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무제와 황제지배체제의 완성.안정기에 접어들었던 문제와 경제의 시기에 오초 7국의 난을 거치며, 제국 질서에 커다란 위협을 가하던 제후세력의 약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한 무제시기에 중앙집권 체제를 성립할 수 있었던 발판이 경제시기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무제는 실질적은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한 인물로 bc 141년부터 bc 87년까지 54년이라는 긴 시간을 재위한 황제이다. 한 무제는 16세에 처음 즉위하여 수렴청정, 귀족들의 억압 등 많은 압박을 받았지만 친정을 시작하고 나서는 강력한 황제지배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그의 중앙집권화 정책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1-1. 가장 먼저, 그는 황권 강화를 위해 중앙 행정기구를 황제의 전제군주 체제로 전환하였다. 진나라의 최고위직이었던 승상의 권한을 축소하여 황제로부터 소외시키고, 시중·상시·급사중·상서 등을 중용하여 황제의 의지를 대신하게 하였다. 이러한 직위들은 황제의 명령을 실천하는 직위로, 당시 ‘내조’는 실제적인 정책결정의 기구이며 승상이하의 외조는 집행기관으로 전락하여 권한이 약화되었다. 모든 결정권이 황제에게 집중됨으로써, 시황제가 다 이루지 못한 중앙 집권제도가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에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1-2. B.C 106년에 13자사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전국을 13개로 나누어, 지방 통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황제는 감독관을 파견하여 직접적인 통제를 하였고 이로 인해 제후 세력이 약화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 결과 제후왕은 지방에서 아무 권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자신의 지역의 조세만으로 생활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왕이라고 이름하지만, 실제적으로는 힘 없는 군현과 다름이 없었다.1-3. 연호제를 제정하였다. 연호제는 동아시아의 질서를 만드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는데. 무제의 첫 연호는 근원으로 초기에는 6년마다, 후기에는 4년에 한 번씩 개정하여 총 10개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연호를 바꾸는 횟수가 이 시기 이후 줄어들었으며 명나라 주원장 때는 1명의 군주가 1개의 시간으로 규정하는 것이다.1-5. 제후 권력의 약화에 힘썼다.추은령: 아버지(제후)가 죽으면 아들이 상속하던 기존 제도를 바꾸어 제후가 죽으면 제후의 자녀들에게 골고루 상속해서 세력을 분산하게 하였다.주금령: 8월마다 조상제사가 중앙에서 이루어지면 제후가 금을 보태는 제도였는데, 이 때 보내는 금의 양을 보고 빌미를 만들었다.좌관률: 마음대로 제후가 군신관계 맺는 것을 금지 시켰다.부익률: 지방 제후왕이 마음대로 조세 징수 하는 것을 막았다.아당률: 제후왕이 잘못이 있는데 숨겨주면 숨진 죄를 물어 바로 중앙에 고발하게 하였다.이렇게 한 무제는 제후 왕의 세력 확장을 막았다.한 무제는 진과 다르게 ‘유학’을 국학화 하였다. 한무제의 초기 집권기는 완전한 안정기라고 볼 수 없었으며, 한 고조의 사상으로 인해 ‘황로 사상’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로 인해 사회기풍이 무기력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사치와 방종이 유행하였다. 또한 당시 중앙 집권제 실시가 이뤄지며 많은 관료가 등용 되었는데, 관료들의 사고방식이 통일 되어야 황제가 관료를 통제하는 것이 쉬웠다. 거기다 사치와 향락에 빠진 백성의 교화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는데, 이는 백성을 제재하기 위해서는 법률보다는 예법을 이용하는 것이 좀 더 부드럽고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새로운 정치이념이 요구되었고, 사회지도이념으로서 새로운 사상, 한나라 통치에 정당성을 줄 사상이 필요하게 되었다.유학이 사상계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 원인으로는,1.다양한 사상을 포용하고 있는 경전을 소유하고 있어 많은 사람을 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2. 유가는 중용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여 사치와 향락에 빠진 백성들을 교화시킬 사회질서, 인간 윤리 확립에 도움을 준다. 황제의 입장에서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를 다스리는 사상으로 적합했던 것이다.3. 평등과 방임을 주장하던 황로사상 때문에 기강이 문란해지자 황로사상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유교는 ‘예’를 중시하여 있어서도 ‘찰거 제도’를 시행하여 추천제도에 의한 관료 등용을 진행하였다. 찰거제의 항목은 효렴(효행과 청렴), 방정(품행이 바름)이 있었고, 이는 일반 백성들에게 까지 관료 등용의 문을 넓혀주며, 제후세력의 약화를 목적으로 하였다.무제는 현실적으로 법가적 황제지배체제에 유가적 통치이념을 접목시킴으로써 중국의 황제 체제를 정치와 사상면에서 완성 시켰다. 국가의 시작은 무력으로 가능하나, 예악은 문피로 달성된다고 주장한 고조시대의 철학이 무제에 의하여 확인되고 제도적으로 완비된 것이다. 유교와 법가 사이의 균형이 마련되면서 법가에 의하여 파괴된 유가사상이 무제에 이르러 사상계의 권위자로 군림하게 되었다.한무제의 경제정책은 b.c 123년 이후 나타나게 된다. 123년에 시행하기 시작한 이유는, 한 무제는 대외전쟁 때 국고를 거의 모두 고갈하게 되었고, 123년도에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한무제의 경제정책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1. 가장 먼저, bc119년에 상홍양의 건의로 전매제도를 실시하였다. 전매제도에는 국민들의 생필품에 대한 전매가 가장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소금, 철, 술의 전매제를 집중적으로 시행하였다.2. 균수법과 평준법을 시행하여 전국적 물가의 평준화를 이루어내 물가 불균등을 막고 국가의 재정을 확충하였다. 그러나 국가권력에 의한 상업 통제는 상업 활동을 억제시켰고 전매제 실시 또한 상품의 암거래를 조장하여 상인의 폭리를 가져오게 하였다.3. 재산세를 강화하고 고민령을 시행하였다. 당시 농업을 장려하여 상업과 수공업을 억제하였는데,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백성은 세금의 2.5배를 더 내도록 하였다. 또한 고민령을 시행하여 상인 중 누군가가 탈세나 잘못을 했을 때, 관아에 고발하면 죄를 지은 상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절반을 고발자에게 포상하였다. 