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서 87년 체제에 이르는 우리 역사에서 법과 정치의 관계Ⅰ. 서론, 보통법과 법실증주의 전통법과 정치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정치 과정을 수렴하는 단계로서 법이 제정, 개정되며 법의 작용 내에서 또 다른 정치과정이 행해진다. 정치 공동체의 운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법이란 무엇이며 어떤 특성을 띄고 있을까? 법의 성격을 이해함에 있어서 여러 분파가 갈리는데 이는 법이 갖는 정당성의 근거를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정당성이란 어느 한 법규범이나 단체가 과연 올바른 내용을 추구하는지를 문제 삼는 것이며, 이와 자주 비교되는 합법성은 ‘현존하는 실정법 체계에 합치하는 상태’를 뜻한다(양천수, 93p). 이병택의 흄의 법사상, 김대영의 리프만의 보통법 논문들은 대륙법과 비교되는 보통법 사상을 소개하며, 양천수는 칼 슈미트의 합법성과 정당성(결단주의)를, 마지막으로 나종석은 켈젠의 법 실증주의를 비판적으로 논의한다. 한국에서는 자연법주의와 법실증주의가 주류이며, 보통법 사상에 대한 논의는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먼저, 법실증주의는 도덕과 법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방식을 택한다. 법 실증주의적 전통에서는 법이 도덕과 우연적인 연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이 둘 사이에는 어떤 내적이고 필연적인 관계가 존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므로 실정법의 타당성의 근거는 정의의 원리에 의거해서 해명될 수 없다(나종석, 147p). 즉 법이 갖는 정당성은 논외로 두고, 합법성만을 중시하여 법 조문 그 자체의 해석이 중요시된다. 한편 한국에서는 널리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그와 대비되는 보통법적 관점도 존재한다. 보통법 이론은 영국에서 발전된 법이론으로, 유럽의 대륙계 법이 주로 추상적 원리로부터 연역적으로 법체계를 구성했던 반면에, 영국에서는 사안에 따라 귀납적으로 과거의 판례에 기초해서 법을 만들었다(김대영, 33p). 흄의 보통법적 관점은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시민적 주체의 구성과 적실성의 추구를 중시한다. 흄은 감각과 달리 관념게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것이다.ⅰ) 조선시대의 법과 정치의 관계김영수의 논문을 통하여 세종대 시기의 법과 정치의 관계를 알아보자면, ‘왕정’과 ‘예치’가 지배했던 조선 중기에도 법치주의는 존재했었다. 특히, 저자가 평가하기에 조선의 정치체제를 전제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바로 민심과 공론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법률이 사회적 안정의 기초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강제력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어야 함을 자각했던 것이다. 이 합의의 원천은 민심과 공론이었고, 정치적 정당성을 존속시키기 위한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강조되었다(김영수, 73p). 따라서 조선은 말의 자유를 건전한 정치에서 불가결한 요소로 생각하였고, 포럼형 왕정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세종의 노력과 정치역동성. 공론을 통해 인민의 의지를 파악하는 것을 중요시한 리프만의 보통법적 관점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조선의 정치체제인 예치 혹은 유교에는 ‘신분제’라는 거대 구조적 장애물이 존재하였고, 법치주의는 이에 가로막혔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종법제와의 충돌이었다. 왕과 귀족이 도덕의 모범이 되는 종법제 운영원리 하에서 귀천의 도덕적 관계를 라는 법률적 관계로 객관화시키는 성문법이란 이 체제의 근본원리인 종법제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민고소금지법과 같은 신분제와 법치의 대립이 나타났다. 이후, 조선 중기에는 법망 내지 법제를 통해서 “백성들을 어거”하려는 통치자들의 생각대로 세조, 예종, 성종 3대에 걸쳐 경국대전이 만들어졌고, 이는 조선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시대의 거울로서 당시의 치안, 풍속, 노비 등의 여러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노력의 결실이었다(박현모, 107p). 하지만, 그 실제를 들여다보면 경국대전으로 인해 관료제의 기강이 수립되고 행정체계와 유교적 사회질서는 자리잡았을지 모르나, 공동체 구성원들의 개성과 활력, 그리고 국가적 역동성은 약화되고 침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박현모, 122p). 예전(禮典)은 공식적인 영역 외에도 가정 분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만 건전한 법과 정치 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ⅲ) 대한민국 역사에서 법과 정치의 관계그렇다면 해방정국부터 87년 체제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의 법과 정치의 관계는 어떻게 발전했을까? 대한민국 설립 이후, 헌법의 제정은 법과 정치의 관계에 있어서 중심이 되었고, 제-개정 때마다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논란을 가져왔다. 헌법의 기능은 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논의되지만 홍윤기는 헌법을 미래에 대한 가장 확고한 약속이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국가시민의 활력을 결집하고자 하는 국가적 대의의 협약이라고 바라보았다(홍윤기, 19p). 