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지도안 (서양악기).hwp2024학년도수업지도안이 름학 과학 번Ⅰ. 음악교육과 수업지도안본시 수업지도안단계시간학습내용및 요소교수·학습 활동학습자료및유의점학습형태교사학생도입인사 및 동기부여○ 인사 및 자기소개자연스럽게 일상 얘기로 시작하며 선생님을 소개한다.○ 동기부여- 교사가 전공한 악기와 공부해봤던 악기들을 얘기해주며 학생들에게 배워 보았던 악기를 질문한다.- 다양한 악기의 사진들을 짧게 보여주며 학생들이 서양 악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파악한다.● 일상 얘기를 통해 선생님과의 유대를 형성한다.● 교사의 악기 연주 경험에 빗대어 나의 악기 연주 경험을 떠올려본다.개별전개○ 수업 진행 과정 설명(1) 서양악기에 대한 소개- 학습지를 잘 채우며 들을 것, 여러 악기의 연주를 감상하며 가장 마음에 드는 악기를 하나씩 선택할 것을 강조한다.(2) 반 단합 학급게시판 꾸미기 활동 진행- 각자 좋아하는 악기를 하나씩 선택해 반 단합 학급게시판 꾸미기 활동을 진행할 것을 예고함● 수업 진행 과정에 대해 인지한다- 학습지에 채워야 하는 빈칸을 확인한다.- 본인이 마음에 드는 악기를 선택해야 함을 인지한다.이 수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며 학생들이 더욱 오늘 수업에 대한 동기를 지닐 수 있도록 한다.개별○ 현악기에 대한 설명- 줄로 활을 마찰시키거나 손으로 뜯어서 소리내는 악기라고 설명함(1) 바이올린현악기 중 가장 작은 악기로 가장 높은음을 내며 비교적 발랄한 소리가 난다.- 실제 악기를 보여주고 소리를 들려준다.(2) 비올라바이올린과 크기가 비슷하지만 조금 더 크고 낮은 소리를 내는 악기. 바이올린보다 조금 더 무거운 느낌의 소리를 지님.- 실제 악기를 보여주고 소리를 들려준다.(3) 첼로앉아서 연주하는 악기로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유사한 소리를 지닌 악기라고 불린다.- 감상 : https://youtu.be/StkB8y8XAjs?si=9eMeQ9AOrmbOCl_m(4) 더블베이스현악기 중 가장 크기가 큰 악기로 저음의 소리를 낸다.- 감상https://youtu.be/StkB8y8XAjs?si=9eMeQ9AOrmbOCl_m○ 목관악기에 대한 설명- 리드를 사용해 소리를 내거나 관에 바람을 직접 불어 소리를 내는 악기(1) 플롯관에 직접 바람을 불어 소리를 내는 악기로 새소리와 유사한 소리가 난다.- 감상https://youtu.be/yt_mYlZfM6M?si=JqZnOyoYUhVyFi2H(2) 클라리넷- 홀리드 악기로 악보에 적힌 음과 실제 음이 다른 이조악기- 감상https://youtu.be/zpmDukr9sGU?si=vymfdT15lCRCbfpt(3) 오보에- 겹리드악기로 오케스트라에서 음을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감상https://youtu.be/LQRhxkVx5Ik?si=3WyT3yFuFzirTKUM(4) 바순- 겹리드악기로 목관악기 중 가장 크고 낮은 음역을 지님- 감상https://youtu.be/lVzzFoP0QXk?si=MzXWmQ1yB4PQ8lXj○금관악기에 대한 설명- 감상https://youtu.be/3Xx4FQK_LCM?si=RJNEpeZk_tweDJn4(1) 트럼펫- 3개의 밸브를 사용하여 연주하고 금관악기 중 음역대가 가장 높은 악기이다.(2) 트럼본- 슬라이드를 밀고 당겨서 연주하고 낮은 소리를 주로 내며 중후한 음색을 지님(3) 호른- 관이 동그랗게 말린 모양을 하고 있고 부드러운 음색을 가져서 목관5중주로 연주한다.(4) 튜바- 크기가 굉장히 크고 연주할 때 많은 숨이 필요하며 금관악기 중 가장 낮은 음역을 연주한다.● 현악기에 대해 이해한다.빈칸을 채운다. (악기 이름과 느낌을 서술한다.)●목관악기에 대해 이해한다.빈칸을 채운다. (악기 이름과 느낌을 서술한다.)●금관악기에 대해 이해한다.빈칸을 채운다. (악기 이름과 느낌을 서술한다.)악기의 소리를 감상하며 느껴지는 것을 서술하도록 지도한다.개별○반 단합 학급게시판 꾸미기 활동 진행(1) 학생이 선택한 악기와 그림그릴 종이를 나누어준다.(2) 학습지를 참고해 악기를 연주하는 나의 모습을 그린다.(3)가위로 오리고 단체 꾸미기 용지에 본인의 모습을 붙인다.(4) 단체 꾸미기 용지를 꾸민다.●교사에게 받은 악기를 A4용지에 붙인 후 악기를 연주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봄으로 연주하는 모습에 대해 익히고 자연스럽게 본인이 좋아하는 악기의 소리를 찾아볼 수 있다.- 단체로 게시판 꾸미기 용지를 만들어보며 협동심을 향상할 수 있다.