포상의 금액이 크기 때문에, 고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4. 화페의 통일이 bc 113년에 이루어져 화폐제조를 국가에서 독점하였다 또한 오수전을 발행하여 전국적으로 유포하였다. 오수전은 금화와 유사한 금외원정을 활발하게 하였다. 무제의 흉노토벌은 외교적, 직접적 압박으로 나뉘는데, 군사적 압박이었던 직접적 압박 외에 한나라 장건을 흉노에 의해 쫓겨나야 했던 월시국(서역)에 파견하여 외교적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월시국은 이미 고향을 이동하여 안정적 국가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연합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실질적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는 서역의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농산물 수입을 이뤄내며 중국 농경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서역 파견을 통해 동서 문물, 문화 교류에 긍정적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또한 남방무역의 토대인 남해 9군을 설치하여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정책은 재정을 고갈 시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했다.한 무제는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모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책은 대 다수 유교적인 양상을 보이나 관료등용에 있어서는 법가 주의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표면은 유교, 내재적으로는 법가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 무제는 신선술(방사)에 심취하여 시황제 못지않게 불로장생에 관심이 많았다. 한 무제의 죽음에는 신선술로 인한 수은중독이라는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주나라 정전제와 봉건제1) 정전제주나라의 토지제도는 ‘정전제’로 알려져 있다. 정전제는 토지의 사 경작·영구점령 발생 이전에 생긴 씨족 공동체에서 이용한 제도이다.정전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동네에는 ‘정’이 있는데 이 ‘1정’은 900‘무’이며, 100‘무’는 1‘경’으로 정의한다. 정전제는 땅의 모양이 우물처럼 생겨서 이름 붙여졌으며, 우물 정(井)의 모양처럼 토지가 9조각으로 나눠 경작하게 된다. 9조각, 즉 900무가 1정, 한 조각이 100무인 셈이다.정전제는 그 중간에 공전이 있으며 이 부분이 8가구가 함께 경작하는 공동 경작지이다. 공전을 둘러싸고 있는 나머지 8개의 조각이 사전으로써 8가구가 나눠가지게 된다. 경작시에는 공전을 경작하고 난 후 사전을 경작해야 하며, 이에 대한 내용은 [시경]에 있다.정전제의 실시 이유에 있어서, 전정제의 주요 개념인 토지를 균등하게 소유한다는 사고방식은 국가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왕토사상과 결합하여 차별 없이 공평하게 나눈 토지의 농산물을 바탕으로 공평하게 세금을 징수하려고 실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의견이다.정전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서, 시경, 맹자 등에 수록 되어있다.정전제에 대한 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정전제 실시는 가설이다. 라는 주장이 있는데, 정전제가 옛날에 의탁해 제도를 개혁한 것이라 보는 입장이다. 춘추까지는 토지 사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맹자 시기는 토지 사유화가 이루어져 대토지를 나누고자 했다. 고정된 재산이 없으면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 주장에 대해 권위를 세우려면 과거 현인의 주장을 인용해야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옛날 정치 제도에 탁해 현재 토지제도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이상에 불과한 토지제도라고 비판하는 것이다.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정전제가 실제 존재했으며, 실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정전제란 전지가 일정하게 나눠져 가구마다 분배되는 제도로,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경작권의 의미로써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되어 진다. 서주시대는 개인적 소유가 불가능한 시대였으며, 공동체 생활에서 씨족장을 통해 공납과 노역의 의무를 집단적으로 수행했다. 정전제는 공전의 경작을 통해 노동력과 작물을 제공하며 국가에 세금을 바쳤다.이를 근거로 하여 정전제도는 노동을 지대로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최근에는 춘추시대 이전의 촌락 사회의 토지 분급과 수취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2) 봉건제(1) 통지체제로서의 봉건제 (정치적측면)통지체제로서의 봉건제를 통해 정치적으로 봉건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봉건제는 무왕이 일찍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 했을 때 성왕 대신 7년간 섭정했던 주공이 설립했다. 주공의 봉건제는 정복한 상 지역에 일족과 공신을 파견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으며,
진의 통일 정책과 한반도에게 주는 시사점, 의의.진나라의 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은 여러 가지 작용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있었던 상앙의 변법과 부국강병과 시황제라는 뛰어난 지도자의 등장이 직접적 배경이 되었지만 전국시대에 형성된 통일론과 일반 백성들의 통일 욕구 역시 큰 작용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백성들은 경제,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굉장한 손해를 보고 있었고 잦은 전쟁으로 많은 문제점을 직접적으로 겪어내고 있었다. 이러한 국민적 열기가 있었기 때문에 ‘진’의 통일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통일된 진을 분열 없이 이끌고 가기 위한 시황제의 통일 정책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가장 먼저 시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기 위해 황제 칭호를 비롯한 각종 제도를 마련했다.1. 