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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Ⅰ. 서론 : 거들떠보기우선 생각해놓아도 전혀 해롭지 않을 어떤 문제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떠한 개념을 정립하기 위해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은 바로 그 개념의 ‘유’와 ‘종차’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논리학에서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으므로, 윤리학을 주제로 한 본 텍스트에서는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다. ‘유’와 ‘종차’로 개념을 세우는 방식에 대해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인간’이란 개념에 대해 정의한다고 하자.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공공연한 사실처럼 말해져 왔다는 것을 염두 해두고 관련하여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이 명제 안에서 ‘인간’을 특징지어보자면, ‘인간’의 ‘유’는 동물이며, ‘종차’는 이성적이라는 것이 된다. ‘유’와 ‘종차’ 모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요한 가치를 가지며, 개념이 반드시 가져야 할 필요조건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종차’가 더더욱 큰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종차’란 ‘유’라는 커다란 울타리 안에 동일성으로 묶인 여러 가지 것들을 각각의 ‘개별자’로 드러날 수 있게 해주는 차이를 말한다. 바로 여기서(종차에서) 우리는 그 ‘개별자’들의 특징으로 말미암아 각각의 기능이나 능력을 알 수 있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에게 있어 학문(철학)의 주요대상은 식물도 동물도 아닌 바로 ‘인간’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생물들과 비교하여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도 에서 영혼의 모든 기능들을 설명하며 그 가운데 이성을 제외한 다른 능력들은 모든 동식물들에 공통된 능력이고, 이성만이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위에서 언급했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명제가 여기서부터 착안된 것이다).이 정도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유’와 ‘종차’가 개념 성립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밝혀진 것 같다. 이 두 조건을 먼저 언급한 이유는 필자가 다룰 부분, 그러니까 의 제 2권 중 5장의 제목이 탁월성의 유 :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이해를 앞에 두면 뭐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없으니까.Ⅱ. 본론 : 들여다보기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Arete)에 관한 고찰*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2권 5장…탁월성이 무엇인지를 검토해야 한다. 영혼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세 가지, 즉 감정(pathos)과 능력(dynamis)과 품성상태(hexis)이므로, 탁월성은 이 셋 중 하나일 것이다.(1105b20-23)내가 말하는 감정이란 욕망, 분노, 두려움, 대담함, 시기, 기쁨, 친애, 미움, 갈망, 시샘, 연민, 일반적으로 즐거움이나 고통이 동반하는 것들이다. 또 능력이란 그것에 따라 우리가 이러한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것들로, 가령 화를 낼 수 있거나 슬퍼할 수 있거나 연민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능력들이다. 품성상태란 그것에 따라 우리가 감정들에 대해 제대로 태도를 취하거나 나쁘게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1105b23-27)- 감정과 능력, 품성상태에 대한 정의를 내림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의 ‘유’가 무엇인지를 밝히려 하고 있다. 그는 계속하여 본문에서 탁월성이나 악덕(탁월성에 반대되는 개념)이란 감정에도, 능력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우리가 타인에게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은 감정에 따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감정을 가졌다 하여, 예를 들어 무언가에 겁을 내거나 성질을 냈다 하여 좋거나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러한 타인에 의한 평가는, 우리가 탁월성 혹은 악덕을 지니고 살아감에 있어, 또는 그것들을 꾸준히 발휘함에 있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감정은 합리적인 선택(목적-바람-수단-숙고의 과정)에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합리적 선택을 앞서 세우고 있는 탁월성은 그 발휘에 있어 특정한 상태에 있다고 이야기된다.또 위와 같은 논리들로 보아 탁월성은 능력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본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월성이건 간에 그 무엇을 좋은 상태에 있게 하고, 그것의 기능(ergon)을 잘 수행하도록 한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1106a15-17)- 예를 들어 쉽게 생각해보자. 무기를 제조하는 사람에게는 무기를 잘 만드는 것이 그의 덕을 수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잘 제작된 무기는 병사에게 어떤 종류의 안정과 자신감을 제공할 것이고, 병사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전투에서 훌륭한 결과를 거둘 수 있다. 이때 제작된 무기가 갖춘 탁월성은 그 무기를 만든 무기 제조자가 지닌 탁월성과 같을 것이다. 그 무기의 탁월성은 병사가 느낀 안정감, 자신감 등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이처럼 탁월성이란 각자의 고유한 특징과 본성, 기능이 최대한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2)연속적이고 분할할 수 있는 모든 것에서는 더 많은 양을, 혹은 더 적은 양을, 혹은 동등한 양을 취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때의 더 많고 적음이나 동등함은 대상(pragma) 자체에 따라 이야기될 수도 있고, 우리와의 관계에 따라 이야기될 수도 있다. 이때 동등함(ison)은 지나침과 모자람의 어떤 중간이다.1106a26-30)대상에 있어서의 중간은 각각의 끝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이며 동일하다. 반면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은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이지도 않고 동일하지도 않다.(1106a30-32)- 연속적이고 분할할 수 있는 것에서, 우리는 더 많음(과잉)이나 더 적음(부족), 동등함(과잉과 부족의 중간)을 택할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선택사항은 첫 번째, 대상 그 자체에 따라 이야기 되거나 두 번째, 우리와의 관계에 따라 이야기 된다.첫 번째, 대상 그 자체에 따라 이야기 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20cm짜리 길고 가는 끈을 분할의 대상으로 설정한다면, 여기서 18cm의 지점은 더 많음이고, 2cm의 지점은 더 적음일 것이다. 또, 여기에서 10cm는 중간 지점으로서 동등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다.이 두 가지 경우는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사이에 어떠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부분은 어떤 것일까? 이 저서가 그의 ‘윤리학’을 다루고 있으므로 거기에서 착안해볼 필요가 있다. 윤리학이란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좋음과 나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담고 있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가지 경우 중 후자, 그러니까 두 번째 언급한 ‘우리와의 관계에 따라 이야기 되는 경우’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도 텍스트에서 이 점에 대해 밝히고 있다.