기말고사 대체 글쓰기 과제자신의 미래자서전을 적어보세요. 미래자서전에는 과거와 현재, 미래(제일 중요)에 대한 구상, 버킷리스트 등이 필히 들어가야 합니다. 글의 분량은 2000자 이상(여백 포함)이 되어야 합니다.제목: “인생 이야기관”에 전시될 내 사진을 정리하며오늘은 90번째 내 생일. 어렸을 땐 내가 200살 정도까지 거뜬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시대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어둡고 슬픔이 가득한 분위기의 “장례식장”이 따뜻한 분위기의 “인생 이야기관”으로 바뀌어 마음이 한결 편하다. 요즘 부쩍 건강이 악화되는 것이 느껴져 인생 이야기관에 전시할 내 사진들을 골라보려 한다.이가 보이게 활짝 웃고 있는 이 사진은 일곱 살 즈음이다. 나는 매우 활발한 성격이었다. 엄마가 “하고 재비”라는 별명으로 날 불렀을 정도로 해보고 싶은 게 많아서 음악, 미술, 태권도 등 여러 학원을 다니기도 했고, 노는 것도 유독 좋아해 계곡에 한 번 놀러 가면 샌들 모양 그대로 발을 태워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춘기를 피해 갈 순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질풍노도 시기의 절정을 찍었던 나로 인해 우리 집은 매일매일 전쟁이었다. 이때 친구들과 엄마 몰래 화장하고 찍은 스티커 사진은 부끄러우니 조그맣게 붙여야겠다.첫 피아노 대회에서 큰 상을 탔던 날 레슨 선생님과 찍은 사진이다. 내가 ‘피아노’를 전공으로 택하게 된 계기라고도 말할 수 있는 이 날의 사진은 내게 너무나도 소중하다. 대회 이후 나는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해 공감대가 잘 맞는 친구들도 많이 만나며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연습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무대에도 정말 많이 섰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이때의 사진을 보니 몽글몽글한 마음이 다시 피어오르는 것 같다.가장 많은 양을 사진을 자랑하는 이 시기는 대학시절이다. 열심히 달려와 가장 행복할 거라 생각했던 이 시기는 한편으로 내게 암흑기였다. 대학입시만을 바라보고 달려왔기에 입학 후엔 큰 꿈이 없어 길을 잃은 방랑자 같은 모습이었다. 웃고 있는 사진이 대부분이지만, “인생의 동반자로 피아노를 택하는 것이 맞는가?“하는 고민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니 재미있는 추억들이 많았다. 노래방에서 열창하고 있는 이 사진은 사실 애인에게 실연당해 미친 듯이 노래를 불렀던 날이고,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으며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사진은 종강한 날의 사진이다.스물셋, 고민을 가득 안고 졸업한 나는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버킷리스트들을 적고 그냥 하나씩 실천해 보는 것이다. 빈 종이를 하나 꺼내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첫째, 번지점프하기, 둘째, 필름 카메라만 가지고 강릉 여행 가기, 셋째, 영어 회화 공부하기” 원래 실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성격이지만 이전의 내가 답답했던 걸까? 그날 바로 번지점프와 강릉 가는 버스를 예매하고, 영어학원에도 등록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내게 용기를 주었던 이 시기 도전들은 같이 묶어 전시해야겠다.피아노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 있다. 이때 아르바이트를 하며 내가 가르치는 일에 소질이 있기도 하고 큰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고 “음악 교사”라는 직업을 꿈꾸게 된다. 특히 “지영이”라는 친구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지영이는 나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피아노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된 친구였다. 꼭 독일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었는데,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너무 궁금하다.스물여덟, 임용에 합격해 “김해 관동중학교” 음악교사로 취직을 했다. 대학 졸업할 즘에는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게 죄책감처럼 다가와 힘들었는데 마음을 놓고 여러 일들을 도전해보니 내 적성을 찾게 되어 교단에 서서 행복하게 일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고등학교 진학 상담을 할 때 “꿈이 없어 고민이에요”라는 학생들에게 “마음으로 놓고 여러 일에 도전해 봐”라며 내 이야기를 해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스승의 날 아이들이 써 준 편지와 사진을 같이 진열해야지.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칠 년 정도 흘렀을까? 꾸준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배우고 싶은 것들,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아 여러 도전을 했었다. 