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년 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인에게 인기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다. 2017년 러시아를 찾은 한국 관광객은 전년 대비 57.8% 증가한 25만 명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는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과 무비자 협정으로 자유롭게 여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루블화의 가치 하락으로 한국보다 물가가 저렴해졌다. 즉, 2~3시간의 비행과 비교적 저렴한 물가로 유럽의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인기 여행지가 되었다.이렇듯 극동·시베리아 지역은 한국인에게 관광지로 떠오르고 있다. 두 지역의 면적은 약 1130 으로 러시아 전체면적의 66%이며 인구는 2575만 명으로 러시아 전체인구의 18%다. 극동 및 시베리아 연방관구는 광활한 면적을 가진 만큼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다.러시아는 다민족 국가로 각 민족의 언어와 종교를 존중해주는 편이다. 그 예로 시베리아 연방관구에 있는 부랴트 공화국을 들 수 있다. 부랴트 공화국은 러시아인이 약 64%, 부랴트인이 약 29%이며 100개 이상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또한 공용어로 러시아어와 부랴트어를 사용하며 불교, 샤머니즘, 러시아 정교, 유대교, 개신교, 이슬람, 가톨릭 등이 있다. 주로 샤머니즘과 라마교를 믿었으나 1930년대부터 라마교 사원들이 사라졌다가 1980년대에 다시 불교와 샤머니즘이 부활하고 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러시아는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같은 유럽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런 사회와 문화를 보면 선입견이 깨지며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점이 관광지리적으로 이점이 있다.극동·시베리아 지역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의 역사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고구려와발해의 옛 터들, 구한말의 신한촌과 1937년 강제이주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특히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지역은 독립운동과 강제이주의 아픔이 여전히 남아있다. 신한촌의 박물관이나 관련 유적 등이 잘 관리가 되지 않고, 이곳에서 독립운동가의 자료는 잘 없을뿐더러 찾기도 힘들다. 오히려 이런 점이 대한민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더 잘 체감할 수 있고, 잊히고 있는 과거를 반성하며 이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러시아에서도 시베리아 지역은 겨울이 길고 매우 춥기로 유명하다. 이런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사는 소수민족이 있다. 바로 사하 공화국에 사는 에벤키족이다. 이들은 문명 생활보다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자연이 주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이런 대자연의 원시적 모습과 전통적인 문화를 느낄 수 있으며, 바쁘게 살아가는 한국인에게 색다른 영감을 줄 것이다. 한국이나 다른 해외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곳에서는 할 수 있다는 점이 극동·시베리아의 차별화 전략이 될 수 있다.
▨선사시대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비너스 유물농경사회 형성-씨족공동체-모권제 →부권제 사회(우크라이나 트리폴리예)금속자원 활용→ 다양한 금속제품 생산다양한 민족이 살았음검은 돌우라르투 국가 수립-B.C 9c , 연맹체 국가노예제有, 철기까지 지속키메리아/ 스키타이/사르마티아/ 고트/ 훈/아바르/ 하자르/ 폴로브치▨고대 루시(키예프 루시 이전)▲스키타이 제국(B.C 8~7)-흑해 지방의 초원지대에 유목민족-스키타이 족: 러시아인의 조상-특징: 유목민이면서 농경생활 유지 / 부족 연합체, 강력한 군대(기마병) 소유☞ 재산?부유함=馬,물질적 풍요(증거: 귀족의 무덤에서 화려한 금세공 발견) / 사르마티아 제국에 복속※러시아 영토에 살았던 민족들 중 최초로 역사에 기록된 민족 (헤로도투스-『역사』)▲사르마티아 제국(B.C 4~3)-스키타이와 같이 아시아의 유목민족-특징: 남부 러시아 지배(B.C 3末 ~A.D 3初) / 부족 연합체 /강력한 군대 보유(중기병과 경기병)-로마의 군사전략에 꽤 영향을 미침/ 남부 러시아 지배(B.C 3末 ~A.D 3初)제국 쇠퇴 후 로마 편입화 /고트족에게 멸망.당시 러시아의 초원과 북부 지역은 그리스와 이란 문화 번창(사르마티아는 이 지역 파괴X)그래서 그리스 문화가 스키타이족이나 사르마티아족에게 흘러 들어가기에 이름△고트족-게르만 족의 한 일파-특징: A.D 200-370년까지 러시아 지역 지배 / 항해술 발달 / 강력한 군사력 보유 / 훈족에게 멸망△훈족-흉노족. 터키 계통의 민족으로 몽골족과 우그리안족 요소 포함.-특징: 유목?기마민족 / 서유럽의 이탈리아까지 정복/453년 아틸라 왕 죽음으로 제국 분열? 쇠퇴 → 타민족과 혼혈, 동화 소멸됨△아바르족-몽골계 투르크 유목민족.-특징: 막강한 군사력 보유 / 몽골계 훈족·불가르족과 게르만계 등 여러 부족 복속.슬라브족 나타남△하자르족-터키어 계통의 아시아 민족-서기 7c에 동남러시아의 초원에 하자르국 건설-9세기 후반 쇠약해지면서 아틸이 키예프 대공국의 스뱌또슬라프 대공에 공격받아 국가 차 제도화, 키예프- 키예프 루시의 중심지, 수공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 비잔틴 교회에서 상당 부분 독립, 학교와 도서관 건립, 러시아어라는 공통 언어 사용하며 공통된 문화를 가진 통일성 확립.△키예프 루시의 분열1054년 야로슬라프 사후 다섯 아들들의 형제의 난 발생, 내란과 몇몇 독립 공국들로 분열.