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신의 성장 과정과 환경이 자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기술하세요(1000자 이내).어릴 때 저의 부모님들께서는 항상 농사일로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집을 지키는 시간이 많았던 저는 주로 집에 있는 위인전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집에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밥을 챙겨먹으면서 자연스럽게 책임감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주 주말이 되면 바쁜 농사일을 돕기 위해서 부모님과 함께 일터로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처럼 일터로 가던 도중 아버지의 차가 논두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가족들은 모두 차를 빼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결국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아, 이 차는 우리의 힘으로 빼낼 수 없구나. 포기해야 하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하시며 끝까지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다시 힘을 얻은 우리 가족은 계속해서 시도했고 몇 시간의 노력 끝에 결국 차를 빼낼 수 있었습니다. 이때의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저에게는 정말 크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평소 집에 혼자 있을 때 읽었던 책 중에서 나폴레옹이 했던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흔한 말이고 책을 읽을 당시에도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 경험 이후 저 말은 바로 저의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저때의 경험과 좌우명을 다시 떠올리며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2. 학교 생활 중 배려, 나눔, 협력, 갈등 관리, 리더십 발휘 등을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구체적으로 기술하세요(1000자 이내).고3이 된 후 저는 반에서 장래희망이 비슷한 친구들끼리 모여서 학급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그 동아리는 우리들이 주체적으로 교내의 문제를 알아보고 함께 힘을 합쳐 해결해 나가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습니다. 저희는 주기적으로 교내에 어떤 문제들이 있는지를 토의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 결과 학교폭력 근절을 동아리의 목표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함께 의견을 모아 해결책을 도모했지만 모두 뻔한 해결책들 밖에 생각을 해내지 못하여 모두들 의욕을 잃어버려 첫 난관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창의적인 생각을 하여 신선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다시 모두에게 활력을 불어넣으며 토의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제시한 아이디어는 바로 학교폭력 예방 UCC를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 명도 예외 없이 역할을 나누어서 UCC를 만들어서 SNS에 올렸습니다. 그 UCC에 대한 친구들의 호응은 매우 좋았고 그때의 뿌듯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외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학교폭력예방표어를 조금씩 만들어서 학급 게시판에 붙였고 비록 저희 학급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서명운동까지도 펼치며 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작지만 큰 노력들 덕분인지는 몰라도 실제로 친구들이 교내에서 친구들을 괴롭히는 모습을 그 이후에는 거의 볼 수가 없었습니다.비록 한 학기 남짓한 짧은 학급동아리 활동이었지만 그동안 경험해보았던 틀에 얽매인 활동과는 다르게 우리들이 주체가 되어서 직접 계획하고 의견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창의력과 통솔력 그리고 남을 생각하는 배려심과 책임감까지 함양하게 된 활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저의 장래희망인 국어교사가 된다면 이때의 학급동아리 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창의적이고 새로운 수업을 준비하여 아이들을 위해 가르쳐 주고 싶습니다.3. 지원 동기와 지원 분야의 진로 계획을 위해 어떤 노력과 준비를 해왔는지 기술하고, 본인에게 가장 의미 있었다고 생각되는 교내 활동을 기술하세요. 단, 교외 활동 중 학교장의 허락을 받고 참여한 활동은 포함됩니다(1500자 이내).어머니의 어릴 적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항상 선생님이 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어릴 때부터 교탁에 서계신 선생님들을 보며 항상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저는 선생님으로 장래희망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 꿈을 더욱 구체적으로 정하기 위해 평소 관심 있는 분야를 생각해보며 무슨 과목을 가르치면 좋을지에 대해서 한동안 생각해봤습니다. 