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홍의 인생, 니체로 바라보기철학과 201504140 김성은처음 영화를 본 다음 과제 있다는 것을 알고 주제를 생각해보았을 때는 나는 샤오홍의 사랑을 정의해 보고 싶었다. 영화에서 나온 샤오홍의 사랑은 평탄한 또는 평범한 사랑과 멀었기 때문이다. 유년기나 청소년기 시절에는 차가운 아버지와 따뜻한 할아버지 사이에서 자랐고 막 성인이 되어서 독립하게 되었을 때는 금지된 사랑을 키우던 사촌오빠와 같이 베이징으로 떠났지만 버림받고 돌아온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 약혼자와 잘 지내는 듯싶었지만 그 약혼자는 임신한 샤오홍을 두고 떠나버린다. 그 과정에서 같이 외상으로 지낸 비용들을 모두 샤오홍에게 떠넘기고 사라진다. 어린 나이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시기에 2번이나 사랑에 버림받은 샤오홍은 사랑의 상처보다 남겨진 외상의 빚 때문에 더 고통 받는다. 임신한 몸으로 빚을 갚을 방법을 찾아보다 어찌보면 샤오홍 인생의 진정한 사랑인 샤오쥔을 만나게 되고 둘은 금방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 생각되는 샤오쥔도 샤오홍에게 지속적이고 또는 이상적이라 생각되는 사랑을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상처를 남긴다. 그는 결혼생활 도중에 몇 번의 외도와 폭행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문장에 재능이 있는 샤오홍을 높게 보지않고 그 재능을 폄하한다. 샤오쥔과의 갈등으로 그를 떠난 샤오홍은 그녀 인생의 마지막 사랑을 맞이한다. 계속 친분이 있던 두완무랑 그녀는 결혼을 하게 되고 인생의 마지막을 같이 보내게 된다. 굴곡진 그녀의 인생은 그녀의 사랑 때문이라도 더 힘들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런 힘든 사랑을 하다 세상을 떠난 샤오홍이 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만남 중에서 사랑은 몇 번일까?’ 라는 생각이 들어 주제를 처음에는 정했다. 그리하여 이 것을 어떻게 평가하거나 정의하기에는 내 생각만으로는 또는 내 기준만으로는 힘들 거라 생각이 되어 도움될 만한 철학자 한명을 골라봤는데 니체였다. 사실 이 과제하기 전 까지 니체는 한 번도 읽어보지도 관심도 없었다. 내가 기독교인 것도 한 몫 하였고 이성을 주재를 부정한 니체를 쉽게 이해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니체를 고른 것은 인간의 행복이나 고통속에서도 나아가는 인간관을 제시한 것이 니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제는 여기서 바뀌게 되었다. 샤오홍의 사랑의 진실이나 정의에서 그녀의 인생을 바라보는 것으로 달라졌다. 어찌보면 31살 짧은 인생을 살다간 샤오홍 그 과정은 대부분 사람들이 보기에 역경과 고통의 반복인 그 삶을 나는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그저 안타까운 삶을 살다간 사람으로 여기면서 끝내야 하는 가로 생각이 나아갔다. 내가 누군가의 인생을 평가하거나 결론을 내기에는 부족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편협한 생각에 갇혀있겠지만 평범하게 그저 불쌍하다, 안타깝다 가 아니라 진지하게 하나의 견해로 그녀의 인생을 바라보고 싶어졌다. 흔들리고 넘어졌던 그 와중에서 자그마한 행복을 꽃 피우고 가꾸었던 샤오홍을 니체의 도움을 받아 내 방식대로 보려한다.니체는 그대는 그대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인생을 평가할 때 재산과 명예, 또는 애인과 가족, 건강을 두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것이 사라진다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는 진정한 자기를 찾는 것이 인생의 목표점이면 나아가야할 길이라고 말한다. 이 진정한 자신을 찾는 방법은 친절하게도 니체는 설명해준다. 사람의 진정한 자아는 누군가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나조차도 이 것이 나의 자아라고 정의 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니체는 간접적으로 찾아보기를 권유한다. 자신의 영혼이 기뻐하는 행동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는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잘 맞춰본다면 어느 샌가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발견하게 된 진정한 자아를 그냥 두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 자아의 상태로 나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생은 자기초극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초극이란 이전의 자신을 넘어서 더 나아진 자아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초극은 누구의 도움을 통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초극은 자신만이 걸을 수 있는 길으로 설명한다. 니체는 인간을 나약하게 보지 않았다. 