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운동목차Ⅰ. 머리말Ⅱ. 형평사 창립 배경Ⅲ. 형평사 창립과 활동Ⅳ. 형평사의 해소Ⅴ. 맺음말Ⅵ. 참고문헌Ⅰ. 머리말개항 이후 그리고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함께 새로운 사상이 조선에 흘러들어왔다. 기존의 봉건적 질서에 순응하고 살아가던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운동을 벌였다. 특히 1920년대에는 부문 운동이 활성화되어 학생, 여성, 청년, 농민 등 사회에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중에서 여기서 다룰 것은 신분 해방을 꿈꾸던 백정들의 운동에 관한 것이다. 오랜 시간 신분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서 한껏 몸을 낮추고 살았던 이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집단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나서게 된 배경을 살펴본 후, 형평사라고 하는 백정들의 조직에 대해 그리고 활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그들의 운동이 어떻게 끝을 맞이하는지와 그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Ⅱ. 형평사 창립 배경우리가 알고 있는 백정은 조선시대에 가축의 도축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을 말한다. 그 어원은 신역이 부과되지 않은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를 거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온 북방계 유목민들 중 일부는 농경문화에 정착하지 못하고 도살업으로 먹고 살았고 그들만의 거주지를 형성한 이들을 백정이라 불렀다.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떨어져 살았으며 특수화된 직업 탓에 신분 사회에서 굉장히 낮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백성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병역과 납세의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도 많은 제약과 차별이 존재했다. 백정은 그저 규제하고 관리해야할 대상으로 조선시대 내내 차별과 멸시를 받아온 사람들이었다. 개항 이후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고 신분간의 차별을 없애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자 자연히 백정들도 봉건적 차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갑오개혁에서 법제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었고 백정의 천민 신분해방도 공 벗고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직업으로 백정을 구분하여 차별하였다. 이런 까닭에 백정들은 제도적으로 천민 신분에서 해방되었으나 계속해서 남아있는 사회적 제약과 차별대우를 받았고 이에 백정들은 그러한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였다. 그 저항의 형태가 개별적이었던 조직적이었던 간에 백정들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본인들의 처우를 개선하기위해 노력했으며 후술할 형평사라는 조직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물론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처우를 개선하려는 의지만으로는 전국 단위의 조직을 형성하는 것은 힘들다. 거대한 운동이 시작되려면 우선 기초되는 의식의 성장이 필수적이다. 1910년대의 항일독립운동의 방향은 크게 무장투쟁노선과 민족교육운동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민족교육운동을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일반 대중의 의식 성장이 이룰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민족교육운동은 야학이나 사립학교 등의 방식으로 교육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3.1운동이라는 일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또한 성장한 의식의 수준은 1920년대 유입된 신사상의 수용도 가능케 했다. 신사상이라 불리는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과 대중의 의식의 성장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의 부문 운동이 활발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동, 농민, 학생, 여성 등 각 부문에서 권익 신장과 처우 개선, 민족 해방 등의 기치를 내걸고 다양한 단체들이 조직되어 사회운동을 일으켜나갔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역시 차별적 대우를 개선코자 했던 백정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형평사라고 하는 백정들의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Ⅲ. 형평사 창립과 활동형평사 창립 경위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정 출신의 자산가 이학찬의 자제가 교육에 있어서 백정 출신이라는 점에 차별을 받자 이에 백정의 신분 해방을 위해 이학찬과 강상호 등의 인물이 ‘조선형평사’를 조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민중 계몽에 앞장섰던 양반 출신 신현수와 강상호가 백정 계급의 해방을 통한이 중심이 되어 창립된 것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와 민중을 계몽시켜 궁극적으로 독립을 이루려는 지식인들, 그리고 1920년대 국내외에 퍼진 새로운 사상의 풍조는 백정들이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는 길로 이끌었다.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형평사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강상호를 임시의장으로 추대한 가운데 형평사 주지와 사칙을 채택하였다.