‘여’황제에 대한 판단-당 측천무후에 대하여-1. 머리말중국 유일의 여 황제였던 측천무후. 사학계에서 측천무후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역대 어떤 황제에 대해서도 이토록 다양하고 극심한 의견 차이를 보인 적이 없을 정도이다. 측천무후는 밀고 조장, 혹시 등용, 무고한 살해, 관직의 남용 및 문란한 사생활 등으로 갖가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측천무후 시대에 정치적 혼란이 극심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전반적인 사회 및 경제는 매우 안정적으로 성장했으며, 그녀는 2천 년에 달하는 봉건역사상 전무후무한 변혁을 시도했음에도 반대 세력을 단기간 안에 처단해버리는 능력을 보였다. 이 글에서는 측천무후의 삶을 보고,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그녀가 어떤 황제였는가에 대해서 말해 보고자 한다.2. 측천무후의 일생측천무후, 즉 무조가 당 태종의 후궁으로 황실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4살 때(641 또는 642년)였다. 무조의 아버지 무사확은 목재업으로 재산을 모으고 수나라 양제 시대에 하급 무사가 되었다. 이후 이연(李淵. 당나라 고조)이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 부하가 되어 태종 시대에 공부상서를 지냈다. 무조의 어머니는 무사확의 첩으로, 수나라 황족 가문 출신이었다. 무사확은 격변기에 처세를 잘 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명문가 출신 여인을 첩으로 맞아들여 집안의 격까지 높인 것이다. 무조는 출세를 향한 남다른 의지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당의 태종은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궁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태종은 무조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으면서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무조가 태종의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무조를 포함하여 아이를 갖지 못한 태종의 비빈들은 절에 보내졌다. 죽은 황제를 위한 공양을 드리며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무조는 태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 아들인 황태자 이치(李治)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추측 된다. 고종으로 등극한 이치는 아버지 태종의 기일에 장안의 큰 절인 감업사로 갔다가 무조를 발견하고(이미 무조의 소재를 알고 감업사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무조와의 사랑을 시작한다.무조가 651년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황궁에 발 들여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종의 황후가 소 숙비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무조와 함께 소 숙비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펴면서 무조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다. 무조는 황후를 공손히 받들면서 황궁 내부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나갔다. 무조를 통해 소 숙비를 견제하려던 황후의 계획도 성공했다. 그러나 황후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었다. 무조는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력으로 황궁 사람들의 인심을 모았다. 결국 무조는 빈 중 첫 번째 지위인 소의에 올랐다.측천무후는 소의 시절에 딸까지 죽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무 소의가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에 황후가 처소를 방문했다. 이 때 방에는 아기만 있었다. 황후는 아기를 어르고 돌아갔고 곧 고종이 찾아왔다. 무 소의가 아기를 보여주려고 이불을 젖히자 아기는 죽어 있었다. 이후 고종은 황후를 의심하게 되었고 무 소의는 황후가 자신을 저주하는 주술 행위를 했다고 무고하여 황후를 더욱 깊은 곤경에 빠뜨렸다.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655년 황후와 소 숙비를 폐하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무 소의는 드디어 황후가 되었다. 황궁에 다시 들어 온지 4년 만의 일이었다. 측천무후는 서인이 된 황후와 소 숙비 즉 왕씨와 소씨 두 여인에게 곤장 100대를 치고 손발을 자른 뒤 술 항아리에 산채로 넣어 죽였다. 황태자 이충(李忠)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로 앉힌 것은 이듬해의 일이다.측천무후는 자신과 고종 사이의 장남 이홍(李弘. 고종의 다섯째 아들)을 황태자로 세웠었지만, 이홍은 측천무후의 전횡을 염려하여 황제에게 자주 직언했다. 이홍은 병약했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정이 많았다. 이홍은 측천무후와 경쟁했던 소 숙비가 낳은 배다른 공주 둘을 불쌍히 여겨(연금 상태에 있었다) 시집을 보내주었다. 그 직후 이홍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675년). 사람들은 측천무후가 독살시킨 거라 여겼고, 이 소문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3. 측천무후의 정치측천무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이홍과 이현(李賢)을 죽이고, 역시 아들인 중종 이현(李顯)을 폐위시켰다. 