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도 학기 중간과제물(온라인제출용)교과목명 : 현대의서양문화o 과 제 명 : 모더니즘 건축 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이론이 발전하는(발전한) 역사적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각각의 건축 이론이 보이는 특징에 대해 구체적인 건물들의 예를 들어 상술하시오.- 이하 과제 작성서 론-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 및 생겨난 역사적 배경2. 본 론-모더니즘 건축이론와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이론의 정의 및 각 건축 이론이 발전하는(발전한)역사적 배경-모더니즘 건축이론의 특징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론의 특징3. 결 론4. 참고문헌서 론-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 및 생겨난 역사적 배경모더니즘(modernism)이란 1920년대 초 교회의 권위 또는 봉건성을 비판하며 널리 근대화를 지향하고 과학과 합리성을 중시하는 근대적 감각, 예술상의 여러 경향을 말한다.기계문명과 도회적 감각을 중시하는 현대풍을 추구하며 예술상의 모더니즘은 표현주의, 미래주의, 다다이즘, 형식주의 등 추상적 초현실적인 경향의 여러 운동을 일컫기도 한다.즉 모더니티의 이념은 지금 현재를 의미하는 현실성, 현재성에 그 가치를 두고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가 고대와 중세, 즉 과거와는 다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종교개혁이나 산업혁명 등 진보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중세와 근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이념을 가진다.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모더니즘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용어로서 보편성의 거부, 존재의 탈중심성, 경계의 함몰, 전통적 가치 거부, 깊이 없음, 의미의 불확실, 원본이 없는 복제, 역사성의 상실 등의 특성을 갖는다.이는 고급문화와 저급문화를 구분하는 낡은 기준을 거부하는 것이며 서구의 합리주의가 붕괴된 이후 사용된 용어이다.그러나 문학과 예술분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용어 자체가 보여주듯 모더니즘과의 관계안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 개화했던 모더니즘은 인간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환경을 창조하아니라 사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를 방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모더니즘 이후 발생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후기현상 또는 모더니즘이 극단적으로 발전한 형태로 바라보는 관점과 모더니즘과의 의식적 단절이나 비판적 반작용으로 발전한 형태로 바라보는 관점 등이 있다.분명한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반적인 대중매체와 연계하여 표면적인 이미지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심층적인 것들을 보지못하며 언어보다는 이미지, 문자로 된 책보다는 텔레비전 화면, 담론보다는 형상을 더 추구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에서 깊이 있는 내면 성찰이나 관조가 거의 가능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그렇다면 이 개념들이 건축물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아래에서 더 깊이 살펴보겠다.2. 본 론-모더니즘 건축이론와 포스트 모더니즘 건축이론의 정의 및 각 건축 이론이 발전하는(발전한)역사적 배경-모더니즘 건축이론의 특징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론의 특징 (구체적 건물의 예)건축에서 모더니즘은 새로운 기능주의 원리로서 그것이 만들어지는 본래의 용도에 충실하며, 건축 또한 산업제품처럼 유용하고 기능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저 고급스럽고 우아하기만 한 복잡한 주름 장식 같은 것에서 과감하게 탈피하여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공간과 심플한 선을 즐긴다는 원리로 건물을 짓자는 생각이었다.1920년대 이래 모더니즘은 새로운 시대상을 형성하여 왔으며 60년대 후반부터 1차 기계 사회의 산물인 근대건축이 급속히 발달된 후기산업 사회에서 병폐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새로운 양식으로서 탈 근대적인 건축의 형태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1890년대에 미국에서는 아무런 기능이 없는 외관 장식을 다 없애고, 값싼 강철과 강화된 콘크리트, 전기 엘리베이터 등을 이용한 초고층 건물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개념화된 것은 특히 건축분야에서 시작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 특히 그 중에서도 인터내셔널 스타일의 건축 양식에 대한 비판과 도전으로 말미암는다. 특히 성보다는 수용에 의한 통일성을 새로운 건축 디자인의 개념으로 제시하기도 하였다.(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1977)에서 젱크스는 모더니즘 건축이 산업화에는 기여하였으나 도시의 복합적인 문화공간들을 파괴하여서 비인간화와 소외문제를 더 심화시켰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모더니즘 건축의 기계적 은유, 대량생산 패러다임, 획일성에 반발하여 의미의 다중화, 지역성의 이해, 이중코드화, 지역적 전통의 해석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그리하여 포스트 모더니즘건축의 가장 큰 특징은 건축에서의 역사적 연속성과 표현에 대한 중요성의 회복에 있으며 공시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건축과는 달리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과거의 여러가지 생활양식을 강조하면서 전통과 역사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한다.20세기 모더니즘의 사회 상황은 18세기 말~19세기에 이르면서 공장의 출현과 함께 빠른 교통수단이 등장하게 되었고, 새로운 미디어와 문화들이 창조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교통과 통신수단의 등장에 따라서 사람들은 도시의 기능에 대해 깊게 고민하게 된다.그래서 모더니즘에서의 건축은 기능과 효율을 중시하게 되고 이러한 주제로 인해 19세기부터 건축물속에 많이 보였던 장식적 요소들이 19세기 부르주아들의 가식과 허영이라고 비판되었고 ‘아돌프루스’는 현대건축에서 장식을 죄악시하고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현대 건축의 거장인 ‘르코르뷔지에’ 또한 이런 현대건축의 주제와 동일시하면서 이후 건축에 있어서 장식은 사라지고 기능만이 더욱 강조됨을 말하였다.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바우하우스’는 19191년~1933년 사이에 존속한 독일의 디자인학교로서 그란드 듀칼색슨 예술 아카데미와 듀칼 색슨 공예학교를 합병한 건축가 월터 그로피우스가 세워 ‘바우하우스’라고 불리기 되었고, 이는 집을 짓다의 뜻을 가진 독일어 ‘하우스바우’를 거꾸로 조합해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본 건물은 학생들에게 완벽한 작업 환경을 제공하고 모더니즘 건축의 전수를 구현하는 본관 건물을 설계하도록 하였으며, 각 공간마다 기능수 있도록 통유리로 벽을 대신하여 외부에서 내부를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또 모더니즘 건축물에 속하는 미스반데어로에는 공간은 바닥면이 가장자리에서 꺾여 올라가서 외부에서 연속적으로 높은 벽을 만드는 구조를 구상하였고 콘크리트 오피스 빌딩 디자인 계획안을 제일 처음 구상하기도 하였다. 