통일 전 분열된 국가에는 각 나라마다 ‘왕’이라는 호칭이 있었다. 하지만 시황제는 여기서 한 단계 발전 하여 ‘황제’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황: 태양처럼 비춘다, 온 천하를 비춘다./ 제: 천제- 자연계와 인간계를 지배한 최고의 신, 현생에서 초월적 존재. 상나라는 왕의 조상)-공과오제, 덕겸삼황/ 시황제는 다양한 용어를 사용했다(자신을 지칭하는)1-1. 시호를 없애고 세제를 사용했다. 시호란 특정인물이 죽고 나면 그 사람의 업적을 평가하여 두 글자의 시호를 지어주는 제도였는데, 시황제는 이 제도를 없애고 세제를 사용하여 처음 시 자를 써서 ‘시’황제, 그 이후는 1세, 2세, 3세로 표현하도록 했다.1-2. 황제 국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만세’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스스로 황제국가임을 드높이려고 했다.1-3. 옥새 제도: 6새의 옥새를 사용했으며,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주나라의 ‘정(솥)’처럼 상징물을 사용했다. 옥새라는 상징물이 가지는 의미는 대권계승자로서 황제 정통성, 천명을 받드는 천자, 정치수장임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시황제의 세제는 3세에서 끝났지만 정책적 변화와 제도(황제 호칭)은 청나라 까지 사용되어 그렇게 외치던 만세, 실제 만년은 아니지만 굉장히 오래 갔다.통일 정책 두 번째, 중앙 집권 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군현제도를 시행했다. 진나라는 6국을 흡수한 후에 36개로 나뉘었다. 이 당시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시황제에게 당시 고위 관료는 800년을 이어가게 했던 봉건제를 추천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만세’를 꿈꾸던 시황제는 봉건제에 만족하지 못하였고, 이 때 ‘이사’라는 관료가 강력한 중앙 집권제도인 군현제를 제안했다. 시황제는 이를 수용하여 현 복권지역과 남쪽 지역을 점령한 후 42개의 군현으로 나누어서 통치하였다. 전국을 군현으로 나눈 시황제는 장관인 군수와 현령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통치하였으며, 지방관의 임명권은 모두 황제에게 있었으므로 관료들은 황제의 수족처럼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관료구조 역시 진나라의 황제체제를 유지하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 짜여졌다.중앙집권체제는 춘추말기부터 등장하였으며 전국시대에 정착기를 거쳐, 시황제 때 전국적 보급을 이루었다. 시황제는 씨족이나 공동체의 장이 중간에 끼어있지 않은 강력한 중앙 집권화와 군현제를 이용하여 황제의 말이 말단까지 이어지게 하였고, 군현제를 통해 인신적 지배를 가능케 하였다. 모든 백성이 국법에 따라 개별적 인신지배를 받게 되어 황제 지배체제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군현제를 통해 황제의 ‘직접적’ 통치를 이뤄냈다.통일 정책 세 번째, 경제·사회·문화적인 통일 정책을 시행했다.3-1. 가장 먼저, 각국의 ‘어(語)’를 통일하였다. 이로써 활자보급도 수월해졌고, 국가가 다르면 읽을 수 없었던 책도 한 문자로 보급이 가능해졌다. 현재도 중국의 말은 통일이 되어 있지 않지만, 진나라 당시 전 중국의 문자를 통일해주었기 때문에 ‘어’는 모두 통일 되었다. 이는 굉장히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3-2. 도량형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사물 측량 시 이루어지는 무게, 부피, 길이 측정에서 사용되는 도량형을 진나라 도량형 기준으로 통일하였다.3-3. 화폐를 통일하여 경제활동을 수월하게 하였다.3-4. 차궤와 수레 폭을 통일하여 수월한 이동이 이루어지게 하였으며, 장거리 이동이 좀 더 수월해졌을 뿐만 아니라 차궤를 통일함으로써 수리도 용이해졌다.통일 정책 네 번째, 6국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6국의 수도에서 생활하던 부호, 구 귀족 등을 12만호를 수도인 함양으로 강제 이주 시켰다. 이는 시황제의 두가지 의도를 볼 수 있는데,4-1. 6국에 잔존한 구 귀족과 부호들의 세력을 약화시켜 반란을 방지하는 것이다. 고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되면 토착세력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세력이 약화되며, 이는 반란 가능성을 줄이게 된다.4-2. 부호와 구 귀족들은 경제력을 모두 가지고 수도 함양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모든 재화가 함양으로 모이게 된다. 변두리 수도였던 함양의 수도 기반을 탄탄하게 하며, 인구와 재화가 풍부하게 채워지기 때문에 안정적인 수도로써 수도의 굳건함을 다질 수 있다.다섯 번째, 시황제는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를 진행했다. 시황제는 법가주의로 진을 다스리고자 했으며 자신의 신적요소를 드높이기 위해 민간 신앙을 이용해 백성이 황제를 ‘신격화’하게 하였다.시황제의 강력한 법가 주의적 통일정책은 법가를 제외한 나머지 사상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고, 그 중 유교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이에 ‘분서갱유’를 진행하게 되며 황제의 권위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생뿐만 아니라 방수사 또한 핍박받았다고 나와 있는데, 불로장생을 위해 방수사를 가까이했던 시황제가 아무 효과가 없어 그에 따른 배신감에 방수사 역시 핍박하였다고 한다.여섯 번째, 시황제는 다양한 대형 토목공사를 진행했다. 대형 건축물을 통해 스스로의 위엄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만리장성, 아방궁 등을 건축하면서 많은 노동력을 징발했던 문제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이 외에도 음양가의 오덕존시설을 받아들여, 정치철학에 반영함으로써 진이 주나라를 계승했다는 정통성을 내세우기도 했으며, 연좌제를 사용해 많은 사람들을 통제하기도 했다.이후 진나라는 진승 오광의 난, 절대권자의 사망, 군현제의 허점, 민심이 떠나는 등의 이유로 멸망을 맞이했지만, 소수의 민족까지 통일한 최초의 통일제국이며, 전국적으로 군현제를 확대한 황제지배체제의 확립을 보여주었다. 이는 국가통치방법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중국 역사에서 꾸준히 수용되었다. 또한 현재 중국 영토의 결정 시기라는 것에도 의의가 있다.우리는 시황제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하고 있지만, 유달리 시황제에게만 폭정, 사치라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짧은 수명(기록 생성 시간 없음. 