막내 이륜(예종)을 등극시키나 예종도 690년 사실상 폐위시켜 황태자 지위로 강등시키고 측천무후 자신이 제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로 바꾸고 수도도 장안에서 낙양(신도(神都)로 이름을 바꿈)으로 옮겼다. 측천무후가 세운 주나라를 공자 시대 주나라와 구별하여 무주(武周)라 일컫기도 한다.측천무후는 실권을 장악한 다음부터 공포 정치를 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또 권력의 정점에 오른 다음까지 포함하여 죽인 사람이 93명에 달한다는 주장이 있다(그 가운데 23명이 자신의 가족 및 친족). 93명이라는 숫자도 연루되어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숫자는 뺀 것이라 한다. 측천무후는 질투가 심했다. 그래서 황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여인은 항상 원인모를 독으로 죽었다. 또한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이 낳은 고종의 아들 중 3명은 반역죄와 뇌물수수죄의 누명을 씌어 사형시켰다.공포 정치는 숙청 정치와 밀고 제도에 기초를 두었다. 측천무후가 잇달아 숙청을 휘둘러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다. 당조의 핏줄이 흐르는 왕조들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자신의 운명에 떨어야만 했다. 밀고 제도는 686년에 시작되었다. 밀고를 하는 상자에 친구나 이웃의 반정부적 행동을 밀고했다. 신분이 낮더라도 투서를 할 수 있었다.4.측천무후에 대한 여러 평가여러 역사서들이 전하는 측천무후의 유언에 따르면 그는 “황제의 칭호를 거두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칭하라” 명했다. 복위한 중종은 어머니에게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의 존호를 올리며 존중했지만, 황제의 칭호를 고집한다는 것은 무씨의 종묘사직을 고집한다는 뜻이 되고, 이것은 측천무후 자신의 사후에 무씨에 대한 적대감을 고조시킬 수 있었다. 측천무후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정치력을 발휘한 셈이다. 이에 따라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로 간주되었으며 주나라 황제였다는 사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중남미 문화원 답사보고서중남미 문화원은 고양 서원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한국의 전통적인 모습과 중남미문화원의 이국적인 풍경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중남미의 문화나 예술은 평소 자주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남미 문화원의 모습은 신선했다. 붉은색 벽돌로 이루어진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야외 조각공원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물관은 중남미 고대의 마야문명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다.중남미 문화원은 1992년 중남미에서 30여 년 간 외교관 생활을 하셨던 이복형 대사와 그의 부인이신 홍갑표 이사장이 그 지역의 풍물을 모아 세운 곳이다. 일반인에게 아직은 낯선 중남미 지역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청소년들에게는 세계화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꿈과 이상과 건전한 세계관을 심어주기 위한 취지로 건립되었다. 현재 중남미 문화원은 일반 개인 및 단체는 물론 학회, 외교단, 기업과 교육 기관 등에서 많이 이용하고 있으며 앞으로 문화, 예술의 장소로서, 향토의 테마 문화 공간으로 육성해 나가고자 한다. 박물관에는 중남미의 대표적 문화인 마야, 아즈텍, 잉카 유물 등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고, 미술관에는 중남미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그림과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조각공원을 비롯한 야외에는 중남미 12개국 등의 현대 조각가들의 작품이 공원 및 산책로, 휴식 공간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예술품을 통한 중남미 문화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마련되었다. 중남미 문화원에서 처음으로 들어선 곳은 박물관이었다. 먼저 들어가서 중앙홀에 들어서니 제일 처음 돌로 만들어진 분수대를 볼 수 있었다. 전시실 안에는 중남미의 음악이 흐르고 있어서 이국적인 느낌을 한층 더했다. 먼저 오른쪽부터 관람이 시작되었다. 제 1 전시실에서는 중남미 고유문화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중남미 지역은 아메리카 대륙의 남쪽, 멕시코와 카리브해 연안, 중미의 여러 나라들을 말하는데 마야, 아즈텍, 잉카문명 등이 이 지역에서 발생한 고대 문명이다. 기원전 3,000년경 멕시코와 페루고원지대에 정착한 인디오들 중 가마솥 속에서 구운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신석기시대 문화가 열리고 올메까와 차빈이 초기 토착문화를 정착시킨다. 이러한 문화를 반영한 많은 전시품들이 전시되어있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이후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맥을 이어나가던 인디오 문화는 이후 서구 문명과 혼재되면서 독특한 특성을 보이는데, 전시실의 중앙부에는 이러한 특징을 잘 반영한 바로크풍의 거실이 조성되어있고 가구들이 배치되어있었다. 또한 성화나 종교화들이 많이 걸려 있어 새로운 문명과 토속문명이 혼재되어가는 이 시대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 많지 않은 전시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실은 다양하고도 독특한 가면들이었다. 