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는 등 백정 또한 일반 민중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내용을 담은 형평사의 주지와 사칙은 형평사의 운동 방향과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또한 사원자격을 백정에만 두지 않고 모든 한국인으로 하였으며 진주에 본사를 위치하였지만 전국 각도에 지사를, 군에는 분사를 두어 전국적이고 광범위한 조직을 목표로 하였다. 창립축하식을 거치고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간 형평사는 각 지방에 형평운동을 이해시켰으며 임원들을 전국으로 파견하였고 이런 노력들과 각 지방의 백정들의 호응에 힘입어 목표한대로 전국 단위의 조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당시의 각 언론들과 여러 사회단체에서는 지지를 표명하며 때로는 적극적인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신분제가 법제적으로 폐지되고도 사회적 차별대우를 받아온 백정들은 이제 권리 신장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백정에 대한 차별에 저항을 하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형평의 의미를 선전하였다. 호적에 백정을 기재하는 것을 정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관리로부터의 차별을 금하도록 각 관청과 접촉하였다. 이런 활동은 백정들에게 행해지던 제약이 다소 완화되는 결과를 불러왔으나 여전히 백정에 대한 차별은 그대로 존재하였다.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킨 이후 일제는 백정들이 전담하던 도축산업에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많은 규약과 제제로 도축산업을 옭아매었고 이는 백정들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위협이 되었다. 그렇기에 형평사의 활동 중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운동도 있었다. 일제에 넘어간 도축장 관리권이나 피혁 소유권을 되찾고자 하였으며 고용 형태로있었고 성공적으로 임금인상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도 형평사는 사원끼리의 분쟁에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경제적 갈등을 해소하였다.형평사는 일차적인 목표에 대한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과 계몽활동에도 앞장서 강습소와 야학을 열어 사원이나 자녀의 교육에 힘썼다. 기본소양을 갖추고 사원의 의식을 각성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기관지를 발행하고 연설회를 열어 형평사를 선전하고 사람들의 결집을 모으기도 하였다. 지방순회활동으로 각 지방의 백정들에게 형평운동을 이해시킴과 동시에 운동의 참여를 유도했으며 상호부조활동으로 사원간의 후원, 구조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형평사의 가장 큰 목적은 차별대우 철폐를 통한 실질적인 신분의 해방이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백정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지지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형평사는 일반 대중들의 사회 운동 단체와의 협력이나 교류를 하기도 했다. 여러 부문의 운동단체들 역시 본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결집된 다양한 세력과의 연대가 필요했기에 형평사와 다른 단체들 간의 협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노동단체의 경우 형평사 창립부터 조직의 형성까지 형평사에게 협조하고 지지하였으며 형평운동은 노동단체와 같이 파업 투쟁에 나서는 형태도 있었다. 청년단체들 역시 형평운동의 의의에 공감하여 형평운동에 적극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게다가 농민단체나 사상단체들과의 유기적인 연대로 형평운동은 추진력을 가지고 운동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일본에선 조선의 백정과 비슷하게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특수민들이 형평사보다 앞서 조직한 수평사라는 조직이 있었다. 수평사는 형평사의 창립 소식을 듣고 형평사와의 연대를 꾀했으며 이에 형평사는 응답하여 상호간의 교류를 하며 연대적인 제휴를 하기로 결의했다.Ⅳ. 형평사의 해소형평사는 창립 후 초기 단계부터 운동의 방향에 대해 사람들 간에 의견차가 있었다. 백정뿐만 아니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이들에게 사원자격을 주었고 다양한 사상을 가진 단체들과 교류를 하였기에 형평사지 못하고 분열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형평사 내에서는 사회적 차별을 없애 형평을 이루려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계급에 대한 해소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신분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신분해방을 계급투쟁과 동일시하였으며 사회주의 단체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형평운동을 강경하게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움직임에 당연히 형평사 내에서 반발이 있었고 형평사는 대립과 분열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형평사가 복수의 조직으로 분리가 되는 일도 있었다. 후에 다시 통합되어 형평운동을 전개해나갔지만 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사상 간의 차이는 언제든 다시 분열의 씨앗으로 작용될 여지가 있었다.그러다 1925년 이른바 예천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이 터졌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나가고 운동을 전개해나가는 형평사의 움직임에 반발한 사람들이 형평사 사원을 폭행하고 습격한 것이다. 그간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받아온 백정들이 차별의 관습에 조직적, 적극적으로 저항하자 일반인들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일반 대중과의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는 백정과 달라진 풍속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전처럼 그들을 대하려는 일반 대중은 물리적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예천사건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터진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예천에서 터진 형평사원에 대한 습격사건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형평사에게는 물론 충돌의 주 세력인 농민들을 지원하는 농민단체나 노동단체에게도 좋지 못한 현상이었고 사회주의 운동 단체와 더불어 노?