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의 죽음의식 고찰- 라깡의 욕망이론 중심으로< 차 례 >1. 들어가며2. 유년의 기억과 죽음의 상관성3. 죽음의식의 발현 양상(1) 아버지와 동일시를 실현하는 상상계(2) 죽음에 대한 타자의 욕망을 치환하는 상징계4. 나오며1. 들어가며시대가 엄혹할수록 시인의 역할은 빛난다. 시인은 억압과 열정, 불안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기형도의 시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근대적 삶의 위기에 대한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시의식은 타락한 문명세계를 부정하고 비관적으로 바라본 1930년대 이상의 시 「오감도(烏瞰圖)」와 ‘원수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1970년대 신동엽의 시론에 이미 그 단초가 놓여 있다. 기형도의『입 속의 검은 입』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80년대적인 틀에 묶여 있지 않고 오히려 90년대 이후 현대 시에 보이는 문학적 징후를 선취하고 있다. 1989년 이후 대외적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이념과 거대담론들이 흔들리기 시작할 무렵과 맞물렸다. 후기산업사회에 접어들었던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고 국내 문단의 상황은 ‘문학의 죽음’과 위기의식에 휩쓸려 있었다. 죽음에 관한 미의식이 기형도의 신드롬을 자극하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기제가 되었다고 본다.기형도는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한 그는 정치적 색채가 가득한 민중시 ? 노동시가 주류였던 당시에 묵시적인 언어와 독특한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다져나갔다. 1989년 만 29세에 사망할 때까지 불과 5년 남짓한 활동기간을 가졌다. 그의 저서로는 그해 5월에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되었다.비록 짧은 기간 동안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중적인 관심과 지속적인 평가를 받는 원인에 기형도가 요절시인이었다는 점과 1980년대 후반에 문예지가 많이 생겨났다는 외적 요인 작용했다. 그러면서도 지속된 관심은 작품 내적인 측면에서 기형도의 시가 갖는 개성을 꼽을 수 있다.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봄이 오면 아버지도 나으실 거구. 風病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잖아요. 마늘을 까던 작은누이가 눈을 비비며 중얼거렸지만 어머니는 잠자코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수건을 가만히 고쳐 매셨다.2아버지. 그건 우리 닭도 아닌데 왜 그렇게 정성껏 돌보세요. 나는 사료를 한줌 집어던지면서 가지를 먹어 시퍼래진 입술로 투정을 부렸다. 농장의 목책을 훌쩍 뛰어넘으며 아버지는 말했다. 네게 모이를 주기 위해서야. 양계장너머 뜬 달걀 노른자처럼 노랗게 곪은 달이 아버지의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이리저리 흔들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팔목에 매달려 휘휘 휘파람을 날렸다. 내일은 펌프 가에 꽃 모종을 하자. 무슨 꽃을 보고 싶으냐. 꽃들은 금방 죽어요 아버지. 너도 올봄에 벌써 열 살이다. 어머니가 양푼 칼국수를 퍼담으시며 말했다. 알아요 나도 이젠 병아리가 아니예요. 어머니. 그런데 웬 칼국수에 이렇게 많이 고춧가루를 치셨을까.3방죽에서 나는 한참을 기다렸다. 가을 밤의 어둠 속에서 큰누이는 냉이꽃처럼 가늘게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이번 달은 공장에서 야근 수당까지 받았어. 초록색 추리닝 윗도리를 하나 사고 싶은데. 요새 친구들이 많이 입고 출근해.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도 있고 맛도 좋으니까.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누이의 도시락 가방 속에서 스푼이 자꾸만 음악 소리를 냈다. 추리닝이 문제겠니. 내년 봄엔 너도 야간 고등학교라도 가야 한다. 어머니. 콩나물에 물은 주셨어요? 콩나물보다 너희들이나 빨리 자라야지. 엎드려서 공부하다가 코를 풀면 언제나 검댕이가 묻어나왔다. 심지를 좀 잘라내. 타버린 심지는 그을음만 나니깐. 작은누이가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는 아무것도 해온 일이 없고.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약값을 줄일 순 없다. 누이가 까던 감자가 뚝 떨어졌다. 실패하시고 나서 아버지는 3년 동안 낚시질만 하셨어요.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들을 건졌어. 이웃 농장에 가서 닭도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위협받고 있다. 유년의 자아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며 바람 소리가 무섭다고 호소한다. 그런데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어머니는 안심시켜주기는커녕 그 울음 소리의 진원지가 방 바깥의 어느 먼 곳이 아니라 바로 그의 내부임을 지적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세계-삶의 비극성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유년의 부정적 세계관에 정점을 찍은 사건은 차례차례 진행되는 죽음의 변주이다. 어린 날의 친구이자 보호자였던 바로 위 누이의 죽음은 시인의 삶에 큰 충격을 준다.누이여또다시 은비늘 더미를 일으켜세우며시간이 빠르게 이동하였다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너의 생애를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중략)…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떠다니는 내 기억의 얼음장마다잠글 수 없는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아아, 하나의 작은 죽음이 얼마나 큰 죽음들을 거느리는가나리 나리 개나리네가 두드릴 곳 하나 없는 거리봄은 또다시 접혔던 꽃술을 펴고찬물로 눈을 헹구며 유령처럼 나는 꽃을 꺾는다-「나리 나리 개나리」일부‘하나의 작은 죽음’으로 표현했던 누이의 죽음은 실상 ‘큰 죽음’을 거느리는 파동의 근원지다. 누이의 죽음은 그의 시세계에 ‘상실의식’을 각인시킨다. ‘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누이의 생애를 꺾어버린 기억의 봄’을 시인은 극복하지 못하고, 희망 혹은 삶의 열망을 상징하는 봄을 스스로 꽃을 꺾어버림으로서 상실한다. “평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가을무덤-제망매가」) 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유년 시절의 누이의 죽음은 존재의 상실을 경험하게 하며 그의 시세계에 ‘죽음의식’의 근저를 이루게 한다.