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시기와 요술 사건국어국문학과20140040 이예빈목 차1. 머리말2-1. 건륭제와 그 시기2-2.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본 요술 사건3. 맺음말1. 머리말라는 제목은 겉보기엔 상당히 흥미롭게 보인다. 영혼과 같이 초자연적인 것은 언제나 사람들의 호기심과 흥미를 끌기 마련이고, 필자 또한 그랬다. 어떤 사람들이 누구의 영혼을 훔치는지, 그것이 1768년 중국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호기심이 일었다. 더군다나 현재까지도 말이 많은 ‘영혼’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그 당시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궁금하였다.책을 모두 읽고 난 후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시대 상황이 백성들의 생활 및 정서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시점에서 바라볼 때, 요술 사건은 정말 터무니없는 사건이며, 신경 쓸만한 사건도 아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의 중국은 요술 사건을 상당히 큰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백성들은 요술 사건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며 조금만 수상한 사람이 보이면 폭력을 행사하거나 신고를 하였고, 황제는 요술 사건과 ‘모반’이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따라서 필자는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본론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로 요술 사건이 발생한 건륭제 시기에 대해서이다. 당시 건륭제는 어떤 정치를 하고 있었고, 나라의 상황이 어떠하였는지에 대해 다뤄볼 생각이다. 둘째로 요술 사건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왜 건륭제 시기에 발생하였는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요술 사건이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등을 토대로 요술 사건이 가지는 의미를 밝혀보고자 한다.2-1. 건륭제와 그 시기건륭제는 청나라 제 6대 황제로 1735년부터 1795년까지 60년간 재위하였다. 그의 조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시기까지를 흔히 ‘태평성대(太平聖代)’라고 부른다. 그만큼 당시의 중국은 겉보기에 평화롭게 보였고, 국내・국외를 통틀어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건륭제 시기는 태평성대의 끝자락으로, 내리막길을 걸794년 3억 1천 300만 명으로 늘었는데, 빠른 시기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잉인구 문제는 당시 건륭제에게 큰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급격하게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또한, 이민족 통치를 하고 있는 만주족의 입장에서 볼 때, 한족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빈부격차에 관한 문제이다. 당시 중국은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등 경제적인 측면에서 노력하고 있었고, 상당히 성장하였다. 그러나 경제 시장은 불안정하였으며, 지역 간의 경제적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났다.즉, 개개인의 빈부격차 문제와 함께 지역 간의 빈부격차 문제까지 겹쳐, 차이를 완화시키고 문제를 해결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경제적 하층민들은 유랑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떠돌기 시작한다. 그들은 불교나 도교 사찰 등에서 전전하며, 사찰의 재산을 축내거나 불법 행위, 구걸 등을 하며 생존을 모색하였다. 이렇게 떠도는 생활을 하는 그들은 훗날 요술 사건과 연루되어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더 문제인 것은 그들이 불법 행위를 함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그들을 제지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경제적 하층민들 대부분은 거지 혹은 종교인의 모습으로 있었는데, 당시 중국은 종교인들의 상황을 파악하는 체계가 엉망이었다. 게다가 종교인의 모습을 한 그들은 밤낮으로 떠돌아다녔기에 범죄를 추적하더라도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세 번째로 관료들에 대한 문제이다. 당시 대부분의 관리들은 무사안일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순무와 성급 관리들은 하급 관리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였고, 주접을 통해 황제에게 전해야할 사항도 본인들끼리 입을 모아 올리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관료들의 부패와 생산성 상실에 따라 관료 기구의 효율성 역시도 저하되었다. 심지어 몇몇 관료들의 한족을 따라하는 듯한 행위들은 건륭제의 심기를 심히 불편하게 만들었다.이렇듯 건륭제 시기의 문다. 건륭제는 이러한 문제들을 엄격하게 다루었으며 관료들에게도 강압적인 면모를 보였다. 이러한 시기에 발생한 요술 사건은 건륭제가 관료들의 폐해에 대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는 2-2에서 다루도록 하겠다.2-2.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본 요술 사건왜 하필 건륭제 시기에?건륭제 시기에 발생한 요술 사건은 필연적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필자는 단순한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건륭제 시기에 야기된 많은 문제들이 ‘요술 사건이 발생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 듯 보였다. 특히나, 척박한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요술과 관련한 두려운 소문은 쉽게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적인 분위기와 함께 백성들의 심리적 공황이 요술 사건을 만들어낸 것이다. 굳이 요술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비슷한 양상의 문제가 반드시 발생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단순히 시기가 맞물린 사건이 아니라, 건륭제 시기였기에 일어난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한다.