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사 이해의 새로운 관점문학의 범위먼저 문학은 구비문학과 기록문화 두 가지로 나뉜다. 그리고 문학은 형상이라는 점에서 일상 언어와 구분되기 때문에 형상 인식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문학의 범위 기준은 형상 여부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이어서 국문학의 범위를 살펴보면 구비문학과 한문학이 있다. 문학은 언어예술이기 때문에 이러한 기본 전제를 수정하지 않는 한, 구비문학도 국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는 한문학이 있다. 한문으로 쓰여졌지만 우리 음으로 읽으면서 구결을 지어냈고 토를 달았기 떄문에 우리말 문어체의 하나라고 봐야한다. 마지막으로 국문문학이 있다. 국문문학은 일제시대의 민족문학으로 국문학을 제대로 연구하는 현대에 와서야 정통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문학의 갈래문학사를 쓰기 위해서는 문학을 다루는 적절한 단위가 필요한데 이것을 갈래라고 부른다. 갈래는 국문학에서는 서정, 서사, 교술, 희곡으로 갈래가 나뉘게 된다. 서정갈래는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이 없이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라고 정의 하고, 교술갈래는 작품외적 세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의 세계화라고 정의하며, 서사갈래는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고 정의하고, 마지막 희곡갈래는 작품외적 자아의 개입 없이 이루어지는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갈래는 갈래체계, 즉 갈래의 역사 속에서 변화를 겪고 없어지기도 한다. 또한 체계 자체가 유동적이어서 느슨해지고 갈래에서 이탈하는 개별갈래가 나타날 수도 있다. 구비문학도 하나의 갈래로서 항상 같은 양상을 지니고 있는 듯하지만, 어느 단계에서 어떤 갈래가 특히 두드러진 의의를 가졌거나 기록문학과 깊은 관련을 맺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다른 갈래와 얽혀있디 때문이다. 한문문학은 희곡갈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국문학에 비해 교술갈래가 다채롭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시대 구분시대구분에 관한 주장은 일원론과 다원론으로 나뉜다. 일원론은 어느 한 가지 기준에 의해 시대가 계 사람들이 함께 받드는 시조를 부르는 보통명사라고 할 수 있고, 주몽은 고구려의 건국 시조의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주몽하면 동몀을 떠올리는 이유는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의 이야기가 구체화되어 그 갈래 전체를 대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백제는 부여·고구려계 사람들이 지배층이 되어 세운 나라이다. 그래서 건국신화도 그 맥락을 이어왔는데, 건국시조인 유리왕이 주몽의 아들로 전승되는 것을 보고 그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부자의 연계를 중요시하는 현상으로 마한의 후예가 뒤늦게 백제의 중심세력으로 들어서면서 백제의 건국 신화를 수정했다는 설도 있다. 이러한 설을 받쳐주는 것이 백제의 건국시조는 아버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흔히 주몽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백제를 세웠다는 신화와 북부여의 왕 해부루의 손자인 우태가 백제를 세웠다는 신화와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백제의 초대 왕이 되었다는 신화 등 여러 가지 신화가 다양하게 분포하기 때문이다. 이 중 하나를 택해 건국신화로 세웠을 법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건국시조의 출신을 정확히 판명할 수 없다. 즉, 후백제의 창업주가 백제의 건국신화를 재현해 민심을 모으고자 했다는 점에서 현재 주몽의 아들이었다는 신화가 가장 유력하게 남아있다.삼한 ? 신라 ? 가락 쪽의 사정마한은 종교적 지배자가 굿을 주관하였다. 오월과 시월에 걸쳐 농사굿을 벌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신라 건국 이전에 육촌의 촌장이 있었고 각각 다른 봉우리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통해 천신족으로서 자부심은 있었지만 건국신화의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산의 봉우리로 내려왔다는 것을 통해 산신신앙이 주된 신앙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 때 육촌 촌장은 모두 남자이므로 남신이지만 이 다음 혁거세를 낳은 선도산성모는 여성신이다. 혁거세는 알영과 결혼해 신라의 건국시조가 되었고 알영도 주인공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보아 여신의 시대에서 남신의 시대로 넘어오고도 여신은 계속 존중받은 것이다. 혁거세 집안의 박씨’, ‘황초령비’, ‘북한산비’는 고유명사만을 이두식으로 표기하였고 나라의 위업을 담아 위엄을 세우려는 사고방식이 드러나며, 왕도사상이 나타난다.백제는 국가의 위업을 자랑하는 비문은 남기지 않았다. 추론하기를 백제의 전성기 시대에는 한문을 사용해 비문을 남기는 일이 일반화되지 않았고, 한문이 발달한 후에는 굳이 패배한 기록을 남길 이유가 없었던 까닭이다. 위업을 자랑하는 비문은 없지만 비문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택지적비’는 글자수를 고정하고 두 구절이 대구를 이루는 변려문의 수법을 극도로 사용했다. 형식의 아름다움을 무리하게 추구한 것으로 이는 백제 말기의 문화가 화려한 수식의 미문 취향이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국내외의 정치문서, 이른 시기의 한시국서는 외교상의 용건을 전하며 문화적 역량 과시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일본과의 관계가 가장 활발했던 나라로 외교문서의 교환도 활발하였다.고구려는 자주적 기풍을 드높였으며 국력의 강건함으로 사대외교를 택할 이유가 없었다. ‘여수장우중문시’를 통해 수나라 장수의 허세를 비웃는 을지문덕의 기상을 알 수 있다. 이 시는 최초의 한시이며 반어적인 표현으로 허세를 비꼬았다. 또한 정법사의 ‘영고석’은 외로운 바위의 빼어난 모습을 기리며 작자의 기백을 나타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특산물을 소개하기 위한 작자미상의 ‘인삼찬’이라는 시도 찾아볼 수 있다.백제는 근초고왕 때, 칠지도에 명문을 새겨서 보내는 등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자랑했다. 개로왕 18년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한 백제는 북위의 효문제에게 장문의 국서를 보내게 된다. 개로왕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고 효문제를 황제라고 칭하며 시대외교의 격식을 차렸다. 어려운 수식이 들어간 변려문을 사용하면서 황제를 위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했으나, 청을 거절당하고 관계를 끊었음을 알 수 있다.