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국의 肉食 문화 비교지난 2015년 10월 26일 WHO 산하 기구는 국제 암 연구소(IARC)에서 소시지, 햄, 베이컨 등의 가공육의 섭취가 암 유발을 일으킨다며 가공육을 사실상 발암물질로 분류하여 논란이 되었다. 이는 비단 가공육뿐만 아니라 육류 섭취 전체에까지 확대되어 다시금 육식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육식에 대한 논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져 왔다.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나는가 하면 육식 문화 자체가 인류에게 해악이 된다는 의견도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까지 지속적으로 서구화된 육류 섭취 증가에 따른 폐해가 지적되고 있다. 아시아인은 기본적으로 채식 체질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육식에 대한 논쟁도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들은 육식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것일까? 동아시아 국가 중 대표적인 한국과 중국, 일본의 육식 문화를 살펴봄으로써 진상을 살펴보기로 하자.한·중·일 육식 문화의 공통점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중·일 모두 각기 다른 육식 문화가 엄연히 존재했다. 그리고 이들의 육식 문화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3국의 육식 문화는 모두 유목 문화와 농경문화의 융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동아시아 삼국인 한국중국일본 중에서 몽골이나 신강지방의 유목민을 제외하고는 원래는 육식을 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현재 동아시아 삼국에서 다양한 육류음식을 조리하여 먹고 있다는 것은, 북방 유목민이나 외국선교사 등의 영향을 받아 긴 세월 동안 이루어온 식문화의 소산인 것이다. 권순자, 「육류와 동아시아의 식문화 (한·중·일)」, 『동아시아식생활학회 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5, p.4.3국 중 북방 계통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고구려에서는 일찍이 육식 문화가 발달하여 소나 돼지의 고기를 양념에 절여 꼬치에 구워먹는 맥적 요리가 있었다. 도현신, 『한국의 음식문화』, 살림, 2012, p.71.중국인의 음식 구조는 대체적으로 곡식과 채식을 위주로 하고 육식을 보식(補食)으로 하는 식아서 가축과 고기를 다루는 재질이 우수했다. 김천호, 위의 논문, p.5.그 맥족의 음식 중에 맥적이 나온다. 맥은 ≪후한서≫에서 고구려를 가리킨 것이고 적은 ≪석명≫이라는 중국사전에서 “불 위에서 굽는 것으로 호맥에서 온 것”이라 했다. 맥적은 통구이로 직화로 굽는 것이다. 다만 모든 잔치에서 나오는 적을 맥적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어 모두 통구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맥적은 맥족의 육식문화로서 조미하여 굽는 현재의 불고기의 시작으로 보며 타민족의 조리방법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인 고기요리이다. 김천호, 위의 논문, pp.5~6.또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고대 부족국가의 하나인 부여의 관직 명칭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 말, 소, 돼지, 개 등 양축을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윤서석 외, 『맛·격·과학이 아우러진 한국음식문화』, 교문사, 2015, p.314.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백제 사람들에게 매를 이용한 사냥법을 배웠다는 기록이 있으며 손종연, 『한국식문화사』, 진로, 2009, pp.149~154.신라에서 불교가 국교로 인정되어 다음해인 529년에는 살생금지령이 내려지기는 했지만 신라의 불교에서는 살생금지라기보다는 살생유택(殺生有擇)으로 그 제한이 심하지 않았다. 즉, 동물의 번식기에 살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김천호, 위의 논문, p.7.또한 가난한 서민들은 불교 교리 자체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고 궁핍했기 때문에 본능에 따라 육식을 했으며, 닥치는 대로 도살하거나 강에서 고기를 잡아먹었다. 권순자, 위의 논문, p.6.고려 초기에는 숭불사조의 영향으로 왕부터 육식을 절제하고 육식절제를 권하였다. 도살 금지령은 성종 7년, 문종 20년, 예종 2년, 충숙왕 2년 등 여러 차례 있었다. 주선태·정은영, 위의 책, p.53.≪고려도경≫ 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을 정도이다. “고려는 인으로 정치를 행하고 불교를 숭상하여 도살을 삼간다. 국왕이나 재상이 아니면 양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도살고루 조리해서 먹었다. 쇠고기를 맹물에 오래도록 삶다가 감을 쳐 먹는 탕인 곰탕, 설렁탕 등은 시장 매식의 대표적인 탕밥이 되었다. 권순자, 위의 논문, p.5.이처럼 육류가 풍족한 지역에서는 살코기 위주로 고기를 섭취하지만 육류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뼈를 이용해 국물을 우려내는 등 부산물까지 각종 요리에 이용했다. 주선태·정은영, 위의 책, pp.39~40.조선 말, 한양에서 하루에 소 5백 마리 정도가 도축되어 쇠고기로 유통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쇠고기가 대중화되었다. 도현신, 위의 책, p.73.소의 도살 금지로 인해 소를 대체한 육식용 동물로 닭, 돼지, 개, 꿩, 노루, 사슴, 멧돼지, 양, 염소 등이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돼지는 일찍이 가축화가 이루어져서 조선 초기부터 우육 대신 식용되는 육류의 주종을 이루었다. 다만 ≪임원 16지≫, ≪규합총서≫를 비롯한 의학서에 돼지고기를 먹으면 중풍을 일으킨다는 설이 존재하여, 상류층에서 돼지고기가 기피되었다. 이것은 중국의 요리에서 돼지고기가 차지하는 비중에 비하여 우리나라에서 현저하게 기피하는 식품이 된 이유가 되었다. 권순자, 위의 논문, p.5.조선 사람들은 쇠고기를 최고로 쳤고 돼지고기는 그보다 질 낮은 고기라고 생각했다. 1443년 도승지 조서강은 “우리나라 사람은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사오니 보통 사람들도 그러한데 어찌 궐내에서 쓸 수 있겠습니까?”라고 적고 있다. 도현신, 위의 책, pp.74~75.하지만 상류층 양반가에서는 돼지고기를 기피했으나 서민과 하층민들은 이를 즐겨 먹었다. 주로 삶아서 썰어 먹거나 구워 먹었고, 돼지의 내장에 갖은 야채를 곡분 양념과 혼합하여 채워 먹는 순대는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발달했다. 돼지고기는 제례음식으로도 활용되었는데, 특히 삶은 돼지머리는 빠질 수 없는 식품이었다. 권순자, 위의 논문, p.5.그리고 대표적인 돼지고기인 삼겹살은 해방 이후 탄광촌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목에 낀 먼지를 몸 밖으로 배출하는데 돼지고기가 좋다는 말을 듣고 알리는 명금(鳴禽)이어서 일반적으로 식용을 피하고, 나머지 4종은 모두 주요 육식 원료로 이용되었다. 육축 중에서 말을 제외한 나머지를 오생(五牲)이라고도 한다. 이것들은 식용뿐만 아니라 제사에도 사용되었다. 소는 농사를 짓는 일 외에도 제사의 주요 제품(祭品)이었다. 은·주대에는 소, 양, 돼지를 삼생(三牲)이라 해서 이를 모두 갖춘 융숭한 제사를 태뢰(太牢)라고 했다. 소를 빼고 양과 돼지만으로 한 것을 소뢰(少牢)라고 했다. 