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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육심리학 인지주의 이론에 관한 PPT 발표자료
    인지주의 학습이론CONTENTS Tolman 의 잠재학습 01 통찰학습 02 정보처리이론 03 학습전략 04 학습의 전이 05 인지주의 학습이론의 교육적 시사점 06 QUIZ 07* 주요원리 2. 사전경험에 따라 다양 학습자는 능동적인 존재 인지주의 관점에서 새로운 정보를 적극수용 , 능동적 지식 구성 학습자는 자신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학습 성과를 보임 Ex) Ex) 수업 시작 종소리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인지주의 학습이론3. 학습은 행동 잠재력의 변화까지 포함 . 행동주의는 학습을 직접 경험에 근거한 행동의 변화 인지주의는 학습을 행동잠재력의 변화로 정의 4. 행동주의와 인지주의 학습이론 비교 인지주의 학습이론1.Tolman 의 잠재학습 1. 출생 : 1886. 4. 14. ~ 1959. 11. 19 2. 행동주의자들 처럼 객관성 강조 . 3. 행동주의와 달리 인지적 변화도 학습에 포함된다고 주장 . 4. 쥐의 실험 결과를 제시 Ex) 인지주의 학습이론1. Tolman 의 잠재학습의 결론 쥐의 실험결과를 바탕으로 환경의 특성 , 위치에 관한 정보를 그림 또는 지도와 같이 형태화한 정신적 표상을 인지도 라고 함 . Tolman 의 연구는 눈에 보이는 행동의 변화만 학습이 아님을 증명 , 보이지않는 인지적 변화도 학습이며 , 이러한 학습을 잠재학습 이라고 하였다 . 인지주의 학습이론통찰학습 1. 출생 : 1887.1.21 ~ 1967.6.11 2. 대표적인 형태주의 이론가 3. 침팬지 문제 해결능력 실험 인지주의 학습이론행동주의 이론의 한계점 쾰러의 침팬지 문제해결 능력 실험으로 행동주의 이론 한계 파악 1. 행동주의는 시행착오 를 경험하며 점진적으로 문제 해결 - 쾰러의 침팬지 실험 에서 시행착오 발생하지 않으며 갑자기 완전한 형태로 문제를 해결 2. 행동주의에 따르면 학습은 자극과 반응의 반복적 연합 , 침팬지 실험에서 행동주의에 따르면 여러 개의 상자를 쌓기 위해서는 상자를 이용 할 때 마다 강화 ( 먹이 ) 를 주어여 함 . 3. 쾰른의 침팬지 실험에서는 강화를 하지 않아도 상자를 조합 - 행동주의 만으로는 고등동물 의 인지과정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판단 . 인지주의 학습이론통찰학습의 결론 통찰학습은 문제상황에서 관련 없는 여러 요인이 완전한 형태로 재구성 되어 문제해결 . 관련 없던 부분의 요소들이 유의미한 전체로 파악되면서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과 목적으로 결합될 때 학습자는 ‘ 아하 ’ 현상을 경험 EX). 그리스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3. 정보처리이론 Atkinson Shiffrin(1968) 에 의해 제안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기초하여 인간의 인지과정 입력 저장 인출Atkinson Shiffrin(1968) 에 의해 제안 컴퓨터의 정보처리과정에 기초하여 인간의 인지과정 감각기억 작업기억 감각기억 새로운정보 주의 지각 부호화 인출 초인지 쇠퇴 쇠퇴 , 치환 쇠퇴 , 인출실패 반응 유지시연 3. 정보처리이론기억저장소 1. 감각기억 환경으로부터 들어온 자극 또는 정보를 원래의 형태 그대로 매우 짧은 시간동안 보존하는 저장고 1-4s기억저장소 2. 작업기억 새로운 정보를 조작하여 저장하거나 행동적인 반응을 하는 곳으로 , 지금 이 순간 의식적으로 활성화된 기억 저장고 작업기억에 들어온 정보는 약 10-20 초 유지 , 용량 제한 중앙집행부 정보의 흐름을 통제함 정보를 장기기억으로 전이함 조음 루프 말과 소리에 대한 단기 저장소 유지시연을 통해 정보를 보유함 시공간 스케치판 시간적 · 공간적 정보에 대한 단기 저장소 * 유지시연 : 작업기억에 들어온 정보를 변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반복적으로 되뇌는 과정 .기억저장소 3. 장기기억 작업기억의 정보가 부호화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저장되는 저장고 , 용량과 저장기간에 제한이 없음 비활서화된 기억으로 정보를 인출하려면 작업기억으로 이동 필요 일화기억 , 의미기억 , 절차기억 으로 분류기억과정 주의 01 지각 02 부호화 03 인출 04 특정한 자극에만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는 과정 자극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새로운 정보를 장기기억에 표상하는 과정 장기기억에 저장된 정보를 작업기억으로 이동시키는 과정이전에 경험하였거나 학습한 것에 대한 기억을 일시적으로 또는 영속적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것 장기기억에서 저장된 정보의 인출 실패로 망각이 발생 * 쇠퇴 :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 ( 감각기억에서 망각의 주요 원인 ) * 치환 : 작업기억의 용량 한계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새로운 정보가 이전의 정보를 밀어내고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것 ( 작업기억에서 망각의 주요 원인 ) * 간섭 : 과거에 학습한 지식 또는 최근에 학습한 지식이 기억하고자 하는 정보의 인출을 방해하는 것 망각망각 재인 단서나 도움이 제공되는 상황에서 장기기억의 정보를 인출 회상 어떠한 단서나 도움이 제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기억의 정보 인출 에빙하우스 망각곡선사고과정에 대한 지식으로 , 자기 자신의 인지과정 전체를 지각하고 통제하는 정신활동 첫째 , 초인지적 학습자는 목표와 동기를 계획하고 통제하고 이끄는 방법을 안다 . 초인지 둘째 , 이들은 정보에 주의를 기울이고 , 변형하고 , 조직하고 , 정교화하고 , 재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인지전략 ( 심상 , 정교화 , 조직화 ) 사용방법을 알고 익숙해져 있다 . 셋째 , 주의집중의 중요성을 지각하고 자신에게 효과적인 학습환경을 조성한다 .4. 학습전략 1. 묶기전략 서로 관련된 여러 자극을 하나의 정보 또는 묶음으로 인식하는 전략 작업기억의 용량 한계 극복에 효과적인 방법 2. 심상전략 새로운 정보를 우리의 마음속에 그림으로 만드는 과정 장소법 : 기억해야 할 항목을 잘 아는 장소의 심상과 연결해 기억하는 방법 핵심단어법 : 암기해야 할 단어의 운과 심상을 연결하여 기억하는 방법4. 학습전략 5. 맥락을 이용한 인출전략 자신의 사전경험에 근거하여 새로운 정보를 장기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연결하는 부호화 전략 정보를 기억할 때 범주로 묶거나 위계 관계를 만드는 부호화 전략 개요작성 : 학습자료의 주된 내용을 위계적인 형식으로 표현 개념도 : 개념 간의 관계를 보여주고 주제와의 관련성을 나타내기 위해 개념 간의 관계를 기억하도록 돕는 강력한 시각적 도구 6 . 인출연습전략4. 학습전략 5. 맥락을 이용한 인출전략 6. 인출연습전략 SQ3R – Robinson(1961) : 훑어보기 – 질문하기 – 읽기 – 암송하기 – 복습하기 PQ4R – Thomas Robinson(1972) : 사전검토 – 질문하기 – 읽기 – 숙고하기 – 암송하기 - 복습하기 사전검토 : 제목 , 소제목 , 전체적인 구조를 빠르게 훑고 소제목을 이용 , 개요 작성 질문하기 : 읽기 전에 읽을 내용에 대한 질문 던지기 . 사전지식 또는 제목과 소제목을 이용해 질문 작성 읽기 : 앞서 만든 질문을 생각하며 본문 읽기 . 내용에 따라 속도 조절 . 중심 내용에 별도 표시 필요 . 노트필기 X 숙고하기 : 질문과 관련 내용 정리 . 선행지식과의 관련성 염두하며 내용정리 , 개념도로 정리 암송하기 : 책보지 않고 스스로 역질문 . 