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태양과 달 신화:예와 항아신화를 중심으로 간략하게 정리흔히, 비가 많이 내리거나 혹은 아예 오지 않는 등 자연재해가 일어나면 “하늘이 노하셨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가 많다. 특히 고대에는 날씨는 곧 농사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런 자연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화가 난’ 하늘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제물을 바치는 등의 행위도 나타난다.이처럼 고대에는 자연을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론 웃기도하는 살아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태양, 달, 바람, 비, 번개 등의 자연은 그들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도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는, 제어할 수 없는 부분인데 고대에는 그 결과의 사태가 심각했을 것이다. 이에 그러한 특별한 존재를 넘어 그들에게 신이 되었다.중국신화에서 태양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흥미로운 점은 지금과는 달리 처음에 태양이 ‘10개’였고 이들은 교대근무(?)를 했다. 중국의 태양신은 희화로 그의 남편은 동방의 신 제준이다. 제준과의 사이에서 희화는 10명의 아들을 낳는데, 그들이 ‘10개의 태양’이다.태양들은 매일 여행을 즐겼다. 이러한 여행에는 하나의 규칙이 있었는데 매일 ‘한명’의 태양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아들들은 이 규칙을 어기고 하늘에 10명 모두 등장하면서 지상의 모든 생물들이 말라죽고 만다. 지상세계의 이런 재난은 활을 잘 다루는 예에 의해 종결된다. 그는 10개의 태양 중 9개의 태양을 활로 쏴, 하늘에 1개의 태양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일월조정(一月調整) 신화라고 부른다.태양을 쏴 죽인 예와 관련한 이야기는 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원래 그도 천상의 신이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벌을 받게 된다. 천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지상에 남게 된 것이다. 이는 무한한 신이 아닌 유한한 인간으로 살아가게 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에게는 ‘항아’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 역시 남편의 죄로 인해 지상에 남게 된다.어느 날, 남편 예는 ‘불사약’을 구해왔는데 이를 남편과 나눠먹으면 죽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신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항아는 왠지 억울했다. 자신은 죄가 없으니 천상으로 돌아가 신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남편 몰래 불사약을 혼자 다 먹었고 몸이 가벼워진 항아는 하늘로 올라간다.
1941 진주만 공격일본의 개항 메이지유신 군국주의 대동아 공영권 진주만 공격의 배경 차례일본의 개항 외부 미국의 수교 요구 – 1852 년 4 척의 함대를 끌고 왔으나 수교 맺지 못하고 돌아감더 큰 함대를 끌고 1853 년 다시 방문 1854 년 미일화친조약 내부 도시와 산업의 발달 농민의 가난함 , 도시에서의 부르주아지 발생 , 화폐경제의 시작은 도쿠가와 사회 정치 사회 구조에 대한 막대한 도전 1854 년 미일화친조약 맺으면서 일본 개항 “1 년 후 다시 올 때 까지 ” 페리 제독일본의 개항 미국과 수교 이후 다른 서구 열강들과도 조약을 맺기 시작 1854 년 요코하마 항구에 상륙하는 페리 함대메이지 시대 개막 마지막 막부 – 도쿠가와 막부 17c ~19c 약 250 년간 일본 통치 일본은 막부 체제 ( 무사 계급 ) : 쇄국 정책 [ 당시 상황 ] 부르주아지가에도 시의 상권 지배 인구 3000 만명중 200 만이 사무라이 계급 , 그들의 90% 가 에도 시 상인들에게 부채 국민들에게 배당되는 곡물이 턱없이 부족 1867 년에 일본 메이지 王 , 천황과 도쿠가와 장군이 세상을 떠나자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왕정 복고 메이지유신 배경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왕정 시대 복고 일본의 막부체제메이지 유신 메이지 정부는 학제 · 징병령 · 지조개정 ( 地租改正 )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 부국강병의 기치하에 구미 ( 歐美 ) 근대국가를 모델 , 국민의 실정을 고려하지 않는 관주도 ( 官主導 ) 의 일방적 자본주의 육성과 군사적 강화에 노력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가 성립 ,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 가 개시 , 사회 · 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 산업혁명과 헌정 ( 헌법 + 의회 ) 을 함께 이룬 나라는 아시아에서 일본이 유일 메이지 유신 내용메이지 유신 무능한 막부 정부에 대항하여 하급 무사들을 중심으로 ‘ 존왕양이 ( 尊王攘夷 )’ 를 외침 진보적인 현대 일본 건설을 주장하며 등장한 새로운 정치지도자들 12c 부터 군벌 세력이 일본 정부를 메이지유신의 지도자로 등장 메이지 유신과 군국주의 결합 무사계급이 