소는 농업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수단이었을 뿐더러 제사에도 가장 중히 여긴 동물이었으므로 특별한 일이 없이 사사로이 소를 죽이면 벌을 받기도 했다. 이 때문에 가장 보편적인 육식은 양과 돼지였다. 物에 牛가 들어간 것은 소가 만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반증한다. 이돈주, 『중국 고대문화』, 태학사, 2006, pp.137~138.그 까닭은 한나라 이래로 농업을 중시하여 소를 보호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기도 하다. 권순자, 위의 논문, p.16.만일 쇠고기와 닭고기, 돼지고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중국인들은 보통 돼지고기를 더 선호한다는 말이 있다. 쇠고기는 질기고 거칠며, 닭고기는 담백하고 맛있지만 씹는 맛이 없어, 돼지고기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다른 고기들은 메뉴에서 牛肉, 羊肉으로 표기하지만, 오직 돼지고기만 그냥 肉으로 표시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수원식단≫에서는 돼지고기에 대해서는 많은 지면을 할애한 반면, 쇠고기에 대한 부분은 양, 사슴고기와 함께 북방인들이 주로 먹는 잡생(雜牲)으로 분류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에 소의 주요 임무는 요리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농사일을 돕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쟁기질만 하며 살았던 소는 육질이 단단하고 질겨져 맛있는 식재료로서는 별 매력을 얻지 못했다. 김원희 외, 「중국 육식 문화에 대한 小考」, 『中國人文科學』, 제 51집, 2012, pp.376~377.중국은 세계 최대의 돼지 생산국이며 중국 총 육류 소비량의 90%가 , 대체로 고대부터 고급 음식으로 인식되어져 왔다. 때로는 수요에 비해 공급을 따라가지 못해, 가격이 너무 올라 구입조차 쉽지 않았다. 금으로 만든 솥에서 양고기가 익어간다는 시조가 있을 정도였다. 김원희 외, 위의 논문, pp.384~386.중국 사람들은 양고기를 먹을 때, 특히 양 꼬치를 먹을 때 향신료 쯔란을 빠지지 않고 뿌린다. 더불어 돼지고기와 양고기를 주로 먹던 중국인들이 고기 특유의 누린내를 잡기 위해 향신료를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중국에서 향신료 문화가 발달되게 되었다. 김원희 외, 위의 논문, p.391.중국 고대에는 개고기를 좋아했던 풍습 때문에 개를 도살한 전문 백정이 있었다. 흔히 삼복이라고 할 때 伏에는 犬 자가 들어가 있는데, ≪사기≫ 에는 진나라 덕공 2년, 처음으로 복날을 정하여 개를 잡아서 열독을 제거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한서≫에는 복날에 관에서 개고기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狩獵이라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개는 사냥에도 활용되었다. 이돈주, 위의 책, pp.143~144.또한 사슴은 육축에는 들지 않았지만 고대인들은 양처럼 길상의 동물로 여겼다. 그 까닭은 첫째 식용으로 이용할 수 있고, 둘째 사슴의 가죽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慶자에 鹿가 들어간 것은 그런 까닭이다. 이돈주, 위의 책, p.145.중국인의 먹는 방식에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숙식(熟食)’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권순자, 위의 논문, p.7.비록 ≪예기≫에서 반찬을 나열한 이름 중에 쇠고기 회가 들어가 있어 선진시대에 膾를 즐겨먹었음을 알 수 있고, 위진시대 이후로 음식문화의 중심이 북방에서 남방으로 옮겨짐에 따라 회의 재료와 조리법도 달라져 오 지방의 는 물고기가 주요 원료였다는 기록도 있지만 이돈주, 위의 책, p.160., 중국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익혀 먹는 숙식과 날로 먹는 생식을 기준으로 중국민족과 주변 민족들을 구별하였다는 설이 있다. 현재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육회를 먹고 있으나, 중국에서는 육류를 날로 먹는 문화가 없는
REPORT수강과목 : 동양생활문화사담당교수 : 최덕경 교수님학 과 : 사학과학 번 : 201204123이 름 : 이동희제출일자 : 2015.10.21기나긴 지구 역사 중 가장 획기적인 일대의 사건이라면 과연 무엇을 손에 꼽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서슴없이 인류의 탄생과 그 진화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만큼 인류는 지구상 존재했었고 지금까지도 존재하고 있는 모든 생명 중에서 가장 유니크한 존재(만야 창조론이나 지적 설계론을 숭배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인류의 탄생과 진화는 예측불허하고 통제 불가능한 면을 보이기 때문이다)임에 틀림없는 것이다(물론 이러한 발상자체가 극히 인류의 입장에서 하는 말이지만) 특히 이러한 사유의 중심에는 문화 내지는 문명이라는 인간만의 독특한 패러다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문명이라는 메타포는 인류와 그 외 존재를 구분하는 잣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류라는 동종을 구분하는 또 하나의 척도로 자리매김 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잣대의 표상인 속칭 문명인(문화인)과 미개인(야만인)이라는 이분법적 사유는 인류가 첫발을 내리고 어느 정도 진일보한 시점부터 지금 현대에 이르기까지 뿌리 깊숙이 각인되어 있는 유전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의 프리즘은 다름 아닌 인종적 차이라는 유전적인 요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논거들은 중세유럽이 신세계를 짓밟고 아프리카대륙을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 발호의 근거를 제공했다. 지금이야 이러한 인종적 유전적인 프리즘이 설 곳이 없지만 아직도 그 옛날의 향수를 그리워하는 근본주의자들의 터무니없는 망언까지는 잠재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아침에 휴대폰의 알람소리에 잠을 깨고, 부엌으로 와 정수기에서 나오는 깨끗한 물을 마신 뒤, 전기밥솥에서 몇 시간이 지나도 따뜻한 밥을 푸고,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가스레인지를 통해 국을 데운 뒤, 식사를 마치고, 물이 끊임없이 나오는 샤워기로 샤워를 하고 집을 나선다. 이것이 21세기를 맞이한 현대 문명인들의 삶이다. 불과 10중화문명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어찌하여 기마민족은 말 토템이 아니라 늑대토템을 갖고 있는 것인지? 중화문명이 지금까지 중단되지 않고 면면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에 늑대토템의 문화가 내재된 까닭은 아니었을까? 중화민족의 과거의 영광과 몰락에 대한 이러한 성찰을 통해서 중국의 용 토템에 대한 비밀도 풀려질 수 있을 것이다」. 장룽 , 『늑대토템 1』 , 김영사 , 2008 , 12~13p작가가 말하는 이라는 사상은 과연 무엇일까? 농경사회보다 뒤떨어졌다고 여겨지는 원시유목사회를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흔히들 말하는 문명사회가 비 문명사회에서 배울만한 것이 있기는 할까?1970년 문화대혁명 당시를 배경으로 베이징의 지식청년들이 몽고로 오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무리 중 한명인 천전은 빌게노인의 게르 몽골족[蒙古族]의 이동식 집. 중국어로는 파오[包]라고 한다.에서 머물게 된다. 전형적인 대학생 지식층이었던 그는 빌게 노인의 게르에서 살게 되는 2년 동안 엄청난 사고의 혁신을 맞이한다.