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고전의 시각에서 논어 비판논어는 빼놓을 수 없는 동양의 고전이다. 논어를 통한 공자의 가르침은 2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논어에 관련된 책만도 3천권 이상이 출판되었다고 하니 아시아에서 논어라는 텍스트가 차지하는 비중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논어는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 불리는 텍스트들과는 사뭇 다른 점이 많다. 특히 서양의 고전과 비교했을 때 내용에서부터 서술방식, 형식 등 여러 부분에서 그 차이를 알 수 있고, 비교적 서구의 텍스트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에게 논어는 매우 낯선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양자 간의 차이가 꽤 커서 그 둘을 비교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무리의 소지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양자 간의 비교를 감행하려는 이유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동서양 간 나타나는 사유방식, 서술방식의 차이나 어느 하나가 결한 부분, 간과하고 있는 부분 등을 살필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서양의 고전 중 플라톤의 '국가'를 '논어'의 비교대상으로 잡으려 한다. 굳이 '국가'를 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 면에서 논어와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시기적 유사성을 들 수 있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 BC 551 ~ BC 479)와 소크라테스(BC470~BC399)가 살았던 시대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논어'와 '국가' 는 비슷한 시기에 쓰였다. 또 텍스트가 점하고 있는 위상에도 둘을 묶을 만한 유사성이 있다고 보았다. 문자화되어 전승되는 고전(古典) 중 각각 동서양 최초의 텍스트라는 점도 둘 간의 유사한 점이다. 양자는 각각의 지역에서 오랜 시간동안 고전으로서 기능하며, 후대에 이르기까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한편, 후학에 의해 끊임없이 연구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책이 다루고 있는 주제 역시 겹치는 부분이 상당하다. 용어의 차이는 있으나, 올바른 정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 등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끝으로 두 책 모두 제자에 의해 쓰였다는 점, 형식적으로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역시 공통점으로 작용한다.'논어' 대부분의 내용은 '당위'로 구성이 되어있다. '~해야 한다.'의 형식이나 '~아니한가.'의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구절의 문제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만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에 대한 증명이나 의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논어'기 기존 상식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좀 더 확대하면, 공자는 당시에 통용되고 있던 여러 관습이나 덕목 중 특정한 것에 대한 강조는 하고 있을지언정, 독창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지는 못하다. 물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양보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라는 인물의 성인적(聖人的) 특수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려면 시대상황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일정한 문명발달단계에서 일정한 지적생산물이 나온다고 가정할 때, 공자나 논어는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논어에서는 옳은 것이 왜 옳은 것인지, 중요한 것이 왜 중요한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부족하다. 당연한 것인지가 불분명한 당위명제의 나열이다. 반면 '국가'는 비교적 증명의 과정이 조금 더 충실하다. 국가 1권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가 '정의'에 관해 논쟁한다. 트라시마코스는 계속해서 소크라테스의 의견과 상반된 의견을 제시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논리에 대한 반박과 적절한 비유를 통해 그를 설득해가는 과정에서 '정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과정을 통해 더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가까이 가며, 이는 증명의 역할을 하고 있다. 논어에서는 당위명제만 주어질 뿐, 그것에 대한 반론이 없으며, 공자의 생각을 철저히 파고드는 등장인물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구전문화에서 동서양 간 말하기 방식의 차이나 사람 간 위계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왜?'라는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 공자가 야속해보일 것이다.이와 연계하여 각종 개념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혹은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논어에는 '인'과 '예'와 같은 핵심 개념어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다만 논어에서 표현된 몇몇 용례를 통해 유추가 가능할 뿐이다. 이것을 이루는 방법 역시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아 그 실체에 접근하기가 어렵고 해석하는 자의 편의에 따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둔다. '국가'에서 철인정치에 대해 설명하며 철인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는 작업을 선행한다. 이 정의가 합당한 것인가는 차치하고라도 어떤 개념어가 등장할 때에 이것에 대한 속성을 살핌으로써 그것의 정의(定義)에 다가가려는 시도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독자에게 분명하게 전달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는 텍스트가 가지는 내용과 별개로 한문이 갖는 불가피한 의미전달의 한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자의 해석이나 끊어 읽는 방식 등의 차이로 의미의 변화가 발생한다. 