메이지 시대의 주요직을 차지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사쓰마번 · 조슈번의 젊은 무사들 맨 왼쪽 이토 히로부미메이지 유신 천황 의 존재는 아무런 실권이 없으나 역사적으로 법적 지위를 보존 과거 다이묘에 대한 충성을 천황으로 옮김 옛날 사무라이 계급은 국군의 군복을 입고 중앙정부의 중요한 지위를 점령 엘리트 = 사무라이 출신 1889 년 일본 헌법은 일본 국민을 통치하고자 한 공적이고 계약된 것이었으나 어디까지나 배후 개념은 봉건적이었고 기묘한 수단으로 국민을 사기함 천황 숭배가 바로 그것 메이지 유신과 천황숭배 천황 숭배는 ‘ 중앙집권 강화 ’ 로 이어짐 1889 년 메이지 유신 이후 채택된 구 일본제국 욱일기서구 열강을 배우자 1871 년 , 조정에서는 100 명으로 구성된 사찰단을 유럽 미국 파견 100 명 중 49 명은 이와쿠라 , 오쿠보 등 메이지 정부의 고위 관료들 그들은 12 개국을 순방하였으며 , 100 권에 달하는 사찰실록을 작성 유럽 열강을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의 문명을 배우고 수용해야 할 대상으로 여김 일본이 선택한 모델은 후발공업국인 독일 서구사상과 제도를 일본의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수입메이지 유신 일본 민족을 야마도 민족 원시 시대 여러 종족 중의 하나 , 우수한 종족 전 세계를 향해 일본의 우수한 문명을 전파 – 제국주의 이념 발생 1890 년 메이지 천황의 교육 훈시 – 일본 천황은 하늘과 땅과 함께 시작한 신성한 존재이며 영원 무궁한 존재이고 전 세계인들의 숭배를 받아 마땅한 존재 일본 교육제도는 정치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 수립의 선구자 . 군대와 같이 교실에서도 어떻게 일본 군대의 전통을 명예스럽게 할 것인가에 집중 제국의 이권 보장만이 국민 윤리의 기초 메이지 유신과 제국주의 이념 민족주의 이념과 제국주의 이념의 결합 메이지 천황대동아 공영권 대동아공영권은 일제가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슬로건 1937 년 7 월 중일전쟁 후 일제는속 공격편대가 태평양을 건너 미국 진주만 공습을 시작으로 일본은 제 2 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는데 이틀 뒤인 12 월 10 일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 ’이라고 부름 12 일 이 전쟁의 목적이 ‘대동아 신질서 건설’ 발표 당시 일제는 미국 등 서구세력에 맞서기 위해 이 되 아시아는 하나로 뭉쳐야 하며 이는 대동아권 ( 圈 ) 에 소속된 모든 나라에게 이득 는 일이라고 선전 그러나 엄밀히 말해 ‘ 대동아공영권 ’은 일제가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내건 슬로건 에 불과 대동아 공영권을 나타낸 1942~47 년까지 일본에서 쓰인 우표진주만 공격과정 1936 년 12 월 2 일 야먀모토 제독 , 현대식 무기로 해군 항공부대 건설에 착수 1939 년 2 월 10 일 일본군 중국 하이난 섬을 점령 8 월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대장 연합함대 사령관장 취임 9 월 4 일 야마모토는 시마타 해군 중장에게 편지를 보내 “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독일과 이탈리아와의 관계 ” 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밝힘 1940 년 봄 미국 함대가 진주만으로 이동 , 영구기지로 삼음 일본의 입장에서 미국의 행동은 상당히 노골적인 위협으로 간주됨 . 야마모토 제독은 이 사건을 해군항공 전력 증각의 구실로 삼음 . 야마모토 대장은 미국 해군에 먼저 전쟁을 거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전쟁의 시기와 장소를 선택하게 만드는 것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고려하기 시작함 . 7 월 루스벨트 대통령 , 일본에 대한 항공연료와 강철 , 고철의 금수조치 시행 진주만을 공격하기까지 짧지 않은 과정을 거침 1941 년 6 월 26 일 프랑스 비시 정부 , 일본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점령을 허용 . 미국은 자국 내 일본인들의 예금을 몰수 . 루스벨트 , 필리핀 군대를 미군에 포함 시킴 7 월 17 일 일본 새로운 내각 출범 7 월 28 일 미국 ,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 및 자산 동결 , 미국 항구에 대한 일본 선박의 입항 금지 8 월 18 일 1940 년 선택적 병역법에 ‘ 즉각 ’ 일본에게 선전포고 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힘 11 월 25 일 미국과 일본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음 , 이에 따라 나구모 기동부대가 쿠릴 열도에서 출항 12 월 7 일 일본 해군 진주만 공격진주만 공격 러일전쟁 (1904) 이전부터 군사력을 현대화하면서 무기의 성능 향상과 생산에 총력 일본은 아시아로 자신의 영토를 확장 미국 이 일본에 대한 ( 석유 , 철강 등 ) 금수조치 천연가스에 대한 수요가 급증 중국과 인도차이나 , 태평양의 섬들을 주목 - 남방작전 일본이 영토를 확장해나가자 유럽이 연합하여 저지 배경 유럽의 간섭과 제약에 대한 일본의 두려움이 증폭 당시 진주만 해군 기지 모습왜 진주만인가 ? 