괴상하게 생기고 과연 실제로 사용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보통 가면은 의례용이나 장식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묘사가 가능하다고 생각됐다. 더불어 설명문을 읽어보니 이러한 멕시코 원주민의 상징적인 가면들은 새로운 영혼과의 교류 혹은 현실 탈피의 수단으로 표현되어 왔다고 한다. 다양한 색채의 가면들은 축제, 카니발, 종교 의식 등에 사용되었으며 신, 악마, 쌍면(두 얼굴),사자 각종 동물, 곤충 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특히 사자의 가면에는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는 뜻에서 입이 없다고 한다. 가면을 통해서 그 안에 담긴 그들만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성모 마리아상 등을 표현한 가면들을 통해서 인디오의 전통에 새로 들어온 종교인 가톨릭이 융화되는 모습이 가면에 담긴 다양한 문양과 장식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시실 중앙에 위치한 도자기는 중국풍의 도자기였다. 이것은 중국과의 무역 또한 이루어졌고 그 문화를 받아들여 정착시켰다는 사실을 추측해 볼 수 있었다.마지막 전시 공간인 제 4 전시실에 다다랐을 때 마침 전시해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남미의 전통 악기인 ‘레인 메이커(rain-maker)’를 직접 만져보고 흔들어보는 체험을 해 볼 수 있도록 했는데 이 레인메이커는 선인장 속에 못을 박고 조개껍질과 같은 것을 넣어 소리는 내는 악기였다. 이 악기에서 나는 소리가 빗소리와 비슷했기 때문에 가뭄 때 제사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참고적으로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왔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비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중남미 원주민의 끈기를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었다.박물관 바로 맞은편에 있는 미술관은 중남미에서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표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집해서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그들의 작품에서 특징적인 점들을 몇 가지 발견했는데 그림 속에서 수박과 물고기가 많이 등장한다는 점, 여자들의 모습이 날씬한 여자보다는 뚱뚱한 여자들을 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 붉은색 계열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 등이 있었다. 이러한 묘사에는 특징적으로 민족적 전통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미술계의 하나의 시대 흐름인지 궁금증이 들었다.종교전시관에는 서양의 기독교가 중남미로 유입되어 그들만의 색채를 입고 정착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종교화나 조각, 주제단에서 기독교를 주제로 묘사했으나 중남미 특유의 느낌이라던가,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되었을 때 토착신앙이나 도교와 융합이 되면서 칠성각(혹은 산신각)과 같은 모습이 나타난 것이 생각났다. 종교도 하나의 문화이기에 새로 유입이 되면 그 지역의 문화와 혼합이 되어 새로운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한 중남미 문화원 내부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들의 창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되어있어 이것 또한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종교전시관에 있었던 성모마리아상 스테인드글라스나 최후의 만찬 스테인드글라스는 아직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이 책이 시도하는 바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전염병의 유행이 고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세계의 각종 사건에 얼마나 영향을 끼쳐왔는지 알아봄으로써 전염병의 역사를 역사학적인 설명의 장으로 끌어들이는데 있다. 이 책은 인류의 역사와 관련해서 과거에 우리가 지녔던 사고방식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환기시키는데도 의의가 있다고 본다.제 1 장. 원시수렵사회우리 조상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생물을 잡아먹었고, 또한 다른 생물에 잡아 먹혔을 것이다. 이렇게 몸집이 큰 대형 생물 간의 피할 수 없는 관계 외에도 작아서 때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작은 기생체가 우리 조상의 몸 안에 들어와 먹이를 구하고 이를 통해서 인류 또한 생물계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우리의 먼 조상들이 먹이로 섭취했던 식품이 매우 다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먹이를 나누어가졌던 기생생물도 매우 많고 다양했겠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오늘날 질병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심한 증상을 나타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기생충에 의한 가벼운 감염이 때로는 우리 조상들의 체력이나 수명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을 것이도 심하게 다치거나 먹이가 없어서 기아상태가 심각해진 경우에는 숙주의 생리적 균형이 깨져서 가벼운 감염이라도 치명적인 합병증으로 진행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심한 신체적인 부조화가 없었다면 오늘날 열대 우림에 사는 야생원숭이처럼 일정수준의 건강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리라 상상된다.