요술 사건 : 정치적 측면요술 사건은 건륭제 시기의 정치가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앞서 말했듯이 건륭제 시기는 관료들의 부패가 상당했다. 요술 사건이 터지기 시작하면서, 관료들의 무능함 역시 드러난다. 관료들은 소문의 진원지를 파악하는 등의 빠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다. 주접 제도로 인해 황제에게 올려야하는 친전서에도 초기 대응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쓰지 않는다. 사실상 황제는 소문으로 요술 사건을 접하게 된다.더불어 요술 사건 용의자 조사 과정 중에도 문제는 발생한다. 당시 중국의 고문 제도는 상당히 고통스러웠고, 용의자들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거짓 진술을 하거나 말을 번복한다. 이러한 상황은 요술 사건의 진범을 찾는데에 더욱 어려움을 야기할 뿐이다. 건륭제는 이에 대해 고문을 자제하라는 상유를 내리지만, 관료들은 황제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고문을 실행하였던 것 같다. 건륭제 역시, 조사 과정 중에 크게 다치거나 병을 얻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성들에게 엄격하게 지킬 것을 강요하였다. 만주족의 문화인 변발을 통해 한족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표시함을 물론 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동질감을 느끼게끔 시도한 것이다. 강요의 정도가 상당히 심하여서, 변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반역자 취급을 당해 사형에 처하기도 하였다.그런데 요술 사건의 핵심은 ‘변발을 자른다’는 것인데, 이러한 행위는 건륭제에게 모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요술 사건의 용의자가 모반을 꾀하며 정권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인 것이다. 조사 과정 중에도 관료들에게 실수가 없도록 하라 명령하였다. 또, 변발을 자른 행위에 대해 세세하게 조사를 하였으며, 용의자를 수색하는데 혈안이 된 것이다.요술 사건 : 사회적 측면백성들은 두려웠다. 영혼을 도둑맞는다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보다 변발이 잘린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변발을 자른다는 것은 반역을 꾀한다는 의미로 통하고 있었기에, 변발이 잘리면 본인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목이 잘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요술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퍼지면서 백성들은 변발에 무척이나 예민하게 굴었다.이렇듯 예민한 상황에서 낯선 사람은 더욱 더 경계할 대상이었다. 당시 중국은 유랑민들이 많았다. 그들의 대부분은 거지이거나 종교인이었는데, 구걸의 행위 등을 통해 생존을 모색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서 수상함 낌새가 보이기만 해도 바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신고하였다. 요술 사건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는 낯선 사람을 보기만 해도 바로 폭력을 행사하고 신고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더군다나 이렇게 혼란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인물 양상이 보이기 마련이다. 변발을 잘라서 잡힌 사람들의 대부분은 윗사람에게 ‘변발을 자르면 돈을 지급받는 것’을 약속받은 상황이었다. 한 푼, 한 푼이 귀한 하층민들에게는 그것이 꽤 쏠쏠한 돈벌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술 사건의 용의자로 잡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윗사람이 변발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어떠한 이익이 있으니깐 사주를 한 것일싶다는 이유로 상대를 요술 사건의 용의자로 몰아간다. 마치, 상대가 진짜 다른 사람의 변발을 자른 것 마냥 일을 꾸미고 증거를 남긴 것이다. 조사 과정 중에 오해가 풀려서 좋게 끝난 적도 있겠지만,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꼼짝없이 용의자로 몰려 벌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듯 요술 사건을 이용한 허위고발문제 역시 사회에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요술 사건 : 경제적 측면경제적 측면에 대해서는 정치적・사회적 측면에 비해 할 수 있는 말이 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측면을 따로 표시해놓은 것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바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변발을 잘라오면 돈을 주겠다는 말에 넘어가서 변발을 자른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라고 보기보다는 생존하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더 마땅한 것 같다. 그러나 정말로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사람들의 공포 심리를 이용한다. 세상이 곧 멸할 것이나 우리들이 만든 부적을 사면 괜찮을 거라는 식으로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하여 부적 등을 팔고 이익을 보는 비밀종파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이들이 온전히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목적으로만 비밀종파를 형성하여 활동한 것은 아니나, 비밀종파의 상당수는 분명히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3. 맺음말요술 사건을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하고 그 의의를 찾고자 한 것이 본 글의 목적이었다. 따라서 건륭제 시기를 대략적으로 살펴보았고, 요술 사건의 다양한 측면도 이야기해보았다. 요술 사건은 시기적절한 사건이었으며, 우연한 계기로 발생한 사건도 아니다. 또한, 요술 사건은 사회적으로 혼란을 야기하였는데 그것이 단순히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영향이 아니라, 정치적・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요술 사건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때, 그 의의를 네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의의를 마지막으로 본 글을 끝맺도록 하겠다.첫째, 나라에 혼란을 야기한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둘째,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함이 적나라하이다.