농민단체는 단체 차원에서 농민들에게 백정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형평사는 사회주의 단체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였고 그 결과 형평운동의 방향이 이전보다 더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워졌다. 또한 민족운동단체간의 좌우합작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연합전선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형평사 역시 사회주의 단체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졌다.
형평운동학번이름목차Ⅰ. 머리말Ⅱ. 형평사 창립 배경Ⅲ. 형평사 창립과 활동Ⅳ. 형평사의 해소Ⅴ. 맺음말Ⅵ. 참고문헌Ⅰ. 머리말개항 이후 그리고 서양의 새로운 문물과 함께 새로운 사상이 조선에 흘러들어왔다. 기존의 봉건적 질서에 순응하고 살아가던 많은 이들이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다양한 운동을 벌였다. 특히 1920년대에는 부문 운동이 활성화되어 학생, 여성, 청년, 농민 등 사회에서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 중에서 여기서 다룰 것은 신분 해방을 꿈꾸던 백정들의 운동에 관한 것이다. 오랜 시간 신분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서 한껏 몸을 낮추고 살았던 이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집단적인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나서게 된 배경을 살펴본 후, 형평사라고 하는 백정들의 조직에 대해 그리고 활동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끝으로 그들의 운동이 어떻게 끝을 맞이하는지와 그 전개과정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Ⅱ. 형평사 창립 배경우리가 알고 있는 백정은 조선시대에 가축의 도축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을 말한다. 그 어원은 신역이 부과되지 않은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시대를 거치며 우리가 알고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온 북방계 유목민들 중 일부는 농경문화에 정착하지 못하고 도살업으로 먹고 살았고 그들만의 거주지를 형성한 이들을 백정이라 불렀다.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고 떨어져 살았으며 특수화된 직업 탓에 신분 사회에서 굉장히 낮은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백성이라면 마땅히 가져야할 병역과 납세의 의무도 부과되지 않았으며 사회적으로도 많은 제약과 차별이 존재했다. 백정은 그저 규제하고 관리해야할 대상으로 조선시대 내내 차별과 멸시를 받아온 사람들이었다. 개항 이후 새로운 사상이 들어오고 신분간의 차별을 없애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자 자연히 백정들도 봉건적 차별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갑오개혁에서 법제적으로 신분제도가 철폐되었고 백정의 천민 신분해랭이를 벗고 갓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직업으로 백정을 구분하여 차별하였다. 이런 까닭에 백정들은 제도적으로 천민 신분에서 해방되었으나 계속해서 남아있는 사회적 제약과 차별대우를 받았고 이에 백정들은 그러한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고 저항하였다. 그 저항의 형태가 개별적이었던 조직적이었던 간에 백정들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서 본인들의 처우를 개선하기위해 노력했으며 후술할 형평사라는 조직은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 나타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물론 사회적 차별을 없애고 처우를 개선하려는 의지만으로는 전국 단위의 조직을 형성하는 것은 힘들다. 거대한 운동이 시작되려면 우선 기초되는 의식의 성장이 필수적이다. 1910년대의 항일독립운동의 방향은 크게 무장투쟁노선과 민족교육운동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중 민족교육운동을 통해 사회 전반적으로 일반 대중의 의식 성장이 이룰 수 있었다. 이 시기의 민족교육운동은 야학이나 사립학교 등의 방식으로 교육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그 결과 3.1운동이라는 일제에 대한 민족적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었고 또한 성장한 의식의 수준은 1920년대 유입된 신사상의 수용도 가능케 했다. 신사상이라 불리는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과 대중의 의식의 성장은 사회 여러 분야에서의 부문 운동이 활발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동, 농민, 학생, 여성 등 각 부문에서 권익 신장과 처우 개선, 민족 해방 등의 기치를 내걸고 다양한 단체들이 조직되어 사회운동을 일으켜나갔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역시 차별적 대우를 개선코자 했던 백정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형평사라고 하는 백정들의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Ⅲ. 형평사 창립과 활동형평사 창립 경위에 대해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백정 출신의 자산가 이학찬의 자제가 교육에 있어서 백정 출신이라는 점에 차별을 받자 이에 백정의 신분 해방을 위해 이학찬과 강상호 등의 인물이 ‘조선형평사’를 조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민중 계몽에 앞장섰던 양반 출신 신현수와 강상호가 백정 계급의 해방을식인이 중심이 되어 창립된 것이다. 