소리내서 중얼거리기 복습하기 : 암송할 때 헷갈렸던 부분 다시 읽기 , 시연의 정확도 높이는 전략5. 학습의 전이 전이 (transfer)? 새로운 학습 , 상황에 적용 , 사용 학습자 인지구조 속에 존재하는 기존의 선행지식 (Schemata) 새로운 학습에 영향 = Convey1. 긍정적 전이 : 선행지식이 학습자가 새로운 학습을 하는데 도움 이 되어 촉진 2. 부정적 전이 예시 ) 비올라 연주 누가 더 쉽게 배울까 ? 바이올린 연주자 ? or 피아노 연주자 ?  바이올린 연주자 : 선행지식이 학습자가 새로운 학습을 이해하는데 방해 를 주어 혼란 이나 오류 발생 예시 ) 예전에 영어단어 학습  새롭게 습득한 불어 단어 암기 방해3. 수평적 전이 : 한 분야에서 학습한 것을 다른 분야 또는 실생활 에 적용 4. 수직적 전이 : 기본 학습 이후 고차원적 이고 복잡한 학습 에 적용 되는 것 예시 ) 수학시간에 배운 사칙연산  방정식 , 함수 푸는데 적용 예시 ) 수학시간에 배운 사칙연산  물리시간 공식 이해 , 물건 값 계산 , 잔돈 지불√ 전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기계적 학습  전이 촉진 X 이해 동반 학습  정교화 , 조직화 , 부호 와 같은 전략 이용 1) 학습의 질과 맥락 학습되었던 상황과 전이가 일어날 상황이 비슷 할 때 더 쉽게 발생 예시 ) 제트기 조종사가 실제 비행기와 비슷한 모형 비행기에서 훈련  실제 비행 빨리 적응 2) 학습의 유사도 정보 습득  자동적 전이 X 전이를 유도하는 수업  배운 지식과 관련된 뉴스기사  주제별 구성과 통합 교육과정 3) 학습의 방법예시 ) 물 ? 사회 - 가뭄 또는 홍수 발생시 어떤 경제적 영향 ? 수학 - 가정에서 물을 얼마만큼 사용 하는가 ?6. 인지주의 학습이론의 교육적 시사점 둘째 , 학습자의 주의 를 끄는 수업을 계획 첫째 , 교사는 학습자의 선행지식 활성화 셋째 , 인지적 과부하 가 걸리지 않도록 수업Q : 어떠한 상황에서 관련 없는 여러 요인이 갑자기 완전한 형태로 재구성되어 문제를 해결 하는 것을 어떤 학습이라 하는가 ? A. 통찰학습 QUIZ 1.QUIZ 2. Q : 다음 교수 활동 사례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촉진시키고자 한 정보처리의 전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A . 정교화전략 학생들에게 기억해야 할 새로운 정보를 선행지식과 연결하게 함으로써 정보의 유의미성 을 높였다 . 학생들에게 새로운 정보의 의미에 대해 토론하게 하거나 글의 요점에 대해 설명해 보도록 하였다 . 학생들에게 새로운 정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을 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적절히 활용하였다 . 이 정보의 예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이 정보로부터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까요 ? 이 정보를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Q : 전이의 종류 중 다음이 설명하고 있는 전이는 무슨 전이 인가 ? 학습자가 새로운 학습을 처리하는데 선행학습이 도움이 될 때 이를 OOO 전이 라고 한다 . A. 긍정적전이 QUIZ 3.{nameOfApplication=Show}
    교육학| 2020.10.20| 30페이지| 2,500원| 조회(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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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실과 전주
    조선 왕실과 전주Ⅰ. 머리말Ⅱ. 본문1.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2. 태조 이성계의 조상3. 조선왕조의 관향, 전주1) 경기전2) 전주사고Ⅲ. 맺음말Ⅳ. 참고문헌*전주박물관*경기전*전라감영지*전주객사*전주한옥마을Ⅰ. 머리말전주의 역사를 거슬러 보면, 전주는 견훤 후백제의 도읍이었고, 조선 건국조, 태조 이성계의의 본향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전주에는 조선왕실의 발상지인 만큼 경기전, 조경단, 오목대 등 조선왕조와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고, 지금까지도 전통도시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는 전주를 견훤이 세운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 그리고 고려의 호족이자, 신흥 무인 세력으로 이름을 떨쳤던 이성계의 실제 고향이 전주가 아닌 점에 비롯한 태조의 조상과 조선 건국 이후 ‘전주 이씨’의 본향이라는 점에서 조선이 어떻게 전주의 위상을 높였는지 많은 유적들과 관련하여 알아보고자 한다.Ⅱ. 본문1. 후백제의 도읍지, 전주전라도(全羅道)의 ‘전(全)’에 해당하는 전주라는 지명이 처음 사용된 것은 757년 신라 경덕왕 때의 일이다. 이전에 완산주라고 불렀던 지역을 전주로 개칭하면서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도 전주, 완산, 완주란 세 지명이 혼용되어 전주 지역을 지칭했으나, 후백제의 수도 역할을 하며 전주란 지명이 자주 사용되어 점차 굳어졌다.통일신라시대부터 전주에도 지방 세력은 존재했었으나 실질적으로 전주가 역사의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앞서 말했든 후백제시대부터다. 889년(진성여왕3년)에 발생한 상주 지역 농민항쟁인 ‘원종과 애노의 난’ 진압을 계기로 견훤은 892년(진성여왕6년)에 무진주(광주)에 웅거하였다. 이어 무리를 이끌고 여러 지역을 복속하다 900년(효공왕4년)에 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자신을 ‘후백제왕’이라고 칭하였다.견훤은 전주로 도읍하기 전 무진주(광주)를 습격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감히 공공연히 왕이라고 일컫지는 못하고 직접 서명하기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겸어사중승상주국한남군있는데 이는 견훤이 전주를 후백제의 도읍으로 정한 이유에 주목하게 한다.답은 전주의 유리한 지리적 위치와 당시의 위상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전주는 호남지역 내에서 비교적 중심에 위치해 있다. 이는 전주가 호남지역을 아우르는 교통·군사적 요충지가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를 이용해 견훤은 전주를 중심으로 후백제의 영토를 확장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견훤이 전주를 택한 지리적 위치보다 중요한 이유는 바로 전주의 군사력을 이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통일 후 신라는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 지역을 차지한 후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 각각 3개의 주를 설치했다. 이 때 백제 지역 3개 주는 무진주(광주)와 웅주(공주), 그리고 전주에 설치되었다. 무진주(광주)와 (공주)에는 군사 부대인 정(停)을 설치하고 만보당을 두 개씩 설치한 반면, 전주에는 이 외에도 완산정과 완산주서를 추가 설치했다. 이는 전주의 군사력이 광주와 공주 군사력의 2배이고, 통일신라가 옛 백제 지역 내 군사력의 중심을 전주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이 외에도 당시 전주 지역을 중심으로 백성들에게 반신라적 감정과 백제부흥기운이 퍼져 있어 견훤이 전주를 자신의 거사 중심지로 택했다는 설도 있다. 후기 신라 속 모순과 고려의 등장으로 혼란한 사회를 극복하고자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수도의 위치와 군사력이 아니었을까 싶다.