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문학의 이해기말레포트을 토대로 본 비극의 본질서론ㅣ----------------------------------------page 1본론ㅣ비극의 구성상 특징------------------page 1ㅣ비극의 본질: 4가지 요소-------------page 2~5맺음말ㅣ-----------------------------------------page 5참고문헌ㅣ ----------------------------------------page 5서론소포클레스는 대표적인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중 한명이다. 그리고 그의 작품 ‘오이디푸스 왕’은 대표적인 비극론 을 집필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비극으로 여기며 모범적인 예로 사용한만큼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는다.나 역시 그렇게 사용했었지만, 흔히 ‘비극’은 흔히 일명 ‘새드엔딩(sad ending)’의 동의어 정도로 치부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오이디푸스 왕’을 포함해 비극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고대의 ‘비극’은 ‘새드엔딩’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한다. 비극은 주인공이 극 속의 많은 갈등과 투쟁을 거쳐 파멸과 좌절에 이르는 과정을 가리키는 것이다. 대표적 비극론 ,,의 6장부터 시작된 비극에 관한 설명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비극은 어느 정도 위대한 인물의 선하고 그 자체로 완결된 행위를 매력적인 형태의 언어로 모방한다. 이때 각각의 장면에서 형상화하는 수단은 각각 다르게 적용될 수 있다. 보고가 이날 행위자에 의한 모방으로 연민(eleos)과 공포(phobos)를 일으키고, 이를 통해서 흥분 상태의 정화를 야기한다.”본 레포트에서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작 ‘오이디푸스 왕’과 김길웅 교수님의 ‘서양문학의 이해’과목의 강의와 강의안을 비롯해 추가적으로 찾아본 참고문헌들을 기반으로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비극의 본질에 대해 서술해보고자 한다.본론비극의 본질에 대해 살펴보기에 앞서 ‘오이디푸스 왕’을 기반으로 한 비극의 구성상의 특징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펴보겠다.우선, ‘오이디푸스 왕’갈수록 그의 비도덕적 행위에 이은 파멸의 모습과 대비를 이루며 더욱 극적인 효과를 낳는다.그리고 작품의 배경에는 집단 간의 관계가 존재한다.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신이 그것이다. 개인인 오이디푸스와 테배간이 개인과 공동체를 나타내고 오이디푸스의 행동에 대한 신들의 분노로 테배가 위험에 빠지자 결국 오이디푸스는 스스로에 대한 행동에 개인적인 책임을 짐으로써 자신 때문에 공동체가 피해보지 않도록 한다.인간과 신의 관계에 있어서는, 극의 초반부에는 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나타난다. 그러나 인간의 맹목성이 보여지며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신에 대비되어 인간의 무능함이 나타나고, 사회 유지에 있어 신의 힘이 보여진다.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그의 창작극이 아닌 전승되어오던 이야기를 연극의 형태로 재구성 한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그보다 먼저 활동했던 극작가 아이스퀼로스가 사용했던, 비극 3부작에서 3부작 모두가 하나의 소재를 연속해서 다루는 이른바 ‘연속 3부작’이라는 기법을 버리고, 개개의 비극이 그 자체로 완결되도록 했다. 이는 인간 운명의 주역을 신이 아닌 인간으로 보는 그의 인생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을 보더라도 이러한 그의 비극의 개혁을 적극 반영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신에 대한 인간의 한계성이 드러나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 속의 주역은 신이 아닌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또한 이야기가 과거에 일어났던 주인공의 잘못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 흐름이 과거, 현재, 미래 순이 아닌 피드백 형식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오이디푸스 왕’을 토대로 비극의 본질이 기반을 두는 요소들을 네 가지로 생각해보았다.첫 번째 요소는 주인공의 설정에 있다.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 왕은 비범하고 선(善)하며 책임감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테베에 스핑크스가 출몰해 수수께끼를 하나 내어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었는데, 오이디푸스는 이를 지혜롭게 풀어 테배 백성을 구하고 그 나라의 왕이 된, 비범한서 보여지듯 자신의 가족 뿐만 아니라 자신의 백성들을 매우 아끼고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노력하는 극히 선(善)한 왕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이 아닌 그의 아버지가 지은 과오로부터 시작된 신의 저주 때문에 피해를 본 인물로 그려진다. 펠로프 왕의 환대에 오이디푸스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이 펠로프 왕의 아들인 크리스포스 왕자를 꾀어 욕정을 채우는 배반으로 답하였다. 이에 오이디푸스 가문에는 신들의 저주가 내려졌고, 그에 대한 첫 희생자가 오이디푸스가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세대를 잇는 저주는, 고대의 신화 이야기들을 보면 신들이 저주를 내릴 때 죄를 지은 자만이 아니라 그 다음 세대나 그 후의 세대까지도 저주와 벌을 내리는데 ‘오이디푸스 왕’에서도 이러한 점이 적용된 것과 같다. (물론, 오이디푸스가 테배로 가는 삼거리에서 우발적으로 라이오스 왕을 죽인 것은 결코 선한 사람의 모습으로 볼 수 없으나 이것은 극의 전개상 그려진 일이므로 세 번째 요소에서 다룰 것이다. 지금 첫 번째 요소에서는 그의 전반적인 선(善)한 인물 설정을 중심으로 보았다.)