수없이 많은 주석서가 나온 것도 이런 까닭일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설명 없이 추상화된 개념어들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차이는 동서양간의 개념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무엇이 더 우월한가를 평가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다만 ‘정의’를 하는 부분에 있어, (ⅰ)동양의 텍스트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서구의 논리전개 방식과 비슷한 형태로 변화되어왔다는 점과, 이러한 기술방식에 진화론적 관점을 적용한다고 할 때에 (ⅱ)현 시점에 서구의 방식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는 점 등은 학문을 익히는 데에 있어 서양 텍스트에서 사용된 사고방식이 비교적 유리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고 본다. 이것이 유리한 이유 중 하나는 개념에서 확장된 논의나 지식의 실천에 있어 보다 명확한 기준에 의한 정의가 확립되어 있을 때, 그 적용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가령 동양의 텍스트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특정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텍스트에서 다루어진 용례들을 바탕으로 그 기준점을 재구성해야 한다. 결국 한 번 더 추상화 과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 가지를 덧붙이면 어떠한 텍스트가 종교의 영역이 아닌 학문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기 위해서는 텍스트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표현)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논어에서 나타난 사상과 관련해 제기해 볼 수 있는 문제는 공자의 문제해결방식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보수성과도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존 제도를 벗어나려는 시도가 보이지 않는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는 전란의 시대였다. 정치적 안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회이다.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논어의 유명한 글귀는 이러한 공자의 생각을 볼 수 있는 구절이다.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는 다수의 해석을 따른다고 할 때에 이는 다분히 기존제도 친화적인 발상이다. 각자 맡은 바에 충실할 때에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기존체제에 대한 의심 없이 그것에 속한 개인만 제 기능을 한다면 된다는 발상은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다. 당시 상황에서 만인평등과 같은 급진적인 생각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거시적인 안목을 기대해 볼 수는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이를 조금 더 비약하여 해석하면 인간본성에 관한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공자의 이상향처럼 모두 주어진 자리에서 기대되는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다면, 어떤 구조든 어떤 정치체제 하에서든 사회는 안정적일 수 있다. 노예제, 봉건제, 공화정 등을 비롯한 기타 모든 정체 하에서 아무런 불만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그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는 인간 본성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좀 더 원론적인 해결책은 개인이 아닌 구조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공자는 주어진 체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으며, 체제 내에서의 개인의 덕성함양에 의존한다. 이를 볼 때, 공자를 시대를 초월하는 선구자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는 ‘국가’에서도 결하고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국가'에서는 철인정치라는 정체를 구상한다. 이는 어떻게 보면 공자가 제시하는 임금다운 임금의 한 형태로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점은 철인정치라는 새로운 정체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기존의 ‘왕이 철인이 되어야한다’와 ‘철인이 왕이 되어야한다’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전자가 개인적 차원의 해결이라면 후자는 보다 구조적 차원의 해결이다.
루이 브뉘엘의 초현실주의 영화를 어떻게 읽을것인가?Ⅰ.서론영상예술의 이해란 수업은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관념들을 너무나도 많이 들쑤셔놓았고, 나의 무지함을 거듭 깨닫게 해주기도 한 수업이다. 회화부분은 원래 내가 잘 관심 갖지 않았던 분야라 논외로 한다하더라도, 영화의 분야는 학문적으로 접근해본적은 없는 분야지만, 비교적 많은 영화를 감상하고 나름 따분할 수 있는 예술영화도 많이 접했던 터라 꽤나 자부하고 있는 분야였다. 그러나 이 수업을 통해 본 몇 편의 영화와 그에 곁들여지는 교수님의 설명은 나를 너무 초라하게 만들었다. 재미있게 보았는데 그 안에 숨은 메시지를 전혀 읽을 수 없었던 영화들이나, 내용조차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작품들은 나의 머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했다. 수업시간에 감상한 영화 한 편 한 편 모두 정도의 차는 있지만, 나를 괴롭히기에 충분했다. 그 중에서도 ‘안달루시아의 개’라는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충격은 잊을 수가 없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논하기 위해 어떤 느낌의 충격이었는지는 서론에서 길게 밝혀 쓰지는 않겠다. 내가 전혀 마주해 본 적이 없는 장르의 영화였다. 줄거리도 감상평도 이야기하기 어려운 그저 ‘저게 뭐지?’라는 생각만 들었다. 16분여의 짧은 영화, 그 영화가 끝이 나고 들었던 짧은 감정들 중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은 ‘찝찝함’이었다. 물론 현대영화에서도 결말부를 명확히 제시해주지 않는 등의 방법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찝찝함을 경험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는 그런 종류의 찝찝함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표현의 한계로 이렇게 표현하지만, 그동안 영화를 보고 느낀 감정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수업시간에 다루었던 여러 영화초기 작품들이나 이해가 어려웠던 작품들이 많았으나, 가 가지는 그러한 성격은 상당히 압도적이었다. 과제를 작성하는데 있어서 너무 어려운 주제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우려도 되었으나, 이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목표라는 생각이 들어, 이 작품을 선택했다.어떤 질문을 통해 이 작품을 분석하권을 빌렸지만, 아직 읽지 않은 상태이고, 본론의 작성까지 끝이 난 후에 읽을 생각이다. 우선 다른 매체는 이용하지 않고 내가 생각한대로만 써 볼 계획이다. 