비록 견훤이 세운 후백제가 약 36년이라는 짧은 왕조역사를 지녔지만, 후기 신라 사회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주는 역사이다. 후기 신라 사회에 이어 새롭게 한반도의 패자가 되었던 고려의 강세 속에서 끝까지 빛을 발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후백제의 향기를 가장 많이 품고 있는 곳이 바로 전주이다.2. 태조 이성계의 조상조선 제 1대 임금 태조,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 이 씨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실제 태생은 영흥 출신으로 고려 말 원군과 왜구 격퇴의 공을 세워 중앙 정권으로 진출하였다. 이 점에서 이성계가 토성인 전주가 아닌 동북면 지역에서 성장한 계기를 살펴보기 위해 이성계의 조상들비명」과 『용비어천가』 그리고 『태조실록』 총서를 보면, 이안사는 1252년(고종39년) 7월과 가까운 시기에 전주에 파견된 산성별감의 일로 전주목사와 불화를 일으켰고 이로 인해 삼척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삼척으로 이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253년(고종 40년) 7월에 예쿠가 거느린 몽골병이 침입을 하자 두타산성에 들어가 피하였다가, 몽골군이 물러간 1254년(고종41년) 봄에 이안사는 의주로 다시 이동을 했다. 그 이유는 전주에서 갈등을 일으킨 산성별감이 다시 이안사가 거주하던 지역에 안찰사로 파견되었기 때문이다. 15척의 배를 이용해 의주로 이동을 한 이안사는 그 후 몽골의 산길대왕에게 투항하여 1255년(고종42년)에 몽골로부터 다루가치의 직을 받았다. 몽골제국 초기의 다루가치는 몽골 승전에 큰 공을 세운 자들로 하여금 정복지역의 관할을 담당하도록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안사는 적극적으로 몽골에 협력한 인물라고도 할 수 있다.이안사가 이주하게 된 배경에는 기본적으로 그가 무신의 난의 주동인물이었던 이의방과 관련된 집안이라는 데에 있다. 감시와 견제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안사의 아들인 이행리가 충렬왕을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 북쪽으로 달아난 이유에 대해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도를 넘는 폭정이 그가 이거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음을 말해준다. 그 갈등은 기생 문제로 인해 불화를 일으켰고, 결국 이안사는 자신을 따르는 집단을 데리고 삼척을 거쳐 의주로 이주를 해야만 했다.이안사의 북방 이주는 관리의 폭정 등이 겹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고려 내부적으로는 반역행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기록에는 기생 문제로 인한 다툼으로만 기록하고 있다. 이는 조선이 효(孝)와 충(忠)이라는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한 국가라는 점에 그 이유가 있다. 반역행위를 그대로 드러낼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관리와의 충돌 그리고 그로 인한 몽골귀부 과정은 최소화하고 기생 문제를 부각시켜 지극히 개인적이며, 인간적인 사건으로 포장하였 발자취가 남아 있다.오목대는 1380년(우왕6년) 남원 황산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돌아가던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조들의 터전이었던 이곳 전주에서 여러 종친들을 모아 승전 잔치를 베푼 곳이다. 흥겨워진 이성계는 유방의 대풍가를 읊으면서 개국의 꿈을 키운 것으로 보인다.“센 바람이 부니 구름이 높날리네.위엄을 해내에 더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네.어떻게 용맹한 군사들을 얻어 사방으로 지킬까“오목대와 관련된 조선의 왕이 한 사람 더 있다. 오목대에 가면 고종황제가 친필로 ‘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석을 남겼다. 조선을 건국한 첫번째 왕, 이성계와 조선이 무너져가는 순간에 오목대를 찾은 조선의 마지막 후손. 조선의 처음과 끝을 전주 오목대에서 느낄 수 있을 것이다.1) 경기전(태조 진전)의 건립과 그 의미조선초기 태조의 어진을 모신 태조진전은 영흥·전주·평양·개성·경주의 5개 지역에 건립되었다. 태조가 살아있을 때 영흥과 평양, 경주에 태조진전이 건립되었고, 태조가 사망한 후에 전주와 개성에 태조진전이 건립되었다.태조진전이 건립된 지역들은, 영흥은 태조 이성계가 태어난 곳이고, 전주는 이성계의 선조가 살았던 곳이다. 개성과 경주, 평양은 전 왕조의 수도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이곳 태조진전이 건립된 영전의 이름은 후에 각각 영흥부-선원전, 개성부-목청전, 평양부-영숭전, 경주부-집경전, 전주-경기전로 이름을 고쳤다.태조진전은 새 왕조의 개창과 함께 조선초기 불안정한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태조진전이 건립된 지역들은 지역적·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태조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주의 태조진전은 태조가 사망한 후, 완산부에서 어진을 모셔다가 모사하였고, 1410년(태종10년) 9월 28일에 전주에 봉안하였다.전주에 설치된 태조진전은 건립 초기 별도의 이름 없이 경주와 평양에 태조 어진을 봉안한 전각들과 함께 어용전이라고 불리다가 1412년(태종12년)에 태조진전으로 이름을 은 “(태조가) 승하하신 뒤에는 경기전을 지어 어진을 봉안하여 전주를 중요하게 여겼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전주를 풍패로 인식하는 것은 대체로 조선초기 인식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세종, 성종대 정국이 안정되면서 관리들은 대체로 전주를 ‘국가의 풍패다운’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조선후기 『완산지』(1895) 「풍패기문」에는 ‘무릇 전주이씨의 시조인 사공 이한으로부터 목조 이하까지 대대로 완산에 살면서 왕업의 터를 닦았으니, 흐름을 따라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주는 실로 태조의 조상이 대대로 살던 고향이다. 이리하여 경기전을 창건하고 태조 임금의 초상화를 받들어 모시는 일을 하게 되었다’라며, 경기전의 설치가 곧 태조의 조상이 살던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조선시대 이성계의 고향인 영흥을 풍패로 여기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아마도 전주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호남의 역할과 가치가 제고되었을 것이다. ‘조선의 풍패’라는 인식은 정해년(1767) 대화재로 소실됐던 전주부성을 1768년(영조44년)에 중건하는 과정에서 남문과 서문을 풍남문, 패서문이라고 이름을 지음으로써 ‘풍패’를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다.한편 경기전은 창건 후 22년 만에 훼철될 심각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1432년(세종14년)에 태조의 진전을 세우는 것은 예법이 아니라는 이유로 목청전을 제외한 나머지 태조 진전은 모두 혁파해야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세종 또한 준원전과 목청전을 남기고 혁파하고자 했다. 하지만 결국 옛적의 예가 아니더라도 선왕이 건립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유지하며 국가의 제례시설을 정비하는 방안을 선택했다.1473(성종4년) 봄에는 경기전 내에 사고가 설립되었다. 세종대에 정비된 경기전은 이후 큰 변화 없이 조선 중기까지 유지되어오다가 1597(선조30년) 정유재란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다행이 경기전 내 어진은 당시 경기전 참봉 오희길과 수복 한춘에 의해 묘향산의 보현사 별전.
