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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고서] 공주 공산성 답사 보고서(컬러사진 포함)
    벚꽃이 흩날리던 3월 중순, 공산성으로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답사를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것이다. 답사(踏査)의 의미가 ‘밟고 보다’인 만큼 직접 공산성을 밟고 보며 웅진시대 백제 인들의 향취를 느끼기 위해 노력하며 이번 공산성 답사를 진행하였다.백제는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인해 문주왕 원년(475)에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로 천도한다. 공산성은 문주왕을 비롯해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을 거쳐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도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왕성이었다. 백제 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 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 시대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었다. 금강에 접한 해발 110m의 산에 능선과 계곡을 둘러쌓은 포곡형 산성으로 축조되었는데, 백제시대에는 토성이었다가 조선시대 인조, 선조 이후에 석성으로 개축되었다. 이는 쌍수정을 설명할 때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겠다. 성의 길이는 총 2,660m이고, 동서남북 네 곳에서 문의 터가 확인되었다. 남문과 북문인 진남루와 공북루는 남아 있었고, 1993년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여 각각 영동루와 금서루로 명명하였다. 2011년에는 연도가 새겨진(645) 백제시대 갑옷과 마갑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팸플릿에 따르면 약 한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는데 걸음걸이가 얼마나 빨라야 이 큰 산성을 한 시간 안에 돌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러한 점은 공산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한 담당 부서의 의도적 실수가 아닐까 한다.금강철교를 지나 공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서문을 통하는 길 하나뿐이다. 서문을 지나면 두 갈래 길이 나뉘는데 이 갈래 길 중에서 쌍수정으로 가는 길이 하나 있고 공산정으로 가는 길이 하나 있다. 대략 반년이 지난 지금도 붕괴된 성벽의 복원이 다 이루어지지 않아 붕괴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하여 공산정으로 가는 길은 통제되어 가볼 수 없었다. 올해에는 공산성에 세 번 다녀왔는데 처음 갔을 때에는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려 서문주차장에서 금서루만 보고 다시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서문에 주차장을 만드는 등의 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작업 이전에 금서루 근처에 살던 송덕비 사람들의 요구도 있었을 것이다.서문 주차장에서 금서루로 올라가는 길에는 비석들이 서 있다. 이 비석들은 모두 ‘송덕비’ 인데 공산성에서 발굴되거나 공산성에 세워진 비석들은 아니고 모두 시내나 나루터, 다리 등 시내 곳곳에 세워져 있던 관찰사·암행어사·목사·군수들의 행적을 기리는 선정비·불망비·영세비 등 43개의 비석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이다. 대표적인 송덕비로는 제민천의 다리에서 가져온 영세비 2개가 있다. 일목요연하고 질서정연해 보이긴 하는데 어딘지 조금 어색하다. 비석과 같은 문화재는 원래 있던 자리에 있을 때 가장 빛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공산성과 관련되어 있는 비석들도 아니라 굳이 제 위치가 아닌 공산성에 있어야 할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 비석들이 공산성에 있던 것이 아니라는 설명은 있지만 왜 이리로 왔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없다. 사실 이점도 특정 비석 몇 가지를 설명하고 있어 유추한 것이지 이러한 과정이 없다면 몇몇 비석을 제외하곤 본디 공산성에 있던 비석들이라 충분히 생각할 수 있어 이러한 점이 조금 아쉽게 다가왔다. 작년, 처음으로 공산성에 가보았을 때 내가 범했던 실수가 그것이었다. 설명이 없는 비석들을 보고 당연히 공산성을 지키던 사람들, 공산성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나 관련된 것들을 세긴 비석인 줄 알고 지나쳤었는데 학과 교수님과 함께 간 답사 때 그것이 아님을 알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런 점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면 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오해라 생각한다.금서루를 지나 공북루로 내려가는 길 주변에는 수문병 교대식을 체험할 수 있도록 옥사, 활쏘기, 공예 체험장이 준비되어 있었다. 활쏘기 체험장의 경우 24대 동성왕이 활만 쏘았다 하면 백발백중이었다는 점을 같이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는 체험하면서 배우는 역사가 아닐까 싶었다. 동성왕의 활솜씨가 철저한 고증을 거친 후 재현한 것이라 한다. 실제로 문화해설사가 이에 중점을 두고 설명하는 모습이었다. 복식에 대한 설명은 없었으나 수문병들의 무기인 ‘창’에 대해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한 것이라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문병들은 하늘, 땅, 사람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지닌 창술을 보였는데 하늘의 경우 드높은 기상을, 땅의 경우 성벽을 오르는 적을 찌르는 모습을, 사람의 경우 말 그대로 사람을 찌르는 모습을 보였다. 병사들이 금서루 성벽에 올라 창을 교환하는 모습까지 재현하고 약 20분정도를 성을 지키며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니 서울시의 문화정책이 생각났다. 