벽은 두께를 가진 선으로, 창은 얇은 하나의 선으로 만들어 공간이 사각형의 입방체 모양을 벗어나 확장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자유로운 벽의 위치와 위계가 없는 공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선과 면을 활용한 평면도를 사용하였다.이렇게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 특징인 기능과 효율에만 너무 치중한 결과 거주민들의 환경심리나 감성이 무시당하게 되었고,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 인물인 로버트베추리는 이런 모던건축이 모두 비슷한 모습의 단조로운 보편주의라고 비판하면서 이것을 반대하게 된다.그리하여 각기 특색을 지닌 지역성을 강조하고, 모더니즘 건축에서 배제되었던 건축의 장식주의를 다시 부활시키게 된다. 필립존슨과 버기가 설계한 뉴욕의 AT&T 건물이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을 설명하는 대표적 예가 될 수 있다.고전주의적 석조건물처럼 위장한 벽과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정면을 보아 전체적인 대칭과 요소 간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골조위에 돌을 덧입혀서 고전주의 석조건물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때로는 아무런 기능적 필요가 없이 과거의 형태를 차용하기도 하며 콘크리트보다는 여러가지 다른 재료들로 장식을 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사각형 형태를 비틀고 왜곡하여 상징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특히 AT&T 건물은 영국의 가구 디자인풍 곡선장식을 패러디하여서 모던건축에 활용함으로 과거와 현재의 스타일, 엘리트와 대중의 취향을 동시에 접목시키는 ‘이중 코드화’기법을 아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또한 마이클 그레이브스가 설계한 포틀랜드를 포스트 건축물의 자부심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건물은 포스트모던의 용어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 대표적 건물이다. 다의적인 코드를 사용하고 고전적인 이미지를라스터와 같이 색체와 고전적인 요소의 모방을 통해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건축물이다.또 이탈리아 광장에 있는 찰스 무어가 건축한 건축물 역시 고전과 상업적 경향, 지역적 특성과 이국적 양식을 무대와 같은 구조물로 모두 결합하여 만든 광장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건출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프레그 아소나 하우스, 오리글리오 하우스, 모르고테 하우스 등 포스트모던의 특징들로 보는 정면성과 대칭성 지역적 토착성, 파스텔 색감의 외피 등을 볼 수 있다.대표적으로 1997년 완공된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 역시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물인데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20세기 인류가 만든 최고의 건물이라는 극찬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7280여 평대에 지어진 이 미술관은 상자 모양이라는 건물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리고, 미술관 외관의 주된 외장재료인 스페인 그라나다산 석회석과 신소재 티타늄을 사용하였다.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는 티타늄의 금속 패널과 구불 구불해서 춤을 추는 듯한 자유로운 외관으로 인해 어느 방향에서 보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신선하고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있다.3. 결 론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은 기능주의, 기하학적 조형, 자유로운 공간구조 채용 등을 들 수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적인 특징은 구조주의, 동적표현과 우연, 다원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개념을 추구하며 건축물에 적합 시켰다.모더니즘 건축은 산업 혁명 이후 새로운 건축술이나 재료 건축운동 따위를 배경으로 한 건축이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근대 건축의 사고 방식이나 표현 방법을 초월하려는 새로운 디자인 운동인 것이다. 이는 기존의 모더니즘을 모조리 부정하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의미보다는 또 하나의 연장선으로서 모더니즘의 한계에 다양하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4. 참고문헌- 현대의 서양 문화_ 김태우,민유기,박구병,박준규,백영경,손화철,여국현,이용철,이태주,이희수,장일 공저- 네이버 지식백과- 클릭서양건축사 (예경제5집
1. 플라톤과 그의 사상(1) 플라톤 : 플라톤은 아테네출신이며 귀족출신으로 귀족출신이면 보통으로 하는 정치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성년기에 들어서 소크라테스의 문하에 들어가 그가 장려하던 토론의 열렬한 참여자가 되었다. 일생을 통하여 그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탐구 정신과 목표와 방법의 감화를 받았다. 그는 정치 생활은 하지 않았지만 아테네에 아카데메이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학교를 창설하였고, 이것은 역사상 ‘아테네의 네 학교들’ 중에서 최초의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요성에 있어서도 가장 으뜸가는 것이었다. 세상의 평판에 의하면 이곳에서 그는 철학적 문제에 관해 강의도 하고 또 토론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사람들에게 개인 생활이나 국가 문제에 있어서의 지침이 되리라고 생각된 원리들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플라톤의 철학은 그 표현 형식이 대부분이 철학자들과는 판이한데 그의 말에 의하면, 철학이란 다른 학문과 같이 논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오직 긴밀한 정신적 교제를 통해서만 사람의 영혼 속에 불꽃처럼 점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철학적 문제들을 철저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모색한 많은 을 저술하였다고 한다.(2) 플라톤의 덕에 관한 사상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많은 분야 중 플라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것, 즉 그를 다른 분야에까지 이끌어 간 핵심적 분야는 윤리학이었다. 플라톤이 사람다운 훌륭한 삶을 다루는 데 있어서 기반을 이룬 것은, 양립할 수 없는 다른 견해들과 함께 이미 그 이전부터 희랍의 도덕적 전통 속에 간직되어 있던 개념이다. 이 개념이란 어떤 것의 좋은 상태는 그 사물의 가장 성숙한 모습, 즉 가장 완전히 발전된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에 있어서도 역시 좋은 상태란, 그가 가진 잠재적 모습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에다가 특별한 명칭을 붙이고 있는데 플라톤이 사용한 희랍어로는 ‘아레테’라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흔히 ‘덕’이라고 번역한다. 플라톤이 말한 문맥상의인간의 선 내지 덕은 일종의 조화인 것이다. 