    인문/어학| 2014.11.28| 7페이지| 2,000원| 조회(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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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녀사냥에 대한 보고서
    중세의 흑역사 : 마녀사냥목차Ⅰ. 서론Ⅱ. 본론1) 마녀사냥의 원인2) 마녀사냥의 과정3) 마녀사냥의 결과Ⅲ. 결론참고문헌Ⅰ. 서론서양사에서 종종 중세시대를 암흑시대라고도 한다. 암흑시대라고 하는 이유에는 중세사가 고대사에서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사가 후퇴했다고 하는 평가가 들리기도 한다. 그들이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발전하지 못한 시대라고 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들을 들자면, 첫째는 종교인 듯싶다. 중세 시대에서 기독교는 빠질 수없는 부분이다. 교황의 절대적인 권력이 부패를 낳았고, 그 부패들로 인한 여러 가지 폐해가 생겨났다. 그것에 대한 돌파구로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이용해 180년간의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다. 두 번째는 여성의 대한 불평등적 사회구조였다. 이런 사회구조는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만연하게 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가부장적 제도와 중세의 폐쇄적인 사회구조는 중세시대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이라는 흑역사를 낳았다. 현대에서 마녀사냥은 특정하지 않은 인물에 대해 정확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그 사람에 대해 무차별 적인 비난을 하고 그 사람이 이 사회에서 심하게는 매장당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마녀사냥이 처음으로 시작된 때는 중세 유럽사회에서이다. 이 보고서에서는 중세시대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려고 한다.Ⅱ. 본론1) 마녀사냥의 원인마녀사냥이란 15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 약 300여 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는 마녀 사냥이 극에 달했다. 학자들은 각기 다리게 주장하지만,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의 사람이 처형됐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처형된 근본적인 원인은 유럽인들이 마녀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유해한 인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녀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하나님을 믿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을 저버린 자, 악마를 숭배하며 악마의 도움을 받아 유해한 마술을 사용하는 자, 어린애를 잡아먹고 집단적으로 난잡한 성행위를 하는 반인류적?반사회적?반기독교적인 인물 내지는 집단으로 규정했다.유럽의 민중은 마녀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정부 당국에 마녀를 고소했다. 유럽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이 마녀술이라는 죄명으로 재판을 받았다.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재판을 받은 사람 가운데 절반은 화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시대와 지역에 재판을 받은 사람의 수는 달랐지만, 마녀 재판은 근대 초기 유럽에서만 일어난 거대한 사법 행위의 한 부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우리는 이 재판을 흔히 마녀 사냥이라고 칭한다. 그렇다면 이 마녀사냥은 왜 일어나게 된 것일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학자들은 마녀 사냥의 원인을 주로 종교 개혁과 가톨릭 개혁, 특별 재판소와 법적인 고문의 시행, 종교 전쟁과 성직자의 종교적 열정, 근대 국가의 성장과 자본주의의 발달, 마약의 광범위한 사용과 의학적 사고의 변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갈등, 이교를 뿌리 뽑기 위한 노력, 대중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지배 계급의 필요성, 여성에 대한 증오 등에서 찾고 있다.마녀 사냥에서 가장 기본은 마녀 사냥 재판의 원인인 마녀와 마녀술이다. 유럽인들은 마녀술을 지칭할 때 염두에 둔 것은 흑마술이었다. 이는 이상하고 특이하며 신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 해로운 짓을 함을 뜻한다. 마녀 이야기를 믿는 사회에서 마녀는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특수하고 신비함 힘을 지닌 존재로 인식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마술이란 인간이 스스로 부릴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초능력적인 힘을 말한다. 이 힘이 바로 마술사의 힘이다. 마술사는 이 초자연적인 힘을 어떤 의식을 통해 행사한다. 이때 마술사가 초자연적인 힘을 얻는 의식을 정확히 행한다면, 그는 원하는 바를 저절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마술사가 의식을 정확하게 행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다. 마술도 원하는 효과를 획득하기 위해 신이나 기타 정령의 힘을 빌릴 경우, 종교적인 요소를 쉽게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에 종교와 마술의 경계는 아주 모호하다. 종교는 단지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다고 믿는 정령이나 신에게 기원할 뿐이고, 만약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이는 신이 그가 요구한 바를 들어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해서 기독교에서는 모든 마술 활동이 이교 신의 힘과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이교의 신은 모두 마귀라고 생각했다. 근대 초 유럽인들은 이러한 마녀의 악의적인 마술과 기독교의 적으로 악마에게 신종 선서를 하고 계약을 맺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마녀술은 곧 악마를 숭배하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기독교 역사 전반에 걸쳐 마술은 악마의 일로 간주되고, 이단의 한 형태이자 잘못된 믿음이었다.