신라는 중국과 뒤늦게 외교를 시작하였고 중국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그래서인지 신라의 국서인 ‘담설인귀서’나 ‘걸좌게 지어낼 수 있는 몇 마디 말로 노래를 짓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유리왕 때에 지어 불렀던 ‘도솔가’는 노래갈래 이름이었다고 추정된다. ‘도솔가’에 나오는‘꽃’은 미륵을 모셔올 수 있는 매개자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는 노래를 불러서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는, 불교 이전의 사고방식이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서 제사를 올릴 때 부른 것으로 사뇌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 두 줄에서는 누이의 죽음을, 그 다음 두 줄에서는 누이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낙엽의 비유는 사뇌가의 서정적 표현이 세련된 경지에 이르렀음을 밝힌다. ‘제망매가’는 나라의 노래나 화랑의 노래가 아닌 개인의 노래를 지어 내면적인 정서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안민가’도 경덕왕 때에 지어졌다. 경덕왕이 후사가 없어 고승에게 부탁하여 치성을 드린 후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로 인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충담사에게 안민가를 짓게 했다. 충담사는 월명사와 같이 정권에서는 소외되어 있으면서, 화랑의 전통을 잇고 미륵을 숭상하는 국선의 승려였다. ‘도솔가’에서는 나라를 평화롭게 한다는 생각이 추상적으로 드러나지만 ‘안민가’에서는 정치상황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찬기파랑가’는 ‘안민가’보다 먼저 지어졌는데 죽은 기파랑을 찬양하는 비장하면서도 숭고한, 개인적인 노래이다. ‘찬기파란가’는 삼국유사에 ‘찬기파랑사뇌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뇌가가 갖춰야 할 뜻이랑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첫줄에서 한 토막 모자라는 짜임새이며, 형식상 결말이 줄 가운데 오기도 하는 변형은 시상을 오묘하고 복합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사뇌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기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불교를 따른 노래향가의 작자는 굳이 화랑의 지도자로 국한되지 않고, 작품의 성향이 숭고한 이상을 품고 있으면 향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랑과 연관되지 않으면서 숭고한 이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불교와 연관기법과 대구를 이루는 말, 멋들어진 창작을 위한 변려문의 격식을 취하고 있다. ‘김현과 호랑이 처녀’ 와 ‘조신이야기’는 신라말, 전기(문학적인 수식을 의도적으로 가미해 글로 정착시킨 설화)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 증거이다.(6) 연극의 자취를 찾아서중세의 굿·놀이·연극굿, 놀이, 연극은 원시시대부터 시작하여 고대에 이미 뚜렷한 모습을 보였다. 마음에 지닌 사연을 행동으로 나타낸다는 점이 굿, 놀이, 연극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굿은 사람이 아닌 것과 사람의 갈등을 주술로써 해결하자는 목적 달성을 위한 행사로 엄숙해야하며, 즐거운 놀이가 복합되어 있기도 하다. 놀이는 화해와 단합을 꾀하고 정해진 공동의 절차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고대에는 화랑도와 다른 하층의 놀이패가 따로 있었다. 상층문화가 중세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고 국중대회의 유산은 하층에서 마을굿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와 함께 민속극이 시작되었다. 민속극은 굿, 놀이, 연극의 복합체로 상층을 비판하고 풍자하는데서 생기를 찾게 되었다. 중세에는 굿의 구실이 축소되고 종교가 더 긴요한 것으로 부각되었으며 불교는 재래의 주술도 이용되었다. 굿, 놀이, 연극의 복합체를 대신해서 종교, 철학, 주술의 복합체가 커다란 구실을 하게 되었다. 유교 이념에 따라 예악을 정비하게 되자 굿과 복합적으로 행해지던 놀이는 놀이만으로 그치게 되었다. 함께 어울리던 전통 대신에 관람객의 입장으로 놀이패를 바라보게만 된 것이다. 굿과 연결되는 굿에서 발생된 농악대의 굿에서 탈춤이 생겨나고, 무당의 굿에서 무당굿놀이가 생겨났다.고구려·백제의 놀이와 연극고구려의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가무가 대단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가무는 서역악의 영향을 받았으며, 중국, 일본에 전해지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외래악을 좌방악과 우방악으로 정리했는데 우방악 반수가 가무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악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악 중에서도 꼭두각시놀음은 민간에서 성행했으며, 중국까지 널리 인기를 모은 구경이다.
7. 중세 후기 문학 : 제 1기 고려 후기(1) 무신란·몽고란과 문학시대 변화의 추이무신란이 일어나자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은 더욱 왕성한 창작 의욕과 날카로운 비평의식을 가지고 더욱 활기를 띠었다. 이규보를 제외하고 현실 도피를 위해 문학을 탐닉하는 일이 많아졌고, 최씨정권의 문신이 등용되었으나 이전 문학에 비해 미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문인층의 성격 변화로 설명이 가능하다. 문벌귀족 문학(특권의식·모화사상·형식주의 등)의 몰락에 이어 신흥 사대부의 등장으로 농민·천민 반란 등에 자극, 민중과 친근한 관계, 민중의 동향을 기록문학화(농민시·애민시 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몽고란은 최씨정권의 항쟁 지지하면서 민중의 애국적 역량 조직하면서 상하 일치의 경험을 통해 진취적·민중적 문학을 등장시켰다. 이 시기의 무신란과 몽고란은 문인성장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후기문학은 조선 전기로 이어지면서 정비되어, 고려 전기와는 다른 질서와 조화를 가지게 되었다.김극기가 택한 길김극기의 문집은 130~150여권이나 되는데 최씨정권의 우두머리 최우가 편찬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는 농촌에 머물며 시를 짓는 생활이 절실하게 나타난다. 벼슬에 올라 사신을 가는 길에서도 농촌을 찾아 묵으며, 작품을 남겼다. 그가 지은 와 같은 시는 농민의 말로 농민의 생활을 나타내고 있어 농민시라고 할 수 있으며 은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동정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애민시라고 불러도 마땅하다.죽림고회의 문학죽림고희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은 오세재, 임춘, 이인로가 있는데, 그 중에서도 이인로는 죽림고희의 대변자 노릇을 하였다. 또, 과거 명문의 표현이나 관련 사실을 재활용하는 창작방식인 용사를 소중하게 여겨, 문벌 귀족의 문학이 지속되기를 바랐다. 오세재는 상당한 지위를 가진 문인의 가문에서 태어난 인물로 이규보와 특히 가까워 오세재가 죽자 이규보는 를 지어 애통한 마음을 나타내었다고 한다. 