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사이드와 기억의 정치서평.강성현교수님이 이번학기에 강의하시는 주제 ‘폭력’에 연관된 이 책을 읽고 보고서를 쓰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이 책을 구입하고 나서 책의 첫 번째 부분을 살펴보며 살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제노사이드, 대학교 와서 이 강의를 들으며 듣게 되었던 생소한 용어. 유태인의 ‘홀러코스트’는 알고 있었지만 제노사이드의 한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지금까지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그 어느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았던 대량 인간학살이 자행되었고 그것이 은폐되어 왔다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비인권적이고 끔찍하고도 잔혹한 일들이 고등학교 역사시간에는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말이다.제노사이드란 용어는 인종, 부족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enos'와 학살을 의미하는 라틴어 ’cide'의 합성어이다. 렘킨에 따르면 “국민이나 민족 집단 자체를 절멸할 목적으로 그 집단 구성원들의 삶의 본질적인 토대들을 파괴하기 위해 시도되는 다양한 행위들로 이루어진 공조 가능한 계획”을 의미한다. “제노사이드의 목적은 그 집단의 정치, 사회제도, 문화, 언어, 민족 감정, 종교, 경제적 생존 기반을 붕괴시키고 개인들의 안전, 자유, 건강, 존엄성과 생명(삶)까지 파괴하는데 있다”라고 했다.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라 불리는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부터 시작하여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민족 청소’ 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대량 죽음의 사태가 벌어진 20세기는 제노사이드 시대였다. 책에 따르면 제노사이드에 의해 6000~ 1억 7,500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사건들을 고등학교 교과서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량적인 사람들의 죽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권력이란 정말로 무섭고도 잔혹한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 책은 국가가 국민을 지배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화 하는 과정을 아주 자세하고도 세밀하게 따라간다. 정치집단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기억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한그리고 나치 협력에 대해 동일한 작업을 했다. 오스트리아는 쿠르트 발트하임의 실제 전쟁 기록을 조사하는 것을 주저해왔으며, 미국은 운디드니 밀라이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토론을 피해왔다. 각 국가들이 수행한 것은 실제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신화학이 발전되왔고, 이러한 방식의 원형이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친일파 과거청산이 아닐까. 대부분의 국가는 특히 자국의 과거 행동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으로 비칠 때 솔직한 자기 인식을 피하려고 한다. 독일과 소련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나치 과거를 결코 직시지 않았었다.폴포트는 누구이기에 자국민의 800만의 인구중 무려 150만명의 인구를 학살했던 것일까? 폴토트에 대해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던 크레르 루주의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원리주의적 공산주의에 따라 강제적인 농업화 정책을 시행하여 많은 국민들을 기아와 고문 등으로 죽게 만든 킬링필드로 유명하다. 재임기간동안 원리주의적 공산주의에 따라 강제적으로 농업화정책을 시행하여 많은 국민들을 죽게 만들었다. 그가 이끄는 군벌 크메르루즈라는 무장단체에 의해 벌어진 학살로 3년 7개월이란 짧은 시간동안 무려 150만명에 가까운 국민이 학살당했다.그는 쿠데타로 정권을 수립한 뒤 자신의 이상향으로 생각한 공산주의 사회를 최단시간 내에 건설하기 위해 혁명에 걸림돌에 되는 모든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엘리트였으나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뒤에 공산주의와 모택동 사상에 빠져 부패에 허덕이는 조국을 개혁코자 쿠데타를 일으켰다.. 부패에 허덕이는 정권을 개혁코자한 일이 자신의 사상을 위하여 사상과는 관련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었을까? 그가 생각한 공산주의가 대체 무엇이기에? 자본주의나 외세에 연계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으며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는 폐지되고 시민들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농촌으로 가제 이주시켜 집단농장을 곳곳에 세웠다. 외국어를 구이 일어났을 것이다. 150만명이란 숫자를 상상해봤다. 2002년한일월드컵때 시청앞에 모였던 수많은 붉은악마들조차 150만명이란 숫자가 되었을까. 아는 사람 10명이 그렇게 학살된다하여도 충분히 경악할 만한일인데, 150만이란 숫자는 상상이 가질 않는다. 거대한 광장서 그저 죽기만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 각각의 삶과 기억이 있을지언대 그저 죽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대체 무엇이 그렇게 인간을 서로 죽이게 만들고 미워하게 만들고 잔혹하게 잔인하게 만드는 것일까. 미친 사람이 한명 뿐이라면 상관이 없지만 미친 집단은 통제가 불가능할뿐더러 상상도 못할 해악을 끼친다. 