「가젤 떼가 올론 초원에 몰려온 뒤로 베이징의 지식 청년들은 갑자기 2등 시민으로 전락해버린 느낌이었다. 지난 2년간 지식청년들은 각자 독립해서 소나 양을 방목할 능력은 이미 갖추었지만 사냥에 관해서는 아직 전혀 알지 못했다. 내몽골 중동부 국경 초원에서의 유목 생산방식을 자세히 보면 목축보다 오히려 수렵이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룽 , 위의 책 45p충분히 경험했다고 생각했던 초원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에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거나 노인을 따라 다니면서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한다. 특히 초원에 가젤이 등장하고 난 후의 내용 전개는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를 깨닫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7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옐로스톤 국립공원은 중요한 지질학적 현상과 진행 과정들을 보여 주는 보호지역이다. 또한 지열력(geothermal force을 보호해줍니다. 」 장룽 , 『늑대토템 2』 , 김영사 , 2008 , 450p이 대사를 읽으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인간은 발전해왔다고 배웠다. 생물은 모두 불변한 것이 아니라 변화 발달(진화)하는 것이라는 설.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수렵사회에서 목축사회로 그리고 농경사회로. 이런 생각의 맹아는 그리스 시대에도 있었는데 과학적인 이론으로서는 수세기에 걸친 생물학, 지질학, 고생물학 및 농학의 발달을 기초로 하여 주로 다윈에 의해 확립되었다. 진화론에 의해 처음으로, 다종다양한 생물의 존재는 하등한 것에서 고등한 것으로의 진화의 결과라는 과학적인 설명이 부여되었다. 진화론은 인류의 기원 및 생물의 무생물로부터의 발생의 문제에도 확장되어, 자연을 자연 이외의 것(창조주, 신 기타)과 연결 짓지 않고 자연 그 자체로 해석하는 생물학에 있어서의 유물론적 세계관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또한 생물을 역사적인 발전과정으로 받아들여 자연에 대한 변증법적인 이해의 중요한 일환이 되었다. 생물 진화의 사실 그 자체를 의심하는 일은 다윈 이후 거의 없어졌는데, 진화과정을 지배하는 법칙이나 요인에 관하여는 생물학의 여러 부문의 발달과도 관련되어 다윈주의에 대립하는 각종 학설이 나타났다. 제레미 다이아몬드 , 『총·균·쇠』 , 문학사상사 , 2005 , 102p그리고 우리는 이 설을 우리의 역사에도 올려놓았고, 우리는 점점 발전된 사회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했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정말 발전하고 있는 것일까?소설 속 빌게 노인은 수많은 명대사를 말했다. 하지만 내게 가장 와 닿았던 대사는 단 한 문장이었다. 빌게 노인은 몽골 청년들에게 말했다. “어째 너희 젊은 놈들은 점점 외지인을 닮아 가는지 모르겠구나.” 장룽 , 위의 책 81p이야기의 흐름상, 작가가 아무 생각이 없이 썼을 수도 있는 한 문장에 왜 주목하였을까. 바로 우리의 현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인은 평생을 초원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글을 읽을 줄 모른다. 게다가 몽골 민족은 않아. 초원에서 불쌍하기로 치자면 풀만큼 불쌍한 생명체도 없어. 몽골 사람들이 가장 불쌍하게 여기고 마음 아파하는 게 바로 풀과 초원이야. 살생이라고? 가젤이 풀을 죽이는 살생이야말로 제초기보다 오히려 훨씬 살벌하지. 가젤 무리가 필사적으로 풀밭을 뜯어 먹는 것이야말로 살생이 아니냐? 초원의 큰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니 말이다. 초원의 큰 생명체를 죽이면 초원에 있는 작은 생명체들도 모두 죽게 된다고! 가젤 떼는 늑대 무리보다도 두려운 재앙이 됐어. 초원에는 폭풍 한설로 인해 백재(白災)나 가뭄이 들어 농작물이 시커멓게 타는 흑재(黑災)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런 가젤로 인한 황재(黃災)도 있지. 황재가 닥치면, 그야말로 가젤이 사람의 목숨을 잡아먹는 거나 다를 바 없어..... 」 장룽 , 위의 책 86~87p이 장면을 읽으면서 그야말로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23년간 살아오면서, 교과서는 물론 어느 과학책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론을 몽골 초원에게서 배운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가 유목사회를 너무 도태된 사회라고 보는 편견에 입각한 시각일 수 도 있다. 농경민들은 문자를 가지고 있었기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고, 따라서 오늘날 초기 유목민들의 역사로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으레 농경민들이 기록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그 내용 중에는 농경민들이 유목민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갖가지 오해와 편견들이 녹아 들어가 있음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즉 유목민들이란 농사를 지을 줄 모르고 성곽이나 마을도 없는 열등한 존재들이고, 노인보다 젊은이가 대접받고 형수를 아내를 취하는 등 예의범절도 모르는 이들이었으며, 마지막으로 틈만 나면 전쟁과 약탈을 일삼는 호전적인 야만인들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목민들에 대한 이러한 부당한 평가는, 유목민들이 처해 있는 생태적 환경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들의 풍속을 단지 피상적으로만 이해했기 때문에 그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유목이 농경이 비해 결코 열등한 발전 단계가 아니라는 것은말부터 템즈강의 지류는 오염되기 시작하였는데, 부분적으로 하수처리장을 설치한 결과 어느 정도 수질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대영제국은 세계 교역량의 1/3을 담당하게 될 정도로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철강·화학·석탄·방직 산업 등의 발달로 많은 양의 산업 폐수가 템즈강으로 배출되어 심각한 오염원이 되었다.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런던의 도시화는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가져왔고, 이로 인한 생활 하수의 대량 방출이 더욱 오염을 가중시켰다. 게다가 고온 건조한 런던의 기후는 하수 오염으로 인한 악취를 런던 전역에 퍼지게 했다. 또한 수인성 전염병이 유행하게 되어 1830년부터 1866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콜레라가 발생했고, 1854년에는 2만명 정도가 사망하게 되었다. 특히 템즈강으로부터 직접 식수를 얻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이 피해를 많이 입게 되었다.여러 학자들은 콜레라의 만연이 물의 오염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고 보고하였고, 여론이 거세어지게 되자 공중보건당국이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하수 시설에 중점을 두어 템즈강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자 제방도 쌓고, 오염된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좁은 운하를 만들기도 하였으나 근본적인 대책은 되지 못했다.그러던 중 1878년에는 '프린세스 엘리스호'와 '바이엘 캐슬호'의 충돌로 많은 사망자가 생겼는데, 일부 사람들은 오염된 강물에 황화수소가 많았기 때문에 사망자수가 더 늘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템즈강 오염에 대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어, 1882년에는 '대도시 하수 처리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 위원회에서는 전문가를 비롯한 각계 각층 사람들로부터의 증언을 따라 악취의 원인을 찾아내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과학적인 증거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그 후 '대도시 사업국'에 있던 딥딘(Dibdin)이라는 화학자가 처음으로 템즈강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암모니아와 같은 오염 물질의 양을 측정하여 수질 오염에 대한 과학적인 자료를 제시하였다. 또한 용존 산소량과 BOD를 사용하여 수질 오염에