광화문광장 근처의 한식집에서 일할 때 였다. 오전 11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간만 되면 청계천변을 따라 조선시대 복장을 갖춘 사람들이 행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공주시의 수문병 교대식은 이를 넘어 관광객들과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수문병들은 자신의 역할이 끝나자 사람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등 관광객들과 어우러지려는 모습을 보였다. 주 관광객은 대부분 어린 아이가 있는 가족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이러한 경험을 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높아져 굉장히 좋은 것이라 생각된다. 금서루를 지키는 수문병들 쌍수정 수문병들이 지키던 금서루를 지나서 공산성 성곽을 올라가던 중에 연미산, 정지산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연미산은 그 정상에 오르면 공주시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정지산의 경우 각주에서도 설명했지만 그 이름이 배가 멈추는 산이라는 의미이기에 예전에는 그 일대가 물에 잠겨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정지산은 지리적으로 교통상의 요지였는데 이는 서해로 나갈 수 있는 동시에 중국, 일본과의 교역을 시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신라 당(항)성의 역할을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위치적 특징보다 더 중요한 역사적 특징이 있는데, 그 특징은 정지산에서 얼음냉장고의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정지산은 무령왕릉이 자리하고 있는 는 이름을 하사한다. 이 일 이후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 시작됐고, 쌍수산성은 상당히 자랑스러운 이름이 되었다. 쌍수정에서 본 서울 가는 길 쌍수산성사적비 또한 왕의 기념비인 쌍수산성사적비를 내렸는데 왕의 기념비는 왕과 다름없었기에 예전에는 남문인 진남루 앞에 홍살문이 있었다고 한다. 임금이 이름을 내려주고 기념비까지 내려주어 왕이 있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쌍수정하면 대중들이 떠올리는 것이 하나 더 있다. ‘인절미’가 바로 그것이다.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를 지나던 인조에게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진상한 떡으로 인조께서 '매우 뛰어난 맛'이라 감탄하여 절미(絶味) 라는 말 앞에 떡을 진상한 사람의 성을 따서 '임절미' 라 부르다 '인절미'로 부르게 되었다라고 전해진다. 평소에 인절미를 먹을 때 공주에 대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 이야기를 들으니 인절미가 공주의 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쌍수정에 갔을 때, 하필 쌍수정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세미나 비슷한 무엇인가가 진행되고 있어서 쌍수정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는 수업시간에 배운 건축양식을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그러지 못해 굉장한 아쉬움으로 남는다.쌍수정에서 실제로 서울로 오고가는 길이 보이는지 사진을 찍어보았는데(사진7) 사진은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직접 볼 때는 천안논산 고속도로가 실제로 보였다. 공산성 우물터 웅진시대 백제는 공주에 63년간 도읍을 했는데 왕성이 어디 있는지 분명치 않다. 백제 유적은 발굴은 많이 되었으나 부여의 경우 왕궁터를 추측만 할 뿐 구체적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공산성 역시 그렇다. 백제의 왕성이라는 확신은 있으나 그것에 합당한 근거가 없는 것이다. 쌍수정 근처의 큰 공터에는 우물로 알려진 커다란 구덩이가 하나 있고 그 옆에는 발굴 후 왕궁터로 추정되어 펜스가 쳐진 땅이 있다.사람이 사는데 있어 물은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모든 성에는 용수시설이 필수적이다. 용수시설이 없다면 그 성은 성의 역할을 할 수 없다해할 수 없었다. 유적에 빠지지 말라고 설치한 나무 펜스 역시 문제가 많아보였다. 공산성이 유서 깊은 유적이고 주변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나무를 사용한 것 같은데 이것까지는 좋다. 허나 이 나무펜스가 너무나 약하다. 손을 올려서 살짝 당겼더니 펜스가 심하게 흔들흔들 거린다. 요즘 공산성은 성벽 붕괴의 위험성으로 인해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다. 따라서 주차장 옆 매표소가 비어있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언급했듯 올해 공산성에 3번 다녀왔는데 한번은 야간이라 그렇다 치더라도 주말인 토요일을 제외하고는 매표소에 직원이 있는 것을 보질 못했다. 즉 충분히 인명피해나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쌍수정에서 본 벚꽃일제 시대에는 이 공터를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즉 공설운동장으로 사용했다. 이로 인해 백제시대의 유적이 많이 파괴되었다. 그때 심은 벚꽃이 고목이 되어 피고 있는데 굉장히 아름답다는 생각과 동시에 일제가 파괴한 유적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기 이를 태 없었다. 이 곳에서 남쪽으로 가면 진남루를 볼 수 있고 북쪽, 말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언덕을 내려가면 영은사를 볼 수 있다. 영은사 전경 영은사는 공산성 내부에 있는 작은 절이다. 건물도 몇 개 되질 않는다. 대략 4개 정도의 작은 법당이 있었던 것 같다. 영은사의 특징이라면 북향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대부분의 건축물이 남향인 반면 영은사는 북향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점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영은사가 위치한 곳의 지형 때문에 발생한 결과이다. 영은사에서 아래로 조금 더 내려가면 만하루에 도착하는데, 만하루와 영은사 사이를 약 20여 년 전에 발굴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발굴 결과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대의 조그마한 불상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영은사가 생기기 전에도 이 일대에 규모가 자그마한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점에서 봤을 때 영은사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 이상의 고찰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은사 스스로 천년고찰이라 모습