어쩌면 집단이라는 것은 한 개인의 생각을 넘어서 집단의 생각이 개인에게 심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개개인이 모인 사회적집단은 그 사회적 집단만의 성격과 생각을 가지게 되고, 그 집단과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은 서로 배척하게 되고 거기에 속한 개개인들마저 서로 미워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단절된 상황이 극단적으로 변질되어버리면 바로 이와 같이 학살만이 남을 상황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살아숨쉬는 '사람'이 없어지고 오직 없어져야할 '적'으로서 인식되어버리는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떠한 연민도, 어떠한 슬픔도 없이 잔혹하게 벌어지는 참극들. 그것이 제노사이드가 아닐까.혹은 홀로코스트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집단들은 근거가 확실한 정보로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강력한 사실을 드러내는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반하는 반대세력들은 눈앞의 증거들조차 믿지 않으려하고 그에 반하는 증거들을 애써 만들어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학술이라는 외양은 부정론에 상당한 지위의 겉치장을 제공하는 데 이용되고, 이러한 형태로 역사를 다시 쓰는 것이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 사용된다는 것. 부정론자의 저서들은 매우 폭넓게 배포되어 약간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이게 된다.인간은 정말고, 국가가 발표한 증거를 부정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한다. 또한 이번 연평도 사건은 어떤가, 이건 말이 필요 없는 북한의 도발공격이고, 이로 인해 민간이 사상자까지 나왔는데도 전쟁이 아닌 평화를 외치며 이렇게 된 것은 우리군의 훈련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며 말하는 이러한 단체들은 도데체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로저 스미스가 논했듯이, 검증되지 않은 부정론은 정치적으로 강제된 죽음을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로 바꿔버린다. 인정, 분개, 그리고 동정이라는 단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직 침묵으로 남아 있게 된다.기억의 함정이란 무엇인가? 사실 기억의 위험성은, 우리가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같은 것으로 보기 시작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의 생명을 심각하게 대량 파괴하는 모든 것들이 홀로코스트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마치 한국속담처럼 자라보고 놀란가슴 솥두껑보고 놀란다.처럼 말이다. 모든 독재자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히틀러이다. 그러나 만일 적이 히틀러라면 타협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은 어떻게 600만 명의 학살을 기획한 사람과 협상하겠는가? 만일 어떤 국가의 지도자들이 또 다른 지도자가 적이라는 인식을 만들기를 바란다면 그들은 그 지도자에게 히틀러와 같다는 딱지를 붙인다. 이러한 전술은 아마도 걸프 전쟁때인 1991년에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을 히틀러와 비교한 데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일단 그러한 비교가 만들어지면 정책발의는 심각하게 제한되고, 그 비교가 받아들여지면 정치적으로 실행 가능한 선택은 오직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를 파괴하기 위한 군사 행동과 관련된 것뿐이기 쉽다. 물론 문제는 사건들이 똑같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모두 인식해 , 미래의 유사한 오판을 이해하고 희망적으로 예방할 수 있게 해주는 유형들을 차츰 알아가야한다. 역사는 과거 우리가 범하기 쉬웠던 오류들을 통해 무엇을 피해야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교훈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람들이 배우것은 아니다. 기억은 인간적이고 정당하며 평화로운 미래를 세우기 위한 토대가 되어야 한다.그러나 나에게 있어 피부위로 와닿는 분명한 사실은, 나는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있다는 것이며 민주주의에 수립된 정권이 5년마다 국민들의 직접투표로 바뀌며, 그때마다 새로운 정권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구조는 어느 한 정권이 자신의 정치화를 위해 사회화 과정을 계속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결국은 국민들이 스스로 알게 한다는 것이다. 세계 유일의 공산주의인 북한의 경우만을 봐도 그렇다.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검정일 정권은 3대 세습을 이어가고 있고, 남한을 계속 위협하며 국제사회에 매우 폭력적인 문제아라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정말 제대로 된 체제였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것이지만 결국은 민주주의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수업 중에 어떤교수님께 들었던 말이 생각난다. 전쟁은 어느 한쪽이 악하다고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신들이 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라고.국가의 목적에 복무할 의도로 정치적으로 승인된 대량 학살의 시대, 집적적으로 계획된 학살의 시대였다. “남자, 여자 그리고 아이들이 목숨을 빼앗겼는데, 국가가 이것을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20세기는 제노사이드의 시대이다.레비가 살아온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점점 읽는 것이 거북해졌다. 진정 사람의 삶이 이정도까지 끔찍해질 수 있는지, 이러한 삶이 있고,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를 읽다는 것이 이렇게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몰랐다. 그의 이야기는 비인간성에 대한 이야기이기에 그 어떠한 따듯한 인간성를 찾아볼 수 없었지만 미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이 느껴졌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렇게 열심히 경고하더라도 그 누군가에는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세상일 것이다. 