1592년 4월 13일 어선들이 조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평화롭던 오후 5시경 의문의 함선들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수평선 너머로 한두 대 모습을 드러내던 함선들은 끝을 보이지 않더니, 모두 700여척에 달했다. 함선의 돛에는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는 다급히 봉화를 올렸고, 부산 첨사 정발은 전함 3척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어서 대적할 길이 없자 성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군사와 백성을 모아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밀려든 왜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정발을 비롯한 무수한 백성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고바야시 게이지(역 홍영의), 『한일 역사의 현장 』 , 시간과 공간사 , 2006 , pp131~132.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200년간의 평화 속에서 살았던 조선에게 17만이라는 병력은 너무나 버거웠고, 동래를 시작으로, 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한성(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불과 20일 만에 한성은 함락당하고,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게 된다. 단숨에 끝날 것만 같던 전쟁은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 명나라의 원군에 의해 7년이라는 시간동안 지속되고, 명과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끝이 나게 된다. 조선은 임진왜란 전에는 농지 면적이 170만 결에 달했으나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54만결로 줄어, 그만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하였다. 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어 인구가 줄고일본은 어떨까? 임진왜란 전에 일본은 조선보다 문화적인 면에서 뒤떨어져 조선 문화를 동경하고 열망하였다. 왜군은 조선에 침입하자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문화약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에 영향을 미친 조선 문화로는 공예품. 인쇄술. 성리학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예품 중에서도 일본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도자기 제작 기술이었다. 원래 일본의 도자기 제작수준은 유치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능가할 만한 도자기 제조 국가로 성장 하였다. 왜란 이전에 일본은 도자기가 형편없이 질이 나빠 조선과 명으로부터 수입한 자기를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장수들은 다투어서 자기를 약탈하고, 포로들 중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다. 이로써 일본 도자기 업은 획기적으로 발달하게 되었다.일본의 유학은 임진왜란 때 약탈해 간 많은 서적과 납치해간 조선 유학자들에게 의하여 발달 하였다. 본래 일본의 학문은 보잘 것 없었으나 조선의 유학이 전래되면서 차차 학문이 발달하여, 성리학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대표적인 학문이 되었다. 일본 성리학은 퇴계 이황이 학문 계통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처럼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고 학자와 기술자를 납치해 감으로써 문화가 급성장하여 에도 막부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일본사에서는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고 있으며, 한국사에서는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기점이 되고 있다.박석순 , 위의 책 , pp230~231.참으로 아이러니 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의 당사인 두 국가의 입장이 이렇게 차이가 나니 말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임진왜란이란 국토를 황폐화 시키고, 수많은 희생이 있었으며, 문화재와 인명 피해가 상당했던 전쟁일 뿐이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통해 인명의 피해가 있었다고 하나, 엄청난 문화적 발전을 이룩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사서는 임진왜란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일본에 남은 임진왜란』은 이에 관한 이야기 하고 있다.고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의 오사카 · 교토에게 있어서 치욕적인 역사인 귀무덤에 일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이 무덤은 16세기말 천하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걸음 더 나아가 대륙에도 지배의 손길을 뻗기 위해 조선반도를 침공한 소위문록, 경장의 역(임진, 정유의 왜란)에 관한 유적이다. 히데요시 휘하의 무장들은 고대 일반의 전공 표시인 머리 대신에 조선군민남녀의 ㅣ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일본에 가지고 왔다. 이러한 것들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묻혔고, 공양의 의례가 치러졌다. 이것이 전해지는 귀무덤의 유래이다. 귀무덤은 교토에 현존하는 히데요시 유적 중의 하나이며, 그 위에 세워져 있는 오륜의 석탑은 옛 그림에도 나타나며, 귀무덤의 석책을 통해 무덤의 축성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은 조선반도 일본은 한반도를 조선반도라 칭함. 원문 : 朝鮮半島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끈질긴 저항에 부딪쳐 패배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전역이 남긴 이 귀무덤은 전란 때 입은 조선민중의 수난을 역사의 유훈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하고 있다. 