그래서 모든 전문가들은 이런 방식으로 지나침과 모자람을 피하며, 중간을 추구하고 이것을 선택하는데, 이때의 중간은 대상에 있어서의 중간이 아니라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이다. (1106b5-7)따라서 만일 모든 전문적 앎이 이런 방식으로, 즉 중간을 바라보면서, 또 일을 이것으로 이끌어 가면서 자신의 기능을 잘 완수해 내는 것이라면(…), 또 자연처럼 탁월성도 모든 기술보다 더 정확하고 더 좋은 것이라면, 그렇다면 탁월성은 중간을 겨냥하는 것(stochastik?)일 터이다.(1106b8-16)3)내가 말하는 탁월성은 성격적 탁월성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감정들과 행위들에 관련하며, 이것들 안에 지나침과 모자람, 그리고 중간이 있기 때문이다.(1106b16-18)-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제 2권 1장)탁월성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지적인 탁월성이며, 다른 하나는 성격적 탁월성이다. 지적 탁월성은 그 기원과 성장을 주로 가르침에 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것은 경험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반면 성격적 덕은 습관의 결과로 생겨난다.(1103a14-17)- 여기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탁월성이 각자의 고유한 특징과 본성, 기능이 잘 발휘되도록 하는 것이라면, 인간의 경우에도 우리가 지닌 고유한 것들이 잘 발휘될 탁월성이란 성격적 탁월성이라고 직접 주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먼저 탁월성의 두 종류와 그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그러나 마땅히 그래야 할 때,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은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행위에 관련해서도 지나침과 모자람, 그리고 중간이 있다. 그런데 탁월성은 감정과 행위에 관련하고, 이 것들 안에서 지나침과 모자람이 잘못을 범하는 반면, 중간적인 것은 칭찬을 받고 또한 올곧게 성장한다. 이 양자가 탁월성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탁월성은 중간적인 것을 겨냥하는 한 일종의 중용이다.(1106b23-28)그러므로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과 결부된 품성상태로, 우리와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중용에 의존한다. 이 중용은 이성에 의해,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이 규정할 그런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다. 중용은 두 악덕, 즉 지나침에 따른 악덕과 모자람에 따른 악덕 사이의 중용이다.(1106b40-1107a3)- 우리의 품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여러 성격적 탁월성은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넘치면(지나치면) 탁월성으로서의 의미를 잃게 된다. 이는 악덕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모자라면(부족하면) 탁월성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어 악덕이 되고 만다.이러한 모자람과 지나침의 악덕을 피하고 중간적인(적절하고 동등한) 얼굴을 하고 있는 품성만이 마침내 탁월성이라 이름 지어질 수 있다. 탁월성의 이러한 모습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라 부른다.그런데 탁월성이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어떤 조건들이 요구된다. 중용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동등함과 중간적 상태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이 숙고는 인간의 정신 활동(이성적 활동)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탁월성의 두 종류 중 지적인 탁월성의 일차적 근원이 바로 이 이성적 활동이다.
    인문/어학| 2024.06.29| 7페이지| 5,000원| 조회(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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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하이데거의 예술관과 인간관
    하이데거의 예술관과 인간관
    [ FINAL REPORT ]하이데거의 예술관과 인간관1. 탐구의 출발 : 사물성에 대한 고찰하이데거는「예술작품의 근원」을 통해 예술작품,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의 근원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가 곧바로 예술의 근원 또는 본질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작품에로 접근하는 이유는, 매우 추상적으로 여겨지는 예술이라는 개념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제로 펼쳐져 있는 작품을 통해 다가서는 것이 한층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예술작품은 예술이라는 개념보다 현실적이다. 그것은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져 있거나,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은 어떤 사물적 측면(das Dinghafte)을 지니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예술작품은 결국 사물로서 환원된다고 하는 결론은 아닐 것이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듯이, 작품은 사물적 측면과 함께 그것과는 또 다른 어떤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또 다른 측면이란 아직 우리에게 드러나 있지 않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작품을 이루고 있는 것들 중 가장 현실적인 사물적 측면을 우선 들여다본다.“사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사물의 사물존재(Dingsein)”, 즉 “사물성(Dingheit)”에 대해 묻는 것이다. 그는 사물성의 고찰을 위해 ‘사물’에 대한 전통적인 세 가지 관점들에 대해 먼저 돌이켜본다. 그 관점들이란 ‘속성의 담지자로서의 사물’, ‘감각의 통일체로서의 사물’, ‘형상화된 질료로서의 사물’이라고 요약될 수 있는데, 하이데거는 이 세 가지 관점들을 차례로 비판하고 있다.우선 첫 번째 사물 개념에서 사물은 일정한 특징(속성)들을 지닌 어떤 것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화강암이라는 사물은 단단함, 무거움, 거칠음 등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고, 이러한 성질들을 우리는 “돌에서 감지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특징들은 돌 자체에 고유하게 속해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돌 자체’라는 사물은 여러 속성들을 가지고는 있지만, 속성들로 환원되지는 않는 어떤 것이다. wandtnis)에 의해 이끌려지고 밝혀진다.” 즉, 우리가 일차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감각 그 자체가 아니라 ~한 감각 또는 ~의 감각인 것이다. 따라서 ‘감각의 통일체’로서의 사물 개념 또한 우리를 사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그렇다면 세 번째 사물 개념은 어떠한가? 이미 언급하였듯, 하이데거가 보기에 단순한 사물이란 자발적으로 자라나는 의미로서의 ‘자생성’과 자기 안에 고요히 머물러 있다는 의미로서의 ‘자족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세 번째 사물 개념에서 사물이란 “질료와 형상의 결속”으로서 “일종의 ‘지속적인 것’이자 ‘자기 안에 머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사뭇 사물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규정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형상화된 질료로서의 사물 개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형상화된 질료 개념은 곧 재료와 어떤 목적 또는 계획의 결합을 뜻한다. 