그해엔 왜 그토록 엄청난 눈이 나리었는지. 그 겨울이 다 갈 무렵 수은주 밑으로 새파랗게 곤두박질치며 우르르 몰려가던 폭설. 그때까지 나는 사람이 왜 없어지는지 또한 왜 돌아오지 않는지 알지 우리들의 환한 家系를. 봐요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는 저 冬至의 불빛 불빛 불빛.-「위험한 家系 ? 1969」일부앞서 시의 전반부에서 확인했듯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중풍으로 누워계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족들은 일선으로 뛰어든다. 가난 속에서도 영특한 어린 기형도는 상장을 받아도 자랑할 가족이 곁에 없다. 반장이기에 가정방문을 해야 한다는 담임선생님을 저지하고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우는’ 행동을 할 만큼 그는 내성적이며 외로웠다. 아직은 따뜻한 보호 받아야할 어린 기형도의 곁을 지켜주는 이가 없다. 다만 병들어 누워 계신 ‘여전히 말씀도 못하시고 굳은 혀’의 아버지뿐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요. 아버지 혼자, 낮에는요’에서 그의 의식 속의 아버지는 ‘아무도 없는 집’을 대변하고 있다. 그에게 아버지는 한없이 무기력하고 가족의 부담이 되어가는 존재인 것이다.일반적으로 상상계에서 대타자는 어머니가 그 대상이 되지만, 어린 기형도의 동일시 대상은 누워계신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최초의 대타자인 어머니가 완벽하지도 않고 결여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어린아이의 거세 콤플렉스가 형성되듯이, 그는 타자인 아버지의 결여를 깨닫게 되면서 콤플렉스를 갖게 된다. 병을 얻어 쓰러졌다는 이유로 가족을 부양하는 경제적 역할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는, 가장으로서의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기형도가 자신을 아버지의 모습에 투영하여 아버지와 동일시하면서 ‘자신 = 아버지의 죽음’으로 각인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래의 시들에서 아버지와의 동일시로 각인된 기형도의 죽음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반 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고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단단한 몸통 위에,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아아, 노랗게 단풍든다.-「病」전문상상계에서 유아는 타자와의 동일시를 통해 완전체의 자신을 자각하게 되며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되나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그는 앉아 있다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요히 핥는그의 탐욕스러운 눈빛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침이 흘러내리는 입과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내가 아직 한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단 한걸음도그의 틈입을 용서할 수 없다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손으로는 쉴새 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여전히 입을 벌린 채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 속에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늙은 사람」전문앞에서 기형도는 아버지와 동일시함으로서 스스로를 ‘이미 늙은 것’으로 표현했다. ‘늙은’이 원래 가리키고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였음을 「늙은 사람」에서 다시 확인 할 수 있다. 기형도의 아버지는 중풍으로 스스로 육체를 통제할 수 없다.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과 ‘침이 흘러내리는 입’은 기형도의 아버지를 지칭하고 있다. ‘허옇게 센 그의 정신’에서 아버지는 육체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정신마저 죽어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정신과 육체적 죽음의 과정을 겪는 아버지는 욕망한다, 화자의 건강하고 탄탄한 육체를.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혐오하며 배척하는 화자를 보고 ‘시선을 떨어뜨린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것은 삶의 애착을 포기함이라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육체에 갇힌 거추장스러운 정신을 해방시키고 싶어 한다. 이는 아버지가 죽음을 욕망한다고 볼 수 있다. 죽음의 욕망을 보여주는 다른 시를 살펴보겠다.구름으로 가득찬 더러운 창문 밑에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마룻바닥 위에그의 손은 장난감처럼 뒤집혀져 있다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온 것처럼비닐 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감정이 없는 저 몇 가지 음식들도마지막까지 사내의 혀를 괴롭혔을 것이다-「죽은 구.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김준오, 『詩論』중「詩와 詩語」중심으로< 차 례 >1. 들어가며2. 시란 무엇인가2.1 시의 정의2.2 시의 언어3. 나오며1. 들어가며아리스토텔레스는 詩論(Poetics - 詩學)을 정의하여 ‘詩 그 자체와, 詩의 종류들과 그 각 종류의 독특한 기능의 문제, 그리고 작품이 아름다워지기 위하여서 플롯을 어떻게 형성해야 하며 어떤 부분으로, 얼마나 많은 부분으로 플롯을 형성해야 하는지, 기타 등등의 문제’를 다루는 이론이라고 하였다. ‘詩學’은 조직된 방법과 체계를 갖춘 시의 학문으로 시론보다 객관성을 가진 것이며, 지식을 기술하고 논하는 학문으로서의 존재 의미를 가진다면 시론은 시학이 담당하고 있는 범주까지를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그렇다면 시란 무엇인가? 그 개념부터 살펴보자. 우선 시는 산문과 대립되는 장르로서 리듬을 가진 운문의 문학형태이며 창작문학의 의미를 띠고 있다. 시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서정시를 생각한다. 서정시란 서구의 경우 어원적으로 음악과의 관계가 고정되어 있지만, 오늘날에는 서사와 극과 함께 문학의 큰 갈래 명칭으로 사용하며, 시와 서정시를 사실상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영미문학권에서 시에 해당하는 용어로 poem과 poetry의 두 가지가 있는데, 이 poem은 어떤 특정의 구체적 작품을 가리키는 말로서 ‘형식’의 개념을 가진다면, poetry는 장르 개념이자 ‘내용’의 개념으로 일반적으로 모든 poem을 가리키는 시정신의 추상적 용어이다. 