진주만은 미국 하와이 제도의 오아후 (Oahu) 섬에 있는 만 일본과 미국 사이에 위치한 이 섬들은 처음에는 해군의 수상함 공격부대위해 , 이후 항공부대를 위해 완벽한 기지 제공 미국 의회는 일본에 경제제제를 가했고 이어서 미국 태평양함대 전력의 대부분이 진주만을 모항으로 삼게 됨 일본은 적에게 포위당한 채 사방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낌 일본은 하와이를 자국의 영토 확장에 잠재적 위협이 되는 존재로 간주 현재 진주만의 모습진주만 공격 노무라 미국 주재 대사 임명 – 양국 사이의 벌어진 틈을 이어줄 것을 기대 일본과 소련 사이에 중립조약 체결 – 소련의 팽창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됨 1941 년 중반까지 일본은 이미 만주와 조선 , 몽골 동쪽 3 분의 1, 상하이 , 대만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지배 – 대동아 공영권으로 불림 유럽은 아시아의 사태에 효과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 – 유럽에서 독소전쟁 (1941 년 6 월 22 일 발발 ) 이 일어나고 있었음 1941 년 10 월 도조 히데키 장군 새로운 내각 구성 , 총리에 취임하며 군에 대한 통제권도 장악 대내외적 상황 도조 히데키 장군전쟁을 반대한 군인 새로운 항공모함의 중요성을 옹호 해군 항공대 육성과 전술 능력 배양에 전력을 쏟음 미국의 경제력과 잠재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미국과의 덧붙인 일화 일본 정부가 전쟁을 결정하자 일본이 결정적 우위에 설 수 있도록 총력 기울임 진주만 공격이 전함이 아닌 항공기에 의해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 진주만 공격 계획은 야마모토의 발상 해군대장 야마모토 이소로쿠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지만 , 전쟁이 결정나자 총력을 다함 “ 진주만 공격은 항공기에 의해 승리할 수 있다 ”두 차례 협상 1941 년 11 월 6 일일본군의 제한적 철수 , 중일전쟁 종료 제안 미국 거절 11 월 20 일 두 번째 제안을 발표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의 재개 , 동남아시아 에서의 군사 철수 , 중국 에서의 군 철수 등 헐 국무장관을 필두로 하는 국무부는 일본의 두번째 제안과 유사한 잠정협정안을 추진 전쟁을 막기위한 외교적 노력 1941 년 11 월 26 일 미국은 마지막으로 자국의 입장을 정리한 헐 노트를 일본에 전달 주미 일본 대사 노무라 기치사부로 미 국무장관 코델 헐 문제는 이러한 협상이 진행되는 중에서도 일본의 군사행동 계획이 변경되거나 철수하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음진주만 공격 일본과 미국의 영향권이 풍선처럼 계속 팽창 일본과 미국은 충동 침로를 달림 일본이 영토 확장을 원했다면 , 미국은 현상유지를 원했음 양국의 관계악화 국수주의적 불신감이 팽배 1941 년 , 11 월 25 일 미국과 일본의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음 , 이에 따라 나구모 기동부대가 쿠릴 열도에서 출항 1941 년 12 월 7 일 진주만 공격1941 년 12 월 7 일 진주만 공습을 받았을 때 , 일본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하는 연설 1941 년 12 월 7 일 ‘ 치욕으로 기억될 날 ’ 미 의회는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 루스벨트 대통령 “1941 년 12 월 7 일은 치욕으로 기억될 날이다 ” 미국 32 대 대통령 루스벨트출처 진주만 1941 , 칼스미스 , 플래닛 미디어 , 한국국방보포럼 . 2008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와 뿌리 , 선우학원 , 내일을 여는책 , 2015 100 가지 세계사 1000 가지 상식 , 판도라 , 세상모든책 ,2008 한나절에 읽
중국의 과학기술 커뮤니케이션학부 정지 연차 례 1. 중국의 과학기술 2. 고대의 과학기술 3. 중국의 4 대 발명 4. 현대의 과학기술중국의 과학기술 Θ 춘추전국 ( 春秋戰國 ) 시대의 철학적 사고와 탐구 정신을 바탕으로 실용적인 기술 혁신을 시작 Θ 한 ( 漢 ) 대와 당송 ( 唐宋 ) 시대를 거쳐 지속적인 발전 Θ 고대부터 실제적 응용과 농본 위주의 생산에 치중 Θ 자연과학 및 토목건축 등의 분야가 크게 발전 Θ 중국의 4 대 발명 인 종이 , 화약 , 나침반 , 인쇄술은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한 원동력고대의 과학기술 Θ 수학 - 중국의 전통 수학은 실용에 중점을 두어 발전 , 천문학적 예측이나 상업의 적용에 힘씀 서주 ( 西周 ) 시기 수학은 귀족 자제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중요한 학문 중 하나 , 당송 시대에는 국자감에 산학 ( 算學 ) 기관을 두어 인재를 양성 , 산경 ( 算經 ) 서적을 인쇄하여 널리 보급 Θ 천문학 - 천명 ( 天命 ) 사상을 받드는 천자 ( 天子 ) 로서의 황제는 항상 하늘의 뜻을 살펴 천상을 관찰 Θ 고대 중국에서 천문지식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신령에게 충고를 얻기 위해 점을 친 복사 ( 卜辭 ) Θ 당시에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고 별을 주기적으로 관찰하였음을 알 수 있음 . Θ 1 년을 12 개월로 하여 큰달은 30 일 , 작은달은 29 일 그리고 윤년에는 1 개월을 더함 . 60 진법을 사용 Θ 지리학 - 지리학은 중국의 전통과학 분야 중 하나로 , 고대 중국인들은 항상 위로는 천문 ( 天文 ) 에 통하고 아래로는 지리 ( 地理 ) 에 통한다고 여김 . 