를 읽고 –소설 직지, 과연 직지를 중심으로 해서 어떤 내용을 풀어내고 있을지 호기심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솔직히 말하면,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흘러가듯이 직지에 대해 배운 것 말고는 아는 게 없다고 할 만큼 부끄럽지만 난 그렇게 무지한 상태였다. 나에게 새로운 것은 언제나 구미를 당기는 일이기에, 도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는 액자형의 틀을 유지한 이야기로, 외적인 이야기에는 진무와 희지가 등장한다. 진무와 희지 사이에 ‘진려’라는 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한 때 사랑했던 사이였으나, 진무가 스님이 된 후로 그 둘은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시간이 꽤 흐른 후, 둘은 재회하게 되고 진무는 희지에게 효진 스님이 쓰셨다는 에 대해 이야기해준 후, 자신은 직지를 찾으러 중국에 가야된다며 희지에게 뒷일을 부탁한다. 그러나, 진무는 결국 돌아오지 못하고 만다. 여기까지가 외적인 이야기고, 내적인 이야기는 효진 스님의 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배경은 공민왕 때, 12살의 어린 석찬은 왜구로부터 부모와 형제를 모두 잃고 백운 선사를 따라 승려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석찬은 십여년의 시간이 흐를동안에도 부모님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떠올리며, 참선이 무엇이고 무심이 무엇인지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다. 방황하는 석찬을 백운 선사는 조급한 마음없이 기다려주었다. 그러다 백운 선사는 법린과 함께 직지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방황하는 석찬은 등 위의 무거운 짐을 깨부수고 오라는 백운 선사의 말을 듣고 바로 다른 길로 떠나게 된다. 고향인 합포를 가나 그곳엔 진정 스승님이 말하신대로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석찬은 왜구의 침입으로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몇을 데리고 청주목으로 가, 그들이 청주목에서 정착할 수 있게끔 도와준다. 또, 석찬은 화선이라는 이흥령의 가녀를 만나 애틋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화선과 석찬은 서로를 애정의 마음으로 품게되나, 둘에겐 기녀와 승려라는 신분의 얽매임이 있었고, 또 화선에게 집착하며 그녀를 감시하는 유숭이 석찬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위협했기에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그리워할 따름이었다. 그들은 아주 가끔씩 유숭의 눈을 피해 만나나 결국엔 유숭의 귀에 다 들어가게 되고, 안그래도 승려의 타락을 혐오하며 폐불을 외치던 유숭은 결국 석찬을 해치기까지 한다. 상처를 치료하며 쉬던 석찬은 백운 선사가 입적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간다. 백운 선사는 그에게 고부 정씨 부인을 찾아가라하곤 입적한다. 그 후, 석찬은 직지를 찾기 위해 애쓰고, 직지의 간행을 위해서는 백성들의 마음이 진정 직지의 간행을 원해야된다고 여겨 마을에서 설법회를 하는 등 점차 스승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유숭에게 직지를 빼앗기나, 화선이 유숭의 눈 앞에서 자결한 후, 직지의 본뜻을 이해하게 된 유숭은 충격을 받고 그대로 길을 떠난다. 그 후, 석찬과 법린, 다른 30여명의 승려들이 직지를 금속활자로 간행하기 위해 애쓸 때, 유숭은 몰래 그들을 도와주며 자신의 지난 날을 사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직지는 100권의 책으로 만들어져 다른 스님들과 고부 정씨 부인, 그리고 백성들에게 나눠지게 된다. 직지의 길을 걷게된 석찬은 스승의 마음을 이해하고, 뜻을 이해하며 무심과 참선에 대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은 석찬이라는 승려의 번뇌와 방황, 기녀와의 애정 관계, 성장 과정과 깨달음 등을 세세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공민왕 시절, 당시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왜구의 잦은 침입과 왜구의 침입으로 인해 자신의 마을이 언제 불탈지, 자신들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백성들, 그런 혼란스러움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꾀했던 미륵불과 같은 미신들, 타락하는 승려들과 폐불을 외치는 권문세가 및 유학자들이 당시 사회가 얼마나 불안정했고, 혼란스러웠는지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나는 불교에 큰 관심이 있지도 않았고 잘 몰랐지만 이 책을 통해 불교의 문화라던가 불교의 사상과 같은 것들을 다양하게 간접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석찬을 통해 승려가 깨달음을 얻고 무심에 도달하기까지의 고뇌와 방황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며, 평소에 막연히 있던 승려에 대한 거리감이 완화되는 것 같았다. 또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승려를 보면 염불을 외워달라는 백성들, 죽은 가족의 극락왕생을 빌어달라는 백성들의 모습 등 힘없는 백성들이 종교밖에 의존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정치가 안정되고, 왜구에 침입에 잘 대비하는 병력을 키웠더라면, 백성들은 좀 더 안정감있는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안타까움은 공민왕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관심을 갖게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검색을 해보기도 하고, 관련된 책을 찾아보기도 했다. 이라는 책이 있는데,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이 책도 읽어보고 싶다. 