인간을 묶어두는 사람과의 관계 또는 신앙이나 관념에서 벗어나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초극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보통의 관점에서는 샤오홍은 어린나이부터 사랑을 잃었고 가족의 지지도 받지 못하고 버림받고 그녀 또한 가족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재정상태는 최악이었으며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유는 건강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에서는 실패 중에 이런 실패한 인생을 없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니체는 저런 기준을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자신의 자아를 찾는 것이 중점이며 그것이 인생이라고 말했다. 이 관점에서 그녀의 인생을 돌아본다면 샤오홍은 그저 슬픈 인생이거나 실패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그녀는 힘든 인생와중에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모를 때는 짧은 시나 단편으로 신문사에 기고하며 자신의 잘하는 일을 찾아낸다. 그래서 철없던 샤오홍에서 자신의 힘든 시기를 누구보다 잘 풀어내는 작가로 조금 더 자신을 초극한다. 또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인 루쉰에게 글을 보내 그에게 인정받고 전폭적인 지지도 받는다. 어린나이에 누구보다 그녀는 자신의 진정한 자아에 나아갔다고 생각된다.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일과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과의 소통으로 자아를 찾아갔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녀는 당시의 정치적 사상에 빠지지 않았다. 그녀의 작품은 당시 항일 시대에 항일 문학을 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 당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문학을 했고 자신의 길을 자신의 결정으로 나아갔다. 이런 점에서 니체의 자신을 초극하는 삶, 즉 진정한 인생에 누구보다 적합한 삶을 살고 있던 것이 샤오홍이 아니었나 생각된다.니체는 인생을 사랑하라(amor fati)라고 말한다.‘인간만이 고뇌한다. 그래서 그는 웃음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일 불행하고 제일 우울한 동물이 당연하게도 제일 쾌활한 동물인 것이다.’, ‘얼마나 깊이 고뇌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인간의 위계를 거의 좌우한다.’우리는 고통과 위험은 안 좋게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인생을 지내는데 고통은 필수부가결한 요소라고 생각했다. 우선 니체는 인생을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화가를 평가할 때 그의 최고의 작품을 기준으로 그를 평가한다. 그리고 니체는 인생 또한 최고의 자아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최고의 자아를 나아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실패를 부끄러워하고 최고의 자아를 포기하기까지 이른다. 이런 상황을 니체는 안타까워한다. 최고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 고통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결과물인 작품을 통해서 평가해야한다. 그래서 최고의 작품으로 나아가는, 즉 우리의 진정한 자아에 나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은 피해야 하는 것이나 악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더 나은 나를 만들어줄 요소로 여기여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런 니체의 말은 자신의 삶에 비롯하여 나온다. 니체는 평생 편두통과 위장병으로 고통 받는다. 그리고 결국 이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니체는 이 고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긍정과 강인함으로 대처한다. 자신의 삶으로 인생애(amor fati)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환경을 극복하라고 말한다. 흔히 생각하기에 환경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고 본다. 요즘 퍼져있는 수저론이 그 대표이다. 하지만 니체는 환경도 인간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고 말한다. 그 인간이 강한 자, 즉 자신의 인생을 부정으로 보지 않고 고통을 자아의 발전 요소로 보는 자라면 그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그것을 밟고 일어선다고 말한다. 