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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트겐슈타인 후기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후기 철학을 중심으로서론I. 비트겐슈타인의 생애II.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과 전환III.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맺음말머리말인간은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그 뜻한 바를 주고받는다. 언어는 음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활자로 나타나기도 하며, 형태 없이 생각 속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철학을 함에 있어 언어가 없다면 어떻게 철학을 할 수 없다. 철학의 도구인 언어에 대한 성찰과 고민 없이 언어를 이용해 철학하는 것은 파도 한 번에 쉽게 무너질 모래성과 같겠다.당연히 언어에 집중하여 언어를 분석하고, 그 성질을 밝히고자 한 철학의 사조를 주로 “(언어) 분석 철학”이라고 지칭한다. 분석철학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의 언어 철학으로,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주목한 철학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일상에서 언어의 사용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규정코자 하는 일상언어분석가들의 철학이다. 양자 모두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친 이가 바로 본문에서 주목하는 비트겐슈타인이다.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은 1889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1951년 영국에서 사망한 20세기 분석철학자이다. 그는 단행본 한 권, 논문 한 펀, 서평 한 편만을 발표했지만 20세기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철학자 중 한 명이며,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는 젊은 시절의 철학을 치열하게 비판, 반성하여 또 다른 저작『철학적 탐구』등을 남겼다. 그가 철학사에 있어 남긴 족적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혹자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말을 비틀어 “흔히 모든 철학은 플라톤에 대한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에는 ‘비트겐슈타인 이전까지’라는 단서를 덧붙여야 한다.”고 평하기도 했고, 『서양철학사』를 남긴 버트런드 러셀은 “가장 완벽히 전통적 천재관에 부합되며, 열정적이고 심오하며 강렬하고 지배적인 천재”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나 칸트와도 비견되는험한다. 그는 이러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자신의 체험과 함께 철학적 생각들을 기록해 나가고 있었다. 29세가 되던 1918년 여름, 휴가 중이던 오스트리아의 할레인에서 자신의 종군 노트를 바탕으로 그는 마침내『논리철학논고』를 완성하였고 11월 휴전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전쟁 포로가 된다.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논리철학논고』를 집필한 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고, 그런 만큼 그는 철학을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1919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그는 재산을 모두 정리한 다음, 약 10여 년 간 철학계에서 은퇴한다.그럼에도 케임브리지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있었고, 그의 친구였던 경제학자 케인스와 램지 등이 그의 복귀를 추진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1920년 초 결성된 비엔나 서클의 사람들과도 교류하게 된다. 비엔나 서클 사람들과 램지 등 일련의 철학자들과 접촉하게 되면서, 비트겐슈타인은 점차 자신의 전기 견해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깨달았다. 드디어 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케인스의 영접을 받으며 케임브리지로 돌아오게 되었다. 케임브리지에 돌아온 그의 최초 신분은 램지를 지도 교수로 하는 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는 이미 케임브리지의 스타였으며, 이내『논리철학논고』를 학위 논문으로 삼아 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 당시 재산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던 비트겐슈타인은,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곧 바로 5년짜리 특별 연구원 자리를 신청하게 되는데, 이때 샘플로 제출한 원고가『철학적 고찰』의 일부이다.케임브리지로 돌아온 이후 1929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기간은, 일종의 전환기라 부를 수 있는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강의와 더불어 방대한 양의 원고를 작성하였다. 이때 저술된 원고들에는 전기의 견해와 후기의 견해들이 부분적으로 공존하고 있는데, 이들 저작들을 통해서 우리는『논리철학논고』의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철학적 탐구』를 중심으로 하는 후기의 견해로 분석을 철학의 본질로 이해했다. 러셀은 복합 관념을 ‘구성 관념’들로 나누는 분석을 시도했고, 동시에 가장 작은 단위인 ‘원시 관념’까지 분석했다. 여기에 단지 기호를 붙여 복합관념들을 논리 기호의 결합으로 나타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 개념은 언어를 지나치게 단순화 하는 경향이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프레게와 러셀의 분석 철학을 계승하여 『논리철학논고』의 언어 이론을 그림이론과 명제 진리 함수론을 통해 발전시킨다.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대해 말하려면, 명제들이 세계와 직접 관련을 맺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 보는 명제일지라도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명제가 사실의 그림이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명제와 그림은 공통점이 있다. 그림을 통해 우리는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으며 그 상황을 알 수 있다. 명제 역시 마찬가지이다. “명제는 그 뜻을 보여준다. 명제는 만약 그것이 참이라면 사물이 그러하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명제가 묘사하는 상황을 공간적 그림이 아닌, 논리적 그림이라고 밝히며 그림과 상황이 대응되는 관계를 논리적이라고 말한다.명제가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첫 번째는 명제와 사실의 구성요소가 일대일로 대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대상이다. 이 대상으로 구성되는 기본적 사실이 원자적 사실이다. 원자적 사실들은 복합적 사실을 이룬다. 복합적 사실의 총체는 세계이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본 단위인 이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름-요소명제-복합명제-언어로 이어지는 것이다. 대상/이름-원자적사실/요소명제-복합적사실/복합명제-세계/언어의 도식인 것이다.두 번째는 명제와 사실이 논리적 형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가 사실의 그림이라는 것은 언어와 세계 사이에 공통된 어떤 것을 가정해야 한다. 이 공통된 것이 바로 논리적 형식이다. 논리적 형식을 바탕으로 명제와 사실의 구성요소들은 같은 방식으로 배열된다. 논리적 형식을 통해 명제가 지칭하는 사실야 한다는 그림이론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조용필이 있겠다. “조용필”과 “가왕”, 그리고 한국외대 철학과에서 논리학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게 “도깨비”는 같은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각각의 말들은 같은 의미를 전달해 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한계들은 언어에 엄격하게 어디서나 따르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규칙은 없다. 