그렇다면 한국의 근대 역사 속에서 헌법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나. 우리는 서희경, 박명림, 홍윤기의 논문들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 대한민국 제헌국회를 통해 만들어진 건국헌법, 그리고 6월 항쟁을 거쳐 개정된 87년 헌법까지, 각기 다른 정치적-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헌법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헌법 제-개정시의 정권의 정치정당성 차원의 문제, 혹은 헌법의 합법성과 정당성차원에서 헌정사를 바라보고자 한다.임시정부시기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본으로 한 , 원형헌법이 탄생했다. 삼균주의의 핵심은 경제, 정치, 교육에 있어서 균등이었고, 그의 헌법구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 1941년 , 1948년 건국헌법의 기본원리로 수용되었다(서희경, 82p).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민족혁명의 성공 후 계급혁명의 재발로 인한 민족적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의 계급적 요구를 균등이념으로 광범위하게 포섭하고자 했던 것이다(서희경, 95p). 이러한 건국헌법 정신은 좌우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모두 수렴할 수 있는 ‘정치적 타협물’로서의 기능을 수행함과 동시에, 건국 이후 이해관계와 불평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국민들의 분열을 방지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한편, 해방정국 이후부터 87년 체제까지 대한민국 헌법사 과정을 관통하는 큰 문제점이 두 가지가 존재한다. 바로 행위자의 제약, 일부 세력만이당성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어왔다. 또한, 시민적 역동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던 87년 헌정체제는 90년대 중반기부터 시민사회가 활성화하고 정보사회화가 진척되면서 한계가 드러나게 된다(홍윤기, 39p). 당시 권위주위적 정부 청산에만 집중하였기에, 시민적 의견 수렴과 그 방안에 관해서는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지 못했고, 현재 시민들의 의식과 민주적 의사수렴에 있어서 현 체제는 현실과 큰 괴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87년 체제는 민주주의의 성격과 영토문제에 있어서 국가의 근본성격과 체제의 문제를 지니며(박명림, 85p), 당시 졸속적으로 이루어진 대통령 5년 단임제와 다른 선거들과의 주기에 있어서 권력구조의 문제에 대한 개헌 요구들이 존재한다. 제헌헌법과 87년 체제 모두 헌정사의 주요 전환점이었으며, 국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두 사건에서 필자는 법치라는 것이 결국 주요 정치인, 즉 인치를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법은 정치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Ⅲ. 결론, 개헌의 방향성2017 대선에 있어서 ‘개헌’이란 대선주자 모두의 공약이었으며, 이는 87년 체제가 타성만 남은 채 더 이상 주권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일조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과 같다. 필자가 위 논문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헌법제정 과정에서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줄어드는 시민들의 목소리, 헌법과 법해석이 주권자들에게 가하는 막대한 영향력, 마지막으로 개헌 필요성에 대한 절감이었다. 제헌헌법과 87년 모두 정치인들 간의 졸속합의였다. 물론 대내적, 대외적 정치환경으로 인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측면도 존재했다. 하지만 촛불혁명을 이루어내고, 민주주의 공고화 단계에 들어선 현재는 심의를 거쳐 개헌을 진행할 환경이 갖추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할 개헌의 방향성이란 무엇일까?필자는 그 방향성을 헌 체재가 지니고 있는 부족함에서 찾고자 한다. 우선 개헌절차에 있어서 시민사회의 역할 확대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만법치주의의 교정가능성을 내포해야만 한다. 민주주의의 교정가능성, 즉 법치적 민주주의란 대표민주주의의 현실에서 소외되기 쉬운 소수자들의 대표성을 보충해주는 장치로 이해될 수 있으며, 법치주의의 교정가능성, 즉 민주적 법치주의란 대표성에서 불충분한 사법부로 하여금 국민적 책임을 강화하고 국민과의 소통을 진작시키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정태욱, 149p). 즉, 국민 다수의 법감정을 반영한 판결을 내리며, 소외당하는 사회적 소수의 권리를 보호하는 판결을 내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정과정은 법원의 일반 판결을 통해서도 내려지지만, 사법부가 의회와 행정부라는 대의 민주주의 기관을 견제하는 사법심사와 탄핵제도를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즉, 의회에서 결정된 법률이 국가의 최고가치인 헌법에 위배되는지 확인하는 사법심사와, 주권자를 대리하는 대통령 등의 선출직 공무원에 대한 탄핵을 사법부가 실시하는 것이다. 