가장 이른 지리학 관련 기록은 『 상서 ( 尙書 )』 「 우공 ( 禹貢 ) 」 편에서 찾아볼 수 있음 Θ 농학 - 농학은 시대에 따라 꾸준히 발전고대의 과학기술 수학 천문학 지리학 농학중국의 4 대 발명 _ 종 이 Θ 3,500 년전 상商 ( 은殷 ) 나라의 갑골문과 종정문 Θ 춘추시대의 죽간 ( 竹简 ) 이나 목판 Θ 전한 ( 前漢 ) 시기 귀족들이 비단이나 부드럽고 얇은 천에 글자를 기록 Θ 죽간이나 비단에 기록하는 것은 갑골에 비해서는 쉬웠지만 , 죽간은 무거워 운반하기 불편했고 비단은 값이 비싸서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어려움 갑골문 죽간중국의 4 대 발명 _ 종이 Θ 궁정 기물을 제조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던 채륜 ( 蔡倫 ) Θ 이전 제지술의 제조 경험을 바탕으로 필사에 적합한 식물섬유의 종이를 제조 Θ 원료를 분리하고 세척하여 펄프 형태로 빻아 편편한 판에다 고르게 펴서 건조시키는 과정을 거쳐 종이 완성 Θ 현재종이 제조법의 원시형태 Θ 중국의 제지술은 대략 수당 ( 隋唐 ) 시기에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해 짐 Θ 8 세기 중엽 아랍 , 12 세기 유럽으로 전파 채 륜중국의 4 대 발명 _ 화약 Θ 도가 ( 道家 ) 의 연단술 ( 煉丹術 ) 과 깊은 관계 Θ 초석 ( 硝石 , 질산칼륨 ), 유황 , 숯을 혼합 불로장생의 단약 ( 丹藥 ) 을 만들고자 했던 위진 ( 魏晉 ) 시대의 연단술사들 Θ 이 세 가지 물질을 병을 치료하는 약물로 여겨 ' 불이 붙는 약 ' 이라는 의미로 ' 화약 ( 火藥 )' 이라 부름 Θ 당과 송의 교체기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화약 제조의 배합 방법이 군사적으로 응용되기 시작 Θ 북송 시기 화약은 초석의 함량이 아주 낮아 주로 적진을 연소시키거나 연막을 치는데 이용 Θ 화약과 화포는 13 세기 때 원나라의 서아시아 정벌을 통해 그 기술이 아랍의 여러 나라로 전해졌고 그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감중국의 4 대 발명 _ 나침반 Θ 발명시기를 정확히 알 수는 없음 Θ 전설 시기 황제 ( 黃帝 ) 가 치우 ( 蚩尤 ) 와 탁록 ( 涿鹿 ) 의 벌판에서 전쟁을 벌일 때 , 당시 안갯속에서도 사방을 분별할 수 있는 지남차 ( 指南車 ) 를 만들어 치우를 무찔렀다는 고사가 전해짐 Θ 전국 말기 서적인 『 한비자 ( 韓非子 )』 에서는 ' 사남 ( 司南 )' 이라는 지남 기구를 언급 Θ 남북을 가리키는 자침의 성질을 이용하여 점을 치거나 풍수지형을 살필 때 사용 Θ 사남은 수평을 이루는 지반 ( 地盤 ) 에서만 사용되었고 , 쉽게 자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항해에는 사용되지 않음 Θ 북송 시기 『 무경총요 』 에서는 지남침의 제작과 사용방법 소개 Θ 주욱 ( 朱彧 ) 의 『 평주가담 ( 萍州可談 )』 에서는 야간에는 별을 보고 낮에는 해를 보면서 항해했고 , 흐린 날에는 지남침으로 항해하였다 . 라고 기록 Θ 원나라 때에 이르러 나침반은 항해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이용 Θ 이러한 항해 기술의 발전은 명나라 정화 ( 鄭和 ) 의 원양항해 개척의 큰 디딤돌 역할 지남기 지남차중국의 4 대 발명 _ 나침반 기술사 혹은 마술사를 묘사한 한나라 시대의 화상석 (114 년 ) 의 일부 앉아있는 인물이 보고 있는 것은 수저형 나침반이다중국의 4 대 발명 _ 인쇄술 _ 조판인쇄술 조판인쇄술 Θ 고대 인쇄술은 크게 조판인쇄술과 활자인쇄술로 나누어 발전 Θ 조판인쇄술은 당나라 시대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짐 Θ 고대 돌이나 도장에 글을 새기는 방식에 기원을 둠 Θ 목판에 좌우가 뒤바뀐 문자를 양각 ( 陽刻 ) 하여 그 위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덮어 탁본 Θ 중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판인쇄물은 당나라 함통 ( 咸通 ) 9 년 (868) 에 인쇄된 『 금강반야바라밀경 ( 金剛般若波羅蜜經 )중국의 4 대 발명 _ 인쇄술 _ 활자인쇄술 Θ 송나라 필승 ( 畢昇 ) 이 조판인쇄술의 불편함을 개선하고 보완하는 과정을 거쳐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활자인쇄를 발명 Θ 이후 목판활자가 발명 Θ 원나라 때 왕정 ( 王禎 ) 은 운 ( 韻 ) 에 따라 목판활자를 체계적으로 배열해 필요한 활자를 아주 편리하게 찾아낼 수 있게 한 ' 회전자판법 ' 을 발명 Θ 활자인쇄술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전파되었고 , 또 실크로드를 거쳐 이란과 이집트를 비롯한 유럽에 전파 Θ 이후에 주석 , 구리 , 납을 이용한 금속활자가 발명 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우리나라의 『 직지 』(1377) 이며 , 그로부터 약 78 년이나 뒤인 1456 년에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유럽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 성경 』 을 인쇄 활자인쇄술현대의 과학기술 우주탐사 원자 력출처 Θ 그림과 사진 _ 네이버 구글 Θ 책 쉽게 이해하는 중국문화 , 김태만 , 김창경 , 박노종 , 안승웅 , 2011. 9. 7, 다락원 Θ 책 ( 그림으로 보는 ) 중국의 과학과 문명 , 로버트 템플 저 ; 과학세대 옮김{nameOfApplication=Show}
