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기억-한국현대사의 이해 가족사 레포트-소속 학번이름Ⅰ. 서론우리 수업에서 한 학기 동안 우리 현대사에서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여럿 다루 어 보았지만, 우리 현대사의 시작 지점이라 할 수 있는 해방과 분단, 전쟁에 이르 는 과정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이 주제들을 다뤄보지 않고서 우리 현대사 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서 가족사 레포트의 주제를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잡았다.Ⅱ. 본론 11. 구술자이 보고서는 주로 외할아버지의 구술을 통해, 그리고 부분적으로 외할머니의 구 술을 첨가하여 작성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1932년 생으로 충청남도 서천이 고 향이시다. 비록 집안 형편과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으로 인해 소학교(현재의 초등 학교)만 간신히 마치셨지만, 한학과 신식 학문을 포함하여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 식을 갖추셨기 때문에 글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식자층 축에 속했던 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해방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당시에 외할아버지 께서는 막 소학교를 졸업한 소년이고 청년이셨다. 게다가 이 시기의 대부분을 서 울에서 보내셨기 때문에 당시의 거의 대부분의 이슈들을 바로 옆에서 겪으셨고,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따라서 부분적으로는 오류가 있을지 모르겠지 만 전체적인 틀에서는 구술의 신뢰성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본다.외할머니께서는 외할아버지의 구술을 들으면서 몇 마디 말씀하신 것을 통해 면 담에 참여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번 조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진 않으셨다. 때문 에 일단 구술자는 외할아버지 한 분으로 한정시켜 보도록 한다.2. 면담 상황면담은 2015년 5월 30일 서천에 있는 외할아버지 댁에서 이루어졌다. 녹음을 한다고 처음에 말씀드린 것만 빼고는 평소 대화하는 것과 같은 편안한 분위기에 서 이루어졌으며, 질문에 대해 외할아버지께서 답하는 형식이었다.3. 서술 방향보고서를 쓰는 데 있어서 외할아버지의 구술을 최대한 생생하게 전달하고자 했 다. 구술 내용에는 몇 가지 오류도 으면 이남도 공산화됐을란지도 몰라. 그건 그렇게들 다 생각하고 있어. 지금말하자며는. 그니 까 그거 한 가지는 잘했다고 보는 거지.- 부화뇌동이나 맹목적으로 했다는 말씀이 어쩌면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쟁의 본 질을 정확히 지적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도자들도 신탁통치가 어떤 것인지, 그것 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목적으로 제기된 것인지, 우리 민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찬성과 반대를 외쳤고, 민중들도 그에 따라 좌익과 우익으로 갈린 채 감정적으로 자기 목소리만 내게 된 것이 아닐까?- 뒷부분은 신탁통치에 대한 질문과는 관계없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관해 말씀하신 부분이다. 그의 독재가 결과적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았다며 그 점은 잘한 일이라고 평가하셨다. 외할아버지의 평가는 이승만을 재평가하자며 그의 집권 기간을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토대를 닦은 시기라거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를 지켜낸 시기라고 말하고 있는 일부 보수층의 논리와 비슷하다. 이승만 대통 령이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펼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정책 자체가 우리나라 의 공산화를 막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반공정책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 유지에 악용된 측면도 강하기 때문에 이 부분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외할아버지의 생각인지 아니면 그 시기를 겪었던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인지는 더 많은 분들과 면담해 봐야 할 내용이다.3) 좌우 대립에 대한 회고모든 행사가 있으면 따로 했으니깐. 그때만 해도 사상적으로 자유스러웠으니 까. 근데 인저 이박사가 정권을 잡고 나서 인저 지금 말하자면 공산주의를 핍박 하기 시작하고 체포하기 시작하니까 전부다 이북으로 넘어간거지. 거물급들도 전부 다.- 외할아버지께서는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는 1946년의 3?1절 행사를 정확히 기억하고 계셨다. 그 외에도 모든 행사를 따로 했다는 것을 보면 좌우 간의 갈 등의 골이 상당히 깊어진 상황임을 알 수 있다. 사상적으로 자유로웠다는 언급 에는 의문의 여지고나는 해방 다음 해에 올라갔지. 해방 다음 해에 올라갔어. 그래가지구서 김구 선생 암살되서 돌아가신거 그 국민장으로 처음 치렀거든, 우리나라 생긴 뒤로 국민장은 처음 치른거여. 그때에 거기 가보기도, 저 학생들이 나란히 서서 저 김 구 선생 영전 앞에 서서 인사 하고 이렇게 갔다. 사람이 많아서 한쪽에서 들어 가서 거시기 하고 나가는 식으로. 해튼 서울 시내에 시민이 90프로는 거기 문상 했을거여. 그정도로 했어. 학생까지도 다 했으니까. 그렇게 허구 한마디로 얘기 하자며는 이 장덕수씨, 송진우씨 같은 분들은 즉, 우익 정치인 중에서 아주 거물 급이거든, 근데 이제 이박사하고 라이벌이 되다 보니까 인제 암살이 된거야. 암 살이 된거여. 그 송진우씨라든가 장덕수씨, 여운형씨라든가 김구선생이나 다 암 살로써 제거가 되지 않했어? 그래가지구서는 이박사가 정권을, 초대 정권을 잡 은 거지.- 서울 시내 시민의 90%가 김구 선생의 빈소에 문상했을 것이라는 외할아버지 의 말씀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장례식까지 10일간 빈소에 무려 124만 명이 다 녀 갔으며 장례식에도 40~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김구 선생 외에도 여러 정치인들이 잇따라 암살당했는데, 외할아버지께서는 이를 통 해 이승만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다고 말씀하셔서 일련의 암살의 배후에 이 대통 령이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그러니까 그게 인제 그 안두희라는 육군 대위가 암살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때 김창룡이가 어 즉 이 특무대에 그 책임자로 있었거든, 근데 그 사람이 이 박사의 심복이란 말야. 그러니까 이 예측들을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90프로 는 그랬을 것이다 하고 보는 거지. 