니체는 내적 자신의 힘을 강화하여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내적 힘이라는 것은 진정한 자아의 성숙을 말한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환경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생각하는 방식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고 무책임하게 만든다고 한다. 범죄자의 배경을 듣고 동정하거나 성공한 사람의 배경을 듣고 그 성공을 폄하하는 행동을 한다고 말한다. 샤오홍은 많은 고통 또는 역경을 거치고 살다가 떠났다. 그녀는 가족과의 연을 끊으면 그 이후 죽을 때까지 재정적인 부유하게 산 적이 없다. 가난한 고통, 굶주림의 고통이 지속적으로 그녀를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 그녀는 좌절하거나 인생을 한탄하며 살지 않았다. 작품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인간의 인생은 자신의 초극으로 반복되는 삶이다. 그중에서 고통은 초극을 도와주는 요소이다. 샤오홍은 이 말을 안다는 듯이 자신의 고통이 담긴 문학을 집필한다. 아이를 입양 보내는 고통이나 가난하게 하얼빈에서 살던 시절을 잘 표현하여 문학적으로 인정받는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자신의 고통을 그저 부인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을 발판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샤오홍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것을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인생애(amor fati)에 가까운 삶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힘겨운 환경 속에서 그것에 안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작품으로 또는 삶으로 나아가는 샤오홍의 인생은 니체가 그렸던 초극하는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 샤오홍은 누구보다 강한 자이며 인생을 평가받는 진정한 자아에 많이 다가갔으며 그녀의 인생을 니체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니체의 허무주의와 그 극복방법김 성 은부산대학교 인문대학철학과2018년 11월Ⅰ. 서 론 2Ⅱ. 니체의 허무주의 41. 허무주의 42. 니체의 허무주의 51) 불완전한 허무주의 72) 완전한 허무주의8Ⅲ. 니체의 허무주의 극복근거91. 힘에의 의지 102. 영원회귀 133. 영원회귀의 긍정 151) 운명애162) 초인17Ⅳ. 결론 19참 고 문 헌 22Abstract 24니체의 허무주의와 그 극복방법김성은부산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요약현대 한국사회에 허무주의가 도래했다고 생각이 된다. 그리하여 허무주의를 알아보고 허무주의를 극복했다고 주장하는 니체의 철학을 통하여 허무주의의 극복방법을 알아보려고 한다. 허무주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던 절대적 진리나 신의 존재가 허구임을 깨달았을 때 도래한다. 사람들은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인해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한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바라본다. 불완전한 허무주의와 완전한 허무주의다. 불완전한 허무주의는 기존의 가치 체계가 허구였다는 것을 깨달은 뒤에 무의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이다.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지 못하고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것에서 멈추어 있는 상태이다. 반면 완전한 허무주의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제시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한다. 니체는 이 결단이 긍정적으로 이루어 졌을 때 허무주의의 극복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근거는 힘에의 의지라고 말한다. 힘에의 의지는 모든 존재가 내재하고 있는 힘이다. 힘에의 의지는 끝없이 더 큰 힘을 원하는 의지이다. 힘에의 의지는 끝없이 큰 힘을 바라기 때문에 투쟁하고, 동화하며, 제압한다. 이 현상으로 인해 변화가 생성된다. 이 변화에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통과 기쁨을 긍정할 때 진정한 힘에의 의지라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이 긍정함을 극한으로 이끈다.니체는 영원회귀를 제시함으로 인간들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영원회귀는 허무주의의 극단적 형식이다. 무한히 반복되는 순환의 세계이다. 무한한 반복 속에서 인간면 인간의 내부에서 허무주의를 극복할 힘이 있어야하는데 니체는 그것을 힘에의 의지라고 말했으며 그 바탕으로 인간은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강한 인간을 초인이라 부르며 우리 모두 초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며, 초인의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가 말한 이 철학이 현대 한국 사회에서도 극복 법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Ⅱ. 