임춘의 글은 내심의 고민을 토로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의 글은 이인로가 모아 엮은 으로 전해진다. 중국 중심주의 때문에 위축되어 있던 의식을 떨치고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고장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며, 중세보편주의를 독자적으로 구현하면서도 영웅서사시이자 민족서사시를 내놓은 것이다. 무신란을 겪고 귀족문화의 기반이 무너지자, 의식에서의 질곡을 깨고 민족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자는 결단을 문학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영웅서사는 의 사관과 표현양면에 걸쳐서 결정적인 반론을 제기했다. 작품의 구성이나 규모부터 영웅서사시에 적합하게 되어있다. 시로써 미처 다 나타내지 못한 사실을 밝히고 필요한 자료를 보태는 구실을 하는 주를 시에 단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화엄종의 승려이자 고려 전기 귀족불교의 체질을 이었던 각훈의 은 승려들의 전기집으로, 개인이 중요시되고, 서술방법도 자유로워 상상에 의한 표현을 쉽사리 허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는 불교를 비판할 때나 관심 있게 다루었으며, 열전에 승려의 저기는 하나도 포함하지 않았다. 본문에서 각 인물의 전기 말미에 찬을 붙인 것을 보면 유학의 경전을 바로 인용하거나 유학에 입각한 교훈을 말한 대목도 더러 있으며, 인물을 다룰 때는 서두에 총평을 두어 출신과 활동을 요약하고 훌륭했던 점을 서술하였다. 비록 저자의 견해이지만 표현을 잘해 설득력을 확보하였다. 본문 뒤의 찬은 고정된 격식으로 붙어있고, 찬을 시로 지어서 내용을 더욱 심화하고, 독자가 감명 받을 수 있게 했다.일연의 는 고려 후기 역사문학에서 가장 뚜렷한 위치를 차지한다. 민족존망의 위기에서 민족사의 주체성을 찾고, 민족문화 새롭게 인식하였다. 또한 삼국사기의 유교 합리주의 잘못을 비판하며 동명왕편서의 주장과 상통하기도 한다.일연은 불교를 기층문화의 전반적인 양상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다루고자 하였으며, 민중생활과 밀착되어 생동하는 구실을 해온 것을 위해 불교설화의 풍부한 상징성을 적극 활용했다. 또한 중국문화에 비할 바 없이 광대한 영역에 걸쳐 불교가 발달했음을 입증하고 우리나라의 땅이 ‘불국토’라고 주장하였다.는 완성된 체계 같은 것을 거부 노래의 개요를 옮겨다 놓았거나 어느 한 대목을 번역했기 때문에 우리말 노래의 묘미를 살리는 데 충실할 수 없었다. 민간의 노래를 악부로 칭하는 궁중용어를 가져다 썼고 칠언절구의 짧은 형식을 사용했으므로 소악부라고 했다.고려 후기 신흥 사대부는 한시와 우리말노래가 그것대로의 영역을 지키는데 머물지 않고 서로 융합하도록 소악부를 창안했기 때문에 한시이면서도 우리말 노래, 민요의 진솔한 사연을 담으려고 했다. 소악부는 한시가 민족문학으로서 저극적인 의의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기에 이대 이루어진 모형이 중시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 대단한 융성을 보이게 된다.참요의 문제점참요는 정치적인 예언을 은밀하게 나타내는 노래로 고려 후기에 특히나 많았는데, 에 전하는 도 참요의 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은 의종이 문신들과 보현원에서 잔치를 하고 있을 때 무신들이 들고 일어나 학살의 참극을 벌인다는 것을 미리 알린 노래로 한문 문구로 창작되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저절로 유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조선왕조 이후 역사를 서술할 때 참요를 고려 말에는 모든 일이 엉망이었다는 증거로 삼았으나 민중이 실제로 부른 노래를 참요로 받아들여 증거를 보완할 필요가 있었다.(7) 설화·무가·연극의 양상설화고려 후기에도 설화는 있었으나, 재래 유학의 합리주의가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에 설화가 문학에서 차지하는 공식적인 위치는 전례 없이 격하되었다. 설화를 정착시키는 것을 우선적인 과업으로 삼아서 사상적인 문제까지 다루던 시대가 청산되었고, 설화에 의거하지 않고서 역사나 사회를 거론 하고, 인륜도덕을 수립하는 단계에 들어서, 효자나 열녀 설화가 아닌 것이라면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관심 밖으로 밀려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고려 후기 설화는 시를 짓는 데 따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겪고 들은 대로 적어서 전해주는 시화와 이보다 넓은 의미의 선화, 인물전설로서 묘미를 갖춘 것도 갖추고 있다.무가일반 민중은 난세를 맞이해서 소망을 풀어줄 구원자의 출현을 기대했기에 무당 또는 승려가 거듭 출현해 였고, 에서는 고려가 문명세계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며 웅대한 기상과 포부를 드러내고 마음의 바른 도리를 추구함으로 한문학이 우리 풍토나 생활과 깊은 관련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정추는 신돈을 탄핵하려다가 죽을 뻔하고 상처 입은 마음을 에서 드러내며 안정된 마음가짐을 추구하였다. 이집은 병자와 노인과 나그네의 신세를 읊은 시를 지었고, 김구용은 신선을 추구하고 명나라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으며, 작품 은 청산별곡을 연상하게 한다.정몽주 세대정몽주의 작품은 호탕한 기백을 가진 풍류의 작품이 많고, 시의 소재가 확대되었으며, 수법이 참신함을 알 수 있다. 신유학의 도리로써 대의명분을 분명히 하면 질서가 유지될 것으로 믿었다. 에서는 마음을 바로잡아 세상을 구하자는 이상론을 펼치고 와 상통함을 보여준다. 과 와 에서는 철학적 시의 새로운 경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이존오는 신돈을 규탄하다가 실패하고, 은거하여 살다가 요절한 사람으로 와 에서 백제 멸망의 사적을 회고하는 동시에 고려 왕조의 멸망을 예견하였다.이숭인은 에서 은거의 뜻을 나타내고 에서는 살아가기 힘들다고 하였으며, 에서는 꿈에 옥황상제를 본 일을 말하며,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작자의 처지를 비관하고 정신적인 방황과 고민이 드러난다.이종학은 이색의 아들로 인재로 태어나 장래가 창창했으나 정몽주가 죽던 해 이숭인, 하륜, 권근과 함께 귀양을 가다가 정도전에 의해 피살당하였다. 그러나 하륜과 권근은 새 왕조에 가담하여 유학의 도리를 구현하는 문학을 크게 떨치게 하였다.귀화인의 참여대한민국이 단일민족이라고 주장하지만 귀화했던 외국인은 과거부터 계속 있어왔다.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 덕분에 고려 초 과거가 정비되었고, 뒤를 이어 과거를 관장한 왕융 또한 중국인일 가능성이 높다.설손은 원래 위구르 사람으로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다가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고려로 피난을 왔는데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당시 인연이 있어 관직과 땅을 주어 귀화하게 된 것이다. 에 시 16편, 문1편이 실려 있어 대표적인 고려의 시인으로 꼽힌다. 이라지가 다 있으며, 가사는 시조와 함께 사적이기만 한 문학이다.