확실한 증거는 못 잡았으니까 지금까지도. 이 못 잡았다구. 그렇게 해서 한마디로 얘기하자며는 이박사가 정적들을 다 제거 했다는거, 특색이 그거여.- 김구 선생 암살 당시에도 이미 사건의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이 있다는 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여러 정황으로 봐서 이런 소문이 돌 만도 했지만, 민중들서 더 올라간 데도 있고, 내려온 데도 있고 하게끔 그렇게 되고 있단 말이야. 그렇게 해서 다시 그게 고착화되서 지금까지 오고 있단 애긴데...-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과 크게 다른 내용은 없다. 다만 외할아버지께서는 전세 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일거에 역전된 것이 아니라 낙동강 전투에서부터 서서히 역전되다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완전히 뒤집어진 것으로 기억하고 계셨다. 낙 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미군 등의 연합군이 결사 항전을 펼쳤고, 다부동 전투처 럼 승리를 거둔 전투도 있었지만, 그 시점에서부터 전세 역전이 이루어지고 있 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역시 외할아버지만의 인식인지 아니면 당시 의 일반적인 상황 인식이었는지는 더 많은 면담을 통해 조사해야 할 일이다.해튼 얘기할라며는 저 사람들이 내려와가지고 양민 학살을 많이 했다는거 그걸 부각시키고 또 이 절대적으로 연합군이 미국을 주동으로 해서 연합군이 개입하 지 않았다며는 완전히 적화가 됐다는거, 또 이 실지가 이승만 박사가 일본으로 옮길려고까지 했었어. 그 직전이었어. 그래가지구서는 거기서 임시 에 그때 말하 면 피난 정부를 세울라고까지 계획했다니까. 그런데 에 참 미군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가지구, 첫째로 공중전에서 승리를 허구, 에 또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 전을 한데서 승리를 한데서 거기에서 성공 한데서 승리의 발판이 됐지. 그렇게 해서 밀고 올라가서 북진 통일이 99프로 됐거든. 됐는데 중공군이 지금 말하자 며는 중공군 30만이 내려닥치는 바람에 다시 후퇴하기 시작해가지구, 그 1?4후 퇴라고 해서 유명혀. 1?4후퇴라고 해서 많이 내려온 사람들은 대전까진 내려왔 을껴 다시. 그렇게 하다가 여기서 다시 또 재차 밀어 올라가가지고서는 거기서 38선을 다시 이뤘지. 뭐 하여튼 9?28수복이란 것도 반다시 넣어야 되고, 9?28 수복, 또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건 아주 뚜렷한 거고, 낙동강 전투에 서 지금 말하자면 걔들이 패색이 짙어져서 도망가기 시작했다는거, 요 세가지가 가장 중요할 거여위 방송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다. 인도 교가 끊어진 줄 모르고 차를 타고 한강을 건너다가 빠져 죽었다는 얘기는 비극 적인 부분이다. 지금까지 그 때의 분이 남아 있는 듯 한 외할아버지의 모습에서 그 때 느낀 불신과 실망, 분노를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3) 피난 생활에 대한 회고나는 이 피난을 갈라고 여기서 몇몇이 쌀 몇말을 짊어지고 가다가 가들 못하겠 더라구. 그래서 다시 저녁에 몰래 들어와서 집에 숨어있는데 며칠 안되가지구서 는 9?28수복했다구 해서 그래서 즉 집에서들 방골에 파고서 들어앉았구, 그렇지 않으면 낮에는 산에들 들어가있다가 밤에는 들어와서 자고 그런 짓거리를 했어.- 9?28수복이 될 즈음에 피난을 가려고 하셨으니 얼마간 인민군 치하에서 살다 가 피난을 결심하신 듯 하다. 하지만 덕분에 외할아버지께서는 인민군에게 점령 됐을 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자세히 기억하고 계셨다.그러니까 어떻게 보면은 우리 세대도 상당히 불행했던 세대여. 따지고 봐선. 공 부를 제대로 해야 할 나이에 그런 일을 겪다 보니까는 역시 불행한 세대여. 그 것 참 진짜로 쌀 두어 말씩 짊어지고 가다가 잘 데가 있어야지. 그니까 들어가 며는 못들어가게 하고. 그러니깐 지나가다 보니까는 산에다가 이 소나무 이거 솔가지를 쳐서 다발지어가지고 쌓아논 데가 있어. 거기 가서 솔가지를 몇 개씩 들어내고 거기 속에서 덮었다고 위로 덮고서 그리고 지키고 자면서 그렇게 하고 자기도 했다니까. 그런 짓거리를 했어. 아침에 일어나보니까는 막 눈이 1?4후퇴 때여, 그득하게 와 있더라고, 눈이. 왜 이렇게 무거웠나 했더니 눈이 그렇게 쌓 여서 무거워. 그걸 모르고 잔거여 거기서.- 이번에는 1?4후퇴 때이다. 불행했던 세대라고 몇 번이고 되뇌면서 말씀하셨 다. 한겨울에 피난가다 잘 데가 없어서 솔가지를 덮고 잤는데 일어나보니 그 위 에 눈이 그득히 쌓인 모습, 생각만 해도 안쓰럽기 그지 없는데 그게 겨우 60여 년 전의 일이다.(할머닌 시골 저기 산골서 살아서 피난 안갔어.) 그리고 한다.
사회주의를 통해 본 러시아성소 속 :학 번 :성 명 :-목차-Ⅰ. 들어가며Ⅱ. 사회주의의 이미지들과 러시아성1. 스탈린 시대의 이미지들2. 흐루시쵸프 시대의 이미지들3. 고르바쵸프 시대의 이미지들Ⅲ. 구소련과 러시아성Ⅳ. 맺음말Ⅰ. 들어가며70여 년 동안 미국에 필적하는 초강대국으로 군림하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구소련에 대해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실패로 끝난 실험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인민이 빈부의 차이 없이 고르게 나누어 갖는, 인류가 아직 경험해보지 않은 이상적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갖고 초유의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왕과 자본가들을 제거하고 실제로 공산주의 국가를 일으켰지만, 온갖 모순 속에 결국 실패했기 때문이다.비록 2차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구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50년 가까이 전세계가 반으로 나뉘어 이념대립을 펼쳤지만, 자발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나라는 러시아와 중국 뿐이었다. 동구권 국가들은 2차대전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고 베를린까지 진격한 소련군에 의해 공산화되어 구소련의 위성국이 된 것이고, 북한은 패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한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을 점령하면서 역시 인민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공산화 되었다. 왜 유독 러시아에서 자발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했을까 하는 의문은 러시아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또한 실제로 사회주의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러시아성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하의 본론에서는 사회주의 정권을 홍보하던 이미지들을 통해 러시아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나아가 구 소련의 인위성 뒤에 숨어있는 러시아성을 찾아보고자 한다.Ⅱ. 사회주의의 이미지들과 러시아성1. 