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엉부엉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72
검색어 입력폼
  • 권력구도 변화로 보는 공포정치에 따른 김정은의 북한
    권력구도 변화로 보는 공포정치에 따른 김정은의 북한국제관계학을 전공하기 전 세계정치에 대해 무지했기에 NPT, 7·4 남북 공동 성명 등에 대해 부끄럽지만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북한하면 궁금했던 것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는 과연 행복할까”이었다. 올해 4월 갑작스럽게 김정은 사망설이 돌았고 그 궁금증은 더 증폭되게 되었다. 사실 무근이라는 것으로 결말 지어졌지만 뇌리를 스치는 궁금증이 하나 더 파생되었다. “북한 내부에서 김정은은 과연 최고 권자에 앉아 안전함을 느낄까?” 만약 사망설이 나오게 된 것이 북한 내부적인 흔들림에 있진 않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들었고 이번 학기에 살펴본 사건 중 어떤 것과 연관을 지을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다. 특히 북한의 존폐를 다룬 미래가 아닌 ‘김정은의 북한에 대한 예측’이라는 점에서 구설수에 오른 여러 이야기들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오르내렸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려한다.권력구도의 변화를 하나의 사건으로 보았고 그렇다면 이 사건은 여러 번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1948년 북한 정부의 수립을 통해 친소파를 중심으로 권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후 1994년 김일성 사망, 2011년 김정일 사망에 따라 새로운 최고 권력자는 숙청 등을 통해 권력구도를 변화시켜왔다. 김정은 또한 북한의 3번째 최고 권력자가 됨에 따라 숙청을 단행했다. 김정은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수령 제1주의 독재체제 집단을 그렇게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문제아는 아니었지만 성격이 급하고 인내심이 없었다.”2016년 김정은의 이모 고용숙은 미국 와 인터뷰를 했다.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이 어릴 적부터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농구 시합을 할 때도 자기 멤버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고 이기기위해서 혹독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공놀이를 하다가 뭔가의 이유로 불만이 생기면 화를 참지 못하고 형의 얼굴에 공을 던졌다. 11살 때 여동생 김여정이 자신을 ‘작은 오빠’라고 불렀다고 화를 내었고 그 이후로 ‘큰 대장동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인터뷰 내용만으로 과거의 김정은의 행동을 전반적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누군가의 편집적 시선에 따라 그렇게 부각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권력자의 기질을 타고났던 것은 분명하다.“원래 아버지는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3대 세습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죠.”김정남이 2011년 인터뷰 중에 말한 내용이었다. “젊은 지도자를 모시는 것은 힘든 일이다”라고 현영철은 자기 아내 앞에서 투덜댄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과연 셋째였던 김정은이 최고 권력자 계승에 정당성을 가지고 북한 파워엘리트들은 젊디젊은 그를 쉽게 따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로 알려진 장석택과 현영철의 처형이나 김정남 사망 등은 최고 권력자로서의 힘을 마음껏 휘두르는 공포정치라고 그동안 생각해왔지만 혹시나 가장 높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있지만 우리가 예상한 것보다 그 자리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인 구속, 감시가 강한 북한에서는 최고권력자 암살 혹은 군이나 민중의 봉기는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역사상 김정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때에도 쿠데타 시도는 계속해서 있었다. 놀랍게도 북한에서는 2019년 테러집단이 미국 CIA와 대한민국 국가정보원과 공모해 김정은의 암살을 꾀했다고 전했다. 정확한 테러집단을 단정할 순 없지만 김정은의 자리가 그가 죽기 전까지 누구도 오를 수 없는 자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여지는 충분히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김정은은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선 국내외적으로 많은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 선택의 과정에는 북한의 최고 권력자의 특성상 통치 능력이 어느 나라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레포트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글은 “김정은의 통치 능력의 한계는 반드시 찾아올 것인가”가 돼야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세계사를 보아도 영원한 권력은 없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우리가 외부에서 바라보는 김정은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권력은 겉보기엔 영원해 보였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북한에 대한 자료는 그 양의 제약뿐만 아니라 적게나마 알려진 자료들이 진실인지조차 사실 확신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확인 할 수 있는 정보를 통해 생각해보자면 북한의 공포정치는 지속불가능하며 잠재적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 정보의 중심에는 계속되는 고위급 엘리트들의 탈북에 있다. 