두 제도는 민주주의와 충돌하는 대표적인 법치주의 제도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인간의 오류가능성을 교정가능성이 보완하는 제도의 역할을 수행한다. 한편, 사법부가 그 기능을 수행함에 있어서 사법부가 법을 만드는지 또는 발견하는지에 대한 것은 위 문제를 관통하는 쟁점 사안으로 존재한다. 법을 만드는 것을 옹호하는 사법자제 주의는 판사들의 역할을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정신 또는 의미에 따라 법률을 적용하는데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사법적극주의자들은 법은 발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창출의 대상이기 때문에 판사들은 헌법에 내재된 원칙과 모호한 의미들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과 사법심사권을 가질 수 있다(강휘원, 385)고 주장한다. 사법부가 어떤 성격을 띄고 정치에 개입하느냐에 따라 산출되는 정치적 결과는 달라지며, 이 과정에서 법원은 많은 비판을 직접적으로 대면하게도 한다.Ⅱ. 본론, 사법심사와 탄핵제도에서 알아보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관계대의 민주주의가 건전하게 기능하는 것은 삼권분립이 잘 지켜져 각 기관간의 견제와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과 맞닿아있다. 그를 위
생물다양성과 진화 레포트생물다양성을 활용한길동 생태공원목 차: 도시에 유치된 생태공원에 대한 소개1. 생태공원의 개념과 유래2. 생태공원의 기능: 생태공원에 적용되는 생물다양성; 길동 생태공원을 중심으로1. 길동 생태공원의 생물다양성과 소생태계로서의 역할2. 길동 생태공원을 통한 교육적 효과도입: 도시에 유치된 생태공원에 대한 소개1. 생태공원의 개념과 유래도시화, 산업화가 가속화됨에 따라 무분별한 환경 파괴가 계속되면서 동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악화되고 면적이 줄어들면서 동물들의 숫자도 줄어들게 되었다. 도시화는 인류의 삶을 보다 윤택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한편으로는 환경 파괴가 지속되면서 동식물의 생태 환경이 파괴되고 서식지를 잃어 가는 상황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생태학자들은 현대 도시에 생물다양성의 보호와 동식물의 보호처이며 사람들의 휴식 공간인 생태 공원을 조성하게 된다. 생태공원은 생물다양성을 이용한 생태 공원은 휴식처일 뿐 아니라 생태 교육의 장으로도 활용됨으로써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생태공원의 개념은 목적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생태적 요소를 주제로 한 관찰, 학습 측면에서 생태공원은 자연관찰 및 학습을 위하여 공원녹지를 생태적으로 복원, 보전하며, 이용자들에게 식물, 동물, 곤충들이 자연환경속에서 성장, 활동하는 모습을 관찰 할 수 있도록 제공된 장소, 즉 소생물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쉽게 접근, 관찰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원을 말한다. 두 번째는 생태원리에 입각하여 조성측면에서 도시속에 야생생물의 서식처를 도입하되, 생태계 질서(종다양성, 생태적 건전성, 지속가능성 등)에 의해 스스로 유지되도록 조성된 공원으로 건강한 야생경관을 도입하고, 최소에너지 투입에 의해 유지관리가 가능하도록 조성된 공원으로 생태환경적으로 타 공원에 비해 비교우위성에 존재가치를 두고 조성된 공원을 말한다.생태공원은 도시의 팽창과 개발에 따른 환경문제의 대두, 물리적 인공환경에 대한 가치 구조 변화로 자연환경에 대한 선호도 증가와 욕구충족, 경제적 측면에서 비용절감 등의 이유로 공원의 새로운 유형인 생태공원이 대두되었다. 생태공원의 시초는 Bloemendaalse Bos로 1952년 네델란드에서 Jae, P.Thijsse라는 교사가 haarlem에서 학생들에게 자연을 이해시키고자 하는 교육목적을 가지고 조성되었다. 1977년 영국에서 도시민과 어린이에게 자연을 쉽게 접촉할 수 있도록 윌리암 커티스 생태공원이 조성되어 8년동안 지속되다가 1985년에 폐쇄된 후 생태공원재단이 발족되어 영국을 중심으로 공원조성시 생태공원의 개념이 도입되었고, 이후 독일, 캐나다 등에서도 같은 개념으로 생태공원이 조성되었다. 생태공원(Ecological Park)이라는 용어는 1980년 Schwarz가 "Natural Garden(Der Natur Garten)" 이라는 책을 출간함으로써 사용되었고 그 이전에 1973년 Le Roy의 저서 "Switch off nature-swich on nature"에서 Ecological garden 개념으로부터 발달되었다. (장병규 외, 2012),2. 생태공원의 기능생태공원이란 도시 속에 자연이 풍부한 공원이다. 탐방객은 다른 공원에 비해 생태공원을 방문함으로써 도시 내에서 다양한 생물과 이들의 살아가고 있는 생태 관찰을 통해 비록 인간의 활동을 염두에 두로 설계된 도시지만 서식지를 확보해주며 생물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소여야 한다.▲ 길동 생태공원 저수지이런 취지에서 처음 조성시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한다.첫 번째로는 다양한 소생물권(biotope)형성이다. 생물유기체(Bio-coenosis)가 비교적 안정한 상태로 살아가는 장소(tope)로 국지적 환경(Micro environment)변화에 의한 다양한 소생물 서식을 유도한다. 두 번째는 서식처(Habitat) 보호이다. 다양한 소생물권(biotope)들이 Network를 형성하여 생태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일정지역을 보호·관리하며 서식생물종의 번식 및 생활환경을 보호함으로써 생태적으로 건강한 공간을 조성하기 위함이다. 세 번째는 자연관찰활동공간 제공이다. 