마녀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 형성되는 원인에 종교 개혁과 그 밖의 사회적인 여건이 마녀 사냥을 더욱 조장했다고 보인다. 종교 개혁은 마녀 사냥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마녀 사냥에 영향을 미쳤다. 종교 개혁가 루터와 칼뱅은 악마에 대한 이론을 폈고, 종교 개혁 이후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으로 성서의 문구처럼 악마가 현실 사회에서 사람을 위협한다고 느꼈다.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악마와 그의 추종자를 현실 사회에서 제거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마녀가 반인륜적? 반사회적? 반도덕적? 반기독교적 행위를 한다고 믿게 된 데는 당시 지배 계층의 영향이 컸다. 민중이 마녀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당시 고위 성직자, 신학자, 지배자, 법률가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지배 계층이 만든 마녀 이야기가 일반 민중에게 강제로 심어져 일반 민중도 지배 계층의 마녀 이야기를 믿게 되었다. 그것이 널리 확산되면서 마녀에 대한 공포심이 깊숙이 퍼져 광적인 마녀 사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2) 마녀 사냥의 과정13세기 이전 유럽 법원의 형사 제도는 모든 범죄, 특히 은폐된 범죄를 기소하기 어려웠다. 게르만 사회의 사법 제도는 고소에 의한 재판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에서 피해자의 고소나 고발 없이는 재판을 열 수 없고, 범죄자를 처벌 할 수도 없었다. 또한 재판이 열려 고소인이 범죄 사실을 입증할 증인이나 증거가 존재하지 않으면, 고소인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다. 이 제도로는 이단이나 마녀와 같은 범죄를 처벌할 수 없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늘어난 범죄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심문에 의한 재판 제도가 생겼다. 이 제도에서는 사법관이 풍문이나 심증만으로 범죄 혐의가 있는 자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범죄 혐의가 있는 자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처벌할 수 있었다. 교회는 이단의 확산이라는 위기에서 이러한 사법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 이단이나 마녀와 같은 범죄를 효율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사법관은 고문으로 혐의자에게 신체적 고통을 주어서 자신이 원하는 자백을 받아낼 수 있었다. 또한 고문으로 얻은 허위 사실을 동료 사법관과 나누면서 혐의자의 말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 새로운 제도로 관리는 직권으로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을 마녀로 기소할 수 있었으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직접 마녀를 고발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제도에서 혐의자의 처벌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증거 확보에 엄격한 기준을 설정한 것인데,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에는 둘 이상의 현장 증인의 진술 내지는 피의자의 자백이었다. 재판관은 이단과 마녀술과 같은 정신적인 범죄에서 증거로서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자백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자백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고문을 사용했다. 이단, 마녀술, 기타 범죄에 고문을 허용한 것은 결국 심문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교회에 의해서 심문 제도가 주도된 것을 보면 기독교가 당시 얼마나 배타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심문 제도에서 사용되는 고문에도 여러 가지 규칙이 적용되었다. 사람이 죽어선 안 된다던지, 고문실에서 받은 증언은 유효하지 않다든지, 하지만 저런 규칙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마녀술에는 예외적인 범죄로 간주하고, 규칙을 적용하지 않았다.마녀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으면, 마녀들은 대게 사형에 처해졌다. 마녀를 다른 중죄인과 마찬가지로 교수형에 처한 잉글랜드와 뉴잉글랜드 지방을 제외하고, 다른 지방에서는 그들을 화형 시켰다. 이는 전통적으로 회개하지 않는 이단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이를 마녀에게 적용시킴으로써, 이단과 같은 악마의 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역할을 했다. 화형은 이단 재판 및 교회가 폐지했던 시련에 의한 재판이 암묵적인 대안이었을 수도 있다. 더 실용적인 의미에서 볼 때, 화형은 마술을 부려 마녀가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지 않을까 걱정한 재판관을 안심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3) 마녀 사냥의 결과그렇다면 이단 운동까지 해서 마녀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여성들을 학살한 이 마녀사냥은 어떻게 없어진 것일까? 마녀사냥이 사라진 이유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종교개혁은 마녀사냥을 더욱 성행하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쇠퇴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교도들이 마녀사냥의 쇠퇴에 영향을 미친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루터와 칼뱅은 마녀사냥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고, 신교도들 역시 마녀사냥에는 가톨릭과 동참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애초에 마녀사냥의 피해 여성들은 농촌의 농민들이었다. 때문에 종교 개혁이 마녀술 재판을 궁극적으로 쇠퇴시킨 것은 사람들, 특히 농촌 주민들이 기독교화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의 특징인 이러한 기독교화 과정은 마녀 사냥을 확산시키는 데 막대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국 기독교화 과정은 농촌 주민으로 하여금 더는 마술을 믿지 않게 했고, 이로 인해 마녀 사냥꾼의 근심거리가 줄게 되었다. 이는 또한 프로테스탄트 사상에 내재된 엄격하게 영적인 개념으로서 악마를 부각시켰고, 사바트에 흑인이나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육신을 가진 피조물로 보는 견해를 더 이상 강조하지 않게 되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 성서 원리주의도 비슷한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는 마녀 사냥을 부추겼으나, 뒤에는 사냥을 쇠퇴시키는 결과로 나타났다.