스탈린 시대의 이미지들러시아 혁명 직후의 불안정한 상황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타개가 되었고, 1928년부터 시작된 1차 5개년 계획을 통해 국유화와 집단화를 추진하는 등 이 시기부터는 사회주의 정책이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고 초유의 국난이었던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었다.이 그림은 스탈린 시기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이다. 이 그림 속에서 러시아인의 특성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봉건 국가에서 형식상으로나마 모든 권력이 인민에게 있는 사회주의 국가로 극단적인 교체를 이루었음에도, 그 교체는 진정한 내용적 교체가 아니었다. 차르가 스탈린으로, 귀족은 공산당원으로 바뀌어, 오히려 옛 것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웅장한 절대왕정 시대, 혹은 바로크 시대에 신민들이 절대군주를 맞이하는 장면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이 작품이 바로 그 러시아성을 드러내준다.2. 흐루시쵸프 시대의 이미지들흐루시쵸프는 스탈린 이후에 등장하여 권좌에 올랐다. 그는 스탈린 개인숭배를 비판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와 ‘레닌주의로!’라는 슬로건으로 개혁을 진행했다.아래의 그림은 당시의 포스터이다. 레닌주의로의 회귀를 주창했던 이 시기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듯 흐루시쵸프의 모습 위에 레닌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생각해볼 점은 과연 ‘레닌주의’라는 사상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의 이론적 지침서는 칼 맑스의 『자본론』이었고, 레닌은 그의 주장에 따라 폭력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사회주의의 정책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레닌의 업적은 크지 않다. 혁명 이후 한동안은 적백내전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적극적인 사 회주의 정책을 펴기 어려웠고, 오히려 전시 공 산주의라 하여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경제정 책을 펼쳤다. 적백내전이 끝난 뒤에 신경제정책 이 실시되지만, 역시 완벽한 사회주의식 정책이 라고 보기에는 어려웠고, 그마저도 레닌은 끝까 지 보지 못한 채 1924년에 사망하고 말았다.여기서 서구주의자였던 게르첸의 말을 떠올려 보자. “우리는 이상, 비난의 대상, 본보기로서의 유럽을 필요로 한다. 유럽이 그렇지 않다면 우 리는 그런 유럽을 창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럽을 바라보는 게르첸의 관점과 레닌주의를 바라보는 흐루시쵸프의 관점이 다르지 않다. 유 럽이든, 레닌주의든,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자신에게 이상, 비난의 대상, 본보기가 되어줄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것 역시 러시아의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러시아성의 하나인 것이 다.3. 고르바쵸프 시대의 이미지들흐루시쵸프의 개혁은 1964년,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흐루시쵸프가 실각함으로써 좌초되고 이후 브레즈네프에 의해 반동정치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보수 반동정치는 사회주의의 모순을 더욱 심화시켰고, 그 결과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권이 서서히 붕괴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르바쵸프가 당 서기장의 자리에 오른 것은 바로 이 시기였으며, 그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도 높은 개혁을 실시했는데,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바로 그것이었다.고르바쵸프의 개혁 중에서도 글라스노스트를 홍보하는 포스터이다. 진실을 알고 싶어 하는 표정의 시민이 글라스노스트를 외치고 있고, 그 얼굴을 사이에 두고 기존 제도의 모순이나 악습이 무너지고 있다. 이 역시도 ‘옛 것’과 ‘새 것’의 극단적인 교체를 보여주고 있다. 고르바쵸프의 집권 직전까지 올바른 것으로 정의되던 것들이 순식간에 모순과 악습으로 치부되어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고르바쵸프가 레닌이라는 제목을 가진 악보를 지휘하고 있는 이 포스터는 고르바쵸프의 개혁 또한 흐루시쵸프의 개혁과 마찬가지로 레닌주의로의 회귀를 지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역시 본보기로서의 레닌주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러시아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 고르바쵸프의 개혁 당시의 포스터도 주체가 민중이 아닌 서기장이라는 점도 시사점이 있다. 지금과 같은 가치관을 기준으로 20년도 더 지난 과거를 판단해서는 안되겠지만, 구소련 기간 내내 포스터의 주체는 계속해서 주로 서기장이었다는 점은 제정 시대의 잔재이자, 나아가 몽골 지배가 러시아인들에 남긴 정신적 유산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전제군주 차르와 소련의 서기장의 모습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Ⅲ. 구소련과 러시아성사회주의 이론 자체는 사실 이미 고대에서부터 얘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도 모두가 골고루 나눠 먹고 사는 나라를 꿈꿨으며, 동양의 유교 사상에서 이상사회로 보는 대동사회 역시 사회주의 사회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토마스 모어, 캄파넬라 등도 『유토피아』,『태양의 나라』와 같은 저서들에서 재산을 공동 소유하는 것을 이상사회로 묘사하였는데, 이처럼 재산의 개인소유로 생긴 빈부의 차이를 부당하게 보아온 눈은 언제나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주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과 함께 크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자유, 평등, 박애를 내건 프랑스 혁명은 계급으로부터 자유롭고 분배에서 평등하며 모든 시민이 서로 사랑하는 사회를 꿈꾼 혁명이었던 만큼 재산의 분배도 평등하고, 소유도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이러한 사회주의 이론을 집대성한 인물이 맑스였고, 그의 이론은 영국의 경제학, 독일의 철학,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결합시킨 것이었다. 또한 영국, 독일, 프랑스는 일찍이 산업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모순 역시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사회주의가 발달할 수 있는 토양도 마련된 상태였다.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것이 프랑스의 파리 코뮌이었던 것도 이 점을 잘 보여준다.