그동안 저는 평소에 학생들의 비속어 사용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학생언어문화개선 바른말 쓰기 자치위원회’에 가입하여 학생언어문화개선 캠페인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였으며 평소 문법 및 문학 쪽으로도 관심이 많아서 국어교육과에 진학해서 국어 선생님이 되겠다고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전 그 당시까지 누군가를 가르쳐 보거나 한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과연 가르치는 게 내 적성에 맞을까?’, ‘선생님들은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유창하게 설명을 잘하실까?’ 등의 많은 호기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말에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저의 집에 서 직접 수업도 해보고 질문도 받아보고 하는 경험을 해봤습니다. 그렇게 5~6번 정도 경험해보고 나니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 준다는 것이 정말 재미있고 저에게 적성이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국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에 대해서 더욱더 확신을 하게 되어서 국어교육과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국어교사가 되기 위해서 할 일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때마침 도서부에 가입해 있었던 저는 동아리 활동을 하며 문학작품에 대해 좀 더 심층적인 이해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다같이 ‘당신들의 천국(이청준)’에 대한 책을 읽고 책의 배경이 되는 소록도로 문학탐방을 떠났습니다. 가는 길에는 태백산맥문학관을 방문하여 조정래 작가가 직접 쓴 원고와 직접 사용한 필기구 등을 보며 저의 견문을 넓혀 나갔습니다. 그리고 소록도에 방문해서 직접 나병환자들이 격리되었던 장소를 보면서 책으로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끼고 다시 한 번 나병환자들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앞으로 제가 선생님이 된다면 학생들을 위해 항상 희생하겠다는 마음으로 좁은 세상만을 알려주기보다는 더 넓은 세상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또한 문학작품 하나를 가르치더라도 항상 문학탐방을 떠난 경험을 떠올리며 좀 더 깊은 이해를 통해 수업을 할 것입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먼저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교재에 나오는 교육의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겠다. ‘교육’이라는 단어에서 ‘교(敎)’자의 의미 속에는 성숙자가 미성숙자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는 의미와 미성숙자가 스스로 성숙자의 모습을 학습한다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있다. 그리고 ‘육(育)’자의 의미 속에는 자녀를 대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사랑과 관심을 갖고 미성숙자의 선천적인 능력들이 바람직하게 발휘되도록 이끌어 내고 길러준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즉, 어원적인 측면에서의 교육의 의미는 성숙한 인간이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한편으로는 지도와 모범을 통하여 미성숙자를 외적인 가치들로 이끌고, 다른 한편으로는 격려와 관심을 통하여 미성숙자의 능력과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들이 발현되도록 하는 의도적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교육은 주형의 의미와 성장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교육은 개인과 개인을 둘러싼 환경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보다 바람직한 인간을 구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지금까지 설명한 교육의 의미가 바로 교재에 나오는 교육의 사전적인 정의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사전적은 교육의 의미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항상 교육이란 ‘거름’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을 한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는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땅을 비옥하게 해서 그 땅에서 크게 될 작물이 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거름을 뿌리지 않아도 작물이 클 수는 있다. 하지만 비옥한 땅에서 자란 작물에 비해 초라하게 자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성숙한 인간에게 교육을 함으로써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성장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만약 교육을 하지 않는다고 가정하여도 사람은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어른이 된다. 하지만 교육을 받은 사람에 비하면 매우 미개한 사람이 될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교육의 범위는 국어, 영어, 수학과 같은 지식과 더불어 도덕, 인성, 생활양식 등 선천적으로 알지 못하는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그 다음으로 이와 비슷하게 다른 곳에 비유하자면 교육은 ‘조미료’라고도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요리를 할 때 조미료는 거의 빠지지 않는 필수 재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국물의 감칠맛을 위해서 인공조미료를 첨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리를 할 때 이러한 조미료들을 넣지 않아도 먹을 수는 있고 음식은 된다. 하지만 소금, 설탕과 같은 조미료를 음식에 첨가함으로써 음식은 더 완성도가 높아지고 맛이 있어진다. 그리고 인공조미료를 첨가함으로써 음식의 감칠맛은 더욱더 풍부해진다. 그래서 나는 소금, 설탕 같은 조미료들을 교육에 비유할 것이고, 인공조미료의 경우 심화교육에 비유 할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적인 생활양식 같은 기본적인 것들을 교육받으며 사람은 조금 더 사람다워지고 거기에 지적인 것들을 배우며 사람이 조금 더 감칠맛 나는 지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교육을 더 많은 것들에 비유 할 수도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2가지에 비유하고 싶다.