조조, 수양제 등) 의 이유로 불공평한 잣대로 시황제를 평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표면적인 기록 평가로 평가하는 것은 오류가 될 수 있으며 잘못된 평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자.15년을 이을 수 있었던 힘은 시황제는 훌륭한 지도자이자 통치자이며, 뛰어난 전제군주였기 때문이다. 봉건제-군현제 발전-한나라 400년-현재 중국을 만들어 냈고, 역사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시사 하는 점.- 현재 민심이 정부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 한반도를 위해 펼쳐 나가야할 통일 정책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음.- 통일정책은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전국시대 6국을 무너뜨리고, 진은 마침내 천하를 얻었지만, 당시 많은 통일에 따른 혼란이 있었다. 진시황이 비록 천하를 얻었지만, 통일된 진의 내부에는 아직 6국의 부활을 꿈꾸는 귀족이나 계층이 있을 것이며, 또한 외부적으로 흉노의 압박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황제는 이러한 난관을 어떻게 해쳐 나갔을까? 우리가 배운 정책을 통해서 보면 그가 많은 고민 속에서 정책을 진행 해왔다고 보는 것은 어떨까?분열의 시대를 거치면서, 통일 되었을 때에 통일된 문자가 없었고, 통일된 행정체계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문제를 비롯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 시황제는 이러한 문제들을 느끼고, 해결하고, 강력한 국가 건설을 꿈꾸게 되었다.진나라의 시(始)황제는 이름에서부터 시작을 담고 있듯이 고대 중국에서 처음으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또한 각각의 나라로 분리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역사적 업적을 세웠다. ?진시황의 통일정책은 국가의 통일뿐만 아니라 문자의 통일, 도량형의 통일, 바퀴 폭의 통일로 이어진다.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했을 당시에는 각각 분리되어 있었던 나라마다 글자의 형태가 달랐다. 물론 그 근본은 은나라의 갑골문자에서 나온 것이지만 지역에 따라 제각기 다른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문자의 형태를 진시황이 천하의 문자로 진나라의 글자형태를 채택하여 나머지 문자들은 폐지시켰다. 문자통일정책은 같은 문자가 전국에서 사용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통일정책으로서 문자를 정리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이로써 진시황은 단순히 국토만 통일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다. 문자가 우선적으로 통일되면, 음성은 서로가 다르지만 우선 글자로서 뜻이 통하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들을 시행하기가 한결 수월해진다.국토와 문자의 통일을 이룬 진시황은 도량형을 통일하였는데 당시의 중국 전역에서는 곡식의 양을 재는 단위와 길이를 재는 단위 등이 약간씩 달랐다고 한다. 그래서 진시황은 ‘흡’이라는 표준 용기를 제작하였다. 화폐의 경우 또한 진나라의 화폐를 전국적으로 통용시켰다. 국토와 문자와 화폐의 통일로 비로소 진나라는 하나가 될 수 있었다.또한 진시황은 바퀴의 폭을 통일하였는데 진나라 이전의 춘추전국이 통일되기 전, 대륙 각국은 다른 나라의 수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바퀴의 폭을 제각기 달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적의 침입을 막았던 것인데 진시황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었으므로 더 이상 적의 침입을 고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진시황은 바퀴자국의 차이가 이제는 전국의 교통흐름을 저해시킨다고 여겨서 전국에 도로를 만들고 바퀴의 폭을 통일시킨 것이다.
주나라 정전제와 봉건제1) 정전제주나라의 토지제도는 ‘정전제’로 알려져 있다. 정전제는 토지의 사 경작·영구점령 발생 이전에 생긴 씨족 공동체에서 이용한 제도이다.정전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동네에는 ‘정’이 있는데 이 ‘1정’은 900‘무’이며, 100‘무’는 1‘경’으로 정의한다. 정전제는 땅의 모양이 우물처럼 생겨서 이름 붙여졌으며, 우물 정(井)의 모양처럼 토지가 9조각으로 나눠 경작하게 된다. 9조각, 즉 900무가 1정, 한 조각이 100무인 셈이다.정전제의 특징,1-1. 정전제는 전지를 일정한 단위로 나누어 각 가구에 분배한다.1-2. 공전과 사전은 사유 재산 개념이 아니라 경작권의 개념이1-3. 정전제의 토지는 공전과 사전으로 나뉘는데, 땅의 중간에 공전이 있으며 이 부분이 8가구가 함께 경작하는 공동 경작지이다. 공전을 둘러싸고 있는 나머지 8개의 조각이 사전으로써 8가구가 나눠가지게 된다. 경작 시에는 공전을 경작하고 난 후 사전을 경작해야 하며, 이에 대한 내용은 [시경]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데, 공전에 먼저 내리고 충분히 적신 후에 사전에 내린다.” 이는 비가 함께 내리더라도 공전의 일을 먼저 하게 되니, 공전에 먼저 내린 것처럼 생각했다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1-4. 공전은 공동 경작을 통해 생산물을 납부하는 일종의 노역지대이다.1-5. 전지 내 크고 작은 수로가 있다.1-6. 토지의 비옥도를 고려한 휴경윤작법에 따라 토지를 지급할 때에 토지의 양을 차등 지급한다. (1가구당 꼭 100무가 지급 된 것은 아니다.)1-7. 일정 기간이 지나면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재분배한다.1-8. 토지의 배급이 어려워지자 토지 소유자의 일정 연령을 기준으로 토지를 회수한다.1-9. 농사철 농지 근처에 ‘여’라는 움막을 짓고 살며, 생활 동한기에는 읍에 거주한다. 계절에 따른 거주지 변화가 존재했다.정전제의 실시 이유에 있어서, 정전제의 토지를 균등하게 소유한다는 사고방식은 국가가 토지를 소유한다는 왕토사상과 결합하여 차별 없이 나눈 공전의 농산물을 바탕으로 공평하게 세금을 징수하려고 실시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개인적인 의견이다.정전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서, 시경, 맹자 등에 수록 되어있다.정전제에 대한 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정전제 실시는 가설이다. 라는 주장이 있는데, 정전제가 옛날에 의탁해 제도를 개혁한 것이라 보는 입장이다. 춘추까지는 토지 사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맹자 시기는 토지 사유화가 이루어져 대토지를 나누고자 했다. 