하지만 정작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에서 일어났고, 그 이후 사회주의 국가들의 종주국이 된 것도 구소련이었다. 채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기도 전이었던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은 공산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다음 단계로 설명하는 맑스의 이론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은 러시아인들의 극단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페테르부르크』소 속 :학 번 :성 명 :-목차-Ⅰ. 머릿말Ⅱ.『어머니』속의 혁명1. 혁명세력의 모습2. 혁명과 가족Ⅲ.『페테르부르크』속의 혁명1. 혁명세력의 모습2. 혁명과 가족Ⅳ. 맺음말Ⅰ. 머릿말19세기 중후반 이후의 러시아 역사를 읽어보면 상당히 어둡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치르는 전쟁마다 연전연패하고 국제관계에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에게 밀리는데, 국내 정세는 혼란스럽기 짝이 없어서 개혁은 실패하고 차르가 암살당하는 일도 일어난다. 게다가 러시아는 서유럽 각국에서 한참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있던 1861년까지도 농노제가 존재하던 나라였다. 나폴레옹 전쟁 직후의 강성함을 잃은 채, 경쟁국에 뒤쳐져 쇠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당연히 암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고, 혁명운동이 그 중 한 가지 흐름이었던 것 같다. 고리끼의 『어머니』와 벨리의 『페테르부르크』 모두 당시 시기에 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 두 책을 읽으면 과연 이들이 정말 같은 시기, 같은 주제를 다룬 책인지 궁금해질 정도로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보고서에서는 두 책에서 혁명세력의 인물들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비교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혁명을 꿈꾸는 과정에서 가족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Ⅱ.『어머니』속의 혁명1. 혁명세력의 모습『어머니』는 1902년 쏘르모프 메이데이 시위행진을 주요 사건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혁명세력의 중심은 빠벨이다. 빠벨도 처음에는 다른 노동자들과 다름없이 어머니에게 서슴치 않고 욕설을 내뱉거나 함부로 행동한다. 하지만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그의 행동은 달라지기 시작한다.모자는 점점 말할 기회가 적어졌고 서로 만나기도 힘들어졌다. (중략)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들이 점점 말수가 적어지고 또한 그가 가끔 그녀로서는 이해 못할 어떤 새로운 말들을 쓰기도 하며 때론 말하는 중에 그녀가 알고 있는 거칠고 격한 표현들이 튀어나온다는 것을 눈치챘pp.24-25.)빠벨 뿐만이 아니라 그에게 동조하는 동지들로부터도 전반적으로 과묵하고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성향이 짙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침묵으로부터 독자들은 침울함, 우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사회개혁에의 의지, 노동자의 인권 향상에 대한 갈망을 읽게 된다.더구나 어머니에게 대하는 태도도 예전과는 어딘가 달랐다. 그는 가끔 방바닥도 쓸고 휴일이면 자기 침대를 청소하기도 했으며, 어쨌든 모든 면으로 보아 어머니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무던히 애를 쓰고 있었다. (같은 책, p.25.)이 책에 그려진 보통의 러시아 남자들은 여자(아내나 어머니)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가한다. 빠벨의 어머니 역시 술주정뱅이 남편에게 얻어맞고 길거리로 쫓겨났다가 집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일상이었고, 무서워 하긴 했어도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역시 아버지와 같은 빠벨의 태도가 변한 것은 앞에서 말했듯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면서였다. 빠벨의 동지들이 그의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 역시 일반적인 러시아 남자들과 다르다. ‘넨꼬’라고 부르며 상냥하게 대하거나 진정한 동지로 여긴다. 전세계 모든 이에게 어필할 수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사회주의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이러한 어린애 같지만 그러나 결연한 신념은 점점 더 자주 그들 안에서 명백해지고 고양되어 강력한 힘으로 차츰 성장하여 갔다. 이러한 신념을 보았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하늘의 태양과 같은 뭔가 위대하고 밝은 것이 세계 안에서 진정 잉태되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같은 책, p.52)신념에 가득 차 있는 모습 역시 빠벨과 그 동조자들의 특징적인 모습이다. 처음에는 빠벨의 변화를 두려워하던 어머니도 나중에는 그의 신념에 뜻을 함께 하게 되고, 열성적으로 아들의 일을 돕는다.그녀는 어느덧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를 많이 하지 않게 된 반면 그리스도와 민중들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민중들은 심지어 그리스도를 알고아가며, 그리스도나 마찬가지로 세상을 가난한 이들의 왕국으로 여기면서 이 세상 모든 재물을 사람들에게 똑같이 분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같은 책, p.287.)빠벨의 어머니는 독실한 정교신자이다. 그런 그녀가 사회주의를 접하면서 교회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니다. ‘놈들은 하나님마저 우리를 속이는 데 써먹고 있어!’ 라는 생각에서 드러나듯 정교라는 믿음 자체가 아니라 정교회와 사제들에 대한 불신을 가진 것이다. 또한 어머니는 빠벨과 그 동지들을 그리스도와 여러 차례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고리끼는 정교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심 깊은 민중들에게 사회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태백산맥』의 주인공 염상진이 떠올랐다. 염상진을 책 속의 정하섭은 ‘치밀하고 침착했고, 아는 것이 많으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라면서도 ‘야성적이고 행동적’ 이라고 평가했는데, 토론을 할 때도 화내지 않고 생각이 다른 이의 의견도 존중해서 듣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빠벨과 흡사하다. 