그 규칙을 억지로 찾고자 한다면, 어떤 언어는 전혀 의미가 없고 사용될 수 없다고 간주될 수 있으며, 혹은 억지로 규칙을 적용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의 그림 이론은 일상 언어 전체에 적용되기 보다는 일부분에서만 적용되는 것이겠다.비트겐슈타인은 다시 케임브리지로 귀환한 1929년부터 전환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 기간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철학을 진리 함수뿐만 아니라 언어이론까지도 비판하게 된다. 『철학적 탐구』를 구상하고 집필하는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의 방법론과 철학을 하나의 이론으로 묶고자 했던 열망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기의 저서들을 통해 『논리철학논고』의 논지를 논박하게 된다.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은 일상적 명제들이 명료하고 명확하기에 충분히 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어에 의하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견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요소 명제에 관한 것이며, 또 이것과 진리 함수와의 관계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명제가 특정한 하나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후기 철학에 이르러 이러한 생각에 대해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사고에 틀을 지웠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명확하지 않은 그림은 결코 누구의 그림도 아니며, 그것을 명확한 그림으로 바꾸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고,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가끔 명확하지 않은 그림이 아닌가 하는 자기비판을 진행했다. 그리하여 그는때 경험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이러한 생각을 펼쳤다. 어린 아이들은 언어를 습득할 때, 다음 과정으로 나아감에 있어 새로운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새로운 경험들과 훈련들이 삶에서 중첩되어 감에 따라 완전한 언어 습득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나아가 언어를 습득하는 훈련의 과정 속에 있는 사람들의 삶의 행태가 같기에 언어는 서로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이것이 언어 습득의 ‘과정들’이다.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삶의 형태를 상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언어 놀이’라는 말은 언어 사용의 다양성을 지칭하거나,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 이상을 말한다. 놀이는 지켜보는 것보다 함께 참여하며 활동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언어가 놀이라면 우리는 직접 언어 속에서 활동해야 한다. 놀이의 규칙처럼 언어활동의 규칙은 우리 삶의 형태를 따라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언어로 표현되는 우리의 사고도 삶의 형식에 따라 이루어지며, 우리 삶의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언어를 놀이로써 파악함은 언어의 다양성과 같은 놀이에서 놀 수 있도록 묶어주는 삶의 형식이 있음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언어 습득의 ‘활동들’이다.본 절에서는 이렇게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속에서 언어 놀이의 세 가지 특징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이제 핵심 개념 중 하나인 가족 유사성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III-2. 가족 유사성『철학적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쓰는 한 단어에 공통의 개념을 뽑아내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공통된 것을 제시하는 것 대신에, 이러한 현상들에는 우리가 모든 것에 대해 동일한 말을 사용하는 그러한 하나의 공통된 것이 없고, 오히려 그러한 현상들은 여러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가족 유사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족 유사성을 통해 단어들의 의미가 보편적인 공통점을 갖는.
    인문/어학| 2021.03.29| 7페이지| 2,500원| 조회(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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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트겐슈타인 전기철학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 『논리철학논고』를 중심으로서론I. 비트겐슈타인의 생애II. 『논리철학논고』의 구성과 내용III. 『논리철학논고』의 언어맺음말머리말『논리철학논고』(論理哲學論考,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1922)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분석철학자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이 생전에 출간한 유일한 철학, 특히 분석철학 단행본이다. 이 『논리철학논고』는 소위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이 경구로 표현되어 있다. 『논리철학논고』는 두 가지로 매우 유명하다. 첫 번째는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로 대표되는 그의 전기 철학이 담겨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지극히 난해하며 복잡하다는 점이다. 그의 저작은 매우 간단해보이지만 함축적이면서도 확고한 선언들로 이루어져있다. 반면 이에 대한 엄격한 논증이나 부가적인 설명은 턱없이 부족하다. 아예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비트겐슈타인은 결코 『논리철학논고』를 독자를 위해 쓴 것은 아닌 듯하다. 독자들이 그의 선언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한 주석이나 메모를 남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독자들이 그와 함께 사유하고 고민하며 철학할 것을 요구한다. 그 자신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논리철학논고』는 “이 책 속에서 표현된 사고들을 스스로 이미 언젠가 해본 사람만이 이해”할 저작이다. 다시 말해 비트겐슈타인 사유의 방식을 끝까지 추구하면서 그 답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만이 이 저작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철학을 한다는 것이 그저 이전에 먼저 살다간 철학자들의 사유에 따른 결과물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유의 방식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이 『논리철학논고』는 실로 철학적인 저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비트겐슈타인은 언어분석철학자 중 한 명이다. 언어분석철학은 언어에 집중하여 언어를 분석하며, 그 성질을 밝히고자 하는 철학의 한 갈래이겠다. 인간은 철학뿐만이 아니라 기초적인 사유와 그 전달까지도 언어를 비트겐슈타인은 제트엔진 설계에 몰두하고 프로펠러 설계로 특허를 따기도 한다. 항공공학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키다가 유체 역학을 공부하던 그는 우연히 러셀의 『수학원리』를 접하게 된다. 1911년 가을, 비트겐슈타인은 드디어 러셀을 만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1년 반 정도 케임브리지에서 러셀과 함께 철학을 공부하였다. 러셀로부터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은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철학으로 완전히 진로를 정하게 된다. 러셀은 1년 후 더 이상 그에게 가르칠 것이 없고, 오히려 그가 자신을 앞서가고 있다고 느꼈다.1914년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면제 판정을 받은 상태였지만, ‘강렬하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 때문에 오스트리아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그 해 9월, 파리의 교통사고 재판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언어의 그림 이론에 대한 착상을 하였다. 