"대학생 한 사람이 한 아이만 후원하더라도 굶어죽는 아이들은 없지 않을까?""도대체 이런 이야기는 어디에서 배울 수 있을까?""우리가 아는 지식이 과연 참 지식일까? 쓸 수 있는 지식일까?""각 나라만의 문제일까? 각 나라 안에서도 문제가 많다."레바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동티모르, 체첸, 카슈미르, 쿠르드족, 이라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에라리온, 소말리아, 콜롬비아, 미얀마 책을 읽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전쟁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웠다.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이상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은 결국엔 '돈'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땅을 가지기 위해서 싸운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애를 쓰고 없는 자는 돈이 없기 때문에 더 가지려고 애를 쓴다.세계에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24년을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나라에서 아직도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체첸이라든가 시에라리온 등이 그렇다. 어떤 나라든 간에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돈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돈 때문에 싸우고 돈으로 인해 죽고 돈을 가져도 싸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승리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은 패배자로 남게 된다.‘돈 많은 사람이 승리하는 세상’, 책을 읽으면서, “왜 친구들과 함께 경쟁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늘 공부하면서 생각했던 점이기도 하다. 친구들과 이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등수를 매기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는가?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행태라고 말하지만, 이미 그런 평가에 물들어버린 세상에서 숨 쉴 틈이 없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지만, 각각이 개인화가 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돌아가기란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개인이 맺어야 할 관계도 좀 복잡하지 않은가? 학교에서의 공동체, 가족에서의 공동체, 그리고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공동체, 이 각박한 세상에 나 혼자 살아남기도 힘든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신경쓸 수 있을까?문득 이런 물음이 머리에 스친다. 그래서 뭐?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돈 때문에 죽어가는 아이들이 많으니 국제 구호 단체들에 조금이나마 후원을 하면 될까? 그럼 이 땅을 살아가는데 드는 죄책감이 덜어질까?나라나 인종에 상관없이 어린아이들은 모두 그 마음이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민족이나 언어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각자 살아온 환경에 달라질 뿐 인종이 그를 결정짓는 부분은 아니듯이. 그렇다면 다른 나라에서 사는 아이들 역시도 한국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대한, 민국, 만세 세 쌍둥이가 우리나라에서 현재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듯이, 전쟁국가에도 3-4살 아이들이 있다. 이 아이들도 사랑받아 충분하지만 그들에게 문제는 오로지 사느냐, 죽느냐. 고아인 아이들도 대부분이다.전쟁할 때, 가장 불쌍한 사실은 - 주로 권력들이 총대를 메고 나가 전쟁터에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엉뚱한 사람들이 전쟁터로 몰리고 사망한다. 전쟁이 나면, 싸우는 사람은 따로 있고 그 뒤에서 이겼는지 졌는지 지켜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주 정치인들은 그저 보고만 있다. 그들 나름대로의 중요한 일 처리가 있겠지만, 세상에 사람 목숨보다 귀한일이 있을까? 몇 천명의 목숨 값보다 귀한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전쟁의 아픔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전쟁이 끝나도 그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황폐한 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국제 사회의 힘이 절실히도 필요한 것이다. 옆집에 불이 나면 이웃집에서 신고를 해주듯이 서로간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하다.하지만 현실의 어려움이 분명 존재한다. 지금 함께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 옆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관심이 없어진 지금에서야 도대체 무엇을 바라며 살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에서 전쟁 국가들의 상황을 글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면, 에서는 종군기자의 삶을 영상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영화를 보면서 주목했던 것은 “왜 제목이 천번의 굿나잇일까?” 라는 것이었다. 종군기자인 레베카는 가정을 둔 엄마이자 아내이다. 