수즈달 공국/ 노브고로드 공국/ 갈리시아-볼린 공국/스몰렌스크 공국/ 폴로츠크 공국/ 페레이아슬라프 공국△키예프 루시 ‘해체의 시대’[수즈달 공국-가장 강력한 공국]1대 공후: 유리 돌고루키(긴 손을 가진 사람)업적: 모스크바 창건(1147년), 1156년 모스크바에 나무로 된 성벽인 크렘린 건축,1155년 키예프 공격-> 키예프 대공이 됨,돌고루키 사후(1157), 그의 아들 안드레이 보골류프스키 대공으로 등극 → 블라디미르로 천도⇒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으로 불림. 업적-블라디미르를 크고 아름다운 도시로 건설,[노브고르드 공국]특징: 커다란 상업(교역) 중심지로 발전, 독립된 봉건국가로서 독자적 화폐와 법률, 군대 확보,11-12세기 이슬람 최초의 큰 통일 국가 셀주크의 잦은 침공 → 비잔틴 제국과 루시 사이의 교역로 차단⇒상업 활동 크게 위축.☆루시의 사회적 성격-봉건국가지배계층: 귀족과 상인1. 대귀족(보야르): 영지 세습, 친위대 보유, 공후들 위협 보야르 회의결정을 따르게 함2. 상인계급: 소아시아 및 비잔틴 제국과의 무역 및 상업에 종사하며 재력을 쌓아 고리대금으로 이윤 착취피지배계층: 수공업자들과 농민3. 수공업자들: 도공, 피혁공, 대장장이, 무기공 등4. 소농민(스메르드): 자유인이였으나 차차 보야르에 예속, 농노화⇒대체로 공후와 기독교는 지배계층의 이익 대변.기독교는 피지배계층에게 공후가 하느님의 듯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가르침▨몽골-타타르의 지배(1240-1480)칭키스칸 사후, 바투에 의해 킵차크 한국건설 → 1240년부터 루시의 공국들 주권 상실 및 복종‘황금의 약탈자'(Golden Horde) 라고 불림♠야르리크:킵차크의 칸은 공689 섭정 → 총리직인 골리친 공후가 관리(중요한 역할)표트르는 권한없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 → 실질적인 군주가 되길 희망②1689년 스뜨렐쯔이의 반란 & 실패 → 표트르 피신(트로이츠키 수도원) → 정국의 파행⇒이를 통해 표트르가 권력 장악 ∴소피아는 동생에게 항복 후, 수도원 行[TMI] 뻬째르부르크 의미표트르의 도시?=베드로(예수의 수제자)③1694년 어머니 나딸리예 사망 & 1696년 이반 5세의 사망⇒ 표트르 1세 실질적인 짜르로 등극 (1696-1725) 단독재위♥뻬째르부르크의 건설♡1700년 터키와 강화조약체결 ⇒스웨덴과 전투시작 ⇒ 뻬뜨로빠블롭스크 요새 구축⇒뻬째르부르크 건설 ⇒ 천도(1712) (왜?-발트해로 나가는 출구 획득 및 부동항)[추가설명]귀족에게 프랑스어 사용권장[업적] -절대왕정의 시대1)생활 관습의 서유럽화-수염세, 긴 외투의 간소화, 무도회(야회) 권장, 서유럽식 문화의 생활화능력에 따라 선출-근대적2) 행정제도 개편: 상설 행정 기구(12행정원, 군무성, 해군성 등)를 만들고 14관등제도를 마련,호구세와 토지세 대신 인두세 징발 (재정수입을 위해)성문화 법전 제정, 차르x-페르(임페라=황제)3) 교육, 출판 개혁: 문자의 간소화(현대러시아어 정비), 많은 전문학교 건설(산술, 항해, 포병, 공병학교) 해양 아카데미와 같은 군사학교 등 건설, 숙련공 배출을 위한 기술학교,병원 부속 의학교 등을 세움, 지리 역사 연구, 지도 작성 및 시베리아 자원 연구, 인구조사, 러시아 최초 신문발행('베도모스찌'). 아라비아 숫자 사용 시작4) 종교 개혁: 종교령 제정, 공포 총주교구 폐지, 국가에 종교를 예속화.교회의 개혁과 사상의 변화(신→황제→신성 종무원;일반인→영혼 구제 & 교육 ☞인민5) 영토 확장: 발트해 점령, 유럽으로 나가는 해로 장악, 스웨덴과의 북방전쟁 승리, 유럽 세계로 편입ex) 나르바 전투(1700~1712)⊂국제적 고립주의 타파, 모든 분야 개혁-서유럽의 기술습득 →근대화⊃[표트르 대제 개혁의 부정적 측면]1. 농노783년 장악), 흑해 지배 4)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로 진출예카테리나 2세러시아지배계급을 위한 계몽군주- 러시아화서유럽화※귀족중심의 자유·평등·인권〓[푸가초프의 난: 1772~1774]최초의 농민 봉기(반란). 볼가강 유역에서 발생하여 당시 세력이 매우 컸음수보로프 장군이 제압했지만 예카테리나 2세 매우 놀라, 이후의 계몽사상 stop농민들이 농노제에 맞서 일으킨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반란, 봉건주의의 바탕을 흔들어 놓음.혁명적 반봉건주의 사상이 빠르게 자라나게 만든 중요 계기표트르 대제예카테리나 2세대내정책적극적 교육 장려 → ‘베도모스티’ 1703년 등장서유럽 서적 번역 권장계몽주의 이론 참고해 입법회의 소집→러시아 사회전체를 통제할 새로운 법전 편찬 위해 노력→귀족의 권한, 권력행사 제한 의도.?귀족들의 필사적인 반발로 인한 실패 · 해산지주, 토지귀족에게 막대한 토지와 농노 부여토지=세습 재산→지주, 부르주아지 이익 위해 봉사.근대화 작업으로 농노, 노동자 큰 부담→아스트라한, 불라빈 반란황실 호사, 귀족 태평성대로 인한 국유지 증가→농민 농노 전락 ⇒저항,폭동?푸가초프 반란(대규모 농민전쟁)대외정책1700년 북방전쟁 시작러시아 vs 스웨덴발트해 지배권을 둘러싼 21년 전쟁1721년 니스타드 강화조약 체결동방 정교회 믿는 러시아 민족과 우크라이나 민족의주거지역을 폴란드로부터 뺏으려 함.1768-74 러시아-투르크 1차전쟁1787-92?러시아-투르크? 2차전쟁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대립 이용 →폴란드 분할 가담공통점: 수 많은 민중들의 고통과 희생 위에 군림▲여제의 시대 이후 ~ 제정 러시아의 몰락?파벨 1세-9번 째 군주표트르 3세와 예카테리나 2세의 아들/ 42세에 황제 등극-표트르 1세의 법령 폐지 : 황제가 후계자를 선택할 권리 갖음. ☜왜?-엄마가 표트르 대제 계승해서-장제 상속제 선포: 여자는 황제 금지-예카테리나 2세가 1775년에 폐지한 중앙집권적 행정 기관 복원-지방정부에 대한 관료적 통제 강화.-귀족 권력 제한 ← 귀족들의 반감(귀족 지식인 투옥시킴.③교육: '정교신앙, 전제정치, 국민성(슬라브주의)'의 세 원칙 표방함? 황실에 충실한 인간만을 주조함 ☞ 그의 절대권을 굳히는데 일차적 목표시민혁명 이후, 철학교육과 해외유학을 중단시킴.군사교육 강화: 자유주의 전파를 막으려농민들의 자녀들은 중학교나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함.러시아 법전이 정리· 편찬.?1833년, 스페란스키는 1649년의 법전으로부터 니콜라이 1세까지의 법전을 망라하여「러시아 제국의 법률 전집」45권과 이것을 요약한「러시아 제국의 법률 개요」15권을 간행*** 국내의 자유주의적 사상 탄압 + 국외의 혁명운동 탄압①폴란드 독립운동, 헝가리 독립운동, 프랑스 혁명 등 사사건건 개입함.TMI: 알레스카 팔린 이유크림전쟁 패배로 전쟁부담금 지불을 위해 알렉산드르 2세가 알래스카 팔음⇒ '유럽의 헌병' 이라는 별명 얻음②지중해로의 진출 시도: 터키와 1853년에 전단 개방.∧ 영국이 이에 反 → 영국 +프랑스, 터키 지원∴1854년부터 러시아와 크림전쟁?세바스토폴(러, 주요 해군기지)을 중심으로 전개1855년, 영?프 연합군에게 패함 ⇒1856년 3월, 파리에서 강화 조약 체결(패배 이유: 낙후된 봉건 농노제의 러시아가 서유럽의 자본주의·공업화·산업화 즉, 무기의 근대화에 敗)⇒이로써 러시아는 지중해 및 발칸 방향으로 남진이 저지, 흑해가 중립화됨. 국위에 손상 입음.③남 카자흐스탄을 병합 →베르노예 요새 건설(알마티)크림전쟁 패배로 깨달음-크림전쟁 그만두고,러시아 개혁하려함?알렉산드르 2세- 1855~1881 / 해방기개혁정치1861, 농노 해방 → '해방자 차르' 존칭 얻음1861 2월 19일, 농노해방령에 서명 → 3월 5일에 공포1862, 예산 제도 개혁1864, 젬스트보 의회(지방자치기구)를 신설?성과 지구에 각각 젬스트보 의회를 신설함.?구성-농민계급, 지주계급 및 도시민계급의 대표 (일정한 재산을 가진 사람만 투표권 有)임기 3년, 대부분 지주계급에 의해 지배됨? 사법제도 개혁1870, 지방 정부 개편1874, 국민(나뉨)