그는 전쟁 기간 중 치열하게 사유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1916년, 그는 자신이 희망한대로 러시아 전선의 최전방 관측소에 배치되었고,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체험한다. 29세가 되던 1918년 여름, 자신의 종군 노트를 바탕으로 그는 마침내 포로수용소에서『논리철학논고』를 완성하였고 11월 휴전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전쟁 포로가 된다. 그는 『논리철학논고』를 프레게, 엥겔만, 러셀에게 보냈지만 셋 모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에도 나와 있듯이,『논리철학논고』를 집필한 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철학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고, 그런 만큼 그는 철학을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1919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그는 약 10여 년 간 철학계에서 은퇴한다.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빈 학파의 학자들과 접촉하게 된다. 빈 학파의 루돌프 카르납, 헤르베르트 파이글 등의 논리 실증주의자들을 만났다. 이를 계기로 비트겐슈타인은 1928년 3월 직관주의 수학자 브라우어의 비판을 일정 부분 수용하면서 점차 자신의 전기 견해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만족스럽지 못함을 깨달았다. 결국 1929년 비철학논고』에서 그 명제들이 지니고 있는 힘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n.1, n.2, n.3 등의 명제들은 n번 명제에 대한 진술들이다. 그리고 나머지 역시도 같은 방식으로 계속 진행된다고 했다.그러나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언급과 같이 『논리철학논고』 전체에서 각기 다른 소수들이 “논리적 무게” 즉, 논리적, 서술적인 중요성에 따라서 부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 의문의 여지가 있다. 먼저 위의 7개의 명제와 같이 소수점이 없는 명제를 간단히 『논리철학논고』의 “상위 명제”라고 부르고, 그 밑에 놓이는 소수점이 있는 명제를 간단히 “하위 명제”라고 부르기로 하자. 『논리철학논고』를 통틀어 볼 때, 어떤 경우에는 하위 명제가 상위 명제만큼 논리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눈에 띈다.예를 들어 명제 4.1212이다. 명제 4.1212는 “보여질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전기철학의 논리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명제 중 하나이다. 『논리철학논고』의 내용을 따르면 원자적 사실을 주장하는 (참 혹은 거짓인) 명제는 요소명제라 불리며 이것은 이름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그 이름 혹은 대상은 보일 수 있는 것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게 된다. 보여진 것은 이미 그 존재 자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에서 무어에게 구술한 단상들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언급하듯, “소위 논리적 명제들은 언어의, 우주의 논리적 속성들을 보여주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것들을 단지 바라봄으로써 이들 속성을 볼 수 있는 반면에, 진정한 명제에서는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참인 것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게 되는데,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는 전기 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명제가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하나의 결정적 과정으로서 명제 4.1212는 그보다 더 높은 소수를 배정르게 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에 답하기 위해 5번대 명제에서 그 준비 단계로 나아간다. 이를 위해 조작과 함수의 구분이 제시되고 진리 함수의 개념이 선명하게 규정된다. 또한 확률명제, 일반 명제, 등식, 태도 명제 등을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6번대 명제에서 『논리철학논고』는 결론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기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심화되고, 질문 (IV)에 대한 대답을 완성하며, 『논리철학논고』의 전체적인 의미로 나아간다. 이에 논리학, 수학, 자연과학 등의 명제들의 본성에 대한 논의를 마치고, 윤리학과 미학의 명제의 본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형이상학적인 것들에 대한 논의를 제시한다.그리고 마지막 7번 명제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며 『논리철학논고』는 마무리된다.III. 『논리철학논고』의 언어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은 ‘언어’이다. 철학을 하는 도구로서 언어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며, 이는 언어분석철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이 적어도 20세기 이후의 철학에 있어서 큰 장을 차지하는 이유는 바로 언어의 한계와 철학의 한계를 명확히 밝혔기 때문이다.본문 I ‘비트겐슈타인의 생애’ 장에서 이미 비트겐슈타인의 전 생애를 재구성하고 살펴보면서 간략하게 언급했듯,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크게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되는 전기 철학과 『철학적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 철학으로 나눌 수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대표작인 『철학적 탐구』의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철학적 탐구』는 오직 『논리철학논고』라고 하는 “옛 사고의 배경 위에서 대조함”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기에, 『논리철학논고』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비트겐슈타인이 가지고 있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많은 선행연구에서 지적하듯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규정하여 철학, 즉 언어를 도구로 이용하는 사유의 한어야”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대상이다. 이 대상으로 구성되는 가장 기본적 사실이 바로 원자적 사실이다. 이러한 원자적 사실들은 관계를 맺으며 복합적 사실을 이룬다. 이러한 복합적 사실의 총체는 세계이다.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장 기본 단위인 이름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름-요소명제-복합명제-언어로 이어지는 것이다. “명제의 총체가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간략히 정리해 볼 수 있겠다.대상/이름 ? 원자적 사실/요소명제 ? 복합적 사실/복합명제 - 세계/언어두 번째는 첫 번째 조건과 도식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명제와 사실이 어떠한 논리적 형식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가 사실의 그림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대전제는 필연적으로 언어와 세계 사이에 공통된 어떤 것을 가정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비트겐슈타인은 “그림을 구성하는 것은 구성 요소들이 확정적 양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는”다는 것임을 선언한다. 이 공통된 것이 바로 ‘논리적 형식’이다. “그림의 요소들이 확정적 양식으로 서로 관련된다는 사실은 사물들이 동일한 양식으로 서로 관련”되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요소들의 연쇄를 ‘그림의 구조’라 했으며, 그 가능성을 ‘그림형식’이라 부른다. 이러한 논리적 형식을 바탕으로 하여 명제와 사실의 구성요소들은 같은 방식으로 배열된다. “그림은 그것이 묘사하고 있는 것과 공통으로 논리-그림 형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논리적 형식을 통해 명제가 지칭하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논리적 형식이 존재하기에 그 역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세 번째는 명제와 사실 사이에는 그 구성 요소들을 연결시키는 투사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투사 규칙이란 명제에서 사실을 이끌어내고, 반대로 사실에서 명제를 이끌어낼 수 있게 해주는 규칙을 뜻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직관적인 예시로 음악과 악보의 관계를 들었다.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음악가가 악보로부터 교향곡을 얻어내는 것, 또한