또한 오이디푸스 왕은 왕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과오로 인해 타인이 피해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무지에서 비롯된 비도덕적 행위임에도 이에 대한 책임을 지며 스스로를 파멸로 이끈다. 오이디푸스 왕은 인간의 한계로서 눈에 보이는 것만, 자신이 아는 것에만 의존하게 되었기에 보이는 것 뒤에 숨겨진, 자신의 부도덕적 행위를 알지 못한 채 지냈었다. 그러나 사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의 행동이 신들의 분노를 삼으로써 피해를 보고 있는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국 백성들을 위해 더 이상 운명에 대한 반항을 하지 않고 스스로의 눈을 찔러 스스로를 벌하고 테배로부터 떠나면서 백성들을 지키는 책임감을 보였다.이러한 맥락에서 그리스 고대 비극인 ‘오이디푸스 왕’의 경우 역시 여느 전설 등이 의도적으로 두는 것과 같은 비슷한 설정 상황들도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비극적 파멸을 맞는 주인공 역시도 어느 정도 스스로의 결함을 가져야 몰락으로 이어진다. ‘오이디푸스 왕’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신탁의 예언 역시 운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테이레시아스가 예언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그의 부모가 애를 썼지만 결국에는 그 운명과 다시 맞닥뜨리면서 일어난 오이디푸스의 파멸을 곧 ‘운명론적인 파멸’이라고 할 수 있다. 라이오스 왕은 예언을 피하기 위해 목동을 시켜 자신의 아들 오이디푸스를 죽이도록 명했다. 그러나 목동이 오이디푸스를 죽이지 않음으로써 예언을 피하고자 했던 노력이 빗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라이오스 왕과 오이디푸스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테배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데 이때 오이디푸스가 우발적으로 라이오스 왕을 죽이면서 예언의 하나가 사실화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오이디푸스는 하나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테배로 간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고 테배의 백성을 구하면서 왕위에 오르게 된다. 테배로 오는 길에 오이디푸스가 테배의 왕인 라이오스 왕을 살해했기 때문에 마침 테배에는 왕의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이렇게 우연의 일치처럼 점점 예언과 맞아들어가는 모습이 보이는데 예언과 그 비극적 운명을 걸어가고 있는 오이디푸스를 관객들은 알아보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모르는 것으로 설정되어있기 때문에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비극은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더 큰 카타르시스로 돌아온다.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는 주인공이 겪는 어려움과 파멸이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러한 비극적 요소들이 주인공 스스로의 과오가 아닌 외부로부터 받은 피해적인 비극성일 경우 더욱 커진다.운명론적인 파멸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두 번째 예언은 오이디푸스 왕이 테배의 왕이 된 이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자신의 생모인 이오카스테를 왕비이자 아내로 맞고 둘 사이에서 자식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번째 예언도 사실화 되는 동시에 오이디푸스는 또 하나의 비도덕적 행위를 저지채 가는 주인공을 보며 관객들이 더 극적인 연민과 공포를 느끼도록 하는 비극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세 번째 요소는 인간의 한계이다. 주인공은 인간이고 비극적 줄거리에 있어 인간은 신의 관찰과 저주를 받는다. 인간과 신의 관계에 있어 인간은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신보다 한없이 무지하다. 때문에 인간의 한계는 비극에 있어서 주인공이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면서도 그에 대한 자각을 하지 못해 결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도록 하는 장치이자 비극의 본질의 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무지로부터 오는 한계, 맹목성으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은 처절하게 비극적이지 않을 수 없다.결국에는 그에게 정해진 비극적 운명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그의 모습은 비극을 이루는 동시에 관객에게 더 높은 몰입도와 감정이입을 하게 한다. 인간이 가지는 맹목성은 그 어느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고 동감하며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는 것에 공포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인간으로서 한계를 가짐에도 주인공인 오이디푸스는 파멸을 겪는 순간까지도 인간의 위엄과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부당함을 느끼며 신에 대항하거나, 자신만 살기 위해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피해갈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수용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하고, 이를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보여주려” 했던 소포클레스의 주관성이 개입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비극의 본질에 관객의 감정, 특히 카타르시스가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관객의 감정이라 함은, 비극의 과정들을 보며 관객들이 주인공에 대해 느끼는 연민과 공포 그리고 카타르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를 비극의 최종 목적으로 본만큼 나 역시도 카타았다.