책이 내 생각을 묶어 내 스스로의 생각이 매몰됨을 방지하고 싶다. 본론 부분까지 대강 적은 후에 참고문헌을 발췌하여 읽고, 결론에 제시할 계획이다. 또한 본론 부분에 어느 정도의 수정도 가해질 것이다.Ⅱ.본론ⅰ. 이 영화는 과연 분석이 가능할 것인가?서론에 밝혀 썼듯이 이 영화는 그동안 전혀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영화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다. 어떤 영화든 나름의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위의 질문을 조금 구체화 하면 각 장면의 분석이 가능할 것인가? 또는 장면의 분석이 유의미한 작업인가? 하는 부분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새로운 형태의 영화이다 보니 감독인 루이 부뉘엘이 의도적으로 분석을 거부하려 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 작품의 분석에 있어서 가장 궁금했던 질문, 루이 브뉘엘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 그리고 두 번째, 표현기법과 관련된 질문과도 연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루이 브뉘엘이 각 장면별로 어떤 의미를 두고 있지 않고, 무의미한 장면의 연속이라는 새로운 영화 형태의 소개라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각 장면의 분석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보인다. 즉 이럴 경우엔, 브뉘엘의 메시지 자체가 장면의 무의미함을 통한 기존 틀의 파괴나 고정관념의 파괴 등으로 귀결 될 것이다. 기존 상업영화에 대한 비판의 차원일 수도 있고, 새로운 영화 장르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일 수도 있다. 혹은 좀 비약일지 모르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혼란을 겪게 하는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경우라면, 표현기법 등 역시 크게 분석될 필요가 없다. 무의미함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면 반드시 영화내의 특정한 장면일 필요가 없고, 다른 장면으로 대체되어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경우는, 개인 표현기법을 사용하고 있는가?쉬우면서 어려운 질문이다. 우선 영화 내내 흐르고 있는 것은 비연계성이다. 장면 간의 연계성이 크게 없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나름대로 등장인물의 일관성은 갖추고 있으며, 전 장면에서 나왔던 소품이나 행위 등이 반복되는 등, 생판 관련 없는 장면들의 결합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러한 시각적 유사성 이외에 다른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보통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줄거리인데, 이 영화는 줄거리라고 부를만한게 없다. 또한 시간의 흐름을 반영하지 않는다. 에서 대표적인 표현기법으로 부를만한 것은 중간 중간 자막으로 등장하는 문구이다. 등장인물들은 대사가 없기 때문에 자막만이 이 영화에서의 유일한 언어적 표현이다. 이 부분만 나열해보면, “옛날 옛적에” - “8년 후” - “새벽 세시” - “16년 전” - “봄이 되어” 와 같다. 이 다섯 가지가 영화 내에 등장하는 자막의 전부인데, 모두 보면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부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이 내용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파악이 어렵다. “옛날 옛적에”는 영화 도입부에 나오고 장면이 넘어간다. “8년 후”다음에는 그 전 장면에서 눈을 베였던 여자가 다시 주인공이 되어 (두 눈이 모두 멀쩡한 상태로) 등장한다. 이를 볼 때, 이 자막은 의도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역방향으로 제시한 것이거나, 혹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의미 없이 첨부된 자막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새벽 세 시” 그리고 “16년 전”과 같은 자막 전과 후에 장면의 변화가 없음을 고려해 보았을 때, 시간을 나타내는 자막은 큰 의미 없이 삽입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다른 표현 방법으로는 첫 장면에 볼 수 있는 달 위로 구름이 지나가는 장면과, 면도날로 눈을 베는 장면이 있는데, 여기서는 시각적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손에서 개미가 나오는 장면에서 볼 수 있는 나름의 특수효과라던가, 책이 권총으로 변하는 장면 등과 루이 브뉘엘이 표현하고자 한 것은 꿈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을 하니 정말 맞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나도 가끔 꿈을 꾸는 편인데, 꿈의 종류 중에는 와 같은 꿈이 있다. 가끔씩 상당한 개연성과 스토리를 갖추고 있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보통의 경우, 등장인물은 일정한데, 맥락이 없는 여러 공간적 장소의 이동, 초능력의 발휘나 시공간을 초월한 배경, 그리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스토리 등 꿈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가 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나름의 정답을 정해놓고 끼워 맞추다보니 영화 내의 모든 장면이 뭔가 설명 가능 할 것 같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가령,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었던, 자막으로 표현된 시간은 꿈에서의 불가능한 시간적 이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새벽 세시”라는 표현은 현재 그 꿈을 꾸고 있는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본다.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 우선 해몽이 가능한가의 문제이다. 꿈의 해몽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행해진다. 동양의 경우는 주로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서양의 경우에는 주로 사물에 초점을 맞춘다. 서양의 영화인만큼, 그들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이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사물을 중심으로 해석해나가면 될 것이다. 넥타이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에서 왜인지는 모르지만 넥타이는 제법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소품인데, 이런 의미를 부여할 경우, 영화의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영화에 사용되었을 몇 가지 모티브 중 하나는 성욕(性慾)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여자를 성추행 하는 장면이나 여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피아노와 사람을 끄는 장면 등에서 이러한 동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이 외에도 기억에 남는 사물로 빗금이 쳐진 상자, 여장도구, 자전거, 잘린 손, 개미, 권총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 가능성의 문제-(이 경우라면 일반 관객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누군가는 이해할 수 있을 수 있다.)