그러면 속 의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이 백성들에게 끼친 영향, 불교에 끼친 영향 등을 이해하는데에 더욱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하나, 안타깝다고 여겨졌던 건 진무의 이야기에 나오는 정부나 청주시 등의 태도이다. 직지 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재들이 외국에 보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에 외교적인 관계라던가, 우리 나라의 상황 등이 문제가 된다치더라도 우리는 너무 적극적이지 못한 것 같다. 책에 나온 것만 봐도 언제든 발 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이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나라에서 먼저 문화재의 소중함을 알리고, 그것이 왜 우리나라 것인지, 우리에게 왜 소중한 것인지 등의 의의와 가치를 제대로 알려 많은 사람들이 깨닫고 그것을 되찾기 위한, 또는 그것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작은 행동을 실천할 수 있게끔 해야 할 것 같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서 큰 물결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나부터가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된 책을 더 읽고, 더 공부하여 작은 힘이라도 보탬이 되고싶다. 처음에는 진무가 왜 저렇게까지해서 직지를 찾으려하나 그다지 와닿지 않았는데, 다 읽고나니 어렴풋이 공감이 된다. 그래도 직지를 검색해보니, 최근에 청주시에서 직지의 상권을 복원하는 일을 추진한다는 좋은 소식이 들려 다행스러웠다. 앞으로, 직지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갖고, 그것에 대해 더 공부하고 그 가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공간 예술의 이해제 1 과제차 례목적과 동기계 획과 정후 기1. 목적과 동기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어언 8개월이 지났습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대전을 방문하긴 하지만, 주말을 이용하기 때문에 대전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을 뿐 더러 특히, 1학기 때는 집에 가고 싶은 날이 많아 힘들었습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공간 예술의 이해를 들으며 “우리 동네 순례”라는 과제를 접하게 되었을 때, 대전에 내가 사는 동네를 순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편안함만 추구하자면 현재 살고 있는 학교 근처 동네를 순례해도 되었겠지만 고향이 그립기도 했고, 15년 가까이를 살았던 동네를 다시 한번 천천히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또, 그것이 과제를 하는데 좀 더 진지하게 임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어 예정에 없던 대전행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11월에 15년 가까이 살았던 동네를 떠나 그 옆 동네로 이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정든 동네와 인사도 할 겸 하는 마음도 있었기에, 더 찬찬히 동네를 둘러보기로 하였습니다.2. 계획계획은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소설에도 여로형 소설이 있듯이, 제 레포트의 과정도 여로형으로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지도를 참고하여 동네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식으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사진을 찍으며 내가 몰랐던 공간이나 변화한 공간 등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습니다. 제가 8개월 가량 동네를 떠나있었기에, 동네에서 계속 지내며 동네가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봐 온 동생과 동행하기로 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며 이동할 것이기에 예상 소요 시간은 약 1시간에서 1시간 20분 정도로 넉넉히 잡고 천천히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3. 과정동네의 지도입니다. 동네 입구에 있는 지도를 참고하여 돌아다니려고 사진을 가장 먼저 찍어 두었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인 ‘변동’뿐만 아니라 옆동네, 더 옆의 동네인 내동, 가장동의 지도도 나와 있습니다. 빨간 원으로 표시한 부분이 제가 순례하게 될 동네인 ‘변동’입니다. ‘변동’의 전체가 아닌 제가 사는 마을인 ‘목운 주택 단지’를 중심으로 순례를 진행할 예정입니다.빨간 원으로 표시한 부분을 확대한 모습입니다. 주택 단지 마을인 만큼 주택들과 빌라로 빼곡하며, 놀이터가 2개 있고 초등학교, 중학교가 각각 하나씩 있습니다. 옆으론 ‘도솔산’이라는 뒷산이 보입니다.㉠ ㉡㉠은 동네의 가장 위쪽입니다. ‘목운 주택 단지’는 도솔산이 마을을 빙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는데, 최근에 일부 산을 밀어버리고 옆 동네와 이어지게끔 길을 뚫었습니다. 옆 동네와 이어진데다가 새로 생긴 도솔 터널과도 바로 근처라 다른 동네로 가는데 훨씬 편리하지만 외관상 좋지만은 않습니다. ㉡은 동네의 위쪽에 있는 절입니다. 평소에 관심이 없었는데 자세히 보니 굉장히 화려한 것 같습니다. 절 이름은 ‘감로사’라고 합니다. 사진에는 없지만, 최근에 감로사에서 동네 노인 분들을 위한 요양원을 새로 지었습니다. 한달에 두 번 정도씩 동네에 올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동네가 변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동중학교제가 졸업한 중학교입니다. 제가 다닐 때만 해도 흙 운동장에, 칙칙한 벽돌 건물이었는데, 약 2년전에 리모델링을 해서 운동장에 인조 잔디와 달리기 코스를 깔고 건물은 화사하게 변했습니다. 집에서 7분 거리라 밤에 산책하러 자주 오는 곳이기도 합니다.위 세 사진은 동네 뒷산인 ‘도솔산’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동네에 도솔산으로 이어지는 길들이 이외에도 참 많았는데, 산이 많이 밀리면서 길도 몇 개 남지 않았습니다. 많이 안타깝지만, 사진 외에도 몇몇 개의 길이 더 남아있고 그 길로도 등산하기에는 충분하니 다행입니다. 길로 다듬어진 곳도 보이지만, 예전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아 저절로 길이 된 곳들도 보입니다. 산이 동네를 빙 둘러싸고 있기에 공기도 매우 청정합니다.