    인문/어학| 2021.03.29| 8페이지| 2,500원| 조회(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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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 비판적 검토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 비판적 검토-교학사 『고등학교 동아시아사』와 『고등학교 역사부도』II, III단원에 나타난 중세를 중심으로I. 머리말II. 교학사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서술 검토III. 교학사 『고등학교 역사부도』 지도 검토VI. 맺음말I. 머리말동아시아사 과목은 2007년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에서 처음 고등학교 역사과 선택 과목으로 신설되었다. 그러나 이 교육과정에 대한 교과서가 집필되지 않은 상황에서 2009년 개정이 이루어졌고, 이에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교과서가 집필되었다. 이 교과서는 2011년에 검정을 통과하여 2012년부터 현장에서 교과목에 대한 수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일국사적,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동아시아사에 대한 이해와 동아시아 지역의 공동발전과 역사적 화해를 위한 수업이 현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정에 대한 충분한 논의 없이 도입하였다는 점, 교육과정 개정이 이루어진 이후에서야 교과서가 집필된 점, 처음 교육과정이 논의되고 4년이 지난 후에야 검정이 이루어진 점 등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또한 현장에 도입되지 않은 2015년 개정까지 총 3회의 개정 이후에도 아직까지도 서술이나 지도 등에 있어 비판점이 존재한다.본문은 그러한 동아시아사 과목의 교학사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교과서와 동 출판사의 『고등학교 역사부도』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특히 중국 중세사 부분이 서술되어 있는 II, III단원을 중심으로 그 서술과 지도를 중점적으로 살펴보려 한다.본문에서 교과서 이외에 역사부도 역시 검토하는 이유는 역사부도가 역사교육의 목적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달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역사부도는 지도와 연표 등을 교육과정에 맞게 재구성하여 줄글로 된 교과서의 이해를 돕는다. 그렇기 때문에 교과서의 내용을 시각화, 구체화해야 하며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역사부도를 검토하는 것은 교과서 비판과 마찬가지로 그 발전세계의 성립]과 III단원 [국제 관계의 변화와 지배층의 재편]이다. 그러나 II단원에는 한대부터 서술되어 있고, III단원은 명대까지 서술되어 있어 고·중세와 중·근세가 섞여 단원 구분에 따라 나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서술의 범위는 단원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닌, 중국의 조위(AD220)대부터 원(AD1368)대까지 왕조 기준으로 하고자 한다. 이에 본 교과서의 중국 중세부분 서술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자면 다음과 같다.가. 한·중·일에 치우친 역사서술과 유기적이지 못한 역사 서술동아시아사 과목은 전술했듯 동아시아사에 대한 이해와 동아시아 지역의 공동발전과 역사적 화해를 위해 신설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서술은 동북아시아 지역, 특히 한·중·일 삼국의 역사서술에 집중되어 있는 모습을 보이며, 한국 중심의 서술, 한국사 위주의 서술을 찾아볼 수 있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베트남과 관련한 부분이다. II, III 단원의 전체 내용 중 베트남, 혹은 대월에 대해 언급되는 것은 단원 앞 연표를 포함하여 14차례뿐이다. 이는 중세뿐만 아니라 모든 시기에 대한 서술에 있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판점이다.또한 동아시아사 과목이 관계사 중심의 서술을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중·일 삼국의 역사적 사건을 중국을 중심으로 단순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시대별로 경향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살펴볼 때 이러한 모습이 두드러진다. 42쪽 ‘삼국과 왜, 경쟁을 통해 발전하다’부분을 살펴보면 고구려의 국가발전, 백제의 국가발전, 신라의 국가발전, 일본의 국가발전을 차례로 나열하는 모습을 보인다. 43쪽 ‘각 지역에 통일 국가가 들어서다’부분 역시 백제의 멸망, 고구려의 멸망, 나당전쟁, 발해 건국, 왜의 중앙집권화, 베트남의 통일이 차례로 나열된다. 삼국의 형성과 발전, 멸망하는 일련의 과정은 중국대륙의 혼란과 다원적·중층적 외교관계의 형성에 따라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역별로 단순 나열하는 서술은 현장의 력으로 동북아시아 세력균형을 유지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지만 고려의 실상을 살펴본다면 이는 옳지 않다. 금이 요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이자겸 등 권문세족은 고려의 주체성 보다는 개인의 세력기반을 유지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 금을 등에 업고 권력을 얻은 이자겸은 주체성을 잃고 금의 내정간섭을 허용했다. 또한 고려와 일본, 류큐의 교류에 관해서는 고려가 중심이 되어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75쪽 소단원 ‘고려, 세력균형을 유지하다’의 서술은 민족주의적 시각에 입각해 동아시아사 과목의 당초 개설 목표와 어긋난다고 평가할 수 있다.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대한 지나친 서술 간략화위진남북조는 후한이 멸망한 이후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중국 대륙에서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이 대립하며 여러 국가가 흥망성쇠를 거듭한 혼란기이다. 그만큼이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동이 존재했다. 그러나 위, 진, 5호 16국 시대에 대한 서술은 8줄에 지나지 않는다. 남북조를 포함하면 2페이지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진을 멸망으로 이르게 하고 5호 16국 시대의 막을 열게 한 팔왕의 난, 유목민족에게 최초로 한족이 중원을 빼앗긴 영가의 난에 대한 서술이 없다. 한 멸망의 서술에 있어서는 ‘황건적의 난’이라는 사건에 대한 간단한 언급이 존재했던 것과 대비된다. 진의 멸망에 대한 서술에는 ‘왕위 다툼으로 진의 세력이 약화되자 …(후략)…’라는 말로 대신한다. 영가의 난에 대한 서술은 전혀 없다. 5호 16국이라는 한 시대를 여는 사건에 대해 어떠한 서술도 없는 것은 학생들의 중국 중세사에 대한 몰이해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사건에 역사적 의의를 두는 까닭은 한족 중심으로 중국 역사를 바라보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다만 중원지역을 지배한 통일 왕조의 멸망과 관련한 사건이자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융합되는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또한 남북조 시대에 대한 서술 중 남조의 청담사상 유행과 관련하여 단순히 청담사상을 방관적이고 귀족적인, 부정적인 사 금의 흥기를 서술하는 단원에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기존 5호 16국 시대 이후 국제정세를 활용한 중국 주변의 국가들의 노력을 무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74페이지에는 현장 학생들에게 생소할 맹안모극제를 소개하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다.이러한 크고 작은 서술의 문제들은 현장의 학생들이 중세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위험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겠다.III. 