또한 그렇게 차분하며 오랫동안 때를 기다리다가 메이데이 시위행진을 치밀하게 준비하여 선두에 서서 대열을 이끄는 모습도 염상진의 행동적인 모습과 닮아 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인 고리끼가 꿈꾼 이상적인 인간상이 우리나라 문학에도 이처럼 영향을 끼친 것이다.2. 혁명과 가족주인공 빠벨의 아버지는 미하일 블라쏘프이다. 책의 가장 앞부분에만 잠깐 등장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는 작지 않다.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그의 모습은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부르주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10년 넘게 가정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블라쏘프는 빠벨의 건드리지 말라는 말 한 마디에 꼼짝 못하고, 얼마 못가 탈장으로 죽는다. 고리끼는 이 장면을 통해, 사실상 허상에 불과하며, 단결하여 저항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느 것으로 보인다.아버지에 비해 어머니는 굉장히 중요하고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빠벨의 어머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훌륭하십니다, 어머님! 어머님은 이 일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모르실 거예요. 너무 훌륭하셔서 눈이 부실 정도합니다. 어머님이 지금 얼마나 아름다우신 줄 아십니까? (같은 책, p.99.)고맙습니다, 어머니! 고마워요, 전 어머니를 존경해요. (같은 책, p.138.)지금 우리는 자식들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 말은, 자식들이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빠벨은 어머니를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요. 하지만 전 아버지가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같은 책, pp.141-142.)빠벨이 어머니를 존경하고 고마워하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혁명 동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동지들은 부모라 하더라도 자신의 이념에 동조하지 않는 이상 그들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빠벨의 동지 나따샤는 부자인 자신의 친부모와는 인연을 끊고 살면서, 혁명에 동참한 빠벨의 어머니는 친부모보다도 더욱 극진히 대한다. 이 책에 그려진 혁명가들에게 가족이란 혈연이 아닌 이데올로기로 연결된 집단이어야 하는 것이다.Ⅲ.『페테르부르크』속의 혁명1. 혁명세력의 모습벨리의 『페테르부르크』는 1905년의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가족에서 아버지 아폴론 아폴로노비치는 고위직 관료인데, 그 아들 니콜라이 아폴로노비치는 테러를 졔획하는 혁명 세력의 일원이다. 현재의 체제에서 출세한 아버지를 둔 니콜라이가 왜 혁명을 꿈꾸게 되었는지, 그 원인이나 과정은 잘 나타나지 않는다.그녀의 다리가 탁자 밑에서 니콜라이 아블레우호프를 건드린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놀랍지도 않은 것은, 그가 천사를 포옹하려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략) 니콜라이그의 머릿속을 엄습했다. 니콜라이 아폴로노비치는 실랑이 끝에 그녀를 소파에 쓰러뜨렸다. (중략) “우우 괴물, 개구리, 우우우-붉은 어릿광대,” (안드레이 벨리, 이현숙 옮김,『페테르부르크』(초판), 서울: 지만지, 2008, p.53.)니콜라이를 묘사한 장면에서는 별로 그에 대한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없다. 위의 장면에 나타나듯이 유부녀를 희롱하고, 잔뜩 치장한 채 파티를 즐기고, 늦게까지 잠을 자는 파락호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언젠가 니콜라이 아폴로노비치는 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끔찍한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가 그런 약속을 한 것은 절망적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실패가 상황을 그렇게 이끌었다. 이후, 실패의 기억은 점차 사라지고, 끔찍한 약속은 저절로 소멸된 것 같았다. (중략) 사실, 니콜라이 아폴로노비치는 기본적으로 그에 대해 잊고 있었다. (중략) 니콜라이 아폴로노비치 자신은 그 약속을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같은 책, pp.59-60.)니콜라이가 감행하게 될 테러 역시 이념으로 무장한 채 치밀한 준비를 거쳐 기획된 것이 아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이념에 대한 믿음이나 확신이 아닌 절망 때문에 즉흥적으로 테러를 제안했고, 절망이 점차 누그러지자 그 제안을 잊고 그저 농담으로 치부했다. 때문에 그 계획을 실행하도록 하기 위해 나타난 자신의 동지를 보고 니콜라이는 반가움이 아닌 목을 조이는 것 같은 심각한 공포를 느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한다.나는 외로움에 병들었소. 요 몇 달 동안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소. 내가 좀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 않소? (중략) 나는 외로움에 병들었소. 갑자기 화가 나는군. 사회적인 문제, 사회적인 평등이라니. (같은 책, pp.67-69.)니콜라이의 동지인 검은 콧수염의 이방인도 그리 건강한 모습으로 묘사되진 않았다. 니콜라이에게 임무를 주면서도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할 만큼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이고, 혁명가답지 않게 사회적인 문제보다 자신의 외로움에 더 신경을 쓴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스스로 노련한 하한다.
‘러시아 방주’를 보고소 속 :학 번 :성 명 :-목차-Ⅰ. 들어가며Ⅱ. 겨울궁전; 유럽과 러시아1. 뾰뜨르대제의 겨울궁전2. 예카테리나여제의 겨울궁전3. 니콜라이 2세의 겨울궁전4. 스탈린의 겨울궁전Ⅲ. 한국과 근대화 담론Ⅳ. 맺음말Ⅰ. 들어가며구소련이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진 거대한 나라이다. 세계지도를 볼 때, 동유럽에서부터 시작하여 시베리아를 지나 우리나라에까지 이르는 러시아를 보며 궁금한 점이 많았었다. 특히, ‘러시아는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하는 질문을 많은 사람들이 해 보았을 것이다. 혹자는 수도 모스크바와 대부분의 인구, 시설이 유럽에 있다며 러시아는 유럽에 속한 국가라고 하는 반면, 아시아에서의 영토가 훨씬 넓으므로 러시아는 아시아 국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의 귀속성을 놓고 벌어지는 이러한 혼란이 러시아 외부인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러시아인의 모습이 영화 ‘러시아 방주’의 주인공에 의해 잘 드러나고 있다.