악장악장은 제왕의 위업을 찬양하는 노래로 태조는 새로운 왕조의 위엄을 드높이기 위해 악장을 스스로 짓고 그 사업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으나, 악장이 문학으로서는 독자적인 형식을 창조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끝내 문학적인 안정을 얻지 못했다. 장이 나누어져 있고 여음이 붙은 것은 고려 속악가사의 전통을 이었으나, 율격이나 표현방법은 그 전례를 따를 수 없어서 모호한 상태에 머물렀기 때문이다.세종 때에는 예악의 제도를 정비하고 실제로 연주하고 노래하는 데 필요한 악장을 갖추었고, 건국을 총체적으로 다루어 제왕이 바뀌더라도 다시 지을 필요가 없도록 하였다.경기체가경기체가는 사물, 사실을 서술하고 전달하는 흥취를 자랑하기 위해서 조선 전기 사대부는 경기체가에 관심을 가지고, 승려들 또한 이에 동조하였으며, 경기체가의 엄격한 형식을 준하며, 음악과 문학을 일치시키고자 했다. 경기체가는 우리말 노래이면서도 한자어에 의존하고 있어서 악장과도 상통하고, 한시에서 국문시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경기체가는 악장의 구실을 하는 경기체가, 승려의 노래인 경기체가, 개인적인 노래인 경기체가로 나눌 수 있다. 기화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면서 불교를 옹호하고자 하는 노력을 경기체가에서 구체화 하였다. 또, 의상은 를 지어 불교를 믿어 서방정토로 가자는 노래를 하였으며, 지언은 라는 경기체가를 지었다. 승려들이 경기체가만 받아들인 것은 신도를 향해서 지식과 교훈을 주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기체가는 사대부의 관심사를 충실하게 나타냈는데, 유영은 을 지어 가문을 자랑하였으며, 주세봉은 경기체가로 교화를 베풀고자 했으며, 권호면은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을 지었다. 이렇게 경기체가는 조선 전기 사대부시가의 대표적인 갈래로 자리 잡았지만, 가사가 성장하자 몰락했다.사대부가사조선시대 가사 첫 작품은 정극인의 으로 정극인은 산림에 묻혀 지내는 생애를 그려냈다. 평생 진출하기를 열망하고어진다.
10.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문학: 제 2기 1860 ~ 1918년(1). 민중종교운동과 문학민중종교운동의 경과민중종교 또는 신흥종교는 1860년(철종11년)에 최제우(崔濟)愚)가 동학(東學) 을 창건한 것이 시발점이 되어 생겨난 수많은 종교를 말한다. 조선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으로부터 붕괴될 수밖에 없는 시기와 맞물려 자본주의 열강의 세계병탄으로 닥친 거대한 시련의 이중적 위기가 조성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척사위정운동·애국계몽운동?항일의병운동과 함께, 민중종교운동이 한 시대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민중종교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역사적 존환이 요망되는 위기에 중세의 지배질서를 재정비하면서 수습하기 위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동학 창건 이후에는 사정이 아주 다라졌다. 민중종교운동의 여러 교단은 각기 자기네 교조의 개인적인 수련과 득도에 의해 엄청난 변혁이 시작되었다하고 서로 배타적인 절대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영향이나 차용의 결과이기 이전에, 그 시대 민중이 바라던 소망을 집약한 데 근거를 둔다는 공통점이 있다.한 인물이 어느 날 득도를 통해 인간만사에서 천지운행까지 꿰뚫어 알게 되었다는 것은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고자 하는 소망을 비약적으로 구현한 상징이었다. 민중종교운동의 교리는 어느 것이든지 낡은 관습을 가능한 대로 혁신해 상징적의미의 차원을 높이면서도 또한 민중에 맞게 낮추어 사용해야만 되었기 때문에 교조들이 사용 할 수 있는 언어 표현이 한문경전?국문경전. 국문가사가 대종을 이르는 노래, 말로 퍼져 나가는 이야기 형식일 수밖에 없어 교리를 펴는 방법을 두고 고심을 해야만 했다. 한문경전이 오래 써먹은 낡은 틀이라고 하겠지만, 어디서 가져오지 않고 당대에 새롭게 창작하는 것은 최초의 시도였다. 전설을 모아서 국문경전을 편찬한 것은 문학의 양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바꾸어 놓은 변혁이었다. 이렇게 민중종교운동은 문학사 자체에 깊숙이 들어와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민중종교운동은 1860년에서 1919년 이전까지의 기간만 활발하게 일어나고, 평가할 .가장 극적인 사건은 경복궁 중건은 실책이라고 비난하는 소리가 계속 자자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탄 왕궁을 다시 일으켜 세우지 않고서는 나라의 위엄을 자랑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경복궁을 중건한 것이었다.〈경복궁가(景福宮歌)〉 또는〈경복궁창건가〉등의 이름을 가진 서로 비슷비슷한 가사가 여러 편 남아있어 그때의 광경을 전하고 있다.대원군 정권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그가 편 시책은 대부분 대원군의 실각과 더불어 역전되었다. 하지만 민속예술의 발전은 위축되지 않았다. 이는 조정의 법령을 통해서 한 일이 아니고, 개인적인 취향이 시대적인 요구와 합치되어 민속예술이 활성화되고 구비문학에서 새로운 창작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만들어져서 반작용을 하기 어려웠다.판소리의 상승과 변모민속예술 또는 구비문학의 여러 종목 가운데서도 음악적인 세련미나 문학적인 수식을 다른 어떤 것보다 잘 갖추고 있던 판소리가 출세를 할 수 있었다.판소리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짓는가는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게 마련이었는데, 하층민의 인기를 모으는 민중예술이면서 동시에 상층의 애호도 받는 이중적인 장점에다가 대원군이 판소리를 무척 즐기고 판소리 광대를 고무하는 상황과 맞물려 상승의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판소리는 충효?우애 등의 표면적 주제를 갖추고 있었던 점과 비교적 장편이기 때문에 양반 취향의 격조 높은 문구를 삽입하기 쉬웠던 점이 판소리의 상승에 유리한 작용을 했다.판소리에서 먼저 이룩된 그 성과를 주목하자면, 근대적인 민족문학의 기본 요건 가운데 하나인 신분과 지역의 한계를 넘어선 공동의 문학이 현실에 대한 서로 상반된 견해를 다양하게 반영한 것이다. 판소리는 여러 계급이나 계층의 사람들이 관여했으며, 상하의 관심을 아우르도록 하는 작용을 아전이나 시민이 적극 수행했다. 그러나 판소리 사설의 문학적 창작은 공연을 다채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범위 안에서 소극적으로 시도되었다. 또한, 현실비판의 문제의식을 상실하고 이미 얻은 인기에 안주하게 되어 새 시대의 문학으로 커다란 구실을 할 수 있는 발전종교의〈중광가〉또한 가사의 사상적인 무게를 시대적인 자가에 맞게 가중시키는 구실을 했다.경험 확대를 보인 가사외교사절로 중국이나 일본을 다녀와서 가사를 짓는 풍속은 한동안 지난 시기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지속되었지만 그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국내 여행의 견문을 다룬 기행가사는 전과 다름없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창작되었으나 대부분 명산이나 명승지를 찾아 놀면서 소회를 풀었다는 내용이고 새로운 경험을 반영한 것은 흔하지 않다. 다소 색다른 작품을 찾는다면 조희백의〈도해가〉가 있다. 더욱 주목할 만한 작품은 울릉도 개척을 다룬 정래기의〈정처사술회가〉와 박시옹의〈울도선경가〉있다.