이 곳은 옆동네 ‘S여고’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동네 주민이 아니면 잘 모를만할 것 같이 생겼습니다.확대한 모습 ☞으슥해 보이기도 하고, 풀이 우거져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만 안다는 지름길입니다. 저도 15년 가까이를 살면서 잘 몰랐었는데, 함께 동네 순례를 했던 동생이 알려줘서 최근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S여고’로 이어지는 길 중에서는 가장 최단 시간이 걸리는 길이라고 합니다.동네의 아래쪽을 가보니 못 보던 집들이 많아서 약간 놀랐습니다. 구석 쪽에 이렇게 으리으리하고 거대한 집이 있을 줄 예상을 못해서 그런지 더욱 감탄한 것 같습니다. 특히 (←) 왼쪽의 사진 속에서 보이듯이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계단이 있어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집의 거대한 정원이어서 부러움의 탄성을 내뱉었습니다.동네의 아래쪽에 높은 부지가 있어서 올라가 보았습니다. 동네가 한 눈에 내려다보여서 굉장히 반가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 멀리 보이는 갈색 건물은 위에서 언급했던 내동중학교의 옆에 위치한 ‘서부초등학교’입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졸업한 학교입니다. 동네의 건물들과 공간, 그리고 여백처럼 말끔한 하늘이 어우러져서 굉장히 정겨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진에 멋진 전경을 다 담아낼 수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4. 후기계획에 맞춰서 동네의 위쪽부터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며 진행하였습니다. 제가 못 보던 사이에 생긴 낯선 공간부터 친근한 공간까지, 그리고 오랜 세월 살았던 만큼 새로이 변화한 공간이 많이 보였습니다. 반가워하기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하면서 약 1시간 가량 동네를 돌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제가 사는 ‘목운 주택단지’라는 공간은 사실 그렇게 큰 동네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석구석에 마치 비밀처럼 숨겨진 공간들이 있었고, 그걸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이제는 11월에 이 동네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많이 안타까웠기에 더욱 눈에 담아두고, 사진에 담아두려는 마음으로 이곳 저곳을 누비며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우리 동네 순례”라는 주제에 무엇을 담아야 할 지 막막한 마음도 있었는데, 산보를 나가듯이 편안한 마음으로 임하니 이처럼 유쾌한 주제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이 동네는 오래된 만큼 굉장히 많이 변화하였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산도 많이 밀렸습니다. 몇 년 전에 재개발을 한다며 아파트 지구를 만든다는 통보가 있었는데, 동네 주민들의 큰 반발에 금방 무산되고 안락한 동네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동네 주민들은 ‘목운 주택단지’라는 이 공간을 소중히 여기며 생활하고 있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도 동네가 많이 변하겠지만 지금의 이 과제를 떠올리며, 동네 하나하나의 공간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의미론 - ‘의미’의 의미와 변화목 차1. 서론2. 본론가. 의미의 의미나. 의미의 변화3. 결론4. 참고문헌1. 서론국어학에서 다루는 내용은 다양하고 광범위하여서 여전히 공부 및 연구가 필요하다. 음운론, 문법론, 의미론, 통사론 등 다양한 개론으로 나뉘며, 거기에 더불어 국어의 역사 및 특성까지 배우게 된다. 국어학도 이렇듯 수많은 분야로 나뉘며 각각의 개성이 있다. 국어학을 공부하다 보면 훈민정음 창제 이후 발전해온 국어학의 역사가 실로 경이로우면서도 흥미롭다. 그 중에서도 내 흥미를 가장 끈 부분은 의미론이었다. 단어의 의미 및 문장의 의미, 단어와 문장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기는 새로운 의미, 의미의 변천사, 중세 국어 단어와 현대 국어 단어의 의미 차이 등 융통성있고 실생활과의 밀접한 관련도 있다. 그렇게 절로 흥미가 생기고 의미론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일 것이다. 물론, 아직도 나는 의미론 전반을 이해하지 못했고, 다 공부하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본 글에서는 의미론 중에서도 더 공부하고 싶었던 ‘의미의 의미’ 부분과 ‘의미의 변화’ 부분을 살펴볼 것이다.2. 본론가. 의미의 의미의미의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이 글의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론’의 정의를 알고 가겠다. 의미론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의미를 다루는 분야, 즉 말 그대로 언어의 의미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언어란 ‘음성+의미’로 이루어진 만큼, 언어학에서 의미론은 중요한 연구 분야이다. 의미론은 어휘론, 화용론과 함께 다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만큼 언어의 의미가 단어 및 문장, 실제 발화까지 관여하기 때문이다.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 않다. 의미는 우리의 직관력과 통찰력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만큼 의미는 그 의미가 놓인 환경에 따라 의미가 확대, 축소, 이동 및 변화하는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이때, 의미의 의미를 살펴볼 때는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가 지시설이고, 다른 하나가 개념설이다.지시설은 하나의 표현이 가리키는 지시물이 언어의 의미라는 것이다. 즉, 언어 표현의 의미를 그것이 지시하는 세상의 사물인 ‘지시체’와 동일시하는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래의 예를 보도록 하겠다.㉠ 불㉡ 강동원이 가게에서 사과를 샀다.㉠을 보면, [불]이라는 음성은 실제 사물인 ‘불’을 가리킨다. 