적절한 지도와 현명한 계획을 가지고 질서가 지배하는 조화된 짜임 속에서 잘 조절된 갖가지 관심의 대상을 얼마든지 성취해 나갈 수 있다면 훌륭한 인간이며 결국 완전히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3) 플라톤의 국가론과 선한 인간에 대한 사상어떤 것의 좋은 상태는 그 사물의 가장 성숙한 모습, 즉 가장 완전히 발전된 모습에 있다고 하는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을 고찰함에 있어 하나의 유추 법을 사용하였다. 플라톤의 말에 의하면 국가(도시국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확대된” 하나의 인간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이 일반인 보다 더 크다는 까닭 때문에 관찰하고 분석해 보기가 좀 더 용이한 것이다. 국가 안의 사회적 계급, 이 계급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관계,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사회적 지위에 맞는 직분을 수행하도록 교육하는 방법, 사회적인 여러 가지 계급에 특유한 덕과 전체로서의 국가에 특유한 덕, 이러한 모든 유추의 주요점은 인간다운 훌륭한 생활을 이해하는 데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플라톤의 유추의 출발점은 국가라는 것은 분업의 원리에 따라서 조직된다는 점에서 개인들의 단순한 집합체와 다르다고 하는 주장이다. 국가에는 다른 사람들의 수요나 오락이나 위안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인 생산자 계급이 있고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서 국가를 보호하는 동시에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생활을 통솔할만한 약간의 사람을 선출할 필요가 있음에 전사 계급이 있으며 그 밖에 일부 사람들은 정책을 결정하고 시민의 복지를 위해서 계획하는 지배자 계급이 있다. 이 지배자들의 일은 전사들의 방위와 수호할 목적을 밝혀 주는 동시에 국가 전체를 위하여 생산자들의 사업을 건실하게 해줄 조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 이렇게 국가는 생산자, 전사, 지배자의 세 계급으로 형성된다. 그러나 국가에는 많은 단계로 우열의 차이가 있으며 국가가 완전무결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올바로 질서가 잡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에 필요하다고 명시해 주는 목적을 충실하게 이행하여 감을 말하는 것이다. 절제는 국가 전체를 통해서 누구나 지니고 있어야 할 덕으로 어떤 일부의 사람에게만 요청되는 용기와 지혜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균형의 원리이며 모든 계급의 이해 관심의 정당한 표현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절제야말로 자기 자신 속에 있어서의 그리고 한 시민으로서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에 있어서의 한 인간의 도덕적 조화인 것 이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정의의 덕을 다른 덕들과 동등한 또 하나의 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덕을 모든 계급과 모든 사람이 다른 덕들을 발휘하고 상호간이나 전체에 대해서 필요한 모든 직분을 완전히 수행 했을 때, 다른 덕들이 함께 모여서 이루게 될 절정의 것으로 여겼다. 이 정의의 덕 때문에 다른 덕들로 생기는 것이며, 또 다른 덕들은 모여서 이 정의의 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네 가지 덕을 관념상으로는 구별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는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플라톤은 국가의 유추를 점차로 개인에게로 적용하여 갔으며 사회적인 세 계급은 ‘영혼의 부분’, 즉 인간의 본성의 세 요소로 표시했다. 생산자 계급에 대비되는 것으로 인간의 의식 속에 발동하고 있는 욕망이나 감정, 욕정을 든다. 전사 계급에 대비되는 것으로는 기개가 있는데 이것은 정력적인 기백이나 기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배자 계급에 해당되는 것은 지정 내지 이성, 즉 판단하고 예견하고 비판하고 아는 인간의 능력이다. 완전한 인간이란 이 세 가지 면이 뚜렷하게 각기 특색을 나타내면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국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개인에 있어서도 기초적인 세 가지 덕은 결국 질서 잡힌 전체의 훌륭한 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3) 플라톤의 인식론플라톤 철학의 중심 사상은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개별적인 것과는 달리 지성으로써만 알 수 있는 대상이며 고정적, 불변적이고 시간의 경과에 손상되지 않는 것이며 따라서 영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이데아가 인식의에게 이데아의 실재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하였으며 이데아를 인식하지 않고서는 자신을 개선하거나 우리 주변의 다른 것들을 처리하거나 하는데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에서 이데아 설에 대하여 제기되는 것으로서 해결책이 없어 보이는 반론들을 고찰하고 난 후 이데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정신이 지향할 바 그 대상을 가지지 못할 것이며, 또 그와 함께 대화의 가능성마저도 그 근저로부터 파괴시켜 버리게 될 것이라고 쓰고 있다. 인간은 비록 누구나가 깨닫고 있지는 못할지라도 두 개의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셈이 된다. 즉 개별적 사물들과 개별적 사건들로 되어 있어 완전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저급한 세계와 모든 대상이 완전하고 불변적이고 청정한 고차원적 이데아의 세계와의 두 세계에 동시에 살고 있다는 것 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숙명적으로 ‘육체라는 감옥’ 속으로 들어와서 개별자의 세계에서 살게 되기 이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다고 한다. 태어나기 이전의 인간의 영혼은 불사적인 신 및 순수한 이데아들과 더불어 천상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들이 육체 속에 갇히고 개별자들의 세계 안에서 살게 됨으로써 이데아들을 망각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은 다른 모든 이데아를 이성의 포괄적 체계로 체계화하는 일은 최고의 원리, 즉 원리들의 원리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잘 이룩될 수 가있으며 이 최고의 원리가 되는 것은 ‘선(善)의 이데아’라고 주장하였다. 어떠한 것도 그것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능이나 이상적 실현인 좋은 상태(善)에 비추어서 보기 전에는 정당하게 인식되지 않으며 또 다른 것에 비해서 그것만이 지니는 가장 의의 깊은 위치를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2.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사상(1) 아리스토텔레스 : 그리스 북부의 한 반도 출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경험적인 학문에 대한 강렬한 경향에 물들어 18세에 아테네로 와서 20년 동안 플라톤의 제자로 머물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적인 발전 요인이 개별 존재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고명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논리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논리학은 어떤 방식으로 주장의 정당성이 통찰될 수 있는지를 명시하여야만 하며 따라서 학문적인 증명 방법을 제시하여야만 한다. 미리 주어진 참다운 전제에서 도출된 그러한 명제만이 오성에 의하여 절대적으로 참답게 인정될 수 있다.