역사의식을 고취한 가사외세의 침략이 닥쳐오자 거기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사를 바로 알아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애국계몽 사상가들이 논설? 역사서? 전기 등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출판물을 이용하지 않은 가사 또한 시대적인 사명의 구현체 노릇을 했다.역사관에서는 가사가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필사본이 부녀자들 사이에서 유통되어 일제의 출판 검열이 미치지 못한다는 조건 덕분에 가사가 지속적인 기여를 할 수 있었다.규방가사의 변모와 각성규방가사는 부녀자들이 애독하는 가사의 총칭이다. 남성의 작품 가운데 교양이 아닌 흥미를 위해서 읽을 만한 것도 규방가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작자층이 독자층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녀자들이 작자가 되어 생활의 지혜를 가르치고, 심정을 술회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작품이 규방가사로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규방가사는 구시대 문학의 잔존형태임에 틀림없고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가 지속되는 동안에만 그 나름대로의 구실을 했지만, 일제의 식민지통치에서 생긴 제약을 덜 받았으므로 상대적인 의의가 확대되었다.산문 기록의 양상소설이 아닌 산문을 국문으로 짓고 필사본으로 돌려 읽는 풍속도 오랫동안 이어졌지만,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작품 가운데 특이할 만한 것은 찾기 어렵다.조사가 미진해서 자세하에서 문서와 기록을 담당한 사람이 작성한 것이 있다. 이정규는 유인석 부대의 기록 담당자로서 일을 하면서 의병 투쟁사의 자료를 모으고 순국 의병장들의 전기를 썼다. 박정수는 안승우의 경력을 정리하고 이강년 부대의 투쟁기록을 남겼다.기백과 울분의 한시의병문학에서 한시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의병장은 거의 다 평소에 한시 짓는 수련을 쌓았으므로 싸움터에 나서는 기백을 나타내고 시련을 견디어내는 각오나 패배했을 때의 울분을 쏟아놓기 위해서 한시를 짓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널리 알려야 할 사실은 산문으로 정리하고, 하층민까지 독자에 포함되면 가사를 택하는 한편, 용건 전달이 아닌 자기 심정 표현이 필요할 때마다 한시를 지었다. 일기에서도 고조되는 감회는 한시로 응결시켜 표현했고, 힘들게 기록된 다른 자료에 전하는 한시는 더 많아, 글하는 선비가 전투를 지휘해야만 했던 고충을 새삼 절감하게 하였다.의병장의 한시의 의의는 한문학이 고식적인 표현의 인습을 벗어버리고 역사 창조의 충만한 경험과 만날 수 있게 하였다.투쟁을 위한 가사1895년 10월에 강릉에서 기병한 의병장 민용호가 강원도?함경도 방면에서 전투하여 승리를 거두고 해산하기까지의 경과를 기록한〈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은 의병장의 일기로서 소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의병가사가 실려 있어 더욱 주목 된다.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격문을 읽을 수 없고 한시에서 감동을 받을 수도 없어 국문가사로 의병 투쟁의 취지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특히 왜적이 들어와서 전답을 빼앗아 생계를 위협한다고 통분한 대목은 환영하는 군중과의 유대를 두텁게 하는 데 아주 긴요 했다.국문가사라고 해서 몇 마디 말로 사리를 설명하고 소박한 감회를 전하는데 그칠 수는 없었다. 대의명분을 분명하게 하면서, 어리석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무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필요한 순서를 밟아야만 했다.많은 의병가사가 있었지만, 한시만큼 소중하게 여기지 않아 자료가 수집되지 않았고, 의병이 패배하자 구전되던 가사마저 사라졌다. 또 일본름의 국문을 창제했으나, 사회 구조의 전반적인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한문과 국문의 관계가 역전될 수 없었다.〈한성주보〉는 정부에서 설치한 박문국(駁文局)이 발행한 정부 기관지이므로 이러한 변화가 더욱 주목할 만한 의의를 가졌다. 한문을 공식적인 글로 사용하면서도 세 단계에 걸쳐 한문을 국문의 문체로 바꾼 것은 개혁의 요구를 신중하게 받아들인 처사라 할 수 있다.국문 사용의 확대와 공식화“右와 여히 檄文를 西方에 飛傳?니 勿論이 鼎沸?얏다 每日亂亡? 謳歌?던 民衆드른 處處에 모여서 말?되「낫네 낫네 亂離 ㄱ낫서」「에이참?되얏지 그양이이로 지니서야 百姓이 ?사?이 ?어디 ?머있게 ?” 이것은 1893년 11월에 전봉준이 주동이 되어 동학혁명을 모의할 때 사방에 돌린 격문의 서두를 원래의 표기법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보다시피 국문을 택하고서, 한자어에는 한자를 첨가하는 이중의 표기를 한 점이 주목된다. 국문만 알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한자에 익숙한 사람들의 취향도 아울러 반영했다.이와 같은 이중 표기는 획기적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민중」이라는 말이 문면에 바로 나와 있으며, 민중들이 곳곳에 모여서 하는 말을 적은 부분에서는 실제로 사용하는 일상생활의 구어가 생동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거사를 모의한 주동자들은, 서당훈장이었던 전봉준이 한문이나 한자에 어느 정도 익숙했으므로 한문 투로 이치를 따르는 표현을 아울러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국문 사용을 둘러싼 논란정부의 방침이 법제화되고, 교육의 방향이 정해졌지만 문자 생활의 통일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어서 국문문학은 한문학의 위세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다듬어지지 못해 사태를 일거에 역전시킬 도리가 없었다.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법으로부터 완전히 일탈한 상황이라 순국문을 택하는 경우에는 뜻 구별을 쉽게 하고 표기법을 가다듬는 방안을 강구해야만 했는데, 그 작업이 참으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한문으로 국문을 대신하고 중국 역사로 국사를 대신해서 국가사상을 박멸했기 때문에 우리 역사보다 중국습