고정된 재산이 없으면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나누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그 주장에 대해 권위를 세우려면 과거 현인의 주장을 인용해야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옛날 정치 제도에 탁해 현재 토지제도를 바꾸자고 주장하는 이상에 불과한 토지제도라고 비판하는 것이다.하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정전제가 실제 존재했으며, 실행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정전제란 전지가 일정하게 나눠져 가구마다 분배되는 제도로,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경작권의 의미로써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되어 진다. 서주시대는 개인적 소유가 불가능한 시대였으며, 공동체 생활에서 씨족장을 통해 공납과 노역의 의무를 집단적으로 수행했다. 정전제는 공전의 경작을 통해 노동력과 작물을 제공하며 국가에 세금을 바쳤다. 이를 근거로 하여 정전제도는 노동을 지대로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최근에는 춘추시대 이전의 촌락 사회의 토지 분급과 수취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2) 봉건제(1) 통지체제로서의 봉건제 (정치적 측면)통지체제로서의 봉건제를 통해 정치적으로 봉건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봉건제는 무왕이 일찍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 했을 때 성왕 대신 7년간 섭정했던 주공이 설립했다. 주공의 봉건제는 정복한 상 지역에 일족과 공신을 파견하는 ‘감시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으며, 감시자로 파견한 주공의 형제들의 난으로 잠시 혼란이 초래되기도 했다.상나라 때부터 봉건제가 있었다고 하지만, 주나라와의 차이를 보인다. 주나라의 봉건제는 상나라 후기부터 확대되어 온 것이며, 그 차이를 살펴보자.1. 상나라의 봉건제는 수도 주위에 동성 제후를 세우고 먼 나라를 이성제후에게 맡겼다.2. 그러나 주나라는 주로 수도지만 먼 지역, 특히 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주요한 지역에 혈연이나 주요인물을 세웠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제나라의 강태공이 있다. 이는 주 왕실이 은-주 교체의 정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려는데 그 정치적 목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좌전]에는 무왕이 상을 정벌한 후, 형제 150명에게 나라를 세워줬고 희씨 혈족 30명의 나라 설립을 도왔다는 기록, [순자] 유효편에는 2/3이 동성제후, 1/3이 이성제후라는 기록이 있어 주나라 봉건제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제후의 구성에 대해서 알 수 있다.주는 상나라 사람들이 주에 반기를 들지 않는다는 전제하여 동성귀족과 이성귀족의 권력유지를 인정하였다. 상나라 사람들을 씨족별로 나눠서 분봉시켜 주었으며 상족들을 나누어 각 제후국으로 분배하기도 했다. 그 예로 노나라의 주공 단, 주공의 장자 백금의 예가 있다.수많은 제후국에서도 이성 제후국이었던 제나라는 다양한 특권을 가지고 있기도 했는데, 그 특권이란 다양한 이민족을 지배할 수 있는 특권과 왕실을 대신해 역심을 품은 제후국을 정벌할 수 있는 권리였다.또한 제후국에는 다양한 세력이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동이족이 있다. 동이족은 하남성, 노나라, 제나라 등으로 분산 분배하여 주 족에 대한 반발을 감소 시켰다. 이 외에도 주나라의 제 2 수도인 ‘낙양’에 부호를 보내 새 수도를 부흥하게 하고 상 부흥 운동을 저지하는 효과를 내기도 했다.뿐만 아니라 지방 제후의 일족을 중앙에 머물게 하고 관직에 임용함으로써 지방 제후의 통제를 쉽게 하였다. 또 제후의 감시와 통제를 위하여 지방에 감시관을 배치하는 감국제도는 강력한 제후 통제기구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제후를 통치하고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는 방법으로는 조공제도를 실시하여 중앙과 지방간의 군신관계를 확인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공 이외에 천자가 직접 지방의 제후국을 순수함으로써 천자의 권위를 지방에 확산시키고 제후의 정치를 직접 살피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고려시대의 혼인제도(婚姻制度)에 대하여1. 여는 말2. 고려시대의 연애와 결혼3. 다양한 혼인의 형태4. 혼인 풍속과 혼인 의례5. 사랑과 전쟁, 간통6. 새로운 시작, 이혼과 재혼7. 맺는 말8. 참고문헌1, 여는 말어느 시대에나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며 때로 일탈하고 헤어지는데 구체적인 모습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지금의 모습과도 많이 달랐던 500년 왕조의 고려, 그만의 특별함을 가지고 있었던 고려시대에는 남녀가 어떻게 연애하고 결혼했는지, 또한 일탈의 양상과 그에 대한 제재는 어떠했는지, 헤어지는 모습 및 다른 이성과 재결합하는 모습은 어떠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2. 고려시대의 연애와 결혼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했을까?옛 문헌인 『송사』 고려전은 고려의 풍습에 대해 “남녀가 스스로 부부가 되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며, 여름철에 한 시냇물에서 함께 목욕하며, 부인(婦人)과 승니(僧尼)는 모두 남자처럼 절한다.”라고 소개했다.이와 비슷한 기록을 또 찾아볼 수 있는데, 고려에 사신으로 왔었던 송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많은 남녀들이 흐르는 시냇물에 몰려들어 구별 없이 의관을 벗어 냇가에 두고는 섞여서 목욕하고 수영하면서 몸을 드러내지만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또한 “부인과 승니는 모두 남자처럼 절하는데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라고 서술했다.이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남녀가 스스로 부부가 되는 연애결혼을 할 수 있었다. 남녀가 옷을 벗고 알몸인 채로 한 시냇물에서 함께 목욕하며 헤엄쳤으니 그만큼 남녀가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것인데,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정신적·육체적 사랑이 싹트게 되며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다. 남녀가, 특히 여성이 몸을 드러낸다는 것은 자유연애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부인이 남자처럼 인사하는 풍습도 여성들의 위상이 높았음과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했음을 시사한다.