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에서의 청구권, 배상인가 구걸인가1992년, 정신대와 관련한 보도가 줄을 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정신대에 직접 관여했음을 밝히는 문서 또한 발견되었으며 일본총리가 이를 인정하고 피해자의 개인적인 보상청구가 가능함을 밝혔다. 하지만 이 때 당시 발견된 문서들은 방위연구소와 일본의 국회도서관에서 발굴된 것으로 전혀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어떠한 목적에 의해 드러났던 것이다.일본총리 방한 즈음에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무역적자 해소와 기술이전 등을 교묘하게 피하면서, 한국인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이끌었고 그 불만을 정화시켜주려 했던 명백한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은 과거 식민지지배를 합법화한 위에서 피해의 보상도 경제협력의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하였다.진정한 식민지지배 청산을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 일제지배 기간 동안에 계속해서 민족해방투쟁을 계속하였고, 이에 대해 배상을 받아야 한다. 또한, 식민지지배 동안에 일어난 인적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하며 이러한 청산이 늦어진데 대해서 가중된 보상 또한 받아내야 한다. 이에 앞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식민지지배의 부당함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이승만정권은 정부수립 직후부터 대일배상요구선언을 하고 배상을 요구하였지만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이후에 한일간의 문제는 청구권의 문제로 제한되어 버린다. 일본은 오히려 한국정부에 대하여 한국정부에 두고 온 일본정부의 재산에 대하여 청구권을 요구하였고, 청구권문제를 엄밀하게 법적근거에 한정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주장은 식민지지배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당시의 법또한 합법화 하고 있다.1965년에 결국 무상3억, 유상2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과 식민지지배에 대한 합법화를 교환함으로써 청구권협상이 종결되고 만다. 우리는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는 단 한마디도 받지 못한 채, 5억달러의 돈으로 식민지배 합법화까지 묵인해주게 된다.과연 이 돈은 일본의 보상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구걸이었을까? 흔히 드라마에서 외제차를 끄는 엄청난 부자가 지나가는 행인을 쳐놓고 아무런 반성의 기미 없이 수표 한 장을 손에 쥐여 주고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의 도리로서 먼저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괜찮냐는 말 한마디는 건네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리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인간이라도 사과의 말 한마디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일본은 5억달러라는 돈으로 30년간의 우리 민족의 아픔을 갚으려 하였다. 우리는 30년간, 아니 한국 역사 내내 조상들이 겪은 수모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아픔을 짊어지고 세계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은 이제 바로 우리 대학생들이 되었다. 우리는 지난역사에서 일본정부의 ‘야만’에 대하여 어떻게 대응 할지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일제하 조선?동아일보는 민족지였나소위 우리 사회의 상위계층 약 5%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사상을 대변하기 위해 언론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악용하고 있다. 그들이 나머지 95%의 일반 시민들을 통제하고 사상을 지배하는데 언론만큼 이용하기 쉬운 것이 없다. 우리가 흔히 조?중?동이라고 불리는 3대 신문의 배후에는 전부 기득권층이 존재하고 있다. 그들 신문이 과연 서민의 입장을 대변해줄지,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해 줄지는 뻔하다.놀라운 사실은 조선?동아일보가 자신들이 일제하에서 민족지였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책의 내용을 통해 조선?동아일보의 일제하 활동을 자세히 보면, 조선?동아일보가 가장 먼저 내세우는 사실이 총독부로부터 압수?정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민족해방에 관한 내용이 아닌, 본질에서 벗어난 이야기가 많았다. 즉, 이들은 민족해방을 위해 시민들을 고취시키는데에 그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압수?정간을 받았다는 사실을 내세워 당시 독자층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이들은 민족해방가가 아닌 단지, 대중의 민족심을 악용하는 잔인한 사업가였다. 확실한 것은, 이들 신문이 자리를 확보해 가면서 압수?정간을 당하는 일이 확연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이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이들은 이제 영리를 위한 또다른 사업을 벌이기 시작한다. 동아일보에서는 이광수를 이용하여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하였으며, 조선?동아는 각각 한글보급운동과 브나로드 운동을 실시한다. 이 또한 민중운동의 성격이 아닌, 단지 문맹층을 타파하여 독자층을 늘리고 동시에 타협주의를 보급시키기 위한 것이었다.1930년대에 조선?동아일보는 이제 노골적으로 일본제국을 옹호하는 신문이 된다. 이봉창 의사의 폭탄투척사건에 대해서 이봉창을 범인 취급하며, 천황폐하라 일컫는자의 안위를 살피고 있다. 도대체 어느 민족지에서 이봉창 의사 의거를 테러행위로 기록한다는 말인가? 이들은 후에는 일본 제국주의를 위한 전쟁에 젊은이들을 앞다두터 내몰게 된다.조선?동아일보가 주장했던 민족해방활동은 오로지 그들의 사업이익을 위해 총독부의 검열을 교묘히 이용한 것 뿐이었으며, 이들은 노골적으로 친 매체로서 일본제국을 옹호하는데 충성을 다하였다. 시민들의 눈이 되어야 할 신문이 자신들과 특정계층의 입장을 옹호하게 된다면 대다수 비판적이지 못한 시민들은 그들의 논리에 끌려다니게 된다. 지금 현재 우리의 언론은 과연 진실만을 말하고 있을까? 만약, 미디어법으로인해 언론의 독과점이 심해진다면 우리는 한 가지 관점(특정계층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사회의 면면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승만 정권기 미국 경제원조의 본질우리는 현재 미국을 6.25때 남한을 위해 함께 피를 흘려주었으며, 건국에 있어 우리를 먹여살려 준 형제의 나라라고 칭하고 있다. 외교에 있어서도 미국은 대한민국의 제1동맹국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정말로 아무런 대가없이 우리에게 희생하여 주는 형제의 국가일까?마치, 땅따먹기 게임처럼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느 한 순간 돌변하여 약소국을 위해 무상원조를 해주기 시작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단지 그 방식만 바뀐 것일 뿐, 원조 또한 그들의 국가 쟁탈전 중 하나였다.