세종대왕의 업적- 한글 창제를 중심으로 -◆ 차례 ◆Ⅰ. 서문Ⅱ. 본문 (세종대왕의 업적)- 훈민정음 창제- 4군 6진 개척- 대마도 정벌- 장영실 등용 (노비 포용 정책)- 인쇄술의 발전과 서적 발간- 음악 분야Ⅲ. 결론Ⅳ. 참고 자료Ⅰ. 서문흔히 ‘성군’이나 ‘대왕’의 호칭이 붙는 세종은 우리 역사에서 단연코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대에 이미 ‘해동요순’이라고 불렸으며, 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와 민족 문화를 꽃 피우고 후대에 모범이 되는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4대 왕으로 이름은 이도였으며, 자는 원정이고, 시호는 장헌으로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3대 왕이었던 태종의 셋째 아들로 22살에 왕위에 올랐으며, 초반에는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존재로 인해 자신을 낮추며 무서운 시절을 보내었다.그러나 재위 4년 후, 1422년에 태종이 죽고, 태종이 세운 정치적 안정 속에서 세종은 전권을 행사하게 되며 어릴 때부터 길러온 학문적 역량을 펼치게 된다. 유학 경전과 사서를 뒤져서 이상적인 제도를 연구하고, 세부사항을 규정해나갔다. 또한 학문이나 문학, 예술 분야의 기틀을 세웠다. 그리고 여진족과 왜의 정벌을 단행하기도 하였다.이처럼 세종은 우리가 흔히 아는 훈민정음을 발명하고 반포하였다는 업적 이외에도 여러 업적을 이뤘다. 하지만 훈민정음을 발명한 업적에 나머지 업적들이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하기도 한다. 따라서 본 조사보고서에서는 훈민정음 발명이외에도 세종의 감춰졌던 여러 업적들을 알아보기로 한다.Ⅱ. 본문1. 훈민정음 발명과 반포훈민정음은 음력 1443년에 세종대왕이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창제 시기와 사람, 창제 원리가 명확히 기록되어 알려진 유일한 글자이다. 표의문자인 한자가 주축을 이루었던 동아시아 세계에서 전혀 성격이 다르면서도 한 단계 더 발전한 표음문자인 훈민정음을 독자적으로 창제한 사실은 크게 주목할 일이다.훈민정음 이전, 우리나라에는 언어는 있어도 , 한자음 정리 목적이 있다.애민정신으로 어린 백성들에게 표기수단을 제공하고자 하였던 것은 훈민정음의 중요한 정신적 바탕으로 가장 뚜렷한 훈민정음 창제동기이다. 이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명시되어있으며, 백성들이 차자표기로 인해 겪는 불편함을 위로하고자 발명하였음이 드러난다. 훈민과 백성 교화의 목적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세종은 백성들이 손쉬운 소통수다늘 통하여 필요 덕목과 지식을 배우기를 원했다. 훈민정음의 이름 자체가 ‘훈민’이니 이 목적또한 비교적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애민정신의 목적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목적으로 대립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왕조의 정당성 홍보와 유교 질서의 확립의 목적으로 훈민정음이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용비어천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이씨 왕조의 조상부터 신성성을 강조하여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였다. 한자음 정리의 목적으로는 당시 조선의 한자들의 발음이 통일되지 않았으며 세종은 이러한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정음’을 만들었다고 현재의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바른 소리를 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리글자가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이라는 용어 자체가 ‘백성을 가르치기 위한 바른 소리’라는 뜻을 생각할 때, 이 논리는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최만리 등의 유학자들은 한자음의 혁신이 훈민정음의 본뜻이라고 보고 반대하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훈민정음 반포 초기에는 최만리 등의 많은 유학자들이 사대의 대상인 중국의 문자를 두고 어찌 사사로운 문자를 쓸 수 있겠냐면서 훈민정음의 창제와 반포를 반대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대중적으로 만들려했던 세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류에 따라 훈민정음을 사용하는 사람은 얼마 존재하지 않았으며, 주로 언해류에 사용되었다. 또한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에도 한자어가 점점 불어났으며 실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록들이 한자어로 되어있으며, 유교와 관련된 한자어가 더욱 늘어난 것으로 보아 훈민정음이 상층무창군, 우예군 등에 성을 쌓고 방어 진지를 만들었다. 또한 세종은 김종서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삼아 동북쪽의 여진족을 몰아내게 했다. 그런 다음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을 설치했다. 6진은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 등이며 4군과 함께 조선의 북쪽 국경을 이루게 되었다. 이 때 남쪽의 백성들을 이득을 제시하며 이주시켰고, 이로 인해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이 조선의 영토가 되어 오늘날 우리 국토의 모양을 이루되었다. 결과적으로 4군 6진의 개척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우리의 국경선으로 삼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다.3. 대마도 정벌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로 49.5킬로미터, 일본 후쿠오카에서 최단거리로 134킬로미터 떨어져있는 섬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보면 많은 목판본 지도 중에서 82개의 포구가 그려진 섬지도가 바로 대마도이다. 천연의 요새로 왜구는 이곳을 본거지로 삼고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500여 차례 이상 침략과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1419년 세종이 전군에 비상 소집 명령을 내리고 조선 수군의 주력군을 견내량에 집결시킨다. 원정함대의 총사령관에는 이종무 장군, 좌군도절제사에는 유습 장군, 우군도절제사에는 이지실 장군이 특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227척의 전선이 모였고, 군사는 1만 7285명이 모였다. 이는 전체 수군의 3분의 1이라고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굳이 견내량이었던 이유는 견내량이 육지 사이의 좁은 바다이기 때문에 하루 두 번 물살의 방향이 바뀌게 되고, 썰물의 힘을 빌리면 빠르게 큰 바다로 나갈 수 있고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대마도에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이 때 사용되었던 전함은 당시 최고의 전함으로 적어도 60여명이 탈 수 있었으며, 배의 좌현과 우현에 가룡목을 끼워 배의 구조를 튼튼하게 했다. 또한 화약은 따로 보관하였으며,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화덕 위에 시렁을 얹어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전함은 고려시기의 배와 비슷한 구조이지만 한층 발달한 단계로 볼 수 있다. 최근 목로 노비 출신의 장영실을 등용하여 과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장영실은 노비였기 때문에 그 능력을 펼칠 기회가 없었으나 세종대왕이 그 능력을 높이 사서 곁에 두었고, 이로 인해 조선의 과학이 한층 더 빛을 발하게 된다.장영실은 1437년부터 6년 동안 천체관측용 대간의와 소간의를 발명하였고,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와 천평일구를 발명하였으며, 고정된 해시계인 정남일구와 앙부일구를 발명하였고, 주야로 사용 가능한 시계인 일성정시의를 발명하였다. 