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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비지니스 커뮤니케이션 과제 채용 전략
    국회 인턴 채용 전략학교:학과:학번:성명:목 차Ⅰ. 왜 인턴인가?Ⅱ. 국회인턴과 나의 계획1. 모집 정보2. 국회인턴의 요건3. 업무Ⅲ. 나의 준비계획Ⅰ. 왜 인턴인가?우선 내가 국회인턴으로 리포트를 작성하게 된 이유는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있어서 첫걸음 이며 꼭 필요한 과정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국회 인턴에 대해서 알게 된지는 얼마 안 된다. 우연히 오랜만에 만난 학과 동생에게 방학동안 뭘 하면서 지냈냐고 물어보게 된 것이 출발이었는데, 방학동안 국회인턴 3개월을 하고 왔다는 것이다. 그게 정말 신기해서 이래저래 물어본 결과 생각보다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고 상황 돌아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선 기간에 이 일을 했던 사람은 바쁘지만 더 많은 경험을 했을 거라는 등 이야기를 들으니 무언가 뒤쳐졌다는 생각과 함께 이 일을 꼭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이번 2학기도 지나게 되면 4학년이 되는 나로서는 이제 더 이상 미래에 대해서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건 모든 대학생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번 E-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 수업을 듣게 되면서 다시 한 번 진로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때 떠올린 것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는 게 좋을 것인가?'였다. 그래서 일단 결론을 내린 것이 앞서 다짐했다시피 경험을 조금이라도 더 쌓을 겸 이번 당장 겨울 방학시기에 모집하는 국회인턴에 지원을 하는 것이다.미래에 하게 될 직업이 아닌 인턴에 대해서 리포트를 작성하는 이유는 앞으로 내가 하게 될 일들이 어떨지 제대로 상상이 안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선 이번 인턴 건에 대해서 제대로 작성하면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며 겪고 나서의 일을 토대로 진로에 대해 다시 한 번 조심스레 결정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앞으로 다루게 될 리포트의 내용은 우선 첫 번째로 국회 인턴을 하기위한 모집정보이다. 모집정보는 어디서 얻는가, 지원방법, 준비해야 할 것과 서류, 면접 등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두 번째는 국회인턴의 요건인데 여기에서는 자격요건 및 우대조건 그리고 급여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세 번째는 업무이다 국회 인턴에서는 어떤 업무를 맡게 되는 것인가 대해서 알아보고 네 번째로 나의 준비계획에 대해서 적고, 마지막으로 리포트 작성 소감에 대해서 적는 것으로 리포트를 마무리 짓겠다.Ⅱ. 국회인턴과 나의 계획1. 모집 정보맨 처음 알아보게 될 내용은 모집 정보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이라는 말이 있고 현대에 들어서 가장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바로 정보이기 때문이다.모집 정보는 각 국회의원 의원실에서 공개채용을 하거나 인맥에 의해 인턴을 채용하게 된다. 인턴 채용에는 유급인턴과 무급인턴으로 나누어 공고가 뜨니 주의해서 봐야 한다. 공개 채용은 대한민국 국회 사이트(http://www.assembly.go.kr/main.acl)에 접속하면 확인 할 수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밑의 사진을 순서대로 하면된다. 사이트 왼쪽 상단의 의원광장 배너를 클릭한다. 왼쪽 메뉴에서 의원실 통신 ? 의원실 채용을 클릭한다. 표시된 곳에서 확인하면 된다.각 의원마다 공개채용 시기가 다르므로 수시로 확인할 필요가 있으므로 주의한다.지원 방법에 대해서는 공개채용 방법과 인맥을 통하는 방법이 있다. 앞서 소개한 방법을 통해 사이트에서 공개채용으로 지원하는 방법과 인맥을 통해 들어가는 방법이다. 사람마다 각자의 성향이 있고 거주 지역이 다르므로 중구난방 찔러보기 보다는 어느 정도 자신의 정치 성향과 지역을 고려한 후 지원하는 게 좋다고 본다. 나 같은 경우에는 공개 채용 보다는 이쪽에 인맥이 있기 때문에 이를 십분 활용할 계획이다.미리 경험을 했었던 학과 동생의 말로는 지방에 살면서 이 일을 하느라 왔다 갔다 하기 힘들었다고 하는데, 친척집에 사정을 설명하고 몇 개월 신세를 지기로 결정했다.준비해야 할 것과 서류는 인턴에 지원하면 1차 서류 2차 면접을 거치게 된다. 어느 곳에 지원을 하던 이력서는 필수이므로 이력서를 작성한다. 면접의 경우 보좌진 면접 이후 바로 채용되거나 보좌진을 거쳐 의원 면접까지 봐야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2. 국회인턴의 요건우선 알아볼 내용은 모집 대상이다. 국회 인턴은 크게 정책인턴과 행정비서로 나뉘어서 모집한다. 그렇다고 두 인턴의 하는 일이 뚜렷하게 차이가 나진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국회인턴은 학력제한을 두지 않고 있다.자격요건 및 우대조건은 우선1. 국회업무 유 경험자 우대2. 국가 공무원법 제 33조의 결격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자3. 컴퓨터 활용능력 우수자 우대4. 원칙적으로 국회사무처 규정에 따르나 ‘불규칙한 퇴근시간’에 걸리지 않는 자급여에 대해서는 국회인턴은 국회의원에게 소속된 공무원이 아니라 국회 사무처와 계약하는 근로자이다. 그래서 국회인턴은 국회의원에게 급여를 받는 게 아니라 국회사무처를 통해서 월급이 지급된다. 