형상이라는 목적에 의거하여 질료는 그 종류나 배열이 정해진다. 질료를 선택하는 형상은 ‘용도성(Dienlichkeit)’이라는 목적에 의거하는데, “질료의 선택은 이러한 용도성 속에 근거를 가지며, 또한 재료와 형태의 결합체(Gefuge, 결합구조)가 지닌 위력도 이러한 용도성 속에 그 근거를 갖는다.” 이러한 설명에 비추어 보면, 사물에 대한 세 번째 개념은 단순한 사물을 설명하는 데 있어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이는 오히려 목적에 따라 제작되는 도구를 설명하는 데 더욱 적합한 듯하다. 이에 자연스레 ‘도구존재’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다.2. 예술작품과 진리하이데거는 도구를 단순한 사물과 예술작품 사이에 독특한 위치를 갖는 존재자로서 이해한다. 도구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사물이므로, 사실상 우리가 고찰하려는 단순한 사물보다도 더욱 현실적일 수 있다. 따라서 순수한 사물과 작품 사이에 놓인 이 도구라는 존재자를 파악할 수 있다면 사물존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지도, 더 나아가 작품존재에 대한 접근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하이데거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되는austreten, 출현한) 것이다.” 은폐되어 있던 존재의 드러남, 다시 말해 “존재자의 비은폐성(Unverborgenheit, 환히 드러나 있음)”이 “진리(Wahrheit)”라고 하이데거는 덧붙인다.그런데 혹시 작품의 진리라는 것은, 고흐가 농부의 신발을 완벽하게 재현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하이데거는 재현의 산물이 아닌 예술작품으로서 그리스 신전을 예로 든다.신전이란 실제의 대상을 오롯이 옮겨놓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은 그저 우뚝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인들의 삶 전반을, 더 나아가 신전의 주인인 신의 존재까지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신전이라는 작품이 빈 터 위에 존재함으로 인해, 그 전까지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던 존재자들의 본연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존재자들이 훼손되지 않은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펼쳐짐’을 하이데거는 “세계의 세계화”라 명명한다. 존재자들이 비로소 그 스스로의 모습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것, 즉 “솟아나와 피어오르는 행위(Herauskommen und Aufgehen)”에 대한 사유는 이미 그리스인들이 ‘퓌시스’라 불렀던 개념으로부터 온 것이다. 보통 ‘자연’이라는 단어로 번역되는 퓌시스는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존재자들이 근본적으로 삶을 영위해야 할 바탕과 터전을 밝혀주는데, “우리는 이것을 대지(die Erde)라 부른다.” 예술작품은 “거기에 서서 세계를 열어 놓는 동시에 (대지의 품으로) 되돌아가 그 세계를 대지 위에 세운다.”이제 하이데거의 예술론에서의 예술작품은 필연적으로 진리와 연관된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진리’를 사유함에 있어, 우리는 ‘세계’와 ‘대지’라는 개념과 만나게 되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논의는 예술작품의 진리와 세계-대지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라는 문제로 자연스레 이끌린다.우선 세계란 “드넓은 궤도가 스스로 열리는 개방성(Offenheit, 열려 있음)”이며, 대지란 “자기를 꼭 닫아두고작됨으로써 존재하는 창작된 존재(Geschaffensein)라는 사실에 존립”한다고 언급함으로써, 우선은 일반적인 상식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뒤이어, “창작된 존재가 작품으로부터 나타난다(Hervorkommen)고 함은, 분명히 어떤 위대한 예술가가 그 작품을 만들었으리라는 점이 그 작품에서 뚜렷이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뜻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창작이란 단어를 “하나의 산출행위(Herborbringen)”, 즉 “어떤 것을 그것의 존재의 은닉된 영역으로부터 존재의 열린 장 속으로 이끌어내어-나타나게-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사용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창작된 예술작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단순히 그 예술작품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작품을 창작한다는 것은 곧 “작품에서 진리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고, 또한 “진리를 작품 안으로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 안에 ‘진리가 스스로를 정립한다’는 그 ‘행위’를 보다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창작자’의 존재 자체를 아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하이데거에게 창작자는 창작의 ‘주체’라기보다는, 일어나는 존재의 진리를 작품 안으로 가져오는 창작 ‘매체’” 혹은 ‘매개’에 가까운 것이며, 따라서 ‘창작’이란 “주체의 자발적, 능동적인 제작”의 의미로서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하이데거에 있어 작품 속에 창작된 존재는 세계와 대지의 투쟁에서 일어나는 존재 사건이므로, 작품은 언제나 새롭거나 낯선 것일 수밖에 없다. 작품은 그 안에서 스스로 정립되는 진리, 즉 존재자의 비은폐성 안으로 우리를 밀어 넣고(einrucken), 익숙하고 낯익은 것으로부터 우리를 밀어낸다(herausrucken). 이러한 작품존재의 ‘밀어 넣음’과 ‘밀어냄’은 인간 실존의 변화, 즉 “모든 통상적 행위와 평가, 그리고 그러한 앎과 시선을 자제하며 삼가”는 태도 변화를 가능하게 때, 예술의 본질이란 “진리가 스스로를-작품-속으로-정립함”이다. 그렇다면 ‘시 짓기’란 어떤 의미에서 ‘진리 스스로의 작품 속으로의 정립’이라는 것인가? 여기에서 ‘시 짓기’의 개념은 “임의적인 것을 멋대로 생각해” 내거나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표상이나 상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시 짓기’라는 행위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는 대개 ‘시 짓는 주체로서의 시인’에 주목하게 된다. 언어가 인간 존재의 특징이며, 시작(詩作)이 언어 행위의 일부로서 여겨지는 한, ‘시 짓는 주체’에 대한 이러한 관심은 사실 피할 수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언어와 시작(詩作), 그리고 인간 사이의 연관관계의 큰 틀 자체는 하이데거 또한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정초함으로써 그 연관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밝힌다. 하이데거가 이해하는 “언어는 개방될 수 있는 것과 은폐된 것을 비로소 낱말들 속에 담고 문장들 속에 담아가도록 촉구”하고, “존재자를 하나의 존재자로소 비로소 처음으로 (존재의) 열린 장 안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근본적 언어란 단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적 언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인간들에게 그때마다 비로소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스스로를 개시하며 일어나는” 어떤 “사건(Geschehnis)”으로서의 언어인 것이다. 이러한 언어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시 짓기란 존재자의 비은폐성에 관해 말하는 것”, 즉 “그 안에서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개시되는 그런 터-있음의 터로서의 존재의 열린 장”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의 “시 짓는 본질”으로 말미암아 “예술이 존재자의 한가운데에서 열린 곳(offene Stelle)을 열어젖히게 되며, 이 열린 곳의 열려 있음 안에서 모든 것이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존재하게” 된다.하이데거는 을 통해 우리가 명사적으로 사용해 온 개념들, 특히 진리나 창작, 보존 등을 동사적으로 사유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명사것이다.