또한 태양의 고도와 출몰을 측정하는 규표, 자격루의 일종인 흠경각의 옥루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이에 경상도 채방의 별감이 되어 구리와 철의 채광과 제련을 감독하였다. 또한 1441년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와 수표를 발명하여 하천의 범람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였고, 이 공으로 상호군에 특진되었다. 그의 최고의 발명품인 자격루는 해가 뜨지 않을 때도 정확하게 시간을 알릴 수 있었기에 경복궁 남쪽에 설치되어 조선의 표준 시계로 사용되었으며, 이러한 정확한 시간을 바탕으로 조선에 알맞은 달력을 제작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해, 달, 화성, 수성, 금성, 목성, 토성, 즉 칠요의 운행을 계산하는 ‘일곱 천체의 운행 계산법’을 활용한 ‘칠정산내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농업의 혁신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이처럼 노비들도 실정에 맞게 등용하는 포용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발전들이 직접적으로는 장영실의 업적이지만, 그를 등용한 세종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발전이었다는 점에서 세종의 업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5. 인쇄술의 발전과 서적 발간세종은 제도 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서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서들이 더 정확하고 풍요로워지도록 학자들에게 요구했다. 또한 이를 위해 중국의 사서도 연구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자치통감」의 완질을 구해 연구하여 주석서인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하였다. 이 「자치통감훈의」는 중국에서 간행된 것보다 완성도가 더 높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이렇게 경전과 사서를같은 악기를 만들어 음악을 발전시켰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악보인 ‘정간보’를 창제하여 여러 악곡을 작곡하였다.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오례’가 존재하였으며, 이중에서 ‘흉례’를 제외한 ‘길례’, ‘군례’, ‘빈례’, ‘가례’의 네 가지 의식에서 정악을 사용하였다. 이 말은 우리의 의식에서 정악은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종이 주력하여 작곡하였던 악곡은 종묘제례악 중에서 보태평과 정대업이 있고, 여민락이 있다. 여민락은 세종때 용비어천가의 가사 위에 곡을 얹은 음악으로 조선 전기에는 한문가사를 사용하는 성악곡의 여민락이 연주되었으나, 조선 후기 '성악곡의 기악곡화'현상으로 가사가 탈락되어 「한금신보」나 「삼죽금보」에서 기악곡의 여민락이 연주되었다. 세종 대에는 성악곡으로 연주되었으며, 음계는 황종평조로 이루어져있었으며, 당시 10장으로 구성되어있었다. 향피리, 대금, 해금, 가야금, 거문고, 좌고, 장구, 아쟁, 소금 등의 악기가 편성되어있었다.보태평과 정대업은 둘 다 종묘제례에 속하는 곡이나, 악기편성 등이 다르기에 나누어진다. 따라서 두 악곡은 세종 대에 회례악으로 사용되었으며, 고취악과 향악을 사용해 세종이 직접 작곡하였고, 악작과 악지가 존재하며, 32정간으로 연주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다.보태평은 세종 대에 임종평조로 연주되었으며, 당시 11곡으로 구성되었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청황종평조로 연주되며 12곡으로 구성되어있다. 정대업은 세종 대에 남려계면조로 연주되었으며, 당시 15곡으로 구성되었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청황종계면조로 연주되고, 세조 대에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면서 11곡으로 축소되어 구성되었다.Ⅲ. 결론세종이 없는 한국 혹은 한국역사는 상상하기 어렵다. 세종이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지금과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세종의 역할은 대체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종은 그만큼 위대한 업적을 한반도 역사 위에 선명하게 아로새겨놓았다. 그리고 세종의 이러한 업적은 그가 가진 리더쉽으로 인해 세워졌다다.
영웅전설- 영웅 : 신의 혈통을 이은 초인적 존재- 설화 :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적시한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이야기.┗ 신화 : 세계의 생성을 설명하고 거기 관계한 신들의 행적을 담은 이야기.┗ 전설 :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적시한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 이야기.┗ 민담 : 전설적 속성을 지니면서 시간적, 공간적 신빙성이 떨어지는 분방한 설화.- 그리스 전설 : 영웅적인 주인공의 활약상이 주 내용. 전설 = 영웅 전설┗ 전설의 주체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지닌 이야기.그리스 영웅의 세대- 1세대 : 그리스 각 민족의 시조나 OR 도시의 건설자. 개인적으로 활약하는 지역별 영웅.┗ EX] 페르세우스, 미노스, 테세우스, 이아손, 카드모스, 헤라클레스 등.- 2세대 : 트로이아 전쟁의 아버지 세대들- 3세대 : 트로이아전쟁의 영웅들.┗ EX] 아가멤논, 헥토르, 파리스, 아킬레우스, 오뒤세우스 등.- 4세대 : 트로이 영웅들의 아들 세대[페르세우스] (Perseus)- 아르골리스 지방의 영웅으로 헤라클레스의 조상.- 종말에 대한 언급X : 다른 영웅과의 다른 점. 신인지 인간인지 불분명하다.- 아크리시오스왕(아르고스)과 그의 딸 다나에┗ 신탁(자식X, 손자에게 죽을 것)과 청동탑(다나에를 청동탑에 가둠)┗ 제우스의 황금비(다나에를 찾아감) → 페르세우스 탄생.┗ 모자추방과 세리포스의 딕티스→ 딸의 아들이 아크리시오스를 죽이게 되리라 신탁 딸을 청동탑에 가둔다 이 모습을 본 제우스가 황금비로 분장 후 창 틈으로 스며들어 침입 이렇게 태어난 아들이 페르세우스 아크리시오스왕은 모자를 추방 세리포스라는 섬에서 딕트스라는 어부가 구해줌.페르세우스의 모험- 세리포스 왕 폴뤼덱테스(다나에와 결혼하려다 실패하고 심술부림.) ; 메두사의 머리→ 폴뤼덱테스의 결혼 선물로 바칠 메두사의 머리를 페르세우스가 구하러 감- 고르곤(포르퀴스 + 케토) : 스텐노, 에우리알레, 메두사 → 세자매 가운데 하나인 메두사- 아테나의 선물 : 청동 방패- 님프들의 선물 : 요술 모자(몸이 보이지 려 보내고 통과함.- 코르키스에 도착. 아이에테스왕이 어려운 과제들을 내줌┗ 불길을 내뿜는 황소로 밭을 갈고, 뱀 이빨(사나운 사내의 씨앗)뿌리기- 헤라의 도움 → 아프로디테에게 마법사 메데이아(아이에테스왕의 딸)가 이아손을 사랑하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함. 신비한 약(황소의 불길을 견딜 수 있음.) 자석 고리(혹은 돌)를 던져서 병사들끼리 싸우게 함. → 자중지란- 메데이아가 마법약으로 황금 양가죽을 지키는 용을 잠재우고 획득함. → 크리키스의 군대가 쫒아오자 아프쉬르토스를 살해해서 토막난 시체를 여기저기 뿌려 군대가 수습하도록 해 시간을 번다. →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모 키르케의 액풀이를 받음.