고려사회에서 연애결혼·소개결혼·중매결혼 중에 어느 쪽의 비중이 더 높았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기록에는 어떤 과정으다. 즉, 고려 법에 부모 중 한 쪽이 천인이면 자식이 천인이 되므로, 주인들은 자기 종과 양인을 혼인 시켜 재산의 증식을 꾀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국가로서는 국역(國役)울 담당할 양인의 수가 줄어들게 되므로 양천혼 금지법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고려의 천인에 대한 규제는 굉장히 엄격했으며, 심지어 왕의 자손도 어미가 천인 출신 궁인일 경우에는 제재를 가해 남자는 소군(小君)이라 하여 승려로 만들고, 딸은 양반과 혼인하되 남편과 자식의 벼슬 종류나 승진에 제한을 두었다. 예컨대 고종 때의 관리 손변(孫?)은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처가가 왕실의 서족(庶族)이기 때문에 요직에 임용될 수 없었다. 그의 처는 남편에게 자신을 버리고 세족(世族)가문에 재취(再娶)하라 했으나 손변은 따르지 않았고 이에 아들도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양천간의 혼인이 규제되었다지만, 사실 혼인할 대상은 이보다도 훨씬 좁았다. 고려의 신분은 크게 양천으로 나뉘나, 양인 내에서도 귀족·중인·일반 양인 등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실제 혼인의 범위는 굉장히 세분화되어있었다. 특히 귀족의 경우에는 자신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소수가문은 중첩된 결혼을 통해 음서(蔭敍)나 공음전시(功蔭田柴)같은 귀족적 특권을 친가와 외가 모두에서 전승받았다.이 외에도 당사자의 됨됨이도 중요했는데, 간혹 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자가 과거에 합격한 뒤 귀족의 사위가 되어 사회의 최상층에 진입하는 경우도 생겼다. 귀족들은 능력 있는 인재를 사위로 삼아 가문의 성세를 더하려 했고, 가난한 천재들은 처가의 배경이 자신과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분제 사회이면서도 고대의 골품제와 달리 개방성을 띠었던 고려시대에 혼인은 특권을 유지하는 수단이면서 신분상승의 도구이기도 했던 것이다.고려 왕실의 혼인 특징 중 하나였던 근친혼은 일반인 사이에서도 나타났는데, 특히 귀족계층에서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근친혼은 고려 후기로 가면서 점차 규제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예교(, 이들 나라로부터의 귀화인도 많았다. 광종은 이들을 우대하여 관료로 등용하기도 했으며, 한인들은 외교·통역·무역 등의 여러 가지 분야에서 활약해 고려 전기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송나라와 고려의 무역도 굉장히 활발했으며, 송나라 상인을 따라 아라비아나 남양(南洋) 여러 나라의 상인들까지 고려에 와서 상행위를 했다. 이에 고려의 무역항 벽란도는 크게 붐볐고, 『고려사』 「악지」에 나오는 작품 ‘예성강곡’의 유래에서 보듯 중국 상인과 고려 여인이 혼인도 했음을 알 수 있다.거란과 여진의 경우에는 귀화 후 특수행정구역 등에 모여 살며, 이들 거란인·여진인과 고려인 간의 통혼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이처럼 고려 전기에는 후삼국 및 발해인과의 통혼을 통해 실질적인 민족 통합을 이루고 한인과 거란인·여진인의 귀화 및 이들과의 혼인을 통해 한층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국제혼은 원 간섭기에 들어와 한층 빈번해졌다. 원나라와 강화를 맺은 뒤 왕은 원나라 공주를 제1비로 맞이해야 했으며, 원나라에 공녀도 바쳐야 했다. 양국의 인적교류가 늘어날수록 국제혼도 늘어날 수밖에 없었으며, 원나라가 세계 대제국을 건설함에 따라 국제 무역이 한층 발달하고 고려에 드나드는 외국 상인의 수도 더욱 많아져 이들과의 혼인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공녀 징발은 고려의 혼인제도와 여성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딸을 공녀로 보내지 않기 위해 빨리 혼인을 시켰는데, 이것이 바로 조혼(早婚)의 성행을 불러왔다. 다음의 사료를 통해 조혼 풍습을 살펴보자.이달에 탈타아(脫朶兒)가 제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구하는데 대신의 가문에서만 구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딸을 가진 자들은 두려워서 서로 앞을 다투어 사위를 맞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대신의 집 가운데 두세 집을 적어 주어 탈타아 자신이 간택하게 하였다. 탈타아가 얼굴이 고운 자를 가린 결과 김련(金鍊)의 딸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는데 그 집에서는 이미 사위를 데리고 있었으며, 그 사위는 두려워서 집을 나가 버렸다.……었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딸도 아들 못지않은 소인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녀 차별도 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호적에도 아들·딸 구분 없이 순서대로 기재했으며 여자가 호주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또한 고려 남녀의 결혼 생활에 있어 당시의 도덕과 법률을 어기면 제재가 가해졌다. 형의 처 및 남편의 제매(弟妹)를 구타한 경우 손발은 곤장 70대, 머리카락을 뽑은 것 이상은 곤장 90대, 이빨 하나 이상을 부러뜨리면 도형 1년 반, 두 개 이상이면 2년 등의 형이 가해졌다.남편이 처를 구타하여 상해를 입힌 경우는 곤장 80대, 사지를 부러뜨리면 도형 2년, 죽게 하면 교형, 과실로 죽이면 논하지 않았다. 처가 첩을 구타한 경우도 남편이 처를 구타한 경우와 같았다. 처부모(妻父母)룰 구타한 경우 십악(十惡)의 불목(不睦)에 준하여 논하였다. 여성의 경우는 남편의 형제자매들을 구타하면 그 정도에 따라 처벌받았으며, 남편의 부모나 조부모를 구타하는 경우에는 정도에 상관없이 죽임을 당했다.이 조항들이 언제 만들어졌고 실제로 지켜졌는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측면이 있지만 여성도 가정폭력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2) 혼인 의례: 혼인의 절차와 혼수품혼인 의례에 대한 기록은 왕실을 제외하고는 찾기가 쉽지 않다. 『고려사』 「예지」에는 왕실의 혼인 의례가 실려 있는데, 절차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우선 혼인의 대상이 결정되면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고(납채), 혼인 날짜를 정해(택일) 사신을 보내 알린다. 태묘에도 왕태자가 혼인하게 되었음을 고한다. 신부 집에서는 혼서(婚書)를 받은 뒤 사례하는 표를 올린다. 