니체의 허무주의1. 허무주의허무주의란 어떠한 존재도 인정하지 않고 또 그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과 가치까지도 부정하려는 사상적 입장을 말한다. 어원은 라틴어의 ‘nihil’로서 보통 니힐리즘이라 불린다. 허무주의는 ‘우리 존재에 존재 이유가 없으며 보편타당한 앎을 운운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오는 정신적 공황’이다. 허무주의의 일반적 특징은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고 부정하려는 것으로, 회의주의적인 사유방식이 진행되어 결국에는 무조건적 부정의 입장을 내새운다. 신앙, 도덕, 종교 등을 부정하는 행위가 바로 그 예이다. 모든 것이 부정되지만 대체되는 가치를 찾지 못하여 결국에는 무정부 상태에 이르는 것이다.모든 것의 부정이라는 의미에서 허무주의는 존재론적인 허무주의, 인식론적인 허무주의, 종교적 허무주의, 윤리적 허무주의의 형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존재론적인 허무주의는 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허무주의는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존재자를 존재하게 하는 절대적인 존재자를 부정한다. 허무주의에서는 어떠한 절대적인 존재도 부정된다. 궁극적인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허무주의에서는 존재론의 근본 목적인 실체적인 존재의 실재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인식론적인 허무주의에서는 객관적 진리의 인식 가능성을 부정한다. 인식론에 따르면 관념과 인식되는 대상이 서로 일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진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허무주의에서는 객관적 진리 자체를 부정한다. 주체는 관념과 일치하는 대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식론 측면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부당한 것에는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니체는 이성에 대한 거부를 보인다. 니체는 철학적 전통적 사유이자 최고의 가치인 이성이 무너지면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허무주의가 도래한다고 말한다.셋째, 니체는 허무주의를 모든 가치들의 전도라고 말한다. 최고의 가치가 상실됨으로 새로운 가치가 설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하지만 새로운 가치를 설정하지 않고 허무주의를 벗어나려고 하는 행위는 불완전한 허무주의라고 니체는 말한다. “불완전한 니힐리즘, 그 여러 형식, 우리는 그 한가운데서 살고 있다. 지금까지의 가치를 가치 전환하는 일 없이, 니힐리즘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시험이야말로, 그 반대의 것을 산출하고, 문제를 첨예화한다.”그러면서 니체는 이러한 불완전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 완전한 허무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니체에게 허무주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한편으로는 허무주의가 인간을 몰락으로 이끌며, 퇴보로 이끈다고 비판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해석의 주체로 올라서는 것이라고 본다. 몰락을 뜻하는 것은 ‘불완전한 허무주의’이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여 허무주의를 극복해 나아가는 것을 ‘완전한 허무주의’라고 말한다.1) 불완전한 허무주의‘불완전한 허무주의’에서도 두 가지의 형태로 나뉜다. 니체는 ‘수동적 허무주의’와 ‘능동적 허무주의’로 나누어 본다. ‘수동적 허무주의’는 기존 가치 체계가 무너짐으로 모든 가치가 무가치함으로 무너져가는 상황이며, ‘능동적 허무주의’는 절대적 가치나 진리가 없는 것을 깨달은 뒤 기존의 가치체계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파괴하고자 하는 상황이다.수동적 허무주의는 기존 혹은 전통 가치에 대해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또한 믿음이 없으면서도 이에 대하여 거부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황을 말한다.반면 능동적 허무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와 반대되는 성향을 보여준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수동적 허무주의와 달리 기존의 가치를 거부하는 나오는 인간의 본성이지만, 형이상학적인 것은 아니다. 힘에의 의지는 형이상학적인 절대불변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과 생명체들이 가지는 본성적 현상 자체이다. 삶을 유지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행위 속에서 힘에의 의지를 찾아낸다. 