생태적으로 안정된 장소에서 자연환경기작(ecosystem)을 관찰,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여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공간이므로, 생태적 교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제한된 관찰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길동생태공원홈페이지)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생태공원은 생물다양성 그 자체인 것과 동시에 생물다양성을 증진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길동 생태공원은 생태공원에 생물다양성이 어떻게 적용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어 훌륭한 사례가 될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본론1. 길동 생태공원의 생물다양성과 소생태계로서의 역할생태공원은 생물유기체가 비교적 안정한 상태로 살아가는 장소로 단순한 서식지가 아니라, 소생태계로서 생물다양성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서식지는 개개의 특정한 종이나 개체의 서식장소를 가리키는 반면, 소생물권은 특정한 생물 군집이 서식하고 이동하는 데 도움이 되는 균일한 환경을 갖춘 소면적의 공간단위를 일컫는다. 즉, 생태수공간의 조성을 통하여 사라져가는 여러 동식물의 서식공간을 마련하고, 그에 따라 종 다양성을 높여 전반적인 도시생태계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념이다.▲ 길동 생태공원 내부서울시에서 조성한 첫 번째 자연생태공원으로서 강동구 천호대로변 습지에 생물 서식공간을 복원하여 시민과 학생들에게 자연생태의 학습과 자연체험공간을 제공하며 생물의 다양성을 증진시켜 도시민들에게 건강한 녹지 공간 제공으로 도시환경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이다. 길동자연생태공원은 1999년에 문을 연 이래 소나무, 보리수 등 64만 3만2000여 그루의 수목과 3만여 마리의 물고기, 왜가리, 물총새, 원앙 등의 철새가 찾아드는 도심 속 야생식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이제는 생태계가 상당히 안정된 곳으로 손꼽히며 프로그램도 다채롭게 운영되어 인지도가 높다. 공원은 습지지구, 저수지 지구, 산림지고, 환경 초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습지지구는 땅에서 끌어올린 지하수가 수로를 통해 이동하면서 만들어진 물웅덩이, 수로 연못을 만들어 습지와 관련된 다양한 생물들이 다양한 생물이 안정적인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습지지구에서는 수생식물과 수서곤충 개구리 등을 볼 수 있고, 수련 노랑어리 연꽃 갈대창포와 하늘의 사냥꾼 잠자리, 물방개 물자라 등을 볼 수 있다. 삼림지구는 숲이 천이과정에 따라 자연스럽게 자라는 참나무 숲과 오래전 심어진 아까시나무 숲이 작은 개울 사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키 큰 나무 아래로 키 작은 나무와 풀들이 어우러져 안정된 숲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 안에서 다양한 동물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다. 산림지구에서는 꽃과 나무마다 이름표를 달아 놓아 학습에도 도움이 된다. 농촌지구는 논과 밭에 계절별 향토식물을 지배하는 곳이며, 초지지구는 자연상태를 그대로 두어 식물이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초지지구에는 초가집 움집 인공벌통 등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과 텃밭 등이 갖추어져 있다. 마지막으로 저수지지구는 공원 전체에 필요한 물을 저장하는 시설로 물과 관련된 생물, 특히 어류와 조류가 활동하고 번식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이다. 물가 주변에 보호막을 설치하여 물가에 오늘 새들이 번식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조류 관찰대는 나무로 높이 칸막이를 만들고 사방 30cm 정도의 관찰창을 뚫어 새들이 놀라지 않게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계절에 따라 물총새, 왜가리, 원앙, 흰뺨검둥오리, 꼬마물떼새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이곳 공원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계절별 생태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어 자연생태학습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길동생태공원홈페이지)▲ 길동 생태공원에 서식하는 찌르레기2. 길동 생태공원의 교육적 효과길동 생태공원이 일반적인 도시공원과 다른 점은 도시 안에서 자연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다. 습지며 나무며 저수지를 그대로 두고 최대한 생태계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을 조성하 게 특징이다. 게다가 다양한 생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자연해설가의 설명을 듣거나 스스로 관찰하는 방법 등이 있어 방문객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그러므로 지역사회 차원에서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종종 체험학습의 장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길동 생태공원 내에서 실시되는 프로그램들은 다음과 같은 지향점을 가진다.-도시 내 생태공원은 열린 공간과 초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도시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도시민에게 휴식 및 여가 장소를 제공하는 등 삶의 질 향상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생태공원은 식물과 곤충, 야생조류 등의 생물들이 서식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는 역할도 수행