    생활/환경| 2019.04.22| 10페이지| 8,000원| 조회(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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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 보고서] 경주 답사 보고서 평가A+최고예요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와 대화하다가장 먼저 간 곳은 쪽샘지구였다. 사실 총론을 듣기 전에는 쪽샘지구라는 곳이 있는지도 몰랐다. 쪽샘지구에 도착하자 실제로 발굴을 담당하시는 분이 쪽샘지구와 신라 무덤 양식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해주셨다. 더불어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과도 비교해주셔서 신라의 무덤양식을 이해하기에 더 쉬웠다. 쪽샘지구는 3~6세기의 대규모 고분군으로 신라의 고분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쪽샘지구를 지나 도착한 곳은 대릉원지구였다. 대릉원지구를 보자 든 생각은 경주가 신라의 고도로 생각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구나였다. 또한 다른 도고의 경우 고분들이 산 속이나 특정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데 경주는 생활공간 안에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대릉원지구는 총 7개의 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7지구는 오릉, 황남동 고분군, 노서리 고분군, 노동리 고분군, 재매정 동부유적지구, 미추왕릉 지구이다. 각론이 천마총 앞에서 이루어져 천마총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지난학기에 고고학개론을 수강하면서 들었던 신라고분양식에 대해 다시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천마총에 관해 들었던 이야기 중 독특한 것이 하나 있다. 천마총의 경우 일련번호 155번 고분으로 발굴 후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는데 내부에 들어가면 돌들이 새카맣다. 이는 일반인들이 벽면을 너무 많이 만져서 묻은 손 떼라고 한다. 신라 고분의 경우 왕릉의 피장자를 정확히 알아내지 못하는 점이 너무나 안타까웠다.세 번째 각론지는 감은사지였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정말 크다였다. 당시 이정도로 커다란 탑을 세웠다는 것은 어떠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감은사는 쌍탑식 가람배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통일 이후의 신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람이다. 감은사의 건설은 통일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창건한 사찰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탑의 상징적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사회, 정치적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사회, 정치적으로 단결되어 추진된 통일전쟁의 수행 이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이완된 민심을 하나로 집결시키려는, 즉 국가 내부의 안정을 꾀하려는 시도로 생각된다. 따라서 만파식적이라는 절대적인 힘이 필요했고 문무왕은 용이 되었어야 했던 것이다.그 다음 각론지는 문무대왕릉이었다. 문무대왕릉은 감은사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만파식적 설화가 바로 그것이다. 문무대왕릉의 의의는 무덤 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바위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우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특수형식인 수중릉이다. 이는 지금까지 그러한 예가 없다. 평소에 역사적 장소나 유물을 볼 때 그 자체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읽고 이것들이 현재에 시사하는 바도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과 합치하는 장소가 문무대왕릉이 아닐까 한다.첫째 날의 마지막 답사지는 동궁와 월지, 안압지였다. 동궁과 월지의 경우 과 역사상 최초의 야간답사라고 들었다.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주령구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한다. 주사위의 내용을 보자면 술마시기, 노래부르기, 장난치기 등이 있는데 이를 통해 동궁과 월지에서 신라 귀족들이 놀이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동궁과 월지는 신라라는 한 국가의 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국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지어진 건물이며 후에 태조 왕건이 신라 경순왕을 만나러 갈 때에도 동궁과 월지가 존재했다. 즉 신라 역사와 함께해온 유적인 것이다. 단순히 야경을 감상하는 장소가 아닌 당시 귀족들의 풍류와 사회 모습 등을 생각할 수 있는 장소이기에 이러한 점을 인지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바람이 들었다.둘째 날 오전부터 비가 주륵주륵 오기 시작했다.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답사는 계속되어야 하기에 첫 번째 각론지인 불국사로 향했다. 