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차별의 해체-목차1. 푸코의 생애2. 푸코의 사상(1) 근대적인 인간관에 대한 문제 제기(2) 관념론적 형이상학의 잔재 제거(3) 에피스테메의 변화(4) 감옥과 감시사회의 탄생(5) 서구의 성과 고백의 문화3. 참고 문헌1. 푸코의 생애미셸 푸코는 1926년 10월 프랑스 프와티에에서 의과 대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45년에 파리의 앙리4세 학교의 준비학급에 입학하였고 그 곳에서 그에게 철학을 가르쳤던 장 이폴리트와 만나게 된다. 장 이폴리트를 만났던 당시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푸코였지만, 이폴리트로 인해 철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푸코가 그에게 빚진 것이 많다며 수 없이 말했을 정도로 이폴리트는 푸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1948년에 푸코는 소르본에서 철학학사학위를 취득했다. 그 학위를 취득한 푸코는 심리학에 관한 학위 또한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는 다니엘 라가슈의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1948년에 푸코는 자살미수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의 주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푸코는 몇 차례의 자살기도를 했으며, 면도칼로 가슴을 그으려고 하는 것을 어떤 선생이 보고 막은 적도 있다고 한다. 어쩌면 이러한 것이 그가 가지고 있던 동성애 때문은 아니었는가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밤에 동성애자들의 바에 다녀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수치심과 후회, 그리고 이 이외의 복합적인 감정들로 인해 고독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고 한다.1950년은 푸코가 공산당에 입당한 해이기도 하며, 그가 교수자격시험에 떨어진 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1년 후 푸코는 교수자격시험에 당당히 합격을 하였고 티에르 재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고등사범학교의 심리학 조교로 그는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1년 후, 푸코는 파리 심리학연구원에서 정신병리학 학위 자격증을 취득하였다. 그는 하이데거의 Daesin분석을 정신분석과 정신의학의 실천에 도입한 빈스방거를 만나러 자클린 베르도와 함께 스위스로 가기도 했다.푸코는 학생운동을 지원하기도 하고, 시위 중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광기와 이성의 확연한 구별은 가능한가?푸코는 각 시대는 그 시대의 인간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그때그때의 인식 구조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보고 있으며 이러한 인식 구조는 연속적이기보다는 단절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본다. 푸코는 역사 과정을 절대이성이 자신을 완성시켜가는 과정으로 보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의 잔재를 철저하게 제거하려고 했다. 이러한 잔재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관념론적 형이상학의 영향으로 모든 근현대의 사조들이 인간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인간은 이성을 통해 실재의 궁극적인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거나 인간을 실마리로 하여 세계를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근대를 지배한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근대적인 이성의 한계와 자기기만을 탐구하고자 하였다. 푸코는 이 책에서 중세 이후에 광기에 대한 서고의 담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탐색하고 있다.푸코는 『광기의 역사』를 통해서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는데, 그의 광기에 대한 문제의식은 16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광범위한 자료를 관통하고 있다. 여기서 푸코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는 두 가지 사건은 1656년 파리에서 구빈원 설립과 함께 6,000명에 달하는 방탕자와 범죄자들을 광인들과 함께 무차별적으로 수용한 ‘대감호’의 사건과 18세기 중엽부터 광인들만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아 처음으로 근대적 정신병원이 만들어진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을 거쳐 광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질병이 아니었던 광기가 질병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대(14~16세기)까지만 해도 광기는 배척의 대상이 아니었다. 광기의 사람들은 배에 태워 일정기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돌아다니게 했을 정도로, 가벼운 격리조처의 대상일 뿐이었다. 15세기 말, 제롬 보슈의 그림 는 바로 그러한 광인들의 삶과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그런데 고전 시대(17~18세기)에 접어들면서 광기와 이성 간의 관계에 대한 유럽인들의 생각이법은 근대적 치료법과 단절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계보학적 연계성을 갖고 있다고 푸코는 주장한다. 광인이 감시와 심판을 받고, 유폐의 대상이 되고 있는 19세기의 과학적 정신의학은 고전주의 시대의 수용소를 대체한 정신병원의 구조를 통해 결국 광인에 대한 새로운 억압형태를 나타낼 뿐이라는 것이다. 최초의 정신병원이라고 할 수 있는 ‘프티트 메종’(La petite Maison)과 같은 기관의 책임자가 의사가 아니라는 점이 이런 점을 매우 잘 보여준다.푸코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는 광인을 범죄자나 극빈자와 전혀 다른 부류들로 구분하여 정신 발달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로 규정되었다고 말하며 이와 함께 광인들이 감금에서 풀려나 가족적인 분위기로 운영되던 치료시설에 수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인도주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조치들도 광인들의 정신을 보다 효과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광인들은 육체적으로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 고문을 당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18세기 후반 이래로 광기는 이렇게 철저하게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면서 이성과 광기 사이의 대화는 완전히 단절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 푸코는 정신의학의 언어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이 되었다고 말한다. 20세기에 들어와 프로이트와 같은 의사가 나타나 정신분석학을 만들어 새로운 정신착란의 개념과 환자와의 대화치료요법을 시도하였지만, 프로이트가 광인의 편에서 광기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라 이성과 정상인의 기준에서 광기를 이해하려 했기 때문에 광기의 진리를 밝히고 광인을 해방시켰다고 볼 수는 없다.광기에 대한 푸코의 연구가 우리에게 감동적인 것은 이성 중심적 사회에 의해 억압된 타자, 우리와 전혀 다른 그러한 인간적 실존의 모습과 광기의 언어를 파악하려는 그의 근본적인 시도 때문이다. 푸코의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것은 결국 광기의 진실은 억압되었을 뿐 망각될 수는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3) 에피스테메의 변화『말과 사물』은 사물들에 대한 분류와 정리시대이다. 