결국 우리 인류의 조상이 겪어 온 생물학적인 진화는 인간의 체내에 기생하는 생물과 인간을 잡아먹는 육식동물, 그리고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생물의 진화와 균형을 유지했을 것이며, 이 삼자가의 관계에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진화과정은 유전적 변화와 도태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한쪽이 변하면 그 상대가 되는 생물도 유전이나 행동규범에 대응하는 변화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류가 학습과정을 통해서 점차 문화적로 변형되어 문명화된 인류사회가 갖는 생물학적 균형 속에서 안정된 구성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문명사회에서의 대부분의 전염병은 아마 동물로부터 사람에게 전파된 질병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사육동물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염병 중 한두개 내지 대다수는 이러한 가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병원체를 가지고 있는 동물들로부터 사람들이 감염되었고, 특히 동물의 사육법이 도입됨에 따라 가축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그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가축화된 동물 사이에서는 물론 가축과 야생동물 사이에서도 각종 전염병이 교류되어 같은 종의 동물은 물론 종이 다른 동물 사이에 전염병은 그 경계를 넘어 상호교류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질병을 유발하는 각종 기생생물은 인류가 종래의 생태계를 변화시켜 각종 동식물을 본격적으로 사육하게 되자 이에 따라 새롭게 형성된 생태계의 변화에 발맞추어 그들의 번식에 이용했던 것이다.결정적인 문헌이나 고고학상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세계의 모든 고대문명은 도시문명이 발생해서 기원전 500년에 이르는 사이에 거의 독자적으로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옮겨지는 일련의 전염병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에 의해 각종 전염병에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갖추게 된 문명권의 주민은 생물학적 무기에 힘입어 문명사회는 힘들이지 않고 영토를 확장시켰다. 여러 질병이 흔한 이른바 질병 발생지는 정확하게 경계 지을 수 없다. 분명히 개별적인 전염병의 유행의 지리적 분포는 사람의 이동이나 병원체 자체의 독성변화, 그리고 그 전염병이 정착되어있는 문명중심의 내부의 발전양상 등에 따라 해마다 다르며, 극히 불안정하다. 문명사회가 만들어 낸 거시기생과 미시기생에 관련된 생물학적 균형은 통신, 교통상의 중요한 변화에 의해 깨어질 가능성이 높다.제 3장 질병문화권과 유라시아대륙 기원전 500년 ~ 기원후 1200년기원전 500년경이 되자 유라시아대륙의 문명화된 모든 지역에서 나름대로 각기 다른 미시기생과 거시기생의 균형이 확립되었다경우 많은 사망자를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것이다. 한 질병 문화권으로부터 다른 질병문화권으로 병이 옮겨지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는 않았겠지만 드물게 우연한 상호교류를 통해 새로운 지역에 옮겨져 감염의 사슬이 계속되고 한두 계절이상 계속된 경우는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전염병의 교류가 생겨나려면 계속적으로 여행자가 늘어나야 했고, 아시아대륙을 횡단해서 감염의 사슬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간 집단이 유라시아 대륙에 널리 확산되지 않으면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육로를 통한 대상무역이 확립되면서 그 조건이 충족되었다. 중국황제의 사신들이 거쳐 온 길을 따라 대규모 무역과 정기적인 교류가 중국과 시리아 간에 이루어지기까지는 21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아시아대륙을 횡단하는 대상무역이 본격화되자 이 대륙의 거시기생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지중해와 인도, 그리고 중국을 연결하는 해양무역도 비슷하게 발전되었다. 인도양과 남지나해에 이르는 해상항로가 개발됨으로써 인도의 왕실문화가 기원전부터 동남아시아 큰 강의 여러 유역과 섬들에 전파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왕실문화 발달은 무역신장에도 크게 기여했는데 이는 지중해 연방 변방에 살았던 야만족의 지배자들이 지중해의 도시문명을 지탱해 준 교역을 증진시킨 사정과 매우 흡사했다. 기원후 2세기에 걸쳐 동지중해지방과 인도, 그리고 중국 간의 교역이 정기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이전에 비해 훨씬 대규모로 전개되었음에 틀림없다. 대상들은 육로로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와 사막지대를 누비며 정기적으로 상호교류를 했으며 바다로는 배가 인도양과 주변해역을 자주왕래하게 되었다. 