이 문장은 현재 귀무덤 앞에 교토시가 세운 안내판을 번역한 문장임.귀무덤(일본어: 耳塚 미미즈카[*])은 일본 교토 시 히가시야마 구에 있는 무덤으로,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건너편 공원에 방치돼 있다. 일본 사람의 “귀”를 묻은 무덤을 뜻하나, 그곳에 묻힌 것은 대부분 사람의 “코”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목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무덤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무장들이 부피가 큰 목 대신 가져갔던 것으로 본래 이름은 코무덤(鼻塚)이었으나 이름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바뀌었다. 일본군은 조선에서 조선군과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갔다. 일본군 장수들은 코를 베어 일본에 보내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코영수증을 써주고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일이 그 숫자를 센 뒤 장수들에게 감사장을 일본을 다녀왔던 경섬(慶暹)의 기록인 『해사록(海錄) 조선 중기의 문신 경섬(慶暹)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사행일록(使行日錄).』과 1617년(광해9)에 같은 통신사로서 일본을 다녀왔던 이경직이 남긴 『부상록(扶桑錄)』 조선 중기의 문신 이경직(李景稷)이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뒤의 기행록(記行錄).등에 귀무덤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 중 『해사록(海錄)』의 기록을 보면왜의 서울 동교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코 무덤이 있다. 대개 왜국이 서로 전쟁할 적에 반드시 사람의 코를 베어 마치 헌괵 전쟁에서 적을 죽여 그 왼쪽 귀를 잘라 바치는 것을 말함하듯이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진년 난리 때에 우리나라 사람의 코를 거둬 모아 한 곳에 묻고 흙을 쌓아서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그 뒤 수뢰가 그곳에 비를 세웠는데 그 내용이 “ 너희들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의 운수가 그렇게 된 것이다 ” 하였다. 참호를 파고 담을 둘러 싸 밟지 못하게 하였다 한다. 경섬 , 「해사록(海錄)」 , 『국역 해행총재(2)』 , 역 정봉화 , 민족문화추진회 , 1989 , p270비교적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희생자의 다수가 양민들이었기 때문에, 양반인 경섬으로서는 별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하나, 너무나 담담하게 서술하여 오히려, 섭섭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일본의 기록도 위의 안내문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전쟁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결과물이라는 인식이 강한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귀무덤이 오늘날에는 한일관계에서 어두운 과거를 털어버리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데 활용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부산의 자비사 박삼중 스님이 이 무덤에 묻혀있는 영혼들을 고국으로 환국시키는 운동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한국에 반환된 영혼보다 일본에 묻혀있는 영혼이 더 많다. 점점 감정적으로 격해져가고 있는 한일 간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귀무덤의 영혼들이 어서 빨리 한반도에 17만의 대군을 이끌었던 장군은 누구였을까? 당시 조선백성들을 떨게 만들었던 대상은 누구였을까? 그전에 짧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사명대사가 왜의 진영에 들어갔다. 적의 무리가 몇 리나 열을 지어놓고 창과 검을 다발처럼 들고 있었지만, 사명대사는 두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기요마사를 만나 시종 담소를 나누었다. 기요마사가 사명대사에게 “귀국에 보물이 있는가?”하고 묻자 사명대사가 답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다른 보물이 없고, 다만 너의 목을 보물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러자 기요마사가 “무슨 말인가?”하고 묻자 답하기를 “우리나라는 천근의 금과 만 호의 읍으로 너의 목을 구하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자, 기요마사가 크게 웃었다. 대구사학회 ,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 , 푸른사 . 2005 , p220.일화에서 보듯이 당시 조선 측에서는 기요마사의 목에 막대한 금액의 현상금을 걸고 있었고, 그것을 사명대사가 적진임에도 대담하게 기요마사에게 말하고, 기요마사도 이에 호탕하게 웃었다고 기록할 만큼, 우리 측 기록에도 기요마사의 배포에 대해 장수다운 기질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기요마사란 가토 기요마사(加藤 正)를 말한다. 그에 관해 간단한 설명을 하자면,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제2군 장수였으며, 조선의 동 북측 함경도로 진격을 선택하여 북진하였고 전쟁 초반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한 가토 기요마사는 점령지인 함경도에서 호랑이 사냥을 자주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가토 기요마사를 호랑이 가토라고 불렀다.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귀환을 명령받고 왜로 돌아가지만, 1596년 지진이 났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도운 공이 인정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제1군 사령관으로 왜선 300여 척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하게끔 명령받았다. 정유재란 시에는 전라도 지역을 주로 공격하였다. 물론 이수광은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도, 그것은 실제의 이야기라고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