장준하에 대해서Ⅰ. 서론보통 정치인 혹은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는 장준하는 평범하지 않은 일생을 보냈다. 약 50년이라는 길지 않은 인생동안 학도병을 참전하고 언론인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국회의원까지 한 평범하지 않은 인물이다. 또한 1960~1970년대 권력의 핵심에 있던 박정희의 라이벌로 김대중과 더불어 장준하가 언급된다. 본고에서는 장준하의 생애와 대표적인 잡지인 《사상계》, 그리고 5.16군사정변에 대한 장준하의 태도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론장준하의 생애장준하는 3.1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18년 8월 27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장석인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부친이 의주 영산시장 만세시위에 가담했다가 쫓기는 바람에 이듬해 조부 장윤희 이하 온 가족이 의주 안쪽의 삭주 외남면 청계동 산골마을로 이사를 갔다. 부친은 선천의 신성중학교와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다닌 지식인이고, 조부 역시 의주에서 신학문을 가르치는 양성학교라는 사학을 세워 스스로 교사로 일한 교육자이면서 기독교 장로였다. 15세에 삭주 인근의 대관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장준하는 이 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친과 합류했다. 모친도 삭주에서 내려와 한 가족이 모두 평양에 모여 살게 되었다. 그러나 부친이 갑자기 신성중학교로 발령이 나서 장준하도 신성중학교로 전학했다.그 후 일본 도요대학 예과를 거쳐 동경의 니혼신학교에 다니다가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되었다. 입영 6개월 만에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임천에 있던 중국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대하였다. 이곳에서 김준엽과 《등불》이라는 필사본 잡지를 발간하였다.그리고 광복이 되자 8월 18일에는 광복군의 국내 정진군 선발대로 여의도 비행장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1945년 12월 환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교무처장으로 정계에 잠시 몸담았으나, 그 동안 못다 한 학업을 마치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을 다녔다. 1·4후퇴 때 부산에 피난한 뒤, 1952년 9월 문교부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사상≫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1953년에는 피난지에서 무일푼으로 ≪사상계≫를 창간하였다. 1962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혐의로 검거되어 복역 중 1967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공천으로 옥중 출마하여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생애가 끝날 즈음에는 정당 활동보다 민주회복국민회의를 통한 재야운동에 전념하였다. 1975년 8월 등산길에서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계창호, 「장준하, 애국애족의 언론인, 그 시대의 순교자」, 일조각, 2012, pp.157~159.2. 《사상계》의 탄생전쟁이 발발하자 장준하는 부산으로 내려갔다. 1.4후퇴 때 부산까지 내려간 장준하는 그곳에서 당시 문교부 장관이던 백낙준을 만나게 되었다. 1952년 백낙준은 피난지 부산에서 문교부 산하에 '국민사상연구원'을 설립하고 장준하를 그곳으로 끌어들였다. 국민사상연구원에 들어간 장준하는 기관지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사상계'의 전신인 『사상』이 태어났다. 그러나 『사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백낙준에 대한 이승만의 신임을 시기한 이기붕의 아내 박 마리아 때문이었다. 결국 장준하는 국민사상연구원을 그만두고 자신의 힘으로 잡지를 만들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사상계』였다.종이 한 장이 귀하던 전시 하에서, 그것도 재산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장준하는 오직 의지 하나로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잡지를 제작했다. 원고료를 주지 않고 원고를 모으고 한국 리더스 다이제스트사 사장 이춘우의 도움으로 조판을 할 수 있게 되어 『사상계』는 1953년 2월 20일 제작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3월 10일 『사상계』 4월호가 대중에 첫선을 보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전쟁이 사실상 끝나자 장준하는 피난 시절을 마감하고 서울로 올라와 『사상계』12월호를 출간했다. 전쟁이 끝나고 모든 물자가 부족했던 상황이었지만 잡지에 매진한 그의 노력으로 『사상계』는 제 모양새를 차리게 되었다. 편집위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잡지의 질은 높아졌고 대중의 인기를 얻어갔다.『사상계』가 대중의 인기를 한층 더 얻은 계기는 이승만 정권과의 충돌이었다. 