이처럼 멀리 떨어진 지역 간의 정기적인 상호교류의 길이 트이자 물자의 교류뿐만 아니라 전염병도 상호 교류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구세계의 중심지로 문명이 가장 발달한 지역에서는 그렇게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이 유행해서 인구자체가 감소된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실제로 1500년 이후 유럽대륙은 거의 전염병의 피해를 받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전염병은 유럽으로부터 출항는 자원에 비해 인구가 비교적 많았음으로 페스트로 죽은 사람들의 빈자리를 채우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고 희망자도 많았다. 그러나 1360, 70년대에 페스트가 거듭 유행하면서 사정은 크게 변화하였다. 농사를 짓는데 요구되는 단순노동인력조차 부족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페스트로 인해 거의 1세기 이상 인구가 감소했고 1440~1480년에는 최저치에 달했다. 인구가 페스트의 충격으로부터 회복되는 데 소요된 시간은 약 100년 내지 130년 쯤 되어서 사람의 5~6세대에 해당한다. 페스트가 돌면 사람들은 감염의 위험을 줄일수 있는 수단을 익히게 된다. 즉 페스트 환자를 일시적으로 나병과 똑같이 취급한 것이다. 결국 40일 간의 격리가 검역의 기준이 되었는데 이는 건강한 사람들이 병에 대한 공포나 저주를 나타내는 공인된 수단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 이 병을 전파하는데 쥐와 벼룩이 담당하는 역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따라서 검역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검역제도의 방역제도에도 불구하고 중세 후반부터 근세 초기에 이르기까지 페스트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인구동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존재했다. 지중해 지역에서 발생한 최후의 가장 큰 페스트의 유행은 마르세이유와 그 근교에서 1720~1721년에 발생했다. 17세기에 이르자 페스트는 자주 유행했다. 어떤 도시에서는 1년 만에 인구의1/3 내지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망하는 경우도 흔했다.북부유럽에서는 페스트에 대한 검역조치나 행정대책이 전혀 없었다. 대신 페스트에 대한 대중의 증오나 공포심이 격한 형태로 나타나고는 했는데 특히 오랫동안 억눌려온 가난한 사람들의 부자에 대한 원한이 자주 표면화되어 폭발했다. 여러곳에서 일어난 폭동과 약탈은 당시의 사회체제 자체에 중대한 시련이 되기도 했다.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들어서도 동지중해 지방이나 러시아에서는 페스트가 유행하기도 했지만 1665년 런던에서 발생한 대유행을 마지막으로 북서유럽 지방에서는 파스튜렐라 페스티스가 점차 사라졌다. 유럽각지의 주민들이 벼부터 페스트가 침입할 위험이 있었다. 오늘날 남아있는 자료로는 19세기까지 선페스트와 다른 전염병을 구별 할 수 없다. 불행하게도 현존하는 자료만으로는 분명하게 이와 같은 사실을 밝혀낼 수 없다. 또한 1200년에서 1393년에 걸쳐 중국의 총 인구는 약 반으로 줄었는데 역사가들은 몽고인의 학정과 만행에 기인했다고 주장하지만 아마 페스트가 유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1368년 이후 몽고제국의 쇠퇴를 고찰해 보도록 하자. 중국을 지배했던 원나라는 1368년에 중국대륙에서 물러났는데 이시기가 바로 파스튜렐라 페스티스가 초원지대 전역에 자리 잡은 시기와 일치한다. 초원지대 유목민들은 페스트의 유행 때문에 급격하게 인구가 감소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랬다면 중국이나 페르시아, 러시아 등의 민족에 대한 몽고제국의 지배권 유지에 필요 불가결했던 인력자원이 제대로 보충되지 않았을 것이며 따라서 몽고제국이 파견한 여러 나라의 군주들은 아시아는 물론 동유럽 전역에서 농민들에 의해 타도되고 흡수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급격한 인구감소는 초원지대에 퍼져있던 여러 도시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처럼 쉽사리 초원지대의 교역도시들이 몰락했던 데에는 대상교역자체가 갖는 본질적인 취약성도 깊이 관여했으리라 생각된다. 장거리 교역활동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려면 교역로의 조건이 나빠서는 안된다. 즉 교역로의 일부 지점에서 정치적인 불안이 생겨나 지나친 거시기생 같은 현상이 나타나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는 대상교역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의 동부 초원지대에서는 17세기에 이르자 몽고와 만주에 살던 사람들이 페스트의 감염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정치 군사적인 변화는 17세기 중반에 동부초원지대의 유목민이 다시 남쪽의 안정된 전통적인 농경사회와 경쟁해서 그들 본연의 역할을 되찾을 만큼 그 힘을 회복하고 인구수도 늘어난 결과라 여겨진다.반면 서부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은 이슬람교의 영향아래 페스트의 감염을 불가피한 재앙으로 받아들였다. 유라시아 대륙것이다.
들어가면서...“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이 글은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강보에 쌓인 두 병정에게)이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거사를 치르고 순국한 그는 19세의 나이에 이미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들어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의사는 의열 투쟁에 뜻을 모으고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여 김구와 함께 홍구 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독립운동 지원과 임시정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백범 선생님과 윤봉길 의사의 일화~전략~ 마침 오전 7시 종소리가 울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한 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라며 내 시계와 바꾸자고 하였다. 