그녀는 전쟁 지역에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삶을 사진기에 담아 세계에 알리는 카메라 기자이다. 엄마와 아내로서의 삶과 종군기자로서의 삶이 충돌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엿볼 수 있었다.나는 어릴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 이유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상상할 때 항상 ‘뛰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열정적이고 그 일에 대한 만족도도 크게 느껴졌다. 현재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있는 이유 역시 ‘기자’라는 직업을 과연 내가 진짜로 원했던 것이며 내가 상상했던 그 일을 하는 사람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공부하고 있다. 실제로 전공과목의 취재 실습이나, 대외 활동을 현장취재를 다니면서 느낀 점은 생각과는 많이 다른 모습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벤트를 취재해서 그저 몇 글자를 올리는 일을 하는 것들이 그랬다. 현재 우리나라 기자의 모습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이라는 영화에서 보여지는 종군 기자의 모습이 사실 내가 꿈꿔왔던 모습과 흡사했다. 열정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고 거기서 보람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 주인공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늘 현실과 싸우면서 살아왔는데,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자로서,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일부러 여자니까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에 반기를 들고 더 잘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다르다. 여자이기에 더 잘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으며 나에게 주어진 내에서 무엇을 활용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중이다.때문에, 나는 기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접기 시작했다. 내가 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는 나는 물론, 나에게 취재를 당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말이다. 세상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고,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을 전하고 즐거움을 찾으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나는 왜인지 그 소녀가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불쌍한 마음보다는 어쩔 수 없음을, 그리고 그 소녀는 자신의 선택을 자랑스럽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그 소녀의 인권을 말하기 보다는 그 소녀의 입장이 되어봤을 때, 한 번 죽는 인생 내 가족과 민족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직접 그 입장이 되어 보지 않아서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그런 일을 시킨다라고 보는게 아니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슬퍼할 가족이 없고, 부양할 자녀들이 없다. 문화적인 부분으로 보자면 남자들은 전쟁을 나가야 할 입장이었을 것이다. 여자를 폄하하는 문화가 아니라, 여자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부분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서양 윤리비교기말고사 준비단국대주나라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시대에 다양한 제자백가들이 등장함. 진나라가 이를 통일하였지만, 무너지고. 항우와 유방이 싸워 유방이 이기고 한을 세운다. 한에서는 진나라의 법가사상으로 지쳐있던 국민들을 위해 “공자사상”을 데려오는데… 실은 다양한 사조로 통치했던 한의 절충주의를 살펴본다.한의 절충주의1 유가사상과 관련된 한고조의 취임에 대한 Homer. H . Dubs의 관점을 설명하라.2. 한의 절충주의라는 제목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는가?한고조는 국민들의 인심을 얻기위해 사면을 해주거나 노예를 풀어주거나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그가 권력을 잡으려 초기에 노력했을 때, 민심을 얻기위해 최소한의 간섭을 하기도 했는데, 이는 진나라 시대에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관료들이 정기적으로 주민들의 대표와 상담했는데 그들의 바람을 확인하기 위해서 였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이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았고 그의 관료들의 충고와 동의를 따랐다.