직역과 의역의 사이에서 -『번역의 탄생』을 읽고-중학교 3학년 무렵, 사춘기의 영향이었는지 단순한 변덕이었는지 학교 공부보다 남들이 하지 않는 색다른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내 인생에도 도움이 되는 것을 찾다가 시작하게 된 것이 일본어였다. 알파벳과 달리 히라가나와 카타가나를 외우는데 한 달을 소비하긴 했지만, 영어와 달리 한국어와 동일한 어순과, 강제로 해야만 했던 영어에 비해 스스로 선택해서 그런지 무척이나 재미가 있었다. 학교성적이 수직 하락하는데 비해, 일본어 실력은 잭의 콩 나무처럼 쑥쑥 자랐다. 그렇게 일본어와 인연을 맺고, 수능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일본어를 공부하여, JLPT 2급을 획득했다. 잠시 일본어에 소홀해 있던 중, 입대를 하여, 독학을 통해 올해 2월 JLPT 1급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게 인연이 되어 9월부터, 부산학생통역협회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부산학생통역협회는 부산의 대학생들이 모여, 통역을 위한 준비를 하는 스터디모임이다. 쉐도잉, 스피치, 작문, 번역 등을 통해 최대한 외국인과 비슷한 표현을 쓰는 것을 훈련하고, 외국 언어를 자연스럽게 한국어로 통역하고, 번역할 수 있을까를 공부하고 있다. 물론 통역일도 나간다. 스터디를 통해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알아듣는 것과 그것을 남에게 잘 전달하는 것은 참으로 별개의 일이며, 잘 알아듣는다고 해서 잘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그런 내게 『번역의 탄생』은 생각지 못한 도움을 주었다. 인연이란 정말 존재 하는 지도 모른다.협회에서 처음 스터디를 하던 날이었다. 일본 신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는데, 5,6년간 일본어를 공부했지만,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적는 과정은 내게는 처음 있는 행위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일본어의 느낌을 살려, 직역을 하였지만 내게 돌아온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 일본어 같다.”였다. 일본어를 일본어처럼 번역했는데, 일본어 같다니? 라며 당시에는 의문을 품었지만, 스터디를 해 갈수록 내 생각도 바뀌어 갔다. 아마 나의 고민은 통역 가지기 시작했으며, 이는 번역에도 영향을 미쳐 직역에서 의역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라고.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이야기할 것이지만, 본인은 조금의 의문을 가지고 있다.한국어의 특징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동적이다, 주어의 비중이 작다. 대명사를 쓰지 않는다. 등으로 말하고 있다. 이희재 , 위의 책, p40.이를 2장 3장 4장에 걸쳐 이야기하고 있는데, 읽는 내내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에 2번씩 부산대학교의 외국인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당시 무슨 자신감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학생들을 맡겠다고 지원했다. 학생은 총 4명으로 싱가포르 출신 3명과 괌 출신 1명이다. 다행히 영어권이라,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지만, 수업에 들어가면 곤란한 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한글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문자라고 칭찬한다. 이 말에는 많은 외국인도 동의하고,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에 관해서는 어떨까? 라고 물어본다면, 그들의 대답은 “NO"였다. 외국인들에게 영어로 한국어를 설명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수업 중 학생들이 내게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은 ”Is this verb? or adjective?" 와 “where is subject?" 다. 한 가지 예로, 한 학생이 식당에서 쓸 만한 문장을 알고 싶다고 한 일이 있었다. "Do you have an English menu?"를 한국어로 가르쳐 달라고 했었는데, 무심결에 ”영어 메뉴판이 있나요?“ 라고 말해주었더니, 그들의 반응은 ”Where is 'You' "였다. 매번 수업 때마다 학생들에게 “한국어는 주어를 잘 쓰지 않는다.” 라고 설명해 주고 있지만,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 것 같다.일본어의 문법을 공부하면, 초반에 등장하는 부분이 “사역형”이다. 그만큼 일본어는 사역형을 중요시하고, 많이 쓰고 있다. 예를 들어"退院させていただきます。"라는 표현을 일본어 그대로 직역한다면, “퇴원시키는 것을 받겠습니다.” 가 된현이라는 인식 때문에, 수동태, 사동문을 더 많이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표현 속에서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되었다.” 같은 표현이 우리의 입에서 오르고 내리는 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번역의 탄생』도 이와 같은 상황을 걱정 하고 있다. 이희재 , 위의책 , p94.외국인 학생들에게 드라마 속의 대사를 들려주고, 따라서 말해보는 수업을 한 적이 있다. 나의 경험상 교재나, 문법에서 배우는 외국어와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언어의 격차는 제법 컸기 때문이다. 학생들 역시, 실생활에서 바로 응용할 수 있는 수업을 해주는 편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생각보다 호응이 좋았다. 즐거운 수업을 진행하던 중, 나와 학생들을 모두 얼어붙게 한 표현이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차를 타러간 상황이었는데, 남자가 화 가 나 여자에게 차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황당해한 여자는 대사를 읊었다. “뭐야, 문도 안 열어주고.”학생들은 자신들이 처음 들어보는 문법에 당황했고, 나는 이 대사를 어떻게 실감나게 영어로 옮기고, 그들에게 설명해야할지 하는 생각에 당황했다. 결국 학생들에게는 이 문장을 영어로 하면 “Oops, Why didn’t you open the door for me?” 라고 설명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후회되고 아쉬운 설명이었지만, 그 외에의 설명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여전히 다른 설명은 없는 것 같다. 『번역의 탄생』도 언급했지만 한국어는 중국어나 영어와는 비교가 안 되게 어미변화가 복잡하다. 이는 어간과 어미가 한 몸으로 끈끈하게 붙어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독 한국 작품을 외국어로 옮길 때, 의역이 많은 지도 모른다. 이희재 , 위의책 , p171스터디에서 FNN의 뉴스를 해석 하던 중 ‘リュックサック’ 이라는 단어가 나와 모두를 당황케 한 일이 있었다. 사전을 검색해보니, 독일어 ‘Rucksack’라는 단어를 일본어 발음 형식으로 쓴 표현이었다. 당시의 우리는 이에 알맞은 단어는 무엇이 있을까 고anguage와 target language를 ‘원천어’와 ‘표적어’라는 표현보다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출발어’ ‘도착어’의 경우를 들었다. 이는 원어에 얽매이기보다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고 쉽게 전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 뒤에 나타난 북한의 경우가 몹시 재밌었다. 사실 북한은 1950년대에 이미 외국어를 다듬는 과정이 끝났기 때문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현재의 대한민국보다 한글과 토박이말의 가능성을 넓혔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fetlock의 경우 한국에서는 거모(踞毛)라고 사전에 나오지만, 북한의 경우 ‘며느리발톱’이라는 토박이말을 쓰고 있다. 원어에 덜 얽매인 것이다. 이런 말 만들기는 동식물 이름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Raccoon이라는 동물을 영한사전에서는 ‘미국 너구리 또는 완웅(浣熊)’이라고 적어놓았지만, 현실에서 뿌리내리지 못하고 우리는 그저 발음그대로 ‘라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개곰’ 이라는 라쿤의 생김새 특성을 정확히 살려서 이름 지었다. 