우리나라에서 동일성이라는 용어로 서정시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학자는 김준오라 할 수 있다.김준오의『시론』전체를 꿰뚫고 있는 개념이 바로 이 동일성이다. 그가 사용하는 동일성이란 개념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부상한다. 동일성을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동일이 말하는 ‘세계의 자아화’보다는 폭넓은 개념이다.다음 장에서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 김준오의 『시론』에서 다루는 ‘시의 정의’와 ‘시의 언어’의 주요 내고 불변적인 것으로 설정하여 모방하는 ‘개연성’을 말하는 당위적 진실을 가치기준으로 한 모방론을 말한다. 이 개연성은 리얼리즘 문학의 ‘박진성’과 구분된다. 그러나 현실과의 관련 문제는 모든 문학에 제기되는 기본항이므로 70년대 민중시는 리얼리즘 시를 대표하는 전형으로서 모방론에 입각해 있다.표현론적 관점은 시를 시인 자신과 관련시켜 보는 시관이다. ‘자기 표현’이 시의 목적이 되고 이 관점은 낭만주의의 산물이며, 낭만주의 비평가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표현론에서 작품 평가의 기준은 ‘성실성’이다. 이는 고전주의 시대의 가치기준으로서 일종의 문학적 에티켓인 ‘적격’과 대립된다. 적격을 파괴함으로써 문학의 독창성을 획득하고 성실성은 탄생된다. 표현론은 문학을 자기표현으로 보기 때문에 개성적인 것, 독창적인 것이 가치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성실성은 시인 개인의 상상력이나 마음의 상태에 대한 ‘진실성’이다. 모방론에서는 대상의 진실성이 가치기준이지만 표현론에서는 예술가 자신의 진실성이 그 기준이다.효용론적 관점은 시를 ‘전달’로 보는 것, 독자에게 끼친 어떤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획득하는 성공 여부에 따라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독자의 반응에 초점을 둔 문학관이다. 이 효용론은 진리의 전달로서 ‘교시적’ 기능과 정서의 전달로서의 ‘쾌락적’ 기능으로 수렴된다. 개화기 시가, 카프시, 참여시, 노동시, 정치시 용어들은 모두 교시적 기능과 연관된 현대시의 유형이다. 생산문학과 소비문학의 구분도 그 기준은 문학의 교시적 기능이다.구조론적 관점은 서양의 가장 지배적 시관이 되어 왔다. 반면에 동양에서는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는 시관이 지배적이라서 고전시학에서 표현기교는 시관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었다. 신비평에서 시의 가치기준은 복잡성과 구체성이다. 이것은 poetry보다 poem의 측면에서 시를 본 데서 이미 시사되었다. ‘포괄의 시’, ‘형이상학 시’, ‘비순수의 시’ 등의 용어들은 시의 이런 미적 가치를 기술한 것으로 시의 복볼 수 있다.서정시의 장르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시정신 또는 시적 세계관이나 비전에서 발생한다. 서사나 극과 구분되는 시정신은 단적으로 말해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즉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이다. 시에서 자아와 세계의 만남이 동일성으로서의 만남이 되는데, 듀이는 이를 미적 체험이라고 정의한다. 자아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동화되어 있듯이 대상(세계)은 자립적 의의를 갖지 못하고 주관(자아)에 종속되므로 ‘거리의 서정적 결핍’이 서정시의 본질이다. ‘세계의 자아화’, ‘回感’, ‘내면화’ 등의 용어들은 이런 시적 비전을 기술한 것들이다.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은 시의 원래의 모습이자 시인의 몽상하고 갈망하는 고향이다. 이런 자아를 서정적 자아라고 부른다. 대상에 자립적 의의를 인정하고 대립하는 서사적 자아와 변별되어 서정적 자아는 대상을 자신의 욕망과 의지대로 변형시킨다. 조동일 교수는 서정적 자아를 주관과 객관, 감정과 이성이 구분되지 않는 상태이며 세계와의 접촉 없이도 존재하는 자아라고 기술한다. 하지만 문명의 시대에 본연지성으로서의 서정적 자아는 기질지성의 서정적 자아와의 대립 ? 갈등을 인위적으로 극복하여 합일의 경지를 몽상하게 된다.시인이 의식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을 추구하는 데는 동화와 투사의 방법이 있다. 동화란 시인이 세계를 자신의 내부로 끌어들여서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세계의 자아화이다. 투사의 방법은 자신을 상상적으로 세계에 투사하는 것, 곧 감정이입에 의해서 자아와 세계가 일체감을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 서사장르에서는 인물들이 상호 주체가 되기도 하고 객체가 되기도 하지만 서정장르에서는 서정적 자아가 객체화되는 법이 없다. 현대시들에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고 대립과 갈등이 지배적인 현상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세계의 자아화라는 서정장르 이론과 전면적으로 불일치하는 것이며 이것은 서정시 이론의 불충분함을 시사한다.시는 사물의 순간적 파악, 시인의 순간적 사상 ? 감정을 표현한 것, 인생의 단편적 에피소드, 영원한 현압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장시화 내지 요설화 경향을 통해 순간성과 압축성은 서정시의 절대적 조건이 아님을 볼 수 있다.서정시란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자기표현으로 주관적 경험, 내적 세계의 ‘표현’이 서정 스타일이다. 독일문예학에서 서정장르의 본질은 주관성이고 이 주관성의 실체로서 체험과 감정을 강조한다. 독특한 경험으로서 체험은 감정의 독특성이기에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으며 감정의 기준은 서정시의 본질적 조건으로서 주관성과 결합된다. 서정시는 대립 ? 갈등을 본질로 하는 파토스의 감동이기보다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는 조화의 감동인 서정적 감동을 준다. 김춘수는 김소월 시를 분석하면서 서정성을 우리 고유의 반응양식으로 재인식하였다.장르의 제시형식이란 문학이 독자에게 어떻게 향유되는가의 문제, 즉 시인과 독자 사이에 확립되는 여러 조건들의 문제다. 이런 제시형식에 의해서 문학 작품은 여러 장르로 범주화되는 것이고 독자에 대한 시인의 태도로 정의되기도 한다. 詩歌가 노래로 불리는 제시형식으로 ‘듣는’ 시가였다면 신체시는 ‘보는’ 시로의 이행이라는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 ‘소통방식’의 견지에서 노래하기, 낭독하기, 읽기에 적합한 것으로 서정시를 분류하기도 한다. 제시형식은 장르구분의 기준일 뿐만 아니라 장르변화의 한 요인이 되어 새로운 매체의 고안은 장르를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2.2 시의 언어문학은 언어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언어예술 또는 언어로 미를 창조하는 예술이다. 