점점 더 이런 실천은 법에 써놓지 않았지만 법으로 성취되었다. (불문법) 후예들의 결정은 만약에 관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Dubs가 한고조의 등장은 공자 철학의 승리를 나타낸다고 말했는데, 황제의 권위가 제한적이라는 것과 오직 인민은 위해, 정의에 기초해서 황제의 권위가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법가주의에서는 제멋대로 하며 절대통치를 했는데 이를 기려내고 공자철학의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다. 한고조와 그의 후예들은 기술적으로 여전히 강력한 군주로 남아있었지만 실제로의 그의 힘은 제한되었다.이론적으로 어느정도 정부란 어떤 것이 아니냐? 하는 공자의 생각을 갖게된다. 국민은 정부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며 임금이 손에 권력을 쥐어준 관료들을 선발해야 한다. 그럼에도 본래 이상과 거리가 있지만 한고조 같은 깡패가 공자의 이상에 가까이 가려고 했던 것은 놀랍다.한고조는 유가학파가 아니다. 그는 그들을 격식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검소하게 살았다. 그가 죽었을 때, 그는 장례식을 최소하하라고 했는데 이는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지 않기위해서 였다.이것이 위선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유교 덕목에 있어서 모든 역사속에서 가장 자비롭고 사랑이 있는 정말 귀감이 될만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 미신적이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신비로운 힘을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혹하여 휘말렸다. 학자들중에서 그의 궁에 공식적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임명된 모든 다양한 종교이론이 제시되었는데 단 한명만 유교학파였다. 게다가 문제의 아들의 선생님을선택할 때, 법가주의자를 선택했다.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7번째왕 무제의 시대는 그야말로 최고 승리의 유교 시대이다. 잘못 이름 붙여진 것일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유교학파의 후원자로 알려져있다. 그리고 그의 궁안에서는 유교학파들이 영향력이 있었다.그러나 우리가 사실을 좀 더 주의깊게 들여다 보면 역사가 우리에게 여전히 남겨주고 있는 사실들을 보면 다음 결론을 피하기 어렵다. 첫 째, 무제가 공자파였을 것이다. 그가 15살 처음 궁을 물려받을 때, 그는 재빨리 이 국면을 넘어섰다. 그의 긴 성년의 통치기간에 그는 법가주의자였고 그는 정치적으로 정교하게 공자파인척 했다. 둘째, 그들은 한직에 배치되었고 요직은 법가주의자들이거나 반유교학파들이 차지했다. 이러한 명목상 공자학파 관료들은 높은 요직을 가지고 있는, 실제 좋은 유교파가 아니었고 그리고 무제는 어떤 사건도 그들의 충고에 귀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유교가 한무제 시대에 위대한 승리했다더라도 제한된 의미에서 사용되어져야 한다. 행정 절차에 있어서 실제는 정치행정의 공자 철학은 나뒹굴고 있었다. 또한 왜곡되어 본래와 거리가 있었는데 이 모습을 공자, 맹자, 순자가 살았더라면 매우 놀랐을 정도였다.4. 동중서의 정치 철학에 대해 설명하라동중서는 흔히 한시대의 가장 유명한 공자파라 불린다. 그의 사상을 표현하는 본보기들이 전해진다. 그 중 최고의 작품은 : 역사의 번잡한 . 반대로 더 악화시키지는 않을련지…?”공자시대의 이 주장은 꽤 설득력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대에까지 중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불교의 복잡한 교리와 도교에 익숙해져 간단하고 현실적인 철학은 뭔가 부족해보였을 것이다. 전반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 없이는 희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때가 왔다. 일부 학자들이 공격할 때가. 하지만 당시대는 아니었다.송나라 시대에 960-1270 소위, 신유가라는게 탄생한다. 시작은 당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신유가 이런 것을 제시한다. 불교가 제시하는 모든 것 (불교의 우주론에 필적한다는 것, 우주세계를 설명하고, 공자윤리를 형이상적으로 설명 할 수 있으며 사회, 정치, 활동을 정당화 시키고 보통사람들의 행복 추구를 정당화 할 수 있음) 을 할 수 있음을 말이다.7. 주희의 리&기에 대해서 논하라송의 신유가엔 다양한 학파가 있었다. 그 중 두 학파가 두각을 드러냈다. 육상산과 주희이다. 주희는 신유가 학자 중 중국을 통틀어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학자이다.주희는 글쓰는 집안의 진지한 학생이었다. 어렸을 때, 도교와 불교를 공부했는데, 주희는 확실한 공자학파였다. 공직을 하는 동안, 대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많은 학생들이 있었고, 그의 학생들과ㅏㅏ 얘기하는 기록은 강력함을 드러냈고, 인격적으로도 매력적이었다. 그는 광범위하게 썼다. 가장 중요한 고전 작품에 대한 주석이 전통으로 인정되었다. 바르게 받아들여 질 수 있는 해석으로 1313부터 1905년 과거 시험이 폐지될 때까지.주희는 신유가 운동에서 선배들이 쌓아놓은 것들을 보았다. 그리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그의 핵심개념은 리이다. 현대 중국에서 이것은 ‘예’와 혼동되어 사용되는데 발음의 유사성 때문이다. 사실은 꽤 다르다, ‘리’는 원리를 드러낸다.