다 의미가 있었지만 상담 심리 공부를 시작한 일이 내 인생에서 큰 도움이 되었는데, 아이들을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이 공부를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연은 따로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항상 따뜻한 눈빛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와 결혼한 것을 지금까지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는걸 보면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 같단 생각도 든다. 풋풋하던 시절 남편과 데이트하던 사진들을 전시해야겠다.
“반 시게루”, 건축물에서 휴머니즘을 말하다.반 시게루의 인터뷰 영상, 여러 자료들을 중심으로< 목차 >>1. 들어가며--------------------------------------------------2. 반 시게루의 강연 내용을 통한 생각의 전환----------------------- 왜 그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할 수 밖에 없었는가?3. 반 시게루의 건축물을 중심으로-------------------------------- 종이교회- 페이퍼 테니어 뮤지엄4. 맺으며--------------------------------------------------[그림 1] 반 시게루 1. 들어가며“반 시게루는 지난 20년간 전 세계의 재해 현장을 돌며 적은 비용으로도 단순하고 위엄 있는 피난처와 공공건물을 지어 고통받는 피해자를 도왔다. 그의 인도주의적 헌신은 모두에게 모범이 되었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반 시게루는 지난 2014년, 이와 같은 상찬과 함께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게 된다.강의를 수강하며 많은 건축가들의 평가를 접하게 되었으나, 여태 본 건축가들의 평가와는 조금 다른 듯 했다. 나라를 빛내는 랜드마크, 화려한 건물들을 설계한 것이 아닌 피난처와 공공건물 등을 설계함으로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는 것이 색다르면서도 궁금해졌다. 공부한 바에 의하면 ‘개인의 노력 + 사회, 문화의 공동발전’이라는 프리츠커 건축상 선정 방법에도 부합하고, 건축의 시대 흐름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을때도 당시(2010년도 즈음) 사회적 기요도가 많은 social 건축가들을 많이 선발하는 경향이 보인다는 점에서 적절하겠으나, 다른 프리츠커상 수상자들에 비해 다소 대단하지 않은 건물로 상을 탄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과 함께 접하게 된 반 시게루의 인터뷰 영상은 나의 부끄러운 편견을 없애주고 건축에 대한 나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줌과 동시에 왜 그가 프리츠커 상을 수상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안겨주었는데, 이를 내가 평소 지니던 생각과 더불어 간단히 서술해 보겠다.2. 반 시게루의 강연 내용을 통한 생각의 전환왜 그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할 수 밖에 없었는가?첫째로, 건축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다. 우선 영상에서 반 시게루는 건축가가 된 후 매우 실망을 했다 말한다. ‘건축가들이 돈과 권력을 소유하고 있는 특혜층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건축가를 고용해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통해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건축가란 좋은 집, 아름다운 건축물을 창조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실은 나또한 그랬다. 좋은 건축가란 그저 특이한 디자인, 그리고 화려하고 독특한 구조로 창의력을 뽐내고, 그 지역의 아름다움을 더하는데 이바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지, 그 이면의 소외계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건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물론 부유층들이 의뢰하는 아름답고 특별한 건축이나 한 나라, 한 지역의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건축물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반 시게루처럼 사회적 약자나 소외계층을 위한 저렴하면서도 효율적인 집에 관심을 기울이는 건축가가 늘어난다면 세상은 필연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기념비적인 건물을 설립하는 것 보다 사회에 진정한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자신의 일에 임하는 이 태도는 내가 가지고 있던 건축에 대한 기본적 생각과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어 주었으며 전 세계에서도 인정받으며 많은 이들이 그를 롤모델로 꼽은 계기가 되기도 한다.