    인문/어학| 2024.06.29| 9페이지| 8,000원| 조회(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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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스피노자 <에티카> 제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
    스피노자 <에티카> 제3부 '정서의 기원과 본성'
    * , 철학 석사 1기제 3부. 정서(affectus)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정서와 인간의 생활 방식에 관하여 기술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또한 인간의 무능력과 무상(無常)의 원인을 공통적인 자연력에 돌리지 않고 인간 본성의 결함에 돌림으로써, 인간 본성을 멸시하거나 저주했다.스피노자는 이러한 철학자들이 정서의 본성과 힘을, 그리고 정신이 정서의 제어에 관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규정하지 못했다고 여긴다. 그는 사람들이 부조리하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인간의 결함이나 우행을 기하학적 방법으로 증명하고자 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자연의 활동 능력과 그 힘이 작용하는 방식으로서의 자연 법칙은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기 때문에, 자연 안의 모든 사물들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도 또한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 의한 인식이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정서도 그 자체로 고찰한다면 자연의 필연성과 힘에서 생긴다. 또한 그것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특정한 원인과 성질을 지니고 있다.이러한 논리로 스피노자는 정서의 본성과 그 힘, 그리고 정서에 대한 정신의 능력과 함께 인간의 행동과 충동까지도 기하학적 방법으로 고찰하고 있다.Ⅰ. 세 가지 기본 정서들1) 욕망이란, 인간의 본질이 주어진 정서에 따라 어떤 것을 행할 수 있도록 결정된다고 파악하는 한에서 인간의 본질 자체이다.2) 기쁨은 인간의 더 작은 완전성에서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3) 슬픔은 인간의 더 큰 완전성에서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는 것이다.[해명] 기쁨은 완전성 자체가, 슬픔은 결핍(無) 자체가 아니므로, 이행하는 활동으로 이해해야 한다.Ⅱ. 기쁨 또는 슬픔과 관련된 정서들Ⅱ-1. 외적인 원인(외부 사물)의 관념을 동반하는 정서들1) 경탄(경이)은 새로운 사물에 관한 표상인데, 이 표상은 다른 표상과 아무런 연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정신이 그 안에 확고하게 머문다.2) 경멸이란 정신이 어떤 사물을 보고 있으면서다.[해명] (3부 정리 52의 주석에 의해)미워하는 대상을 경멸할 때 우리는 그 대상의 존재를 부정한다. 또한 우리는 (3부 정리 20에 의해)미워하는 것의 존재를 부정하는 한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가 조롱하는 대상을 동시에 미워하므로, 사실 이러한 기쁨은 견고하지 못한 것이다.9) 희망은 결과가 의심스런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기는 불안정한 기쁨이다.10) 공포란 결과가 의심스런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기는 불안정한 슬픔이다.11) 신뢰는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기는 기쁨이다.12) 절망은 의심의 원인이 제거된 미래 또는 과거의 사물에 대한 관념에서 생기는 슬픔이다.[해명] 사물의 결과에 대한 의심의 원인이 제거될 때 희망은 신뢰로, 공포는 절망으로 바뀐다. 의심의 원인은 인간이 과거나 미래의 사물을 현존하는 것처럼 표상하기 때문에, 또는 인간이 의심을 품고 있는 대상의 존재를 배제하는 어떤 다른 것을 표상하기 때문에 제거될 수 있다.13) 환희란 희망(부정적 결과에 대한 예상)과는 다르게 일어난 과거 사물에 대한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14) 양심의 가책(회한)은 희망(긍정적 결과에 대한 예상)과는 다르게 일어난 과거 사물에 대한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15) 연민이란 우리와 유사한 타인이 겪는 불행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이다.16) 호의란 타인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17) 분노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 대한 미움이다.18) 과대평가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를 정당한 것 이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19) 멸시(과소평가)는 누군가에 대한 미움 때문에 그를 정당한 것 이하로 평가하는 것이다.20) 질투란 일종의 미움인데, 타인의 행복에 대해서는 슬퍼하고 불행에 대해서는 기뻐하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해명] 질투에는 동정이 대립되는데, 따라서 동정은 원래 의미와는 달리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21) 동정은 일종의 사랑인데, 타인의 행복에 대해때조차도 자신을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지 않는데, 그 이유는 본인이 할 수 없다고 표상하는 것은 동시에 필연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표상되기 때문이다(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음). 그러나 만약 타인의 의견에만 의존(사람들이 자신을 경시한다고 상상)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와 연관하여 현재 자신에게 있는 어떤 것을 부정(나쁜 것이나 불확실한 것만 바라거나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할 경우에는, 우리는 자신을 정당한 것 이하로 느낄 때도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치욕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여 쉬운 일도 감히 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면 그러한 상황 또한 자신을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소심함(abjectio : 용기가 없는 상태)으로 정의된다.5) 소심함이란 슬픔 때문에 스스로에 대하여 정당한 것 이하로 느끼는 것이다.[해명] 그런데 겸손과 소심함은 인간 본성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희박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상 (3부 정리 54에 의해)정신은 자신의 활동 능력을 긍정하는 것만을 표상하고자 하기 때문에, 그러한 정서(겸손, 소심함)에 가능한 한 저항할 것이다. 따라서 소심하고 겸손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명예욕이 강하거나 질투심이 깊다.6) 명예는 우리가 타인의 칭찬을 기대하는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7) 치욕은 우리가 타인의 비난을 예상하는 행동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다.Ⅲ. 