이러한 조건에서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는 마치 거울 속에서 비추고, 비치는 관계지만, 그것이 명증하게 일치된 관계는 아니다. 이 시대에 안다는 것은 짐작하는 것이고, 대상을 관찰하고 증명하는 작업이 아니라 짐작하고 해석하는 행위였다.17세기 중반기에서부터 18세기 말에 이르는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는 표상과 재현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특징인 계량과 질서의 분류 기준으로 자연사와 일반 문법, 부의 분석이 일반화된다. 이러한 에피스테메에서는 발생론과 역사가 배제되었다. 고전 시대의 사유는 이상적인 발생론의 형태로, 즉 이상화된 원초적인 과거에 유토피아를 투영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고려하는 것에 그친다.그러나 18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근대에 학자들은 삶, 노동, 언어를 역사적인 것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고정된 질서보다 역사적인 변화를 중시하는 이러한 에피스테메는 인간을 중심에 두면서 삶, 노동, 언어의 영역에서 구체적인 인간 경험을 결정하는 요소들을 파악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이 하나의 개인으로 탄생되기 전에 인간을 구성하는 것이다.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경험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 근대적인 에피스테메는 특정 수준의 선험적인 이성을 미리 상정한다. 이 결과 근대적인 에피스테메에서 인간은 경험적이면서도 선험적인 존재라는 이원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이러한 근대적 인간의 이중체가 보여준 혼동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푸코가 말하려는 바는 혼동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문과학 연구자의 한계가 아니라 인문과학 그 자체의 한계를 의미한다.현대에 와서는 인문과학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하는 무의식적인 규칙과 규범을 폭로하는 것으로 과제로 삼는데, 이러한 인문과학에서 인간은 자기 비판적이다. 이러한 과학은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적인 미몽에서 사람들을 깨어나게 해주고 푸코는 이런 맥락에서 객관적인 인식의 주체로서의 인간은 현대에 와서는 사멸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에피스테메의 전개 과정에 대한 푸코의 분석에는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그는 『말릴 때까지 잠시 붙잡아두는 곳이었다. 이 당시의 신체형이란 『감시와 처벌』의 서두에서 묘사된 다미엥의 끔찍한 신체형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죄인의 신체를 절단하고 분해함으로써 극단적 고통을 극대화하는 처벌방식이다. 이것은 단순히 죄인에게 극단적인 고통을 유발하는 형벌일 뿐 아니라, 권력의 효과를 노리기 위해 죄인의 고통을 최대로 창출하는 정치적 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감시와 처벌』 2장의 “신체형의 호화로움”에는 신체형을 통한 정치적 행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신체형은 법률적이고 정치적인 기능을 갖는다. 중요한 것은 상처받은 군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식이다. 그 의식은 군주권을 화려한 형태로 과시하면서 그것을 회복시킨다. 아무리 성급하고 일상적으로 실시하는 형벌이라도, 공개적 처형은 침해받은 후에 회복하려는 권력이 행사하는 일련의 대규모 의식들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군주를 경시한 범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무적의 힘을 과시하는 행위이다.(『감시와 처벌』)이러한 신체형 의식은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종식이 되었는데, 이는 공개적 처형을 구경하는 민중들이 끔찍한 폭력의 장면 앞에서 두려움과 동시에 분노를 갖게 되면서 처형당하는 죄인에 대한 동정심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일이 빈번해지고 권력의 의도와는 달리 죄인에 대한 민중의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계기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아울러 사회계약 이론이 대두하면서 범죄는 군주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사회계약에 대한 위반, 즉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처벌 역시 공동체에 가해진 과오를 시정하고 범죄자를 원래의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것이 되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위험부담들을 없애고, 행사에 드는 과도한 비용을 감소하면서 또한 범죄인들로부터 저항을 받지 않는 방식, 즉 권력의 경제학이라는 측면에서 효과적이고 생산적인 방법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 죄인에 대한 새로운 처벌방식이 바로 근대적 감옥의 징역형이고 ‘감금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그런데 푸코는 계몽 시대의 이러한본다.
●천태●천태종은 소의경전이 묘법연화경, 보통 법화경이라고 부르는 경전이 있고 대열반경 혹은 대반열반경이 있다. 소의경전만 봐도 이 사상들이 어떤 이론체계를 제시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경전들이 어떤 주장을 펼치는지를 일단 알아야 한다.그리고 또 한가지는 종파 이름을 붙일 때에는 소의경전에 따라서 붙인다. 그런데 천태는 법화종이나 열반종도 아닌 천태종이라 한다. 그 까닭은 천태사상을 적립시킨 지의대사가 주로 활동했던 곳이 천태산이기 때문이다. 천태사상은 제일 중요한 것이 일심과 일승개념이다.천태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명제는 일념삼천세계이다. 내가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게되면 그 생각하나가 삼천개로 나눠놓은 어떤 세계에 반드시 속한다는 것이고 내 생각 하나가 삼천의 제일 밑바닥에있는 국토세간의 지옥의 여시상의 모습일 수도 있고 국영세간의 불승의 부처의 여시성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것은 진짜 어마무시하게 아무것도 방해가 되어질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라고 하는 굉장히 어찌보면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던질 수도 있고 모두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한 것이다.이것은 부처에 대한 어떤 보장도 안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또 부처가 될 수 있는 어떤 제약도 전부 파괴하는 것이다. 절대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는 항상 책임이 따르기에 어떤 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것보다 더 주체성을 담보해주는 것은 없다. 그런데 그것의 근거가 되는 것이 일종의 유식사상이다. 생각 하나에 따라서 삼천세계가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생각이 사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 식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구분해봤을 때 4가지로 나타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생각, 일어나려고 하는 생각, 지금 이 순간의 생각, 이미 지나간 생각.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한 생각에 의해서 내가 규정되어지는 것이다.여기에 더해서 일불승을 얘기한다. 