근로자로 근무를 해야 되기 때문에 4대보험의 적용을 받으며, 인턴 월급에서 세금과 보험료를 제외하고 급여를 지급받는다.거두절미하고 국회인턴을 경험한 동생의 말로는 대략 120만원정도를 받는다고 한다.3. 업무다음으로는 국회인턴의 주요업무이다. 우선, 국회에는 299개의 의원실이 있다. 각 방에는 방마다 다르지만 보좌관, 비서관, 비서, 그리고 인턴 이렇게 있다. 공통되는 업무는 한가지이다. ‘설거지와 홈페이지관리’ 이다. 밑의 내용은 이제 국회인턴을 경험한 동생의 업무에 대해 자세히 적은 것이다.- 홈페이지 관리각 방마다 인턴의 업무는 다르지만 주로 홈페이지 관리는 인턴이 한다고 한다. 의원의 홈페이지에 관련 언론보도나 의정활동을 올리고 일정관련 사진과 코멘트를 작성하고, 최근은 홈페이지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트위터 등 다양한 sns를 관리하기도 한다.- 축사 및 인사말 작성각종 행사에서 축사 및 인사말 요구가 주기적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의원의 일정상 직접 작성에는 무리가 있기에 이를 대신 작성하고 보좌관 및 비서관의 검토 후 의원에게 보고된다.- 신문스크랩매일 아침 출근과 동시에 의원의 이름을 검색 한뒤 뉴스 카테고리에서 쓸만한 기사를 복사해서 2∼3개 정도 포스팅하고 당일 신문 기사는 모두 인쇄한다. 그리고 스크랩 마스터라는 프로그램으로 1면에 나온 기사를 저장 인쇄하여 스크랩북에 보관한다.Ⅲ. 나의 준비계획내용 전반적으로는 크게 어려운 일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군 시절에 인사행정병 경험도 있기 때문에 문서작성이나 업무처리 능력은 어느 정도 자신 있다. 또한 대대장 옆에서 수발을 들었던 경험도 있기 때문에 상황 판단이나 눈치껏 행동하는 것 또한 자신 있다. 그렇다고 마냥 아무 계획 없이 가만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현재 정계상황을 읽고 흐름을 계속 파악하며 지원하게 될 혹은 인맥을 통해 연결될 의원의 정보를 모으고 정치성향이나 정치색을 잘 파악 하는 것이다.
    경영/경제| 2013.11.26| 7페이지| 1,000원| 조회(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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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간 교류의 역사와 바람직한 한일관계
    제출일 :한일간 교류와 바람직한 한일관계담당교수 :과 목:학 과:학 번:성 명:목 차Ⅰ. 서 론Ⅱ. 한?일간 역사적 교류 형태1. 삼국 시대2. 고려 시대3. 조선 시대① 국교 재개(5p)② 일본인 입국 통제(6)③ 임진왜란 후 일본과의 관계(8p)4. 개항 시기① 조일수호조규체결(11p)5. 대한 제국6. 일제 강점기① 무단통치(13p)① 민족분열정책(13p)7. 대한 민국Ⅲ. 결 론Ⅳ. 참고 문헌Ⅰ. 서 론정치외교학과에 있으면서 다양한 국가들의 정치형태와 문화, 역사에 대해서 자주 접하게 되었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되갈 무렵 문득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공부 하고 있는 것들은 보통 구미 쪽과 러시아와 중국인데, 이러한 강대국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는 국가 중 하나인 바로 일본을 완전히 빼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재작년 학기에 본 수업 교수님의 ‘일본의 이해’ 라는 수업을 수강하고 이렇게 이번에 ‘일본역사의 이해’를 수강하게 되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전 강의를 통해서 유익한 학기를 보냈었기 때문에 이번 학기에도 노력하여 우리나라를 둘러싼 강대국중 하나인 일본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역사적으로 우리나라와 일본은 고대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물론 고대에서는 주로 중국과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문화를 전해주었지만, 근대화 이후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는 일본이 발달하게 됨으로써 서로 교류를 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오게 되었고, 지금도 우리나라와 일본은 물질적, 문화적 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다. 물론 그 사이에 일본의 침입으로 인해 우리나라 고통 받은 역사적 사건들로 임진왜란이나 강점시기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한?일 간의 역사적인 교류 상황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앞으로 한?일 관계에서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이룰 수 있을지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Ⅱ. 한?일간 역사적 교류 형태지리학적으로 일본은 섬나라이기문에 성과가 없었다. 우왕때는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가 규슈를 통제하기 위해 설치한 규슈단다이에게 정몽주를 파견하여 왜구의 단속을 요구했다. 당시 규슈단다이 이마카와 료순은 정몽주의 인품과 언동에 감동하여 붙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3.조선시대① 국교 재개고려 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창궐은 조선왕조 건국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조선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의 금지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붙잡혀간 민간인, 즉 피로인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당시 일본은 북조의 교토 황실을 지지한 무로마치 막부의 3대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조를 타도함으로써 남북조(1336∼1392)의 내란상태가 끝난 상황이었다.