『사상계』는 1954년 이후로 이승만 정권과 반목하게 되었는데 그 출발점은 1954년 7월 이승만 정권이 내놓은 '한글 간소화안'에 대한 정권과의 논쟁이었다. 『사상계』를 중심으로 한 서면논쟁으로 한글 간소화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고, 『사상계』의 주가는 날이 갈수록 올랐다. 이렇게 『사상계』는 한국 최고의 잡지가 된 것이다.이렇게 잡지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을 때인 1956년 장준하는 『사상계』의 대표적 논객 함석헌을 만났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펼치는 함석현의 날카로운 비판은 비판에 목말라 있던 대중에게는 신선한 한 모금의 물이었다. 함석헌은 1958년 8월호 『사상계』지면을 통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썼다. 『사상계』역사상 처음으로 필화 사건을 일으킨 이 글에서 함석헌은 이승만을 "민중을 버리고 민중을 잡아먹는" 탐관오리로 묘사했으며 "미국의 앞잡이" 라고까지 비하했다. 또 "이제부터라도 진정으로 나라를 위해 일하라" 고 훈계까지 했다. 이 글로 인해 함석헌은 옥고를 치러야 했으며 장준하도 수사기관에 불려다니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1950년대 『사상계』는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다. 4.19를 전후해 당시로서는 놀라운 9만 7000부를 찍은 것으로 알려진 『사상계』는 그만큼 많이 읽혔다. 『사상계』가 지식인들에게 인기를 얻은 것은, 학술지가 거의 부재했던 당시 상황에서 선진국(미국)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통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 출판사 '사상계'는 미국의 주간지 『타임』과 월간지 『라이프』의 총판을 맡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반공과 친미 성향을 드러냈다. 그것은 지식인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상계』가 끊임없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비판함으로써 4,19혁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을영, 「장준하 : 37년 만에 살아 돌아오다」, 인물과사상사, 2012, pp.66~67.3. 5.16 군사정변, 긍정에서 항거로장준하는 5.16군사정변 초기에는 이를 인정하고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사상계' 1961년 6월호의 권두언에서 "자유당과 본질적으로 다를 것이 없는 민주당은 혁명과업의 수행은 커녕 추잡하고 비열한 파쟁과 이권 운동에 몰두해 (중략) 누란의 위기에서 민주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5.16혁명이다. (중략) 5.16혁명은 4.19혁명의 부정이 아니라 그 계승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그러나 장준하의 이러한 5.16군사정변에 대한 인식과 관계없이 군사정권은 장준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장면 정부 때 재무부장관 김영선으로부터 재정지원을 조금 받은 것이 빌미가 되어 장준하는 부패언론인으로 찍혀 부정축재처리위원회, 혁명검찰, 혁명재판소, 성울지방국세청 등으로 불려 다니며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장준하는 1962년 8월 31일 막사이사이상을 받고 힘을 얻었다.
정지용 Ⅰ. 서론정지용의 「유리창 1」 은 총 네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시로, 1929년 12월에 쓰여져 1930년 1월 『조선지광』 89호에 발표되었다. 「유리창 1」은 보통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을 노래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본고에서는 정지용의 생애를 간단히 살펴본 후, 그의 대표작 을 분석해보고, 발표자의 해석을 덧붙여보겠다.Ⅱ. 본론1. 정지용의 생애정지용은 충북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번지에서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 사이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정지용은 1914년 4월 4년제인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25일 제 4회로 졸업하고 191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고향에서 한문을 공부했다. 공립학교 입학 전인 1913년에는 인근인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송재숙과 결혼했다.그외 유년시절은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다. 부친 태국은 중국과 만주 등지를 다니면서 익힌 한의학을 바탕으로 고향에서 한약상을 했으나 도둑을 맞고 홍수 피해까지 입어 가계가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아버지의 자포자기는 가정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어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곧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한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둘째 부인을 얻었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결국 정지용에게 있어 고독과 고민, 그리고 소외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1918년에는 휘문고보에 입학하여 습작활동을 시작했다. 김화산,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만들었다. 1923년에는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이 학교의 주선으로 일본 경도에 있는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유학, 본격적으로 문학수업을 했다.1929년 귀국한 그는 휘문고보 영어 교사로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유리창1」을 썼다. 1930년 『시문학』 동인에 가담하여 시작품을 발표하였고 시작활동이 활발했던 한 해였다. 1933년 8월에 반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구인회’에 가담하였다. 