세상 어떠한 존재라도 모두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게 되는 것이 일불승이다. 존재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것에 근거해서 불성이 있는 모든 존재는 수양하면 모두 붓다까지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태가 위대해지는 것이다.2가지 축을 기억해야함. 제법실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열반경(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라고 하는 그 논리에 근거해서 (성구설이라고 하는) 불성이 갖춰진 것들이 표현해 낸 모습이기에 참된 모습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제법실상임. 그런데 그게 아무런 보장을 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순간순간 내 한 생각이 어떠냐에 따라 바뀌는 것. 한번 붓다의 깨달음을 받은 것처럼 느껴져서 붓다로 계속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생각이 들면 지옥에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천태(본격시작)●천태가 성립하는 시기가 6세기경이다.그 당시에 불교가 이미 거의 중국사상계를 접수한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불교가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시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인재들이 불교계로 입문하는 모습들을 보인다. 남북조시대로 갈라졌던 것도 영향이 있지만 본래부터 중국의 북방과 남방을 나눌 때 북방은 주로 현세적인 측면이 강한 것이 있다면 남방쪽은 약간은 현학적인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특징이 불교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나타난다.그래서 북방에서는 주로 선정과 계율에 편중했다. 일종의 실천하고 좀 더 관련있는 모습을 보였다고 얘기할 수 있다.반대로 남방은 워낙 형이상학적인 기운이 강하고 위진현학하고 가깝게 지낸 모습들이 나타나서 이들은 실전보다는 현리 자체, 공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모습들로 특징지을 수 있다.그런데 지의대사가 어느한쪽도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정혜쌍수 지관경중을 강조하면서 둘을 통일시키려고 하는 노력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지의대사의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지는 보존하는 첫 관문이고, (지는 선정을 말한다) 관은 의혹을 끊는 요점이다. 지는 심식을 아끼고 기르는 훌륭한 바탕이고, 관은 신묘한 해석을 촉진시키는 묘술이다.(관은 이론적인 측면을 가리킴) 지는 선정의 우수한 요소이고, 관은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사람으로 처음 나타난 사람은 혜문이다.?혜문: 일심삼관설을 주장일심삼관이라고 하는 것은 천태안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론 중 하나임=>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들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라는 주장을 보고 공, 가, 중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잘 이해했다. 그런 후에 일심삼관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송나라때 지반이라고 하는 사람이 훌륭한 승려들의 일대기나 사상을 정리한 책을 쓰는데 거기서 혜문에 대한 표현이 있다.제법무비인연소생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에 의해 생겨나지 않은 것이 없다.이차인연 : 이러한 인연은유부정유공부정공 : 있어도 확실하게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해도 완벽하게 공한 것이 아니고불이 : 불이 아닌 모습으로 있다.그래서 이름을 중도라고 하는 주장을 혜문이 펼쳤다고 쓰여있다.그리하여 용수를 계승했다고 하는 평가가 있는 것이다.그리고 대지도론에 보면 아래와 같은 표현이 있다. 한 마음 안에서 일체지,도종지,일체종지라고 하는 3가지 지혜를 얻는다. 그렇게해서 모든 번뇌와 습관들을 끊어 버린다. 비록 한 마음 안에서 이 3가지 지혜를 얻지만 또한 초중후라고 하는 순서가 있다. 그래서 마치 한 마음에 3가지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일체지 : 공관의 공이라는 얘기, 모든 것들이 다 그렇다라고 하는 공을 얘기도종지 : 가, 여러 가지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가상을 얘기하는 가일체종지: 중, 그 둘을 함께 불이함을 나타낸다.이 세가지가 과연 한 마음에서 다 나타나는 것이라면 무슨 순서대로 나와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어떻게 해서 그것을 전후로 획득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일체지, 도종지, 일체종지를 마음 속으로 얻게되면 동시에 그 3가지 지혜를 갖게되는 것이고 그것이 어떠한 마음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일체지든 도종지든 일체종지든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일심삼관이다. 니 마음이 어떤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가상으로도 보고 공상으로도 보고 중상으로도 본현의 : 법화경에 대한 현묘한 의미에 대해서 이론적인 문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법화문구기 : 글자와 글자, 문장마다 설명해주는 것 , 마하지관: 어떻게 수양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주는 것④담연지관보행전홍결이라는 주요 저작이 있다. 이 사람이 중요한 이유는 천태종이라고 제일 먼저 칭했고 이론을 삼대부에 따라서 그냥 막 전해지던 것을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온 천태종은 거의 담연이 정리한 천태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화엄과 법상, 선종 등과 토론을 많이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지켜낸 공헌을 하게 된다.일념삼천: 천태의 세계관삼천대천세계 : 수메루 세계의 집합세계이다. 전 우주를 말한다.능엄경에 보면 세계라는 말에 세는 흘러가는 것, 과거-현재-미래 이 시간이라 표현하는 것이 세라는 것이고, 계는 공간을 가리키는 방위로 동-서-남-북으로 세는 시간, 계는 공간을 말한다.삼천대천세계라고 하는 것이 세계가 모든 시공간 자체를 포함하는데 그것을 3천개로 나누어서 설명해본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저히 그 밖이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할 수 있는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념에 달렸다는 것이 일념삼천대천세계이다.왜 삼천이냐 하면 먼저 10계가 있다. 지옥서부터 천상까지 육도윤회하는 것에 삼승(성문,연각,보살)이 더해지고 마지막으로 붓다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각각의 그 열 개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또 그 세계를 포함할 수 있다. 그러니 지옥은 지옥을 포함하고 아귀도 포함하고 쭉 붓다까지 포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00개가 된다. 거기에 십여시라는 것이 또 있다. 각각의 백 개가 열 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00개가 1000여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삼종세관이 있고 그것이 각각 천개가 하나씩 들어갈 수 있어서 삼천대천세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전부 다 일념에 의해서 좌지우지되어진다는 것이다.대지도론이라는 책에 보면 여러부처님께서 두 가지 종류의 설법이 있다. 먼저는 다. 