조선 시대처럼 나라 전체에 금혼령을 내리고 대대적으로 간택하지 않고, 적당한 인물을 물색해 결정한 것 같다. 신부 집에 혼인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납폐(納幣)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선왕이 세자 시절 진왕(晉王)의 딸 보탑실련 공주와 혼인할 때 황제와 태후, 진왕에게 각각 백마 81필씩을 폐백으로 바폈다. 우 노비 사이, 승려와 무속인 등 평상시 가까이 접촉할 수 있는 범주의 인물이 대부분이었다.가장 기본적인 간통은 배우자가 있음에도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는 것이며, 상중이거나 부모·조부모가 감옥에 갇혔을 때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해도 간통이 성립했다. 또한, 배우자가 사망한지 100일이 넘지 않은 자와 연애하면 간통죄가 성립하기도 했다. 당시는 불교식으로 대개 백일상을 지냈으므로 백일이 간통죄 성립에서 주요요건이었을 것이다. 우왕 때 원 씨는 세가의 여자로서 남편이 사망한지 1년이 안되어 황상(黃裳)과 결혼 했다가 헌사(憲司)의 탄핵을 받아 유배당했다. 시기와 신분과 분위기에 따라 근신기간이 달라질 수 있지만 고려 여성은 남편이 사망한지 최소 1백일 안에, 최대 1년 안에 재혼하면 간통죄가 성립할 수 있었다.이 중에 주목할 것은 친족 사이에 유교적 규범이나 인륜의 도를 넘어서는 간통 사례가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문종 때의 사람인 이공(李?)은 형의 딸을 간음해 딸을 낳았으며 원종 때의 장군 주선(周瑄)은 숙부의 처 대씨와 간통하였다. 심숙공의 처는 사위와 간통해 아들을 낳았으며, 아버지의 첩을 사통하거나 아내의 전 남편의 딸을 범한 사례도 다수 나타난다.이와 같은 근친관계의 관통에 관련한 고려의 법은 어땠을까? 『고려사』 형법지에 의하면, 부조(父祖)의 처, 백숙모(伯叔母), 고종자매, 자손(子孫)의 아내, 형제의 딸을 간통하면 화간(和姦)은 교살(絞殺)하고, 부조의 행비(幸婢)를 간통하면 두 등급을 감형했다. 부조의 첩이나 행비, 백숙모, 자손의 아내와 성적인 관계를 맺으면 당연히 간통죄가 성립했다. 고종자매는 4총, 형제의 딸은 조카에 해당하는데 이들과의 성적인 관계가 간통으로 정의되었다. 왕실을 제외하고 4촌내의 근친혼은 확실하게 간통죄로 자리 잡았고 5촌이 추가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6촌은 때에 따라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별 문제는 되지 않았던 것 같다.이러한 일들은 남성 쪽에서 유혹한 사례가 많았지만, 여성도 쉽게 동조하거나 능동적인 경우도 있다.
역사과 교수·학습 지도안수업 일시수업 대상2학년 4반수업 장소2학년 4반 교실차 례Ⅰ. 역사과 교육과정 개관 ---------------------------------------------- 31. 역사교육 2009 개정교육과정 -------------------------------------- 32. 역사과의 목표 ------------------------------------------------------ 33. 역사과 내용과 영역의 기준 ---------------------------------------- 44. 역사과 교수·학습 방법----------------------------------------------- 65. 역사과 평가 -------------------------------------------------------- 10Ⅱ. 교재 및 단원의 개관 ------------------------------------------------121. 교과서 및 단원명 ---------------------------------------------------122. 단원의 개관 --------------------------------------------------------3. 단원 설정의 이유 -------------------------------------------------- 124. 대단원 학습 목표 --------------------------------------------------5. 중단원 학습 목표 --------------------------------------------------6. 단원 지도상의 유의점 ---------------------------------------------7. 단원 설정 및 지도계획--------------------------------------------- 14Ⅲ. 본시 교수·학습 과정안 -----------------------------------------7Ⅳ 산업화제국주의 침략과 민족 운동? 제국주의와 식민 지배? 아시아의 민족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민족 운동과 근대 국가 수립현대 세계의 변화? 제1, 2차 세계 대전과 평화를 위한 노력?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변화? 대중 사회? 세계화나. 영역 및 학습 내용 성취 기준(1) 역사와 인간세계사 학습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전 지구적 관점에서 역사 학습의 필요성과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파악하고 가능한 해법을 모색한다.㈎ 인류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인류가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어 가는 흐름임을 파악한다.㈏ 세계사 학습을 통하여 현대 세계 인류가 당면한 다양한 문제의 근원과 가능한 해법을 탐구한다.(2) 문명의 성립과 통일 제국인류의 출현 이후 각 지역에서 문명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을 다룬다. 각 지역 세계에서 통일 제국이 형성되고 주요 종교가 발달하는 과정을 이해한다.㈎ 유라시아 대륙 각 지역에서 최초의 문명이 형성되고 도시 국가가 출현하는 과정을 비교한다.㈏ 각 지역 세계에서 진·한, 마우리아와 쿠샨, 페르시아, 로마 등의 통일 제국이 형성되어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한다.㈐ 각 지역의 통일 제국에서 유교·불교·조로아스터교·크리스트교 등의 종교가 출현하여 전파되는 과정을 탐구한다.(3) 지역 세계의 재편과 성장각 지역 세계에서 발전과 교류가 확대되는 과정을 다룬다. 인구 이동 및 주요 종교의 확산을 바탕으로 지역 세계가 재편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어 경제 발전과 교류의 활성화 등에 기반하여 지역 세계가 성장하는 모습을 탐구한다.㈎ 인구 이동과 전쟁, 주요 종교의 확산 등을 계기로 동아시아, 인도, 이슬람, 유럽 세계가 재편되고 성장하는 과정을 이해한다.㈏ 비유라시아 세계(아프리카, 아메리카 및 오세아니아 등)의 지역 문화 발달을 이해한다.㈐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각 지역 세계 간의 교류가 활성화되는 모습을 파악한다.(4) 지역 세계의 통합과 세계적 교역망15세기를 전후하여 각 지역 세계에서 독자적인 문화가 발달하고 지역이 통합구 학습법, 현장 학습법, 개별화 학습법, 정보 통신 기술(ICT) 활용 학습법, 가치 탐구 학습법, 토의·토론식 교수법, 협동 학습법 등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을 활용하되, 특히 다음 사항에 유의한다.