이전에 고위급 엘리트들이 탈북 하는 이유는 숙청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컸고 남한으로 내려와서도 자신을 세상에 공개하는 것을 꺼려했다. 하지만 요즘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탈북자들이 나오고 이제는 탈북자들을 패널 전체로 해서 진행하는 토크쇼도 생겼을 정도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행동에는 남한의 치안에 대한 믿음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탈북이유의 변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 ‘국가체제에 대한 불만’이라면 자신을 더욱 들어내고자 하지 않을까? 마치 시위처럼 말이다.아이러니하게도 통일부의 자료에 따르면 2016년까지 증가하던 탈북자의 수는 2017년부터 급감하였다. 하지만 탈북자수 자체가 2000명이 안 되는 적은 수이고 퍼센테이지로는 급감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감소분 자체는 100여명이다. 또한 대한민국으로 탈북 하는 인원이 줄어든 것이지 제3국으로 망명한 난민까지 가리키기 때문에 정확한 증감은 확인하기 어렵다. 대한민국으로 탈북한 인원의 감소 변화에 대한 정확한 원인 분석은 나오지 않는 상황이지만 김정은 정권 출범 후 국방경비대 경비 강화와 중국 측의 철저한 감독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 탈북자 감소의 원인이 탈북의 욕구가 줄어든 게 아니라면 부패의 만연 속에서 언제까지 그 욕구를 국가가 막을 수 있을지가 궁금해진다.단발적인 경험적 자료이지만,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 같은 전공에 탈북민 동기가 있었다. 수업시간 중 교수님의 양해를 통해 탈북민들이 남한으로 오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을 들은 내용은 이렇다. “나도 모든 탈북민의 탈북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매일 감자를 먹는 집은 보통 집, 쌀밥을 먹는 집은 부유한 집이고 적어도 우리 동네는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생일날 쌀밥을 먹을 수 있었고 그 조차 불가능한 해가 있었다고 한다. 남한에 대한 이야기는 마을에서 드라마줄거리처럼 점점 퍼진다고 했다. 그럴수록 탈북에 대한 생각이 점점 들었고 자신은 가족들과 탈북를 했다고 했다. 고위급 엘리트뿐만 아니라 일반 주민들의 탈북으로 인한 인원 감소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은 핵과 전쟁으로 글로벌 정치를 하고 있다는 의견들이 많은데 그런 생각에 따르면 탈북으로 인한 인원 감소 자체와 그로 인한 탈북하지 않은 주민들까지 사기가 저하되어 북한의 국방력 감소될 것이다. 오와 열이 기계처럼 맞는 모습이 북한 뉴스를 통해 전해지기도 하지만 군복을 풀어헤치거나 성추행과 영양실조 등 화려함 속에 감춰진 것들 또한 종종 뉴스를 통해 보이곤 한다.김정은의 통치능력의 한계는 언제 나타날 지는 알 수 없다. 어떠한 자극에 의해 일어날지도 예측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의 여러 욕구불만 속에서 과연 최고통치자는 언제까지 공포정치를 지속할 수 있을까?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인간의 행동과 자아실현은 욕구충족에 따라 단계적으로 다음 단계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으며 인간은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갖고 있다고 했다. 메슬로우의 욕구 위계론에 빗대어 탈북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생리적인 욕구에는 앞서 말했던 탈북자 동기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 일반 주민들 중에서는 (대다수가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굶는 것이 당연스럽고 북한의 식량난은 예전부터 심각해지고 있음을 여러 국가의 언론이 보도했고 지역별 아사자 발생을 예측하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식량난이 일어나는 이유는 국가가 주민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보호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생리적 욕구와 함께 안전의 욕구 또한 결여되기 쉽다. 다양한 이유로 처형과 고문이 이뤄지고 이 뿐만 아니라 군인에 의한 성폭행, 식량 강탈 등 내 집에서도 안전을 보장받기 힘들다는 탈북자들의 인터뷰를 적지 않게 들을 수 있다. 모든 주민이 그렇다고 할 수 없지만 그런 주민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처럼 신체적, 감정적 안전을 추구하는 욕구도 결여되어 있다.