여전히 존재하는 백정에 대한 차별대우와 민중을 계몽시켜 궁극적으로 독립을 이루려는 지식인들, 그리고 1920년대 국내외에 퍼진 새로운 사상의 풍조는 백정들이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는 길로 이끌었다.1923년 4월 25일 진주에서 형평사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강상호를 임시의장으로 추대한 가운데 형평사 주지와 사칙을 채택하였다.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는 등 백정 또한 일반 민중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내용을 담은 형평사의 주지와 사칙은 형평사의 운동 방향과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또한 사원자격을 백정에만 두지 않고 모든 한국인으로 하였으며 진주에 본사를 위치하였지만 전국 각도에 지사를, 군에는 분사를 두어 전국적이고 광범위한 조직을 목표로 하였다. 창립축하식을 거치고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간 형평사는 각 지방에 형평운동을 이해시켰으며 임원들을 전국으로 파견하였고 이런 노력들과 각 지방의 백정들의 호응에 힘입어 목표한대로 전국 단위의 조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당시의 각 언론들과 여러 사회단체에서는 지지를 표명하며 때로는 적극적인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신분제가 법제적으로 폐지되고도 사회적 차별대우를 받아온 백정들은 이제 권리 신장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백정에 대한 차별에 저항을 하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형평의 의미를 선전하였다. 호적에 백정을 기재하는 것을 정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관리로부터의 차별을 금하도록 각 관청과 접촉하였다. 이런 활동은 백정들에게 행해지던 제약이 다소 완화되는 결과를 불러왔으나 여전히 백정에 대한 차별은 그대로 존재하였다.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킨 이후 일제는 백정들이 전담하던 도축산업에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많은 규약과 제제로 도축산업을 옭아매었고 이는 백정들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위협이 되었다. 그렇기에 형평사의 활동 중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운동도 있었다. 일제에 넘어간 도축장 관리권이나 피혁 소유권을 되찾고자 하였으며 고용 형 있었고 성공적으로 임금인상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도 형평사는 사원끼리의 분쟁에도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경제적 갈등을 해소하였다.형평사는 일차적인 목표에 대한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과 계몽활동에도 앞장서 강습소와 야학을 열어 사원이나 자녀의 교육에 힘썼다. 기본소양을 갖추고 사원의 의식을 각성하는 역할도 하였다. 또한 기관지를 발행하고 연설회를 열어 형평사를 선전하고 사람들의 결집을 모으기도 하였다. 지방순회활동으로 각 지방의 백정들에게 형평운동을 이해시킴과 동시에 운동의 참여를 유도했으며 상호부조활동으로 사원간의 후원, 구조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형평사의 가장 큰 목적은 차별대우 철폐를 통한 실질적인 신분의 해방이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선 백정들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지지를 받아야 했다. 따라서 형평사는 일반 대중들의 사회 운동 단체와의 협력이나 교류를 하기도 했다. 여러 부문의 운동단체들 역시 본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결집된 다양한 세력과의 연대가 필요했기에 형평사와 다른 단체들 간의 협력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노동단체의 경우 형평사 창립부터 조직의 형성까지 형평사에게 협조하고 지지하였으며 형평운동은 노동단체와 같이 파업 투쟁에 나서는 형태도 있었다. 청년단체들 역시 형평운동의 의의에 공감하여 형평운동에 적극적이고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게다가 농민단체나 사상단체들과의 유기적인 연대로 형평운동은 추진력을 가지고 운동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일본에선 조선의 백정과 비슷하게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특수민들이 형평사보다 앞서 조직한 수평사라는 조직이 있었다. 수평사는 형평사의 창립 소식을 듣고 형평사와의 연대를 꾀했으며 이에 형평사는 응답하여 상호간의 교류를 하며 연대적인 제휴를 하기로 결의했다.Ⅳ. 형평사의 해소형평사는 창립 후 초기 단계부터 운동의 방향에 대해 사람들 간에 의견차가 있었다. 백정뿐만 아니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이들에게 사원자격을 주었고 다양한 사상을 가진 단체들과 교류를 하였기에 형평지 못하고 분열될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형평사 내에서는 사회적 차별을 없애 형평을 이루려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계급에 대한 해소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신분해방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신분해방을 계급투쟁과 동일시하였으며 사회주의 단체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형평운동을 강경하게 진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런 움직임에 당연히 형평사 내에서 반발이 있었고 형평사는 대립과 분열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형평사가 복수의 조직으로 분리가 되는 일도 있었다. 후에 다시 통합되어 형평운동을 전개해나갔지만 운동의 방향을 둘러싼 사상 간의 차이는 언제든 다시 분열의 씨앗으로 작용될 여지가 있었다.그러다 1925년 이른바 예천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이 터졌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해나가고 운동을 전개해나가는 형평사의 움직임에 반발한 사람들이 형평사 사원을 폭행하고 습격한 것이다. 그간 사회적 차별과 멸시를 받아온 백정들이 차별의 관습에 조직적, 적극적으로 저항하자 일반인들과의 충돌이 잦아졌다. 