나는 기념으로 그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내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그러는 사이 자동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 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후략~- 백범 김구. 백범일지中 -한인 애국단. 그리고 윤봉길윤봉길 의사가 몸담고 있었던 한인 애국단을 창립하게 된 데에는 여러 배경이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원인을 들 수 있다. 첫번째는 일제가 ‘만보산사건’을 조작하여 한국과 중국 두 민족을 이간시키는 데 성공한 결과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의 악감정과 적대적 행동으로 만주와 중국관내에서의 한국 민족 독립운동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또한 일제의 9·18 만주침략으로 만주지방에서의 한국 독립운동은 더욱 불리한 조건을 갖게 되었다. 중국인들도 만주를 침탈당하여 통분해했지만, 국력이 부족해 무력으로 대항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상해의 프랑스 조계 안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곤경과 독립운동의 약화였다. 임시정부는 이제 독립운동의 이 난국을 타개하고 국면의 대전환을 추진하는 특수한 대책을 수립하여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한인 애국단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하여 설립한 ‘특무대’이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고 ‘만보산사건’과 일본의 만주침략으로 조성된 위기의 타결 대책으로서 ‘특무대’를 설치하여 그 대장에 김구를 임명하고, 모든 활동의 계획·실행·책임을 지도록 결정함 이에 김구는 이 특무대의 이름을 편의상 ‘한인 애국단’이라고 칭했다. 임시정부 ‘특무대’로서의 한인 애국단을 1931년 11월에 창립한다. ‘한인 애국단’을 지칭하는 ‘특무대’가 바로 독립군 특정대와 같은 성격을 띄게 되는데 백범이 창설한 한인 애국단은 극비의 결사였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과 단원의 이름을 알 수 없다.한인애국단의 대표적인 활동에는 이봉창의사의 동경의거와 윤봉길의사의 상해 의거를 말할 수 있다. 이봉창의사의 의거는 한인애국단의 특공작전 제1호였다. 애국단원 이봉창을 일본의 수도 동경에 파견하여 일본제국의 상징인 ‘천황’을 특공해서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고 침체된 독립운동을 고향시키려고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봉창은 일본어를 능통하게 하였고, 거류민단으로 찾아가 독립운동을 지원했었다. 또한 꾸준히 백범과 만나 독립운동가 지도를 받았다. 백범은 이봉창의 독립운동에의 헌신결의가 확고부동함을 확인하고, 이 동경특정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무기로 수류탄 두 개를 구입(한개는 일본 천황에, 나머지 한 개는 이봉창의 자살용)하여 이봉창의 손에 전해지고, 이봉창은 수많은 일본인들 사이를 뚫고, 천황의 마차로 추정 되는 것에 폭탄을 던지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것은 천황의 마차가 아니었다. 비록 이봉창의 특공작전은 실패했지만, 그 정치적 반향은 매우 컸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이봉창의 특공작전을 통해 한국민족은 전 세계에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인들은 한국인 이봉창의 특공 작전을 크게 화영하고 이에 고무된다.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사는 1932년 김구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하이 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홍커우 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주중 일본공사 시게마쓰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단상의 군,정 수뇌부 7명에게 피해를 입힌 윤봉길의 의거는 전 세계에 크게 보도되어 세계를 경악케 했다. 특히 ‘만보산 사건’으로 인한 한국인과 중국인과의 악감정은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며 도리어 중국에서의 한국 독립 운동의 활성화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이러한 대표적인 활동 외에도 한인애국단의 활동으로는 일본군사령부 출운호 폭파활동, 일본군비행장 격납고 무기창고 폭파계획, 이덕주 · 유진식 의사 조선총 특공계획, 최홍식 · 유상근 의사 대운 특공 계획과 같은 활동들이 있었다.
