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농장“... 봄이 되었는데도 복서는 살이 찌지 않았다. 채석장의 꼭대기로 오르는 비탈에서 커다란 바위의 무게를 자신의 근력으로 떠받치고 있을 때면, 굳건한 의지 말고는 그의 발을 버티게 해 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그의 입은 ‘더 열심히 일할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에게는 어떠한 소원도 남아 있지 않았다.”『동물농장』, 조지오웰, 동서문화사, 2021.12.25., p.330『동물농장』의 건장한 말로 등장하는 복서는 성실한 노동자다. 동물들을 지배하는 인간들을 물리치고 자신들만의 유토피아그리스어로 ‘아니다, 없다.’와 ‘장소’의 합성어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역이 될 수 있다.를 건설하겠다는 농장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동물들의 마음을 움직일 줄 아는 스노볼이나 처세술로 동물왕국의 지배자가 된 나폴레옹을 배제하고서 일반적인 성실한 동물을 꼽으라면 복서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는 책임감이 있었다. 그리고 암탉을 비롯한 농장의 동물들이 그러한 그의 행동과 모습에 진심으로 존경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나폴레옹의 시선에서는 이용하기 좋은 동물 중 하나였다.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복서는 성실한 노동자들을 표현했으며 소설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시골에서 도시로 몰린 유럽의 노동자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희망고문을 가지고 구세군이 마련해준 나무 틀에 잠을 자던 최소한의 노동권도 보호받지 못하던 시기말이다. 풍차를 건설하면 농장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나폴레옹의 말에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의 말에 순종하던 모습이 교차되기도 한다. 그러면서 정년보장과 연금이란 공수표에 쓰러질때까지 일하다 결국 말도축자에게 끝을 맺은 그의 마지막에도 술에 절은 돼지들에게 이용당한 그의 모습은 소시민 삶의 허무에 투영된다.모두가 복서와 아무것도 모르며 나폴레옹의 간계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모든 것을 돼지들에게 맡겨버리고 본인들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톱니바퀴로 살아가는 모습들은 소설이 나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다.이 책이 출판된지 어언 백여 년이 가깝게 지나온 지금에도 유효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도 공감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공감되는지 생각해 본 바, 몇 가지로 추론된다. 첫째, 소설 속 복서와 암탉 등의 소시민으로 비유되는 동물들의 삶의 모습들. 둘째, 나폴레옹과 같은 주변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자들에 대한 분노. 셋째, 과거에 쓰인 책이 현대에도 여전히 적절히 비유되는 상황. 들이 이 고전 도서가 아직까지 유효하도록 숨을 불어 넣어 준다.첫째와 같은 이유는 언제나 소시민들의 애환과 슬픔이 담겼다는 점에서 더 이상 언급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둘째, 셋째의 경우 이제는 조금 달리 보아야 되지 않나 생각한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나폴레옹이길 원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음에 질투를 느끼는 것이라는 것이다.승리자인 나폴레옹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복서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삶의 목적이 분명했다. 욕망이 있었으며 욕구 충족에 충실한 삶을 사는 돼지였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스노볼은 사회와 그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었고 그러한 체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둘의 관계는 인류 역사에서 몇몇 적절한 비유 대상들이 생각나게 하는 대립관계이고 동물농장의 상황 설정 상, 레닌과 스탈린이 먼저 떠올랐다. 역사가 쓰여졌듯이 승리의 여신은 스탈린의 손을 들어 주었고, 그의 공산화 정책과 잔인한 지도 정책은 본인이 서거할 때까지 아무도 자신에게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철저했다고 볼 수 있다.도덕적인 측면에서 스탈린은 폭정을 일삼으며 잔인한 한 인간이었지만, 스탈린 개인의 삶을 조망한다면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도자가 된 격이다. 그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나폴레옹을 대입해 보겠다.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 나폴레옹은 비난받아야 마땅한 존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니체의 저서 『도덕의 계보』 제 3장, 첫 문장은 이렇게 적혀있다. ‘나는 도덕을, 다시 말해 이제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찬양되어 온 모든 것을 의심한다... 나에게 ’선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이다.’ 헤겔의 철학 전반을 관통하는 한 단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모순성’일 것이다. 이상과 현실의 대립에서, 관계를 엮는다면 유일한 접착제는 ‘모순’이라는 단어만으로 가능할 것이다. 니체의 기존 기독교적 세계관의 비판과 고통을 넘어 진정한 ‘위버맨쉬’로 나아가야 함에 있어서 첫 출발점은 자신을 속박하는 이 세계의 기존 질서들의 파괴로부터 출발한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그의 저서 『이 사람을 보라』와 『도덕의 계보』는 마치 관습과 습관처럼 전해 내려오며 믿고 있는 도덕과 윤리에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마치 관습이나 종교적인 규범정도로 우리를 뒷받치는 도덕윤리는, 현실에서 모순되는 상황들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바, 이에 다른 시선이 아닌 마치 동물농장 속 암탉과 늙은 당나귀 혹은 복서와 같이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가기만 한다는 것은 탐욕스런 돼지보다 못한 삶을 본인이 선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스탈린과 나폴레옹은 보다 브루주아적이었고, 보다 솔직했으며 그렇기에 개인으로써 자신을 지키는 삶에 최선을 다했다.조지오웰의 동물농장은 당시 시대상을 우화로 녹여놓은 작품으로 순식간에 그를 베스트셀러로 만들어 준 계기가 된 책이다. 당시 시대상은 폭발적인 성장과 달리 암울한 개체의 인생이 저변에 깔려 개인의 희생으로 소위 가진 자들과 국가에 배불리는 기계로 전락했으며, 그러한 현실에 부당함을 일찍이 깨달은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에 반대되는 공산주의를 전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전파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그의 족적을 살펴보면 스페인 내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한 경력으로 보아 시대의 계몽가들이 그러했듯 유럽의 유령“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라는 세기의 명언 공산당 선언의 전문을 비유로 든 것이다.중 하나였다. 과학과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1차 세계 대전 전후로 전 세계에 크고 작은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으며 그때에 등장했던 새로운 철학의 등장, 실존 철학은 헤겔까지 이어져 오던 인간의 이성의 절대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피폐해진 개개인의 삶을 조망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물음을 제기하게 되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동시에 전체가 아닌 개체의 중요성을 일갈하던 분위기에 유럽의 망령들은 큰 힘을 얻게 되었고 경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본가들에게 영원한 적으로 남고 있다.이렇듯 인류사는 ‘영원한 투쟁’을 상황과 시대, 그리고 인물만 바뀌어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은 진부하고 지루하다. 새로운 것들도 반복되면 거부감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동물농장』을 읽으며 나폴레옹적인 사람이 되려 노력한다거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삶을 인생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직까지도 전체 속에서 나의 위치를 설정한다던가, 나와 다른 타인과의 협동이나 관계성 회복이라는 피로감에 매여 자신을 들여다보지 못하여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고전은, 또 다시 새롭게 읽힐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져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