    사회과학| 2020.06.27| 3페이지| 1,000원| 조회(130)
    미리보기
  • 7.4 남북공동성명(배경, 요인, 전개, 한계와 의의)
    4. 7.4 남북공동성명(배경, 요인, 전개, 한계와 의의)“7.4 남북공동성명 배경, 요인 (데탕트)”한반도 갈등은 갈등이 유례없이 빠른 악순환을 거쳐 전면전의 형태인 열전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이는 당시 하나였던 한반도에 유입된 외부 세력으로 인한 전이와 정치형 지도자들의 등장, 그리고 크게는 세계 질서의 냉전 구도에 영향을 받았다. 상호 배제를 목표로 벌인 ‘한국전쟁기’를 거쳐, 상호 경쟁을 바탕으로 체제 경쟁을 벌여온 ‘체제 경쟁기’로 이행한 후, 1970년대에 이르면서 갈등 관리의 첫 실험적 계기가 마련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에 의해서였다. 문제는 7.4 남북공동성명의 내용적 측면이다. 남한 주도설, 북한 주도설, 미?중 주도설의 여러 설이 있었으나 현재는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의 비밀해제문서에 의해 미?중 데탕트에 의한 미국의 남한 압박과 중국의 북한 설득에 대한 설에 무게가 실린다.1차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들에 의하면 당시 미?중 데탕트는 각각의 동맹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남북한으로 하여금 동맹이론에서 말하는 모방, 편승, 포기의 두려움, 혹은 방기 등의 심리에 의해서 미?중 화해의 축소판을 한반도에서 연출하도록 강요받았다고 보고 있다.먼저 미?중 데탕트는 그 효과가 국제적으로는 소련과 중국과의 실질적인 결별을 뜻하는 것인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좋지 않은 국제관계변수의 결과에 시달리던 미국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입장의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헨리 키신저 역시도 그의 회고록을 통해서 당시 딘 애치슨과 덜레스 외무장관이 주장한 1940년대 후반부터 베트남전까지의 봉쇄정책이 전반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에서 힘과 외교가 분리됨으로서 발생한 대외정책에의 거국적 의견불일치는 결국 한국전쟁에서는 유럽의 공산화에 대한 예비 군사력 보존을 이유로 맥아더 장군을 해임하였고, 베트남전의 개입 역시 인도차이나 전쟁을 세계 공산화라는 소련의 세계 전략으로 해석하여 베트남전의 실패를 거듭하였다. 결국 미국 내의 반전 운동으로 인해 닉슨 행정부 내부 참여자들은 국민들의 일치가 없는 상황에서 외교정책을 수행해야 했고 이러한 미국의 내부 상황 역시 닉슨 행정부 내에서 미?중 데탕트를 시도하게 된 배경이었다.“7.4 남북공동성명 전개”7.4 남북공동성명은 3개의 시기 구분을 통해 전개되었다. 1기(1969년∼1971년 봄)는 미국의 압력으로, 2기(1971년 여름∼1972년 말)는 그를 국내 정치에 이용한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으로, 그리고 3기(1973년)는 이후 시들해져서 유명무실해 지는 남북관계라고 언급한다.남한의 경우 7.4 남북공동성명에 있어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노선의 변화는 당시한반도의 남북 갈등이 대결과 경쟁이라는 두 개의 경로에서 또 다른 경로를 노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미국과의 관계 유지는 한국의 정치 지도자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정권 유지의 수단이었고, 그것을 어길 경우 미국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가 바뀔 수 있다는 시나리오 역시 가정하고 있었다. 결국 한반도 최초의 남북한 갈등 관리를 위한 남한 측의 시도는 국내 정치와의 ‘big deal’이라는 내부 정치의 포석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닉슨 대통령의 1969년 8월 양일간의 회동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재확인을 통한 동맹 관계의 불변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윌리엄 포터 주한미대사의 한반도 관리에 대한 미국의 변화된 대응에 대한 시도는 점점 더 가시화되었다. 1970년 3월 20일 닉슨은 서명을 통해 주한미군 7사단의 철수를 결정하였고, 이는 박대통령의 안보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자아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닉슨에게 서한을 통해 공식 반박하였으나 미국의 동아시아의 변화된 정책은 새로운 시도를 요구하고 있었다. 