모든 사물은 리와 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희는 주장한다. 기는 정확히 해설 될 수 없는데, ‘실체’와 유사하다. 그래서 잎과 꽃이 다른데 그들의 기가 다른 것들에 지배를 받는다. 모든 것들이 이와 기로 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믿음은 구체화 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지식을 얻기 위해 제안하는데, 조용히 명상하는 것이다. 이런 모든 기술들은 부지런히 계속 실천하는 갑자기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힌두교 부하니샤의 성명서와 아주 유사하다. ‘그게 내 본절이다’ 몇가지 방법에서 유사하다. 선불교에서의 계몽과. 육상선은 말한다. 만약에 배관공이 찾아보고 추적하고 검토하고 자기 자신을 세련하면 어느날 아침에 깨달을 것이다.육상선은 선불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주희와 비교했을 때, 그의 사후에 . 송의 신유교. 고전에 관한 그의 주석은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고 시험의 기준으로 쓰였다.신유가에 대한 반응신유가에 대한 고연무의 반격후자 주제가 유효하다는 것이 증명됐다. 만주 사람들에 맞서서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었을 때, 그러나 그가 부재중일 때 이 일이 일어났다. 그의 양어머니 그녀로부터 빚을 지고 헌신 받았다. 만주 통치하에 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는 굶어 죽으면서 그녀의 아들이 만주 치하에 직장을 얻지 않길 바랐다. 그는 완전히 왕조가 세워질 때 까지 싸웠고 여러가지 경영을 배우며 돌아다녔다. 그가 산업을 운영하는데 재능이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사업은 그의 진짜 흥미가 아니었다. 만주에 대항항 혁명 자금을 벌 생각으로 돈을 벌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감옥에 들어갔고 후에 만주는 그에게 일하라 했다. 만약 강요한다면 자살하겠다고 말했고, 그는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죽을 때 까지 공부하고 가르쳤다.학자로서 그는 두루 방면을 공부했다. 책을 읽고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다녔다. 이는 당시 좁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가 영향을 끼친 것은 음성학 연구였다. 선배들의 연구를 공부하고 발전시켰다. 음성학의 사용을 기록문에 관한 역사학자 였다. 돌 바위에 쓰여진 비명을 연구하고 편집했다.철학자로서 육상산의 신유가에 강력히 공격했다. 왕양명의 신유가는 선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지켜봤다. 신유가의 깊에 빠진 동시대의 인물들은 효과적으로 처음엔 부끄러워 하더니 이제는 익숙해졌다.그들은 세상이 사적인 이익이라고 생각한다. 아들, 손자들이 영원히 즐길 수 있도록 물려주고 있다. 고대에는 민중이 주인이요, 통치자는 손님이라 얘기했다. 통치자들의 삶은 민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었다. 민중이 언젠가 그저 손님들이 되었다. 그 안에서 평화롭게 즐기는 한 조각의 여유따위도 존재하지 않는다.왕권을 열광하는 사람이 그것을 얻게 되기 전에는 수 많은 사람이 죽고 가죽이 갈갈이 찢어진다. 오직 그의 재산 확장을 위해 어떤 불쌍함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나의 후손을 위해 내 재산을 마는다. 그리고 왕권 장악한 후에 민중의 노동과 눈물의 뼈를 갈고 가족을 흩어지게 하는데 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는 내 이익이며 나의 재산을 위한 것이다.제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통치자이다. 저런 통치자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을 것이다. 왕권의 팽창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고대에는 사람들이 통치자를 사랑하고 아버지처럼 지지했다. 그리고 하늘을 받들 듯 존경했고 실제로 그랬다. 이제는 그들은 도둑하는 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별볼일 없는 “친구”라고 생각한다.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이 시기를 특징 짓는 고대의 선배는 공자다. 공자는 실천적인 개혁자였다. 말이나 관념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학자는 이렇게 썼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는 말은 느리게 하고 행동하는 데는 빠르다. 행동하는 데에는 힘차고 말하는 데에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군자는 국으로 한다. 말을 먼저하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 그의 말이 그의 행동보다 앞서가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3. 안원의 반격안원은 의료를 열어 생계유지를 했다. 젊었을 때에는 열렬한 도교학파 였다. 나중엔 깊이 신유가에 빠졌다. 신유가가 명하는 명상을 실천하면서 중년에 들어서 그는 완전히 이러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신유가가 싶이 도교와 불교에 물들어 있음을 알았다.안원은 공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