일반 대중과의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대우를 받으려는 백정과 달라진 풍속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전처럼 그들을 대하려는 일반 대중은 물리적 충돌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예천사건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터진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예천에서 터진 형평사원에 대한 습격사건뿐만 아니라 타 지역에서도 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형평사에게는 물론 충돌의 주 세력인 농민들을 지원하는 농민단체나 노동단체에게도 좋지 못한 현상이었고 사회주의 운동 단체와 더불어 노?농민단체는 단체 차원에서 농민들에게 백정들에 대한 인식을 개선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형평사는 사회주의 단체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였고 그 결과 형평운동의 방향이 이전보다 더 사회주의 사상에 가까워졌다. 또한 민족운동단체간의 좌우합작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연합전선의 필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형평사 역시 사회주의 단체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다.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위정척사 운동의 전개학번이름목차Ⅰ. 서론Ⅱ. 본론1.개항이전2.3.4.Ⅲ. 결론Ⅳ. 참고문헌Ⅰ. 서론역사는 끊임없이 흐른다. 하나의 사건이 다른 결과로 이어지며 그 결과가 또 다른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그 과정 속에서 영원하리라 여겨졌던 것들이 급변하는 상황을 맞이해 점차 변화해나가기도 한다. 유학이 조선에 그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에까지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사회 지도층이었던 양반은 물론 일반 대중이나 하층민까지 유교의 문화적인 관습은 곳곳에 스며들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기도 한다. 수백 년 동안 한반도에서 한민족을 지배해왔던 성리학적 세계관과 관습과 질서는 19세기 급변하는 정세를 맞이하여 변화를 겪으며 계속해서 이어져왔다. 유학자들이 가진 타학문에 대한 배타성은 위정척사라는 형태로 나타났으며 위정척사의 사상이 어떻게 전개되는가의 과정을 살펴본다면 당시 사회와 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세기 이후 위정척사사상은 그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음 4단계로 변천하였다. 1)개항 이전 천주교를 포함한 서구의 문화가 조금씩이나마 조선에 유입되던 시기, 2)조선과 서양의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난 시기, 3)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던 시기, 4)을미사변 이후. 이 글에서는 이렇게 4단계로 나누어 전개과정을 살펴볼 것이다.Ⅱ. 본론1. 개항 이전 시기서학은 서구의 발달된 과학과 천주교인 종교를 포괄하고 있는 용어이다. 종교에 해당하는 천주교의 동양사회 전래는 이미 16세기부터 이루어졌다. 철저한 성리학을 신봉하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새로운 사상의 도입을 반기지 않았다. 게다가 정통성을 강조하고 다른 학문을 이단으로 규정, 배척하는 유학자들의 특성상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천주교에 대해 강하게 배척하였다.서양의 세력이 동양으로 점차 들어오는 이른바 서세동점의 시기에 나라와 전통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국내의 보수적인 움직임은 위정척사의 형태로 나타났다. 황사영의 백서사건은 천주교가 격렬하게 배척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천주교의 사상은 조선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반국가적인 이단으로 규정되었고 이를 마땅히 탄압하는 것이 도리라고 여겨졌다. 유림들은 격렬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국가에서는 천주교도들을 반역의 죄로 다스려 이들에 대한 탄압을 하였다. 천주교도들의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는 것이 효를 중시하던 유학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다. 기본적으로 효를 다하는 것이 곧 忠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던 유학에서 효를 다하지 않는 것은 곧 나라에 대한 반역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또한 화이론적 세계관에선 오직 중화와 중화가 아닌 오랑캐들만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로 본다면 조상에게 예를 다하지 않는 서양의 문화는 오랑캐의 문화로 배척해야할 대상이었다. 이런 시각에 따른 그리고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천주교를 비롯해 서양의 사상은 조선에서 널리 퍼질 수 없었고 유학자들의 배척으로 이어졌다.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의 시기조선은 서양의 군사적으로 직접 맞닥뜨리게 되었고 당연히 이는 국가나 지배층인 양반들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통상을 요구하며 횡포를 부리는 서양 군대의 태도는 조선에선 용납할 수 없는 무례한 오랑캐의 행동이었다. 조선은 이들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곧 중화를 버리고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들이 가진 모든 것들은 성리학의 도에 어긋나는 물건들로 보았다. 그리하여 천주교에 대한 배척에서 이제는 아예 사상뿐만 아니라 서양의 기술이나 과학 등 모든 것을 배척하게 되었다. 또한 군사적인 위협에 대응하여 자연스럽게 척화주전론이 등장하였다. 대표적 이항로(李恒老)의 양화배척론을 들 수 있다. 그는 성리학에 있어서 조선조 후기의 거목이었고, 위정척사론의 이론적 정립을 기한 전통유림이었다. 그의 척화론의 주된 내용은 서양의 물건에 대한 전반적인 배척이었다. 