윌리엄 포터 대사의 압박은 이후 사이밍턴에서 열린 미상원 외교문제위원회 한국문제 청문회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우리의 관점을 한국 정부가 고려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이 필요하며, 직접접촉을 통한 긴장완화의 방식이 전달되기 위해 아마도 ‘좀 더 강력한 수단’이 필요할 것”이라고 언급했다.1971년 여름 이후 박정희는 ‘동맹국 관리와 대미 협상력 강화’ 등을 고려하여 ‘지나치게 남북관계가 개선’되지 않는 선에서 남북대화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는 내부 정치적으로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후보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근소한 득표율로 박정희를 추격한 것 역시 하나의 요인이 되었는데 미국이 김대중 후보를 통해 미국의 정책을 한반도에 실현시킬 수 도 있다는 발언 역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북한 접촉이 결국 국내 정치권력의지지 기반 강화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인식전환의 결과물인 10월 유신은 남북 갈등 이외에 갈등을 남한 내부에서 대화, 관리할 수 있는 내부 통합의 퇴보를 의미하기도 했다. 민주주의의 수호와 사회 안정을 위해 민주주의를 통제하는 결정은 당시 역사의 불가피성을 보여주었다. 이와 동시에 동 과정은 갈등의 치유 과정을 남한 내부에서 이해시키는 데 결정적 퇴보를 가져온 것이기도 했다.이러한 전후 관계를 토대로 7.4 남북공동성명이 환경을 수용, 이용한 내부 정치적 문제와 박정희 정권의 소극성으로 인한 의지 부족과 전략의 부재가 낳은 산물이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이는 합의의 제한적 영역, 남북 관계 성격의 변화 실패 등을 남한의 대북정책 소극성으로 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에 이어 동년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제5 기 1차 회의를 통해 북한도 사회주의 헌법을 통해 김일성 1인 독재를 헌법상으로 보장하였다. 동 헌법은 북한 최초의 사회주의 헌법으로 이때부터 마르크스-레닌에 대한 강조보다는 ‘이를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한’ 주체사상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노동당 총서기에서 주석직의 자리에 오르면서 1960년대 후반 정리된 권력을 제도적으로 더 보강하였다. 최초의 남북한 접촉은 ‘권력의 시녀’용으로 국내 정치에 이용되었다. 갈등을 관리할 수 있는 환경변수는 국제 정세를 국내 정치가 어떻게 판단하여 행동하는 가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한계와 의의‘7.4 남북공동성명은 최초의 상호 성명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제한 사항과 한계점이 드러나고 있다. 7.4 남북공동성명은 성명 이후 남북조절위원회 본회담에서 3차에 걸친 본회담 중 남북 군대 10만 이하로의 감축, 미군을 포함한 외국 군대의 철수, 이상의 문제들을 남북 사이에 무력행사를 하지 않겠다는 담보의 평화협정 체결 등 회담의 의견 차이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북한이 3차까지 지속적으로 군사 5개 항목의 우선 토의 등 회담의 의제를 변경한 데 반하여 남측은 경제분과위원회, 사회·문화분과위원회를 통하여 사회 개방의 우선화를 목적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즉, 상호간의 신뢰회복이라는 기본 전제부터 의심된 회담은 갈등을 관리할 수 있는 의제를 끌어내는 데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던 것이다. 7.4 남북공동성명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구호를 통해 긴장상태 완화를 통한 조치, 다방면적인 교류, 직통전화의 개설, 남북조절위원회의 운영 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상대방을 반대하거나 중상?