하지만 본격적으로 유럽화 정책을 실시한 뾰뜨르대제가 즉위했던 1682년은 이미 40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다. 과연 그 긴 시간동안 러시아인들의 유럽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이 변함없이 유지되었을까? 설령 여전히 러시아인들이 스스로 유럽인인지 아시아인인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400년 전과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지 않을까? 레포트를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도중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때문에 이 글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군주들과 그들의 시대를 따라가며 러시아인들의 의식 변화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맹목적으로 서구화를 추구하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Ⅱ. 겨울궁전; 유럽과 러시아1. 뾰뜨르대제의 겨울궁전관찰해보면 각 나라마다 조금은 희한한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더 희한한 것은 그 유사한 생각을 어 흥미롭게도 비잔틴 제국, 로마 제국, 명나라 모두 당시에는 이미 멸망한 나라였고, 이미 도태된 나라를 본받으려 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 몰라도 신성 로마 제국이나 조선은 시대 변화에 뒤쳐진 채 그들의 모델들과 똑같은 운명을 맞았다. 하지만 러시아는 달랐는데, 아마 뾰뜨르대제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뾰뜨르대제는 유럽 선진 국가를 스승이자 귀감으로 삼아 러시아 사회에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했다. 그의 개혁을 통해 러시아의 사회와 문화는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유럽 변방의 야만 국가에서 일약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721년 러시아 원로원이 그에게 러시아 대제의 칭호를 수여하며 바친 아래의 찬사는 뾰뜨르대제를 바라보는 러시아인들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당신의 쉼 없는 노고와 지도로 당신의 충직한 노예들이 비로소 무지의 깊은 수렁에서 빛의 세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공허의 세계를 벗어나 실체로 가득 찬 세계로 향할 수 있었으며, 문명화된 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탕진 외, 이지은 ? 이주연 옮김, 『대국굴기』(초판), 서울: 한영문화사, 2007, pp.441-442.)‘빛의 세상’, ‘실체로 가득 찬 세계’, ‘문명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자명하다. 뾰뜨르대제가 그토록 닮고자 했던 유럽인 것이다. 그가 건설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리켜 영화 속의 유럽인은 “그는 늪지 위에 유럽의 도시를 세웠다.” 라고 평했다. 그 수도 위에 건설된 궁전에 대해서는 “이거 완전히 바티칸이군! (중략) 참 제대로 베꼈죠. 그렇죠?” 라는 대화가 오간다.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던 정교 국가 러시아 제국의 궁전이 카톨릭의 본산 바티칸을 모방했다는 점은 뾰뜨르대제 통치 시기의 개혁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러시아 원로원의 찬사에서도 드러나듯 이 시기 러시아는 스스로를 야만, 아시아로 보고 그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본 문명, 유럽을 닮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이 뾰뜨르대제의 유럽화 정책이고, 그 결과 러시아는 유럽 열강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다. 새로운 차르의 유년기 경험은 유럽화 정책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좋은 촉매제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치세기 동안 러시아는 프로이센과의 7년 전쟁을 우세하게 이끌었고,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폴란드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함께 분할했으며, 크림반도와 터키의 일부 지역을 차지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1796년에 이르러서는 러시아 제국은 이미 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영화에 등장하는 예카테리나여제의 통치기는 러시아의 유럽화가 외관상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차르 앞에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러시아 단원들을 보며 유럽인이 그들을 이탈리아인이라고 착각할 정도다. 그렇지만 거기까지다. 차르는 신하들 앞에서 오줌을 싸러 가야겠다며 뛰쳐나간다. 이런 장면들을 보며 유럽인이 “러시아는 하나의 극장같아.” 라고 한 말은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의 말은 마치 아직 러시아인들에게 유럽의 시각에서 볼 때 비잔틴적, 아시아적, 야만적 특성이 남아 있음에도 겉으로는 유럽인처럼 가장하고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그런데 여기서 잠시 주인공과 유럽인은 현대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그림 전시관으로 돌아온다. 이들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이 무렵 유럽을 바라보는 러시아인의 시각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엿볼 수 있다. 전시되어 있는 대리석 화병을 보며 유럽인이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에서 생겨난 암피르 양식이라고 지적하자, 주인공은 그에게 러시아가 나폴레옹 전쟁을 치러냈음을 상기시킨다. 그 전까지 러시아를 무시하는 뉘앙스의 유럽인에게 끌려다닌다는 인상을 주었던 주인공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또한 유럽인은 예카테리나여제의 콜렉션을 보면서 카톨릭의 전통에 맞지 않는 그림 전시를 보며 충격을 받는다. 예카테리나여제를 본 직후 그림 전시관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일련의 장면들은, 어느덧 유럽의 초강대국과도 대등하게 전쟁을 벌여 승리할 수 있는 강대국이 된 러시아가 이제는 뾰뜨르 시기처럼 유럽에 대한 열등감 속에서 일방적으로 그들을 모방하는 단계를 지나, 동등인공의 자신감도 여기서 절정에 이르러, 유럽인을 향해 “이봐, 보이나요? 이 화려한 제복들! 화려함, 제국, 권력!” 이라며 감탄한다. 또한 완연한 동방적 색채가 느껴지는 페르시아의 사신단과 대비되는 러시아 군신들을 보면 이 시기의 러시아는 의심의 여지 없이 유럽의 국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그렇지만 러시아는 자신의 강성함에 취해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유럽 전역을 휩쓴 부르주아 혁명의 결과 유럽 각국이 자본주의 노선을 택하여 국력이 날로 신장된 반면, 러시아는 차르의 전제 통치 하에 있는 낙후된 봉건 국가로 전락해 갔다.