이 때의 실제 사물은 지시대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말소리는 단순한 물리적인 실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말을 아는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기억되어 있는 머릿속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청각영상이라고 한다. ㉡에서는 ‘강동원’과 ‘사과’에 주목해보겠다. 문장의 ‘강동원’은 한국의 잘생긴 남자 영화배우를 가리키고, ‘사과’는 대개 동그랗고 빨간 과일을 가리킨다. 이 역시도 지시대상이 곧 의미라는 지시설의 근거가 된다. 특히, ‘강동원’, ‘한강’, ‘숭례문’ 등의 고유명사는 명백한 어떤 개체를 지시함으로 지시적 표현의 대표적인 예이다.더욱 일반적인 개념으로 개념설을 들 수 있다. 개념설은 언어의 의미가 지시대상에서 추려낸 개념, 즉 심리적 영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가 대표하는 것은 실재하는 나무이기보다는 우리 마음 속에 형상화된 나무라는 견해다. 나무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들의 공통점을 뽑아 마음 속에 나무라는 형상을 만들게 되고, ‘나무’라는 단어는 그 심리적 영상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개념설의 심리적 영상은 심적 표상과 연결되기도 한다. 심적 표상 역시 심리적 영상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언어 사용자가 세상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언어 표현이 직접 사물을 지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화자가 가지는 세상에 대한 심적 모형을 통한 간접적 연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래의 예를 보도록 하겠다.㉠ 진호는 현주가 좋았다.㉡ 진호는 현주를 좋아했다.같은 상황을 기술하지만 ㉠과 ㉡이 표현 양식이 다른 것은 심적 표상이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듯 표상적 관점에 따르자면 다른 방식의 개념화가 세계의 상황 기술에 영향을 미침을 알 수 있다.이러한 심리적 영상 및 심적 표상을 흔히 ‘개념’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을 음성으로 표현한 것이 ‘기호’라고 한다. 여기서 오그든과 리차즈의 기본삼각형을 살펴보도록 하겠다.개념기호 지시물위의 삼각형은 기호의 표의작용을 나타낸 것이다. 기호와 개념의 관계, 개념과 지시체의 관계는 기본적이며 직접적이고, 기호와 지시체의 관계는 간접적이다. 즉, 외부 세계의 어떤 사물(지시물)이 화자의 마음에 생각(개념)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그에게서 기호를 이끌어낸다. 다시 말해서, 한 단어의 의미란 지시물 자체가 아닌 이 지시물의 심리적 영상(심적 표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나. 의미의 변화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언어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아서 사회, 역사, 또 다른 언어 등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를 거듭한다. 의미가 항상 일정하지 않고 여러가지 원인에 의하여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19세기에 접어 들면서 인식되어 지기 시작하였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19세기 문헌학이 과학적 학문으로서의 지위를 얻으면서 의미에 대한 깊은 연구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의미변화의 초기의 연구는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을 결과와 원인 양면에 두고 탐구하는데 주력하였고 그 성과도 컸다. 최근에 이르러 국어의 의미 변화 현상에 대한 많은 연구가 다양한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개척의 여지가 많다.의미 변화의 원인은 무척이나 다양해서 그것을 일일이 수를 메기며 나열하기가 어렵다. 수많은 연구가 있는 만큼, 언어 변화의 원인을 나열하는 기준과 방식도 다르다. 그렇기에 수업의 주교재인 ‘국어학개론’에 나온 것을 기준 삼아 의미의 변화 원인을 살펴보겠다.㉠ 언어적 원인㉡ 역사적 원인㉢ 사회적 원인㉣ 심리적 원인㉤ 외래어의 영향㉥ 신어의 필요성㉠의 언어적 원인은 어떤 단어가 자주 놓이는 문맥에 감염되어 그 의미에 변화를 입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확고한 생각을 뜻하는 ‘주착’이 주로 ‘없다’와 어울려 부정적 의미인 ‘주착없다’가 된 경우가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의 역사적 원인 대상(지시물)은 변모하였는데, 단어는 언어의 보수성, 즉 단어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킴으로써 의미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글씨’의 개념은 원래 붓을 가지고 손으로 그린 것을 의미한다. 필요한 도구는 종이와 붓과 먹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쓰는 도구가 연필, 펜, 볼펜, 만년필, 타자기 등으로 다양해짐에 따라서 어느 것으로 썼든지 ‘글씨’로 통용된다. 이렇게 글을 쓰는 도구인 사물의 발달로 지시물이 진화했으나 언어의 보수성과 마찰을 일으키며 의미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인 것이다.㉢의 사회적 원인은 일반적 용법의 단어가 어떤 특수 사회집단에서 그 의미가 특수화하여 의미의 축소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나, 반대로 특수한 집단에서 쓰이던 단어가 일반사회에서 쓰이게 되면서 그 의미도 일반화하여 의미의 확대를 초래하게 되는 경우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신분 사회에서 당상관 벼슬을 뜻했던 ‘영감’은 오늘날에 와서 노인, 남편에 대한 호칭으로 바뀌었다. 또 일반적인 의미로 쓰인 ‘구원’, ‘아버지’ 등이 기독교 내에서는 ‘죄에서의 해방’, ‘하나님’으로 쓰이는 것도 그 예이다.㉣의 심리적 원인은 화자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특징이나 경향에서 의미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은유와 금기가 있다. 먼저 은유는 어떤 사물을 그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다른 사물로 나타내는 비유의 한 가지인데, 예를 들어, ‘게으른 사람’을 ‘나무늘보’라 하는 것이다. 금기는 사회적 관습에 따라 어떤 대상을 직접 말하지 않고 다른 말로 대신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폐병’을 ‘가슴앓이’, ‘마마(천연두)’를 ‘손님’, 오줌을 ‘소변’이라고 하는 것이다. 금기와 관련되는 심리 작용에 따른 이러한 현상을 완곡표현이라고 한다.