서양 중세사 보고서- 파리 대학, 대학의 거울 -Ⅰ. 중세대학ⅰ. 중세 대학의 형성 배경ⅱ. 중세 대학의 기원Ⅱ. 중세 파리 대학ⅲ. 파리 대학의 형성과정ⅳ. 파리 대학의 자치권 투쟁과 특권ⅴ. 학문의 대가 아벨라르를 따라서ⅵ. 파리 대학의 구조와 교과과정ⅶ. 파리 대학의 학생과 생활Ⅲ. 중세 파리 대학의 의미ⅷ. 중세의 파리 대학의 역할ⅸ. 성균관과 파리 대학Ⅳ. 소감문ⅹ. 대학이란 무엇인가?대학의 역사이석우 지음한길사 출판대학사가 통사(通史)라면, 이 책은 시대사로 중세의 대학에 대해 다루고 있다. 대학사보다 읽기 편하고 그림 자료가 많다. 또한 당시 학과목, 교육방법, 교육 과정, 교수의 위신, 학생들의 실생활 등 중세 대학의 모습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중세문화이야기박은구 외 1인혜안 출판앞서 두 책이 ‘대학’에 집중되어 있지만 이 책은 중세를 전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당시의 정치적인 배경, 학문, 신학 등에 대해 특히 고딕예술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한 이야기식의 풍부한 설명과 많은 삽화로 두 책보다 읽기 수월하다.대학사이광주 지음민음사 출판대학의 내부보다는 외부(이념, 제도, 구조 등)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학 성립 이전의 고대 교육부터 베를린 대학 및 미국 대학까지 폭넓게 설명해서 대학사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여러 대학을 볼 수 있었지만 내용이 적어서 아쉬웠다.참고 사이트위키백과참고 논문파리대학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고찰/ 이정민중세 대학의 설립과 발전/ 박승찬대학의 유형별 기원에 관한 고찰/ 김영희학문간의 연계성/ 박승찬Ⅰ. 중세대학ⅰ. 중세 대학의 형성 배경중세 대학의 성립에는 역사적 여러 배경이 있다. 중세 이전에 고대 학교들이 더 이상 기능 할 수 없게 되자, 수도원은 자신의 공동체에 학교를 제공할 필요성을 느꼈다. 수도원 학교는 그 지역에서 유일한 교육기관이었고 수도자들을 위한 내부 학교와 모든 일반인들을 위한 수도원 부속의 외부 학교를 수도원 바깥에 세우게 되었다. 점차 교육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하던 교회의 간섭 의해 조합의 자치권이 인정되었다. 이 연합체들은 대체로 주교좌성당 학교에 병설되었지만 독립적인 조직 형태를 취했다. 초기에는 교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지만 세속적인 이들은 제도적으로 교회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대학 발생 초기인 12~13세기에 우니베르시타스(universitas)라는 용어는 배우는 학생들과 가르치는 교수들로 구성된 조합, 즉 “교수들과 학생들의 연합체”를 의미했다. 이는 사람으로 구성된 집단을 가리켜 사용한 용어이며 어떤 집단의 위치 또는 장소와는 무관하게 사용되었다. 스투디움(studium)은 모든 지역으로부터의 학생들이 받아들여지는 장소를 의미했다. 스투디움의 뜻은 세 가지로 단순히 특정한 나라나 지역으로부터가 아니라 적어도 모든 지역으로부터 학생들을 끌어들이거나 청할 수 있는 학교, 고등교육의 장소(신학, 법학, 의학이 가르쳐지는 곳) 그리고 이런 과목들이 상당수의 사람에 의해, 적어도 다수의 선생들에 의해 가르쳐지는 곳으로 해석되었다.Ⅱ. 중세 파리 대학ⅲ. 파리 대학의 형성과정파리 대학은 학문 태동의 중심지로 중세 유럽 대학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런 명성을 얻게 된 것 아니었다. 12세기 카페왕조가 수도를 파리에 두면서 파리가 점차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오히려 1100년 무렵까지 다른 북유럽의 도시들에 비해 학문의 도시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샤르트르, 라옹, 랭스 같은 주변도시가 더 높은 명성을 갖고 있었다.11세기 들어 도시가 발달하면서 교회의 주도권이 수도원보다 도시 교회 쪽으로 이전되었다. 이에 따라 교육의 장소도 수도원 학교에서 도시성직자(재속성직자)가 담당하는 교회의 부속학교(특히 주교좌 교회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이 학교에는 지금의 총장에 해당하는 챈설러 혹은 에콜라트르의 관할 아래 있었고 대표적으로 노트르담에 속해 있는 대성당 학교가 있다. 또한 외부인들에게 비교적 열려 있다는 점에서 수도원 학교와는 구별된다. 노트르담을 중심으로 한 주교 학교에서는 주로 신학을 가르쳤다. 한편으로, 것은 1180년 프랑스 국왕 필립 2세가 파리 대학에 학도보호장을 부여한 것과 관련해서이다. 1200년 파리에서 벌어진 학생과 관리 사이의 유혈 사태 이후 필립 2세는 파리의 학인을 세속법정에서 제외하고 파리의 주교법정에 귀속한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 문서는 파리 대학의 특권을 보장하는 최초의 문서이다. 또한 그는 교수들이 도시를 떠날까 염려하여 교회법적 특권과 사법적 특권이라는 법률적 보호를 제공했다.필립 2세의 지원에 이어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도 파리 대학에 교수자격면허 취득에 부과되는 수수료를 면제하는 특권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1215년에 교황 사절 쿠르숑 로베르투스에 의해 대학의 학칙이 인가되었다. 12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대학 대헌장을 발표하여 대학의 특권과 자유를 재확인했고 파리 대학의 학생조합은 공인을 받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문서로 파리 대학이 스스로 필요한 율령과 조례를 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짐으로서 13세기 동안 대학의 자치를 누리며 발전할 수 있었다.