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의 궁전의 분위기는 어둡고 무겁다. 아나스타샤를 비롯한 철없는 공주들만 뛰어다닐 뿐 황후는 병약한 태자 알렉세이를 걱정한다. 그녀는 예감이 좋지 않다거나 총성이 들린다고 말하며 불안해한다. 니콜라이 2세는 아버지로서의 모습만 나올 뿐, 차르로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이 시기의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서가 영화에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의 크림전쟁 패전, 1905년의 러일전쟁 패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거듭된 패전은 직전 시대까지만 해도 충만했던 러시아인들의 자신감을 꺾어 놓았을 것이다. 게다가 서유럽 국가들이 눈부시게 성장하는 동안 러시아는 정체되어 있던 터라 두 세력 간의 격차는 다시금 벌어져, 러시아와 유럽의 관계는 뾰뜨르대제 통치기였던 17세기 후반~18세기 초반으로 돌아가 버렸다. 뾰뜨르대제 시기의 러시아가 맹목적으로 유럽을 본뜨려 했듯이 니콜라이 2세 시기에도 차르 정부의 주도 아래 토지개혁과 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여 유럽을 따라가고자 했다. 그러나 차르는 전제 군주제를 포기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져 로마노프 왕가는 무너지고 만다.4. 스탈린의 겨울궁전제정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소비에트 연방은 독재자 스탈린의 통치 아래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했다. 그가 추진한 국민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공으로 1913년 210억 루블이었던라며 거기서 관을 만들고 있었다. 1941~1942년 겨울의 레닌그라드 포위전으로 인해 10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그때 에르미타쥬 박물관의 소장품 중 절반이 안전한 후방 지대로 옮겨졌고, 그 밑에는 간이 시체 안치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영화 속 관을 짜던 사람은 1941년 겨울에 이 박물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기나긴 포위에 맞서 레닌그라드를 지켜냈고 끝내는 나치 독일을 패배시킨 그 사람이 유럽인에게 한 “당신은 시체를 밟고 있소!” 라는 말은 이 시기의 유럽에 대한 러시아인의 시각을 담고 있다. 수천만명의 러시아 인민이 목숨을 잃어가며 독일을 패퇴시켰고 독일의 지배 하에 있던 유럽을 해방시켰으니, 유럽인이 누리고 있는 자유는 러시아인의 시체를 밟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는 그동안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항상 유럽을 뒤따르기만 했던 러시아가 유럽을 넘어섰음을 나타낸다. 이제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게 된 그들의 국력으로 보나, 서유럽과 달리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한 이념으로 보나 유럽은 더 이상 러시아의 모델이 될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뾰뜨르대제를 비난하고 러시아인들에게는 고유한 사상이 없다던 유럽인이 여기에 이르러 “이 모든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대해 당신네 황제를 비난한건 내 실수였소. 심지어 그들 모두가 폭군이었다 해도 말이죠.” 라고 한 것은 이제 유럽의 가치관으로 러시아를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러시아가 유럽을 극복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닐까.Ⅲ. 한국과 근대화 담론“너 때문에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안된다.”초등학생들의 대화 속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이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말을 통해 우리 사회가 서구를 닮아 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얼마만큼 강하게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한 이래,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서구 문명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개발었다.
Ⅰ. 서론오늘날 인구의 대부분은 기업체에 종사하고 있고, 기업에서 만든 생산품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다. 현재의 인류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시장 자본주의, 그 중에서도 기업의 영향이 지대하다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기업들은 현재 막강한 권한을 갖고 휘두르고 있다. 심지어 일부 SF 영화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 다국적 기업들이 각국 정부를 능가하는 슈퍼파워를 갖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기업 또한 역사를 갖고 있다. 그 역사를 살펴 보면, 기업이 원래부터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대에서부터 상거래가 활발한 지역에서 자연발생했던 기업 조직은 1700년 동인도회사의 설립을 기점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데 성공했고, 이어 주식회사가 고안되면서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빠르게 변화하여 환경에 대한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주는 조직인 기업은 오늘날에도 그 혁신을 멈추지 않고 유한책임회사나 합자조합 등 새로운 조직체를 발명해내면서 계속 발전하고 있다.그렇다면 미래에 기업들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할까? 사람마다, 보는 입장마다 모두 다른 의견을 갖고 있겠지만, 기업의 역사를 살펴 보고 느낀 점을 통해 바람직한 발전 방향을 경제적 측면과 사회적 측면으로 나누어 제시해 보고자 한다.Ⅱ. 본론1. 경제적 측면에서 기업의 바람직한 발전방향기업의 존재 이유란 무엇인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견해가 많지만, 기업이란 이윤을 내야 하는 집단이다. 이윤이 나지 않으면 종업원들에 대한 임금을 지불할 수도 없고, 주주나 이해관계자에게도 손해를 끼치게 되며, 사회적 공헌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업이 이윤을 내지 못한다면 생존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적 측면에서 기업의 발전방향을 논하기에 앞서 이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사실 기업의 발전 역사는 바로 상인들이 보다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교황권과 결탁했던 메디치 가문, 제국주의의 첨병으로 식민지 개척에 앞장섰던 동인도 회사, 유한 책임을 지면서 대규모 자본을 조달할 수 있게 한 주식회사 등을 통해 기업가들은 이윤 극대화에 한 발짝씩 다가섰다.