지난 답사 때에도 비가 와 굉장히 불편했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국사에서의 각론을 듣기 시작했다. 불국사 역시 지난 학기 수강한 문화재학개론으로 인해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던 터라 둘러보는 데에도 어려움은 없었다. 불국사의 가람배치는 지상세계와 천상세계를 모두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지상세계에서 청운교와 백운교를 오르면 부처님의 서기를 상징하는 자하문을 거쳐 부처님을 모신 금당이 나오는데 그 앞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마주보고 서있다. 우리가 답사를 갔을 때에는 석가탑이 해체되어 있어 탑의 구성부분을 구석구석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답사가 한 달 늦춰진 것이 오히려 행운이 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국사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학창시절 꼭 다녀오는 관광지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허나 불국사도 엄연한 문화재이기에 이를 문화재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절이 아닌 의미가 있는 요소들의 집합으로 이를 바라보기 위한 시각이 필요하다.
    독후감/창작| 2019.04.22| 2페이지| 1,500원| 조회(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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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사] 사료를 통해 본 백제의 시조
    백제의 건국 이야기백제의 시조에 대해서는 5가지의 설이 있다. 첫째는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 본문에 보이는 시조 온조설, 둘째는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즉위년조의 세주에 보이는 시조 비류설, 셋째는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조에 보이는 시조 우태설, 넷째는 《주서》 권49 열전 백제전과 《수서(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 시조 구태설, 다섯째는 《삼국사기》 권32 제사조 및 《속일본기》 권40 연력 9년 추7월조에 보이는 태조 동명=도모설이다(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469∼473쪽). 백제본기에서 시조 온조설과 시조 비류설 및 시조 구태설을 기록한 《삼국사기》의 찬자는 《삼국사기》 권32 제사 백제사례조에서 “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 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라 하여 시조 동명설을 취신하고 여타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百濟始祖 溫祚王, 其父, 鄒牟, 或云朱蒙.백제시조 온조왕, 기부, 추모, 혹운주몽.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그 아버지는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하였다.온조왕-백제를 건국한 사람은 고구려에서 내려온 온조(溫祚)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백제의 건국자는 온조 외에도 비류(沸流), 구이(仇台), 도모(都慕)가 국내외의 사서(史書)에 전해지고 있다. 백제의 시조가 온조라는 주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의 본문과 《삼국유사》 남부여전백조(南夫餘前百濟) 조에 전하며, 비류설은 백제본기 온조왕 조의 세주(細註)에 기록되었다. 그 반면에 도모설은 《속일본기(續日本記)》등 일본의 사서에만 전하고, 구이설은 《주서(周書)》 국사편찬위원회 와 《수서(隋書)》의 백제전등 중국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自 北扶餘 逃難, 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자 북부여 도난, 지졸본부여. 부여왕무자, 지유삼녀자, 견주몽, 지비상인, 이제이녀처지.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 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 "朱蒙, 到卒本, 娶越郡女, 生二子."]미기, 부여왕훙, 주몽사위. 생이자, 장왈 비류, 차왈 온조.[혹운: "주몽, 도졸본, 취월군녀, 생이자."]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 아들은 온조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도착하여 월군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 來爲太子.급주몽재북부여소생자, 내위태자.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었다.沸流·溫祚, 恐爲太子所不容, 遂與 烏干 ·馬黎 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 多.비류·온조, 공위태자소부용, 수여 오간 ·마려 등십신남행, 백성종지자, 다.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 마침내 오간· 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더불어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수지한산, 등부아악, 망가거지지, 비류욕거어해빈.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자 하였다.한산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강 북안설(北漢山說)과 한강 남안설(南漢山說)로 대별된다. 백제의 최초의 도읍지를 한강 이북으로 본다면 온조왕조에 보이는 한산은 북한산에 비정할 수 있다( 정약용, 《아방강역고》3 |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1976, 491∼497쪽).부아악은 삼각산의 제일봉인 인수봉의 옛날 이름으로 그 뒤편에 또 하나의 바위가 붙어 마치 아이를 업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라서 부아악十臣諫曰:"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십신간왈:"유차하남지지, 북대한수, 동거고악, 남망옥택, 서조대해. 