영화 감상문[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작가와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사형제도에 대해 내가 고려하지 않았던 다른 여러 관점들, 가해자와 사회적 관점 등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영화이다.본 영화는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비슷한두 남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가난하고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정윤수와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한때 유명 가수였던 문유정. 15살 때 사촌오빠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지만 그 상처를 보듬어주기는커녕 자신에게 죄책감과 수치감을 안겨준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살아가던 문유정과 사랑하는 연인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그 결과 사형수가 된 정윤수를 만나 두사람은‘진짜 이야기’를 터놓는다.영화에서는 사형이 집행되지만 실제 우리나라는 형법 제41조형의종류에법정최고형으로사형을포함시키고는있지만10년 이상 사형 집행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사형 폐지국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011년도 기준으로 전세계의 현황을 보았을 때 95개국의 국가들이 사형제도를 폐지 하였고 우리나라와 같이 제도는 있으나 10년이상 집행을 하지 않은 나라가 35개국, 씻을 수 없는 중범죄일 때만 집행하는 9개국, 법이나 관행으로 사형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가 58개국이 있고, 미성년자에게도 사형을 집행하는 무시무시한 사우디아라비아, 북한 등이 있다.선진국을 중심으로 사형집행이 사라지는 추세이다.나는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와 사형집행에 찬성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형제도에 있어 찬반의견에는 크게 재판 판결의 오류 가능성과 인권이 재기된다. 그러나 나는 무고한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을 만한 중범죄에 연루되어 있을리는 없을거라며혹여나 있다 하더라도 여러 번의 재판을 통해 선고되는만큼‘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억울한 자는 가려지지 않겠냐고 반박했다.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방법은 잘못된 것이라고 들어왔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자에 대해서는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범죄자를 최소한의 인권보장이라는 이유로 비교적 적은 고통으로 사형을 집행한다는 사실이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요즘 사람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들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을 뉴스에서 볼 때마다 그들이 사형선고를 받는다 할지언정 실제로는 국민의 세금으로 감옥에서 평생을 먹고 자며 ‘살아’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분했다. 그 어느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겨울을 나다가 변사체가 되어 발견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보다 범죄자들이 나라의 보살핌을 받으며 더 나은 삶을 사는 것 같아 불공평하다고도 생각했다. 범죄 관련 사건을 간접적으로 듣는 나도 분한 마음이 가득한데 피해자 측 가족과 지인들은 오죽할까 하고 생각했다. 가해자 측과 그 가족 및 지인들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여러 등장인물들을 통해 내 생각이 감정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쳐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되었다.특히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가해자의 상황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본 영화에서 가해자로 등장하는 정윤수의 상황을 살펴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정윤수, 그에게 실제적으로 남은 가족은 없었다. 어머니는 그와 그의 동생을 버렸고 시각장애인이었던 그의 동생은 일찍 죽었다. 그러던 그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고 그 여자는 아이를 가졌다. 여자와 뱃속의 아이는 그에게 남은 마지막 가족이자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 그의 여자와 뱃속의 아이가 모두 위험한 상황에 있을 때 수술비가 없어 살리지 못하는 그의 심정은 세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사람의 심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과 책임감 그리고 절실함은 결국 그를 범죄현장으로 이끌었고 의도치는 않았지만 그는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고 그에 대한 벌은 피할 수 없다. 그렇지만 선택을 달리했다면 그는 충분히 그가 추구하던 삶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성장기에 그를 돌봐줄 가족이 있었더라면 혹은 시설에서 돌봄과 교육을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수술비를 지원받고자 찾아갈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병원이나 기관 혹은 비정부기구에 문의해 긴박한 수술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혹은 누가 알려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더라면 그는 범죄현장에 가담하는 선택보다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법률이 관여하는 단계는 마지막 단계이다. 사회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자율성을 주기 때문이다.