비방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제의에도 본회담은 남한 측은 교류를 통한 문호 개방에, 북한 측은 단지 군축을 통한 주한미군 철수로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전략적인 입장만을 고수했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회담이 가지는 상징성은 이후 현실적인 문제에서 상호 체제를 실제적으로 상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회담의 의제설정에 의해 가로막혔던 것이다. 상호 신뢰가 전혀 쌓이지 않은 상태, 즉 아무 교류가 없는 상태에서 조건만을 제시한 회담이 갈등 관리를 위한 성과를 낸다는 것은 냉전이라는 세계사적 흐름과 이념이 가로막고 있는 양국 간의 제약조건하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회과학| 2020.06.27| 3페이지| 1,000원| 조회(195)
    미리보기
  • 박정희 정권(제4공화국)의 정치②
    7주(4.29) (원격수업)박정희 정권(제4공화국)의 정치②: 유신체제의 성립과 붕괴(김영명 5장, 김인걸 6장, 정주신 3장, 윤여준 등)1. 유신체제의 성립1) 유신체제 출범과 관련한 세 가지 관점o 유신체제의 출범 원인에 관한 설명으로는 다음 세 가지 주장 존재 ① 자본주의 산업화의 위기에서 원인을 찾는 관점 - 주로 오도넬(Guillermo O'Donnell)의 관료적 권위주의 이론을 한국에 적용하려는 관점 ② 동북아 안보 환경 변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으로 파악하는 관점 - 박정희 정부 자신이 내세운 유신 선포의 명분 ③ 박정희의 권력의지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정치적 관점 - 많은 정치학자들이 동의하는 정치권력적 분석 → 박정희 정권은 안보위기를 유신의 공식적 이유로 내세웠기 때문에, 주장의 신빙성 검증을 위해서는 1970년대 초의 국내외 안보 환경 분석 필요2) 유신체제의 성립 배경 검토가. 안보 위기 상황 검토o 휴전 이후 남·북한 두 체제는 10여 년 동안 내부 건설에 몰두 - 본격적인 관계는 1960년대 후반 북한의 일련의 도발 행위로 재개 · 북한은 사회주의 건설과 정치적 통제를 어느 정도 확립한 1960년대 초 ‘4대 군사노선’ 채택(1962.12)과 ‘4대 혁명 노선’ 선포(1964.2) · 이에 따라 1960년대 중반 이후 비무장지대에서 충돌 건수 급증 - 1968년 들어 본격적인 도발 행위 시작 ·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침투사건(‘68.1), 美해군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68.1), 울진·삼척 지구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68.11), 미국 정찰기 EC-121기 북한군에 의한 격추사건(‘69.4) 등 o 1970년대 들어 남북 간 긴장이 다소 가라앉은 상황에서, 미국 1971년 ‘닉슨 독트린’ 발표 - 아시아 방위를 아시아 사람들에게 맡기고 미군의 직접 개입을 피할 것을 천명함으로써 한국 정부를 긴장시킴 - 미정부는 주한 美지상군 감축계획을 발표했고, 1971년 3월 제7사단 철수 - 이러한 화해(detente) 기류는 닉슨이 1972년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절정 - 급변하는 정세는 박정희 정부로 하여금 정치적 변화 시도 계기
    사회과학| 2020.06.27| 13페이지| 1,000원| 조회(162)
    미리보기
  • 김대중 정권의 정치
    11주(5.29)김대중 정권의 정치: 수평적 정권 교체 실현과 남북화해(안철현 8장, 김영명, 유현석, 김수행, 이종규, 윤여준 2부 9장 등)1. 김대중 정부 출범과 국정운영의 기본 방향1) 15대 대통령 선거와 김대중의 당선o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통령 선거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측을 불허하는 치열한 접전 펼침 - 결국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1,033만 표로 유효투표의 40.3%를 얻어 994만 표로 38.7% 얻은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를 39만여 표차로 누르고 당선 -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493만 표를 얻어 김대중 당선의 1등 공신이 되었고,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31만 표 획득에 그침o 선거 막판까지 학계나 언론계에서 김대중 후보의 승리를 점친 사람은 거의 없었음 - 이는 수평적 정권교체론을 내세운 호남과 충청이 아무리 합쳐도 이회창을 앞세운 