1935년 10월, 시문학사에서 첫 시집『정지용시집』이 간행되었다. 49세였던 1950년, 6·25전쟁 도중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고, 이로 인해 정지용의 시는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일반인에게 공개적으로 읽히지 않았다. 이후 1988년 3월 30일, 정지용의 작품이 해금되었다. 1950년 9월 25일 사망했다는 기록이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기재되었다.2. 작품유리창(琉璃窓) 1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길들은양 언날개를 파다거린다.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디치고,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寶石)처럼 백힌다.밤에 홀로 유리(琉璃)를 닥는것은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고흔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러 갔구나!-『조선지광』, 1930-3. 작품분석3.1 ‘기승전결’ 네 단락의 구조이 작품의 전반부는 의미상 두 단락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1행에서부터 3행까지가 첫째 단락에, 4행에서부터 6행까지가 둘째 단락에 해당된다. 첫째 단락에서 화자는 무엇인가 '차고 슬픈 것'이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그는 유리창에 다가가 입김을 흐리우게 되는 것이다. 둘째 단락에서 화자는 그 대상을 좀더 분명히 확인하고자 유리창을 지우고 보는 행위를 되풀이한다. 그런데 대상을 만나보고자 하는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자에게 보이는 것은 어둠과 별뿐, 화자가 찾고자 하는 대상은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화자가 공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상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대상을 만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절망감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그리하여 6행에서 슬픔을 이기지 못한 화자가 눈물을 머금게 되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별을 바라보는 화자의 심정을 시인은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와 같이 강렬한 이미지로 간접화하여 제시해 놓고 있다.작품의 후반부 역시 두 단락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앞 단락은 7행과 8행으로 되어 있다. 7행이 전반부의 시적 상황을 간략하게 요약해 놓은 부분이라면, 8행은 그 상황 속에서 화자가 느끼는 심정을 고백하여 놓은 부분이다. 전반부에서 화자가 유리창을 지우고 보는 행위를 되풀이한 것은 사실 그가 '외로운 황홀한 심사'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단락에서 밝혀진다.마지막 단락인 9행과 10행에는 화자의 현실인식이 드러나 있다. 이 단락에서 화자는 대상인 네가 폐혈관이 찢어진 채 먼 곳으로 떠나 가버렸다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시인은 이것을 대상이 산새가 되어 날아가버린 것으로 제시하였다. 시인은 이곳에서 화자의 주관적인 심정을 절제하고 산새 이미지로 객관화하여 제시하는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3.2 ‘외로운 황홀한 심사’의 역설적 의미외롭고도 황홀한 화자의 정서는 유리창의 양면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자가 지금 대하고 있는 유리창은 창 밖의 세계를 내다볼 수 있게 하는 투명성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창 밖의 대상과 창 안의 화자를 갈라놓는 차단성도 또한 갖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의 화자는 유리창의 투명성으로 하여 창 밖에 있는 대상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게 된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유리창은 화자에게 창 밖의 대상과 창 안의 화자를 갈라놓는 차가운 벽으로 존재한다. 화자가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이 벽을 인식한 데서 오는 단절감에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그리고 화자의 황홀함은 대상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대상을 만나보고자 하는 화자의 심정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기대감은 더욱 증가될 것이다.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을 때 화자는 황홀감까지 느낄 것이다. 그러나 유리창의 차단성을 확인한 화자는 대상을 만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깊은 단절감을 느끼게 된다. 이와같이 화자의 기대감은 황홀함을 낳게 되고 그가 느끼는 단절감으로 하여 외로움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4. 발표자의 해석내가 이 작품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때이다. 그 당시에 배울 때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절제된 표현을 통해 나타낸 시라고 배웠다. 물론 그 해석이 가장 적절하고 보편화된 『유리창1』의 해석이다. 하지만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조선지광』에 발표된 해가 1930년인 점을 감안해 보면 조국을 잃은 슬픔에 대해 노래한 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의 해석은 이러하다.