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꿈이라는 나름의 정답이 좌절된다면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쯤부터 기존의 연구를 통해 내 생각의 검증과 보완을 하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ⅳ.기존의 연구와의 비교 및 검증참고문헌을 읽으면서 다소 충격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내가 생각했던 바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다행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그 중 제작노트를 인용해 본다.“영화를 만든 의도는 관객에게서 흡인 작용이나 반발 작용의 본능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중략)...이 영화에서 어떤 것도 무엇인가를 상징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상징들을 연구하는 방법은 아마 정신 분석일 것이다.”비교적 명확하게 그 의도를 밝히고 있는 이 부분에서, 루이 브뉘엘은 장면 하나 하나에 어떤 의도를 숨겨놓지는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자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제작했다.―영화 중 피아노에 묶여 있는 두 남자 중 한명이 달리이다. 즉, 당시 대두되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이 영화가 제작되었다. 초현실주의라는 큰 패러다임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회를 향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어떤 특정한 장면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자체가 초현실주의를 표현하고 있음은 확실해 보이나, 영화 내의 장면은 그 초현실주의를 표현하기 위한 방법적인 장치일 뿐, 그 제각각이 어떤 현상을 상징한다거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영화의 주된 모티브는 꿈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좀 더 넓은 차원에서 보면 ‘무의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꿈속에서 또는 최면의 황홀경 속에서 상상력의 고삐가 풀렸을 때, 무의식은 이미지를 향해 질주한다.”루이 브뉘엘은 무의식에서 파생되는 이미지를 스크린으로 옮기고자 했다.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무의식에서의 이미지는 결국 내가있다.
논어에서 나타난 好學.논어의 내용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 단어를 하나 꼽으면 단연 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강조되고 있는 것이 學이다. 공자는 배움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논어의 첫머리에서부터 배우고 익히는 것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는 데에서 배움에 대한 강조를 느낄 수 있다.공자가 보는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이상향은 ‘君子’ 이다. 군자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군자로서 가져야 할 여러 가지 덕목을 제시하나 仁을 이러한 것을 모두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볼 때 군자가 되기 위해서는 仁만 갖추면 된다. 여기서 學과 仁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논어에서 學은 좋아하다는 의미를 가진 好와 함께 쓰여 好學으로 쓰인 용례가 자주 등장한다. 好學과 仁을 동위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하는지 혹은 仁이 포괄하는 여러 개념 중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인지 혹은 仁이라는 궁극적인 것에 다가가기 위한 방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따져볼 수 있다. 논어에서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하는 개념이 仁이라고 설정할 경우 學의 의미는 세 번째의 의미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먼저, 好學이라는 단어는 텍스트 내적으로만 보았을 때, ‘배움을 좋아하는 것’ 혹은 ‘배움을 즐기는 것’ 외에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크게 없어 보인다. 논어집해와 논어고금주에서도 이 단어 자체에 대한 다른 해석은 나오지 않는다.처음 好學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학이편 14장이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君子,食無求飽 居無求安 敏於事而?於言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好學이 반드시 특정한 ‘배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마치 仁과 같이 어떤 추구해야할 것을 나타내는 일반명사로 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배부르기를 구하지 않고, 거처할 때는 편안하기를 구하지 않는다.’ 는 부분이 好學의 속성 중 하나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만 보았을 때에, 이러한 행동은 배움을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관계가 없어 보인다. 서로 별개인 두 개의 행위인 것이다. 논어 집해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뜻을 둔 바가 있어 그러할 겨를이 없다’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논어고금주에서는 ‘食’과 ‘居’를 克己의 의미로 보아 好學을 달성하는 데에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 논어한글역주에서는 이 부분을 군자의 범용의 도덕을 뛰어넘는 사회적 책임의 요청으로 본다. 食無求飽 居無求安 부분이 배움의 결과로서 나타날 개연성은 있으나, 어떤 해석을 참고하더라도 양자 간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찾기 어렵다. 여하 간에 공자가 생각하는 好學의 속성을 열거했다는 점에서 이 구절에서 나타난 好學은 다른 덕목들을 포함하는 상위개념으로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옹야편 2장, 그리고 선진편 6장에서 好學이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질문의 형태로 나온다. 질문을 한 주체만 다르고 내용은 같다. 