(3)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데아는 사물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될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 안에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데아는 사물을 비로소 현상으로 불러들이고 사물에게 형상을 부여하는 것으로 더 나아가서 이데아는 정지해 있는 존재자가 아니고 이 세계의 동적인 힘이며 구성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라는 표현을 ‘형상’이라는 개념으로 대치시킨다. 형상은 사물 안에서 작용하는 원리이고 또 형상은 사물의 본질이지만 사물 자체는 아니다. 사물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형상 이외에도 재료 또는 질료가 필연적인데 형상이 없으면 사물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질료가 없어도 사물은 불가능 하다. 만일 형상이 사물에 있어서 운동을 부여하는 움직이는 원리라면 질료는 움직이지 않는 움직여진 원리이다. 질료가 없으면 형상은 현상으로 나타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형상이 없으면 질료는 현상으로 나타날 수 없다. 질료는 그 자체로 아무런 실재도 소유하지 못한다. 질료는 모든 것에 대하여 순수한 가능태 이며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이 생길 수 있는 공허한 기체이다. 형상은 순수한 최고의 능동태 또는 활동이고 이것에 의하여 사물은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형상이 질료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움직이게 하고 형태를 부여함으로서 개물이 형성된다. 이러한 형성에 있어서 형상이 질료보다는 한층 더 높은 의미를 가지는데 질료는 전적으로 수동적임에 비해 형상은 능동적인 부분이다. 형상을 부여하며 형상이 부여된 본질 형상으로서 형상을 현 실태이자 의도된 사물의 목적이며 형태를 통하여 자신의 현실화를 발견하는 목적이다. 각각의 사물은 각 단계에서 이중적인 위치를 차지하는데 사
일본에는 많은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며 그 중 나는 나의 전공인 철학과 관련하여 일본 문화를 이해해 보고자 하였으나, 일본에는 철학 자체에 대한 존재가 의미가 거의 없다고 하여 알아보고 싶던 일본의 종교에 대해 이해해 보고자 한다. 모든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 졌으며 완전한 내가 없는 것이 오히려 우리라는 개념을 더욱 완전하게 한다. 불완전한 인간은 대부분 완전을 지향하고 살아가며 빠르게 발전하는 세상 가운데 불안한 심리나 정신 상태를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다. 간추려 말해 이러한 의미에서부터 종교의 필요성이 있는 것 같다.일본의 종교 인구를 통계상의 수치로 보면 전체 인구수를 훨씬 넘는다. 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2003년도에 일본정부 문화청이 집계한 종교 인구를 만 명 단위로 끊어서 표시하면 신도계가 1억 678만 명, 불교계가 9549만 명, 기독교계가 182만 명, 기타 가 1065만 명이다. 또 종교법인은 18만 3000개나 되며 그 밖에도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단위 종교 법인이 약 5100개가 있다. 도쿄와 같은 대도시는 좀 다르지만 지방의 중소 도시나 농가의 일반 가정에서는 보통 불단과 신도의 신을 모신 ‘가미다나’ 가 한 집안에 마련되어 있다. 가미다나는 일본 신도의 신을 모시는 위패를 넣어두는 작은 집으로서 수업시간에도 배운 바가 있다. 일본인들은 유일신을 믿는 문화권의 사람들과는 달리 평생을 살면서 여러 종교와 접하면서 살아가며 역사적으로 신도와 불교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사회적 기능을 해 왔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일본인의 종교의식과 종교행동을 이해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일본인들은 한 평생을 사는 동안 여러 가지 형태로 종교와 관련을 갖는데 특정 종교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이라도 태어났을 때는 신도이 신에게서 축복을 받고 죽었을 때는 불교에 의해서 구제를 약속받는다. 에도시대의 일본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신사에 가서 신에게 그 출생을 알리고 일상생활은 유교에 따르며 죽었을 때는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일반 가정이나 궁정에서도 행해진다. 현재는 신이 늘 존재하고 있는 곳으로 관념화 되어 있는 ‘신사’라는 말도 원래는 ‘신의 숲’ 이라는 뜻이며 고대 일본인에게 있어서 삼림이란 신들의 영이 깃든 신성한 영역으로 사람이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일본에는 지역사회마다 신앙 대상이 되어 있는 신산, 영산 이 있어 이곳에 신사를 짓고 신을 모시고 있다.일본 신도는 애니미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애니미즘 사상에서는 모든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보고 이 같은 정령은 모두 사람들의 숭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면 가미로 승격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 신도에서는 자연숭배와 더불어 조상숭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조상숭배야말로 일본인의 모든 신앙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뒤에서도 나올 이야기지만 신사는 물론 불교의 사원과 민간신앙이 거의 모두 이 조상숭배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 일본의 신들은 각각 역할이 분담되어 있어 분업화된 신들의 기능을 수행하고, 신도에서는 역사적인 인물도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일본의 신은 늘어날 것이다. 기업에서도 각자 모두 기업 신을 모시고 있다.조상숭배가 중심인 불교가 장례와의 관계가 깊어지기 시작한 것은 중세 가마쿠라 시대 부터이다. 불교가 서민층에 침투하여 토착하게 되는 계기는 장제를 통해서 인데 서민의 장제는 에신 스님이 그의 저서인 를 종교의례화한 25삼매강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그 후 정토종의 호넨 스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계승되고 전국에 보급되었다. 중세불교는 정토교계가 장제를 떠맡음으로써 서민들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 봉건시대에 들어오면서 이미 국가나 귀족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불교로서는 서민의 신앙에서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즉, 장례식불교의 형태로 민중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의 불교식 장제는 정토종을 주축으로 하여 보급되었지만 선동도 역시 그 의례를 그에 맞게 정비해 갔다. 선종의 많은 내용 중 좌선가 흔히 있었다. 15세기 이후에 불교식 장례가 서민층에 보급됨으로써 불교가 일본에 토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사원을 그 성격상의 차이로 구분해 보면 일본불교의 실상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데 먼저 학문사는 고대에 국가나 귀족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일종의 대학처럼 불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역할을 했다. 기원사는 그 본존의 영험이 널리 알려져 근세인 에도시대에 도시가 발전함에 따라 서민들의 폭발적인 신앙을 모았던 절을 말하며 오로지 서민의 현세이익만을 기원하는 사명을 띠고 있었다. 