조명희Ⅰ. 서론소설 은 이른바 방향전환기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1927년 7월 『조선지광』에 발표되었다. 정덕준, 『조명희』, 새미, 1999, p.1.은 신경향파 소설의 특징과 그 한계가 극복되는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었던 작가 포석 조명희의 작품으로, 궁핍한 삶의 현실과 그 속에서의 수난을 그렸던 초기성향에서 벗어나 계급적인 이념의 구현이라는 분명한 지향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민음사, 2002, p.349~350.본고에서는 조명희의 생애와 더불어 소설이 무엇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 가치와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 조명희의 생애포석 조명희는 1893년 8월 10일 충북 진천군 벽암리의 명망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고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수탈이 자행되는 속에서 집안 형편도 어려워졌다.조명희는 이런 시대적 고난의 흐름 속에서 성장했다. 3·1운동이 난 해인 1919년 9월에 일본 동경의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그곳에서 '극예술협회'에 참가했으며, 가세가 기울어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던 지 1923년 봄에 시인은 졸업을 앞두고 귀국하며, 이듬해에는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서울에서 발행한다.그러나 조명희의 문학적 명성이 높아진 것은 1927년 7월 『조선지광』에 발표된 소설 에서였다. 그 이전에 '카프'의 창립회원으로 가입하고 잡지 『개벽』에 단편소설 를 발표했지만 조명희의 문명을 크게 드날린 것은 이었고, 이 작품으로 그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맨 앞줄에 서게 되었다.그 다음 해인 1928년 4월에 소설집 《낙동강》이 출판되자 더는 나라 안에서의 억압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8월에 소련으로 망명,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거주한다. 조명희는 이곳에서 산문시 를 썼으며, 소련작가동맹에 가입하고 신문 『선봉』의 문학 편집자가 되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명령으로 조명희는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했다.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한 조명희는 그곳에서 조선사범대학 교수,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 간사로 활약했다. 그리고 소련의 정보부 KGB는 1937년 9월에 조명희를 체포하고 이듬해 5월에 총살형에 처한다.그후, 1956년 극동군 관구 군법회의는 1938년의 사형선고 판결을 파기하고 무혐의 처리 복권을 시켰는데 18년후의 일이었다. 정광수, 「시인 조명희의 삶과 작품 세계」, 『문예운동』 제92호, 문예운동사, 2006, p.22~24.2. 은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서사단락을 통해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의 서사단락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① 현재: 이른 겨울 밤, 병보석으로 출감한 박성운과 그 일행이 낙동강을 건너간다.② 과거: 박성운은 사상 전환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었다.a. 박성운은 낙동강 어부의 손자요, 농부의 아들이다.b. 군청 농업조수를 지내다가 독립운동에 참가, 1년 반 감옥 생활을 하였다.c. 서간도로 이주, 독립운동에 노력하다가 사회주의자로 변신하여 귀국하였다.③ 과거: 서울에서 사회운동단체에 참여하나 파벌 다툼에 실망하고 귀향하여 농민운동을 전개하던 박성운은 갈밭 사건으로 투옥되고 심한 고문을 당했다.④ 과거: 형평사원과 장꾼들과의 패싸움 때 ‘로사’를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a. 로사는 형평사원(백정)의 딸이다.b. 로사는 여고보와 사범과를 마치고, 여훈도가 되었다.c. 박성운의 영향을 받아 여성동맹원이 되고, ‘로사 룩쎈부르크’로 개명하였다.⑤ 현재: 박성운의 장례 행렬이 강 언덕을 지나간다.⑥ 현재: 첫눈 내리는 날 아침, 로사는 북행열차를 타고 구포를 떠난다.2.1 에 나타나는 미래 전망의 형상화은 양의성을 지니고 있다. 즉 주인공의 현실적인 패배·죽음과 미래에 대한 이상·전망이 교착되어 있다. 주인공 ‘성운’의 행적만을 살필 때, 사실상 이 작품은 주인공의 좌절과 패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조명희는 작품 서두에서부터 미래 전망의 제시라는 선명한 의도를 내보이고 있다.‘그러나 역사는 또 한 바퀴 구르려고 한다. 소낙비 앞잡이 바람이다. (중략) 폭풍우가 반드시 오고야 만다. 그 비 뒤에는 어떠한 날씨가 올 것은 뻔히 알 노릇이다.’위의 인용문의 ‘반드시 오고야 만다’라든가 ‘뻔히 알 노릇이다’라는 화자의 주관적인 전망 부분을 통해 작가의 확고한 신념, 혹은 전망에 대한 과신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주관적인 전망의 제시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주인공의 죽음 이후에 이뤄지는 이 작품의 대단원에서이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인공 ‘박성운’은 경찰 당국의 고문으로 중병이 들고 결국에는 병사한다. 그의 죽음은 현실적으로는 운동의 실패요 좌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그가 추구하는 운동이, 낙동강이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로사에 의해 ‘재생’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정덕준, 위의 책, p.218~219.2.2 ‘박성운’에서의 ‘로사’로의 이데올로기 전이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성운’과 ‘로사’의 만남이다. 