배움을 좋아하는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논어에서 나타난 이 두 차례의 같은 질문을 통해 평소 공자가 好學을 상당히 강조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공자의 답 역시 같은데 안회라는 자가 있었는데 이제 죽고 없다는 내용의 답이다. 논어집주에서는 배움을 좋아하는 이를 찾기 어렵다는 해석을 하고 있다. 안회라는 인물 딱 한 명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好學이라는 것이 인간으로서 매우 달성하기 어려운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군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경지의 것이 好學인 것이다.공야장편 14장에서 공문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도 好學이 나온다. 여기서는 공문자라는 사람이 왜 文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논어집해와 논어고금주 모두 공문자라는 사람이 文이라는 시호를 받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文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는지 물어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공자의 대답은 敏而好學 不恥下問 是以謂之文也이다. 여기서도 배움을 좋아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이 합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논어고금주에서는 이러한 대답을 공자가 그의 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두둔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본다. 이 대목은 공자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논어에 나타난 부분만 두고 보면, 다른 부분에서 하자가 있더라도 배움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文의 시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볼 때, 好學이라는 것 자체에 공자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러한 용례에서만 보았을 때, 好學은 다른 것들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어로 볼 수 있다. 仁과 동위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군자로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차원의 덕목으로 보인다.반면 學에서 배움의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언급되지 않고 있다. 논어의 분위기 상, 모든 종류의 배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道, 禮 등으로 그 배움이 국한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개념어들 또한 그 구체적인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아 그것의 정확한 의미를 단정 짓기 어렵다. 가령 말하기 기술이나 외모를 치장하기 위한 기술을 배운다고 할 때에, 공자는 그것을 學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學의 의미는 당시의 학문으로 분류되던 것이나, 혹은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 등으로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논어의 내용에 좀 더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이런 의미에서 보면, 學이란 것은 그 대상이 仁을 추구하는 데에 국한된다는 점에서 仁을 위한 방법적인 것으로 생각될 소지가 있기도 한다. 그러나 好와 결합하여 好學이라고 사용되면 學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배움을 좋아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가치가 되는 것이다. 논어에 나타난 보다 구체적인 好學의 용례에 의해 알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의 평등, 평등주의에 관한 소고「한국의 평등주의」를 읽고.이 책을 읽으며 한국사회에서 평등주의가 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강남의 집값 문제를 비롯한 빈부격차, 대학입시 등은 거의 매일같이 듣게 되는 평등 관련 논쟁거리이다. 시공을 초월한 당연한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특히 우리나라에서 좀 더 민감한 문제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외국과의 비교를 통해 보니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경험적으로 가장 와 닿는 부분은 성공한 사람을 보았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축하하기 보다는 시기와 질투가 앞선다는 것이다. 성공한 자의 정당한 노력은 애써 등한시 한 채, 그들이 성공하는 과정에서 취한 부당한 방법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잘못된 행위에 더욱 민감하다.현대 사회로 오면서 '불평등한 것'에 대해 상당히 민감해지고 있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한국의 평등주의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내용에 앞서 '불평등한 것' 이 잘못된 것인 가하는 의문이 든다. 한국에서는 불평등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평등은 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본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법적으로라도 모두가 평등한 지위를 갖는 시대는 200여년 남짓에 불과하다. 고대사회부터 노예제, 봉건제 등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늘 불평등해왔다. 법적으로 평등한 시대는 비교적 최근의 일인데, 이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른 동물을 비롯한 자연계를 살펴보아도 평등은 인간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현상이다. 즉 인위적으로 제도화한 평등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제도적으로는 평등을 구현해놓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불평등이 존재한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본성이라고 보인다. 극단적인 평등주의, 예를 들어 결과의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같은 경우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사회주의 내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 때문이 아니라 불평등한 인간을 평등하게 맞추어 놓으려는 시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불평등은 필연적이다.