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에 수갑을 차고 재판에 서고 판결을 받는다. 이들에게 사형을 집행할 것인지 집행하지 않을 것인지를 논하는 것보다 가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그 전에 소외된 자들을 보호하고 교육의 자리를 만드는데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인권’을 존중하는 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본 영화를 보고 가장 인상 깊게 남는 두 대사 및 장면이 있다.하나는 가해자인 사형수 정윤수를 용서해보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찾아간 피해자 어머니의 대사로 “[출처] Hyperlink "http://blog.naver.com/bosshard/10180954073" 우리나라 사형제도 알아봅시다|작성자 Hyperlink "http://blog.naver.com/bosshard" 오뚜기김사장너를 죽여 내 딸이 살아온다면 너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여 너 대신 사형수가 될 터이지만 그게 아니잖아. 그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용서할게. 아니 마음 깊은 곳에서는 널 용서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노력할게.”라는 부분이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죽인 가해자는 그 이상의 방법으로 죽어 대가를 치러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죽은 사람은 절대 돌아올 수 없다. 가해자를 죽인들 피해자의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피해자가 죽었으니 가해자를 죽인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는데 무엇이 남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살아있는 경우에는 경우에 따라 ‘합의’가 가능하다.그러나 피해자가 죽은 경우 그 권한이 피해자의 가족에게 넘어간다. 통상 ‘합의’는 형사적인 경우가 아니라 민사적인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 맞지만 대략적으로나마 이러한 경우를 대입해보았을 때, 피해자의 어머니가 그를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의 죽음을 원하지 않는데 국가는 무슨 권리로 그의 사형을 집행하는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다른 하나는 문유정이 정윤수의 ‘진짜 이야기’를 들은 후 판사인 그의 오빠에게 정윤수의 사형판결은 부정하지 않되 집행만은 막을 수 없겠냐며 부탁할 때 문유정이 “그럼 나라가 사람을 죽이는건?”이라고 반박한 부분이다. 그녀의 질의에 판사인 오빠는 “죽이는 게 아니라 법 집행이야, 법 집행” 이라는응답을 했다. 가해자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살인이고 나라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닌 집행으로 치부된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매우 모순된 말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본 영화의 피해자 어머니 말대로 가해자를 죽인다고 해서 피해자가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가해자를 죽이는 것은 진정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건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진정으로 피해자를 대신해 가해자의 범죄에 대한 형벌을 주는 것인지, 사형집행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앞으로의 범죄 발생을 막는데 사회적으로 그 어떠한 영향력을 정말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관점에서, 혹여나 재판의 오류로 인해 무고한 자가 사형 집행을 당했는데 집행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된다면그 무고한 자의 희생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 줄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극 중 사형집행관들이 사형 집행 후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중범죄를 지은 사람이 사형수라 할지라도 사람을 죽이는데에 가담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본의 아니게 죄책감에 시달리고 직업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준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많은 이들에게 불행과 슬픔을 안겨주지만 그 가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도 많은 이들에게 불행과 슬픔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사형집행에 대해 정말 다시 숙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사형판결은 내리지만 집행은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출처] Hyperlink "http://blog.naver.com/w87658/10178768094" 범죄자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영화 3탄! |작성자 Hyperlink "http://blog.naver.com/w87658" 김똑똑극중에서 아침을 두려워하던,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정윤수와 문유정은 서로 ‘진짜 이야기’를 하고 들으며 서로를 위로 받고 삶에 대한 의욕을 가진다. 서로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과거만 불쌍하고 불우했던 것은 아니구나 하며 위로를 받는다. 문유정은정윤수를통해서세상을조금이나마용서하고조금이나마따뜻함을얻었으며삶의의욕을찾게되었고,정윤수는문유정을통해서자책만하는형벌에서조금위로를받고삶의의욕을얻게되었다. ‘우리들의행복한시간’으로지칭되던두사람의대화시간이나는그어떠한방법보다영향력있다고생각했다. 삶을포기하고싶어하던두사람을그자신들의대화가두사람모두에게삶의의욕을가져다주었기때문이다. 