① 극화 학습, 제작 학습, 추체험 학습 등을 통해 역사 학습에 대한 학습자의 적극적 참여와 내적 동기를 유발한다. 다양한 사료 및 사진 자료, 도표, 연표와 역사 지도, 각종 멀티미디어 자료 등을 적극 활용하여 생동감 있고 재미있는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하며, 학생들의 탐구 능력을 기르도록 한다.② 학습 내용에 따라 개념 학습, 사료 학습, 주제 학습, 인물 학습, 탐구 학습, 토론 학습, 정보 통신 기술(ICT) 활용 학습, 협동 학습, 문제 중심 학습, 프로젝트 학습 등 다양한 교수·학습 모형을 활용하고, 학생들의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위해 토론, 발표, 논술, 조사, 사례 연구 등 다양한 참여 활동을 연계하여 지도한다.③ 정보화 사회에 요구되는 정보 처리 능력과 활용 능력 신장을 위해 신문 활용 교육(NIE), 인터넷 활용 교육(IIE), 영화 활용 교육(MIE), 이러닝(E-Learning) 교육, 블렌디드 러닝(Blended Learning) 방법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창의적인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④ 교사와 학습자, 학습자와 학습자 간의 적극적인 상호 작용을 강조하여 학습의 효율성을 도모한다.(2) 개인차를 고려한 교수·학습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에 유의한다.㈎ 교과서의 내용을 순차적으로 똑같은 비중으로 다루기보다 교사의 교과 전문성을 살려 주제의 순차를 조정하거나 몇 개의 주제를 합하여 새롭게 구성하는 방안, 또는 하나의 주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방안을 고려한다.㈏ 자기 지역과 관련된 지역의 역사를 배울 때는 지역의 인물을 선정하거나 일화를 발굴하여 가르치는 등 교사의 관점과 학생의 수준과 흥미도 등을 고려한 교과서 내용의 재구성을 통해 가르칠 수 있도록 한다.㈐ 수업 시간 중에 학습자의 반응에 따른 적절한 피드을 종합적으로 활용하여 수집품과 전시물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게 한다.㈐ 학습자로 하여금 박물관의 전시 유물을 자세히 관찰하거나 묘사하고, 만들어 보게 함으로써 문화재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고양시킬 수 있도록 한다.㈑ 오디오, 비디오, 터치스크린(touch screen), 멀티미디어 자료, 컴퓨터, 인터넷 등 각종 과학기기 등을 활용하여 동적인 전시를 감상하도록 한다.5. 평가가. 평가 계획(1) 평가는 교육 과정의 한 부분으로서 학습자의 학습 과정을 이해하고 성취 수준을 높이며, 교육 내용과 교수·학습 방법의 적절성을 진단하는 마무리 과정이다 그러므로 교육 과정에 제시된 목표, 내용, 교수·학습 방법과 일관성을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2) 평가 목적, 평가 시기, 평가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진단 평가, 형성 평가, 총괄 평가, 수행 평가를 적절하게 활용한다. 이러한 평가를 통해 학습 의욕을 자극하고, 성취도를 높이며, 학습 과정과 평가의 연계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한다.(3) 평가 상황, 평가 방법, 평가 기준을 학습자에게 미리 알려 주어 평가가 역사 학습을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도록 한다.나. 평가 목표와 내용(1) 교육 과정에 제시된 목표와 내용에 따라 추출된 요소를 준거로 평가를 시행한다.(2) 평가는 지식, 기능, 가치·태도를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단편적인 역사 지식을 암기하는 것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고 기능과 역사에 대한 관심과 태도 영역까지 평가하는 종합적이고 균형 있는 평가가 필요하다.(3) 평가 내용은 각 영역의 학습 내용에서 균형 있게 선정하되, 학년별 수준과 범위를 고려한다.다. 평가 방법진단 평가, 형성 평가, 총괄 평가, 수행 평가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학습 의욕을 자극한다. 이때 평가는 성취도를 높이며, 학습 과정과 평가의 연계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1) 진단 평가는 수업의 출발점에서 학습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학습자의 초기 학습 상태, 즉 출발점 행동을 측정하는 것이다. 진단 평가의 목적은 학생들의 사전 학습 정 재편게르만족의 침입 이후 나타난 유럽 세계의 형성 과정과 서유럽 봉건 사회 및 비잔틴 세계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는 가운데 중세 유럽 사회의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고 크리스트교의 발전과정에 대해 분석한다.(1) 게르만족의 이동과 서유럽의 형성① 지도를 통해 게르만 민족의 이동 경로를 살펴보고, 그것이 유럽 각 지역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를 토의한다.② 프랑크 왕국의 발전 및 붕괴 과정을 파악하고, 그것이 유럽 세계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이해한다.③ 유럽 문명의 기반이 되는 요소들을 추출하고, 오늘날의 유럽 통합 운동과 관련지어 설명한다.(2) 서유럽의 봉건제와 봉건 국가① 봉건 사회 성립의 배경 및 구성 요소들을 분석하고, 봉건 사회의 의미와 성격을 파악한다.② 장원 제도의 구조와 성격을 파악하고, 농민의 사회적 지위를 고대 노예와 근대 농민과의 비교를 통해 이해한다.③ 대표적인 중세 봉건 국가의 발전을 파악하고, 봉건 국가의 성격을 이해한다.④ 중세 교회의 발전 과정을 파악하고, 중세 교회가 유럽의 정치, 사회, 문화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3) 크리스트교의 성장① 동서 교회의 분열과정과 로마 가톨릭교의 성장에 대해서 알아보고, 당시 교황의 지위에 대해 이해한다.② 교황과 황제의 대립구조에 대해 파악하고 당시 교황권의 성장에 대해 분석한다.③ 중세 문화 중 학문, 대학, 건축, 문학 등의 발전이 있었음을 이해하고 어떤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는지에 대해 분석한다.(4)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발전과 쇠퇴① 비잔틴 제국의 변천 과정을 파악하고, 그 제국의 종교, 정치, 경제 및 사회의 특징을 분석한다.② 자료를 통하여 비잔틴 문화의 특징을 이해하고, 그 문화의 역사적 의의를 동유럽의 문화 형성과 관련지어 탐구한다.(5) 중세 유럽의 변화① 사료, 지도 등의 자료를 이용하여 십자군 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파악한다.② 중세 자치 도시의 구조와 특징을 파악하고, 그것이 봉건 사회에 미친 영향을 추론한다. 대표적인 도시가 어떤 곳에 있는지 파악하고, 도시의 발달에 압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