여기에서 말하는 불평등이 결코 노예제와 같은 계급사회로의 회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전제로 한 사회의 역할은 불평등을 관리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계급사회는 계급을 이용하여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구조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따라서 제도적으로 평등을 원칙으로 하여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 의해 존엄성을 다치는 일은 없게 해야 한다. 한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자행된다면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나타나는 불평등 역시 제도적으로 막아야 하는 가는 확실히 말하기가 어렵다. 개인에게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최대의 자유를 보장하되, 이후의 불평등한 결과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역시 불평등은 필연적이다. 가장 먼저 생득적 자질에 의해 불평등이 나타날 수 있다. 책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미녀는 추녀에 비해 유리한 입지를 점한다. 또 부모의 재산 등도 생득적 자질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출발선 상에서 차이가 나고, 이는 결과의 불평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불평등을 바로잡아야 할까? 이 예에서만 보자면, 이 출발선의 불평등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추녀에게 성형수술 등을 지원하여 미녀로 만들어야 하고(미녀를 추녀로 만드는 것은 심하게 반발할 것이다.) 부모의 재산이 자녀에게 지출되는 범위 역시 모두를 평등하게 규제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실제로 불가능할 뿐더러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효과가 있다면 결과가 나타난 이후에 추녀의 불만을 잠재울 수는 있겠지만, 이 경우 자신이 가진 생득적 자질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게 한데에 대한 미녀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 있다. 이 사회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경쟁을 평등하게 출발하도록 하려는 노력을 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 역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회가 이러한 불평등을 모두 평등하게 바꾸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오히려 각 개인의 장점을 잘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회의 역할이다. 다만 한 가지 장점이 모든 경쟁에서 활용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그 외에 해야 하는 것은 경기가 일단 시작되면 공정한 경기가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경기장이 아닌 여러 경기장을 만들어야 한다.경쟁에 의해 계층이나 계급이 발생하고 경쟁은 어떠한 가치를 두고 발생한다. 여기에서는 그 가치를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재화'라고 말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재산, 권력, 지위이다. 여기서 드는 생각은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재화의 대표적인 이 세 가지가 독립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또 계층이나 계급을 나누는 데에서 이 세 가지를 동위의 개념으로 놓고 쓸 수 있는가 하는지도 의문이다. 이 세 가지를 하나씩 독립적으로 취득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일단 셋 중 한 가지를 가지게 된다면, 나머지 두 가지를 갖는 것은 다른 경쟁자에 비해 매우 수월해진다. 가령,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보건대 권력을 얻게 되면 그 권력을 이용하여 재산을 모으는 일이 쉬워진다. 이것이 부당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더라도, 실제로 이러한 일은 매우 빈번하게 발생한다. 예를 들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또 재산을 이용하여 권력이나 지위를 취득하기도 한다. 조선 후기의 매관매직이나 족보를 사는 등의 행위가 그러하다. 이러한 행위는 현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보통 도덕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와 같은 양상은 계속되고 있다. 시기와 질투가 발생할 때에는 성공을 가늠하는 지표인 이 세 가지의 유착관계에 초점을 둔 것이라 본다. 이 셋은 거의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해야 하는 일은 이 셋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 내는 것이다. 하나의 경쟁 내에서의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한 불평등이 다른 분야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것은 막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보다 키가 크고 잘 생겼다고 할 때, '나는 대신 공부를 더 잘해'와 같이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재산을 가지면 다른 모든 것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구조이다. 재산이 다른 두 가지를 취득 가능하게 한다. 이는 '재산'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으면 어느 경쟁에서나 통하는 것이다.사실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로 보인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서 사람들은 오로지 돈에만 관심을 갖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이러한 경쟁 구조를 다른 것 그 자체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선 사람들이 돈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의 후반부에 있는 ‘경제 성장과 평등주의의 관계’ 그림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일정 정도의 소득이나 재산이 보장된 후에는 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삶의 질 등 다른 부분에서의 관심이 생겨날 수 있다. 이것이 맞고, 한국사회의 평등주의를 감소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국민소득을 증가시키는 방향의 정책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인간 본성과 현재까지 한국에서 나타난 평등주의와 함께 생각해볼 때 어렵게 보이기도 한다. 책에서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이후부터는 평등주의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예측을 하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변화양상을 보면 꼭 그럴 것이라고 동의하기는 어렵다. 