그러나 한 마음이 드는 순간 삼천세계가 그 생각하나에 다 갖춰지는 것이다. 이것이 일념삼천세계이다.여기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심 개념이 있는 듯 말하고 심에 의해서 어떤 식, 념이 나오는 것처럼 생각이 되어질 수 있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물 흐르는데 의식의 흐름 자체를 식이라 얘기할 뿐이고, 물이 계속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강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다. 어떤 실체적인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식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인데, 그 흐름 안에서 뭔가 하나라도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삼천대천세계가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의 내용은 성인도 없고 범인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내가 살아생전에 성인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생각을 가지면 붓다가 될 수 있지만 한번 붓다가 영원한 붓다가 아니라는 것이다.주체에 모든 것을 일임하는 것이다.핵심교학①사상추검일념이 삼천이라고 했는데, 그 하나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분석해보니 미념, 욕념, 현념, 이념의 4가지라는 것이다. 미념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생각, 욕념은 막 생겨나려는 생각, 현념은 지금 막 지금의 생각, 이념은 이미 지나간 생각을 말한다. 미념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니 없고 욕념은 일어나려고 하는 거니까 아직 없고 현념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현재 지금 이순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큼인지 생각하는 순간 이미 지나갔다. 그러니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잘게 분석을 하더라도 결코 실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게 식이다. 아무리 분석하고 점검 해봐도 없는 것이다. 이 얘기는 무아라고 하는 것을 유식에 의해서 설명해 보는 것이다. 또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생각들이 일념삼천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세계를 형성해내는 절대자유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성성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늘 언제나 한 생각에 얽매일 수 없는 것이다. 집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일념조차 존재하지 않으므로 니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 지나 보라는 것이다한다.
●선종사상●선종이라는 종파도 화엄처럼 나중에 성립이 되었다. 정식으로 종파로서 자리잡은 것이 6조혜능서부터라고 본다면 거의 7세기 가까이 되어서 인 것이다. 화엄종은 30~40년 정도 각광을 받고 선이 나타난 이후로 많이 힘들어졌다. 결정적으로는 당 무종의 멸불운동 때문에 거의 모든 불교가 타격을 입는데 마조도일의 제자인 백장회해가 청규를 만들어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자 식으로 자립하는 어떤 운동을 벌여서 멸불운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꾸준히 명맥이 유지되어지는 모습들로 나타났다.거기에는 백장청규와 같은 종교 혁신운동과 같은 것도 있었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론적으로 복잡한 이론체계를 타파하고 불성학설에 근거해서 자신의 본심을 온전히 깨닫기만하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켜서 각광을 받게된다고 볼 수 있다.비록 제목은 선종사상이지만 전통적인 의미에서 선과는 사실은 거리가 멀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선나인데 디야나를 말한다. 외재 사물에 대한 어떤 관념, 생각들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자성에 대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정에 든다고 하는 말과 같은 활동을 주로 가리킨다. 선정이라고 하면 선은 디야냐, 정은 사유수라고 해서 어떤 특정한 마음에 집중해서 다른 어떤 잡스러운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그 단계를 넘어서게되면 집중하게되는 대상으로부터도 마음을 거둬들이는 이러한 공부를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선정이라고 하면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는 앉아서 참선같은 자세로 진행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사실은 이것을 굉장히 반대한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수행하는 사람들을 구속시키는 역효과가 있는 것이지 결코 자신의 본래적인 모습을 깨닫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여 반대하고 폐기할 것을 주장한다. 직접적으로 나의 본성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가야지, 마음의 평화를 얻고 이런 것들이 붓다가 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그런데 불성이라는 것은 실체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 불성의 끊임없는 작용으로 나타나는 마음에 집중한다. 마음도 어떠한 실체가 아니다. 강을 강이라고 부르는데 실질적으로 강의 내용은 끊임없는 강물의 흐름을 보면서 강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심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것은 끊임없는 식의 흐름을 가리킬 뿐으로 어떤 실체적이 아님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 측면을 가장 강조하는 종파가 선종이다. 그래서 그 의식의 흐름에 본래적인 모습을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파악해야만 어렵지 않게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그래서 선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하지만 사실 불심종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식 이래로 불교에서는 식이라고 하는 개념을 사용한 순간부터 심이라고 하는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지만 선종만큼 그것에 대한 의미를 강조했던 학파는 없었다. 천태는 명으로 얘기하고 식으로 얘기했지, 본체의 작용으로서의 심에 대해서는 별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론적인 설명에 있어서는 선종사상은 굉장히 박약하다.불립문자, 교외별전이라고 하는 것은 붓다가 가섭존자에게 텍스트로서 가르치는 것 이외의 다른 전통을 부탁한다는 이야기로 있는데,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붓다가 직접 한 말은 아니다. 이 말을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달마가 선종사상을 인도로부터 가져와서 처음했던 말이라고 얘기하지만 실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말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자리를 제대로 잡기 시작한 것은 6조혜능 때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중국의 선종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고 난 후에야 제대로 제시되어진 명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선종사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불립문자는 직역하면 문자를 세우지 않았다. 