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과 목 명 : 제주4.3의 이해학 과 : (야)경영학과학 번 : 2015103352이 름 : 김동환지난 11월 16일. 오랜만에 4.3평화공원을 가게 되었다. 요즘은 사람들에게 많이 노출되어 있고 또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고 친근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4.3평화공원은 몇 번 접해볼 기회가 있었는데, 예전보다 방문객이 늘었고 편의시설 또한 많이 개선되어 불편한 없이 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는 찾아서 보러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기회가 생기면 보러가곤 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4.3평화공원은 인터넷으로 습득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 직접보고 느끼는 것이 흥미를 사로잡을 수 있기 오늘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나 역시 이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4.3사건에 대해 무지했고 또 역사는 지루하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고정관념은 사라지고 4.3사건에 대한 관심과 흥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강의를 듣고 있으면 내가 잘못알고 있었던 사건과 그 사건의 내막 그리고 설명을 듣기전보다 사건들 하나하나가 더 새롭게 다가왔다.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꼭 가보고 싶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다. 드디어 16일 4.3평화공원을 보러갈 기회가 생겼고 상당히 기대가 되었다.4.3평화공원을 가기 전에 간단히 사전조사를 해보았다. 제주 4.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 당국의 정책 실패와 사회 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제주도민의 민. 관 총파업에 대응해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테러와 고문을 일삼았다. 결국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하였고, 5.10 총선거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 되었다.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증파하여 강력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제주도 전역에서 무장대를 협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1949년 3월 비로소 선무를 원칙으로 한 진압작전이 전개도어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고, 그해 6월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와 내륙지방 형무소 재소자등이 또다시 희생되었다. 결국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2만5,000~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가운데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세계적인 냉전 상황과 한반도 분단체제의 고착화 과정에서 발발. 전개된 제주4.3사건은 국가공권력에 의한 집단 희생으로 귀결되었고, 이후 반세기를 넘어 진상규명운동의 과정을 거쳐 명예회복을 통한 화해와 상생의 해결 과정을 밟고 있다.4.3평화공원 전시실은 총 6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관 제주4.3의 전 기간을 통하여 화산섬 제주도의 중산간 지대에 산재한 천연동굴들을 주민들에게 천혜의 피신처로 활용되었다. 동굴을 모티브로 한 전시관으로 통하는 긴 터널은 4.3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정의 처 관문이기도 하다. 이는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터널을 지나면 원형의 천창아래 누워 있는 백비를 만나게 된다. 4.3은 아직도 정명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4.3의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날, 비로소 비문이 새겨질 것이며, 누워있는 비석도 세워질 것이다.2관은 해방과 과절이다. 전쟁-해방-자치0미군정-3.1발포사건-탄압 의 순서로 전개된다. 해방 이후 제주도민은 자치를 시행해나가지만 3.1절 기념대회에서 민간인 6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제주도민과 미준정의 갈등과 대립이 본격화되면서 1948년 4월 3일의 무장봉기의 상황으로 치닫는다.3관은 무장봉기와 분단 거부이다.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무장봉기의 발생과정과 배경을 보여준다. 향후 초토화 작전의 직접적 원인이 되는 5.10 단선. 단정반대사건을 중심으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연찰되었다. 이 공간에는 오름을 상징하는 중앙부와 오름 위의 상황을 묘사한 강요배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4관은 초토화와 학살이다.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대량학살, 그 이후 한국전쟁 기간 형무소 재소자 학살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4.3사건 희생자의 80% 이상은 이대 희생되었다. 원통형의 하얀 방, 벽에는 죽음의 다양한 형상들이 하얀 붕대로 둘러싸인 부조물로 표현되어 있다.5관은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이다. 복구와 정착 그리고 후유증, 진상규명운동으로 나누어 4.3의 상처와 아픔, 그 회복과정을 보여준다. 진상규명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는 오랜 기간 도민의 투쟁에 의해 2000년 1월 4.3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그 결실을 맺었다. 이 공간에는 4.3진상규명을 위한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