새우와 고래싸움 서평-한미동맹관계와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2016년 현재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어떠한가? 미국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간 G2 중국과 자위대법을 통과시켜 언제든지 세계를 위협할 수 있는 일본, 김일성-김정일을 거친 왕좌를 물려받은 김정은의 계속되는 핵과 미사일의 도발 등 동북아시아 상황과 IS테러, 유럽난민 사태, 앞으로 다가올 미국 대선 등 10년 전과 비교하면 상상도 없는 상황들이 한반도를 둘러쌓고 있으며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기에는 여전히 어렵다. 강성학 저 새우와 고래싸움은 현실주의 이론을 기반으로 국제정치 상황에서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이 처한 위치를 재조명하고 앞으로의 발전 방향을 모색한 책이다. 비록 2004년에 발간된 책이기에 이미 해결된 일에 대해 궁금증을 표하는 등 현 2016년 정세를 파악하는 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국제정치 속 한국의 위치를 알아내는 데에는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다.한반도는 주변의 강대국로 인하여 늘 약소국일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처해 왔다. 하지만 구한말부터 어쩌면 현재까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과거에는 중국에 귀감을 받아 안보보다는 문화나 도덕, 윤리 등의 학문의 성장에 주력했고, 현재는 OECD 가입, 월드컵 개최 등으로 강대국 신드롬에 심취해, 혹은 미국의 안락한 보호막 속에서 한국은 우리만의 강대국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저자의 말처럼 한국은 주한미군 덕택으로 이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전재로 고도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고립주의적 성향은 강해지고 있으며 주한미군에 대한 논쟁도 한국 내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서도 끊이지 않고 있다. 주한미군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 입성하여 북한의 2차 도발을 억지하는 ‘인계철선’의 역할을 분명히 해왔다. 하지만 닉슨 독트린 이후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불거져 나왔고 그 이후에는 광주민주화 운동에의 개입, 주한미군지위협정의 불평등문제, 미군 부대와 훈련소 문제 등으로 야기된 한국인들의 불만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불확실한 안보환경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미국과의 안보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핵이 한국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언젠가는 잠재적인 적대세력이 될 수도 있는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입장에서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면서 동북아 안보균형자 역할을 할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축소시킨다거나 파기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군사력이나 총체적 국력 면에서 주변 열강들과 대등한 경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이전까지 한국은 원칙적으로 미국과의 동맹을 계속 유지시키는 정책을 선택하는 것이 국가이익과 목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미국과는 이미 오랜 기간 지속된 동맹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저자는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한미동맹의 주도국인 미국이 동맹을 파기하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한 한미동맹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북한의 대남 군사적 위협이 줄더라도, 한국의 군사적 능력이 북한의 전쟁능력을 억지할 수준이 되더라도 한미동맹은 미국에게 있어서 아시아 지역에 개입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에 한미동맹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미동맹의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는 주한미군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은 이전 보다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킬 필요성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철수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주한미군의 철수는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에 대한 개입이 많이 약화되었다고 해석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 지역의 안정이 와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둘째로 한미동맹은 체계적으로 “제도화”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붕괴되지 않을 것이다. 50년 가까이 유지되어 온 한미동맹은 연합방위체제를 통하여 제도적으로 공고화되어 있다. 