    인문/어학| 2014.11.28| 5페이지| 1,500원| 조회(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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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호 16국 시대의 5호 보고서 평가A+최고예요
    5호, 융합의 문을 열다.목차Ⅰ. 서론Ⅱ. 본론1. 저,강족1) 저1-2) 전진 제국2) 강2. 흉노3. 갈4. 선비1) 전연2) 후연3) 남연Ⅲ. 결론Ⅳ. 참고 문헌▲5호 16국 시대 지도Ⅰ. 서론8왕의 난이 한참일 때 중국 대분열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5호16국 시대가 닥쳤다.‘호胡’란 근대의 ‘양洋’과 비슷했고, 호인은 양인과 비슷한, 말하자면 고대 중국에서 한족 이외 기타민족에 대한 총칭이었다. 당시 5호란 흉노, 선비, 강, 갈, 저를 말한다. 이들은 후한 말 중국의 혼란과 삼국의 분립시대에 서서히 남하를 시작하면서 4세기 초에 서진의 분열과 약체화를 틈타 민족적 자각과 한족의 경제적 착취, 정치적 모순에 항거해서 스스로의 정권을 수립하였다.5호 16국이 존립한 기간은 아주 짧다. 가장 짧은 경우가 3년이었고, 가장 긴 경우도 57년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16국 모두 5호에 의해서만 건국되지는 않았다. 중간 중간 한족도 발을 디뎠다. 이러한 복잡성 때문에5호 16국 시대를 좁은 시각에서 한정해 본다면 정권의 다극화와 불안정이 주목된다. 하지만 5호 군주들은 민족국가를 수립함과 아울러 한족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원래의 유목생활 방법을 버리고 농경생활로 전환하였으며 정치 사회적 종족주의를 타파해 호한체제 위에 군림하는 황제를 지향했다. 이로써 중국의 분열 시대에서 통일로 가는 과도기인 동시에 호한체제라고 하는 중국사의 새로운 역사적 전개를 이룩하게 되었다. 따라서 5호가 한민족과 공존상태 속에서 행했던 호한체제와 5호 각족의 발전과 활약상을 설명하고자한다. (13개 나라 중 특징적으로 알려져 있거나 뛰어난 호한체제를 행했던 나라만을 다룰 것을 알린다. -‘* ’ 표시-)Ⅱ. 본론1. 저, 강족‘저’는 ‘강’의 한 갈래로 티베트계인 이민족이다. 저족은 감숙 남부에서 사천 북부의 산지에 살고, 강족은 청해에서 황하 상류 및 조수 유역에 살고 있었다.삼국시대에 중국인구가 감소했을 때 한차례 이상 저족과 강족을 군사적 개간지로 강제 이주시켜 경제 저인들은 마침 팔왕의 난이 계속 확대되어 고향(약양)은 여전히 기근에 허덕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고향 약양으로 돌아가 굶어 죽느냐, 여기 남아 서진 정부에게 살해당하느냐, 아니면 정부에 대항해서 반항할 것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은 분노한 상태인지라 당연히 반항을 선택하였다. 추장 중에서 이특(李特)을 지도자로 뽑아 무장한 다음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특은 이때 바로 전사했지만 그 아들 이웅 (李雄)은 303년에 성도를 함락시키고 304년 성한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347년 환온에 의해 멸망당한다.1-2) 전진전진의 창립자 부홍은 약양(略陽) 저족 출신으로서 ‘영가의 난’을 틈타서 저족 여러 부족의 맹주가 되었다. 10여만에게 추대되어 대장군, 대선우(大禪于)로 자칭했으나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어 셋째 아들 건(楗)이 아버지를 이어받아 대선우라 하고 나라를 세웠다. 건국 당초 부건의 세력은 일부에 한정되었으나 354년 동진 환온(桓溫)의 북벌을 저지 한 후 세력이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다. 부건은 국가 수립에 착수하면서 덕망있는 노인을 우대하고 유학을 존중하는 등 한문화 향상을 도모하고 국내 상업을 융성시키면서 남쪽 동진과도 교역, 통상을 해서 국고를 충실히 하는 데 힘썼다. 이를 위해 한족 출신 지식인, 상인을 등용하였다. 부건이 죽자 아들 부생이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357년에 그 사촌관계인 부견(符堅)이 군대를 이끌고 부생을 죽였다.부견은 5호 16국 중에서 뛰어난 군주의 한 사람으로 전진 제국은 그의 통치 아래 정상 궤도에 올랐다. 부견은 8세 때부터 유학적 교양을 갖추고 그 막하에는 왕맹(王猛) 등 한˙저족 출신의 뛰어나고 훌륭한 영호들의 보좌를 받았다. 즉위 뒤에는 한문화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을 방침으로 삼아 학교를 세우고 서민 가운데서도 학문적으로 능통한 자는 임관시키는 등 한(漢)나라와 같은 제국 건설을 목표로 삼은 것 같다. 특히 가난한 한족 출신 지식인 왕맹을 재상으로 기용해 국정을 다에게 공격 당하여 패사했으며 부씨 일족인 등(登)이 요씨(姚氏) 정권과 8~9년 동안 대립하다가 피살되어 부씨 일족의 명맥은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394)2) 강(羌)종족명국가명존속기간개국군주강 (羌)*후진384-417요장강족의 요장이 장안을 점거해서 수도로 정하고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대진(大秦) 이라고 하였다(386). 역사에서 부씨의 전진과 구별하기 위해서 후진이라고 한다.요장이 죽은 뒤 그의 큰 아들 흥(興)이 자리를 이어받아 전진의 잔여세력을 소탕, 낙양을 공략하고 또 동진으로부터 땅을 빼앗고 후량국을 멸망시켰다.요흥은 강족 추장으로는 걸출한 인물로 무술만 연마한 것이 아니라 젊어서부터 싸움터에서도 경서 읽은 것을 끝내지 않을 정도로 문사에 힘썼다고 한다. 후진의 국주가 되고서도 나이 많은 지식인을 장안에 초빙하여 청년들을 가르쳐서 이끌고 관중의 한족 출신 지식인을 등용했다. 