그는 상소에서 일상생활에서 양물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주장하고 서양과 교역을 했을 시 조선이 곤궁해질 것을 우려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6대가의 한사람인 기정진(奇正鎭)도 양물금단론을 내세우며 양물을 거두어 없애버리고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다. 상소를 올리며 서양과 교통의 길이 열리면 조선이 경제적으로 예속되어버릴 것이라 보고 양물금단과 양물배척이 척사의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당시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였던 흥선대원군 역시 서양과 통상하는 것을 금하였으며 대원군이 내세운 쇄국정책은 위정척사의 사상을 가진 양반들과 유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정부의 외교 정책과 사회의 지배층간의 사상적 일치는 국가적인 단합으로 이어졌고 서양의 어떤 군대가 와도 이들을 절대 통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국가적 위기를 위정척사의 사상으로 극복한 이들의 자신감은 대원군이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는 것으로 나타났다.3. 개항 이후의 전개조선이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며 문호를 개방하자 당연히 양반층과 유림들에게서 큰 반발이 일어났다. 최익현(崔益鉉)은 이항로의 제자로 조선이 일본과 조약을 맺고 개항하려하자 지부상소를 올리며 조약에 반대하였다. 그가 내세운 반대의 근거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①일본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그들의 탐욕을 막아낼 수 없다.②공업품을 생산하는 일본과 달리 우리는 자연 생산물이라 교역하면 황폐해질 것이다.③왜인이라 해도 서양 도적과 마찬가지이다.④우리의 재산이나 부녀자를 약탈할 것이다.⑤일본은 금수이므로 상대하는 것은 위험하다.정리를 하자면 왜인이나 서양인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이 배척해야할 대상이며 그들과 교역을 할 시 앞서 이항로나 기정진이 우려한 것처럼 조선에 손해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고종은 최익현을 귀양 보내는 것으로 답을 하였다.최익현을 비롯해 많은 척사론자들이 반대하였지만 조선은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간 위정척사의 운동이 문호 개방과 통상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지만 결국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하자 이전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조선은 일본에 수신사와 신사유람단을, 청나라엔 영선사를 파견하여 그들의 앞선 기술이나 본받을 점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그 중 일본에 갔다 온 수신사 김홍집이 《조선책략》이라는 책을 가져왔다. 이 책은 당시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인 황준헌이 쓴 책으로 조선을 둘러싼 주변국의 상황과 조선이 취해야할 외교적 정책을 담은 책이었다. 주된 내용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중국과 친밀하게 지내고, 일본과 결합하고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책이 고종에게 전해지고 정부 차원에서 이 책을 관리나 유생들에게 읽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당연히 보수적인 유생들이나 양반들에게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의 통상을 전면적으로 반대한 이들에게 오히려 이들과 손을 잡고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화이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이들에게는 세상엔 오직 중화와 비중화로 나뉘어 질뿐 러시아를 막는다고 일본이나 미국과 손을 잡는다 해도 러시아나 일본이나 미국이나 똑같이 배척해야할 오랑캐들로 여겨졌다. 전국의 유생들은 앞다투어 상소를 올렸고 김홍집을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생 이만손을 우두머리로 하여 올라간 영남만인소가 있었고 강원도 유생 홍재학이 올린 1만 자 상소인 만언척사소도 있었다. 특히 만언척사소의 경우 그 내용이 과격하였다. 단지 외세와 통상을 거부하던 위정척사의 움직임은 이제 양물, 양학이 만연해 종묘사직이 위기에 빠졌다면서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쪽으로 흘러갔다.4. 을미사변 이후일본이 조선에 대한 간섭이 날로 심해지고 점차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었다. 줄곧 위정척사를 주장하던 양반 지도층부터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반일감정은 퍼져나갔다. 이런 정세 변화는 위정척사운동의 변화를 예고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되고 일본의 압력으로 단발령이 시행되자 결국 위정척사운동은 의병활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침략이 구체화됨에 따라 위정척사의 운동 또한 의병활동으로 행동화된 것이다.1895년 일어난 을미의병은 근왕창의라는 다분히 성리학적인 기치를 내세워 유생들이 일으킨 의병이다.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제천에서 봉기한 유인석, 강원도에서 봉기한 이소응을 들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유생들이 일으킨 봉기에 다양한 사람들, 농민들이나 동학교도 등이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당시 반일 감정은 신분을 막론하고 흔했다는 것, 위정척사의 사상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받고 있었고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친일 인사들의 처단을 내세우고 지방 관아를 습격하여 단발령에 앞장선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그러다 아관파천 이후 친일 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내각이 성립되었다. 고종은 의병장들에게 해산 권고를 내렸고 이에 많은 의병들이 국왕의 권고를 받아드려 해산하였다. 이렇게 을미의병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유생들에게 위정척사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든 불씨만 지펴준다면 들고 일어날 여지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게 조선의 외교권 등이 빼앗기자 다시 일어났다. 