한미연합방위체제는 “양국의 군사력을 통합 운영함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억지하고 유사시 효과적인 연합작전을 수행”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 귀속되어 있다는 점은 한미동맹이 쉽게 해체되기 어렵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세 번째로 한국과 미국의 정치제도의 유사성과 정치이념의 결속 또한 한미동맹을 유지시키는 중요요인이다. 동맹은 그 나라의 정체성과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한 요인이다. 우리가 미국과 맺고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명한다. 이와 더불어 철저한 반공주의는 이념 동맹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결속되어 있다.냉전이 끝나면서 한미동맹은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이익과 목표를 추가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세계적인 강대국이 존재하는 동북아 지역의 다극화 및 새로운 경쟁체제가 발현됨에 따라 이 지역 안보균형자 또는 조정자로서 한미동맹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 특히 중국과 일본의 역내 패권추구는 이 지역의 불안정 요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군사적 잠재력으로 “거대국가화”하여 국제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미국을 견제할 수 있어 국제정치를 주도하는 국가가 되었다. 현재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과 중국은 명실상부한 상호 최대교역국이라 할 만하다. 그만큼 경제적 면에서는 미국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 입장은 군사적으로는 미국, 경제적으로는 중국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상황에서 미·중의 미묘한 냉전관계는 이미 가속화되고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현 대한민국이 해결해야 할 외교 정책과 전략의 가장 큰 숙제가 됐다.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라면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한반도의 경우 강한 쪽에 편승하는 것이 안보를 보장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하지만 현재 한반도는 한·미와 한·중 관계 어느 한 쪽에도 긴장감을 늦추거나 한 쪽만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한 쪽을 포기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현실이다. 새우와 고래싸움이 발간된 2004에도 저자는 한국이 조만간 미국의 밴드웨곤에서 내려야만 할 때가 다고오고 있음을 직감했으며, 현 정부의 행태를 보면 미국이 아닌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중국의 부상이 남한에게는 대미편승을 연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본다. 스테판 왈트에 따르면 ‘아시아의 동반자들이 계속 중국에 대립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미국이 더 지원을 해야 하는가’가 현 미국이 직면한 문제이다. 만약 워싱턴이 너무 조금 지원하면, 아시아의 동맹들은 베이징과의 거래의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워싱턴이 너무 많이 지원하면, 아시아 동맹국들은 무임승차할 것이고, 미국인들은 자신이 대부분의 짐을 지는 것에 너무 피로해 할 것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철수 협박으로 동맹들이 더 많은 짐을 지게 할 것이지만, 한국과 같은 나라는 베이징과 친해지겠다고 협박하면서, 워싱턴이 그들의 이익에 더 많은 투자를 하도록 유도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행동들이 지나치게 추진된다면, 오해와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남한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다리기 역할을 잘 한다면 대미 밴드웨곤을 좀 더 지속할 수 있고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으로서의 외교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보인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 현실에서는 한국은 밴드웨곤에 안주하기보다 내적 자력구제에 힘써 힘의 극대화를 통해 생존해야 할 것이다.