욕망과 관련된 정서들1) 동경이란 어떤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그 대상을 떠올림으로 인해 강화되고, 동시에 그 존재를 배제하는 다른 대상을 떠올림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해명] 우리는 우리를 기쁨으로 자극하는 대상을 떠올릴 때(회상) 그 대상을 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우리가 확실히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그 대상의 존재를 배제하는 다른 대상의 상에 의해 억제된다. 따라서 동경은 실제로 우리들이 미워하는 사물의 부재에서 생기는 기쁨에 대립되는 슬픔이다.2) 경쟁심은 타인이 어떤 대상에 대해 욕하게끔 자극하는 욕망이다.10) 불안함이란 다른 이들은 위험에 기꺼이 맞섬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때문에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11) 당황(공황)이란 두려움을 동반하는 놀라움(경악)에 사로잡혀, 화를 피하려는 우리의 욕망이 방해받는 것이다.12) 공손함 또는 온건함(modestia)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은 하고,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13) 명예욕은 명예에 대한 지나친(절제를 잃은) 욕망이다.[해명] 인간이 어떤 욕망에 묶여 있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명예욕에 함께 묶이게 된다. 따라서 명예욕은 모든 정서들을 강화하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명예욕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14) 미식욕이란 미식에 대한 지나친 욕망 또는 사랑이다.15) 음주욕은 술에 대한 지나친 욕망 또는 사랑이다.16) 탐욕은 부(富)에 대한 지나친 욕망 또는 사랑이다.17) 욕정(정욕)이란 성교에 대한 욕망과 사랑이다.[해명] 이 다섯 가지 정서들(명예욕, 미식욕, 음주욕, 탐욕, 정욕)은 반대되는 정서를 가지지 않는다.앞에서 해명한 정서들의 정의를 통해, 우리는 모든 정서들이 욕망, 기쁨 또는 슬픔이라는 세 가지 기본 정서에서 생긴다는 것, 이 세 가지 기본 정서는 그 상이한 관계와 외적 특징에 따라 단지 상이한 명칭으로 불릴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만일 지금 우리가 이 기본 정서와 함께 정신의 본성에 대해 주의해 본다면, 정신에만 관계하는 경우의 정서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정서의 일반적 정의]정신의 수동 상태라고 불리는 정서는 혼란된 관념인데, 이 정서에 의해 정신은 자신의 신체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하여 이전보다 더 크거나 작은 존재력 혹은 활동력을 긍정하고(기쁨이나 슬픔이 이끄는, 더 크거나 작은 완전성으로의 이행),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한층 더 많이 사유하도록 결정된다(욕망의 대상을 다른 것들보다 더 많이 사유).cf) 3부 정의 3나는 정서를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감소시키고, 촉진하거나 저해하는 신체의 변용인 동시에 그러충동이란 자신의 존재 보존에 유용한 것을 행하게끔 하는 바, 욕망은 인간의 코나투스 그 자체이다. 욕망은 신체의 존재력 또는 활동력이 증대될 수 있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노력한다. 만약 존재력 또는 활동력이 증대된다면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반대로 그러한 능력이 감소한다면 슬픔을 느낀다. 말하자면, 기쁨과 슬픔은 우리의 욕망이 충족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지표 혹은 표식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욕망이 충족되는 방향으로 나아가, 오직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대상과 관계를 맺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실제 삶에서는 그리 단순하게 얻어질 수 있는 결과가 아니다. 우리가 마주치는 대상들 3부 정리 15에 의해, 모든 사물은 우연에 의하여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즉, 우리는 외부 대상이 언제 어디서 어떠한 형태로 우리와 만나게 되는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존재력 또는 활동력의 증대와 감소는 거의 전적으로 외부 대상과의 만남에 의존한다.여기에서 데카르트는 그의 기본 정념에 포함시켰던 사랑과 미움을 왜 스피노자는 기본 정서로 보지 않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다. 스피노자는 3부 부록에서 사랑을 “외적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이라 정의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 “모든 사물이 우연에 의하여 기쁨이나 슬픔 또는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외부 대상은 단지 우연적으로 나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이는 우연이라는 방식으로 외부 대상과 맺어짐으로써 나타나는 사랑의 정서는, 그 대상을 배제하면 사실은 단순한 기쁨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움 역시 그 우연적 원인을 제거하고 나면 단순한 슬픔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미움은 기본(원초적) 정서가 아니다.2. ‘우리와 유사한 타인’과의 관계『에티카』의 여러 곳에서 스피노자는, 우리가 느끼는 정서가 많은 경우 ‘비슷한 타인’이 그러한 정서들을 느낄 것이라고 우리가
    인문/어학| 2024.06.29| 9페이지| 8,000원| 조회(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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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I. 정념적 삶1. 코나투스의 계획1-1. 코나투스모든 존재는 자신을 보존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존재하기 위한 근본적 욕망은 가장 어두운 부정에 의해서도 고갈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부정조차도 부정하는 “행위”로 인해 이미 어떤 긍정적인 힘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물론 존재의 관념이 정확히 규정되기 전까지는 존재의 탐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근본적 욕망이 존재의 긍정을 향한 힘을 구성한다는 사실은 우선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각각의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지 스스로를 파괴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따라서 존재의 탐구에 있어서 첫 번째로 이해해야 할 것은 단번에 탐구의 결정적 방향을 보증할 수 있는 절대적 확실성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각 존재자에게는 자신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노력이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존재자가 자신의 외부와 갖는 관계들에서 생겨나는 양상들을 고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존재자는 자신의 파괴보다는 자신의 존재를 충만하게 긍정하려는 성향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만일 이러한 성향이 파괴될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외부 원인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각 개물을 자신의 존재의 긍정과 성장으로 끊임없이 이끄는 이러한 근원적 활력이 바로 스피노자가 “코나투스”(conatus)라고 명명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한 각 개물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 어떤 개물도 자신 안에 스스로를 제거할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그 개물은 자신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할 본래적 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각 개물이 가진 이 근원적 활력은 자신의 존재력을 제한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한정된 지속, 즉 그 이후에는 자신이 현존하지 못하게 될 지속을 내포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한정한 시간에 따라 운동하고 발전한다. 