그렇다면 다른 문학장르의 언어나 일반언어와 구별되는 시어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먼서 검토함으로써 시를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문학과 언어, 대상 ? 의식 ? 언어, 주술적 언어 의미론적 기호, 시어와 신화, 언어와 사물 등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시어는 문학어의 일부로서 언어의 본질적인 지식적 기능만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수동적인 지시기능으로부터 적극적이고 창조적 기능으로 격상시킨다. 시어의 특징을 보다 근본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 사이에서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시어는 원시인으로 하여금 대상과의 연속감과 일체감을 갖는 ‘원초적 통일성’을 경험하도록 했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 발달과 문명의 진보는 더 이상 그 기능에 공감시킬 수 없었고 ‘의미론적 기능’밖에 갖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언어관의 변화는 추상과 구상, 특수와 보편, 사상과 감정, 주관과 객관이라는 대립된 분열의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과정 속에서 단일한 의미가 분리되고 고립된 개념으로 분열되는 경향의 힘과 처음으로 발생했던 조화된 원초적 통일성을 발견하려는 힘이 드러나는데 전자가 일반언어라 한다면 시의 언어는 후자로서 신화적 세계에 대한 동경과 탐구를 갖게 된다.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 분리될 수 없고 실존적 상황으로서 이 세계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맺고 있다. 이런 관계가 가장 순수하게 원초적으로 표상되는 공간이 시의 세계이며 여기서 시의 세계는 신화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신화의 세계에서 지각하는 모든 것은 특수한 정조에 물들어 있으며, 인간의 의식과 무관한 객체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비인간적인 모든 대상을 의인적으로 인식하는 시적 사고와 일치시킨다. 또한 감정은 의인관과 함께 자아와 세계의 관계를 맺게 하는 힘이다. 시어는 정서적 언어로서 자아와 세계를 결속시키고 삶의 세계를 활성화한다. 시인의 의식은 이렇게 정서적 ‘행위’이기 때문에 시의 세계는 동적이고 실존 그 자체로 간주된다.의미론적 기능으로서 언어는 구체적 체험을 추상화(의미화)한다. 이 때문에 감각적인 방향보다는 개념적 방향에 따라 독자의 감수성을 이끌어가기 마련이다. 시는 근본적으로 역설적인 언어이다.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가 언어이면서도 언어의 제약에 벗어나 사물 그 자체이고자하는 데 시어 특유의 모순이 발생하고 이것이 일반언어와 변별되는 시어의 또 하나의 특징으로 강조된다. 산문의 언어는 현실의 실존적 상황을 지시하는 기호인 것에 반하여 시의 언어는 사물이다. 의인관적 언어, 정서적 언어, 사물로서의 언어
‘시의 구성원리’에 대한 연구- 김준오,『詩論』중「構成原理」중심으로< 차 례 >1. 들어가며2. 시의 구성 요소들2.1 리듬과 심상2.2 비유와 상징2.3 인유와 패러디3. 나오며1. 들어가며웰렉과 워렉도은 「문학의 이론」에서 시를 구성하는 두 개의 중요한 원리 가운데 운율과 은유를 지적하고 리듬(Rhythm)과 미터(Metre)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전통적으로 시의 특징을 말할 때면 소리의 반복성을 말한다. 소리의 반복은 소리의 동일한 시간적 반복과 휴지 소리의 질서 있는 구조로 리듬을 만든다.이처럼 다른 문학에서 볼 수 없는 시만의 특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시를 구성하는 요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산문과 달리 시에서 소리는 어떻게 조직되며 대상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그리고 의미를 강화시키는가를 알아봐야 한다. 흔히 시의 3요소를 음악적 요소, 회화적 요소, 의미적 요소라고 한다. 음악적 요소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리듬이다. 회화적 요소는 심상을 통해서 의미적 요소를 강화하기 위해 비유와 상징 등을 사용한다.다음 장에서는 시의 구성요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김준오의 『시론』에서 다룬 「시의 구성요소」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2. 시의 구성 요소2.1 리듬과 심상언어는 소리와 의미가 일체를 이룬 것으로, 언어의 음악성이나 의미는 홀로 고립될 수 없으며, 두 요소가 하나로 되어 시의 경이를 이룬다. 시인은 음악적 효과를 창조하기 위해 소리를 모형화하고 이것이 리듬이다. 시는 고도의 조직화 성향을 갖는데, 이것은 운율적 언어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이 운율적 언어의 사용은 언어가 가진 어떤 소리자질의 규칙적 반복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시의 리듬은 운(rhyme)과 율(meter)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율격만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다. 리듬의 기표의 ‘반복성’이며 이것은 소리의 반복을 비롯하여 음절수, 음절의 지속, 성조, 강세 등 여러 상이한 토대에서 이뤄진다.리듬의 종류에는 운, 율격, 음보율이 있다. 운이란 한시나 영시에서 많이 볼 수 복합음절 율격 두 가지로 크게 나눠진다. 여기서 순수음절 율격은 음수율을 말한다. 우리말은 첨가어이기 때문에 체언과 용언에 조사가 붙어서 한 어절이 대개 3음절 내지 4음절로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2?3조, 3?3조, 3?4조, 4?4조 등 가르고 개화기 이후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는 7?5조도 전통 음수율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음수율은 박자개념에 의한 시간적 등장성으로 파악한다.복합음절 율격은 음절수와 더불어 어떤 형태의 운율적 자질이 규칙화된 리듬이다. 이는 고저율(tonal)과 강약률(dynamic)과 장단율(durational)로 나뉜다. 고저율은 중세 시가에서 사용된 리듬이고 강약률을 영시에로 주로 볼 수 있고 장단율은 장?단의 소리가 규칙적으로 교체 반복되는 리듬으로 우리말에 있어서 이 장단의 음운 자질이 현대시의 율격형성에 관여할 가능성이 크다고 기대되기도 한다.음보란 음절이 모인 것으로 행을 이루는 단위로 정의할 수 있고, 음보율은 이 음보의 수에 의해서 결된 율격이다. 음보는 3음절 내지 4음절의 휴지의 일주기로 하여 동일한 시간양을 지속시키는 동시성에 발생한다. 3음보와 4음보는 우리 시행을 이루는 기본 율격이다. 3음보는 우리의 미의식과 결부된 고유리듬이고 4음보는 중국문화의 만수개념의 영향으로 성립된 리듬이다. 7?5조가 현대시에서 많이 채택되고 잇는 이유도 전통리듬인 3음보, 4음보의 율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율격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기계적 형식으로 운과 리듬을 형성하기 위한 부수적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리듬은 전통 율격을 파괴하여 소리와 의미에 충격을 주는 ‘형성적’ 원리이다. 