교학사 『고등학교 역사부도』 지도 검토교학사의 『고등학교 역사부도』는 180쪽 분량에 목차, 역사부도 활용하기, 역사의 의미와 학습목적에 이어 본문은 [한국사](6~83), [세계사](84~131), [동아시아사](132~166), 그리고 주요왕조계보, 연표, 찾아보기, 인용자료 출처를 표시한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본 역사부도의 [동아시아사]에서 중세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역사지도에 대해 서술해보자면 다음과 같다.단원지도명 (쪽수)지도 내용II. 동아시아 세계의 성립03. 동아시아 세계의 형성과 발전5호 16국의 혼란(139쪽)-5호의 본거지와 이들이 건국한 국가를 표시하고, 북연은 고구려와 요하를 경계로, 고구려 남쪽에는 백제, 신라, 가야가 있다.-고구려와 백제는 양자강 남쪽의 동진에 조공책봉관계에 놓여 율령, 블교를 받아들였으며,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한 것을 표시했다.남북조시대의 전개(139쪽)-북위의 건국 전후 영역을 표기하고 남북조와, 한반도, 왜의 국가와 조공 책봉 관계를 표시한다.-지도 설명으로 “고구려는 남조와 북조에, 백제는 남조에 조공하여 책봉을 받아 왕권을 안정시키려 하였다. 백제는 왜가 송에 조공하여 책봉을 받도록 도왔다.”라고 서술했다.수당 시기의 동아시아(139쪽)-수, 당의 최대 영역을 표시하고 있는데, 동쪽은 발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수, 당과 주변국과의 관계는 신라, 토번, 남조, 진랍, 참바는 수당에 조공책봉관계이고 일본은 조공만 하는 관계이다. 발해 역시 당에 조공책봉관계로 표기되었다.05. 동아시아의 불교 표시하고 있다.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1274,1281)(145쪽)-1차 원정은 고려 남쪽에서 출발하였고, 2차는 고려 남부에서 동로군/화북지역에서 강남군이 출병한 것으로 표시하고 있다.신안선 항로(145쪽)-원과 고려, 일본 간의 교류로를 표시하고, 교류의 사례인 원과 일본 사이를 오가던 신안선이 신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지점을 표시하고 있다.07. 동아시아의 산업발전과 새로운 지배층의 등장송의 산업지역(146쪽)-지도 설명에서 “송대에는 양쯔강 유역과 그 이남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고 새로운 농법이 시행되어 농업 생산력이 발전하였다”고 서술하며 벼, 밀, 보리, 수수 재배지역과 차, 소금 산지를 표시하고 있다.강화도 간척 사업(146쪽)-지도 설명에서“고려는 12세기에 간척 사업을 시작하였다.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를 비롯한 섬 지역의 농경지를 개발하였다, 조선도 적극적으로 간척사업을 추진하였다.”고 서술하며, 간척지와 방조제를 표시하였다.이에 대해 검토한 바는 다음과 같다.우선 본문의 II. 교학사 『고등학교 동아시아사』 서술 검토 부분에서 지적했듯 전체적인 지도의 내용이 한·중·일 삼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 또한 아직도 한국 중심의 서술이 나타난다는 점에 대해 다시금 지적할 수 있겠다. 특히 동남아시아 지역을 다루는 지도는 전무하다시피하다. 후한 이래로 중국 왕조에 복속되었던 베트남의 경우에는 중국의 중세 동안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고 10세기 이후로는 중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지만 이에 대한 지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균형적 이해를 추구하기 위한 동아시아사 과목 지도로는 부족한 모습이다.역사부도 III-06-거란(요)의 성장과 동아시아(11세기) 지도에서 요는 영역의 남쪽 일부만 보이고, 송이 중심에 위치하고, 지도 설명 역시 “송은 연운 16주를 회북하기 위해 요와 싸웠으나, 문치주의로 국력이 약화되어 패하였다. 그 결과 요와 형제관계를 맺고 은과 비단을 바쳤다”고 서술한다. 이렇듯 거란에 대해 설명하는 지도라면 였다.
    교육학| 2018.06.17| 9페이지| 2,000원| 조회(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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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를 통해 본 전후 동독사회의 형성(쉰들러리스트, 타인의 삶)
    영화를 통해 본 전후 동독사회의 형성- ‘쉰들러리스트’와 ‘타인의 삶’에서 나타난 사회상을 중심으로목차머리말본문 I.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타인의 삶’본문 II. 전후 동독사회의 문제와 그 기원맺음말참고문헌머리말1945년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던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연합국은 얄타 회담을 통해 독일을 분할 점령한다. 소련은 동독지역을 점령했다. 소련은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을 강제로 합병하여 사회주의통일당(Sozialistische Einheitspartei Deutschlands, SED)을 만들고, 이 사회주의통일당은 이후 동독의 집권당이 된다. 이렇듯 동독은 사회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냉전시대를 보냈고, 반공을 국시로 삼았던 대한민국과는 단절된 국가로 지냈다.그러나 동독은 이미 30여 년 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관심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특히 동독은 분단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우리사회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또한 ‘존넨알레’(1999), ‘굿바이, 레닌!’(2003), ‘타인의 삶’(2006) 등 영화를 통해 재현된 동독사회는 문화적 기억으로, 우리사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을 받아왔다. 실재를 담아낸 이러한 영화는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 사회상의 기록이다.남북관계가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로 밝은 현재, 우리는 북한을 생각하며 동독사회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는 이러한 필요성과, 영화가 가진 ‘기록’으로서의 특징을 주목하며 동독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타인의 삶’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당시 동독의 사회상을 살펴보려 한다. 또한 ‘타인의 삶’의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또 다른 영화에 대해 살필 필요성을 느꼈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동독사회의 문제점은 이미 나치독일에서 확인한 바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나치독일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쉰들러리스트’(1993) 역시 함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본문은 전후 탈나치화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왜 또 다시 술, 담배 등을 뇌물로 바치며 갖은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또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돈 한 푼 안들이고 유태인을 이용한다. 전쟁 물자를 공급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던 그는 한편으로는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과 가까워지게 된다. 스턴은 쉰들러가 가진 이기주의와 양심을 흔들어 놓게 된다. 스턴에게서 유태인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나치의 살인에 대해 들은 쉰들러는 자신의 눈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그러한 현실 직시는 마침내 그의 양심을 움직이고, 쉰들러는 비양심적 축재라는 탐욕에서 벗어나 유태인을 강제 노동 수용소로부터 구해내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들 일명 이 유태인을 과연 어떻게 구해낼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동수용소 장교에게 뇌물을 주어 설득하고자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의 마무리는 그들을 독일군 점령지인 크라코우로부터 탈출시켜 쉰들러의 고향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결국 쉰들러는 스턴과 함께 유태인 명단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소재가 되었던 쉰들러 리스트이다. 