『대한제국의 재조명』을 읽고-고종의 행보 중심으로-1. 서론『대한제국의 재조명』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왕조의 전제군주국으로 존속했던 대한제국이 갖는 성격과 의미에 대해 다룬 책이다. 19세기 후반 조선은 서양 제국주의 열강, 청나라와 일본이라는 외세로부터 국권을 침탈당할 위기를 맞이하였다. 고종황제는 그에 대항하기 위해 국내외에서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일제의 식민지로 전략하였고, 대한제국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대한제국에 대한 논의는 다른 과거사에 비해 이뤄지지 않았고 단지 주권이 침탈당한 불행하고 나약했던 시기로 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필자 또한 대한제국의 재조명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러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대한제국의 국가 성격에 관한 논쟁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고, 국권상실 100년을 맞이한 2010년도가 되어서야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이 한층 고조되었다. 현광호 저『대한제국의 재조명』은 2014년에 발간되어 총 3부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은 대한제국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대한제국에 대한 세계의 인식, 세계에 대한 대한제국의 인식 등을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다.2. 본론우선 고종의 인재등용 방식을 보면, 대한제국의 주요 정치세력은 황제 중심의 정국운영을 추종하는 황실측근파와 의정부 중심의 국정운영을 지향했던 의정부대신 집단으로 구분되었다. 고종은 의정부대신들이 입헌군주제를 지지한다는 의심이 있었기에 이용익, 김영준, 이학균 등의 황실측근파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황실측근파는 대체로 중인 이하의 신분 출신이었으며, 그들 사이에서도 상호 견제가 심했다. 필자는 고종은 자신의 입맛에만 맞는 인사등용이 대한제국 운영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용익이라는 인물만 보더라도, 그는 대한제국의 2인자로서 화폐발행사업, 차관도입, 철도사업 등 대부분의 사업이 그의 손을 거쳐 갔고 그가 근대화에 힘 쓴 내공은 크지만, 그의 사업은 체계가 없었고 서양에 대한 지식 또한 부족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그가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 이유 또한 내탕금을 이용한 사업으로부터 나온 수익을 황실에 충당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한제국이 전제군주국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황실 재정과 정부 재정을 구분하여 재원을 적재적소에 배분해야 나라가 운영되는 법인데, 재정권을 장악한 이용익은 정부 재원을 내장원과 궁내부에 이속시켜 황실재정에 막대한 팽창을 가져왔다. 물론 황실재정으로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하거나 외교 자금으로 이용한 경우도 많았지만 황제의 사금고로 변질된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는 당시 외교사절단으로 온 타국 외교관들도 이를 익히 알고 있는 사정이었고, 이를 주권 상실의 주된 원인으로 손꼽았다. 미국 주한공사 알렌은 고종의 자금 낭비와 쓸데없는 소비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고종은 외교 사절단 영접비용이나 건물 축조비에 자금을 쏟거나 황제권 강화 차원에서 서경 공사와 칭경례식 등의 황실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백성들에게 비용을 부담하게 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고종의 인사등용에서의 두 번째 문제점은 매관매직이다. 고종은 매관매직을 말리거나 처벌하지 않고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매관매직으로 고관이 된 이들은 자신들이 들인 돈에 몇 배 이상의 재산을 백성들로부터 수탈했고 민생은 그로인해 더 곤궁해졌다. 즉 한국은 지배층의 과대한 사익 추구로 공공 시스템이 붕괴된 것이다.필자는 『대한제국의 재조명』을 읽고 대한제국이 지녔던 문제점은 대부분 고종의 황제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야기됐었다고 느꼈다. 그는 세계추세를 거슬러 언제까지나 봉건적 전제군주로 남고 싶었고, 그렇기에 국정에 하나하나 간섭하며 황제권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는 이들은 그게 누구였던지 처단했다. 따라서 고종은 무력을 이용해서라도 민족주의·민주주의·근대화운동을 전개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하려 했고, 그가 비전문가에게 대신직을 제수하고 빈번하게 교체하는 데에는 전문성을 가진 대신들에게 해당 직책을 장기간 담당하게 하고 또 그들이 참석하는 의정부 회의를 존중하면, 영국, 일본 등의 내각제로 가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고종의 황제권 집착을 이용해 고종을 자극해 자신들의 정적을 제거하거나 황제로부터 총애를 받아 출세하는 이들도 많았다. 대한국국제의 반포의 목적 또한 전제군주제의 법제화에 있었다. 겉으로는 근대 헌법을 재정하는데 목표를 두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황제의 독재합리화가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황제권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고 국익과 국가의 미래를 더 중점적으로 생각했다면 대한제국, 더 멀리는 현재의 대한민국은 다른 미래를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그렇다고 주권침탈을 피하기 위한 고종의 노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고종은 대한제국 시기 주권침탈을 막는 수단으로 주로 외교에 주력했다. 제국주의 시대는 자국의 운명이 제3국들 간의 협상과 투쟁의 결과 즉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열강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제국주의 시대에서는 이익의 획득과 국가의 운명은 반드시 당사국간의 관계로 결정되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그것은 직 ? 