이런 ‘낯설게 하기’가 바로 예술의 본질이다. 현대의 자유시는 과거의 정형시에 대해서 형성시기에는 낯설기 하기의 산물이 된다. 본연지성으로서의 서정적 자아는 기질지성 형태를 기준으로 할 때 시는 정형시. 자유시 그리고 산문시로 분류된다. 자유시는 유기적인 형식이라는 낭만주의 관점에서 유래한다. 산문시가 자유시의 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났고 둘 다 정형시에서 언어는 이미지가 되기 때문에 시는 이미지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리듬과 함께 시의 대표적인 구성원리인 이미지는 시어의 중요한 특질 가운데 하나이다. 문학적 용법으로서의 이미지의 정의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한 편의 시나 문학작품 속에서 언급되는 감각 ? 지각의 모든 대상과 특질을 가리킨다. 둘째, 좁은 의미로 이미지란 시각적 대상과 장면의 요소만을 카리킨다. 셋째, 가장 일반적으로 비유적 언어, 특히 은유와 직유의 보조관념을 가리킨다. 이미지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해석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의미전달 기능을 한다.시의 이미지는 실제의 대상과 다른 것으로, 시인의 주관적 감정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정서는 ‘이미지의 선택’의 원리며 한 편의 시 속에 선택된 여러 이미지들을 동일화하고 통일시킨다. 심상의 종류는 관점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분류된다. ‘대상과 관계’의 관점에서 상대적 심상과 절대적 심상으로 분류된다. 상대적 심상은 대상을 가진 시의 이미지로 삶의 모든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거나 객관적 대상을 재현한 모방론적 심상이다. 절대론적 심상은 시인의 시적 세계 속에만 존재하는 이미지로 이미지 그 자체가 사물이 되는 것이다.언어의 의해서 마음 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이미지가 바로 정신적 이미지다. 이는 오감을 통해 얻는 이미지와 기관 이미지, 근육감각적 이미지까지 덧붙여 세분된다.2.2 비유과 상징시인은 비교에 의해서 관념들을 진술하고 전달한다. 이 비교가 이른바 비유이다. 동양시학에서는 비유의 기교를 比 ? 興으로 구분하여 기술한다. 賦가 비유하지 않고 바로 진술하는 것에 반하여, 比 ? 興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다. 비유의 근거는 두 사물의 유사성 또는 연속성인 유추에 있다. 두 사물의 동일성에 의하여 비유는 성립된다. 비유에서 동일성과 마찬가지로 차이성도 중요하다. 비유적 언어는 연합적 언어로, 이 연합은 서로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사물의 결합이다. 언어는 이질적인 두 사물을 연결하는 유사성은유, 액자식 은유로 세 가지 형태로 나눠진다.병치은유는 병렬과 종합을 통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은유의 한 형태이다. 흴라이트는 이 은유형태에 조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조합이란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됨으로써 빚어지는 ‘새로운 결합’의 형태이다. 치한은 의미의 예술이게 한다면 병치는 무의미의 예술이 되게 한다. 치환과 병치가 이미지들의 결합방식이고 양자가 다 같이 의미론적 변용작용의 원리가 된다는 점에서 은유로 처리한 것은 독창적 은유론으로서 주목할 수 있다.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는 일종의 ‘힘의 긴장’이 흘러야 하는데, 이 긴장은 두 사물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고조되기 마련이다.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된다. 현대시의 은유는 현저하게 동일성의 원리에서 비동일성의 원리, 곧 도피 또는 대결의 원리로 바뀌어 가고 있다.시는 대개 여러 개의 이미지로 문맥을 형성한다. 문맥 가운데서 근본비교에 의하여 형성되는 문맥이 있는데 이는 한 작품에서 다른 모든 비교를 성립시키는 토대가 되는 비유다.상징은 ‘조립하다’, ‘짜 맞춘다’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동사 심발레인(symballein)에서 유래한 말이다. 어원적 의미로 보면 상징은 기호로서 다른 어떤 것을 ‘대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불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가시적인 것이 상징이다. 비유가 이질적이면서도 유사한 근거에 의해 결합되는 것에 비해 상징은 원관념고 보조관념이 하나의 완전한 결합체가 되는 것이다. 관념과 이미지가 일체화되어 있는 상징의 동일성은 암시성, 다의성, 입체성, 문맥성 등을 하위속성으로 지닌다.암시성은 되도록 무엇인가를 감추려 하는 시의 특성이며, 이것은 상징의 양면성에 처음부터 내재하여 있는 것이다. 시의 리듬은 상징의 암시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시의 리듬이 이미지와 결합되어 시인이 전달하고자 한 관념을 섣불리 노출시키지 않고 상징의 암시성을 더욱 효과적이게 한다. 상징의 암시성은 다시 다의성이라는 속성으로 연결된다. 상징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 영혼과 물질의 결합이며 수평조응은 자연에 대한 공감각적 반응이다. 상하조응은 시의 깊이를 가져오고 수평조응은 시의 다양성을 가져온다. 수직조응과 수평조응의 깊이와 다양성이 상징의 입체성을 가져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징은 고립적이고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전후 문맥에 의해서 달라지고 탄생되는 문맥성을 지닌다.문학적 상징은 관점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눌 수 있겠지만 환기력의 범위에 따라 개인적(사적) 상징, 대중적(관습적) 상징, 원형적 상징의 셋으로 유형화할 수 있다. 개인적 상징은 어떤 하나의 작품 속에만 있는 단일한 상징이나 시인이 자기의 여러 작품에서 특수한 의미로 즐겨 사용하는 상징이다. 시인의 시적 개성은 확대되어 객관성을 띠게 되는데, 이 인습적, 제도적, 자연적, 알레고리성, 문화적 전통의 상징이라 불리는 것들을 대중적 상징의 범주에 속한다. 원형은 역사나 문학, 종교, 풍습 등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이미지나 화소나 테마다. 이런 반복성과 동일성이 원형적 상징의 본질적 속성이다. 원형적 상징은 원형적 이미지, 원형적 모티브 그리고 융의 원형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원형적 이미지는 많은 작품에 되풀이되어 나타나며, 모든 인간에게 유사한 의미나 반응을 환기시키는 심상이다. 