아르고호의 귀환- 다뉴브강(=도나우 강) →아드리아해(포강에, 론강, 켈트인의 나라)와 라인강- 메시나해협(코르키스의 추격) → 지중해 → 리비아 쉬르테스(Syrtes) 해안 → 크레타(청동거인 탈로스의 공격 → 메데이아가 팔꿈치의 나사를 뽑아 피가 다 빠지게 만들어 죽임.) → 아이기나 → 이올코스- 세이렌(Seiren)과 오르페우스 : 오르페우스의 음악으로 세이렌을 무사히 지남이아손의 귀향과 불행- 아이손의 회춘 : 이아손이 자신의 수명을 떼어서라도 아버지를 건강하게 만드려 함. → 메데이아가 이아손의 목을 따고 그 피를 다려 아이손을 청년으로 만듦.- 메데이아가 펠리아스의 두 딸에게 아버지를 회춘시킬 수 있다고 함. →펠리아스가 두 딸과 메데이아에게 토막살인 당함.이아손의 최후- 이아손과 코린토스의 클라우케 : 메데이아의 저주와 자식 살해┗ 이아손이 펠리아스를 죽게 한 죄로 추방 OR 왕위를 다른 대원에게 양보하고 더욱 부강한 도시인 코린토스로 향함. → 왕위를 받는 조건으로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의 딸 클라우케와 결혼하기로 함. → 메데이아가 클라우케에게 드레스(불이 붙는 드레스)를 결혼선물로 줌. → 하객과 왕궁이 모두 불에 탐 → 메데이아가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난 두 자식까지 살해.- 이아손의 최후 : 아르고호의 뱃머리 상에 맞아 죽음.- 이후 메데이아는 아 도착할 때까지 술포대를 풀지 마라.) → 트로이젠 왕 피테우스의 신탁 해석. → 피테우스가 자신의 딸 아이트라를 아이게우스의 침실로 들여보냄. → 아이게우스가 바위 아래에 자신의 “칼과 신발”을 숨겨두고 아들(테세우스)이 태어나면 찾아오게 함.메도스(아이게우스 + 메데이아) : 아이트라와 결혼 후에 집에 돌아가는 길에 코린토스에서 메데이아를 만나게 되고 메도스라는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테세우스의 아버지 찾기- 육로보다 뱃길이 안전하지만 육로를 선택하여 여행함.1. 코리네테스(=페리페테스)(헤파이스토스의 아들, 곤봉의 사나이) → 에피다우로스에 사는 행인을 곤봉을 휘둘러 절명시키고 물건을 뺏는 강도. 테세우스가 이기고 철퇴를 자신의 무기로 삼음.2. 시네스(=피티오캄테스) (소나무를 휘는 자) : 지나가는 사람을 두 개의 소나무에 묶어놓고 찢어 죽이는 강도. → 테세우스가 똑같은 수법으로 죽이고 딸 페리구네와 사랑에 빠짐.3. 파이아(튀폰 + 아키드나) : 크로뮈온에 사는 암퇘지 모습의 괴물4. 스키론 : 발을 씻기게 한 후 바다로 던져 죽이는 괴물 → 테세우스가 똑같이 죽임.5. 케르키론(몸에 기름이 흐르는 괴물) : 엘레우시스에 사는 인물로 씨름의 명수. 먼지를 뿌려 잡은 다음 절명시킴 (그레코 ?로만 형 레슬링 유래)6. 프로크루스테스(포세이돈의 아들) : 다프니에 사는 도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 자신의 침대에 눞혀 키가 크면 자르고 작으면 늘려서 죽임 → 제멋대로의 잣대 → 아전인수테세우스의 크레타 원정- 테세우스의 등장과 메데이아의 저항┗ 메데이아는 테세우스가 아이게우스의 아들임을 알아봄. 아들인 메도스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테세우스가 아이게우스의 아들임을 숨기고 모함해서 독살하려 함. → 아이게우스가 테세우스의 신발과 칼을 보고 아들임을 알아보았고 메데이아는 메도스와 함께 용이 끄는 마차를 타고 도망침.- 크레타의 미노타우로스(미노스, 파시파에, 다이달로스), 일곱 처녀 총각(공물)┗ 테세우스가 오기 전, 아이게우스는 축제의 일환의 다이달로스 : 미노타우로스와 라뷔린토스(Labyrintos미궁)- 미궁 속의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 새의 깃과 밀납, 이카로스의 날개(이카로스의 날개 = 작은 재주를 가지고 만용을 가지면 위험하다)- 시칠리아의 다이달로스 : 미노스의 최후[헤라클레스] (Herakles)탄생- 아르골리스의 영웅이지만 테베에서 태어남.- 알크메네와 암피트리온 : 제우스 ->기혼녀인 알크메네에게 제우스가 접근┗ 알크메네의 오빠들이 도적들에게 소를 도둑맞고 죽음. 알크메네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사촌 암피트리온이 소를 되찾아오고 난동을 부리던 소에게 던진 몽둥이가 알크메네의 아버지인 엘렉트뤼온을 죽임. 추방당하고 오빠들의 복수를 위해 테베로 감. 암피트리온이 사촌들의 복수를 하는 동안 제우스가 암피트리온으로 변장해서 알크메네와 아이를 가짐. 이후 진짜 암피트리온과도 아이를 갖게 되고,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와 암피트리온의 아들 이피클레스가 같이 자라게 됨.- 헤라와 에일레이튀아, 갈란티아스┗ 제우스가 곧 태어나는 페르세우스의 자손이 아르골리스를 지배할 것이라고 선언함. 이에 눈치채고 분노한 헤라가 보복으로 출산의 여신 에일레이튀아를 보내 그들의 사촌인 에우뤼스테우스가 칠삭둥이로 태어나게 함. 헤라클레스와 이피클레스는 만삭을 넘기고도 태어나지 못함. → 알크메네의 하녀 갈란티아스가 에일레이튀아에게 아들을 낳은 것을 어떻게 알고 축하하러 왔냐고 말함. 놀란 에일레이튀아가 팔짱을 품 팔짱을 푸는 순간 알크메네가 아들을 낳음 신의 노여움을 사서 갈란티아스는 족제비로 변함.헤라클레스의 가계도PerseusAndromedaElektryonAlkaiosSthenelosZeusAlkmeneAmphitryonEurystheusHaraklesIphiklesIolaos성장- 생후 6(8)개월, 두 마리의 뱀 → 헤라가 헤라클레스를 죽이기 위해 침대에 뱀을 넣었으나 실패.- 음악 교사 리노스Linos 살해(첫 살인) : 교사 리노스가 헤라클레스를 나무라자 리노스를 때려죽임.- 키타이론 산에 보내어 다시 하늘을 받치게 됨.┗ 나그네를 제물로 바치는 부시리스 왕 해치움. 씨름꾼 안타이오스를 땅에서 떨어뜨려 목 졸라 죽임.12. 케르베로스(저승의 신 하데스의 궁전을 지키는 괴물) : 신과 관련된 과업.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안내를 받아 저승으로 감. → 맨손으로 생포한다면 케르베로스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지상으로 끌고 와서 에우뤼스테우스에게 보여줌. → 에우뤼스테우스는 겁을 먹고 항아리에 숨음.┗ 저승에서 만난 멜레아그로스의 부탁 : 여동생 데이아네이라의 장래 부탁), 테세우스를 끌고 옴.두 번째 광기와 속죄- 에우보이아 지방 오이칼리아의 왕 에우뤼토스의 궁술대회 : 우승 시 왕의 딸 드뤼오페와 이올레 중에서 이올레와 결혼할 수 있었음. → 헤라클레스가 우승했지만 그의 불행한 과거 때문에 왕은 이올레를 주지 않음. → 헤라클레스를 존경한 왕자 이피토스가 왕을 설득했으나 통하지 않음. → 이피토스가 없어진 가축을 찾는 것을 도와달라고 헤라클레스에게 부탁했으나 헤라클레스는 이피토스가 자신을 의심한다고 생각해서 살해함. → 신탁을 들으러 감.- 델포이에서의 난동 : 무녀가 헤라클레스를 쫓아냄. → 퓌티아의 삼각대를 빼앗고 신전을 무너뜨림. → 아폴론이 나타나 싸울 뻔 했으나 제우스가 저지함. → 3년간 노예로 살 것을 명령함. → 뤼디아의 여왕 옴팔레(배꼽)의 노예로 헌신. (그동안 아들 라모스도 낳음.)- 복수와 약속의 성사 :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사람들을 찾아가 복수함.┗ 라오메돈(명마 약속X)을 죽임. (프리아모스로 이름을 바꾼 포다르케와 티토노스만이 살아남음.)┗ 아우게이아스(축사 청소 보수X)을 죽임. (증언을 해준 필레우스를 왕위에 앉힘.)┗ 넬레우스(이피토스를 죽이는 계기) : 3년간의 노예생활에 대한 복수.┗ 저승에서 만난 멜레아그로스와의 약속을 지킴 : 데이아네이라와 결혼. (아들 휠로스를 얻음.)두 번째 결혼과 파국, 그 후- 데이아네이라(오이네우스왕과 알타이아 왕비의 딸)┗ 아켈로오스(강의 신)가 이미 구혼 중이었음. → 헤라클레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