현재까지 소득과 평등주의는 같은 방향으로 증가해오고 있다. 꼭 일정수준을 지나야만 그 방향이 변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방향이 바뀌는 것은 절대적인 소득의 수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득과 무관하게 자생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 본다. 그러나 이미 평등주의가 만연에 있는 현재 한국에서 소득수준을 제외한 어떤 변수가 있어야 이 평등주의의 변화에 영향을 줄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평등주의가 포기되어서 감소하는 방향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 본다. 점차 취업이나 교육 등이 분야에서 격차가 벌어진다. 승자와 패자 역시 비교적 명확하게 분리된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패자에게 시기와 질투, 또는 분노를 가져다주어 사회의 평등주의가 더욱 극단적으로 표출되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으나, 너무 심각해져 더 이상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에 이르면, 체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체념은 불평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결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라 본다.
「군주론」서평한국 및 현대사회와의 비교와 적용가능성Ι. 서론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고전임에도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군주론의 앞에는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 전하께 올리는 글” 이라는 제목의 헌정사가 볼 수 있다. 이 책의 기본적인 집필 목적은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군주 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는 메디치 가문에 한정짓고 있지만, 군주라면 그것이 누구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즉, “군주는 어떠해야 한다”는 내용의 지침서와 같은 성격의 책이다.「군주론」의 근거가 되는 내용은 대부분 역사적 사례에 의한 것이다. 현재 유럽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국가들, 그리고 그 군주들의 사례를 수집하고, 그들이 취했던 정책이나 군주 개개인의 성격이 어떤 식의 결과 귀결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이 분석 결과에 따라 가장 바람직한 군주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정리해 놓은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바람직한 군주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인다. 첫째로는 군주 개인에 적용할 수 있는 뜻이고, 두 번째로는 국가라는 군주의 통치대상이 되는 것에 적용할 수 있다. 우선 군주 개인에 적용함은 군주가 어떻게 해야 그 권력을 잃지 않고, 일신의 안위를 꾀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국가에의 적용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독립국들이 존재하고, 전쟁의 위협이 항시 존재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한 국가가 멸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는가 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더 확장할 수 있는가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마키아벨리가 생각한 군주의 이상형은 이 두 가지 부분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독립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도 두 가지 부분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 책에서 나타난 군주가 가져야 할 덕목으로서의 규범적 내용을 유형별로 재분류를 하자면, 이와 같은 분류도 가능할 것이라고 보인다.「군주론」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특징은 당시의 고전임을 생각했을 때, 상당히 현실적이고 실증적이라는 것이다. 우선 양한 국가가 난립하던 시대가 있었기 하지만, 대체적으로 하나의 왕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몇 백년 주기로 왕조교체가 일어나긴 하지만, 결국 세습군주국의 형태를 유지한 기간이 압도적으로 길다. 따라서 이 책을 동아시아나 한국의 역사적 사례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을 수 있다. 당시 유럽에 비하면 전쟁의 위협도 그리 크지 않은 비교적 안정적인 구조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한반도에서는「군주론」과 같은 내용의 책이 등장할 이유와 필요가 거의 없었다고 본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려나 조선의 왕들이 「군주론」은 읽는다고 가정하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내용이 무용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뒤에 나오는 군주의 권위 획득방법이나 신하나 백성을 다루는 방법에 관한 내용은 지역이나 국민을 불문하고 어느 정도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여하튼, 「군주론」은 복합군주국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있다. 전적으로 새롭게 생긴 것은 아닐지라도, 종래에 있던 군주국에 수족처럼 병합된 경우를 복합군주국으로 정의한다. 이런 형태의 국가는 신생군주국이 겪는 난관을 겪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세습군주국과 비교할 때, 「군주론」에서 다루고 있는 국가와 군주의 범위는, 신생군주국에 한정된다. 즉, 새로운 국가의 형성 초기에 겪는 문제들이 핵심 주제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한반도에서의 왕조교체기 등에 어느 정도 적용의 여지가 있다.다음의 군주국 구분방법으로 가신들로 이루어진 국가와 제후로 이루어진 국가로 구분할 수 있다. 가신과 제후의 구분은 모호하다. 이 책에서는 가신은 한 명의 군주의 은덕과 선임에 의해 국정을 보좌하는 자로 제후는 오랜 귀족 가문의 세습적 권리를 통해 그 지위를 유지하는 자들로 보았다. 조선시대에도 유력가문 등이 있었으나, 이 가문들은 왕을 갈아치울만한 힘을 갖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가문이나 붕당 등은 후계자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가 왕이 될 수 있는 구조는 아닐 것으로보아 가신으로 이루어진 국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표현상의 클 수도 있고, 행운이 클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역량에 의해 군주에 자리에 오른 자일수록 , 행운에 의지하는 비율이 낮을수록 자신의 지위를 잘 유지할 수 있다. 