(조선건국 1392년의 일)일본을 통일한 아시카가는 조선의 요구에 따라 일본국왕의 이름으로 조선국왕에게 국서를 보냈고 조선이 이를 접수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정식으로 국교가 성립되었다. 8세기 말 신라가 일본과 국교를 다절한 후 60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과의 국교가 성립된 이후 조선은 보빙사(報聘使), 회례사(會禮使)등의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하다가, 1428년(세종10년)부터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신의(信義)로써 통호(通好)한다’는 의미의 통신사는 외교의례상 대등국 간에 파겨되는 사절을 가리킨다. 처음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는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장군 취임을 축하하고 아울러 서거한 전장군 아시카가 요시모치를 조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443년(세종25년)에도 새로운 장군의 취임과 전장군의 조문을 목적으로 통시사가 파견되었다. 당시서장관으로 교토(京都)에 다녀온 신숙주(申叔舟)는 이때의 견문과 조사를 토대로『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하였다. 대일관계의 연혁과 규정을 정리한 이 책은 이후 대일정책의 입안과 통신사행의 교과서가 되었다.② 일본인 입국통제일본에서 조선에 입국하는 사람들로는 일본의 막부와 대소 호족이 보내는 외교사절인 사행왜인(使行倭人)과 단순히 교역을 목적으로 하는 흥리왜인(興利倭人)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조선측이 지정 25)이 약조에 따라 쓰시마 도주는 1년에 세견선(歲遣船)50척만을 파견할 수 있었고, 그들에게 1년에 주는 쌀(세사미)도 200섬으로 제한하였다.삼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3천 명을 넘어서고, 더구ㅏ 규정을 위반하는 일이 잦아지자 조선은 밀무역을 단속하는 등 교역을 통제하였다. 그러자 삼포 거주 일본인들은 난을 일으켜 부산의 조선 관리와 백성을 살해하였다(삼포왜란, 1510, 중종5).조선정부는 삼포를 폐쇄하고 쓰시마와 교역을 중단하였다. 이는 조선에서 물화를 보급 받아야 했던 쓰시마에 큰 타격이었다. 쓰시마 도주는 조선에 통교 재개를 간청했고, 이에 조선은 쓰시마와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였다(1512, 중종7).여기에서는 계해약조에 규정돼 세견선과 세사미를 반으로 줄여 각기 25척과 100섬으로 제한하고 특별규정도 모두 폐지하였다. 이후 쓰시마는 세견선을 늘려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는데, 이것이 거절되자 사량진(蛇梁鎭)을 약탈하기도 하였다(사량진왜변, 1544 중종 39).이처럼 당시 조선과 일본의 교역은 쌍무적인 무역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일본인들의 일방적인 요청으로 전개되었다. 일본에서는 구리, 유황과 같은 무기원료 그리고 조미료로 사용되는 후추가 들어왔으며, 조선에서는 미곡, 목면과 같은 생필품과 도자기, 서적등이 수출되었다. 특이한 것은 대장경을 비롯해 불교문화재가 적지 않게 일본에 전해졌다는 사실인데, 이는 일본 측에서 극성스러울 정도로 대장경, 불화, 불상, 종 등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무로마치 막부시대 이후 일본 불교가 산간불교에서 민간불교로 변화하면서 많은 사찰이 세워진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일본에는 조서종으로 불리는 한반도에서 거너간 종과 고려불화 등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한편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온 인물들은 일본의 화포, 병선, 수차(水車)의 우수성과 단점을 알렸다. 아울러 그들은 일본시장의 발달과 화폐유통의 편리함을 소개하면서 조선 상업의 후진성을 개선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15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막부 장군의 후많아 이 때문에 일본의 학문 수준을 깔보게 해서는 안 되니 자숙하자는 의견이 일본 내에서 제기될 정도였다. 한편 조서정부는 서화와 시문에 대한 일본인들의 요구가 높아지자 통신사 일행에 중국 사행에는 없던 제술관(製述官)을 두어 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일본인들과 한시를 교환하거나 서로 경합할 때 뒤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1811년 이후 1868년 막부가 붕괴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 막부장군의 습직은 네 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지 않았고 조선도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가 안정됨에 따라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국정을 탐색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시문을 주고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이 자리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역시 이양선 출몰이 잦아지면서 조선보다는 서구 세력에 대한 위귀와 관심이 커져갔다. 