번역자나 통역하는 사람은 사전의 틀을 넘어야한다 이희재 , 위의책 , pp383~384.라는 말은 몹시 마음에 와 닿았다. 외국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아직 뚫리지 않은 회로가 무수히 널려있다. 우리가 한국어를 외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러한 회로들을 쓰임새를 잘 생각해 뚫어나간다면, 이는 한국어의 발전에 크나큰 도움이 될 것이다.『번역의 탄생』은 이제 막 번역의 걸음마를 시작한 내게 정말 큰 도움을 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번역의 흐름은 직역이 아닌 의역을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고 했다. 그 의견에는 공감하는 바이다.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을 좋아해, 그의 책을 전부 사 모았다. 『개미(1993)』부터 『타나토노트(199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1996)』, 『뇌(2002)』,『파라다이스(2010)』, 『제 3의 인류(2013)』까지 모두 한 사람이 번역을 깊은 고목》 2015년 11월호 월간 『샘터』의 일부분이다. 70이 넘은 아들의 등에 업힌 백 살을 넘긴 어머니의 대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을 시도해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단순히 일본어로 번역하거나, 어떤 일본 지방의 사투리를 쓰더라도, 사투리를 통해 전달되는 특유의 어머니의 미안하면서도, 애잔한 마음을 전달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우면서도 쉬운 것이 사투리다. 문학에서 역시 사투리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작품의 분위기까지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현진건(玄鎭健)이 지은 단편소설. 1924년 6월 ≪개벽≫ 48호에 발표.의 주인공인 김첨지가 세련된 서울말을 썼다면, 『운수좋은 날』이라는 명작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며, 김첨지라는 매력 넘치는 캐릭터 역시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운수좋은 날』을 일본어나 영어로 번역한다면 어떨까. 과연 한국어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것이 가능할까? 이는 많은 번역가들에게 고민을 주었을 것이다. 이는 외국의 사투리를 한국어로 번역 하는 과정에서도 발생하는 고민이다.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이자, 나의 일본어 실력이 어느 정도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시험이나 자격증이 아닌, 일본 현지에서도 통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일본어로 된 원서’였다. 그 중 한권을 읽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제목은 『夢をかなえるゾウ』 水野敬也작으로 2007년 출판, 출판사는 飛鳥新社.인데, 소설 형식을 띈 자기 계발서다. 해석해보면 『꿈을 이루어주는 코끼리』다. 줄거리는 인도에서 산 코끼리 상에서 나온 가네샤 인도신화에 나오는 지혜와 행운의 신으로 인간의 몸에 코끼리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가 성공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내용인데, 다소 흔할 수 있는 내용에 감초 역할을 해주는 것이 가네샤다. 인도신인 주제에 오사카 사투리를 구사하고, 가끔씩 터무니없는 행동.
국수와 쌀밥문화- 북방과 남방의 음식전통 -Ⅰ. 서론Ⅱ. 화북의 밀Ⅲ. 강남의 벼Ⅳ. 결론Ⅰ. 서론중국 고사에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회수(淮水), 즉 화이수이는 중국의 2대강인 황허와 창장강(양쯔강) 사이에 위치한 강의 명칭이다. 중국 대륙은 지역마다 지형, 기후, 토양 등 자연환경이 다른데, 특히 화이수이를 경계로 남북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래서 화이수이는 중국 대륙에서 생산되는 여러 가지 작물의 남북방 한계선이 되었다.중국은 면적이 광대한 만큼 크게는 남방과 북방이 차이가 나고 지역마다 기후와 지형이 다르며 생산되는 물산도 달랐다. 중국은 선진시대부터 북방 황하유역과 남방 장강유역의 음식전통이 제각기 특색을 이루었다. 화이수이는 쌀 생산의 북방한계선으로 화이수이 이북에서는 밀, 조, 보리 등 밭작물을 주식으로 했고, 화이수이 이남에서는 쌀을 주식으로 했다. 오늘날에도 북부 사람들은 밀가루 음식을 많이 먹는 반면, 남부 사람들은 밥을 주식으로 한다. 이재정, 『의식주를 통해 본 중국의 역사』, 가람기획, 2005, pp.17~18.또한, 중국의 음식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술도 농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농업생산의 발전은 곡물로 술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북방에서는 주로 보리, 밀, 옥수수로 술을 만들고 남방에서는 쌀로 술을 만들었다. 송촉화, 「동아세아의 음식문화 국제학술대회 논문 ; 중국의 음식문화와 생태환경」, 『민족과문화』, 6권, 한양대학교 민속학연구소, 1997, pp.103~104.중국은 광대한 영토를 가진 만큼 다양한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본 발표에서는 중국의 대표적인 강인 황허와 장강을 기준으로 화북과 강남을 나누어 그 지역을 대표하는 밀과 쌀에 대해서만 주제를 한정하고자 한다. 밀과 쌀이 각각 어떻게 전래되었는지, 한국으로의 전래과정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화북의 밀맥류(보리밀)의 야생 원종의 분포는 지중해형 기후에 있는 일대가 중심이라 한다. 지중해형 기후지에서 분식이 확인되는 것은 전한 말 이후의 일이다. 윤서석, 앞의 책, p.87.밀과 제분 기술이 남방 해상을 경류하지 않고 서방 실크로드를 통해 한나라에 도입되었기 때문에 분식 조리법은 북방에서 먼저 정착되었다. 물론 맷돌은 노예가 일일이 갈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분식 조리법은 유력자의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조나 기장의 면이 만들어진 것은 후대의 일이고 서민들은 좀처럼 면류를 맛볼 수 없었다. 시노다 오사무, 위의 책, p.64.특히 밀은 주로 화북의 건조지역에서 재배되었으므로 쌀이 주식이던 강남지역에서는 밀가루 음식이 더욱 귀했다. 남조의 송나라에서는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 면류를 올렸으며, 제나라의 무제도 고인이 즐기던 음식이라 하여 할아버지의 제사상에 만두를 올렸다고 전한다. 이재정, 앞의 책, p.42.이러한 사례를 통해서 밀이 잘 재배되지 않고 귀했던 강남지역에서는 제사와 같은 특정한 날에만 밀가루 음식을 사용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그러나 당대에 이르러 화북의 식생활에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 당 중기 이후에 조와 밀을 2년 3모작의 형태로 경작하는 새로운 농법이 출현했다. 그 결과 화북 지역에서 농업 생산력이 획기적으로 증대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분식이 성행하게 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제분이 손으로 돌리는 맷돌에만 의존하는 한, 그것은 노예를 소유하는 왕후 귀족만의 특권이지 서민과는 별로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수당 왕조는 북조 출신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서방과의 교섭이 적지 않았고, 당으로 들어와서는 태종에서 고종에 걸쳐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서역 방면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잠이나 제지 등의 기술이 서방 유럽 지역에 전파되는 한편 서방 문물이 동방에 많이 유입되었다. 