간접적으로 다른 열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서양을 중심으로 한 근대의 그것과는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것이었다. 근대적 국제질서는 주권국가를 기본적인 요소로 하고 있었다. 주권 국가는 국내 문제를 독립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체의 권한을 가지고, 대외적으로는 국가간의 평등하고 대등한 관계를 기본요소로 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대내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 대외적으로는 외국과의 평등한 조약 관계를 수립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선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기는 하지만, 1876년 강화도조약(한일수호조약) 제1조에서 형식적으로 나마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고 규정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상징한다.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와 함께 고종은 견청(遣淸) 사절단의 보고 등을 통해 서양 국가들과 서양화한 일본의 세력확대를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고종의 대외 인식의 변화는 외교정책에 반영되었다. (이성환, 2010)그렇다면 이러한 세계구도의 변화 속에서 고종은 어떤 외교행보를 펼쳤을까? 고종은 한국의 국권을 위협하는 청, 일을 경계했고, 국권 유지의 수단으로 1880년대 구미 열강과 통상조약을 채결했다. 고종은 한국에 주재하던 외국공사를 통해 해외 정세를 파악했으며 그 다음에는 해외에 공사를 파견했다. 즉위 초기의 고종은 공사 파견을 통해 조약규정에 따라 국가주권을 확보하고 열강에 조선의 독립을 증명하려고 의미를 부여했다. 위에서 언급한 고종의 인식 변화와 같이 근대적 국제질서인 주권국가의 성격을 중시한 것이다. 청과 일 등의 방해로 몇 번의 좌절과 실패도 있었지만, 고종은 외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본이 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한국에 대한 점령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자 고종은 거중조정조항에 의거하여 서구 열강에게 중재를 의뢰하고자 했고, 서구 열강을 통해 한국의 중립화에 관한 국제협정을 체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거중조정이라 하면 당사국에 부탁의무가 있거나 제3자의 발의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 제3자의 해결안이 분쟁당사국에 구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외부에서 교섭을 원조하는 주선과 다르다. 또한 고종 본인만‘거중조정’조항에 매달렸을 뿐 타국은 이에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 국무장관 루트는 조미통상조약 제1조의 거중조정의 존재도 몰랐다고 한다. 거중조정 외에도 고종은 서구 열강을 통해 한국의 중립화에 관한 국제협정을 체결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중립화는 이미 1880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검토한 바 있었고, 대한제국이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추진한 외교방안이었다. 고종황제는 외압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중립화를 염원해 왔다.(현광호, 2004) 고종은 미국, 유럽열강과의 긴밀한 외교를 추진하였고, 국제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영세중립국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벨기에를 모델로 삼아 수교를 했고 멜렌도르프, 센즈 등을 고빙하였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의 중립화는 왜 실패했을까? 먼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 부족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중립화에 유리한 환경은 세력균형체제의 확립이고, 세력균형은 5개국 이상의 국가가 해당국가에 이해관계를 가지고 개입하여야 충족될 수 있다. 그런데 대한제국기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는 러시아, 프랑스, 독일, 미국, 영국, 일본이었다. 그리고 이 중에서 한반도에 깊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적극 개입한 국가는 러시아와 일본이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세력균형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이루어진 불안정한 것이었다.(현광호, 2004) 그 외에도 고종은 국제기구, 국제법을 지나치게 신뢰했고‘힘의 원리’가 작동하는 현실주의 패러다임이 지배했던 제국주의 시기 가장 중요했던 국방력이 너무나도 미약했다. 그리고 이런 노력 와중에도 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외국은 이런 상황을 이용의 대한제국의 많은 이권을 가져갔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 한일병합조약을 끝으로 대한제국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