한 존재의 핵을 구성하고 그 존재를 끊임없이 수반하기 때문에 이 존재보존노력은 그 어느 순간에도 정지할 수 없다. 존 무엇이며 증오가 무엇인지를, 말하자면 사랑은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기쁨일 뿐이며 또한 증오는 외부 원인의 관념을 동반하는 슬픔에 지나지 않음을 명백하게 이해한다. 다음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하며, 반대로 증오하는 자는 증오하는 대상을 멀리하고 소멸시키고자 한다는 것을 안다.”(3부, 정리13, 주석)따라서 인간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규칙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존재의 보존을 욕망하는 것, 즉 힘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 간단히 말하면, 기쁨을 획득하는 것. 존재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사는 것, 더 나아가 행복하게 존재하는 것, 제대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 그리고 제대로 사는 것, 이것이 인간의 욕망이 추구해야 할 방향이며, 이는 그의 본질 자체가 명령하는 것이다.(4부, 정리21, 증명) 이러한 노력 없이는 그 어떠한 덕도 생각할 수 없으며, 그 어떤 외부적 원리도 강요될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를 보존하려는 노력은 덕의 첫째가는 유일한 기초이다.”(4부, 정리22, 보충) 선과 악이 구분되고 그 의미를 갖는 것도 기쁨의 획득을 위한 노력이라는 기준으로부터 가능한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선을 모든 종류의 기쁨과 기쁨을 가져오는 모든 것 그리고 특히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악은 모든 종류의 슬픔 그리고 특히 욕망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앞에서(제3부의 정리9의 주석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사물을 선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들은 우리가 혐오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각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무엇이 더 좋고 무엇이 더 나쁜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이 가장 좋고 무엇이 가장 나쁜지를 자신의 감정으로 판단하거나 평가한다.”(3부, 정리39, 주석)사물들의 가치가 선과 악의 용어로 판단되는 것은 자신의 보존 법칙, 즉 기쁜 기쁨과 그것을 향한 자신의 성향의 일체에 대한 생각을 근거로 자신에게 부여한 완전성은 그대로 현존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코나투스는 자신의 현존과 세계를 자신의 실현을 위한 최적의 관계로 설정하려 한다. 과연 이러한 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코나투스의 감정의 삶을 검토함으로써 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코나투스가 외부 세계와 가지는 관계에서 어떤 존재로 나타나는지 보아야 한다. 여기서 코나투스가 비이성적 코나투스라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나투스의 현존의 열악한 조건으로부터 구체화되는 감정적 삶을 묘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코나투스는 끊임없는 정신적 동요의 희생물이 된다는 것을 제시할 것이다. 이로부터 결국 인간의 윤리적 계획이 실패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2-1. 비이성적 욕망인간이 의식적 코나투스라는 근거를 토대로 인간은 엄격한 힘의 논리를 통해 끊임없이 존재의 긍정을 추구하며 존재의 긍정을 부정하는 모든 것을 배척하게 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근거의 다른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사물의 원인을 모른다.”(1부, 부록) 달리 말하면, 인간은 세계를 지각하고 느끼지만, 그러한 지각과 감각에 대해서 설명하지는 못한다. 단지 그것들을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의 이유가 되는 것은 욕망이다.따라서, 본래적인 무지도 개체가 자신의 힘의 보존과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쁨의 추구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절대적 명령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최상의 부정과 포기도 어떤 힘에 근거하기 때문에 역시 존재와 기쁨을 향한 충동인 것이다.그렇다면 현존의 상황은 어떠한가? 비록 각 개체는 자신 안에 있는 근원적 힘이 그대로 작동한다고 원칙적으로 긍정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의 의식에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의 외부사물들의 현존을 인정해야만 한다. 물론 그는 외부사물들을 사용하고자다.”(1부, 부록) 이러한 상황은 비이성적 코나투스의 구체적 삶에서 그대로 나타날 것이며 수동적 감정성에 다름 아닌 혼란한 정신 상태에서 계속될 것이다.2-2. 수동적 감정성코나투스의 임무는 기쁨에 이르는 것이다. 그는 본성적으로 보다 큰 완전성으로 향하려 노력하며 보다 큰 완전성의 즉각적 신호는 기쁨이다. 코나투스는 완전성의 강화에 기여하는 모든 것에 대해 사랑을 느끼며 완전성을 억제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증오를 느낀다. 이러한 논리를 확장시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소유하고 유지하고자 하며, 반대로 증오하는 자는 증오하는 대상을 멀리하고 소멸시키고자 한다”.(3부, 정리13, 주석)그런데, 코나투스는 사물들의 원인들을 모르기 때문에, 그가 외부사물들을 자신의 감정의 영역에 끌어들이려 할 때 그것들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자신과, 자신의 의식이 외부사물들에 대한 현재의 경향과 갖는 관계로부터 오는 연상에 대한 자동적 표상을 토대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감정은 즉각적 지각, 기억 혹은 상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코나투스의 감정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외관, 혹은 현상인 것이다.그러나, 힘의 논리는 언제나 작동 중에 있다. 따라서, 육체-정신의 이중 구조를 가진 개인의 활동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정신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증대시키거나 촉진시키는 것을 가능한 한 표상하고자 한다.”(3부, 정리12). 