이때 유입된 기술이 수차(水車) 수차 : 일반적으로 위에 걸든지 아래에 걸든지 대체로 고저의 수차가 크고 급류이어야만 된다. 그러나 화북은 급류이긴 하지만 대체로 경사가 완만하고, 수량은 풍부해도 흐름이 완만하다. 그래서 차오몐(新疆炒面), 우한러간몐(武漢熱干面), 자장몐(炸醬面), 니우러우몐(牛肉面), 양춘몐(陽春面)’ 등이 있으며 과거에는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음식이었지만 지금은 중국 전역에서 맛볼 수 있다. 김상균신동윤, 『(사진으로 보고 배우는) 중국문화』, 동양북스, 2012, pp.139~140.우리나라의 밀재배는 전한대에 중국에서 들어 왔다. 백제시대 군량을 비축하였던 軍倉址에서 밀이 쌀, 보리, 녹두, 귀리, 콩, 팥 등과 함께 나왔는데 그 출토량이 쌀, 보리, 녹두 다음으로 많아 그 당시의 밀의 산출량이 상당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삼국시대에 밀농사를 지었음은 확실하나 『고려도경』에서 ‘나라에 소맥의 산출이 적어서 京東道에서 사오므로 그 값이 비싸서 盛禮에서만 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밀 산출량은 수요를 채우기에는 미흡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고려시대에는 밀가루로 만드는 유밀과가 성행하였으며 중국에서부터 유입된 밀가루를 발효하여 찐 빵인 霜花가 선호되는 등 밀가루 음식이 비교적 일반화되어 있었고, 『고려도경』에 기록하고 있는 성례에 쓰는 음식 중에는 국수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도 밀보다는 보리의 재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모내기가 일반화되어 벼와 맥의 이모작을 권장하게 되었을 때, 농업기술을 계몽하고자 저술한 농서 등에서도 보리 재배의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후의 문헌에 등장한 전통 국수요리는 총 50여종에 가깝고 수제비는 15종을 넘었던 것을 통해 밀을 이용해서 국수를 비롯한 다양한 밀가루 음식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서석, 앞의 논문, pp.88~91.Ⅲ. 강남의 벼벼는 중국 제일의 양식작물로 전국 양식 총 생산량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벼를 나타내는 도(稻)는 금문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데, 稻자가 출현하기 이전에 남방 구어에서는 벼를 ‘화(禾)’ 또는 ‘곡(穀)’이라고 불렀고 갑골문에서도 ‘禾’자가 있다. 즉, 稻자는 벼가 황하유역에 전해들어온 뒤에야 비로소 갱이가 가늘고 길며, 푸석거리는 성질을 지녔으며 이른바 안남미로 불리며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열대지방과 중국 남부가 주산지이다. 그에 반해 자포니카는 알갱이가 짧고 둥글며 끈기를 지니고 있으며 주산지는 일본, 한국, 중국 중부 및 북부지역이다. 그리고 자바니까는 알갱이가 두껍고 길며 맛이 자포니카에 가까운데 인도네시아 자바섬을 중심한 아시아 각지에서 재배된다. 인디카는 인도 동해안과 벵갈만을 거쳐 동남아대륙 남부로, 자포니카는 양자강 유역과 인도 북부지방 그리고 동남아시아 대륙으로 퍼져 나갔으며 그 결과도 동남아시아 대륙에는 자포니카와 인디카가 공존한다.이어서 바슬바슬한 쌀을 좋아하는 중국인의 기호와 맞지 않았다고 한다. 설영지라는 사람이 참다못해 숙직실 벽에 크게 시를 써 붙였는데, 그 시속에 ‘밥이 끈적끈적 숟가락에 달라붙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이것을 발견한 당 현종은 크게 노하여 그 옆에 답시를 써넣어, ‘그렇게 싫은 음식이라면 먹지 않아도 좋을 거다.’라고 끝을 맺고, 파면시켜 복건성으로 내쫓았다는 재미있는 기록도 남아있다.강남은 기후가 온화하여 단보당 수확량도 많고 칼로리도 높은 쌀을 주 작물로 했다. 반면 황하 이북의 땅은 한랭한 기후인데다 조, 기장 등의 소립 작물이 주를 이루어 수확량이 적었다. 게다가 만리장성 밖의 이민족과 전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 궁핍했다. 수의 제2대 양제가 수도를 양주로 옮긴 첫 번째 이유도 식량 사정이 얽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양제는 양자강의 진강 기슭에서 양주를 지나 태안에서 회수로 들어가는 산양독과 하남성 무척에서 개봉을 지나 회수로 통하는 통제거를 뚫어서 운하를 만들었고, 이 거대한 운하로 강남의 쌀을 황하 유역까지 운반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운하는 후세에 회안에서 천진, 북경을 잇는 대운하라고 불리었고, 원 이후 명청까지 수도가 된 북경 일대를 살찌우게 하였다. 물론 대운하를 통해 쌀이 북방으로 대량 운반되었으나 이때까지도 여전히 북방에서는 쌀이 아직 귀한 음식이었고, 남방에서는 나와 있는 파아(罷亞) 등은 일반적인 품종이었고 우량종에는 전자(箭子)와 같은 새로운 이름이 나오기도 한다. 청대의 『수시통고』권22 곡종편 『직성지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중국 16개 223부주현의 벼 품종은 3,429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왕시밍, 앞의 논문, p.67.한반도에 벼가 언제 어디를 거쳐서 들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1977년 경기도 여주 흔암리 유적지에서 탄화미가 나오고 이어 비슷한 시기의 유적인 평양 남경 유적에서 1982년에 같은 증거가 발견되면서 우리나라의 벼농사의 상한선이 많이 올라가게 되어 지금부터 4천여년 전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었다. 중국 벼농사의 우리나라 전파 과정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로는 북방설과 서방설의 두 가지가 있다. 북방설은 약 7천여년 전에 시작된 중국의 벼농사가 양자강을 끼고 화중지방으로 퍼져 약 4천여년 전에 산둥반도에 이르러 요동지방으로 북상하였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파되었다는 견해이다. 북방설은 우리나라 초기의 마제 석기와 청동기들이 화중지방에서 출토된 농기구와 많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화중지방에서 출발하여 산동반도를 거쳐 들어왔다고 생각되는데, 벼농사도 이때 함께 전래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한편 서방설은 산둥반도 또는 화중지방에서 황해를 건너 중서부 지방으로 바로 들어왔다는 견해이다. 서방설은 무엇보다 오래된 벼농사 관계 유물이 주로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출토되고 4천년전의 볍씨들이 경기도 일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벼농사와 관련된 문화의 관점에서도 벼농사와 관계 깊은 놀이들은 중국에서도 장강 유역과 서남부 지역 등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또한 쌀과 밀접하게 관련된 떡문화도 중국 서남부에서 화중 그리고 우리나라 중부 이남을 잇는 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며 누룩으로 빚는 술, 차, 청국장 같은 식문화도 같은 경향을 보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김광언, 「한국 식행활에서의 쌀의 역사와 문화 」,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7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