멸죄사란 참회를 통해 죄악을 소멸시키기 위한 절로 불교 교리와는 거리가 멀며 장례나 추선공양 등을 떠맡아 해 주는 보리사가 일본불교 사원의 90% 이상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불교를 장례식 불교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신도와 불교의 관계를 다시 정리해 보면 신도와 불교의 역사적인 관계는 불교가 일본에 전래된 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불교 수용과정에서 잠시 대립과 항쟁은 있었지만 그 이후엔 불교가 재래의 원시적인 신기신앙이 지니는 다신교적인 성격과 현제 기원적인 요소를 받아들임으로써 상호 접촉과 병존이 가능하게 되었다. 신불을 모두 함께 경배하라는 신불습합의 경향이 더욱 뚜렷해 졌고 이세신궁, 스미요시 등 유명한 신사는 모두 경내에 절을 지었는데 이를 신궁사 라고 한다. 일본의 신도가 불법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신불습합이 진행된 것이다. 메이지 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신도를 국교화 하기 위해 신불분리령이 내려지고 폐불훼석 현상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일도 있었지만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났으며 민중 차원에서는 그 후에도 여전히 신불습합 현상이 유지되고 있다.이제 한국의 불교를 알아보자.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소수림왕2) 6월 진나라의 순도와 아도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 이불란사 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들의 설법과 전도를 공허한 고구려에서는 그 후 평양 9사와 반룡사영탑 등을 짓는 한편 불 도입되어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선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구산선문의 분파를 이루었다. 국가 안태와 왕실의 번영을 비는 호국불교로서의 신라불교는 사상·정치·문화·외교·국민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 공예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원광과 같은 대학승은 세속5계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은 실천적인 수행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는 80여 부의 논소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 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다. 고려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연등회, 팔관회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특히 문종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그 밖에 중기에 이르러 지눌, 수기, 군여, 말기의 나옹, 보우, 보조, 백운 등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여러 가지 종파도 나눠지게 되었다. 조선시대 세종은 불교종파의 정비를 단행하여 조계, 천대, 총남의 3종을 선종으로, 화엄, 자은, 시흥, 중신의 4종을 교종으로 통합하여 선 교 양종을 성립시켰다. 그 후 한국불교는 일제감정기에 사찰령에 따라 31개 본사와 1,200개의 말사로 구분되었고, 3 ·1운동 때는 많은 승려가 가담하였으며, 한용운, 백용성 등은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 ·15광복 후 전국불교대회를 열어 교구 제를 정하고 중앙에는 총무원, 각 도에는 교무 원을 설치, 종헌에 따라 조직을 강화하였다. 6 ·25전쟁 후에는 파괴된 100여 개의 사찰을 수축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고아원의 설립, 동국대학 ·해인시대인 1549년이다. 스페인의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자비엘은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히라도, 야마구치, 교토, 오이다 등에 체재하면서 약 700명에게 세례를 주는 등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했으며 포교활동 지역은 대개 규슈와 교토에 한정되었고, 그 후의 선교사도 여기에다 오사카 부근을 추가하는 정도였으나, 신자는 자비엘이 전도한 지 30년 만에 10만 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급격히 신자가 늘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며 오다 노부나가가 기독교를 보호한 것은 그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였다. 신구불교의 반대 세력을 타도하고 천하통일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외래 종요인 기독교를 적극 활용 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 많은 불교도 들은 인도에서 새로운 불교가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이를 환영했다. 불교 쪽에서는 기독교의 가르침도 결국은 자기들의 생각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접근하여 기독교의 종교철학에 대해서 알려고 했다. 그러나 1552년에 일본에 온 박테잘 가고는 “일본에서는 악마를 숭배하고 있다. 일본인은 그 악마가 나쁜 줄 알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이를 모시고 있다” 고 보고서에 쓰고 있다. 일신교인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불교도 신도도 악마의 종교였던 것이다. 이렇게 민중들 사이에 기독교가 번져나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장차 기독교가 자신의 전국 지배에 방해가 되리라고 판단하고 1587년 규슈 정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하카타에서 갑자기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을 당시에는 선교사들에게 겁을 주는 정도로 포교는 묵인하였으나 기독교도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되는 극단의 사태는 금교령이 내려진 지 9년 후인 1596년 11월에 일어났다. 1613년 말에 전국에 걸친 금교령이 내려지고 다음해 9월 148명의 신자를 마닐라, 마카오 등지로 추방했다. 철저한 탄압에도 농어촌에는 기독교 신자의 촌락 공동체 조직이 살아남아 그들의 신앙을 몰래 지켰으며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서로 서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존재합니다(We are bacause of each other, each of us is, therefore we are).여전히 혈연, 지연, 학연 등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사회, 다원화사회, 공존이라는 표현은 약간은 이상적으로 들린다. 더 나아가 ‘동질적인 사회’에서도 ‘연대’ 자체가 사회적 문제로 취급되는 지금 다문화주의를 위한 연대의 형성이라는 것은 매우 조급한 기대처럼 보인다. 나름대로 단일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해온 우리나라에서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집단 사이의 대화와 연대는 쉽지 않으며 인종적 차이와 문화, 종교, 언어적 차이를 전제하고 있는 다인종, 다문화 사회에서 과연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라는 회의가 든다. 하지만 다문화 사회는 우리의 호불호를 떠나 형성되는 현실이고, 현실은 한계와 장벽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희망이 실현될 수 있는 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가 다문화 사회라는 새로운 현실을 출발점으로 하여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과는 다른 연대형식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의 실현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는 필연적인 요구 혹은 사명이라 할 수 있다.