모티프란 중인물의 행위를 유발하는 원인인 동기, 또는 동기부여와 구별된다. 원형비평의 개념으로서의 모티프는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의 알맹이를 가리키는 화소를 말한다. 융은 인간의 정신구조 안에서 원형을 찾았다. 정신구조의 이 특수한 원형의 분석은 시적 자아나 당대의 삶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2.3 인유와 패러디인유는 ‘참조’의 다른 말로 인물이나 사건, 작품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동양 시학에서는 인유를 ‘用事’라 하였다. 용사는 옛 것을 빌어서 현실을 설명하는 기법으로 시의 사실성을 확보하는 장치였으며 리얼리즘 전략으로 사용되었다. 인유는 전통의식과 민족의식을 고무하며 시인의 내면세계나 당대 삶의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인유도 여러 유형이 있다. 과거의 원래 디다.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황지우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생이 끔찍해졌다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의 전가족의 성금란을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바깥을 거닌다. 바깥;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먼 눈으로 술잔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廢人을 내 자신이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황지우의 시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 강의시간에 지도 교수님께서 ‘우리나라에 많은 시인들이 있지만 황지우 시인은 50년 이상 거론될 훌륭한 시인이다’라는 극찬에서 생긴 호기심이었다. 이제는 황지우 시인의 시들이 교과서에 수록되고 모의고사에 출제될 정도로 유명한 시인이지만, 그 당시 시에 문외한이었던 나에겐 황지우 시인은 생소했고, 창피한 고백이지만 순전히 지적 허영심에서 그의 시집을 구입했었다. 그의 시집『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와 『 게눈 속의 연꽃은』 내겐 너무도 어려운 시들이었다. 문학이란 그 시대상을 벗어날 수 없고 그 사회를 반영할 수밖에 없는 특성 때문인지 80년대 우리나라의 모습처럼 그의 시들은 무겁고 정치적이며 실험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나는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구나’ 하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그 이후 출간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본격 시집으로는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시집이라 다시금 호기심이 생겼고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제목부터 느껴지는 쓸쓸함과 고독이 술맛 당겨지는 운치라고 할까? ‘흐린’이란 배경은 삶의 고단함과 우울함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수많은 술집 중에서도 酒店은 좀 더 서민적이고 젊은이들 보단 중년층이 선호하는 장소로써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수록된 시들은 그 전의 시들보다 서사적으로 삶이 이야기를 담아내고 희로애락을 너무 어렵지 않게,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거시적 관점보다는 조금은 대중적으로 시인의 삶의 모습을 담담하면서도 멋스럽게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시집『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은 영화제에서 단편영화들을 본 듯, 단편 소설집을 읽은 듯 여러 감정들을 일으킨다.특히 이나 , 등의 많은 시들이 인상 깊었지만, 여기서 나는 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자 한다. 시는 ‘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라는 하소연으로 시작한다. 시 속의 아버지는 여성으로의 변화를 겪는 딸아이를 마냥 아이로만 대할 수 없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주체로서 딸아이를 껴안아 줄 수 없고, 딸아이가 먼저 안아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 아버지는 생이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 역시 딸아이가 언젠가부터 뽀뽀하길 꺼려하고 예전과 달리 스킨십에 야박하게 굴 때에 서운하고 속상했던 경험을 떠올려보면 그의 끔찍한 생에 대한 느낌을 알 듯도 하다. 하지만 시적화자는 딸아이의 일기를 훔쳐볼 수 없어 아쉬워하지만 어엿한 어른으로 존중하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시적화자는 끔찍한 우울함을 넘어서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이라는 표현을 통해 상당한 무기력한 상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옷걸이에 떨어지는 옷’이라는 이미지로 허물어지는 마음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표현력이 정말 매력적이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은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나’와 상반된 이미지로써 배가 나온 모록한 중년 아저씨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만나본 적은 없지만 사진 속의 황지우 시인은 배가 나온 넉넉한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자신을 ‘뚱뚱한 가죽부대’라고 또는 에서처럼 ‘살찐 소파’라고 표현함은 충분히 자조적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바라보며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을 상스럽다고까지 표현하고 있다.1연에서 시적화자는 나눔과 사랑이 넘쳐나는 아이의 방, 집에서 나와서 바깥을 거닌다. 근데, 시적화자는 누군가 늘 자신을 본다는 생각을 갖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이는 그의 다른 시 곳곳에서 볼 수 있듯이 군사정권 하의 구속과 감시를 받았던 황지우 시인에 삶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2연에서 시적화자는 흐린 酒店에 앉아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흐린 날’에 酒店에 앉아 있을 것이라는 말인가, 아니면 그 ‘흐린’이란 것은 酒店을 지칭하는 것으로 잡것이 섞여 깨끗하지 않는 낡은 酒店을 말하는 것일까? 중의적 표현으로 보아 어떤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듯싶다. ‘흐린 날’을 배경으로 보아도 낙담과 슬픔에 빠진 시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고 ‘흐린 酒店’으로 생각해도 시적화자의 우울과 무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공간으로 해석함도 무난하다. 또한 1연과 다르게 시적화자는 스스로를 어색해하지 않고 편안하게 느끼며 늙어가는 세월을 순순히 받아드리려 한다. 등뒤에 들리는 시끄러운 잡담에도 화내지 않고 담담하게 들어줄 수 있는 넉넉함을 갖고자 한다.