무방비 상태라고 해야할 것이다. 옆에서 누가 아무리 외쳐도 귀를 막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는 현실에 우리는 절망하고 만다. 물리학자 이시도어 래비는 모든 국민들이 지금 아우다.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한 나의 의견초과이익공유제초과이익공유제란 정운찬 동반위원장이 제시한 중소기업과 대기업간의 상생을 위한 정책을 말한다.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이 애초에 얘기한 초과이익공유제의 취지는 대기업이 연초 설정한 목표 이윤을 초과 달성할 때 그 일부를 기금으로 조성해 협력사의 생산성 향상, 기술개발, 고용안정 등에 사용으로 정의내리며 정계와 재계의 협력을 구하고 있다.여기서 살펴보면, 무작정 중소기업에 나눠주자는 것이 아니라, 기금을 조성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중소기업에게 도움을 주도록 운영되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중소기업을 도와주게 된다면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의 성장이 대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중소기업의 기술력제고와 혁신은 물품을 납품받는 대기업으로도 좋은 일이다.그러나 논란의 핵심은 기업이 설정한 목표를 초과했다는 말이 문제라고 본다. 어느 누가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 이상을 달성했을 시에 결과물을 내놓으라고 한다면 시장원리에도,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 논리이다. 기업은 주주를 위하여 일하고 이윤에 대하여 주주에게 배분할 책임을 지닌다. 그러기에 주주가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그런데, 주주가 투자한 자본에서 나온 이윤을 나누어주자는 발상은 자신의 것을 남에게 준다는 의미이다. 물론 그 의미가 사회적으로도, 형평성으로도 듣기 좋은 소리일 순 있지만 막상 그 기업 당사자인 주주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불합리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것이 법으로 강제되게 된다면 기업에 대규모의 자본을 투자하고 있는 주주가 다시 그 기업에 투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그러한 강제성보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합리적이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세계적으로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시장원리를 초월한 적극적 지원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모두의 피땀 흘린 노력의 결과물이다. 기업도 중소기업을 도와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선진화가 이루어진 만큼 대기업의 성장이 반드시 전체적인 국민경제발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고용 없는 성장이 지속되고 있다는 것, 그러한 문제가 정말로 심각하다는 것을 기업이나 정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재임초기 친기업적 성향으로 규제를 풀어주려 했던 이명박 정부가 대기업을 적극 지원하는 결과가 전체 국민경제에 투자대비 효과를 보여주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민정책의 일환으로 동반성장위원회를 설치하고 정운찬 전 총리를 임명한 것이다.갈수록 세계화는 진행되어가고 있고, 경쟁은 더욱더 심화되어가고 있다. 기업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는 혁신에 도전해야 하기에 자국 내에서 머무르기보다 초국적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 과정 속에서 초국적 대기업의 성장이 자국민의 생활수준향상으로 이어지지 않게 되고 결국에는 그 연결고리가 단절되게 될 것이다. 그 예로 많은 기업의 공장들이 해외로 이전하고 있고 그러한 이전이 국내의 노동자는 갈 곳을 잃어가고 있다. 또한 대기업에 납품하기 위해 납품단가를 낮추어야하는 중소기업은 상승하는 국제원자재 물가에도 그 가격을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노블리스 오블리주’ 가진 자의 권리를 베푸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참여가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에게도 이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중소기업이 세계적인 기술력 확보와, 우수한 품질을 갖추게 된다면 납품을 받는 대기업의 입장에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대한민국의 현재 세계적 대기업들은 폭발적인 경제성장과 함께 그 과실을 먹어왔다. 이제는 그 과실에 대한 의무를 책임져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강제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대기업 스스로 기금을 조성하고 중소기업과 함께 가는 상생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이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나는 초과이익공유제로 인해 발생한 국내의 뜨거운 논란이 일어나는 현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예전에는 초과이익공유제와 같은 발상을 얘기했다면, 빨갱이나 사회주의자로 몰려 정계든, 재계든 사회적 매장을 당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오로지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밖에 없었기에 그러한 형평성에는 전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글로벌기업으로 성장했고, 벌어들이는 외화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수출 전반을 주도하고 있다. 그만큼 경제가 풍족해지고 사람들은 먹을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그 시점 속에서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형평성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