기천험지리, 난득지세, 작도어사, 부역의호?"열 명의 신하가 간하였다. “이 하남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를 띠처럼 띠고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으니 이렇게 하늘이 내려 준 험준함과 지세의 이점은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한수=한강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비류불청, 분기민, 귀미추홀이거지. 온조도하남위례성, 이십신위보익, 국호십제, 시전한성제홍가삼년야.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이때가 전한성제홍가3년(서기전 18)이었다.미추홀=인천 미추홀에 근거지를 둔 비류집단이 남긴 유적으로 인천의 문학산성, 관교동 토성지(土城址) 등이 거론되고 있다위례성은 해당 사료가 부족하고 관련 유적과 유물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장소를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삼각산 동쪽 기슭, 세검정 일대, 경기도 고양, 서울 강북, 북한산성, 중랑천 일대 등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다.위례성은 ‘위례’가 ‘우리(柵)’를 뜻하는 말의 어원에서 기원( 정약용, 「아방강역고-위례고-」, 《여유당전서》6집3책)한 것으로 볼 때 다른 성읍국가의 중심지와 큰 차이가 없다.위례성은 자연 구릉을 최대한 활용한 상태에서 목책(木柵)을 세우고 일부를 흙으로 쌓은 상태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위례성의 위치를 증명할 수 있는 고고 유적이나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장소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실정이다.沸流以彌鄒, 土濕水鹹,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 慰禮.비류이미추, 토습수함, 불득안거, 귀견위례, 도읍정정, 인민안태, 수참회이사, 기신민개귀어위례.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에 돌아와 보니 도읍은 안정되고 백성들도 평안하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에 귀부하였다.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 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후이래시백성락종, 개호백제. 기세계여고구려, 동출부여, 고이부여위씨.후에 내려 올 때에 백성들이 즐겨 따랐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 그 계통은 고구려와 더불어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一云: 始祖 沸流王, 其父優台,北扶餘王解扶婁 庶孫.[일운: 시조 비류왕, 기부우태,북부여왕해부루 서손.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조 비류왕의 그 아버지는 우태로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이었다.母召西奴, 卒本人延?勃 之女, 始歸于優台, 生子二人, 長曰沸流, 次曰溫祚. 優台死, 寡居于 卒本.모소서노, 졸본인연타발 지녀, 시귀우우태, 생자이인, 장왈비류, 차왈온조. 우태사, 과거우 졸본.어머니는 소서노로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었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지냈다.後朱蒙不容於扶餘, 以前漢建昭 二年, 春二月, 南奔至卒本, 立都號高句麗, 娶 召西奴爲妃.후주몽불용어부여, 이전한건소 이년, 춘이월, 남분지졸본, 립도호고구려, 취 소서노위비.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였으며, 소서노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인문/어학| 2019.04.22| 4페이지| 2,000원| 조회(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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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사 보고서] 강원 - 경기(여주) 답사 보고서
    ? 첫째 날꽃이 만개하던 4월, 우리는 강원도로 답사를 떠났다. 답사(踏査)의 의미는 ‘밟고 보다’ 이기에 강원도의 땅을 밟고 보며 강원도가 품은 역사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침 7시에 모여 학교를 떠나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오대산의 월정사였다. 월정사에 들어서자마자 8각 9층석탑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국사시간에 바람이 불면 탑에 있는 종이 울려 그 소리가 매우 아름답다는 얘기를 듣고 실제로 보고싶었던 탑인데 처음부터 내가 보고 싶었던 탑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월정사 9층석탑 앞에는 공양하고 있는 석조 보살좌상이 놓여 있는데 이는 부처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는 탑에 공양함으로써 부처에게 공양하고, 누구나 공양을 통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월정사를 나와 우리가 향한 곳은 임영관이였다. 가는 길에 비가오기 시작해 임영관에 도착하니 이미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는데 일정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임영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객사문이다. 강릉 객사문은 현존하는 몇 안 되는 고려시대 건물 중 하나이다. 강릉지역에 국보급 문화재가 10개가 있는데, 객사문을 제외한 9개의 문화재가 모두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문화재이기에 객사문을 통해 당시의 건축기법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임영관의 경우 총 83칸 규모로 창건되어 조선시대에도 객사로 사용되었으나 1584년 이후에만 10여 차례의 중수와 증축을 거듭하였고, 1929년 강릉공립보통학교 설치로 인하여 객사문을 제외한 임영관이 일제에 의해 헐린다. 