교외별전은 가르침 이외에 달리 전하고 있었다. 텍스트로서, 말로서 가르침을 전하는 것 이외에 따로 전했다는 것으로 마음으로 전했다는 것이다. 직지인심 견성성불은 곧바로 사람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하면 그래서 자신의 불성을 확인하게 되면 곧바로 붓다가 될 수 있다는 간단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왜 선종사상의 가장 핵심적이며 근본적인 것이냐고 한다면 문자, 언어에 근거해서 만들어진 텍스트로서의 경전 같은 것들은 원래 불법을 알려주기 위해서, 붓다가 깨달은 내용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일종의 외재적인 것이다. 붓다가 돌아가시면서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말고 너 스스로에게 귀의하라고 말한다. 진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깨달음을 얻은 선생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보조적인 작용을 할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나를 깨닫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건 방편인 것이다. 진정한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누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닫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음을 살펴야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봐야지만 우리의 본체가 어떤지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 얘기를 이해되려면 화엄에서 얘기했던 이사무애법계까지는 이해가 되어야 한다. 이사무애법계는 한마디로 하면 본체와 그 본체에 근거해서 작용되어지는 현상이 결코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본체는 모든 시공간을 다 포괄하는 것이라 감각, 지각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본체가 드러난 작용, 현상적인 모습을 통해야만 본체를 확인할 수 있다. 그걸 통해서 우리는 본체를 알 수 있으니 직지인심 곧바로 그 작용으로 드러난 모습을 통해서 본래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붓다다 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생이라는 것이 왜 있냐하면 줄탁동시이다. 선생의 역할은 환기시켜주는 것이다. 어떤 자극을 한번 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이다. 첫 번째 조건이 깨닫고자 하는 사람의 끊임없는 몸부림이다. 그게 없으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줄탁동시라고 하는 것이다.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줄탁동시처럼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음이 전제가 되어야하고 그랬을 때 무언가 이론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와 문자로 가르칠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을 언어와 문자로 가르치려고하면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 깨달으라고 하는 것은 서양식으로 어떤 이성적인 힘에 근거해서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니 마음을 누가 가르칠 수 있겠는가? 스스로 확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를 툭툭 던져주는 가르침이 선의 가르침이고 동양적인 가르침의 대표적인 교육방법이다.1. 간사선종사상은 이론체계를 건립한게 아니라서 소의경전이 없지만 달마가 혜가에게 전했다는 능가경과 혜능이 깨달음을 얻게된 계기가 금강경에 있어서 두 경전을 그래도 중시하는 편이다.2. 심본체홍인이 금강경을 해설할 때 이런 얘기를 했다. 옛날서부터 부처와 부처들이 전달해주는 것이 본체다. 그리고 선생과 선생이 아주 밀접하게 구해주는 것도 본심이다. 그러므로 본체와 본심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주장하는 바가 명심견성이다. 본체의 작용으로서의 심이 분명하게 이해가 되면 그게 바로 본체인 불성을 깨닫는 것이고 그러면 붓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여기서 주의해야하는 것은 본체라는 얘기를 쓰지만 본체의 첫 번째 의미는 배제되는 것이다. 실체라는 개념은 절대 없는 것이다. 실체는 다른 어떤 것에 의지하지않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심본체는 그런 실체의 의미는 없다. 끊임없이 흐르는 작용성 그 흔적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이다. 사실은 심만 있지 마음의 작용으로서 나타나는 것만 있지 천지만물들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본체의 두 번째 특징으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리고 심은 도이자 리다. 평등하다. 그래서 리라고 얘기하고 분명하게 밝다. 그래서 심이라고 한다. 존재와 당위 이런 것들도 전부 심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을 심이 아닌 본체의 작용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면 그게 곧 붓다다. 그래서 즉심시불, 즉심성불이라는 주장도 하는 것이다. 돈오성불의 이론적인 근거가 이렇게 해서 마련된다.
●불교의 중국 전래과정 및 초기 이해●불교가 붓다로부터 시작해서 유식여래장까지 가는데 최소 800년의 시간이 필요했는데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는 어떻게 들어오고 언제 들어왔을까?불교가 처음 어떻게 들어온지는 잘 모르지만 공식적으로 불교를 수입한 사건이 있다. 그것을 동한 명제의 영평 구법이라고 이야기 한다. 기원후 67년에 불교가 전래가 되었다는 것이 모자라는 책 미혹편에 공식적으로 기록되어져있다.하지만 궁중에 있는 대신들에게 까지 알려질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불교라고 하는 것이 알려졌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이 시기에 전래된 불교는 도술이나 방술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다. 나중에는 또한 그래도 조금은 철학적이었던 위진현학과 동조되었다. 그렇게 위진현학을 통해 불교를 이해하면서 점점 깊어지니까 수나라를 거쳐 당나라 때가 되니 완전히 자립하여 자기들 스스로의 불교를 건립하는데 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천태, 화엄, 선 이라고 하는 것이다.불교 발전의 세 시기①수입 전파시기(후한 초전반기부터 위진남북조시대까지 :1~5세기)이때는 주로 소승선학이라고 하는 마음 수양과 선정방법들에 치중하는 그런 형태가 있고 초기의 대승경전인반야경초기의 대승경전인이 주로 소개가 되었다. 또한 소개하면서 그것이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로 쓰여있기에 그것을 번역하는 작업들이 활발히 일어났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구마라습이라는 인도사람인데 와서 제자인 승조와 굉장히 중요한 작업을 많이 한다.②전성 중국화시기(남조 량에서 수당까지 : 5~7세기)중국불교가 천축보다 융성하고 천태, 화엄, 선이 등장하고 여러 고승들이 출현한 시기이다.③정체시기(송이후)당나라 후기로 넘어가면서 부터는 선이라는 것 자체가 이론적인 탐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천태와 화엄이라는 굉장히 복잡한 교학을 가지고 있지만 그런 교학을 부정하는 선의 발전이 더 이상 있을 수 없었고 정치적인 상황이 불교를 더 이상 그렇게 지지하지 않는 분위기가 이어져서 정체되기 시작하고 오늘날까물불천론: 말 그대로 사물들은 경험세계에 있는 어떤 것들도 옮겨가지 않는다. 이것을 얘기하는 이유는 공을 말하는 것이다.