이것이 을사의병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일본과의 조약 체결에 앞장서 반대했던 최익현을 들 수가 있다. 1907년에는 군대 해산, 고종의 강제 퇴위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이 시기의 의병은 전면적인 항일무력투쟁으로 규모도 이전보다 확대되었으며 해산된 군인들의 합류로 질적 수준 또한 향상되었다. 이후 국권이 완전히 빼앗겨도 산발적인 의병투쟁은 계속되었고 일제의 대대적인 진압이 이루어지자 조선을 벗어나 만주, 간도,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문명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논문평(이성규, 강좌중국사,1권,1989년)200000000과아무개목차서론Ⅰ. 신석기문화의 다원성과 그 유산1-1. 다중심 발전론1-2. 신석기문화의 전체적인 성과1-3. 권력의 형성Ⅱ.문명의 탄생과 특징2-1. 주변의 청동기문화2-2. 청동기와 문명의 개화Ⅲ.하 왕조 실체의 탐색3-1. 하문화의 실재3-2. 하족과 비하족Ⅳ.왕조체제의 형성과 발전4-1. 주의 통치 범위4-2. 정치적 통합을 위한 주의 제도4-3. 정치적 통합을 위한 상의 통치체제결론논문평참고문헌서론중국문명은 어디서 왔을까? 동아시아문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중국문명은 언제 누구에 의해 창조된 것인가? 중국인들은 삼황오제 및 고대의 성왕에 의해 중국문명이 창조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청대 고증학, 서구 근대사학에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삼황오제 전설을 담은 고문헌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여 그 전설을 가공적인 허구로 만들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선사문화의 발굴조사는 중원지역의 선사문화 역시 변방지역의 선사문화와 비슷한 원시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중국 초기문명이 자생 발전한 것이 아니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앙소문화를 발견한 안델슨은 앙소문화의 채도가 서아시아로부터 전해졌다는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 전파경로로 추정되는 지역을 조사했고, 앙소촌보다 선행하는 앙소문화의 제유지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중국 신석기문화의 서아시아 기원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용골이 발굴되어 고도의 청동문화를 발전시킨 상왕조의 실체가 입증되었고 중국인의 자존심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높은 수준의 상문화의 기원이 문제가 되었다. 그 전단계가 확인되지 않는 고도의 문명이라면 외부에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초기 청동기술, 갑골문, 천문역법, 정치제도까지 서아시아에서 그 기원을 찾는 연구가 유행하였다. 그러나 1949년 신중국의 성립 이후 적극적으로 추진된 고고발굴조사 및 정리성과는 ‘중국고고학의 황금시대’라 선언할 만큼 거의 동시에 다발적으로 시작되었고 각기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다면서, 어느 한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과거에는 주변의 여러 문화는 앙소문화에서 시작된 선진 황하유역의 영향으로 발전하였다고 보고 아류적인 지위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이 같은 신석기문화의 기원과 발전의 일원론적인 이해는 각 문화성격에 대한 이해의 미숙, 제한된 발굴현황 등 학문 내적인 한계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주변의 신석기문화도 해당지역의 선행문화를 모태로 발전하였고, 그 수준이 중원 신석기에 뒤지지 않았음이 밝혀지자 다중심 발전론이 강조되고 있다. “창조적이고 선진적인 중화문화와 그 영향을 받아 후발되는 주변문화” 대신 “기원과 계통이 다른 여러 문화의 병행, 발전에 의한 중국의 선사문화” 란 인식이 가능해졌고 지지받고 있다.1-2. 신석기문화의 전체적인 성과신석기문화의 큰 특징은 석기, 도기의 출현과 함께 식량의 재배, 생산으로의 발전이다. 중국 신석기인들이 기른 가축의 종류는 말을 제외하고도 많았지만 재배한 작물의 종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재배작물의 종류가 적은 것이 농경의 미발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사용한 생산공구는 발달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능상 완벽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고 문명단계 이후와 별 차이가 없었다. 생산공구의 발달이야말로 중국 신석기시대의 농경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공구는 발달하였지만 기본적으로 화경농법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기에 당시 농경의 생산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곡물로 술을 빚은 증거가 명백한 고병배의 출토, 다양한 형태의 도기가 대량생산 등을 고려할 때, 잉여생산의 증대와 이에 따른 비농업 인구의 출현, 수공업의 발달하였음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생산력의 발전은 인구의 증가를 가능케 하였고, 대규모의 취락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 그 단적인 증거가 된다. 대규모 취락의 출현과 함께 대형 건축이 발전한 것도 주목된다. 요강석을 태워 만든 인조경골료로 지면을 다진 특이한 건축법, 지위의 상징이었다. 또한 부장품 중 생산공구가 거의 없다는 점, 사돈묘의 주인공이 20세 전후한 청년이란 사실은, 이들이 생산과는 유리된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권력도 세습되었을 것이라 추측케 한다. 이러한 권력의 형성은 결혼제도의 변화, 사회적 분업의 발생, 사유제의 성립, 계급과 신분의 분화 등 사회구조의 변화와 병행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 단인장다인합장의 단계에 비해 단인장부부합장이 출현하면서 부장품의 차이가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확실하다. 대문구사회가 반파사회에 비해 생산력이 크게 앞섰을 뿐 아니라 동시에 재부가 소수에게 편중된 단적인 증거다. 