㉤의 외래어의 영향은 말 그대로 외래어가 유입되면서 의미의 변화가 생기는 것이다. 한자어나외래어의 차용에 의해 국어가 밀려남으로 의미체계에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을 뜻하기도 한다. 그 예로, 우리 말의 ‘셈’을 ‘계산’으로 쓰는 것과 연예인을 부를 때 영어 ‘star’의 영향으로 ‘별’이라고 부르는 것 등이 있다.㉥의 신어의 필요성이 의미변화의 원인이 되는 예를 살펴보겠다. 어떤 새로운대상이 생기면 그에 대한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하여 복합어를 만들 수도 있고, 외국어를 차용해 쓸 수도 있으며, 이미 만들어진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쓸 수도 있는데, 어떤 경우이든 의미변화가 생기게 된다. 예를 들어 지하로 다니는 운송수단이 생겨 ‘지하철’이라는 새로운복합어를 만들어 ‘차’의 기존의 의미보다 의미가 확대된 것이 있다.3. 결론지금까지 의미와 의미, 의미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평소에 흥미가 있었던 주제라 그런지 재미있게 끝마칠 수 있었다. 특히나, 배운 부분을 다시 살펴보고 여러 논문과 책을 찾아보며 더욱 깊이있게 공부할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다. 의미의 변화 부분에 있어서 사실 어려움이 약간 있었다. 여러 논문을 봤지만, 원인에 대한 통일성이 없이 다 각자의 기준에 맞게 의미 변화 원인을 나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교재를 토대로 하여, 다른 논문은 참고하는 정도로만 하였다. 아직도 공부할 부분이 많고 내가 다룬 주제를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긴 여정이 필요하지만, 지금을 시작으로 더욱 깊이있는 공부, 학구적인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겠다.4. 참고문헌- 이익섭•장소원, 국어학개론,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강범모, 언어 : 풀어쓴 언어학 개론, 한국문화사- 마성식, 국어 의미변화 원인과 유형설정을 위한 연구, 한남대학교 한남어문학회, 한남어문학
봉산탈춤 감상문어렴풋한 내 기억 속, 봉산탈춤을 접해본 건 아마 고등학생 때이다. 수능 연계 교재에 봉산탈춤의 양반•말뚝이춤 부분의 대본이 나와있어서 ‘봉산탈춤이 이런 내용이구나~’하며 읽었던 게 생각난다. 그래서 그런지, 공연을 보고나서 내가 알고 있었던 봉산탈춤은 극히 일부분이며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던 과거에 반성의 생각도 들었다. 봉산탈춤은 총 7과장으로 나눠지는데, 과장 속에서도 또 이야기가 나뉜다.(예를 들면, 제 4과장 노장춤이 제1경 노장춤, 제2경 신장수춤, 제3경 취발이춤으로 나뉘듯이 말이다.) 봉산탈춤은 벽사진경의식무(사상좌춤과 지노귀굿),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일부대처첩의 3각관계와 서민의 생활상으로 그 줄거리를 크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7과장으로 나눠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유쾌하게 전달하고 있어서, 감히 가벼운 주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흥미롭게 볼 수 있었다.처음, 원형의 무대에 봉산탈춤 전승자들이 모두 등장하여 굿으로 시작한다. 공연의 무사 기원, 관객의 만사형통을 비는 의식인데, 참여하고 싶은 관객은 무대로 오라고 하여서 많은 관객이 무대로 내려갔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의식을 치르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많은 사람들이 봉산탈춤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 같기도 해서 더욱이 공연에 대한 기대감이 상승했다. 굿이 끝나면 제 1과장 사상좌춤부터 제 7과장 미얄할미영감춤까지 쭉 이어진다. 사상좌춤은 앞서 있던 굿의 연장선상에 있는 춤으로, 상좌 네 명이 등장하여 동서남북의 사방신에게 제를 올리는 의식무를 춘다. 처음은 구슬픈 가락으로 시작을 하여, 가락의 변화와 함께 춤사위가 소극적,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특히, 흰 소맷자락이 휘날리는 선을 보자니, ‘아름다움’이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과장에 비해 비교적 짧았던 사상좌춤이 끝나면 바로 제 2과장 팔목중춤이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유쾌하게 본 과장이자, 신명나는 추임새가 절로 나오는 과장이었다. 처음 등장방식의 춤은 처음 봐서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발 끝을 많이 이용하며 강약을 조절하는 듯한 춤사위가 섬세한 탈춤의 세계로 이끄는 것 같았다. 총 8명의 목중들이 등장해서 팔목중춤이라고 불리는데, 각각의 목중들이 북 장단에 맞춰서 등장하고, 빨라지는 북 장단에 맞춰 퇴장하는 식의 반복이 관객으로 하여금 더욱 흥미를 끈 것 같았다. 각각의 목중들은 무대에 등장한 후, 앞서 있던 목중을 때리고, 그러면 맞은 목중은 들어가고 때린 목중이 다시 추임새를 넣고 말을 하며 춤을 추는 식으로 진행된다. 8명의 목중들은 같은 방식으로 등장하고 퇴장하지만, 각자의 몸짓, 재담, 노래, 춤 사위 등에 모두 차이가 있어서 보는 재미가 더욱 쏠쏠했다. 또, 신나는 장단과 춤 동작에 관객들도 ‘얼쑤~’, ‘좋다~’, ‘지화자!’ 등의 추임새를 함께 넣으며 즐기는 모습에 나까지도 절로 덩실거리게 되었다. 공연이 일방향적인 것이 아닌, 양방향적인 모습을 지녀서 절로 들뜨게 되는 것 같다. 제 2과장 팔목중춤은 그 안에서도 제 1경 팔목중춤, 제 2경 법고놀이로 나뉘는데, 여덟 명의 목중들이 단체로 나와 춤을 추다가 퇴장하면, 바로 제 2경 법고놀이 부분이 시작된다. 이 부분은 ‘법고놀이’를 ‘벗구놀이’로 듣고 말장난을 치다가 결국 법고를 치며 노는 것으로 끝나는데, 말장난하는 부분이 해학적이라 끝까지 즐겁게 볼 수 있었다. 웃음과 흥을 돋군 제 2과장이 끝나면 제 3과장 사당춤이 시작한다. 사당이 거사의 등에 업혀 등장하는데, 거사의 등에서 내려온 사당이 선창을 하면 사당을 따라온 모든 거사들이 따라부르며 분위기는 점점 고조된다. 능숙한 그들의 노래와 동작들이 그들이 얼마나 노련하게 준비해왔는지 실감할 수 있게끔 해준다. 제 3과장이 끝나고, 제 4과장 노장춤이 시작하는데, 노장춤이 봉산탈춤 전체 7과장 중에서 딱 중간에 있고 가장 긴 부분이라 그런지, 봉산탈춤의 절정이라고 느껴졌다. 노장춤은 파계승놀이를 소재로 한 과장인데, 또 세 부분으로 나뉜다. 노장춤, 신장수춤, 취발이춤으로 하였다. 제 1경 노장춤, 노장 스님과 팔목중이 함께 들어온다. 팔목중이 노장 스님을 탈판으로 이끄는데, 노장스님은 중간에 슬며시 빠지고 팔목중이 노장스님의 지팡이만 메고 가다가 노장스님의 부재를 알아차리고 차례대로 찾아 나서는 내용이다. 차례로 노장스님을 찾아 헤매지만 다시 돌아와서는 날이 흐렸다, 옹기집을 벗어 놓았다, 숯짐을 벗어 놓았다 등의 말과 함께 헛걸음질을 치며 돌아오다가 여덟째 목중이 노장스님이 있는 곳에 가서 자세히 본즉 노장스님이더라며 백구타령과 오도독이타령을 부른다. 