과 목 명 :담당교수 :발 표 자 :발 표 일 :은희경,「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연구- 라깡의 정신분석 이론 중심으로< 차 례 >1. 들어가며2. 라깡의 욕망이론에 대한 고찰3.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나타난 욕망의 양상3.1 ‘나’의 욕망의 본질3.2 주체의 탄생4. 나오며1. 들어가며은희경은 1995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이중주」가 당선되어 등단하고 같은 해 『새의 선물』이 제 1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하면서 문학적 기량을 인정받았다. 최근 2014년 3월에 출간된 장편『소년을 위로해줘』에 이르기까지, 지난 19년간 꾸준하게 창작 활동을 하면서 1997년에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로 제10회 동서문학상부터 2014년에 단편소설 「금성녀」로 제14회 황순원문학상에 이르는 많은 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은희경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비한 실정이고, 그 연구 또한 대부분 ‘여성 문학’, ‘성장 소설’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어, 은희경의 문학은 ‘여성 문학’, ‘페미니즘’, ‘성장소설’의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확인 할 수 있다.은희경의 평가 중에 ‘은희경은 하나의 장르다.’라는 표현이 있다. 하나의 장르가 된다면 그 장르가 품고 있는 관습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은희경이란 장르의 관습은 ‘자아 분리’다. 『새의 선물』의 강진희가 바로 그 관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10여 년 동안, ‘연미와 유미’(「연미와 유미」), ‘애리와 진희’(「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진과 준’(『그것은 꿈이었을까』) 등등이 그 관습을 유지시켰고, 마지막으로 『비밀과 거짓말』의 ‘영준과 영우’형제가 그 관습을 완성했다.흥미로운 것은 이 관습의 시작과 끝에 각각 ‘아버지’가 놓여 있다는 점이다. 『새의 선물』말미 ‘농담’처럼 등장했던 아버지가 『비밀과 거짓말』에서 무수한 ‘비밀과 거짓말’을 남겨둔 채 죽는다. 은희경의 소설 세계 10년을 추동했던 것은 그 아버지였고, 분리된 자아의 기원이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초적 억압이 골격을 이루는 오이디푸스적 삼각구도는 바로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로 대치되는 언어의 메타포 공식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서 언어가 무의식의 생성조건을 형성하고 이렇게 생성된 무의식이 의식계에 기호적으로 자기표현을 할 때 유사성과 인접성에 바탕을 둔 은유와 환유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이 구조언어학적 관점에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재해석한 라깡의 생각이다.라깡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pre-Oedipal)에 해당하는 언어 습득 이전 단계를 설정하고 그것을 상상계 혹은 ‘거울단계’라고 명명했다. 거울단계는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유아가 자아를 인식하고 주체를 형성하는 단계이다. 거울 단계는 주체와 객체, 자아와 세계,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은 나르시시즘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린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영상 이미지, 혹은 이것과 비견되는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나’라는 자아를 형성해간다. 유아는 거울 이전 단계에서 파편화된 신체를, 거울단계에서 통합된 신체로 인식하게 되는데, 즉 자신의 투영을 경험함으로써 자신을 하나의 완전체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라깡에게 있어서 인간 주체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요인은 자아의 탄생이 아니라 ‘주체의 탄생’이다. 이 주체의 탄생은 상징질서, 곧 언어로의 진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주체와 객체의 경계선이 모호하고 안과 밖이 혼동된 무질서 · 무정형의 상태에 놓여 있다가 언어의 질서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주체는 화려하게 탄생한다. 언어의 습득과 더불어 인간은 사물과 일정한 거리를 갖는 ‘상징질서’속에 살게 된다. 언어적 기호, 상징이 그것을 지칭하는 사물과 대상을 ‘대신하고(stand for) '대치한다(stand in for).주체의 언어의 진입은 오이디푸스적 삼각구도와 맞물려 있고, 아버지의 금제의 목소리를 통한 어머니/아이로 형성된 이자(二者)구도의 해체는 거세(castration)의 위협과 함께 ‘죽음’을 연상시킨다. 이러한 죽음은 필연적으로 상실과재의 문제이다. 더욱이 라깡은 ‘주체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헤겔의 욕망의 변증법에 나오는 조사 ‘의’의 중의법을 십분 활용하여, ‘아이가 어머니에 의해서 욕망되기를 욕망한다’와 ‘아이는 어머니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는 이중의미를 동시에 포착한다. 아래의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서 먼저 ‘나’의 어머니의 욕망을 살펴보겠다.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또 한 번 나를 불러내 고급식당에 데려갔지만 대학생 때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내가 커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간다고 말하곤 했다. 물론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에 하는 말이었다. 대학생이 된 이후 어머니는 더 이상 아버지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내가 성인이 됨으로써,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모양이었다. 