개화시기, 그 중심에 있었던 여인-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고나서-나는 조선의 국모다8살 때 무슨 내용인지 이해도 잘 못하면서 꼭꼭 챙겨보던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는 KBS에서 방영하였던 명성황후였다. 어린 내 눈에 명성황후는 카리스마 넘치는 멋진 여성이었다. 그 드라마를 계기로 고종의 집권 시기나 그녀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이런 관심은 나뿐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녀의 사진 한 장 조차도 진짜다 가짜다 하는 말이 많고, (아직도 그녀의 초상화나 사진에 대한 진위여부는 논란거리이다.) 명성황후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 뿐 만 아니라 뮤지컬, 영화, 소설 등이 다수 등장했기 때문이다.사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조선시대사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매우 독특한 행보를 보여준 왕비였다. 역사상 권력의 정점에 오른 왕비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권력을 쥔 것은 지아비인 왕이 죽고 난 뒤, 아들이나 손자를 내세워 수렴청정하면서 라던가, 아니면 명문가인 친정을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하는 방법을 통해서였다. 명성황후는 이전의 왕비와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지아비인 고종이 국정을 의논하는 가장 가까운 상대였으며, 외국의 세력들이 고종보다도 더 예의주시했던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명문가 친정의 도움으로 왕비 자리에 오르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왕비가 되어 정치적 필요에 의해 친정세력을 키웠다. 살아 있는 왕보다도 더 주목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눠 가졌다고도 보이는 명성황후의 존재는 당시 망국으로 치닫는 조선의 특수상황을 고려하고 생각하여도 매우 특이하고도 경이롭다.불꽃처럼 나비처럼이러한 명성황후를 다룬 다수의 작품 중 이 글에서는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라는 영화를 다루어 보고자한다.이 영화는 세상에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자객으로 살아가던 ‘무명’은 어느 날,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피비린내에 찌든 자신과 너무나 다른 여인, ‘자영’을 만나게 된 것. 하지만 그녀는 곧 왕후가 될 몸으로, 며칠 후 ‘고종’과 ‘자영’의 혼례가 치러진다. ‘무명’은 왕이 아닌 하늘 아래 누구도 그녀를 가질 수 없다면, ‘자영’을 죽음까지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입궁 시험에 통과해 그녀의 호위무사가 되어 주변을 맴돈다.한편, 차가운 궁궐 생활과 시아버지와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하루도 안심할 수 없는 나날들을 보내던 ‘자영’은 ‘무명’의 칼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외압과 그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한 ‘자영’의 외교가 충돌하면서 그녀를 향한 ‘무명’의 사랑 또한 광풍의 역사 속으로 휩쓸리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영화 속에서는 조선 말의 개항, 임오군란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과 경복궁에 최초로 전기가 공급되던 모습, 서구의 의상을 받아들여 입는 등, 문화사적인 소소한 사건들을 볼 수 있었다.조선의 문이 열리고 변화가 시작되다개항을 한 뒤 정부는 크고 작은 반대에도 꾸준히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통리기무아문이라는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고, 그 아래 12사를 두어 외교, 군사, 산업 등 여러 분야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군사 제도 면에서는 5군영을 무위영, 장어영으로 통합하여 국왕의 군부 장악력을 높였다. 또한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인 교관에게 근대식 군사훈련을 시켜 사관생도를 양성하였다.정부는 행정과 군사 개혁 등에 필요한 정보와 참고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일본과 청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은 약 3개월 동안 일본의 정치· 군사 · 교육 · 교통 · 농업 · 과학 기술 등 다양한 선진 문물을 자세히 보고 돌아왔다(1881). 청나라에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유학생과 기술자를 보내 무기 제조법과 근대적 군사 훈련법을 배우게 하였다(1881). 이러한 정책은 지금까지 정부가 취했던 척사 정책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어 그 반향은 적지 않았다.구식 군인과 민중이 합세한 임오군란정부가 추진하는 개화정책에 대해 보수 유생뿐 아니라 구식군인과 서울 하층민 사이에도 갈수록 불만이 높아졌다. 쌀, 콩 등 곡물의 일부가 서울로 올라오지 않고 일본에 유출되어 곡물 값이 올랐고, 신식군대인 별기군만 우대하여 구식군인들에게는 월급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882년 6월이 되자 구식 군인들은 1년 넘게 월급을 받지 못한데다가 겨우 받은 한 달 치 월급에 겨와 모래가 절반 이상 섞여 있자 마침내 폭동을 일으켰다. 도시 하층민까지 가담하면서 군란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들은 정부 고관과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궁궐이 짓밟히고 왕비가 도피하는 상황에 이르자 고종은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맡겼다.다시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군란을 수습하는 한편, 정부의 개화 정책을 중단시켰다. 무위영과 장어영을 없애는 대신 5군영을 부활시켰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였다. 그러나 청의 개입으로 상황은 바뀌었다. 민씨 정권의 요청을 받은 청은 신속히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군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하였다.이때부터 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문제에 깊이 간여하였다. 