이들뿐만이 아니라 발전 단계에서 초기 단계에 있는 기업들은 극대이윤을 추구하는 이익 극대화 경영을 통해 빠른 성장을 가능케 했다. 여기서 기업의 목적은 오로지 경제적 목적 이었으며, 기업가는 순수한 사적 이익을 추구했다. 이러한 이윤관의 기저에는 ‘나에게 좋은 것은 국가에도 좋다’는 이윤관이 깔려 있었다. 초기 단계의 기업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기업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위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기업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하지만 기업들이 계속해서 극대이윤만을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회의 부(富)’라는 파이를 나누는데 기업이 자신의 몫만을 극대화하려는 하면 사회갈등, 환경오염, 화이트 칼라 범죄 등의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대이윤의 추구를 통해 성숙기에 접어든 기업들은 만족이윤을 추구하는 수락경영 방식을 채택할 필요가 있다. 경제적 목적만이 아니라 사회적 목적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즉, 이 단계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업의 시민의식을 고양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기업가에게는 돈과 함께 인간도 중시하는 가치관이 필요하며, ‘우리 기업에 좋은 것은 국가에도 좋다’는 이윤관이 필요하다.여기서 더 발전하면 기업이 적정이윤을 추구하는 단계가 된다. 생활의 질을 중시하는 경영이 이루어지며, 기업은 균형적 다원 목적을 갖게 되는 단계이다. 기업가가 계몽된 사적 이익, 공헌자의 이익, 사회의 이익을 동시에 추구하며, 인간이 돈보다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가질 때 적정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때 기업가의 이윤관은 ‘사회에 좋은 것이 우리 기업에도 좋다’는 것으로 이전의 두 단계에서 우선순위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기업이 적정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이 가정하고 있는 합리적 인간상에 따르면 기업가가 과연 ‘사회에 좋은 것이 우리 기업에도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될지 의문이다. 물론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적정이윤의 추구를 통해 종업원들이 넉넉한 임금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소비가 많아져 시장이 확대될 것이라든지, 기업이미지가 개선되어 소비자들이 그 기업을 선호할 것이라는 등 더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라는 논지로 기업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도 다양한 법적, 제도적, 사회적 장치를 통해 기업가에게 적정이윤을 추구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한다면, 기업가는 그 방향으로 자신의 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2. 사회적 측면에서 기업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일각에서는 기업이 존속하는 것이야말로 사회에 가장 큰 공헌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입장에서는 기업을 ‘사회에 존재하는 제한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그 가치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사회의 경제수준 향상에 이바지하는 조직’이라고 규정한다. 사회 내의 다른 어떤 조직도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어서는 기업만 못하므로, 이러한 점에서 기업의 고유한 가치가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을 넘어서 고용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수출을 통해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는 등의 역할이 모두 기업의 것이라는 측면에서 기업 자체가 충분히 사회에 공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기업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주장은 다르다. 그들은 사회 내에 있는 다른 조직체인 정부, 가계, 학교 등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창출하는 가치를 사회 전반에 골고루 퍼뜨리는 반면, 기업은 사회로부터 부여받은 역할인 가치 극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창출하는 이윤을 사회에 내놓지 않고 그대로 기업 안에 축적하면서 거대한 힘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현재 한국 사회에 반기업 정서가 팽배해 있는 것은 부정론의 우려가 적중했음을 방증한다. 부정론자들은 기업이 소비자를 우롱하거나, 근로자를 착취하고, 환경공해를 유발하며, 정부를 부패시키는 등 기업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다른 사회조직을 짓밟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사회 자체의 존재를 와해시킬 것으로 보고 있는데, 작금의 우리 사회와 너무도 닮아 있다.그렇다면 사회적 측면에서 기업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은 다름이 아니라 기업을 긍정론자들의 입장과 비슷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일 것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고용의 문제가 있는데, 찬반론자들의 합의가 필요한 부분은 바로 기술의 발달로 인한 변화이다. 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인해 관리자가 관리할 수 있는 직원 수가 크게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조직 위계 구조의 수평화가 일어나 중간 관리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져 버렸다. 생산 현장의 기계화로 인한 노동자 수요의 감소 역시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들에게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는 중간 관리자들을 계속 유지하고, 자동화 대신 노동자들을 고용하도록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원가 구조가 불리해져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