진정사회에서범죄를막고아름다운세상을만들기위해필요한것은서로의‘진짜이야기’를들어주고공감하며대화를나눌수있는그사소하지만위대한힘을가지고있는‘관심’이담긴진정한시간이아닐까생각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실사례 분석제출일과목명담당교수학과명학번이름서론시대가 변함에 따라 경영의 방식도 변화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요구하는 ‘지속경영’ 방식을 추구한다. 이제 기업은 경제적인 역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경적 측면의 역할까지 맡아야 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이나 기업이 속한 지역 사회 및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기업의 활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업으로 하여금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비용과의 균형을 달성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현시대에 있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기업의 기본적인 목표인 이윤창출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고 그 기본 목표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더욱이 정보·기술이 발전한 세계화시대에 대기업들의 사회적 책임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기에 그렇다. 본문에서는 여러 기업의 실사례를 통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어떻게 작용되었는지와 그 이유를 분석해보고 각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결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본론1996년 초 기포드라는 인기 방송인의 이름을 붙인 제품을 생산하는 데 아동이 고용됐음이 대중매체의 조명을 받았다. 연말에는 파키스탄에서 12세 아동이 나이키 로고가 선명하게 보이는 축구공을 꿰매는 장면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로부터 대략 1년에 걸쳐서 나이키는 각종 시민단체와 대중매체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을 받았다. 나이키가 전문가에 의뢰하여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자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비난의 요지는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베트남 등지에 있는 나이키의 공급업체가 비인도적이라는 것이었다. 어린 아동을 고용하여 2달러 미만의 일당만 주고 10시간 이상씩 일을 시킨다, 작업장에는 독극물이 널려있고 환기시설도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다, 근로자에게 휴식시간도 주지 않는다, 신체적 가혹행위나 성적 핍박의사례1. 나이키의 아동노동 고용1. 나이키의 아동노동 고용 사례사례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나이키 운동화는 한 켤레에 120~150 달러의 가격에 판매된다, 마이클 조던을 모델로 쓰면서 수천만 달러나 주었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상표이미지가 생명인 나이키로서는 잘잘못을 떠나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나이트가 직접 나서서 “모두가 나이키의 잘못”이라고 시인하고 공급업체의 책임성 경영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우선 공급업체마다 행동강령을 만들게 하고, 각 공급업체에 감독관이나 감사관을 주기적으로 파견해 그 실천 여부를 확인하겠다고 했다.그 뒤로 나이키는 ‘착한 기업’이 됐다. 수출업체에 대한 지도와 감독도 점점 더 강화됐다. 나이키는 현지 정부와 제휴하여 미취학 아동을 위한 학교시설도 만들었고, 교육자재도 공급했다. 가정주부에게 소규모 사업자금을 대여하는 미소금융 프로글매도 만들어 운영했다. 그리하여 나이키는 명실 공히 사회책임 경영을 선도하는 기업이 됐다.나이키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또한 디자인과 마케팅을 제외한 모든 것을 아웃소싱에 의존하는 사업모델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본 나이키 사례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거론된 것은 사실상 나이키가 맺고 있었던 수출업체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나 여론은 속사정을 알아보기보다는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는 대기업인 나이키를 상대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물었다. 기업에 대한 시민의 믿음이 높아진 것도 한몫 한다. 현대 시민들은 기업들에게 기업의 이해관계자나 투자자에 대한 의무 이상으로 사회에 대한 책임이 크다는 일반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 물론 투자자에 대한 기업의 의무는 소유주를 위해 이익을 창출하고, 장기적으로는 주주들의 부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또한 기업이 약간의 책임을 져야 하는 사회적 이해관계자들에는 전형적으로 소비자, 종업원, 대부분의 지역사회, 정부, 그리고 자연환경이 들어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개념은 모든 규모의 조직에 적용되지만 대규모 기업들이 보다 많은 힘과 영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더욱이 활발한 논의대상이 되는 것이다. 많은사람들이 관찰하듯 이 힘에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사건은 “세계적 기업은 공급사슬 전반에 걸쳐서 사회책임을 져야 한다” 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본 나이키의 사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소홀하여 피해를 입었지만 그에 대한 적절한 방안을 마련하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지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임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이끌어낸 경우이다. 