결국 그의 모든 계획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 서있던 1,100명의 유태인을 폴란드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1945년 전쟁이 종식되고 러시아 군대가 동유럽을 자유화 시켰을 때, 쉰들러는 연합군으로부터 잡히지 않기 위하여 공장 주변의 나치 당원들을 집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하면서 자신도 연합군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쉰들러가 연합군으로부터 도망을 가기 전, 자신이 살아있다는 안도감보다는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리게 된다. "왜 나는 더 많은 유태인들을 구해내지 못하였는가?" 그리고 유태인들은 그를 위해 금을 모아 반지를 만들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글귀를 새겨준다. 이 문구를 본 쉰들러가 울며 영화는 끝난다.나치독일의 만행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쉰들러 개인에 집중한다. 그의 변화된 모습과 고뇌가 작품을 이끌어간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작품에서 쉰들러 개인보다는, 감독이 의도했듯 나치독일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8일 당의 방패와 검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소련의 국가안전부를 모델로 만들어졌다. 동구권 최고의 정보기관이었으며, 전국민 감시 프로젝트를 통해 동독 사람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던 동독판 ‘안기부’라고 할 수 있다. 198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슈타지 요원 비즐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비즐러는 자신이 맡은 죄인 혹은 감시해야 할 대상에 대해 냉혹하게 원칙을 지키며, 그 일에 사명감을 지니면서 일을 하는 요원이었다. 전술했듯 슈타지는 당 지배 체제 유지를 위해 반대자를 처리하는 역할을 했고, 이 과정에서 사용되었던 수단이 바로 도청이다. 비즐러는 당대 최고 극작가인 드라이만과 여배우 크리스타를 도청하는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예술가인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를 감시하고 난 후 냉혈적이었던 그의 모습이 이들의 삶에 감정이입 되어 점차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사람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그는 점차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기 시작하며 그들의 감시자가 아닌 조력자의 역할로 돌아선다. 이러한 면모를 보이는 것이 바로 타자기를 찾는 일이다. 그가 감시하는 이들에게는 이상이 없다고 상부에 보고하면서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는 위기를 넘긴다. 그러나 비즐러는 그 과정에서 그가 그간 해왔던 슈타지로서의 일에 후회와 자책을 느낀다.영화 포스터 속의 ‘난 그들의 삶을 훔쳤고 그들은 나의 인생을 바꿨다’라는 글이 이 영화를 설명해 줄 수 있는 한 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제목인 ‘타인의 삶’은 국가의 사상, 체제 하에서 철저히 규율을 지켜가던 비즐러가 ‘드라이만’과 ‘크리스타’라는 ‘타인’의 삶을 감시, 도청하면서 그들의 삶에 동화되어 갔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비즐러에게도 같은 감정을 느끼게 했고, 그것은 비즐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국가와 사상에 대한 신념이 변화하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얼핏 보면 이 영화는 고뇌 속에 부당한 권력에 맞서 소심한 반항을 하는 개인의 이야기를 그린 것만 같다. 그러나 우리는 동독 체제가 가졌던 부당한 억압과 감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상, 즉 나치독일과 동독의 사회상에서는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차이점 역시 존재한다. 나치독일이 주장했던, 순수 아리안의 우월성으로 포장된 극단적 민족주의와는 달리 동독은 사회주의의 이념적, 역사적 정당성이라는 명분의 차이는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테다. 명분이 다르기에 그 대상 역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이러한 차이점이 아닌, 거대한 공통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것은 곧 전후 동독사회의 문제, 바로 자유의 부재, 사상적 신념, 또한 악의 평범성이다.첫 번째는 자유의 부재이다. 국민에 대한 국가권력의 억압과 감시는 이러한 상황이 형상화된 구체적인 상황이다. 나치독일은 친위대와 게슈타포를 통해, 동독은 슈타지를 통해 독일 국민들을 억압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는 친위대의 모습이 훨씬 비중 있게 등장하지만, 실제 나치 독일과 동독 모두 국가권력이 가지는 폭력성을 이용해 국민을 억압하고 감시했다.두 번째는 사상적 신념이다. 나치는 극단적이자 배타적 민족주의, 동독은 사회주의 이념에 도취되어 있었다. 단순히 이에 대해 집단적 광기라고 표현하는 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이로서 지양해야할 자세일 것이다. 나치 같은 극단적, 배타적 민족주의는 당시 1차 대전의 배상금으로 신음하던 독일 국민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로 인식되었다. 나치에 적극 가담했던 이들은 자신들이 행동이 옳다고 믿었으며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영화 ‘타인의 삶’에서 볼 수 있듯 비즐러는 사회주의에 대한 철저한 신념으로 무장하여 국민들을 도청한다. 물론 모든 개인을 동일선상에 놓고 바라볼 수 없으나 적어도 나치독일과 동독의 범법자들에게 있어 그들의 사상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의 도피처가 되었다.마지막으로 악의 평범성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도입한 개념으로 겉보기에 두드러지지 않는, 보통 악인으로 인식되지 않는 인물이 태연하게 일상적으로 끔찍한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의미를 이를 보여준다. 물론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공통점은 두 번째 지적한 공통점인 사상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큰 범주에서 다르지는 않지만 굳이 분리한 까닭은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것이 국가적으로 만연해있었으며, 그랬기에 더 평범한 얼굴로, 무감각하게 ‘악’을 자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지금까지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타인의 삶’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나치독일과 동독의 사회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에 대해 잠시 짚어보았다. 이외에도 수많은 공통점과, 동시에 지적되는 문제점들은 있겠지만 본문에서는 지면의 한계로 이 세 가지 문제만을 지적하고자 한다. 또한 이 세 문제의 원인에 대해 바라보기 위해 동독의 형성과정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한다.우선 동독의 형성은 전후 포츠담회담에서 이루어진다. 소련은 회담 결과 전쟁 이전 독일의 1/5에 해당하는 영토를 장악하게 되었고, 1948년 3월 20일 베를린 봉쇄가 행해지기 이전까지 동독은 서독과 함께 경제적으로는 한 단위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봉쇄 이후 각기 다른 통화개혁 등을 통해 분단의 길을 걷게 된다. 1949년 5월 8일 아데나워는 임시헌법을 가결시켜 5월 23일 독일 연방을 선언한다. 1949년 10월 7일 독일 민주공화국을 선포했으니 이것이 분단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 동독의 주요정책은 반파시스트 동맹의 형성, 소련 점령지역 내 탈나치화와 이를 통한 공산주의 세력 우위 확보, 토지개혁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울브리히트는 종전 직전 모스크바에 망명했으며, 소련은 그를 후원한다. 동독 정권 수립과 함께 부수상이 된 그는 강력한 친소 정책을 펼친다. 동독 내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사회주의의 다른 길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스탈린식 모형에 따르기를 원했다. 동독 정부가 수립되는 기간 동안 소련은 급진적 조치를 통해 스탈린식 모형 이식의 기초를 닦았고 실제로 울브리히트는 스탈린식 모형을 받아들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했던 반대파는 소련의 지원으로 숙청했다. 또한 스탈린식 모형에 반발한 동독 주민다.