얼마 전 내린 폭설 때문에 임영관을 비롯한 건물들의 기와가 많이 무너져 있었는데 강릉시의 빠른 조취가 필요해 보였다.세 번째로 간 곳은 오죽헌이였다. 비가 많이 와 각론에도 어려움이 있었고 관람에도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렸을 때 방문한 적이 있는 오죽헌인지라 얼마나 변했는지 기대가 많이 되었다. 오죽헌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주택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로 손꼽힌다. 신사임당이 이이를 낳은 오죽헌을 보며 조선 전기의 가족제도와 성리학이 저연스럽게 떠올랐다. 한 사람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년시절의 환경이다. 이이가 오죽헌에서 약 6년정도를 살았기에 이 시기가 이이에게 커다란 영향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나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오죽헌 옆에 시립박물관이 있었는데 예전에 왔었을 때에 비해서 유물은 조금 늘었으나 여전히 박물관이라고 보기엔 많은 부족함이 있었다. 또한 오죽헌 시립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죽헌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강릉시의 유물들만을 전시하여 아쉬움이 남았다.첫날의 마지막 답사지인 선교장에 도착하니 비가 조금은 그쳤다.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선교장을 본 순간 아름답다라는 생각 외엔 드는 생각이 없었다. 99칸의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인 선교장은 지금도 그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산기슭을 배경으로 자연과 어울리도록 배치된 건물들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일반적으로 주거시설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선교장을 보면서 당대 사람들의 사생활을 엿볼 수 있었고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러한 주택을 구성했는지 조금이나마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날둘째 날이 되자 비는 완전히 그쳤고 태양이 우릴 반기고 있었다. 숙소에서 멀지않은 강릉향교로 이동했다. 평소에 향교에 대해 생각할 땐 단순히 강학과 제향의 기능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향교의 설립을 시대적인 배경과 상황을 고려하여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강릉향교의 경우 임진왜란 직후 향교 교육이 쇠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상을 지켜왔는데 이 역시 생각해볼만한 점이다. 강릉향교에서 큐레이터 분께서 대성전 안을 보여주시고 공자의 위패를 보여주신 것이 인상 깊었다.영릉은 세종대왕의 무덤이다. 세종의 정치는 ‘애민’이라는 키워드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군권을 장악하고 왕권을 강화시킨 태종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영릉을 보며 진입 공간, 제향, 능침 공간으로 이루어진 조선 왕릉의 공간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참도 역시 영릉의 특징인데, 왕의 참도인 2도가 아니라 황제의 참도인 3도가 놓인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릉 정화작업 당시 홍살문이 제자리가 아닌 곳에 만들어져 있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조선이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참도가 비스듬히 꺾인 것이다. 영릉을 보며 세종과 그의 업적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독후감/창작| 2019.04.22| 2페이지| 1,500원| 조회(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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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과 불교의 수용
    Ⅰ.서불교는 언제 수용되었을까? 최초 수용은 고구려의 소수림왕이었다. 전진의(前秦)왕 부견이 고구려에 파견하는 사신 일행에 순도(順道)라는 승려를 동반시켜 보냈는데 이때 순도는 불상과 불경을 전해왔다. 이것은 불교가 전래된 것이고 이는 소수림왕 2년(372)에 있던 일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불교가 전파된 지 1,600년 이상 되었다는 이야기이다.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불교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찬란한 불교문화를 이루어냈다. 이 가운데에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세계적인 문화유산도 많다. 직지심체요절부터 해서 석굴암, 에밀레종, 경주 남산, 고려대장경 등등 이 그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유적은 약 60~70%가 불교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불교의 영향은 이런 유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천당, 지옥, 아비규환, 이판사판, 아수라장과 같이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고 접하는 단어들의 기원은 모두 불교이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은 야외에서 하는 법회라고 볼 수 있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은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을 합쳐 만든 단어인데 조선의 억불정책 때문에 만들어진 단어이다. 당시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 선택이었고 이에 따라 이판이나 사판은 그 자체로 '끝장'을 의미하는 말로 전이된다.