힘에의 의지는 존재 방식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힘에의 의지는 삶 자체에서부터 정당화하려한다.“자기 자신을 보존코자 하는 것은 궁색의 표현이다. …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은 단지 예외일 뿐, 생의 의지의 일시적 제한에 불과하다. 크고 작은 투쟁은 항상 우월, 성장, 확대를 둘러싸고 선회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에 따라서. - 힘에의 의지야말로 삶에의 의지이므로.”이처럼 니체는 힘에의 의지가 생의 의지를 넘어서는 본질적인 삶의 의지라고 말한다. 이전까지의 세계는 삶을 형이상학에 멈추어 있었고, 이 것은 결국 삶의 부정을 불러오고 가상의 형이상학적 세계만 긍정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래서 니체는 삶을 부정하는 이전의 형이상학적 방식이 아닌 삶을 긍정하고 정당화 하려는 방법으로 삶을 힘에의 의지로 이해하려 한다. 니체에게는 불변의 진리와 고정된 가치가 없기에 힘에의 의지도 그렇게 볼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삶 자체가 준거점이며, 가치 평가의 기준이라고 말한다.니체는 존재를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이란 존재의 다른 표현이며, 곧 힘에의 의지를 통해 추동된다. 이것은 변화와 생성을 경험하는 것으로 본다. 결국 삶이란 변화하는 것이다. 이 변화 중에서 힘의 원리에 의해 대립과 소멸을 통해 생성도 생긴다.“점차 인간의 두뇌는 그러한 판단과 확신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흥분과 투쟁, 그리고 권력에의 욕망은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발전하였다. 유용성이나 기쁨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충동은 〈진리〉에 관한 이러한 투쟁에 있어 편을 들었다.”힘에의 의지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는 다른 힘을 지배하려한다. 또한 힘에의 의지는 더 많은 힘을 추구하는 것으로 힘에의 의지끼리 서로 경쟁하며 더 강해지려 한다. 그렇기에 힘에의 의지이 그대로 다시 한 번, 아니 무한 횟수를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 새로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뿐 아니라 일체의 고통, 일체의 부담, 일체의 사유와 신음, 너의 생에 가운데 있었던 크고 작은 일체의 것들이 동일한 순서, 동일한 결과대로 너에게 되돌아온다.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 이 달빛, 이 순간, 바로 너 자신까지도 되돌아온다. 현존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나 회귀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과 더불어 너는 일말의 먼지바람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너는 굴복하지 않고 분노한 나머지 절치부심하여 그렇게 말하는 혼령을 저주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너는 신이다. 나는 신다운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다.’라고 그 혼령에게 대답하는 비상한 순간을 다시 한 번 체험하는 것이다.”영원회귀란 무한히 반복되는 순환의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는 순환운동을 함으로 과거에도 모든 것이 있었으며, 무한히 순환운동을 하여 영원히 회귀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이미 존재 했었고 여러 번 반복적인 순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계는 끝이 없으며, 순환 도중에 더해짐도 없으며, 적어짐도 없다. 결국 같은 양의 힘이 목표도 목적도 없이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 영원회귀이다.“그대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 그리고 살아왔던 삶을 그대는 한 번 더 그리고 무수한 회수에 걸쳐서 다시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그 삶에는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고통과 기쁨, 모든 사고와 탄식, 그리고 그대의 삶에 있어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작고 큰 모든 일들이 그대에게로 회귀해야만 한다.”이렇게 본다면 영원회귀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회귀함으로 인간의 힘에의 의지로 더 큰 힘으로 나아가는 행위도 결국 회귀되는 세계에서는 무의미한 행위로 보인다. 이 영원회귀는 의미도 목표도 찾을 수 없으며, 새로운 것이 없이 삶이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그저 생존만 이어지며, 무의미한 삶이 반복되는 것이다.영원회귀는 인간에게 무의미함과 극단적 허무주의를 경험하게 한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