동아시아 사회의 안정만으로는 국가의 아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 전환기에 저통적인 통신사 파견의 의미는 실종되었던 것이다. 결국 1811년을 끝으로 조선의 통신사는 파견되지 않았고 국가 간의 교섭은 단절되었다. 다만 조선의 동래부와 쓰시마 사이에는 통신사의 왕래가 끊어진 이후에 역관을 사절로 한 왕래가 지속 되었다.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또다시 교섭을 제의받은 것은 도쿠가와 막부가 타도된 후의 일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 페리 함대의 위협에 굴복하여 치외법권이 포함된 수호조약을 체결하고, 곧이어 유럽의 여러 나라에도 문호를 개방하여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일본 내에서는 서양의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여론이 비등하는 등 국가의식이 드높아졌다. 이러한 국가의식은 외국에 굴복하여 조약을 체결한 막부정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결국 사쓰마번과 조슈번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막부를 타도하고 통치권을 교토의 천황에게 돌렸다(다이세이호칸). 그리고 연호를 메이지로 바꾸고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를 메이지유신이라고 한다(1868).당시 조선은 일본에 대한 최신정보를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였다. 그러자 일본은 명성황후를 살해했고, 여기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조선의 이권을 외국 여러 나라들이 침탈했음은 물론이다.5. 대한 제국1897년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쳤다. 조선이라는 명칭은 중국에 의해 기자가 봉해졌던 땅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당당한 제국의 국호로 타당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일찍이 삼한을 통합했으니 대한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고 하여 이를 국호로 삼은 것이다. 대한제국은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고, 왕을 황제라 칭하여 중국과 동등한 주권국가이며 황제의 나라임을 선포하였다. 중국의 책봉체제에서 탈피했음을 선언하고, 외국의 간섬으로부터 자주 독립을 이루자는 뜻을 천명한 것이다.한반도에서 청을 대신하여 일본의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한 러시아는 일본과의 전쟁을 벌였다(러일전쟁, 1904). 이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미국에 크게 힘입었다. 미국은 가쓰라 - 태프트 밀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 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 조치를 인정하는 일본과 러시아 간의 포츠머스(Portsmousth)조약 체결을 알선하였다. 그리고 이 결과를 독이레 통보하는 등 일본의 ‘한국 보호’를 국제적으로 승인하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미국에게는 국가 이익과 관련하여 한국보다는 일본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러일전쟁의 발발시 일본은 한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철도를 이용해 군수품을 수송하는등 한국을 전쟁을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을사조약(乙巳條約)을 체결하여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독도가 강탈되고 간도가 청에 넘겨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결국 한국은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점 되었다.6. 일제 강점기일제의 식민통치는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한국을 병합한 이후부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일제는 무다.
    인문/어학| 2013.11.26| 17페이지| 1,000원| 조회(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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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정치구조(정부, 정당, 의회)
    목 차Ⅰ. 러시아 정부Ⅰ-ⅰ …… 러시아 정부의 형태Ⅰ-ⅱ …… 러시아의 대통령제Ⅰ-ⅲ …… 러시아 대통령제의 특성Ⅰ-ⅳ …… 소결론Ⅱ. 러시아 정당Ⅱ-ⅰ …… 통합러시아당Ⅱ-ⅱ …… 러시아연방공산당Ⅱ-ⅲ …… 러시아자유민주당Ⅱ-ⅳ …… 공정러시아당Ⅱ-ⅴ …… 기타 당Ⅱ-ⅵ …… 러시아 정당정치의 실상Ⅱ-ⅶ …… 러시아 정당의 문제점과 소결론Ⅲ. 러시아 의회Ⅲ-ⅰ …… 러시아 의회의 구조Ⅲ-ⅱ …… 러시아 의회의 특징Ⅳ. 결 론Ⅰ. 러시아 정부ⅰ - 러시아 정부의 형태러시아 연방은 총 83개 연방주체로 구성되어 있다. 83개의 연방주체는 2개의 시, 21개의 공화국, 46개의 주, 9개의 지방, 4개의 자치구 1개 자치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러시아는 8개의 연방단위로 묶이며, 우리와 같이 혼합대통령제의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국가원수는 2012년 3월 대선에서 승리한 블라디미르 푸틴(Vladimir Putin)이며, 행정부는 내각 총리 1명, 제1부총리 1명, 부총리 5명, 장관 19명으로 현재 내각총리는 5대 대통령이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y Medvedev)이다. 