불교는 그 오랜 역사답게 우리 생활 속으로 깊게 침투되어 있어 한국인들은 그 흔적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불교는 한국문화의 기틀이 되는 하나의 커다란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불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따라서 본 지를 통해 불교의 수용과 수용 목적을 알아보고자 한다.Ⅱ.불교의 수용1. 삼국의 불교 수용삼국 중에서 불교를 가장 먼저 수용한 국가는 고구려이다. 중국 전진의 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고구려에 보냄으로써 수용의 바탕이 만들어지게 되고,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를 수용하게 된다. 이후 고국양왕이 불교를 신봉하라는 영을 내린 이듬해인 광개토대왕 2년(392)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였고, 395년에는 진나라 승려 담시(曇始)가 교화를 위해 고구려로 왔다. 담시는 불교의 교리연구 및 설법의 이해에 필요한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왔고, 수계(授戒)를 베풀어 불제자가 되는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불교역사상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맞게 하였다. 문자왕 7년(498년)에는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으며, 평원왕 18년(576년)에는 의연(義淵)을 중국 북제로 보내어 정국사(定國寺)의 법상(法上)에게 불기(佛紀) 및 중국의 불교전래 등 불교의 역사전개와 교학(敎學)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배우게 하였다.백제는 384년에 침류왕이 불교를 수용한다. 허나 백제에 불교가 수용된 후 약 150여 년간 불교가 어떻게 발전하고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없다. 백제 불교와 관련한 기록은 ‘겸익(謙益)’이 처음일 것이다. 겸익(謙益)은 최초로 인도에 유학을 다녀온 승려였다. 당시 인도로 간다는 것은 모래바람과 같이 쉽사리 예측할 수 없는 사막을 건너고 조그마한 배를 타고 바다를 지나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도 땅으로 가는 것은 시도조차 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러한 일을 겸익이 해낸 것이다. 겸익이 언제 백제를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허나 인도에 수년간 머물면서 공부를 했고 530년에 백제로 다시 돌아온다. 그는 불경을 가지고 왔고,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불교 원전을 해석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인도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귀국하였다. 그는 범문(梵文)으로 된 율문(律文)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번역하여 72권으로 엮었으며,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은 그 율에 대한 소(疏) 36권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는 인도로부터 직접 가지고 온 원전을 백제인의 손으로 번역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 있는 일이었으며, 백제불교가 계율주의적 경향을 띠게 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신라는 법흥왕이 527년 불교를 수용한다. 물론 불교의 수용은 법흥왕 이전이라고 추측된다. 눌지마립간(訥祇王)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 비처왕(毗處王)때에 이르러 아도(阿道 혹은 我道)의 예시가 그렇다.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香)을 주었는데 묵호자(墨胡子)는 신라인들이 향의 사용법을 몰라 이를 알려주었고 아도(阿道)는 부처가 설법한 것을 기록한 책인 경(經)과 승려 및 신도가 지켜야할 계율인 율(律)을 강독(講讀)하였다. 신라와 백제와 달리, 신라가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는 이야기 하나가 존재한다. ‘이차돈의 순교’가 바로 그것이다.이차돈(異次頓)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법흥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이 불교를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였으므로 왕이 근심하였다. 따라서 불교의 수용을 위해 법흥왕의 가까운 신하인 이차돈이“나는 불법(佛法)을 위하여 형(刑)을 당하는데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나의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후 형이 집행되었는데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이 일이 있자 여러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고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면을 봤을 때 불교의 수용은 당시 귀족들이 쥐고 있던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 불교는 법흥왕에 의해 공인되어 발전할 수 있는 길이 개척되었다. 이는 법흥왕이라는 명칭에서 확인 가능하다. 그러나 불교를 진흥시켜 불교국가로 손색없는 기반을 닦아놓은 것은 진흥왕이 이룩한 것이라 볼 수 있다.2. 불교의 수용 목적이처럼 불교가 수용되는데 있어 신라의 경우처럼 잡음이 있을 수도 있고 고구려의 경우처럼 잡음이 없을 수도 있다. 고구려의 경우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 고구려인들을 비롯한 삼국의 사람들은 토테미즘, 애니미즘, 샤머니즘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종교와 신을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믿는 대상이 제각각이다 보니 국가의 백성들이 모두 하나라는 의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의식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 왕실은 아무런 갈등도 없이 불교를 바로 수용한 것이다. 