이런 배경에서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은 선택이 아니라 역사발전의 필연적인 과정이며, 관건은 분열된 사회 혹은 조화로운 사회의 건설의 선택이라는 입장도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충분한 논의를 수행하지 않은 채 이론적으로 혹은 정책적 필요에 의해서 ‘통합의 얼개’를 성급히 제시하는 것도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에 대한 좀 더 치밀한 고찰과 분석이라 할 수 있으며 어려움을 회피하거나 혹은 아무런 실천적 의미도 갖지 않는 해명을 제시하려는 형식적 틀에서 탈피하여 문제는 문제대로 직시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자세가 요구된다.타자에 대해 거부감과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이제 세계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도처에서 경험하는 생라 각자 자신의 관점에 의해 세계를 해석한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타당해 보인다.그런 배경에서 사회생활에서의 대화나 공존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자신의 관점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신의 주장은 참이며 상대방의 주장은 틀린 것이며 심지어 상대방을 ‘악의화신’으로 간주하려는 태도는 아주 ‘자연스러우며(?)’ 그만큼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소통의 주제나 강도 혹은 방식의 변화를 꾀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오히려 타자의 인정 혹은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근본적 인식 혹은 성찰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이며, 여기에 바로 철학 본연의 과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일반적으로 타자의 문제는 철학적으로 동일성과 차이의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동일성과 차이의 사고는 또한 ‘보편과 특수 및 전체와 부분의 문제’라는 철학의 본질적인 과제와 결합된다. 이러한 사고의 토대위에서 ‘평등과 차이 및 조화와 구별’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제기되며, 이런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에 따라 다양한 문제들 즉 “인간과 다른 존재자들 간의 관계, 인간과 문화의 공통점과 차이점, 개인과 사회의 관계”가 정립되어진다. 결국 동일성과 차이의 사고에 따라서 존재론적, 인식론적 귀결뿐만 아니라 실천적인 삶의 문제가 동시에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쉽게 표현하면 사물 자체의 특성이 아니라 세계 이해 방식의 차이에 따라 각기 다른 존재의 질서, 삶의 질서가 부여되게 되는 것이다.이런 배경에서 이 연구는 특히 일원론적 사고를 비판하고 ‘타자’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고 시도한 레비나스의 관점이 다문화 사회에서의 타자와의 연대 형성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레비나스 철학(타자윤리학)은 바로 폭력과 인종주의의 파멸적 귀결에 대한 경고를 담고 있으며 그는 ‘폭력과 인종주의의 뿌리’를 노출시킴으로써 일원론적 사유의 문제점과 한계, 심지어 ‘근본악’을 드러내고, ‘다르게 사유함’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며 존재 안에 머무르려는 경향에 따라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주체성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과의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근본적으로 나의 주체성이 구성된다. 왜냐하면 존재유지의 욕구보다 더 앞서서 무한자에게로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인간의 많은 한계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욕망을 통해서 인간에게는 진정한 사진을 회복하는 길 즉 연대의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이다.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통신매체의 도움으로 전 세계적 연결망 안에 거주하고 있다. 많은 부분 우리는 이러한 발전을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온 혜택으로 간주하며 개인적 삶의 향유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망 안에서 우리가 단순히 수용자가 아니라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로서 기능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물론 전 세계적인 정보망 (중략) 덕분에 우리는 모든 곳에서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지 삶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는 개개인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책임의식을 느껴야 한다. 즉 이것은 바로 도덕 이념을 긍정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당면과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지역의 주민으로 살면서 형성된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세계민족으로 살아가도록 해주는 관념과 제도를 갖추는 것이다. 우린 이미 세계민족이 되었다.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 사의의 소통, 상이한 공동체 사이의 대화적이고 공존의 관계형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 시민적 차원에서 모든 시민적인 권리와 의무의 평등원칙을 재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종교나 성적 선호도, 피부색, 문화적 소속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타당한 것이다. 마르티니엘로(M. Martinielle) 는 다문화사회에서는 동등한 권리의 향유, 동일한 의무의 준수, 상이한 문화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개인과 집단사이의 상호 인정의 조치, 기회의 균등 그리고 문화적 민권의 인정 등 다양한 차원에서 공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는 도덕의 기본적인 요구사항을 강제하기 위하여 권력의 사용을 정당화할 근거를 제공할 수 없게 된다.이 윤리학을 상세히 기술하는 것은 서구 도덕의 이상적 목표와 서구 이외의 도덕의 이상적 목표 양자에 대한 광범위한 비교 평가를 요구하게 된다. 그것이 전통윤리학이 서구 이외의 도덕의 이상적 목표를 고려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이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방어할 수 있는 윤리학을 제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잘라 버린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통윤리학의 이런 잘못을 교정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서구 이외의 문화가 우리 시대에 방어할 수 있는 윤리학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서구 이외의 도덕의 이상적 목표가 우리의 서구 도덕의 이상적 목표를 의미 있게 교정하고 해석하도록 도울 수 있다. 