요흥은 유학과 불교를 중시하여 인도의 승려를 장안으로 영입해서 후대하고 국가사업으로 경전을 번역하는 등 이후 중국의 대승불교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요흥은 재위 22년에 죽고 그의 큰아들 홍(泓)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동진 유유의 군대로 장안이 함락 당한다. 홍은 유유의 군대에 투항하여 동진의 수도 건강에서 살해되었고 후진국은 32년 동안의 짧은 명운으로 멸망하였다.종족명국가명존속기간개국군주흉노(匈奴)*한조304-329유연북량397-439저거몽손호하407-431학련발발2. 흉노(匈奴)중국 역사에서 5호시대의 혼전을 불러일으킨 원인은 멀리 후한 초의 남북 흉노의 분열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살필 수 있다. 분열된 흉노 가운데 남흉노는 후한 제국에 투항하여 장성지대에서 유목이 허용되었다. 그 뒤 200여 년 간, 흉노족은 서서히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유연도 한족문화를 받아들인 소수민족 수령이었다. 그는 흉노족 모둔선우의 후예인데, 일찍이 한 고조 유방과 모둔이 의형제를 맺었으므로 내지로 이주한 그 자손들은 성을 고조의 성인 유씨로 고쳤다.유연은 어릴 적부터 유교 경대선우 이외에 흉노족 고유의 관직인 좌우현왕 등이 존속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흉노는 그 생산양식이 유목적인 것에서 정착적 목축양식으로 바꾸어 졌다고는 하지만 정치는 아직도 전통에 따른 부족 연합 체제를 유지하여 부족적 결합이 보존되고 있었다.유총은 경전과 역사에 통달하고 문무를 겸비했지만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한족의 지지를 얻는 정책을 버리고 민족 압박 정책을 취했다. 낙양을 점령한 병사들에게 방화하고 죽이고 약탈을 자행하게 했으며, 남아 있는 서진 관리들을 모조리 참수하도록 했다. 유총의아들인 유찬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주색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때 한족 출신 근준은 유찬을 살해하고 유씨의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이는 변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한(漢)조 제국은 15-16년만에 멸망하였다.정변이 일어난 뒤 주둔하고 있던 대장 석륵과 장안을 지키던 친왕 유요(劉曜)는 서로 독립하여 석륵은 후조(後趙) 건립하고 유요는 전조(前趙)를 건립하기에 이른다.3. 갈 (?)종족명국가명존속 기간개국 군주갈 (?)*후조319-351석륵석륵은 양국에서 자립하여 왕으로 칭하고 후조를 건국했다. 석륵은 이민족 출신이지만 한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한족을 정치 학문 교화 등 여러 분야에 이용하려고 했다. 이를 위해여 한족 지배계급의 특권적 지위를 보유케 해서 병역과 노역을 면제하는 우대 정책을 강구했다. 위진 시대에 따른 구품 선거제를 실시해 한인 지배계층을 그 정권 안으로 흡수하면서 정치제도와 문화 분야를 한화 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씨 일족도 호한 이중 체제를 시행하고 있었으나 그 우위가 호(胡)족 우위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호인들은 일반 한인들에게 폭행, 비행이 상당이 많았던 것 같다.어느 날 참군 번탄이 장무내사로 발탁되어 석륵을 알현했을 때 그 외관이 너무 남루하여 사유를 묻자 번탄이 말하기를 “앞서 갈족에 약탈되어 재산이 모두 없어지게 되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석륵은 웃으면서, “무도한 갈족이로다. 내가 변 그가 죽자 230년대에는 수 개의 부족집단으로 분산된다. 3세기 중엽부터 선비족 가운데 3~4개의 부족이 두각을 드러냈다. 그 가운데 모용부(慕容部)가 세운 전연과 후연, 남연을 설명하고자 한다.(1) 모용부-전연(前燕)선비족 모용부(慕容部)는 요서 일대를 근거지로 살던 부족으로 서진(西晉)에 복종하면서 선비의 다른 부족과 항쟁을 벌였다. 모용부의 수장 모용외(慕容?)는 307년부터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를 자칭하고 자립하였다. 모용외는 혼란에 빠진 서진의 유민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강화하였으며, 319년 서진의 동이교위(東夷校尉) 최비(崔毖)를 물리치면서 요동(遼東) 지방의 패권을 획득하였다.모용부는 요서로 옮겨온 뒤 주로 영내에 흘러 들어온 한족 유민을 통해서 한문화를 수용 섭취해서 한화되어 갔다. 사회 문화적으로는 유목적 성격을 벗어나 통치조직까지도 한족의 것으로 전환해 갔다.모용외의 뒤를 이어 전연의 왕이 된(337) 셋째 아들 황(?)은 병법과 더불어 경학(經學)을 배우고 천문(天文)에도 통하는 중국적 교양을 갖춘 문무양면에 뛰어난 소질이 있는 위인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황의 모용부 세력 확대 과정에서 같은 선비족 출신인 단부를 후조(後趙)의 석화와 남북에서 협격하여 타파하고 그 부족을 양분해서 영유하였다. 또 고구려에 타격을 가하고 북쪽의 우문부(宇文部)를 멸망시켰다(344). 이리하여 모용부는 지금까지의 요동과 요서는 물론이고 북으로는 시라무룬 강 유역에서 만주 중부까지, 남으로는 장성을 넘어서 북경과 천진의 북쪽에서 산서 동북부에 걸친 넓은 영역을 지배하는 대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3대 연왕은 모용준이었다.(348) 이 때, 후조(後趙)에서는 염민이 쿠데타로 정권을 수립하는 내란이 일어나자, 이 틈을 타 계성(현 북경)에 진주하고 염민 정권을 멸망시켜(352) 제위에 올랐다.(358) 그는 위진(魏晉)체제에 따라 관료기구를 정비하고 그 부조(父祖)를 황제로 추존하는 등 완전히 중국 체제로 전환을 지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인과 그 다.