그리고 반대로, “정신은 자신의 그리고 신체의 능력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하는 것을 표상하기를 피하게 된다.”(3부, 정리13, 보충) 이렇게, 유용한 것과 유해한 것에 대한 의식은 암묵적인 타협에 의해 형성되는 한 처음부터 이미 편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경험 재료들(소여(所與)들)의 정확한 의미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코나투스는 그것들을 그에게 유용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하기로 스스로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이제, 이렇게 취약한 기초 위에서 힘의 논리가 전대된다. 즉, 상상을 통해 자신의가장 큰 유사성으로 인해 그를 가장 공격적인 방식으로 위협할 수 있다.우선, 힘의 논리를 생각해야 한다. 코나투스의 활동은 힘의 논리에 의거하여 언제나 직선적이고 직접적이고자 하며, 이러한 운동은 자신의 존재뿐 아니라, 자신의 힘의 가장 풍요로운 통합을 위한 이용 대상인 다른 존재들에 관해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힘의 논리는 표상적이고 상상적인 관점에서 진행된다: “우리들은 우리 자신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기쁨으로 자극하면 우리가 표상하는 모든 것을 긍정하려고 하며, 반대로 우리 자신 또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슬픔으로 자극하면 우리가 표상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3부, 정리25) 그리고 이러한 힘의 논리는 역으로도 적용될 수 잇을 정도로 엄격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이 증오하는 것을 슬픔으로 자극하면, 우리들이 표상하는 모든 것을 그 증오하는 것에 대하여 긍정하려고 하며, 반대로 우리가 증오하는 것을 기쁨으로 자극하면 우리가 표상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려 한다.”(3부, 정리26)그런데 코나투스의 이러한 근원적 운동은 물론 직선적이지만 충동적이기 때문에 맹목적인 측면을 갖는다. 상상에 의해 끌려다니면서 자신의 비극적 존재 상태를 준비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인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절차가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자.감정상태는 언제나 힘의 논리에 따라 규정된다. 우리는 힘을 증진시키고 촉진시키는 것을 사랑하며, 반대로 힘을 감소시키고 억제하는 것을 증오한다. 즉, 우리는 사랑의 대상의 보존에서 기쁨을 느끼며, 같은 대상의 파괴에서는 슬픔을 느끼며, 증오의 대상의 파괴에서는 기쁨을 느낀다.(3부, 정리19-20) 이러한 논리는 다음과 같이 확장된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의 힘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이를 사랑하며, 그것을 약화시키는 이를 증오한다.(3부, 정리21-22) 따라서, 이러한 논리를 역으로 확장 적용시켜보면, 개인의 기쁨은 증오 대상이 겪는 악의 표상에서 오기 때문에, 그 개인은 증오 대상에게 악을 가하는 이를 사랑하며, 그에게석)
    인문/어학| 2024.06.29| 22페이지| 10,000원| 조회(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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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철학 내에서의 이성과 직관 레포트
    기말레포트, 철학과 석사 3기 목지민동양철학 내에서의 직관과 논증- Carsun Chang의 「Reason and Intuition in Chinese Philosophy」를 중심으로1. 서론대개 사람들은, 서양의 앎은 논증을 통해, 동양의 앎은 직관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구분은 어느 정도 타당한 편이지만, 섣부른 이분법적 사고로 인해 편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논증이란 '옳고 그름에 대해 근거를 들어 밝힘'을 의미하고, 직관은 ‘감관의 작용으로 직접 사물에 관한 구체적인 지식을 얻음’이라고 정의된다. 논증의 방식에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근거’인데, 이러한 근거는 ‘직접적인 앎’에 이르는 직관에서는 배제된다.본 글에서는 동양철학에 포커스를 맞추어, ‘직관적 앎’으로 대표되는 동양철학에 사실은 직관뿐만 아니라 논증적 요소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밝힐 것이다.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으로 보이는 논증과 직관이라는 앎의 방식이 동양철학 내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고 드러나는지 논의해 보도록 한다. 원활한 논의를 위해 Carsun Chang의 논문 「Reason and Intuition in Chinese Philosophy」를 바탕으로 하여 그 내용을 재구성해볼 것이다.2. 직관(Intuition)직관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 인식을 통한 앎이며, 논리적인 추론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사실 직관이라는 용어 자체는 모호하게 사용되는데, 이성을 제외한 모든 인지적 과정들을 포함하는 동양철학의 직관 개념 또한 그러하다.동양철학에서 앎에 이르기 위해 거치는 과정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명상(瞑想, meditation)이라는 행위이다. 명상이란 마음을 자신의 내부로 몰입시켜 내면의 자아를 확립하는, 일종의 정신집중을 일컫는 말이다. 앎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이러한 명상을 통해 긴장과 잡념에 시달리는 외부세계에서 관심을 돌려 그것을 내적인 세계로 향할 수 있다.Carsun Chang에 따르면, 명상에 대해서는 정이程?가 안회(공자의 제자)에 대해단심, 즉 욕망이 없는 상태! 욕망이 없을 때 거기에는 또한 침착한 상태로의 열린 마음(편견 없는 마음)이 있고, 행동하는 동안에는 정직함(거짓 없음)이 있다. 침착함 속에서의 열린 마음은 이해심을 불러 오고, 이해심은 포괄적(종합적) 이해를 야기한다. 행동에 있어서의 정직함에는 이타주의가 뒤따르고, 이타주의에는 보편성이 따라 나온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각적 측면들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3) 포괄적 이해 : 중국에는 “속마음을 바다만큼 넓게 하고 하늘처럼 비워라.”라는 격언이 있다. 사람은 살아가며 수많은 장벽들에 둘러싸이게 되므로, 그들의 첫 번째 도덕적 의무는 그 장벽을 뛰어 넘는 것이다. 이기주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 중 가장 큰 장애물이다. 기독교인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이교도”라고 부르며 종교와 종교 사이에 장벽을 드러내는 명칭을 사용한다. 오늘날 동양인은 서양인들의 문명을 “물질주의적(속물적)”이라고 말한다. 이것 또한 벽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장벽들은 세태의 급격한 변화 또는 위대한 사상가의 출현으로 인해서만 어느 정도 무너질 수 있다.위에서 논의한 세 가지 요소들, 즉 (1) 자기 제거 (2) 마음 집중 (3) 포괄적 이해는 직관적 앎을 위해 거치는 예비 단계들이며, 이러한 단계가 없다면 직관은 그저 돌팔이의 처방이 될 뿐이라고 Carsun Chang은 말하고 있다.3. 이성(Reason)과 논증(Demonstration)철학은 사유와 함께 시작되었다. 공자는 “사유 없는 배움에는 아무런 결실이 따르지 않고, 배움 없는 사유는 위험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는 앎이란 정보와 사유의 체계 위에 근거하고 있음을 뜻한다.