불교를 수용하는 과정에 있어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불교가 당시 고구려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적, 사회적 풍토보다 우월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왕실은 불교라는 하나의 신앙을 중심으로 국가의 정신적인 통일을 이루려고 했을 것이다. 또한 왕실에서 아무런 잡음이 없었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그들에게 유리했음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왕즉불(王卽佛) 사상이다. 국왕 부처와 똑같이 여기게 해서 왕실의 권위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부처와 왕이 같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선 불교를 이용해 그들의 정신을 미리 하나로 만들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교는 정치적인 역할도 수행했는데 이는 백제 성왕의 예에서도 잘 드러난다.불교가 정치적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은 백제 성왕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백제는 문화적인 면에서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더 많은 영향을 흡수한 것 같이 보인다. 성왕의 대표적인 치적 중 하나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했다는 점이다. 성왕은 2명의 학자승려와 16명의 설법사, 불경과 불상 등을 야마토 조정에 보낸다. 이후 일본 왕에게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면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하라고 한다. 이는 불교라는 선진 문물을 전달한 백제가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그들을 정치적으로 쥐고 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물론 백제도 고구려의 경우와 같다. 전해지는 사료가 없어 백제 불교가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모르나 성왕이 겸익을 인도로 유학 보낸 것을 보았을 때 불교는 국가 전체적으로 후원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바탕엔 왕즉불 사상이 깔려있었다. 위에서 언급했듯 당시 인도로 가기 위해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막과 바다를 건너야 하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 겸익을 보낸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서 불교가 많은 이점을 지니고 있으니 그러한 불교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즉 백성들의 정신적 통일을 더욱 완벽하게 하고 자신의 통치를 더욱 안정시키기 위함에서 나온 행위라고 볼 수 있다.신라의 경우도 고구려, 백제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불교를 수용, 공인했다.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는 과정에서 귀족들과의 갈등이 있었기에 이를 탐구해 보려 한다. 귀족들이 반발한 이유는 그들의 기득권이 공격당해서 일 것이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겠다고 하자 귀족들은 이렇게 말하며 반대한다.“요즘 중의 무리를 보건대,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을 하였으며 말하는 것이 기괴하니 이는 확실히 진실한 도는 아닌 줄 압니다. 만약 그들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필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신들은 비록 중죄를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어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이에 따르면 당시 귀족들은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나 무속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일부 높은 귀족들이 그 종교의 권위자 자리에 있었고 일반적인 귀족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다. 이 종교는 귀족들만이 믿을 수 있는 종교이거나 백성들을 통솔하는데 이익이 있는 특징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당시 귀족들의 기득권이나 세력 기반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이 격하게 반대를 한 것으로 보아 아마 백성들을 통솔하는 것에 더 큰 목적이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다. 법훙왕이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만든 왕이라 생각하면 이는 충분히 유추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당시 신라엔 샤머니즘이 있었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불교 공인 이후 이러한 무속은 더 이상 공식적인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 자리를 불교가 대체한 것이다. 따라서 귀족들은 자신의 세력기반을 잃고 왕이 절대 권력자가 되는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인문/어학| 2018.12.07| 6페이지| 2,000원| 조회(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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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4월 25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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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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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