이런 현상이 씨족공동체 자체를 분해시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수가 재부와 권력을 독점한 상황에서는 사회적 통합을 강조하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제의(祭儀)다. 또한 제례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이간의 상징체계를 발달시켰다. 시대가 내려가면서 제례가 더 대규모화하고 복잡해짐에 따라 점복음악상징부호도 더욱 세련되고 체계적으로 발달하였을 것이다.Ⅱ.문명의 탄생과 특징청동기, 문자조직, 계급의 분화, 국가의 형성, 도시의 발달, 체계적인 종교 등은 흔히 초기문명의 지표로 지적되고 있다. 이것들은 신석기문화에선 볼 수 없는 새로운 양상이며 상호 유기적인 관계 하에서 나타난 요소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중국 초기문명에서 기대할 이유가 없고 상대를 문명단계로 본다. 그렇기에 저자는 상대에 선행하는 문명단계의 존재 여부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를 검토하기만 하면 족하다고 보았다.2-1. 주변의 청동기문화악석문화는 처음 발견될 당시 산동 용산문화의 범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그 후 이와 유사한 문화가 발견되었고 비록 청동 용기나 대형 청동제 생산공구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정교한 골기의 제작으로 보아 금속공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라서 악석문화는 청동기문화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다. 홍산문화 역시 문명발생이 예상되는 후보 중의 하나다. 홍산문화는 소하연문화를 거쳐 하가점 하층문화로 발전하였청동기의 출현은 수공업 공구의 혁신을 가져왔을 것이며, 이에 따른 생산력이 어느 정도 증대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기는 주로 병기와 예기에 집중되었고 농구는 소량에 불과하거니와 청동기문화에서 각종 석제농구가 일괄 출토된 것을 볼 때, 초기 문명의 발전이 생산공구의 혁신에 의한 생산력의 증대로 인하였다고 볼 수 없다. 장광직(張光直)은 청동무기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문명의 상징인 도시의 발전은 소수에 의한 잉여생산의 착취에 기초한 것으로, 착취계급의 무력적 기반이 청동무기에 의해 강화, 보증되었다는 것이다. 청동기의 출현과 보급은 이미 상당한 규모의 노동력의 집중과 조직을 전제로 한다. 청동무기의 대량 확보는 그만큼 더 큰 노동력의 집적과 조직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미 문명의 초기단계로 진입하고 있는 왕성강평량대유지에서도 청동기의 사용이 빈약한 사실은 문명 형성과정에서 청동기의 역할이 매우 미약했던 증거다. 그렇다면 청동기가 대량 공급되기 이전 문명 탄생의 기반을 갖게 해준 요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유대가 강한 씨족제도, 제사체계 및 여러 부락의 통합, 노동력의 결집과 조직, 잉여생산의 확대와 소수에 의한 집중, 권력의 확대, 여러 제도의 발달이 이어지면서 중국 초기의 문명이 탄생했다고 보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 청동기가 대량으로 공급, 문명은 더욱 성숙한 단계로 발전하였다고 본다.Ⅲ.하 왕조 실체의 탐색3-1. 하문화의 실재과거 중국인들은 성읍의 건설, 왕권의 세습 등 문명의 요소가 하왕조의 개창자라는 우에 의해 시작된 것이라 믿으며 중국문명의 시작을 하왕조로 인식해왔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불신되었으며 심지어 하의 실재조차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왕조의 실재를 확인하려는 노력이 50년대 이후 대대적인 조사로 구체화되었다. 그리하여 이리두유지가 발견되었지만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이리두유지에서 확인된 문화층이 4기로 구분되는데 2기와 3기, 3기와 4기간에 커다란 변화가 지적되었다. 이리두문화와 정주 이리강기문화의 차이를 강 규모의 정치질서를 하족과 관련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하족의 문화라고 해도 신석기문화에 머문 한, 하왕조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하지만 문명의 초기단계로 인정할 만한 성지가 왕만유형에서 확인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하허로 알려진 산서성 남부 일대에서 용산문화 도사유형이 발견되었고 그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 동하풍유지도 발견되자 문제가 복잡해졌다. 도사유형이 용산문화 만기의 하문화라면 동하풍유형은 이리두문화 단계의 하문화란 결론이 도출된다. 유기우(劉起釪)는 하족의 이동론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산서 남부에서 하대 초중기에 걸쳐 도사유형→동하풍유형을 발전시킨 하족이 만기에 하남으로 이동, 하남 이리두문화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하풍유형이 이리두문화에 비해 선행한 것인지 의문이다. 저자는 산서 남부에서 하남 중서부에 걸쳐 분포된 비선상문화를 모두 하문화로 보고, 그 안에 포함된 각 유형을 동일문화계통의 지역적 편차로 보자고 한다. 그러면서 몇 가지 결론을 내린다. 첫째, 문자자료에 의해 어떤 문화가 하족의 문화란 것이 직접 확인되지 않는 한, 이것을 하문화로 칭하는 것이 적절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둘째, 하문화의 설정은 상왕조에 선행하여 적어도 중원을 지배한 왕조 또는 광역 국가체제를 인정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셋째, 이리두 조기문화를 하문화에 포함시키는 것이 곧 중원지구의 초기문명이 하족에만 의해서 창조형성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하문화의 설정이 초기 중원문명의 형성과정에서 자칫 비하족의 역할을 배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Ⅳ.왕조체제의 형성과 발전4-1. 주의 통치 범위과거 중국인들은 서주를 정치적 통합을 구현한 왕조로서 인식해 왔지만, 실제 주초의 금문에도 주왕은 통치해야 하는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념적인 수사로 분식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한다. 그래도 금문을 통해 확인된 주왕의 통치범위는 생각보다 넓은 것은 사실이다. 광대한 지역의 정치적 통합은 이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