맹자는 마음(혹은 정신)이 옳고 그름의 구분에 대한 앎을 성립하게 해주는 근간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대개 이성주의자로 분류된다. 맹자의 이성주의적 면모는 다음의 기록들에서 살펴볼 수 있다.맹자의 제자가 “모두가 동등한 사람이지만 누구는 대인(大人)이고 누구는 소인(小人)이하게 (유사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우리보다 먼저 파악한 자이다.”이후 근대에 이르러 중국에서는 신유교주의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理(이치)와 이성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졌다. 정호程?는 “모든 사물들 안에 있으면서 서로 다른 것들을 구성하는 것이 이성(이치)이다. (...) 이는 본성적으로 그러하다(인위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그런데 Carsun Chang에 따르면, 이러한 “理” 개념은 다소 모호한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1) 정신 안의, 혹은 정신의 합리성, 즉, 칸트 철학에서의 순수하고 실천적인 이성과 동일한 의미.(2) 물리적이고 도덕적인 세계의 법칙으로서의 합리성, 즉, 자연의 질서로서의 합리성.이러한 Carsun Chang의 구분에 따라 본다면, 성리학자들은 주로 후자의 의미로서 “理”라는 용어를 사용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이성(이유), 즉 그 구성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인간의 경우, 인(仁), 의(義), 예(禮), 지(知)라는 네 가지 기본 덕목들로 이루어진 인간의 본성은 도덕 감각(moral sense)의 근원이다. 특히 중국은 도덕적 가치들을 문제로 삼았기 때문에, 性(인간의 본성)의 높은 수준에 각별한 중요성을 두었고, 이에 인간의 性과 이치로서의 理의 관계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남송의 철학자이자 주석가인 주희와 육상산과 왕양명이 속한 심학파心學派와는 교리적으로 구분된다. 주희는 마음心이란 그 자체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마음의 바깥에서 지식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주희는 비록 백지설(tabula rasa theory)을 설파하려는 경험론자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식을 구하는 것이 心을 발전시키는 데, 또는 그것을 완전성에로 이끄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주희의 반대파들(육상산, 왕양명)은 그의 이러한 이중적 관점에 비판을 가했다. 그들에 의하면, 心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단지 마음으로부터 더러운 교제하면서 신의를 저버린 적은 없었는가. 스승에게 전수받은 바를 제대로 익히고 훈련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일단 이러한 예비적 앎에 숙달되면, 포괄적 이해 또는 갑작스런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따라서 Carsun Chang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 학문의 이성과 직관은 서로를 관통하며 침투하고 있고, 마음의 집중은 진리에 이를 수 있는 열쇠가 된다.”중국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 인격 수양에 이르는 새로운 길로서 정적주의의 경향이 생겨났다. 송 대의 철학자들은 어떻게 사람이 외부의 자극에도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에 관심을 가졌다. 마음의 평안에 대한 정호의 글에는 신 유교주의자들이 불교의 영향 아래서 익힌 “정신적 안녕”의 기미가 보인다. 공자의 제자들에 따르면, 정호는 수도승들처럼 벽 앞에서 몇 년을 앉아있지 않고도 고요함에 이를 수 있었다. 정호에 따르면 본래 천지만물과 일체(一體)이지만 인간이 개체에 집착하여 ‘나’와 ‘세계’를 나누는 것인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의 ‘내부와 외부’라는 구분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를 이성적으로, 또 동시에 직관에 의한 진리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데, 사실상 이는 철학자가 열망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의 것으로 보인다.또 주희는 두 가지 훈련의 과정을 주장했는데.(1) 마음의 집중에 의한 “정신적 안녕”(2) 앎의 성취에 의한 학습의 개선이 바로 그것이다. 주희는 대개 앎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지식만큼이나 마음 집중의 역할 또한 진리에 다가서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한편 주희의 대척점에 선 왕양명은 덕 또는 마음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였다. 그는 도道에 대한 탐구 대신 승마, 문학, 도교, 불교에 관심을 가졌다. 서른 세 살 되던 해에야 비로소 성리학을 읽기 시작했고, 사물 탐구에 대한 이론을 들여다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처음에 주희가 말한 용어들을 바탕으로, 마와 양 왕조 황제 사이의 대화를 살펴보면, 황제가 “나의 통치가 시작된 이래로 나는 수많은 사원을 지었고, 수많은 종교서적을 옮겨놓았으며, 수많은 수도승들을 지원해주었다. 당신은 나의 공로에 대해 어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달마는 “아무런 공이 없습니다. (...) 그것들(황제가 말한 공로들)은 여전히 세속의 흔적들을 보여줍니다. 그것들은 사물 뒤에 따르는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저 개체로서 실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일이란 완전하게 순수한 지혜일 것이고, 완전하고 신비로울 것이며, 그것의 본성은 인간의 지성이 포착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일종의 동양적 신비주의를 엿볼 수 있다. “지성과 세속성을 없애라!”라는 선학의 명령에 이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선학파는 반지성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선학자가 제자들의 앎을 평가하는 방법은 다음의 사건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한 원로가 그의 후계자를 간택하려고 할 때, 가장 똑똑한 제자(신수)가 편지로 의견을 피력했다.“이 몸은 보리수나무요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네.그것을 깨끗하게 지키고 먼지가 머물지 못하도록 하세.“그런데 주방 일을 해 온 또 다른 제자(혜능)도 또한 자신의 의견을 내보였다.“보리수나무라는 것은 없고,밝은 거울도 없으며,최초에는 공허(nothingness)만이 있을 뿐이네.과연 어디에 먼지가 모일 수 있겠는가?“Carsun Chang은 공허에 대한 혜능의 앎이 신수의 그것보다 더욱 완전한 단계에 근접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신수는 여전히 엄격한(규율을 강조하는) 사람이지만, 혜능은 인습의 단위들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사고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지성주의적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선학 역시 지성적 측면을 필요로 한다. 선학은 화엄학의 지성주의적 이론들과 중관학의 변증법적 이론들에 기초하고 있으며, 또한 공안公案들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인문/어학| 2024.06.26| 8페이지| 5,000원| 조회(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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