【자치권】1229년 학생과 경찰 간의 유혈 사태 이후 파리 대학이 결정적으로 자율성을 획득했다. 파리의 대학생들은 섭정을 하던 대비 카스티야의 블랑슈 및 그녀를 지지하던 교황사절에 대한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더욱이 학생들과 파리 시민들 사이에 벌어진 폭력에서 학생이 사망하고 이에 대해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자, 파리 대학 전체는 학업을 중단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교수들은 1229년 3월부터 1231년 4월까지 학생들을 데리고 파리를 떠났다. 그리하여 엄청난 경제적 손실로 1231년 성왕 루이와 블랑슈는 교수조합에게 학교 규정 제정 권한, 강의 정지 권한, 해산의 권리를 인정했고 대학이 법인체로 인정받아 자율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권한】우선 학위 수여 및 강의 허용의 권한은 대학과 교회 당국 사이에 민감한 문제였다. 이 권한은 노트르담 주교좌성당 참사회에 속했던 대학 감독에게 있었다. 파리 대학의 교수들은 저술활동의 제약이나 복 권한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민법과 종교적 사법권도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다.【세력균형의 이동】 13세기 말에는 로마교황권이 약화되는 반면 프랑스 왕조가 봉건제적 세력을 극복하고 중앙집권적·신정체제적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그에 따라 대학의 문제 해결은 교황보다는 국왕의 협조를 얻는 쪽으로 흘러갔다. 더구나 대학이 국제적인 성격이 점차 지역대학으로 변하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 왕 필립 4세 단려왕과 로마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사이의 갈등은 처음으로 왕과 교향 중 한편을 택해야 했다. 이때 왕은 세금면제와 대학의 특전 허용 및 재확인, 안전을 보장해주는 호혜적 입장을 강화해나갔다. 즉 왕권의 강화는 대학의 자율적 선택의 폭과 운신의 공간이 상대적으로 좁아진 것을 뜻했다.대학의 독립성은 백년전쟁으로 침해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들의 조처도 대학의 자율과 독립성을 박탈하고 제한하는 쪽이었다. 1473년 샤를 7세는 대학의 자율적인 재정권을 빼앗고, 전쟁을 위한 세금과 모금에 부과된 액수를 지불하도록 했다. 1445년에는 대학의 독자적 사법권을 박탈하여 모든 소송사건과 법률사항을 고등법원에 예속시켰다. 1470년 루이 11세는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그들이 왕의 신민임을 서약하도록 하여 그의 통치 하에 있음을 재확인 시켰다. 마침내 1499년 루이 12세는 대학이 갖는 강의정지와 해산권을 폐지하였다.ⅴ. 학문의 대가 아벨라르를 따라서1100년 무렵까지 파리 학교들은 아직 명성을 얻지 못했다. 학문의 터로서 위상이 서게 된 것은 아벨라르의 파리 체류 시기와 일치하다. 그만큼 그는 파리의 교육계와 신학이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학교에 논쟁의식을 도입시켜 여러 교수와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교육방법, 논쟁 전개 등이 성공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교수들이 그 방식을 따라갔다. 그렇기 때문에 파리는 새로운 첨단적인 학문의 제공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고, 위상을 높여준 아벨라르의 공헌 가장 컸다고 평가된다.젊은 시절 피에르 아벨라르는 프랑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중세 대학에서 교수들의 자의식이나 교회와의 관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던 것은 신학부였다. 신학부는 신앙에만 의존해서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성서 외에 또 다른 진리 판단 기준으로 이성을 관련시켰다. 의학부는 의학 중심의 자연과학 학부였다. 자연과학이 아직도 전문학으로 발전하지 못해 4학부 중 가장 부진한 학부였다. 또한 파리의 의학부는 살레르노나 몽펠리에 의학부가 누렸던 범유럽적인 명성을 한 번도 얻지 못했다. 한편, 법학부의 강의는 교회법으로 한정되었다. 1219년 교황칙서에 의해 종교적 순수성의 명분으로 시민법 연구가 금지되었기 때문이다.【교과과정】중세의 대학은 인문학부에서 이루어진 ‘입문적인 학문들’의 교육을 토대로 새롭게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의 학문들을 계속 수용·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런 훈련과정을 통해 상위 학부의 교육과정에서 활용 할 수 있는 기초적인 학문 교육을 완수 할 수 있었다. 법학, 의학, 신학, 철학 사이의 활발한 토론들은 이런 공통적인 기초 교육으로 실현 될 수 있었다. 논리학을 비롯한 철저한 철학 교육과 각 학문 분야의 기초를 이루는 다양한 기초 학문들의 충실한 교육을 통해서만 참다운 전문인을 양성 할 수 있었다.파리 대학의 교과과정은 7자유학과로 구성되는데 크게 3학(trivium)인 문법, 수사학, 논리학과 4과(quadrivium)인 산수, 천문, 음악, 기하학으로 나뉜다. 인문학 강의는 7자유학과의 기본 틀 안에서 자유롭게 이루어졌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프리키아누스의 문법은 인문학 교수들의 강의에서 항상 다루어졌다. 대학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했고 교과과정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교양 과정의 정점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2년간의 철학 연구였다.학생들의 과목선택은 오늘의 대학처럼 자유롭지 않았으며, 교재 중심의 교과목이었다. 때문에 오랜 동안 인정받아오고 사용해오던 교재를 중심으로 진행했다. 공부의 형태는 주석이나 토론 및.