내각 부처로는 외무부, 국방부, 내무부, 비상사태부, 법무부, 재무부, 경제개발부, 산업통상부, 농업부, 천연자원환경부, 교육과학부, 교통부, 보건사회개발부, 통신언론부, 정보기술통신부, 지역개발부, 에너지부, 문화부, 체육청소년관광부가 있다.이번 새로운 내각구성에서 푸틴의 로얄 패밀리인 안톤 실루아노브와 세르게이 라브로브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재정상과 외무상의 위치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여기에 푸틴과 친분관계가 두터운 경제전문가 안드레이 벨로우소브가 경제발전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이고리 슈발로브가 제1부총리의 신분으로 이들의 업무를 조정지휘하며 러시아 경제정책의 후견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정부 제1부총리를 한명만 두는 변형된 형태의 내각인사결정은 크렘린궁이 전통적으로 총리가 총괄하던 경제정책의 범위를 자신의 조정 하에 놓겠다는 의미로 생각이 된다.이권 분쟁이 일어날때마다 항해산권은 하원이 대통령 발의법안과 임명동의안을 세 차례 거부할 경우 행사할 수 있다. 대통령령은 의회통과 이전의 한시적인 법령이나 의회제정 법률에 준하는 효력을 발휘한다.대통령의 해임은 국가전복 등 중대범죄가 확인된 경우에 한하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통령 유고시 총리가 한시적으로 직무를 대행하지만 비상대권은 주어지지 않는다.러시아 대통령의 부속기관으로는 대통령 행정실과 국가안보회의가 있다. 대통령 행정실은 1991년 창설된 대통령 직속 자문·보좌기구로서 대통령의 주요 대내외 정책 결정을 보좌하고 대통령의 일정을 총괄한다. 대통령 행정실은 행정실장(1명), 제1부실장(1명), 부실장(2명), 대통령보좌관(7명), 공보실장 및 의전실장 포함(각1명), 대통령자문단(7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ⅲ - 러시아 대통령제의 특성러시아 대통령제의 특성으로는 다음 4가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첫째, 3권 분립의 원칙하에 행정, 입법, 사법권에 대한 권력 배분을 전제하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된 강력한 대통령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다.? 둘째, 러시아의 대통령제는 순수한 대통령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으며, 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혼합적 성격의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즉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할 수 있음은 물론 의회 또한 정부를 불신임할 수 있도록 하는 내각책임제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또한 총리를 내각의 수반으로 인해 대통령이 행정집행 결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간접적으로 피해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셋째, 특정 정당에 적을 두지 않고 ‘러시아의 민주적 선택’, ‘우리집 러시아’, ‘단결당’ 등과 같이 유사여당을 형성·지원함으로써 집권 여당을 구성하지 않은 채 항상 초당적 위치 또는 가부장적 지위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넷째, 1993년 신 헌법에 의거 비록 현재 강력한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법적·제도적 보완 등의 문제를 포함해 전면적 또는 부분적인 헌법 개정 논의가 지속되어 왔다. 옐친시기에는 병상통치에 따른 대통령 부재 시의 권한 신뢰를 해치고 권위의 잠식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살펴본 러시아가 오랜 기간 동안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가졌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 사람에게 정치권력과 상징적인 권위가 집중되는 대통령중심제는 러시아 민주주의의 장래, 그리고 체제안정을 위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Ⅱ. 러시아 정당ⅰ- 통합러시아당통합 러시아당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정당으로,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집권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현 총리의 여당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시대의 사실상 여당이었으나, 정작 푸틴은 대통령 재직 시절에는 당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가, 대통령 임기가 끝난 2008년 5월 7일에 정식으로 당수에 선출되었다. 푸틴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새로운 당수로 선출되었다.1999년의 두마 선거 준비를 위해 세르게이 쇼이구 등이 결성한 정당을 “통일” 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당은 유리 루시코프 모스크바시장 등이 결성한 중도연합 “조국 전러시아” 에 맞서기 위해 크렘린의 지원 하에 결성된 것이었다. 이 두 정당이 2001년 12월 1일에 통합해 성립한 것이 “통합 러시아당” 이다. 푸틴의 지지자들과 다양한 사상을 가지는 정치가들이 모인 정당인데, 2003년 두마 선거에서는 하원의 합계 의석수 223석을 차지했고, 2007년 두마 선거에서는 헌법 개헌 단독 처리가 가능한 300석을 넘어서 총 의석 수의 70%인 315석을 차지하였다. 