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실체하지않는 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옛날 것은 옛날에 있는 것이고, 오늘날의 것과는 상관이 없다. 오늘날의 것은 오늘날에 스스로 있고 옛날 것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물들이 왕래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이미 왕래하는 미묘한 조짐조차도 없으니 어떤 물건이 움직일 수 있겠는가? 움직임이 없다.=> 역사적인 순간에서 시간의 흐름에 존재했던 모든 것은 그때그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얘기다. 이것은 실체적인 요소가 꾸준히 연결되어져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무아를 얘기하는 것이다. 일관된 실체적 요소 같은 것은 없다라는 얘기다.2.부진공론: 참되지 않으므로 공하다. 이 세상의 천지만물들이 모두 다른 모습이지만 스스로 다른 것이 아니다. 자기 원인에 의해서 자기 identity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묘유이기 때문에 보이긴 하지만 진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공이다.3.반야무지론: 뭔가 아는 바가 있다. 아는 게 있다면 분명히 모르는 게 있다. 진리의 실질적인 배경을 보면 그러한 구분, 분별에 근거한 지식이라는 것은 없다. 앎을 갖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 없다. 무지함을 주장하는 까닭은 반야는 세상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는 묘유로서 이해할 수 있는 효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⑤혜원: 신불멸론신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원만하게 응대하지만 뭔가를 낳는 것이 없다. 아주 오묘하게 청해주지만 이름이 없다. 만물이 외재하는 사물들과 감응해서 움직이고 각각의 이치에 따라서 행동을 한다. 그런데 사물들과 감응하는 것은 결코 물이 아니다. 그래서 그 감응의 대상인 사물들이 변화하더라도 그 주체는 멸하지 않는다. 어떤 방법론에 따라서 행동하지만 그 행동하는 주체는 결코 그 방법이 아니다. 그래서 그 이치가 다한다고 하더라도 그 주체는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할 수 있다.반대로 남방은 워낙 형이상학적인 기운이 강하고 위진현학하고 가깝게 지낸 모습들이 나타나서 이들은 실전보다는 현리 자체, 공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탐구하는 모습들로 특징지을 수 있다.그런데 지의대사가 어느한쪽도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정혜쌍수 지관경중을 강조하면서 둘을 통일시키려고 하는 노력으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지의대사의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지는 보존하는 첫 관문이고, (지는 선정을 말한다) 관은 의혹을 끊는 요점이다. 지는 심식을 아끼고 기르는 훌륭한 바탕이고, 관은 신묘한 해석을 촉진시키는 묘술이다.(관은 이론적인 측면을 가리킴) 지는 선정의 우수한 요소이고, 관은 지혜의 수단이다. => 지관은 결코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고 한쪽을 등한시할 수 없다. 함께 중시해야하고 함께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이러한 천태종의 소의경전은 묘법연화경(법화경), 대열반경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의존해서 이론체계를 건립한다. 묘법연화경은 일불승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보살도를 나타낸다. 대열반경은 말 그대로 열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불성개념이 여기서 강조되어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 불성이 있기 때문에 열반에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열반을 상락아정이라고 표현한다. 굉장히 본래의 불교의 모습으로부터 많이 변화된 것이다.1.간사(간단한 역사)처음 맨 앞에 시조를 용수로 두고 있다. 이런 사람을 시조로 두는 것은 권위를 두기 위해서 이다. 대승에 속하는 모든 종파는 전부 중관과 유식에 근거하지 않는 사상은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사람으로 처음 나타난 사람은 혜문이다.?혜문: 일심삼관설을 주장일심삼관이라고 하는 것은 천태안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이론 중 하나임=>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조건들에 의해서 이 세상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라는 주장을 보고 공, 가, 중이라고 하는 것의 의미를 잘 이해했다. 그런 후에 일심삼관이라고 하는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송나라때 지반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다. 식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인데, 그 흐름 안에서 뭔가 하나라도 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삼천대천세계가 현현하게 되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의 내용은 성인도 없고 범인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내가 살아생전에 성인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각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생각을 가지면 붓다가 될 수 있지만 한번 붓다가 영원한 붓다가 아니라는 것이다.주체에 모든 것을 일임하는 것이다.핵심교학①사상추검일념이 삼천이라고 했는데, 그 하나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분석해보니 미념, 욕념, 현념, 이념의 4가지라는 것이다. 미념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생각, 욕념은 막 생겨나려는 생각, 현념은 지금 막 지금의 생각, 이념은 이미 지나간 생각을 말한다. 미념은 아직 생겨나지 않았으니 없고 욕념은 일어나려고 하는 거니까 아직 없고 현념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현재 지금 이순간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큼인지 생각하는 순간 이미 지나갔다. 그러니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잘게 분석을 하더라도 결코 실체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게 식이다. 아무리 분석하고 점검 해봐도 없는 것이다. 이 얘기는 무아라고 하는 것을 유식에 의해서 설명해 보는 것이다. 또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생각들이 일념삼천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세계를 형성해내는 절대자유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성성을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늘 언제나 한 생각에 얽매일 수 없는 것이다. 집착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일념조차 존재하지 않으므로 니 마음이 어떻게 흐르는 지나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심삼관이 관법으로 가는 고리가 되는 것이다.②제법실상성구설에 근거한 것이다. 왜 세상 모든 것들이 참존재다 라고 하는 것이냐? 불성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한다. 본체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이론체계를 가지고 있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본체의 작용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의 모든 근거는 본체다. 