목차0.주제1.서론2.본론3.결론, 4.참고 문헌?출생B.C 63년 9월 23일 로마에서 출생했다. 그의 고향은 로마시 남쪽40km에 위치한 라티움(Latium)지역의 소도시 벨리트라이(Velitrae)이다. 원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G. Octavius)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아버지인 옥타비우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렀다.(작은 옥타비우스). 그의 아버지는 평민이지만 부유한 기사가문 출신이었다. 여러 관직을 겸하면서 가문에서는 처음으로 원로원 의원이 되었다. 두 번째 결혼한 아티아에게서 딸 옥타비아와 아들 옥타비우스를 얻었다. 옥타비아누스의 어머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조카 딸이다. 즉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외종조부이다.?외모? 생활 ? 성격키 173cm에 엷은 금발과 약간 곱슬이었다. 역사가 수에토나우스는 잘생기고 기품있다고 말했다. 여러 기록을 보면 그는 온화한 외모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생활은 다른 귀족(정치인)에 비해 검소했다. 집은 크지 않았고 화려한 대리석 장식도 없었다. 한편 그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허약하였는데 목과 눈이 안 좋았고 동상, 습진, 비염, 류머티즘, 결석 등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이러한 잦은 외병에도 불구하고 당시 평균수명이 30세였던 시절에 그는 78세까지 살았다. 또한 그의 절친한 친구인 아그리파는 매우 건강하여 병에 시달리지 않았으나 50세에 생을 마쳤다. 이는 옥타비아누스의 철저함을 보여준 것이다.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항상 신경을 쓴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소식(小食)한 것이나 포도주를 즐기지 않은 것도 허약한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는 모호한 형식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격은 그의 정치 활동에서 잘 드러난다. 연설습관을 보면 완벽주의 적 성향이 드러난다. 그는 웅변술에 뛰어났으나 언제나 준비된 원고를 읽었다. 혹시나 말하려는 내용을 잊어버릴까 했기 때문이다. 심지토니우스가 현금을 내놓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그는 카이사르의 부동산을 경매로 팔아 재원을 마련했고 남부 이탈리아 식민시에 정착한 제대군인을 중심으로 3천명을 모았다.?안토니우스와의 첫 번째 분쟁 ?얕보지 마라?카이사르의 유산과 군대 습득 후 로마로 입성했지만 안토니우스의 하대와 원로원의 계략으로 옥타비아누스의 입지는 약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려 했다. 원로원에서는 안토니우스의 군사적 행동을 물리치는 법안을 서둘러 통과시켰지만 원로원에는 그에게 대적할 군대가 없었다. 이 사건은 이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원로원은 기원전 43년 1월 1일을 기해 옥타비아누스를 10년이나 일찍 원로원 의원으로 임명했고 군대의 사령권을 부여했는데, 이 권한은 옥타비아누스의 군령을 합법적으로 만들었다. B,C 43년 4월, 안토니우스 군은 무티나 전투에서 원로원과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했다. 안토니우스를 격파한 옥타비아누스 대신 데키무스 브루투스에게 엄청난 사례금과 집정관의 직속 군단의 사령권을 주려고 하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을 소모품으로 본 원로원을 적대시하고 반감을 가졌다. 전쟁 이후 B.C 43년 8월 19일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한편 안토니우스는 친(親)카이사르파인 레피두스와 동맹을 구축하였다.?제 2차 삼두정 ?깨어난 본능?기원전 43년 10월, 평민들에게 통과된 법안에 따라 크게 지지받으며 볼로냐 협약에 따라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제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안토니우스는 동방 속주를, 레피두스는 스페인?아프리카 속주를 관리하였다. 그러나 로마시 관리자로 있던 레피두스를 반역자로 모함하여 실각했다. 그 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대립이 계속되었다.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의 실패로 정치적, 군사적 군위가 실추되어 이집트, 동방 속주를 중심으로 이를 회복하려 했다. 이때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동맹을 통해 서 제일가는 시민이 통치한다는 제 1시민의 정치 또는 元首政이라는 ‘Princi-patus’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養父와 같은 운명을 피하려고, 國制上으로는 공화정부의 형태라는 포장지로 교묘하게 위장한 신체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는 “나는 국가(res publica)를 내 자신의 권력에서 로마원로원과 인민의 손에 맡겨 버렸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의 말을 로마인민의 대표자인 프린켑스(Princeps), 즉 아우구스투스 자신과 로마 원로원이 로마의 속주들을 공동으로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로마 공화정은 끝이 나고 옥타비아누스에 의한 전제정체제로 바뀌었다.오랜 내전에 시달리던 로마 인민들은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였다. 그들은 안전과 질서가 이루어지고 놀이와 빵을 공급해 준다면 누가 어떤 형태로 통치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독재를 혐오하던 원로원의 귀족들조차 당대의 평화와 풍요를 즐기면서 자신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질서정연한 강력한 정치 체제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공화정 체제에서 여러 대리인들에게 오랜 기간 수탈당해왔던 속주민들은 폭군이 아니라 주인 격인 한 사람이 지배하는 정부 형태를 원하고 있었다. 