먼저 아메리칸 인디언 문화를 이용해 보자. 전통윤리학에서는 오직 인간만이 인격이라는 도덕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가정된다. 대조적으로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 중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부족이 동물, 식물 및 다른 특별히 선정된 자연물이 인격이라는 도덕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족은 자연은 인간의 목적을 위해 정복되고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였으며, 그들 자신을 자연의 구성요소의 일부로 보았다.서구 문화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간 이외의 자연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하여 자연에 대한 지배를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이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서구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 호소하고 있다.(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고 대지를 채우고, 대지를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 공중의 새, 가축과 대지를 기어 다니는 모든 동물에 대한 지배권을 가져라. 창 1:28)이 명령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이 인간 이외의 자연을 지배하도록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이외의 자연을 보살해 그것이 어떤 함축을 지니는가를 평가하면서 처칠의 아메리칸 인디언의 입장과 타협이 이루어 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신세계(남북아메리카대륙)에 왔던 유럽인들에 의한 아메리칸 인디언의 정복에 대해 다른 시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최근의 추정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전에 남북 아메리카의 인디언 인구는 리오그란데 강 북쪽에 사는 인디언 약 1천 5백만 명과 함께 대략 1억 명이다. 그 당시 유럽의 인구는 약 7천만 명이었고, 러시아 인구는 약 1천 8백만 명이었으며, 아프리카의 인구는 약 7천 2백만 명이었다.히스파뇰라 섬의 타이노 족에게 스페인인들이 찾아와 금을 원했으며, 목을 매달고, 불에 태우고, 사나운 개에게 손과 발이 물어뜯기는 등 인디언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금을 얻기를 원했다.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6세기 말에 약 20만 명의 스페인인들이 인도제국과 멕시코,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이주 하였으며 그 무렵 그 지역에서 약 6천만 명에서 8천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이 죽었고 생존한 인디언들은 워싱턴 대통령을 “마을의 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20세기가 되어서는 아메리칸 인디언의 취급방식이 나치 지도자들에 의해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했다.처칠은 유태인의 대학살과 아메리칸 인디언의 정복이 오늘날 조명되는 다른 방식을 대조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어떻게 조명되어야 하는지를 밝히고 있으며, 그러면 인디언 땅을 되돌려 주려는 처칠의 계획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는가? 만약 전통윤리학이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대한 정복을 적절히 고려한다면, 인디언에게 땅을 되돌려 주는 의무는 인정하지 않아도 되는가? 무엇이 요구될 것인가?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경제적 자원의 실질적 경비인가? 카지노와 다른 세금이 면제되는 사업을 시작하기 위한 더 큰 권한인가? 전통윤리학이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입장을 적절하게 고려하기 위하여 특별히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우리.
정의란 무엇인가? 책의 제목처럼 말 그대로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책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하다. 책을 다 읽고 난 후 나는, 21살 짧은 인생을 살아오며 정말 진지하게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던 적이 없었으며 이 과제를 통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앞으로도 내가 정의에 대해 생각할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책에서는 먼저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자유, 행복, 미덕으로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도덕적 딜레마에 관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이것들을 설명해 나가는데 예를 들면, 철로를 이탈한 전차 가설 이라던지 아프가니스탄의 염소치기 이야기 등이 있었다. 책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어떻게 행동하는것이 과연 정말 옳은 행동일까 생각해 보면서 정의와 부정, 평등과 불평등, 개인의 권리와 공동선에 관해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는 영역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통과할 수 있을지 그 답을 이 책에서 제공하고자 하였다.·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일반 시민을 동굴에 갇힌 포로에 비유한다고 한다. 이들이 보는것이라고는 벽에 드리운 그림자의 움직임, 즉 이들로서는 결코 파악하지 못할 실체의 투영뿐이다. 이 경우에 오직 철학자가 빛이 비치는 세상으로 나가 실체를 볼 수 있는데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정의의 의미와 좋은 삶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편견과 판에 박힌 일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예가 이제껏 나의 견해를 늘 그래왔던 것처럼 생각하며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주는 말이었다.다음으로 도덕성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최대 행복의 원칙을 주장하는 공리주의의 입장이 나온다. 도덕성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는데 오직 결과에 따라 판단하는 것과 결과가 전부가 아닌 의무와 권리를 생각하여 판단하는 관점이 있다. 그리고 벤담의 공리주의와 밀의 공리주의를 구별하여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벤담은 그 방식이 예를 들면 거지를 한곳에 몰아넣는 구빈원을 세우는 일과 같이 다소 가혹할 지라해도 다수의 행복에 기여한다면 그것은 옳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반박과 도덕적 문제를 쾌락과 고통이라는 하나의 저울로만 측정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반박을 받게 된다. 