영남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로 잘못된 분석은 아니었음 - 김대중의 승리는 ① DJP 연합 ②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문제 ③ 이인제 후보의 독자출마 ④ 외환위기 중 어느 하나라도 빠졌다면 불가2) 김대중 정부의 국정운영 기본방향과 주요 정책o 김대중은 당선 제1성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국가운영의 기본방향으로 제시- 당선자 시절에는 ‘향후 100대 과제’를 발표한 데 이어 제15대 대통령 취임사에서는 ① 외환위기 극복과 경제 활성화, ② 남북관계의 개선, ③ 민주주의의 진전을 ‘국민의 정부’의 3대 목표로 제시 - 국가운영 방향은 시기 별로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 ① IMF 경제위기 극복과 새로운 성장 - 재벌․금융․공공․노동의 4대 개혁, 생산적 복지, 새로운 성장 잠재력 발굴을 위한 정보화사업 등 추진 ② 당면한 위기관리 체제를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계기로 연계시켜 사회 각 부분을 재편 - 정치․경제․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개혁 추진 ③ 남북한 관계를 ‘탈냉전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것 - 대북 포용정책, 즉 ‘햇볕정책’ 수립․추진
    사회과학| 2020.06.27| 16페이지| 1,000원| 조회(193)
    미리보기
  • 노태우정권(제6공화국)의 정치
    <★ 한국정치 Keyword 산책①>: “보수주의: 보수주의의 굴절과 변형”(28쪽)(홍익표)1) 보수주의의 기원과 기본 인식o 전통적 보수주의는 계몽사상의 합리주의와 프랑스혁명에 대항해 출현- 보수주의를 정립한 학자인 에드머드 버크(Edmund Burke)는 인간과 사회에 있어서 전통, 관행, 편견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경험적인 측면 중시- 인간이성은 불완전하고, 인간본성에는 도덕적 사악함이 내재하는 데 반해, 전통은 인류의 진보적인 경험과 지식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 - 보수주의는 자연권 이론과 그 후 대두된 공리주의, 교회, 사회계급, 가족, 자산의 권리를 중시했고, 진보주의자의 역사관을 거부 ․ 보수주의는 지난 세월 동안 형성된 관습과 전통의 총체적 집합물 중시- 보수주의자들은 인간이 주요 정통종교로부터 유리되면 혼란을 겪고 평형을 상실한다면서 종교를 지지- 보수주의자들은 미래에 대한 이미지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호소력, 인간의 깊은 향수, 변화의 시련과 새로운 것의 도전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심성을 파악하고 과거가 제공한 모델에 의존해 현재를 비판. - 보수주의는 인식론적 회의주의와 역사적 공리주의를 주요 논지로 삼음 ․ 기존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타당한 정치양식이라는 것.(pp.174~178)o 보수주의는 일반적으로 권위를 받아들이고, 미지의 것에 비해 이미 알려진 것을 선호하며, 현재와 미래를 과거와 결부시키는 경향이 있는 기질, 정치적 입장 및 일련의 가치체계를 의미① 세계관: 세계를 하나의 체계, 질서로 파악② 인간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신과 사회질서 우선시해야 한다고 주장③ 정치․사회관: 강한 엘리트주의적 정향④ 민주주의관: 다수자의 비이성적 열정은 사회를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다수파의 열정과 광기 차단이 큰 과제. 간접민주정치를 수용(p.179)2) 한국 보수주의의 과거와 현주소o 한국사회에서 보수주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 신영복은 다음과 같이 요약. “1632년 광해군이 폐위되고 난 후 한국의 정치적 지배블록은 바뀐 적이 없다.
    사회과학| 2020.06.27| 16페이지| 1,000원| 조회(115)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8
8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3
  • A좋아요
    4
  • B괜찮아요
    1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02일 토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6:1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