이러한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아우구스투스는 위장된 군주제를 실시하면서 로마 인민, 원로원 의원들의 반발을 최소화 할 수 있다. 이 위장된 군주제를 로마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경험이나 지도력에서 나온 겸손으로 받아들였다. 로마 인민들은 부정부패로 얼룩진 평민 회의가 더 이상 제국을 통치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제의 형태와 용어들을 그대로 유지함으로써 인민들이 공화제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이끌었다. 즉 그의 권력에 의한 질서가 유지되는 현실을 자연스럽게 수용하였다.?공화정과 전제정 그 사이에서아래의 표는 옥타비아누스의 치세를 각각 공화정과 전제정 측면으로 비교한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전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있던 인물이다. 그렇기 전자를 원로원이 관할하게 하고, 후자를 그 자신이 관장한다고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이집트 같은 거대한 주요 속주들을 ’군대주둔의 속주‘로 지정해 자신이 통치하도록 한 것이다. 표면상 그가 내세운 구실은, 원로원이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제국의 가장 좋은 몫의 과일들을 모아야 하는 반면, 그 자신은 많은 노력을 들이고 위험부담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참된 목적은, 원로원 의원들은 비무장시켜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두고, 그 자신만이 군대를 소유할 수 있게 하려는 데에 있었다.B.C 23년 7월 1일 그는 돌연 콘술직을 사퇴하였다. B.C23년 초, 프리무스(M. Primus)의 재판사건과 카이피오(F. Caepio)와 무레나(A.T.V.Murena)의 아우구스투스 암살음모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두 사태는 그에게 최초의 정치위기였다. 그는 정치위기가 발생하게 된 주요인은 그의 끊임없는 콘술직의 장악이었다고 판단했다. 현 상태대로 그냥 밀고 나간다면 양부인 카이사르와 같은 운명을 면치 못하리라고 느꼈다. 즉 귀족신분, 특히 공화정 고수주의자들의 예민해진 감정을 누그러뜨려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그가 꼬리(정치적 용단)를 내리자 귀족들은 그 조치들을 환영했다. 그래서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종신호민관의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것은 콘술의 권한들을 충분히 보상할 만한 것은 못되었다.B.C22년, 평민들은 아우구스투스에게 독재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그가 그것을 사양했다.다음에는 독재관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것마저 사양하자 다음에는 그를 종신 켄소르로 선출하려 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그것도 거절했다. B.C22년∼B.C19년까지 로마시 평민들은 계속해서 그를 선출했는데, 그는 그때마다 거절했다. 로마시 평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확보한 뒤에도 아우구스투스는 켄소르직, 콘술직을 계속 거절했다.아우구스투스는 비록 콘술직을 거부했지만, 사실상 그의 지지 세력이 콘술이 되게 해서 원로원 내 로원 신분의 특권화가 진행됨으로써, 그와 원로원 귀족들과의 수직적 관계는 더욱 분명해지게 되었다. 이로써 공화정기에 누리던 원로원의 권의는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정치권력에서나 권위에서나 아우구스투스의 영향은 더 커졌다.?황제의 임무 ?나는 다르다?아우구스투스는 정치인의 기질을 갖고 있지만 로마를 위해 효율적으로 통치하였다. 내전이 종식되고 평화가 이루어지자 60개의 대군단을 대폭 감축하여 28개 군단만 남기되 지휘 체계를 단일화하였다. 오랜 기간 전지에서 병역 의무를 마친 퇴역 장병들을 정착시키기 위하여 이탈리아와 속주 전역에 많은 토지를 구입하여 이들에게 분배하였는데,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된 퇴역 장병들은 민간이 신분으로 돌아갔다. 또한 악티움 전쟁 승리로 이집트에서 반출한 수많은 전리품과 비옥한 나일평원을 개간하여 대 농장을 조성하였다. 여기서 거둬들인 곡물 수입으로 이탈리아의 도로, 신전, 극장, 상하수도를 건설하고 보수하는 간접 시설에 아낌없이 투입되어 경기는 상승 국면에 진입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공언한 대로 벽돌로 된 로마를 대리석으로 치자할 수 있게 된 것이다.B.C14·9·7년에 화재가 발생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도시 전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로마 시 전체를 주요 도로에 따라 14개의 지구로 재편성했다. 각 지구를 할당받은 정무관들에게 담당 지구 내에서 발생하는 화재, 치안, 도로를 관리하게 하였다.A.D 6년에는 소방대를 창설하였다. 많은 전란으로 곡물이 부족해지고 라티푼디움이 경영되면서 자영농은 붕괴되고 사치는 만연해졌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곡물을 공급했고 화폐를 지급하여 자영농을 도왔고 근검절약과 사치 금지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아우구스투스가 “세입이 부족할 때는 언제나 내 재산을 국고에 넣었다. 그것이 10만 명분 이상의 세금에 해당되는 때도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자산은 국고에 투입되었다. 그는 곡물 무상 분배, 신전 건축과 보수, 도로 건설과 보수, 도수관 건설 등의 경비를 사재로 충당하였다. 더욱이 대중적인 경기를 하였다