지금 현재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전부 불성이의도했던 육도윤회를 주장하는 이유중의 하나는 그 당시 형식주의적인 측면에서 현학의 관념조차도 무너졌을 때 권선징악을 이야기하려는 측면도 있었다. 그런데 생명이 없는 것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권선징악도 부정하는 것이다.●화엄●법계관 중에서 사사무애법계에서 중중무진해서 사사무애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화엄이 무슨소리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십현문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이 중중무진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걸 알아야만 육상이 원융하다는 얘기를 이해할 수 있다.(2) 사법계이사무애법계:정이(이천선생)이 주역을 주석하면서 서문에 체용은 하나의 근원이요 잘 드러나지않는 것과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간극이 없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런 형이상학적 사고는 주역을 통해서도 얘기할 수 있지만 여기서 직접적인 근거가 찾아진다. 본체와 현상사이의 근원이 하나이고 어떠한 간극도 없는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사사무애법계:사는 차별상이다.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그대로 실제론적으로 인식하는게 사법계이다. 이사무애는 본체와 현상간의 관계에 대해 얘기하니까 현상은 본체에 근거하고 현상을 통해서 본체를 확인한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사사무애에서 무애는 방해가 되지않는 다는 것인데, 현상적으로 분명히 차이가 나타나는 것들끼리도 아무런 거슬림이 없다는 것이 사사무애법계이다. 왜 그런가하면 사라고 하는 것은 가상,가짜이다. 그것들은 전부 대승의 논리에 의하면 식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진짜 불변되어지고 구별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부 또한 본체의 현현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장자의 논리대로 그대로 적용이 가능하다. 크다와 작다, 훌륭하다와 못낫다 등등의 대립되어지는 가치개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파악하는데 그것들은 모두 우리의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크고 작고 많고 적음과 같은 것들의 차이가 없어지고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고 결코 절대가 아니기 때문에 대소와 다소, 훌륭함과 그렇지못함 등도 서로서로 하나처럼 융합이 된다났다.
맑스의 사상(1)역사적 유물론맑스가 주장하는 인류 역사의 변천 과정은 생산력, 즉 노동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인한 변화가 중심이 된다. 맑스에게 노동의 발달이란 경제적인 증대 차원의 의미를 넘어서 인간이 가진 본질적 능력의 창조적 실현으로 여겨진다. 즉 노동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수단을 넘어서 창조적인 자기실현을 위한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맑스에게는 노동과 생산관계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물질적 발전이 역사를 지탱하는 하부구조로서 작용하고, 이전과 다르게 종교, 철학, 정치 등은 이러한 하부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상부구조에 불과하게 된다.이와 같은 유물론적 역사 철학을 기반으로 맑스는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과 생산관계는 오히려 생산력을 저해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원인으로 노동과 소유의 모순을 지적했다. 노동은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한 협업과 분업으로 엄청난 생산력의 증대를 실현했지만 소유는 개인의 사적인 형태로 머물렀기에 노동의 분업과 사적 소유의 모순은 인간소외를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병폐의 핵심 원인이 된 것이다. 맑스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주의를 제시한다.맑스의 자본주의 비판의 핵심은 자본주의가 인간을 소외시킨다는 것인데, 4가지로 구분한다.1. 노동자들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이 분업화되었기에 더 이상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 활동을 주체적이고 창조적으로 주도할 수 없는 것이다.2.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된다. 노동자들이 생산한 노동 생산물은 자본가에게 귀속되는 것이다.3. 타인들로부터 소외된다. 경쟁사회이기 때문에 일자리를 놓고 서로 경쟁할 수 밖에 없다.4. 인류의 창조적인 능력으로부터 소외된다. 창조적인 능력이 생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지고 만다.맑스는 사회주의 혁명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성공이 가능하다고 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본가들이 상품을 팔기 위한 시장을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 전 세계로 진출하게 된다. 즉 자본주의동자들에게 하나의 사상적 구심점을 제공하여 노동자들의 단결을 가능하게 하였다.3. 학문적인 차원에서 맑스가 주장한 역사적 유물론은 철학과 역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 전반에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었다.맑스주의의 약점1. 맑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탄력적인 적응성을 너무 과소평가하였다. 이윤을 증대하기 위해 도입된 기계가 실업자들을 늘어나게 할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잘못된 예견이었다. 기계가 일자리를 대체하는 대신 기계를 만들기 위한 산업에 새로운 일자리가 산출되었기 때문이다.2. 계급없는 사회라는 이상의 문제점이다. 계급의 대립이 소멸되면 나머지 모든 인간적인 갈등 역시 소멸될 것이라고 본 맑스는 인간에 대한 지극히 소박한 생각을 지녔다. 또한 자본주의 하에서 경제적 계급 대립이 소멸한다고 해도 새로운 계급 대립이 나타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3. 맑스의 인간관과 국가관의 문제점이다. 맑스는 인간에 대해 너무 낙관적으로 바라보았다. 맑스는 자본주의체제가 제거되면 인간은 본래 이성적이고 선한 존재이기에 사회주의 사회는 완전한 우애와 협동으로 구성될 것이라 보았다. 이러한 맑스의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인 방법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논리적 한계를 가졌다.맑스 사상과 현대-> 맑스의 인간소외론은 자본주의의 끊임없는 자기 수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면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생산물과 노동에서 그리고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되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듯 맑스 사상은 여전히 우리가 살고있는 자본주의사회의 문제와 현실을 환기시키며 이 상황에 맞닿아있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를 되묻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키르케고르의 사상키르케고르는 인간은 실존이라고 주장하며, 보편적 이성이 아닌 인간 개개인의 실존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인간만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은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동물적 욕구가 충족되더라도 자신의 삶을 흔쾌히 긍정하지 못하며, 삶의 가치에 의다. 