통합 러시아당은 헌법에서 명시한 대통령직 3선 금지 규정을 어기고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자, “통합 러시아당” 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많은 유권자들이 “러시아 연방 공산당” 을 지지하여 총선 패배의 위기에 몰리자 결국 2011년 두마 선거에서 부정선거를 통해 238석을 확보하였다. 러시아 선관위 노조의 폭로에 의하면 실제로는 10~20%의 지지정도밖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ⅱ - 러시아연방공산당러시아 연방 공산당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후0년대 초기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이 당을 자금 후원하고 있다는 파문이 일었다. 격동하는 소련후기의 러시아에서 이러한 파문은 검증이 가능치 않으나 이러한 비난은 고의적으로 옐친과 그 후 푸틴에게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다. 2003년 12월 7일 총선에서 당은 450 의석 중 36석을 얻었다. 2011년 두마 총선에서 사상 최대의 의석인 56석을 차지하였다.ⅳ - 공정러시아공정 러시아는 러시아의 사회 민주주의 정당이다. 2006년 10월 28일 성립되었다. 현재 두마의 450석 중 64석을 가지고 있다. 공정 러시아는 러시아의 공평한 사회를 만들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2006년 10월 28일 조국당, 생명 러시아, 펜셔너당의 합당을 통해 창당되었다. 2008년 6월 30일, 공정 러시아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로부터 국제, 사회 민주주의 정당의 세계적인 조직으로 인정받았다. 공정 러시아는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두마에서, 산업 경제 및 정치 체제의 민주화 방향으로 이동해야한다는 대통령이었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의 견해를 지지, 메드베데프 근대화 프로그램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다. 2011년 두마 선거에서 푸틴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의 지지를 통해 64석을 획득한 후, 푸틴 정부에 대한 반대를 선언했다.ⅴ - 기타 당- 야블로코 : 러시아어로 ‘사과’ 라는 의미를 가진 정당이다. 친 서방, 사회민주주의, 친 시장경제 성향을 가지고 있다. 대도시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그러나 현재 하원에서는 의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당의 총수는 그리고리 야블린스키이다.- 옳은일(Right Cause)당 : 가장 신생정당이다. 2007년 총선 이후에 창당 되었다. 성향은 중도 우파적이고 친기업정책을 내세워 기업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갑부중 한명인 미하일 프로코로프가 창당했다.- 러시아애국자당 : 기업인 게나디 세미긴이 창당했으며 세미긴이 공산당 출신인 점에서 미루어보아 구 소련식 공산당의 현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초반에 3권 분립의 의회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었지만, 20년이 지나가고 있는 현재에도 그러한 모습이 지속되고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정당은 정치사회화 차원에서 국민들에 대한 정치교육 기능을 비롯하여 여론 형성 및 조직화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정당은 국민들에게 정치적 의의나 그들의 관심, 능동적인 정치활동에 참여케 하는 등의 정당의 교육적 기능에 소극적이다. 이러한 현실이 러시아 유권자들로 하여금 선거민주주의에 대한 관심보다 안정과 질서를 바라는 전통적인 정치문화에 안주하도록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ⅶ - 러시아 정당의 문제점과 소결론1. 정치?사회단체의 아마츄어리즘- 분리적 원심력의 모습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타협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못함.- 독자적인 정교한 정책 대안 미비.2. 원내 정당간의 이념적 구도- 서방의 이념구도와 달리 개혁, 극우, 극좌의 삼각구도. 합의점 찾기 매우 어려움.3. 사회구조 미비와 시민문화의 결여- 대중들은 시민문화의 결여로 민주적 절차와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지도자나 하나의조직에 전권을 맡기려는 극단적 성향을 보임.-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구조.4. 제도적 장치의 미비- 러시아 의회는 기본적으로 법률을 채택하는 기관으로 전락했으며 대통령의 횡포를 견제할 수 있는 기능이 거의 결여됨.5. 사회적 여건과 비례대표제- 비례대표제를 이용해서 원내에 진출하기 만을 원하는 정치집단이 즉흥적으로 발생.- 국민들이 당의 실체와 무관하게 공약남발만 하는 인물에게 표를 던짐.러시아는 공산주의의 국가이념을 벗어나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는 과거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기에 혼란스런 과도기의 모습을 보여왔고, 조금씩 안정화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당들은 공통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향하는데 이들 간의 차이는 어떤 이념의 바탕에서 민주화를 실현하느냐이다.이러한 러시아의 정당은 이념을 중시하지만 당의 생존이 이에 더 우선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정당간의 재편과정이 매우 활발하다. 또, 주요인물 위주로 정당이 결성?운다.