창의?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예비교사들에게 요구되는 역량과 함양 방안-수업 개발자로서의 교사의 역량과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 방안부제: 생각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지,생각 한 것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목차Ⅰ. 서론1. 2015 개정 교육과정의 특징Ⅱ. 본론1. 교사의 역할2. 변화된 교사의 역할에 요구되는 교사의 역량3. 교사의 역할 수행 실현 방법4. 창의성 함양을 위한 수업5. 상상력 함양을 위한 역사교과 수업Ⅲ. 결론1.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을 위한 교사의수업연구 필요성과 교사의 역할 변화Ⅳ.참고문헌Ⅰ.서론1. 2015 개정 교육과정의 특징교육과정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존의 교육방식은 고용될 사람을 생산하는 교육으로서 지식전달 위주 및 대량생산과 고용을 위한 정형화된 교육이었다. 그러나 이번 교육과정과 미래의 교육은 고용할 사람을 기르는 교육으로써, 개인의 재능, 다양성, 창의성을 강조한다. (Zhao, 2012)이번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창의성’ 함양에 주안점을 두었고 처음으로 창의성 함양을 위한 역량을 제시하였다. 즉, 전대(前代) 교육과정의 중점은 교과, 생활, 학문, 학교 등 당장 시급해야 할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2015 개정 교육과정은 4차 산업혁명에 따라 새로운 인재상을 제시하였고 그 산물이 창의성이다.2015 개정 교육과정의 기본 방향은 모든 학생들이 인문, 사회, 과학 기술에 대한 기초 소양을 함양하여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 기술 창조력을 갖춘 창의?융합형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과정이다. 이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 등 처음으로 총 6개 역량을 제시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창의성’에 중점을 두고 교육과정을 구성하였다. 한편 다음 시기 교육과정의 주안점은 ‘상상력’이며, 미래의 인재에게 요구되는 역량은 ‘문제를 찾는 능력’이다. 문제를 찾는 능력이 확장된 것이 ‘상상력’이다. 개념이 유기적인 관계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통찰이 촉진될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해 보다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다.(차윤경, 2014)교사는 수업 개발자로서, 교과서의 지식을 전달하는 기존과 달리 학습자에게 학습경험을 제공함으로써 이번 교육과정의 목표(창의성)를 달성할 수 있다. 즉, 학습자가 수업에서 배운 지식을 재구성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창의?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수업을 개발해야한다.2. 변화된 교사의 역할에 요구되는 교사의 역량1번에서 언급했듯이, 수업 개발자로서 교사의 역할에 요구되는 교사의 역량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호기심이다. (중등)교사는 자신의 전공 교과 외에 다른 교과에도 관심을 두어야 한다. 융복합교육을 구성하기 위해 호기심을 갖고 교과 간의 연관성 및 사회문제나 현재 이슈를 관찰해야 한다. 두 번째는 개방성이다. 개방성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요 요소다. 개방성은 편견을 배제하는 것이며, 변화와 다름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다문화적이며 다양한 개성과 가치관이 충돌하는 시대로, 수업 내용에 있어서 이를 어긋나지 않는지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세 번째는 창의성이다. 창의성은 수업 개발자로서 교사 역량의 핵심이다. 창의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는 시행착오 정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실패를 감수하고 많이 도전할수록 창의적인 결과를 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티나 실리그, 2017) 더욱이 교사는 지속적해서 교육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개발하여 학생들이 진정성 있는 학습경험을 하고 창의성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네 번째는 의사소통 능력이다. 의사소통 능력은 학생들의 요구조사를 통해 국가수준의 교육과정과 교실수준의 교육과정의 틈을 줄이는 데 필요하다. 실질적으로 교사가 교육 현장에서 요구사정을 가장 빠르게 반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생, 학부모, 지역 사회 등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자세와 공감 능력이 요구된다. 이를 토대로 교사는 교육 프로그램에였다. 또한 얼음땡 놀이에 여러 규칙을 추가하기도 하였다. 즉 아이들은 더 신나고 재미있게 놀기 위한 여러 방안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는 다 같이 놀이를 즐기기 위해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의사소통과 피드백을 통해 방법을 변형하기도 한다.한편, 한국 학생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진행하는 2015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 결과에서 ‘협력적 문제해결 능력’이 세계 최상위권으로 평가되었다. 협력적 문제해결력이 높다는 것은 다수의 주체가 협력해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이 우수하다는 의미이다. 특히 PISA 결과에서 한국 학생들은 다른 나라 학생들보다 남의 말을 잘 들으며, 팀워크가 일의 효율성을 높인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이를 종합해보면,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이전략가나 놀이연구가의 모습을 보였고 PISA결과를 통해 학생들은 타인의 말에 경청하며 협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학교에서 이런 환경을 조성하지 않았을 뿐, 이미 학생들의 능력과 역량은 준비되어있다. 