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러시아말기 경제적 상황, 피의일요일과 그 영향, 10월혁명과 그 변화, 전시공산주의정책과 nep 정리본
- 최초 등록일
- 2013.11.26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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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1세의 집권과 예카테리나2세의 활약으로 러시아는 유럽전체를 하나로 묶는 비전을 제시할 만큼 아무도 무시 못 할 강국 의로서의 면모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으로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사이에, 러시아는 표트르 1세 시절의 유럽화 개혁에서 간과했던 낡은 봉건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러시아도 유럽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꽃피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열의에 불타는 젊은이들이 나타나게 되고 알렉산드르2세는 1860년 농노해방을 하게된다. 이 농노해방은 자본주의의 도입에 있어서 노동시장의 확보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2세 재임 기간의 제정러시아 말기에는 급속한 산업화가 단행되고 인구 증가가 일어났으며, 1897년 시베리아 철도가 부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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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지역을 빼고는 내전이 거의 진정된 1920년 말엽, 문제가 발생했다. 농민들이 식량징발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들은 더 이상 잉여곡물을 생산하지 않으려 했고, 개중에는 남는 농산물을 숨기거나 빼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국토가 황폐해져 그렇지 않아도 충분치 않았던 농업생산이 더욱 줄어들었고, 여러 지방에서 부농을 중심으로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3월 초에 일어난 크론슈타트 반란에서 이 위기는 절정에 달했다. 오랜 기간 혁명의 메카 역할을 수행해온 크론슈타트의 수병들1)은 이제 무정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아, 소비에트의 자유선거와 모든 사회주의 정당의 동등권, 소농과 수공업에 대한 제한 철폐 등을 요구했다. 반란은 보름 만에 진압됐으나, 이 사건은 농민을 필두로 하는 소소유자와 소비에트 권력 간의 갈등이 심해졌음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혁명의 축이었던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흔들리고 있음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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