원조행위를 피상적으로 바라보면 일방적인 희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원조를 통해 원조국에서 얻는 이익이 무엇인지를 보면 그 본질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원조국은 단순히 박애주의에 입각하여 자신을 희생하였다기보다는, 원조국의 과잉물자를 정부에 판매하여 이를 다시 원조물자로 사용함으로 인해서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는 잉여실현의 한 수단임과 동시에 향후에 민간독점자본의 잉여가치 창출과 그 실현을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로, 한국에 제공된 원조는 실제로 군사적 성격을 많이 띄고 있다. MSA원조와 ICA원조는 한국이 국방비로 자신의 능력 이상의 금액을 사용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플레이션의 위기에 있으며 산업구조상의 개편이 저해되고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제공된 것이었다. 즉, 군사적 목적의 원조를 통해 국방비를 지원하고, 수혜국의 정치?경제적 안정으로 인해 그들의 시장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원조는 원조국의 국가자본수출의 한 형태임과 동시에 수원국 내에 국가자본 형성의 물적 기초가 된다. 이러한 원조의 일차적 수혜자는 자본가 및 상인계층으로서 이들은 원조물자를 저가격?저환율로 확보하여 독점적 축적을 하였고, 이들은 결국 오늘날의 재벌형성의 기틀이 되었다.국가간의 관계에 있어 대가없는 희생이란 절대로 없다. 국가는 철저하게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행동한다. 단 1%라도 그들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나 또한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미국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원조해 주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과연 미국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이바지하는 박애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국가인가? 그들의 원조로 인해 우리가 단기적으로 이익을 본 측면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는 미국의 시장개척에 이용당한 셈이다. 우리는 현재 미국의 제1동맹국이라 하지만, 사실상 미국의 국익에 따른 결정에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우리는 냉철한 판단으로 국익을 도모하며 강대국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다북한 공산주의 혁명의 주역이었던 김일성을 생각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를까? 가장 먼저, 그는 북한의 제1대 주석이며,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또한 현재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확실히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그의 반일민족해방투쟁 활동에 대해서는 그 진위를 놓고 공방이 계속되어 왔다. 우리가 진정 민족통일을 이루고자 한다면, 북한의 역사 또한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북한의 역사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김일성을 가짜라고 확실히 믿어왔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단이 낳은 왜곡된 사회적 관념의 파편이었으며, 반공이데올로기 조작의 산물이었다. 김학규의 자서전을 통해 보면, 김일성은 민족주의운동단체인 조혁군에 있다가 공산주의로 사상을 전환하게 된다. 그는 한국공산청년 수십명을 조직하여 찾아와 항일에 참여할 수 있게 무기를 요구하였다. 이상조의 글을 인용하여 보면,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보천보전투의 조직?집행자이다.김일성은 또한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였을 당시 조선일 청년들을 이끌고 안도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이후에 각 유격대들은 재편성되어 유격대대로 발전하였고, 왕청현 유격대대에서 김일성은 정치위원으로 활동한다. 1934년 3월 말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결성되었고 김일성은 이곳에서도 정치위원을 담당한다.또한 김일성과 함께 교도려에서 생활했던 유성철에 따르면,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교도려에서 조선인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교도려에서 김일성은 만주와 국내에 무장 소부대를 파견하여 정찰, 일만군과의 전투, 항일구국의 선전 및 조직사업을 전개하였다. 이후에 교도려에 있던 조선인들은 조선공작단을 결성하여 해방과 국가건설에 대비하였으며, 이곳에서 김일성은 정치군사 책임자였다.
8?15는 진정 해방의 날인가우리는 해방의 날 8월 15일을 기념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날 8월 15일에 해방이 되었을까? 아니면 우리는 현재, 완전한 해방을 이루었을까? 우리의 손으로 직접 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도대체 왜 백범김구는 조선이 해방되던날 땅을 치며 통곡하였을까?우리는 1945년 8월 15일에 우리의 힘이 아닌 미국에 의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한반도는 반으로 갈린 채 남쪽은 미국이, 북쪽은 소련이 점령하게 된다. 우리는 해방 직후에 다시 분단이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소련과 다르게 미국은 남한의 사회변혁보다는 현상유지를 목표로 삼았다. 미국은 자신들의 지지세력을 친일파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친일파가 숙청되지 못한 채 친미파로 옮겨가게 된다. 당시 UN은 미국의 영향력하에 있었고, 소련이 제안한 미?소 동시철수안을 부결시켰다. 결국 남한에는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분단이 고착화된다. 5?10를 통해서 남에는 이승만 정권이, 북에는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남북의 문제는 지리적문제를 넘어서 정치적 분단으로 이어진다. 결국 8월 15일은 해방의 기쁨보다는 분단의 아픔을 더욱 많이 안고있는 역사적인 날인 것이다.해방 직후에, 남한 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이유로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였고, 이는 또 다른 식민지배를 뜻했다. 일본의 지배는 미국의 지배로 변하였고, 친일파는 친미파로 변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프리스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이승만은 미군정의 조직,법,관료,정책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미군정의 법령을 그대로 받은 것은 미군정이 용인한 일제의 법까지 계속해서 사용한다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일제의 관료뿐만 아니라 법까지 그대로 이어졌으며, 이승만 정권은 단지 미국의 군사독재정부를 계승한 정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