이에 반해 밀은 개인의 인격과 개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쾌락도 그냥 쾌락이 아닌 질 높은 쾌락을 추구하는 입장을 내세운다. (나는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정의를 이야기 할 때, 옳은 것을 다수의 행복이나, 그것이 질적이든 양적이든 간에 쾌락으로 판단하려고 하는 것이 정의라는 부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며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다음으로는 자유지상주의를 이야기 하는데 여기서는 최소국가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최소국가는 계약을 집행하고 개인의 재산을 보호하며 평화를 유지하는 국가로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로버트 노직이 말하는 자유시장 철학에서 그는 개인의 어떤 권리도 국가가 침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부자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여 가난한 사람을 돕는 다거나 재산을 재분배하여야 한다는 부분에서 부자가 가진돈이 옳게 가진 자신의 소유물이라면, 국가가 그것에 대해 어떤 부분도 강요해서는 안되고 할수도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는 마이클 조던의 돈을 예로 들어 우리가 우리자신을 소유하는가에 대해 5가지 반박을 내어서 이야기 하고 있었다. 내가 내 몸, 내 삶, 나라는 인간을 소유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것을 내 마음대로 다룰 자유를 갖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때에 책의 저자인 마이클 샌델은 그 생각이 설득력 있지만 그 의미를 모두 받아들이기라 쉽지 않다고 한다. 나도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나서 콩팥판매, 안락사, 합의하여 이루어진 식인행위 의 예를 들어 자기소유라는 자유지상주의의 논리와 정의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그렇다면 자유 시장은 공정한가? 에 대해 전쟁수행과 대리 출산을 들어 이야기가 전개 되는데 먼저 징병제나 대리인을 허용하는 징병제, 자원군을 비교하며 어떤 방법이 가장 공정한지를 묻는다. 징병은 두말할 것 없이 노예제이며 공리주의의 입장에서 대리인을 허용하는 징병이 순수 징병제 보다 낫다고 한다. 자원군은 계층간 차별이라는 불공평, 가난 때문에 대학교육등의 혜택을 받는 대가로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젊은이들이게는 부과되는 강제적인 적이라고 할 수 있다.그다음 대리 임신의 예가 나오는데 뉴저지 테너플라이에 사는 한 부부 이야기이다. 대리모를 고용해 계약을 맺고 아이를 낳았는데 대리모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판을 하게 된 이 사건에서 계약을 인정한 1심법원과 계약을 무효로 만든 상급 법원중 어느 쪽이 옳은가? 책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정의의 두가지 이론인 자유지상주의와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도 대리출산계약을 이야기 하는데 자유지상주의는 성인들이 합의하여 맺은 계약을 지키는 것이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 하고 공리주의는 양 당사자가 계약에 합의 했다면 둘 다 이익이나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도 두 가지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오늘날에는 상업적으로 대리 출산이 이루어 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도덕 문제를 더욱 부각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공리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것이 전체 행복을 늘린다는 사실로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지만, 세계적인 와주 임신도 도덕문제로 부각되고 있으며 대리 출산이 여성의 몸과 출산능력을 도구로 전락시켜 여성을 비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세상에는 시장이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돈으로 살수없는 미덕과 고귀한 재화가 과연 존재하는가? 책에서는 묻고있다. 나는 그에대해 분명히 그런것은 존재한다고 답하고 싶다.다음으로 칸트의 권리 옹호에 대해 말하는데 칸트는 인간이 존중받아야 하는 존엄성을 지닌 이성적 존재라고 하였으며 도덕이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칸트에게 자유로운 행동이란 목적 그 자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러한 목적은 의무동기를 가지고 일어나는 것이어야만 한다. 이러한 생각은 공리주의와 정반대 되는 생각이며 칸트의 입장에서 볼때 공리주의 처럼 인간을 전체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이성을 중요시 하였는데, 이러한 이성도 도구로 여겨지는 것이 아닌 어떤 경험적 목적에도 상관없이 선험적으로 정해지는 순수 실천 이성을 말한다. 그리고 칸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가언명령이 아닌 정언명령에 따라 행할것을 말하고 있는데 가언명령이란 어떤 행동의 수단이 되는 것으로써 예를 들어 “사업가로 좋은 명성을 얻고 싶다면 고객을 정직하게 대하라‘라는 것이다. 정언명령은 조건 없이 무조건 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그것은 우리의 행동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앞서 말했듯 인간을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또한 칸트는 인간에게 있는 감각적 영역보다는 지적 관점에서 나를 자유로운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회계약을 기초로한 정의론을 지지하였으며 그것은 상상의 계약이라고 주장한다.아리스토 텔레스는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하며 그에게 정치의 목적은 좋은 시민을 양성하고 좋은 자질을 배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 삶은 행복을 목표로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쾌락을 극대화 하여 고통을 넘어서는 공리주의 행복이 아니라 습관화 된 덕을 계속 키워나가는것이며 미덕과 일치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중용을 역설하였는데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정도로, 적절한 때에, 적절할 동기를 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정의롭고 덕스러운 사람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 것 같다.존 롤스는 정의에 대해 “무지의 장막”을 뒤에서 즉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원초적으로 평등한 입장에서 합의한 원칙이 공정하다고 하였다. 또 그것이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무지의 상태에서 맺는 계약도 도덕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한다. 롤스는 이 가언계약에서 정의의 원칙 두 가지가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는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사회적 공리나 일반적 행복에 앞선다. 두 번째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한 원칙이다. 이것은 소득과 부를 똑같이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을 인정한다면, 그 이익이 사회 구성원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롤스는 차등원칙을 만들어 소득과 부의 분배를 우연에 좌우되지 않도록 하였다. 롤스의 정의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이론은 미국 정치철학이 아직 내놓지 못한,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옹호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