이후 나이키는 노동자와 그 사회인들에 관련된 환경마련과 지원 이외에도 환경적 책임의 완수에도 각별히 신경쓰는 기업으로 발돋움했다.사례 2. 유한킴벌리의 녹화사업유한킴벌리는 일찍부터 녹화사업을 추진했다. 녹화사업에 인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환경보호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유한킴벌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사회책임을 내세워왔고,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사회가 기업의 책임을 이윤극대화에 그치지만 말고 ‘착한 기업시민’이 될 것을 요구하는 것에 부응하는 과정이자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보디 숍 역시 자발적인 의지로 사회책임을 내세워 온 기업으로 동물실험을 배척함으로써 동물보호라는 대의를 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기업들의 경영진은 사회 혹은 환경에 대한 배려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경영을 한다. 이윤창출도 중요하지만 사회책임도 핵심 가치로 여기고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기업이익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환경 적응적 동기로부터 시작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기업은 장기적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여야 기업의 존속 및 성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급변하는 사회환경이 제기하는 기업과 관련된 사회적 이슈들에 기업들은 능동적인 대처방안으로 해결해 나가야하기 때문이다.유한킴벌리의 본 사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통해 성공적으로 사회 마케팅과 이미지 개선에 성공한 경우를 보여준다. 사회에서 해결해야 하는 많은 문제 중 환경문제는 우리 시대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 중 하나이다. 유한킴벌리는 그 환경문제 해결에 앞장 서는 녹화사업을 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동시에 그들의 브랜드 자산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사례 3. 미국의 스트라우스미국의 스트라우스는 오랫동안 종업원과 지역사회에 성실한 사회공헌을 해온 세계적인 기업으로 유명하다. 이 기업은 1930년대 대공황 시기를 비롯, 여러 위기상황에서도 종업원들을 해고시키지 않았다. 인종차별의 철폐에 앞장섰고, 1990년대에는글로벌기업의선두주자로서노동자의복리후생에눈을돌렸으며,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 국가에서는 사업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말부터 캐주얼 의류시장의 큰 변화로 말미암아 시장점유율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1997년에 미국의 곧장 중에서 3분의 1을 폐쇄한 것을 시작으로 2000년에는 세계 51개 공장 중 30곳을 폐쇄하여 결국에는 전세계에 분포되어 해당 기업에서 종사하는 종업원의 40%에 달하는 1만5천 명을 해고하게 되었다. 그러나 스트라우스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퇴직하는 종업원에게 퇴직수당을 비롯한 경제적 지원금을 제공한 철저한 기업이다.미국의 스트라우스 기업의 본 사례는 과도한 사회적 책임 이행으로 결국 파산에 이른, 사회적 책임과 기업을 추구하다 기본적인 목표인 경제적 책임마저 실패한 경우이다. 본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업계를 리드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윤리적 재무적인 차원에서 건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하버드 대학의 린 폐인 교수의 말에 따르면, “경제적인 이익을 어느 정도 원하느냐, 또는 어떤 윤리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윤리와 경제적 이익 사이의 관계는 달라진다고 한다. 기업의 목표는 ‘지속경영’이며 ‘사회적 책임’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수단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오늘날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라는 개념이 형성되기까지 이에 대한 노동 및 인권, 환경 분야의 국제적인 관심도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전통적인 표준은 제품과 기술 중심의 표준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제사회가 서비스 및 프로세스, 시스템뿐 아니라 사람과 조직의 가치관, 의식, 윤리, 책임, 행동을 표준으로 규정하는 데 합의한 것이다. 이는 표준이 기술 중심 기준을 넘어 국제사회에서 국가, 기업, 조직, 인류의 규범으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사회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이유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첫번째는 세계화이다. 세계화는 상품, 정보, 서비스 자본의 교환이 크게 증가함으로써 생기는 상호의존성 혹은 컨버전스로 인한 복합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전자통신과 정보기술의 발달로 시간과 장소의 한계가 사라졌다. 과거처럼 마을사람들의 입소문에 기업의 비리나 나쁜 행실이 떠도는 시대는 끝났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킹 서비스 등을 통해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것은 그리 보기 어려운 현상이 아니다. 이는 다양한 그룹 및 개인과 조직의 활동에 관한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IT발달은 기업이 전세계로 시장을 확대할 수 있는 ‘장점’이 되는 동시에 악영향도 전세계적인 범위로 받는 ‘위험성’도 가져다 주었다. 따라서 기업은 그들의 평판 및 브랜드 자산을 지키기 위한 ‘리스크 관리’의 필요성이 증가됐다. 리스크 관리는 행동규범과 함께 사회적 책임 활동에 관한 논리를 정당화하는 데 강력한 구성요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