    사회과학| 2013.11.26| 10페이지| 1,000원| 조회(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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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정러시아말기 경제적 상황, 피의일요일과 그 영향, 10월혁명과 그 변화, 전시공산주의정책과 nep 정리본
    1. 제정러시아 말기 러시아의 정치경제적 상황2. ‘피의 일요일’과 그 영향3. 10월 혁명과 러시아의 변화4. ‘전시공산주의 정책’과 NEP--------------------------------------------------------------------표트르1세의 집권과 예카테리나2세의 활약으로 러시아는 유럽전체를 하나로 묶는 비전을 제시할 만큼 아무도 무시 못 할 강국 의로서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사이에, 러시아는 표트르 1세 시절의 유럽화 개혁에서 간과했던 낡은 봉건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도 유럽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열의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게 되고 알렉산드르2세는 1860년 농노해방을 하게된다. 이 농노해방은 자본주의의 도입에 있어서 노동시장의 확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2세 재임 기간의 제정러시아 말기에는 급속한 산업화가 단행되고 인구 증가가 일어났으며, 1897년 시베리아 철도가 부설되었다. 이 시기에는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플레하노프 또한 등장하게 되고 1898년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이 설립된다. 이후 공산당은 1903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쪼개지게 된다. 러시아는 1904년 러일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결정적으로 파국을 맞게 된다. 패전국이 된 러시아는 심한 뒤탈을 앓게 되었다. 국토도 넓고 인구도 많아서 결코 일본에 패할 것 같지 않던 러시아가 어이없이 패하고 만 것은 러시아의 정치가 후진성을 띤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서구 열강과 심지어 일본까지도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 정치를 실시하는 등 정치의 근대화를 이룩했지만, 러시아에는 여전히 헌법도 의회도 없었던 것이다 .패전국이 된 러시아는 심한 뒤탈을 앓게 되었다. 국토도 넓고 인구도 많아서 결코 일본에 패할 것 같지 않던 러시아가 어이없이 패하고 만 것은 러시아의 정치가 후진성을 띤 데 그 원인이 있었다. 서구 열강과 심지어 일본까지도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 정치를 실시하는 등 정치의 근대화를 이룩했지만, 러시아에는 여전히 헌법도 의회도 없었던 것이다.'차르'라고 일컫는 황제를 국가 원수로 하여 극소수의 귀족이 인구의 99%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가난한 농민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농민은 글을 읽지 못했고, 자기 이름을 쓸 줄도 몰랐다. 공장과 상점이 있는 곳은 모스크바와 페테르스부르크 등 큰 몇몇 도시뿐이었다.프랑스의 돈을 빌려 시베리아 철도가 아시아에까지 부설되면서 일부 귀족과 부르주아는 만주에까지 탐욕의 손길을 뻗쳤으나, 러일 전쟁에 동원된 병사들은 자기들이 왜 이렇게 먼 곳에까지 와서 전쟁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후방에서는 전쟁보다 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의회조차 없는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까지도 시위는커녕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조차 알지 못하였다.그러다 마침내 사건은 벌어지고 말았다. 1905년 1월 22일, 페테르스부르크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그날 아침 굶주림에 지친 노동자들이 조용히 길거리를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신앙심이 깊은 노동자들로서, 여느 때라면 교회에 갈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그들은 차르에게 급료를 올려달라고 청원할 생각으로 눈길을 걸어 궁전을 향해가고 있었다. 청원서를 가지고 행진하는 대열은 점점 불어나 급기야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행렬 앞에는 성상과 황제의 초상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찬송가를 부르며, 혹독한 추위 속을 행진하였다. 그 행렬 선두에는 가폰 신부가 있었다.가폰이 페테르스부르크에 공장 노동자 클럽을 만든 것은 1903년 봄이었다. 클럽은 활기를 띠어 1904년 가을에는 회원수가 9천 명에 이르렀다. 모임의 내용은 서로 친교를 하거나 명사의 강연을 듣는 것이 주요 행사였고, 정치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브치로프의 공장에서 노동자 3명이 부당 해고를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가폰 신부 아래 노동자가 결집하게 되었고, 이들이 차르에게 제출할 '청원서'를 들고 행진하게 된 것이다. 이 파업은 이미 1주일 전에 발생하여 계속되다가 이날 22일에는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청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쓰게 된 것이다.청원서 행렬은 오후 2시, 광장에 집결하였다. 이 대열 앞에는 '병사여, 인민을 쏘지 말아라'고 하는 플래카드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막아선 황제의 군대는 대열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뒤이어 대포도 여러 발 발사되었다.이 일제 사격으로 1천 명 이상의 노동자가 피를 흘리며 눈 위에 쓰러졌다. 이 행렬에 대해 이번에는 황제의 기병대가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이리하여 '거룩한 주일'은 '피의 일요일'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노동자의 파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모스크바 · 사라토프 · 바르샤바 등지에서 노동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지금까지 신을 받들듯이 섬겨온 차르의 명령에 의해서 수많은 동료들이 살상된 사실을 알게 되자 러시아 민중 속에 신앙과 같이 뿌리 깊던 차르 숭배는 일시에 무너지고 사람들은 차르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다. 