또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을 강요하여 자국 상인이 조선 경제에 침투할 수 있게 하였다.이러한 경제 침투는 조선 상인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어 백성들 사이에서는 반일감정과 함께 반청 감정이 크게 일었다. 한편,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을 물고, 일본 공사곤의 경비병 주둔을 인정하였다.죽었다고 공포한 왕비, 청군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오다임오군란에 가담한 성난 군중들은 창덕궁에 몰려 들어가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 관찰사 김보현을 죽이고, 왕비의 행방을 찾기 시작하였다. 왕비는 벌써 궁을 빠져나가 서울을 탈출하여 충주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한 뒤였다. 군중들은 왕비를 찾으려고 계속해서 사방을 수색하였고, 대궐 안은 계속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었다.사태가 심각해지자 대원군은 사건의 모든 뒤처리를 대원군에게 맡겼다. 대원군은 민씨 정권이 그동안 추진해 왔던 개화정책을 되돌리고 왕비가 죽었다고 공포하였다. 이는 성난 군중을 달래고 정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한 조처였다.임오군란이 일어 난지 한 달쯤 지나서 대원군은 청나라로 납치되었다. 다시 한 달이 지난 후에 왕비는 청나라 군사의 호위를 받으며 대궐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얼마 뒤 고종은 왕비가 살아있음을 공식 발표하였다.조선의 국모를 시해하다김홍집과 함께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한 후, 온건 개화파를 중심으로 제 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제 3차 김홍집 내각에서는 친일 개화파보다 친러파가 더 우세하였다. 국내외의 정세가 바뀌자 왕실은 러시아와 미국의 힘을 빌려 내정간섭을 물리치려 하였다. 고종은 친러파 인사들을 등용하고 친미 · 친러 정책을 표방하였으며 배일정책을 강화하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은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군인 출신인 미우라를 주한 공사에 임명하였다. 마침내 일본은 약화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신임공사인 미우라의 주도 아래 배일정책을 주도 하던 왕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한다.외국 공사관 보고를 통해서 본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미사변을 일본인들이 일으켰다는 것은 사건 직후 구미 공사관들의 보고서와 노스차이나 헤럴드 신문에서 나왔다. 이들 내용은 현장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다음은 미국 공사관의 10월 10일자 보고서에서 기술한 내용이다.“궁녀의 이야기로는 소란한 사태에 놀란 궁녀들이 왕비의 방으로 몰려들었는데, 궁내부 대신 이경직도 그 곳으로 달려갔다. 일본인 몇 명이 이방으로 쳐들어 왔고, 이경직이 왕비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일본인 폭도의 칼을 맞고 살해 되었다. 공포에 질린 왕비가 자신은 단지 이곳을 찾아온 방문객이라 말하였고, 다른 궁녀들도 모두 같은 말을 하였으나, 한 일본인 흉한이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 세 명의 다른 궁녀들도 동시에 살해되었다. ··· ··· 세 명의 궁녀는 왕비와 비슷한 용모 때문에 시해를 확실시하기 위한 살인자들에 의해 살해되었음이 틀림없다.”경복궁을 밝힌 첫 전기 점등1887년 3월 6일 저녁. 어스름이 짙게 깔린 경복궁 건천궁에 작은 불빛 하나가 깜박깜박하더니 이내 눈부신 조명이 주위를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이를 보기 위해 모여든 남녀노소들이 모두 감탄사를 터뜨렸다. 125년 전 우리나라 최초로 전등이 점화된 것이다. 에디슨이 백열전등을 발명한 지 고작 8년만의 일이었으니,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전등이 가설되기 전 경복궁의 주요 전각에는 오지등이나 칠지등 같은 밀초가 사용됐고 부속 건물들은 쇠기름으로 만든 초를 사용하고 있었다. 초의 특성상 빛도 약하고 그을음과 냄새로 인해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이런 상황에서 첨단 제품인 전등이 점화되어 구중궁궐 깊은 곳을 환하게 밝혔으니 사람들의 놀라움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발전기 조립과 설치, 전등 가설은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의 '윌리엄 멕케이'가 맡았으며, 향원정 연못가에 세워진 발전 설비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성능이 뛰어난 것으로 16촉광 백열등 750개를 켤 수 있는 규모였다.전등이 밝혀진 이후 조선시대 사람들은 그 불빛을 보고 신기하다는 뜻으로 '묘화(妙火)'라고 불렀다. 또 불이 자주 꺼지고 비용이 많이 들어가자 건달 같다고 해서 건달불이라고도 하고 도깨비불, 물불로 불리기도 했다.그로부터 11년 후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됐다.조그만 발전 설비에 의해 경복궁에서 불을 밝힌 첫 점등이 한성전기회사에 의해 본격적인 전력 사업으로 발전했으며 현재 '한국전력'의 모태가 된 것이다.무명의 모티브가 된 무관 홍계훈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였을 때, 민비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을 잠재우기 위해 자주 출전하였으며 후에 동학농민군의 예봉을 꺾은 공으로 훈련대장으로 승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