예전보다 자유로워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곧바로 행복을 약속해주는 건 아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대학생이 되었으니 엄마한테 더 잘해야 한다. 만약 아버지를 만났다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인 셈이다.어머니는 내가 입을 다문 뒤까지도 계속해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신기한 것 같기도 하고 의아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왜요? 내가 투명스럽게 묻자 어머니는, 아니다. 누굴 닮은 것 같아서,라며 기운 없이 웃었다.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어머니의 ‘아버지를 닮아간다’는 입버릇은 아버지를 욕망하는 어머니의 심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나’가 성인이 되고 아버지가 떠났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도 행복해지지는 못했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욕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는 대타자인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 라깡의 개념인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따라서 ‘나’의 욕망은 어머니의 욕망이 되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를 욕망하게 된다는 뚱뚱하고 초라한 모습과 달리 가냘프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나’가 그런 ‘보띠첼리의 비너스’를 욕망함은 거울단계의 타자의 환상적 이미지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르시시즘에 환상에 대한 욕망이며 뚱뚱한 자신에 대한 거부이며, 품위있는 아버지의 동일시에 대한 대상a로써 환유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팔루스를 소유하고 있는 아버지의 전지전능함을 믿고,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지만 주체에게는 메꿀 수 없는 부분이 남을 수밖에 없다. 영원히 메꿀 수 없는 결핍은 아버지를 향한 욕망이 되고, 그것은 ‘보띠첼리의 비너스’를 욕망함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그래서 비너스의 슬픈 눈길은 그 품위있는 ‘아버지와 동일시’되지 못하는 슬픈 ‘나’의 감정이입이 된 대상a인 것이다. 다음의 예문에서도 ‘나’가 대상a를 욕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내 용돈으로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내 방 벽에 비너스의 그림을 걸었다. 사춘기의 내 친구들은 여인의 알몸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포르노 브로마이드에 대한 변형된 취향이라고 생각했다. 뚱뚱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섬세함과 감수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일종의 보상심리로 클래식 장르에 집착한다고 말하는 것은 B였다. 그러나 침대에서 애인 마르스를 맞이하는 관능적인 비너스나 활을 든 에로스와 놀고 있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비너스는 나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다른 선을 상상할 수 없다는 듯 우아한 균형미를 내뿜는 밀로의 비너스 역시 내 눈에는 미술시간의 데쌩 과제물로만 보였다. 나에게 비너스란 오직 보띠첼리의 비너스였다.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띠첼리의 비너스’는 내가 욕망하는 ‘아버지’의 대체인 환유이고 상상계에 속한 환상의 대상a이다. 하지만 ‘나’의 실제 모습은 ‘보띠첼리의 비너스’가 아니라 B의 아버지 서재에서 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뚱뚱하다. 라깡의 거울단계에서 유아는 시각적 이미지를 “이상적 나”로 보고 환희에 차서 동일시 하지만, 이러한 동일시는 그 시각적 이미지를 총체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날에는 내가 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항상 슬픈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특히 내가 뚱뚱한 아이라는 걸 가장 못마땅해 했을 것만 같았다. 순진하고 영민한 아이와 함께라면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지만 심술궂거나 아둔해 보이는 뚱뚱한 아이는 자신의 실수와 한때의 어리석음을 환기시켜주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위의 글에서 보듯이 어린 시절에 ‘나’는 혼외자식이기에 당당한 존재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아둔하고 뚱뚱한 외모 때문에 더욱 아버지가 자신의 존재를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슬퍼한다. 자신은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죽은 누나를 뒤로하고 대를 잇기 위해 갓난아이의 주검이 놓였던 이부자리에서 몇 번의 교접으로 태어난 아이라며, 삶의 비루함과 아버지들의 위선을 말하는 B를 향해 “너하고 난 달라, 네 아버지는 너를 얻기 위해 잠시 커튼 뒤로 들어갔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를 원한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나’의 말 속에는 자아 부정이 깊게 박혀있다. 이처럼 존재의 부정(否定)은 자아의 주체 형성에 큰 타격을 가하고 아버지의 욕망을 더 깊게 만드는 요소가 된다. ‘나’는 ‘아버지와의 동일시’를 이루지 못하고 결국 상징계에 머물러 아버지를 향한 욕망에 고착된 상태로 성장한다. 이것은 대수술을 앞둔 아버지의 재회에 앞서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되고 아버지에게 쉽게 나서지 못하는 이유이다. 자아감이 결여된 ‘나’는 제법 살이 빠졌지만, 직접 통화도 못하고 간호사를 통해서만 수술 날짜만을 확인한다.병원에 전화를 거는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숫자를 누르는 손길이 약간 서두르고 있었다. 2차 수술은 실패였다. 변함없이 친절한 목소리의 간호사가 그 병원의 장례식장으로 연락해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다시 전화기의 숫자를 눌렀다. 내일이 발인이었다.집에 들어와 나는 옷장에 새 양복을 걸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옷걸이에 걸려 있던 다른 옷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어깨를 약간 굽히고 있었으나 태도는 정중하고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