타인의 호의에 의해 자리에 오르게 된 자는 그 호의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닌 이상, 그 지위가 위태로워질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역량은 반드시 무력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비무장의 예언자, 사보나롤라의 예를 들고 있다. 무력이 아닌 다른 힘을 가지고서도 정복을 할 수 있다. 설득 등에 의한다. 그러나 설득하는 것은 쉬우나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운데 이는 인민은 변덕스럽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는 언제나 자신을 믿지 않을 경우, 그것을 강제할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무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력은 개인의 물리적인 힘이 아닌 군대와 같이 강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역량과 행운 외에도 군주가 되는 방법 중 하나로 사악한 방법을 사용하여 군주가 되는 것을 소개한다. 이를 따로 다루었다는 것은 조금 의아하기도 하다. “동료 시민을 죽이고, 친구를 배신하고, 신의가 없이 처신하고, 무자비하고, 반종교적인 것을 덕(virtu)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권력을 얻을 수 있을지언정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위와 같은 행위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일 뿐,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군주가 되는 요소 중 역량과 행운 외의 제 3요소로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군주론」의 성격을 잘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한데, 역량과 구분을 지어 표현했는가와 관련해서는 의문이 좀 있다. 아마도 종래에 통용되던 최소한의 도덕의 눈치를 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이런 행위를 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가해행위는 단번에, 시혜행위는 천천히” 하는 것을 권장한다. 즉 단번에 잔인한 조치를 취하고, 그 후에 시혜행위를 천천히 행함으로써,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원군이나 용병은 늘 불안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군주는 다른 모든 일보다 군무에 힘써야 한다. 정복과 전쟁이 일과인 당시 상황을 고려 할 때, 마키아벨리가 이토록 군대의 중요성을 역설했던 것은 이해가 된다.3. 군주의 이미지후반부의 장들에서는 군주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 인민이나 귀족들을 비롯한 다른 누군가에게 군주가 어떻게 비추어지는게 좋은지 , 즉 군주의 이미지에 관한 문제이다. 군주가 칭송받거나 비난 받는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부터 마키아벨리의 특징적인 생각들이 더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라는 구절은 마키아벨리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종래의 학자들과 다르게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윤리적 공상과 엄연한 현실의 차이를 인지하고 있다. 목적의 달성이라는 목표만 놓고 보았을 때, 이 양자간 차이의 인식은 가장 효율적인 목표 달성방법에 이르는 첫 단계일 것이다. 그간에 윤리적 공상에 빠져 현실을 놓치고 있었다면, 마키아벨리는 그 부분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그렇다면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군주는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뒷부분에서 계속 이야기 한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에는 사례를 덧붙여 근거로서 활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역사적 사례를 통해 군주의 어떤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를 인과적으로 보여주며 구체적인 주장들을 전개해 나간다.먼저 관후함과 인색함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 두 단어의 뜻만 놓고 보면 관후함이 더 바람직하다고 보인다. 군주가 관후해야만 인민들의 지지를 얻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생각은 다르다. 관후하다는 평판을 추구하는 데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자신을 관후하게 보이려 할 경우, 그만큼 많은 재물을 써야 하고, 이것은 결국 무거운 조세 부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조세는 인민의 재산을 빼앗는 행위인데, 욱 잔인해야 한다.비슷한 맥락에서 군주는 그의 신민으로 하여금 사랑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편이 안전하다. 이 대목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즉 인간이란 은혜를 모르고 변덕스러우며 위선적인 데다 기만에 능하며 위험을 피하려고 하는 이익에 눈이 어둡습니다...(중략)... 그렇지만 당신이 정작 그러한 것들을 필요로 할 때면, 그들은 등을 돌립니다. 따라서 전적으로 그들의 약속을 믿고 다른 대책을 소홀히 한 군주는 몰락을 자초할 뿐입니다.” 라고 쓰고 있다. 또한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베푸는자를 해칠 때에 덜 주저합니다.”라고 말한다. 마키아벨리의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성악설의 입장에 있다. 마키아벨리가 어째서 이런 인간관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쓰고 있지 않다. 추측컨대, 당시의 빈번한 전쟁이 실제로 그 시기에 살던 사람들의 성향을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들여다 볼 때, 마키아벨리의 인간관과 그것으로 인해 도출된 결론이 잘 부합하지 않는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신생군주국으로 등장한 고려의 군주인 왕건은 두려움을 주는 정책보다는 온정적, 회유적인 정책을 많이 사용했다. 그럼에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고려 초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왕들 역시 자비로운 왕들이었고, 폭군이었던 연산군은 폐위 당했다. 일제강점기의 사례를 보아도 3.1운동은 무단통치시기 말에 일어났다. 물론 이러한 우리나와의 비교들은 구조적인 차이점에 의한 부분을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인간 본성에 관한 마키아벨리의 생각에는 반론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어보인다.그러나 두려움을 주는 한 편, 신민들의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호의는 군주 자신이 베풀고, 처벌은 신하가 내리도록 하는 방법도 있다. 미움을 피하지 않으면, 인민들은 군주에게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