키르케고르의 철학은 기독교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하지만, 인간이란 어떠한 존재이고 인간의 삶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키르케고르는 인간이 삶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게 세 가지 삶의 방식을 택한다고 생각한다.1. 심미적 실존은 아름답거나 즐거운 것을 추구하는 실존이다. 이들의 관심은 아름다움과 유흥에 있고 그들에게 도덕적 선악은 중요하지 않다. 심미적 실존의 삶은 찰나적 쾌락의 연속에 불과하다. 따라서 심미적 실존은 인격을 가질 수 없으며 반성적 삶이 아닌 쾌락적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심미적 실존에게는 과거에 대한 성찰뿐만 아니라 참된 미래에 대한 구상도 없다. 키르케고르가 보기에 심미적 실존은 향락의 노예일 뿐 주체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다. 심미적 실존이 추구하는 즐거움은 변덕스러운 기분이기에, 오래지 않아 권태,우울,절망이라는 기분으로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2. 윤리적 실존은 삶의 원리로 도덕적 선을 추구한다.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삶의 원리로 도덕적 선을 삼는다는 것이 언제나 선을 택하고 행한다는 뜻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를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는 것’에 둔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견해는 인간에게 선천적인 도덕법칙이 내재한다고 본 칸트의 견해에 대한 부정이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도덕적인 인간은 선천적인 존재가 아닌 자신의 선택에 의한 존재인 것이다. 윤리적 실존은 인격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죽음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윤리적 실존에게 있어서 죽음은 회피의 대상이 아니라 초월의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윤리적 실존은 철저한 정신주의자이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순수한 윤리적 실존이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3. 심미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 모두 절망으로 끝나게 되면서 인간은 실존의 마지막 단계인 종교적 실존으로 도약하게 된다. 키르케고르는 우리가 자각적으로 신에게 귀의하는 것을 통해서만 참된 자신이 된다고 말한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을 단독자로 만들고 학문 활동에 욕심이 없고 지배하는 데 관심이 없으며 자신에 대한 수련이 되어있기에 대중들을 훈계하고 감화할 수 있는 종교자를 이상적으로 보았다.니체니체는 전쟁이나 산업혁명의 폐해, 전통 형이상학의 붕괴로 근대를 지배하고 있던 니힐리즘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니체는 이러한 시대상을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평가한다. 신의 죽음이란 인간에게 가장 성스러운 존재였던 신이 사라졌으며 그로 인해 인간은 삶의 가치와 방향성을 잃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것은 니체에게 있어서 결코 부정적인 상황이 아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이란 오히려 새로운 가치의 설정을 할 수 있는 계기라고 보았다. 인간은 신의 죽음을 통해 니힐리즘을 극복할 방법이 인간 외부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니힐리즘의 극복은 인간의 자기 강화로부터 이뤄진다. 인간은 현실의 무상함과 고통을 긍정하고 자신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한 무상함과 고통을 자신의 힘을 즐길 수 있는 기회로 전환하는 정신력이 진정한 극복을 가능하게 한다. 니체는 이 정신력을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힘에의 의지는 이성과는 다른 것이다. 또한 주위에 있는 인간들이나 사물들을 억압하려는 의지와도 다르다. 힘에의 의지란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생성’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생성이란 힘에의 의지의 자기 초월 운동을 뜻한다. 인간에게 삶은 자기 유지가 아닌 자기 고양 운동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가치문제를 고찰할 때 양심과 원한에서 도덕의 기원을 찾는다. 니체는 기존에 상식으로 통용되던 모든 가치의 개념을 전복한다. 니체에게 나 외부에는 어떤 가치도 실재하지 않는다. 모든 가치의 근원은 힘에의 의지이며, 생산된 가치는 이 힘에의 의지를 고양하기 위해 작용한다. 니체에게 가치는 선과 악 대신 좋음과 나쁨으로 판단되는데 여기서 좋음과 나쁨을 가르는 기준은 힘에의 의지다. 니체는 이런 힘에의 의지의 관계를 기반으로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구분한다. 동정이나 연민에 대한 권과 힘에의 의지의 고양을 위해서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강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니체의 철학을 근거로 개인의 삶의 태도를 형성한다면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스스로를 긍정하며 스스로의 힘에의 의지를 고양해가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모든 가치는 스스로 설정하고, 선악이 절대적이지 않은 니체의 철학을 스스로가 아닌 타인이나 사회에 적용하면 문제가 생긴다. 특히 니체의 철학을 통치이념으로써 사용한다면 나치즘과 유사한 형태의 통치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하이데거1.전기사상하이데거는 우리 인간 혀 ㄴ존재의 존재구조에 대한 분석을 실마리삼아 존재의 근원적인 의미를 묻고 있다. 모든 존재자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있고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인간의 존재 성격을 ‘실존’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존재의 근원적인 의미를 항상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경우 인간은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영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회적으로 승인된 사고방식, 생활 방식으로 갖춰진 틀에 따라 살고 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인 실존이라고 규정한다. 현존재는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과의 관계는 우리 삶에 필연적으로 속하며 우리는 존재자들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진공상태에서 살 수는 없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세계-내-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을 존재자들과 관계하기 이전에 이미 개시되어 있는 전체적인 지시 연관인 세계 내에 거주하면서 존재자들과 관계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세계-내-존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자가 서로 통일된 전체를 이루면서 인간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드러나 있는 상태를 진정한 의미의 세계라고 부른다.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에 처했을 때 일상적인 삶의 공허함에 직면하게 된다. 죽음이란 단지 삶의 종점이 아니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