그러한 과정에서 목중들의 ‘그려~~~~~~어이!’와 같은 추임새로 시작하는 말과 ‘백구타령을 돌돌말아서 귀에다 쏘로로로록-‘과 같은 재치있는 말투가 귀에 와 박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목중들의 들이댐에도 나름 묵묵히 있었던 노장 스님이 소무의 교태스러운 춤과 능란한 유혹에 빠져, 자신의 염주까지 걸어주며 결국 파계하고 만다. 소무와 함께 춤을 추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다가 신장수에게서 소무에게 신겨줄 신을 산다. 신장수의 등장과 함께 제 2경이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신장수의 짐 속에서 빨간 원숭이가 튀어나온다. 신장수가 밀치면, 원숭이도 밀치고 신장수가 엉덩이를 때리면, 원숭이도 똑같이 신장수의 엉덩이를 때리는 등 신장수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며 반복되는 행동에 관객들이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였다. 더욱이, 원숭이의 작은 체구를 보며 귀여움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본 기억이 난다. 신장수와 원숭이가 퇴장하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취발이가 등장한다. 소무와 함께 노는 노장스님을 꾸짖으며 소무를 걸고 춤으로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춤으로 노장스님에게 이기지 못하고 노장스님을 때려서 내쫓고 소무를 차지한다. 또 소무에게 돈을 보여주며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둘은 결국 함께 춤을 추다 아이도 낳는다. 아이의 이름은 마당에서 낳았다 하여 마당이라고 지어준다. 굉장히 풍자적인 성격이 강한 과장인 거 같은데, 이러한 면모가 현재의 사회에도계한 노장스님, 노장스님에게서 무력으로 소무를 뺏은 취발이, 돈으로 소무의 환심을 사는 취발이의 모습, 또 돈을 보며 바로 마음을 돌리고 취발이와 사랑을 나누는 소무의 모습 등이 단순히 당시의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현재 사회도 풍자하는 듯 하였다.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봉산탈춤을 지금에 와서 보게되고, 그것이 시사하고 비판하는 바가 현재 사회가 흘러가는 맥락과도 통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사회악 같은 것들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인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시간을 가지고 좀 더 많이 생각해보고 싶다. 아무튼 제 4과장 노장춤이 끝나고 제 5과장 사자춤이 시작하였다. 처음 공연만 봤을 때는 그저 ‘사자를 소재로 다룬 춤이구나’하며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후에 사자춤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자니 꽤나 깊은 의미가 있는 부분이었다. 팔목중과 취발이, 노장스님 등 앞서 나왔던 모두가 승려의 신분을 파계하고 세속을 즐기며 히히덕거리는 모습에 부처님이 노하여 벌하고자 보낸 것이 바로 이 사자였다. 이에 모두 회개하여 잘못을 빌고 용서를 청한다. 사자는 모두를 용서하고 화해의 춤을 추는데, 흰 갈기가 휘날리면서 사자의 춤사위가 더욱 강조되고 멋있게 비춰진 것 같다. 막판에 사자가 일어선 듯한 모습을 취하는데, 그 모습이 거대하면서도 신기해서 절로 감탄이 나왔다. 사자를 이런 식으로 묘사한 조상들의 재치에 존경스러운 생각도 들었다. 드디어 제 6과장, 내가 봉산탈춤에서 가장 처음 접했던 부분인 양반•말뚝이춤이다. 여기에 나오는 양반들은 양반 계급을 돈으로 사서 신분을 탈바꿈한 사람들이다. 무식하면서도, 유식한 척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비꼬며 풍자하고 있다. 그들의 종인 말뚝이의 등장으로 적나라하게 양반을 비꼬고, 풍자하고 있다. 특히, 고등학생 시절 접했던 ‘개잘량이라는 양자에, 개다리소반이라는 반자 쓰시는 양반들이 나오신단 말이오’라는 부분을 직접 극을 통해 들으니 대본으로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왔가 다 후련한 기분까지 들었다. 기나긴 여정을 마칠쯤, 바로 제 7과장 미얄할미영감춤이 시작한다. 서민들의 삶을 담고 있는데, 특히 그 속에서도 일부 대처첩의 삼각관계를 중심 소재로 다루고 있다. 시작은 할미와 영감이 번갈아 나오며 서로를 찾아 헤매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 할멈의 모습은 하두 흉해서 댈 수가 없다네.’처럼 서로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는 모습이 유쾌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용산삼개덜머리집의 등장과 함께 영감이 할미를 막 대하며 결국은 때려 죽이는 모습을 보자니 내가 다 억울하고, 미얄 할미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고개를 내밀었다. 극 중에서도 미얄 할미의 혼을 달래주기 위하여 지노귀굿을 한다. 공연 시작 전의 굿과 같은 맥락인데, 미얄 할미의 혼을 달래주는 동시에 놀이판의 끝맺음을 알리고, 마지막 정화를 위한 의식 인 것이다. 이렇게 총 7과장의 봉산탈춤은 기나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마지막, 봉산탈춤 공연자들이 함께 나와 인사를 하는데, 나까지도 벅차는 기분이었다. 1년에 단 한 번 뿐인 공연이라는 의미를 떠나서, 이렇게 어느 하나에 몰두하고 그것을 전승, 계승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에 절로 박수가 나왔다. 덕분에 이렇게 훌륭한 공연을 볼 수 있고, 봉산탈춤에 대한 관심도 생기게 해줘서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공연이 계속 하는 날까지 쭉 보고 더욱더 애정을 키워가고 싶다. ‘봉산탈춤’ 많이 들어보고, 익숙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너무나 무지했고, 알아가야 할 부분이 아직도 너무 많다는 것에 숙연한 마음도 들고, 더 찾아보고 공부해보고 싶단 생각도 크게 들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얻어, 멋진 공연을 보고 올 수 있어서 무척이나 감사하고 뜻깊은 시간을 보냈음에 교수님께도 감사하다. 같은 학과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이런 경험을 함에 학과에 대한 애정도 매우 샘솟는 듯 했다. 앞으로 봉산탈춤을 보며 느낀 기분과 다짐 등을 계속 안고가며 좀 더 공부하고,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키우며 봉산탈춤을 비롯한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