    인문/어학| 2018.06.17| 6페이지| 2,000원| 조회(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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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현대사의 시작 1945-1950
    해 방 부터 한국전쟁까지 1945-1950 201000000 사학 과 000 한국 현대사의 시작 헬조선 개봉박두 !들어가기 전에한국 - 현대 現代 Contemporary = Con( 함께 ) Tempora ( 시대 ) 세계 2 차 대전 종전 ? 1989 냉전 종결 ? 포스트 - 모던 ? 1945 년 일제로부터 해방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벌어진 한국인의 역사 = 현재까지 진행됐고 , 진행되는 분단시대의 역사 한국현대사의 시작 헬조선 개봉박두 !지옥불반도 ? Hell + 朝鮮 : 극도로 침체된 한국의 현실을 여과 없이 보이는 단어 현재 대한민국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시발점 한국현대사의 시작 헬조선 개봉박두 ! 정의롭지 못한 사회 – 친일파 청산 실패 이후 자정 없는 사회 분단과 군대 – 미군정과 소군정 / 단독정부 수립 / 한국전쟁 색깔론 , 매 카시즘 – 미군정기 좌우익의 대립 / 친일 친공의 논리 피로 물든 현대의 시작 – 제주 4.3 사건 / 대구 10.1 사건 / 여순사건물론 해방 이후 사 람 들이 바라던 국가는이렇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합니다해방 이전 시기카이로 선언 ( 미 / 영 / 중 ) 1943. 11. 27~12.1 해방 전 조선건국동맹 결성 1944. 8 . 10 1945. 2.4~11 얄타 회담 8.6 / 8.9 히로시마 /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7.17~8.2 포츠담 회담 8 . 11 한국 광복군 국내정진군 편성 7.24 한국현대사의 시작 부민관 폭탄의거1945 8 15 – 해방 ! 한국현대사의 시작건국동맹 결성 한국현대사의 시작 여기 뒤 식물 카페가 데이트 장소로 좋습니다 . 솔로 화이팅 . 물론 저는 커플입니다 .1945 8 15 – 해방 ?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 몇 년을 애써 참전을 준비했다 . ( 중략 ) 그 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약하리라는 것이다 . - 백범 김구 한국현대사의 시작 국현대사의 시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다 ! 8 월 15 일 여운형과 총독부의 협상 ( 일본인 안전보장 ) 8 월 26 일 공식적으로 평양에 소련군이 진주 38 도선 이남 지역은 일본군이 치안 장악 ( 미군 이양 ) 9 월 4 일 박헌영 “ 미군당국과 절충할 인민총의의 집결체 필요 ” 9 월 6 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 개최 , 인공 선포 9 월 7 일 내각 구성 , 정강 발표 자주 통일 정부 수립 목적 , 정치적 주도권 장악 노력 미국과 교섭력을 높이고자 국가형태 조직 수립 수립 과정 및 배경조선인민공화국 ( 인공 ) 한국현대사의 시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니다 ! 중앙인민위원 55 명 – 민족주의 9 / 여운형계 10 나머지 대부분 재건파 이승만 주석 여운형 부주석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외무부장 김규식 재무부장 조만식 군사부장 김원봉 … 구성 그러나 성급히 구성하다보니 중요 정치지도자들과 협의 X 이승만 , 김구 , 김규식 , 김원봉 모두 동의 없이 임명미 군의 입성 한국현대사의 시작 8.11 38 선 한반도 분할론 제시 9.7 인천항 진주 , 맥아더 포고령 - 점령군임을 드러냄 - 인공 , 인민위원회 부정 - 친일관료 , 군 경 고용 9.9 서울 입성 총독부에 행정권 이양 받음 10.10 미군정 남한 유일정부주장 “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 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 (occupy) 한다 . 북위 38 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정부의 권한은 당분간 나의 관할을 받는다 .” - 맥아더미 군의 입성 한국현대사의 시작 친일 청산 1 차 실패 통역 정치 - 이묘묵 , 하지의 통역관으로 여운형과 인공 부정적이미지 조성 일제시기 인원 그대로 재고용 임정 , 인공 정치적 입지 축소 미군의 진주로 해방과 동시에 분단의 씨앗이 뿌려졌다 . 이북의 소련 역시 해방군의 모습을 한 점령군으로 미 - 소의 견제가 시작된다 .미군정의 선포 한국현대사의 시작조선인민공화국 ( 인공 ) 한국현대사의 시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 유보신탁통치 오보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신탁통치 오보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 오보사건 여운형 등 중도파 지지율 하락 좌익 지지율 급락 한민당 / 한독당 / 친미 지지율 급상승 미군정 집권 “ 좌익 = 찬탁 = 매국 ” 소련 / 좌익 견제 친반탁 대립 격화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분단 한국전쟁 이승만 대통령 당선 친일파 청산 실패 매카시즘 독재 - 사법살인 , 학살 윤리의식의 후 퇴 박정희 전향 독재 하나 회 양성 12.12 사태 반독재 김영삼 김대중 5 공 청문회 노무현 문재인 박근혜 촛불혁명 탄핵 반은 웃자고 하는 얘기입니다 . 미군정 집권으로1946 년비상국민회의 2.1 1946 민주주의민족전 선 2.19 3.20 1 차 미 / 소 공동위원 회 5.15 정판사 위조지폐사 건 6.3 정읍발언 9/23 9 월 총파업 좌우합작위원회 좌우합작 7 원칙 발표 10.7 한국현대사의 시작 북조선 인민위원회 대한독립촉성국민 회 2.8 10.1 대구 10.1 사건 12.12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이 사람이 이렇게 된 이 날은 3 월 14 일 저녁 11.30 서북청년당 결 성 3.5 북한 토지개 혁북한의 토지 개혁 한국현대사의 시작 “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 !” 