당시 일본과 전쟁 중이던 러시아 정부로서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위기를 맞은 셈이었다.이런 상황에서 포츠머스 회의에 전권 대사로 파견된 비테는 의회를 구성하겠다는 약속으로 국민을 설득하여 가까스로 난국을 진정시켰으나, 차르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이 무너짐으로써 로마노프 조의 러시아 제국의 붕괴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이 피의 일요일 사건은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러시아 전역에서 정치적 파업과 농민 폭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헌법제정, 언론ㆍ결사ㆍ집회의 자유 보장, 내각책임제 채택 등 입헌군주제 수립을 내용으로 하는 10월선언을 발표한다. 10월선언의 주요내용은 시민권(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참정권 확대, 두마(의회)의 창설 등이었다. 두마는 인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는 대의원들로 구성되며 법령승인의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두마는 반정부적 성격을 띄고있는 인물들이 모두 추방되어 제 3두마에서 차르 정부가 원하는 두마를 얻게 된다. 이후 스톨리핀에 의해 가혹한 억압을 받게 되어 혁명을 불씨가 커지지만 그가 암살 당한 후에는 점점 안정화가 되어갔으나, 시민들이 이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상대적으로 경제가 낙후되었던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국력을 많이 허비했다. 공업 경제가 파탄 나고 실업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굶주림에 지친 민중의 불만은 점점 높아만 갔고 내부 갈등도 심화 되었다. 1917년에 결국 분노에 찬 민중이 봉기하면서 2월 혁명이 발생했고, 니콜라스 2세는 단8일 만에 실각하고 말았다.이리하여 러시아에는 임시정부와 노 · 병 소비에트의 '이중권력'이 탄생했다.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했고, 임시정부도 소비에트의 승인 없이는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거나 실행할 수 없었다. 이 이중권력 구조는 빠른 시일 안에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해소돼야 했다.그러나 민중들이 보기에, 차르가 사라지고 새 세상이 열렸음에도 상황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지겹게도 계속되고, 굶주림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었다. 생산현장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착취당했고, 토지는 농민들에게 돌아오지 않았으며, 소수민족들도 피압박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들은 '평화'와 '빵'과 '토지'와 '자유'를 갈구했다.대중들의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민중의 권력기관인 소비에트뿐이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주축을 이룬 소비에트의 지도부는 자신의 임무를 저버리고 임시정부의 정책을 사실상 지지했다. 지금은 부르주아지를 도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반을 튼튼히 할 때이고 인민이 권력을 잡는 사회주의 혁명은 먼 훗날의 일이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3개 사회주의 정당 중 당시 가장 소수였던 볼셰비키만이 이 흐름을 읽었다. 그들은 임시정부와의 협력에 반대하고, 전쟁반대와 즉각 평화 실현, 혁명의 계속 수행을 외쳤다. 이후 레닌은 4월 태제를 발표하는데 이는 전쟁의 중지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시켜 이중권력을 해소하고, 부르주아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것이었다.이후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러나 슬로건은 이제 무장봉기와 깊숙이 결합돼 있었다.그 무렵 러시아 경제는 전면적인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다. 연료난과 원료부족으로 가동이 중단되는 공장이 늘어갔고, 식량난도 극심해졌다. 정부와 지배계급은 파국을 막을 길이 없었다. 민중은 이제 부르주아지와 지주의 지배를 전면 거부하기 시작했다.노동자들이 공장을 장악하여 직접 관리를 하는 경우가 일반화되기 시작했고, 모든 형태의 노동운동이 권력장악 문제를 제기했다. 뒤늦게 행동을 시작한 농민들도 전투적으로 변해 지주를 추방하고 스스로 토지를 재분배했다. 유럽 러시아의 절반 이상 지역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병사들도 지휘관을 추방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휘관을 새로 선출했으며, 공공연히 전쟁을 거부했다. 각 도시의 수비대와 북부 · 서부전선의 병사들은 사실상 볼셰비키의 부대가 됐다.1917년 10월 24일 오후 레닌은 볼셰비키 중앙위에 긴급 편지를 보내 "행동의 연기는 곧 죽음"이라면서 오늘밤에 일을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그날 밤, 즉각 행동이 개시됐다. 중앙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이 혁명군에 장악되고, 도개교가 다시 연결됐다. 25일 저녁 때까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반혁명파의 모든 거점이 분쇄됐다. 26일 새벽 2시, 겨울궁전이 점령되면서 수도의 봉기는 완료됐다.대회는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선출하고,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인 인민위원회를 창설했다. 다른 당파가 참여를 거부해 인민위원회는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됐다. 레닌이 인민위원회 의장이 됐고, 트로츠키는 외무, 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직을 맡았다.
    사회과학| 2013.11.26| 5페이지| 1,000원| 조회(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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