    인문/어학| 2014.11.28| 8페이지| 1,500원| 조회(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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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물농장 독후감
    《Animal Farm》1George Orwell『Animal Farm』의 시대적 배경, 혹은 책 속에서 풍자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배경이 내게 보다 익숙했다. 책에 대한 그 정도의 사전지식만 가지고 『Animal Farm』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생각 이상으로 책에 빠져들었고 평소 서양사보단 한국사에 더 관심이 갔던 내게 이 책의 시대적 상황, 서양 근대사에 대해 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어졌다. 이 리포트에서 George Orwell이 글을 이용해 풍자, 비판하고자 했던 동물들, 혁명, 사회주의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내 관점으로 얘기해보고 싶다.첫째로, 농장 속 수퇘지 〈메이저〉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메이저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일까, 그는 농장 속 동물들에게 새로운 혁명의 바람을 일으키고 생을 마치면서 농장이 마침내 그렇게 변질 될 것이란 걸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메이저가 살았던 시대는 어땠을까, 그가 한 책 속의 연설에서 “나 자신으로 말하면 운이 좋았던 편이라 별로 투덜댈 생각은 없소. 나는 12년이나 살았고 내가 퍼뜨린 자손만도 4백 마리가 넘소. 그게 돼지의 자연스런 일생입니다. 허나 어느 동물도 끝에 가서는 무지막지한 칼날을 피할 수 없소.” 메이저는 다른 동물들의 일반적인 일생을 언급했지만 정작 본인은 일반적인 동물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아마 메이저는 혁명 이전의 군주제 사회 속 많은 지식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졌던 지식인층을 대변하고, 나아가서 뒤에 똑똑한 돼지들과 농장 속 동물들의 이념의 배경을 제공했기에,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 이념을 제시한 칼 마르크스를 비유한 것인 듯싶다. 하지만 내가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점 중 꼭 사회주의에서 뿐 아니라 동·서양 역사에서 지식인들은 그들이 직접 겪지 보지 않고 백성, 혹은 민중, 혹은 노동자들의 현실, 고통을 대변한다. 그리고 그들은 정작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태어나, 공부하고 그 알량한 지식으로 그들을 위한 해결방안이라며 혁명을 유도했다. 물론 모든 지식인을 그렇게 인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식인에 대한 내 개인적인 인식은 그렇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 지식인으로 한 사람의 훌륭한 독립 운동가가 존재한다면, 그 뒤엔 수많은 앞서 말했던 지식인 같은 친일파 지식인들이 존재했다. 나는 그들이 민중들을 삶을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들에겐 절실함이 부족한 것이고 그만큼 쉽게 변질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해서 소설 속 지식인층을 혁명 이전의 지식인을 대변한 메이저도 그렇다. 메이저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농장은 변질되지 않았을까? 메이저는 나폴레옹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 또한 알 수 없다.농장 주인인 존즈가 쫓겨나고, 이 으로 그 이름이 바뀜으로써 혁명이 이루어졌다. 농장을 이끄는 지도자는 농장에서 가장 똑똑한 동물인 돼지인 나폴레옹과 스노볼이다. 이 혁명은 소위 말하는 러시아 혁명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런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 뿐 아니라, 중국, 북한의 혁명도 대입해 볼 수 있다. 각기 다른 나라이고 다른 역사를 가졌지만 서로 많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역사가 시대별, 나라별로 유사성을 띤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은 분명 새로워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으로 변하게 되었다. 동물들이 꿈꾸었던 사회는 “그녀(클로버)의 머릿속에 담긴 미래의 그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굶주림과 회초리에서 벗어난 동물들의 사회, 모든 동물이 평등하고 모두가 자기 능력에 따라 일하는 사회, 메이저의 연설이 있던 그날 밤 그녀가 오리새끼들을 보호해 주었듯 강자가 약자를 보호해 주는 그런 사회였다. 그런데 그 사회 대신 찾아온 것은, 아무도 자기 생각을 감히 꺼내놓지 못하고 사나운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돌아다니고 동물들이 무서운 죄를 자백한 다음 갈가리 찢겨죽는 꼴을 보아야 하는 사회였다.” 책 속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변하고자 했지만 결국 변하지 않았다. 변한 것은 농장의 주인이 존즈에서 지도자가 나폴레옹으로 바뀐 것뿐이리라. 초기 혁명 상황에서 내세웠던 7계명은 이미 그 자체의 7계명이 아니었다. 나는 북한과 중국의 이름이 떠올랐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처럼 이름뿐인 인민들의 나라, 선거를 해서 나라의 대표를 뽑고, 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독재가 만연하고, 이미 사회주의의 그 순수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더 낳은 삶을 살고자 용기 내어 혁명을 일으켰지만 결국 기득권만 바뀐 이 상황에 그들이 다시 할 수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George Orwell이 나폴레옹을 권선징악을 내세우며 이야기를 마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혁명이 일어났지만 결코 혁명이 아니었던 사회를 보며 또다시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아마 혁명이 일어났던 것도 잊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는 이상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나폴레옹과 스노볼의 공동 체제에서 나폴레옹의 독재체제로 바뀌고 농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일들이 스노볼의 책임으로, 스노볼이 혁명가에서 ‘가증스런 반역자’로 둔갑되었을 때 비로소 노동 혁명은 나폴레옹의 독재체제로 완성되었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가 결국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로 완성되었을 때, 어떤 시대든 최하층인 민중들은 더 낳은 삶을 살기란 힘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민중, 노동자들은 그러했지만 신랄한 사회비판자인 두 혁명가들은 왜 그렇게 변질 되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권력이란 그런 것일까 하는 생각들이 들었다. 예전에 어떤 강의의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김구선생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독재는 없었을까?”우린 당연히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건 모르는 것”이라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교수님의 그 말씀에 온전히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는 되었다. 결국 젊은 혁명가였던 나폴레옹은 독재자가 되었으니까. 스노볼이라면 그렇지 않았을까? 그것도 결코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독후감/창작| 2014.11.28| 3페이지| 1,500원| 조회(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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