만약 교사가 적절한 과제를 제시하고 공유의 플랫폼의 환경을 조성해 주면 학생들은 충분히 협력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협업 및 의사소통 능력, 창의성과 더 나아가 상상력을 기를 수 있다.4. 창의성 함양을 위한 수업20세기는 정보암기력이 뛰어난 인재를 요구했지만 21세기는 정보관리능력과 아이디어창출능력을 가진 창조적 인재를 요구하고 있다. 암기교육이 도전이나 창조를 만드는데 한계성을 가진 교육이었다면 검증보다는 확증에 의한 창조에 도전하는 교육으로 바꿔야 하는 시대이다.(강충인, 2015)같은 사건이나 사물에 대하여 자신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분석하여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교육을 통해 창조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다. 창조는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내는 생각으로 논리적 교육에서 성장한다. 논리적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과정에서 창의성을 신장시키기 위해 융합교육으로 융합적 사고에 의 현재 위인 차이점 알아보기(선정조건)-미래에 위인의 역량에 대해 알아보기-자신의 위인을 소개하고 위인전 표지와 목차만들기(자기 자신 혹은 자기 이외의 사람)기타 증거:-발표하기3단계: 학습 계획학습활동:수업목표 및 본질적인 질문 제시위인 선정 조건에 대해 이해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역량)에 대해 이해창의성을 함양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환경도 중요하다. 그러므로 교사는 수업 개발자로서 창의성을 신장시킬 수 있도록 환경 조성에도 신경 써야 한다. 밑에 표는 책 인지니어스를 참고하여 교실수준 교육과정에서 창의성을 함양시킬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요소내용환경(교사 역할)지식상상력을 발현하는 데 필요한 연료교과 속 지식상상력지식을 아이디어로 변형시키는 촉매학생들의 상상력태도창조성에 시동을 거는 불꽃교사의 과제 제시지원상상력을 구체화하는 지원군학습경험 제공환경상상력을 외부적으로 구현하게 도와줌창의적 체험학습, 자유학기제문화위 5요소를 연결하는 사슬5. 상상력 함양을 위한 역사교과 수업가. 역사교과의 교과 목표 및 역량역사교과의 항존적이며 궁극적 교육목표는 비판적 사고와 삶에 관한 폭넓은 이해와 안목을 키우는 것이다. 즉 다양한 역사적 자료를 탐구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끼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교과의 교육목표를 달성하면서 창의?융합형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역사교과에 요구하는 역량과 연결 지을 수 있다.2015 개정 교육과정에 ‘역사’교과의 역량은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역사’ 과목은 역사 사실 이해, 역사 자료 분석과 해석, 역사 정보 활용 및 의사소통, 역사적 판단력과 문제 해결 능력, 정체성과 상호 존중을 중요한 역량으로 삼고 있다.(사회과 교육과정, 2015)역량의미역사 사실 이해과거의 사건, 인물, 구조, 변화 등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고 중요한 역사 용어나 개념을 이해하는 능력역사 자료 분석과 해석역사 자료를 읽고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역사 지식을 구히 탈피하지 못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교과도 정립되지 않은 역사관과 역사적 정의로 여전히 논란과 혼란이 반복되고 있다. 이렇듯 역사교육은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구조 파악이 결핍되어 역사적 의미부여 보다 사건 자체를 기억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암기 위주의 역사학습이 강조되었다.(최상훈, 2007) 또한 공적문헌 사료 위주로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는데 제약이 있었다.(최상훈, 2007) 정치사 중심의 역사서술로 지배층 중심의 역사를 학습하여 삶의 모습을 배우는 데 어려움이 있다. 결과적으로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게 되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여 역사적 통찰력 및 비판적 사고력을 함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앞서 언급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에 맞는 개별적 해결책이 필요하다. 우선 교사(수업 개발자)가 교실수준 교육과정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크게 2가지로 ‘공적문헌 사료 위주의 역사 서술’과 ‘역사적 맥락 및 구조 파악’이다. 첫 번째로 교과서는 주로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서술한다. 이는 지배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제한적 사고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어느 사대부의 일기, 편지 또는 중국이나 일본의 사료를 추가로 제시해야 한다. 다른 방법으로 역사적 사건으로 신문을 만들 때, 기사 제목을 우/중도/좌 경향의 신문사 입장에서 지어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이 편협된 시각이 아닌 균형 잡힌 시각으로 역사를 볼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여러 관점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학습한 지식을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최종적으로 관련된 자료를 분석하고 비판하는 종합적인 탐구 활동을 통해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도록 지도해야 한다. 즉 이를 통해 역사 자료 분석과 해석 능력을 기를 수 있다.두 번째 역사적 맥락 및 구조 파악이다. 이는 역사에서 제일 중요한 능력으로 역사를 미시적에서 거시적 관점으로 보는 것이다. 즉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