5 정보 이상 소유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 지주층 몰락 , 월남 결국 김일성의 군중노선 다수를 장악하기 위한 전략으로 진행 김일성은 이를 통해 박헌영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북조선로동당 창당 이때 월남한 지주 계층은 반공우익단체 서북청년단의 일익으로 활동 그러나 토지를 분배한 후 현물세율 27% - 농민이 국가의 소작으로 전락 한국전쟁 이후 농민들이 자체로 농사로 지을 수 없다며 협동농장화 1946. 3.5남 한의 토지 개혁 한국현대사의 시작 1946 년 북에서 시행된 토지개혁 – 남한 농민의 불만 1948 년 5.10 총선거 앞두고 지지 확보 위해 신한공사 적산 귀속농지 매각 - 2 정보 한도 귀속농지 1 년치 생산량 3 배 가격 매각 매년 2 할씩 15 년 분할 상환 - 자작농이 일부 증가하는 결과 . 근본적 개혁 재판정에서 고문으로 허위 자백했음을 호소하기도 했다 . 이 결과 남조선로동당 활동은 금지 . 미군정의 위작과 조작 for 정치적 배제 오보사건과 함께 미군정의 정책에 따라 국내 정세가 바뀌는 사건대구 10.1 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 미군정 식량정책 실패 + TK 지역 콜레라 창궐 = 대구지역 출입 통제로 인한 쌀 부족 현상대구 10.1 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 정판사 위폐 사건 이후 공산당 불법화 , 간부 체포령 공산당은 이에 대항하여 9 월 총파업 진행 노동자와 농민 역시 미군정의 정책에 불만 농민 - 토지개혁을 실시하지 않는 미군정 노동자 – 식량배급 , 임금인상 , 노동운동 요구 친일부역자 처단하지 않는 미군정에 대한 불만대구 10.1 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 10.1 저녁 대구부청 앞에서 대팔연탄 노동자 황말용 / 철도노동자 김종태가 경찰 총에 맞아 사망 이튿날 폭력 시위 발생 – 경찰의 조준사격으로 대구 강경 진압 , but 시위 경상도 전역으로 확산대구 10.1 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 친일 경찰관 , 한민당 간부 , 우익청년단원들에 대한 시위대의 구타 경찰의 무자비한 보복 – 시위대 생매장 , 경로당에 모아 수류탄 투척대구 10.1 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 결국 수백의 사망자와 수만의 부상자를 낳고 사태 종결 9 월 총파업을 지 휘 했던 박헌영은 체포령을 피해 영구차 관 속에 들어가 비밀리에 월북대구 10.1 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 머리 좋은 놈은 살아남아 한 자리 하고 , 욱하는 놈은 열사가 되어 그 머리 좋은 놈들이 출세하는 데 한 번 더 이용된다 . 박헌영의 책임을 부정할 수 없다 친일고등계 형사들을 대거 미군정 경찰 요직에 등용시켜 이들을 공산주의 타도의 선봉장으로 삼는 것을 비판한 최능진에 대한 조병옥의 대답 “ 그들은 Pro-Jap 이 아닌 Pro-Job”정읍발언 한국현대사의 시작 “ 남방만의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조직이 필요 ” 사회 각층의 비난 사회주의자 – “ 늙은 파시스트 ” 미군정 장관 – 유보 단독정부 개념을 한반도에서 최초로 공식석여한 경찰 해임 - 서북청년단 충원 제주 남로당 무장대의 경찰 습격 – 계엄령 선포 한라산 일대 지역 주민들 빨갱이로 간주 , 사살 저녁에는 빨치산이 군경에 협조한 서민 학살 오라리 방화 사건 등 학살 지속제주 4.3 사건 한국현대사의 시작 이념과 상관 없이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이는 , 광기의 현장 조병옥 “ 대한민국을 위해서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남북협상 한국현대사의 시작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단체 회의 김구 , 김규식 , 김일성 , 김두봉 등 이승만 중심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 김규식 – 중도파 ‘ 민족자주연맹 ’ 결성 김구 – 이승만과 갈등으로 연대 결렬 김구 미소철군 – 남북 회담 – 총선 제안 김일성 , 김두봉에게 남북협상 제의삼천만 동포에 읍고함 한국현대사의 시작 요즈음 우리 땅 한반도에서는 외세에 아첨하는 자들이 떼를 지어 남침이니 북벌이니 하면서 전쟁얘기만을 획책하고 있지만 실지로 그리되는 날엔 세계평화의 파괴는 물론이요 동족의 피를 흘려서 외세를 이롭게 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다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온데 , 자파세력의 연장을 위해서 민족분단의 연장을 획책하는 것은 온 민족을 죽음의 구렁 속에 빠뜨리는 극악무도한 짓이노라 . 독립이 원칙인 이상 , 그것이 당장엔 가망 없다고 해서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은 왜정하에서 온 민족이 뼈저리게 인식한 바 있거니와 , 지금 독립정부의 수립이 당장에 가망 없다고 해서 단독정부를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 이름하여 자기 위안을 찾으려 하는 것은 미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 부르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것이다 . 삼천만 동포 자매형제여 , 지금 나의 하나뿐인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잡고 통일정부를 세우는 일에 공동 분투하는 일이다 . 조국이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이 한 목숨 통일제단에 바치겠노라 . 나는 통일정부를 세우려다가 38 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w}
    인문/어학| 2018.06.17| 78페이지| 2,000원| 조회(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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