동지적 공감대에 의해 이룩된 두 젊은이의 관계는 이성간의 세속적인 사랑과는 전혀 다른 문맥을 형성하고 있다. ‘성운’의 죽음은 단순한 패배나 좌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민중의 결속된 힘과 이해로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는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 죽음은 오히려 정신의 치열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성운’의 뒤를 밟고 떠나는 ‘로사’의 행동은 이념이 곧 삶의 지표이며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아마 그는 돌아간 애인의 밟던 길을 자기도 한번 밟아보려는 뜻인가 보다. 그러나 필경에는 그도 멀지 않아서 다시 잊지 못할 이 땅으로 돌아올 날이 있겠지.”우리는 애인의 뒤를 이어 망명의 길을 떠나는 ‘로사’의 고향 탈출이 단순한 떠남의 행위가 아니고 다시 돌아오기 위한 예비 단계임을 위의 예문에서 확인하게 된다. 이 마지막 부분은 혁명의 선구자인 ‘성운’이 죽었지만, 그 정신은 ‘로사’로의 이데올로기 전이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시태, 「조명희의 소설연구」, 동아시아 문화연구 24호, 1994, p.231~232.2.3 ‘낙동강’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모성적 이미지로서의 ‘낙동강’여기서 낙동강은 단순히 인물들이 활동하는 공간적 지리적 배경으로만 그려져 있지 않다. 낙동강은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거기에 의지해 살아가는 생명들 즉 "만 목숨 만만 목숨"을 길러내는 '젖'줄이라는 것이다. 낙동강은 바로 그곳에 안겨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의 젖줄로서의 강, 즉 생명의 근원이며 어머니, 즉 모성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다.‘죽음과 부활’의 공간으로서의 낙동강일제에 대한 저항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경찰당국에서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수감되었다가 병이 심해져 출소하는 ‘성운’을 맞이하는 것도, 또 전에 서북 간도를 향해 떠나는 그와, 이역과 타향을 떠돌다 돌아오는 그를 받아들이는 것도 낙동강이다. 또한 수많은 만장에 싸인 장례 행렬을 받아들이고 그 유지를 이어 다시 북으로 떠나는 ‘로사’를 배웅하는 것도 이 낙동강이다. 그렇기에 ‘성운’의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나 단절이 아니라 재생, 혹은 부활의 의미를 띤다.‘낙동강’의 조선으로의 환치‘낙동강’은 '망국'이라는 현실의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면서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즉 자신의 뿌리와 근원만을 환기 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외에 가서 다섯 해 동안을 떠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강이라는 것이 생각날 때마다 낙동강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중략) 따라서, 조선이랑 것도.”의 부분에서도 보듯이 ‘낙동강’은 곧 ‘조선’으로 환치되고 있다. 이화진, 「조명희의 과 그 사상적 지반」, 국제어문학회, 국제어문 57, 2013, p.258~261.3. 은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가3.1 의 이야기 전개‘박성운’을 이야기 축으로 삼아 현재→과거→미래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시간 지연(장면)과 시간 단축(개관)을 기능적으로 연결, →결말로 이끌어가고 있다. 소설에서의 장면이란 허구의 시간을 지연시켜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현장감과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서술기법으로, 현재 지향적이다. 이와는 달리, 개관이란 허구의 시간을 단축시켜 작중인물의 과거나 그 내력 또는 사건의 배경이 되는 어떤 사실을 요약해 보이는 시간기법으로, 과거 지향적이다. 소설에서 이로서 다른 시간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의 문제는 따라서 이야기 짜임새나 그 미적 효과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은 이를 기능적으로 처리하여 소설적 긴장을 조성·유지시켜 나간다. 장면→개관→장면의 유기적 연결이 그것으로, 서두와 결말이 특히 그러하다. 정덕준, 위의 책, p.62~63.3.2 에 쓰인 서술 구조이 작품에서는 떠남과 귀환의 모티프를 선택하여 세계에 대한 자아의 갈등 심리를 표상하는 것으로서 남녀 두 주인공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모티프 사용으로 혁명가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파란만장한 삶의 도전을 제시하고 있다. 정덕준, 위의 책, p.178.4. 의 가치와 한계이 소설의 가치는 명확한 사회운동 프로그램을 제시했고, 사회 운동가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이후 프로 소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즉, ‘박성운’은 프로소설에 등장하는 최초의 혁명적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한 마지막에 로사를 등장시킨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주인공은 비록 죽지만, 그가 전개한 사회운동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한 주인공의 죽음으로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로사’를 등장시켰다. 그녀에 의해 그 운동이 다음 세대로 이어질 때 그것은 결코 끝난 것도 패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