두 번째는 재해에 대한 남다른 생각이다. 시게루는 지진을 예로 들며 설명한다. “그저 지진이 난다고 인명 피해가 생기지 않습니다. 지진이 나 건물이 붕괴될 때 사람이 죽습니다. 그렇다면 그 인명 피해는 건축가의 탓입니다.” 시게루는 이 말을 통해 ‘건축가는 공간적 연구를 하는 사람’이라는 편견을 넘어 건축가라는 직업을 더 고결하게 생각하게 해주었다. 그의 말을 참고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건축가란 의사만큼 사람의 생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직업이라 표현할 수도 있겠다. 안전하고 현명한 건축을 하는 것 또한 여러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장마로 인한 붕괴 또는 침수, 내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난민의 수, 열대성 집중호우로 인한 수해민들의 피해는 여전히 전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의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저 체육관이나 빈 공간에서 수용돼 불안에 떠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당장 피해자들이 쉴 수 있는 집은 어떻게 구해야 할까? 재빨리 이런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건축을 통해 해결할 순 없을까? 시게루는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며 기능적이면서도 아름다운 건축을 재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제공하자 노력한다. 또한 이러한 노력을 실천에도 옮기며 사회에 큰 이바지를 하기도 한다.마지막으로는 “종이”라는 특이한 소재에 대한 사용이다. 요즘 시대는 콘크리트의 시대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면 주변은 온통 콘크리트 투성이다. 콘크리트라는 특유의 소재가 세상을 삭막하게 만드는 것 같아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는 건축가들이 특히 흥미롭게 다가오긴 하나 “종이”라는 소재로 건축을 했다는 것은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그가 종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알바 알토의 전시이다. 그가 존경하는 알바 알토의 전시에서 꼭 작품을 선보이고 싶었으나 나무라는 자연재질을 사용하려 했음에도 예산이 부족해 출품을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한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고민과 여러 실험 끝에 나무 대신 종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작품을 출마하게 된다. 특히 그는 “종이 기둥”이라는 것을 만들어 많은 이용을 하는데, 이 기둥은 40여 일 동안 수백 겹의 종이를 붙여 내구성을 높이며, 방수처리까지 한 튼튼한 특수자재라고 한다. 이 기술을 통해 얻은 종이 기둥은 가벼워 이동성이 좋을 뿐만 아니라 강도도 세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건축 재료보다도 세고 안전하다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다.종이의 사용은 창의력적인 면에서 시게루의 가능성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환경적인 면모에서도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해낸다. 모든 제품은 생산, 사용, 그리고 폐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걸쳐 다양한 피해를 끼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종이 기둥은 90%이상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재생품이다. 건축가에게 있어 필수적인 고려조건이 되기도 하는 생태적 문제, 환경적 문제를 종이라는 단순하고도 참신한 재료로 해결하며, Less waste로 생태적, 친환경적 구축의 모범을 선보인다.3. 반 시게루의 건축물을 중심으로[그림2] 타카토리 교회1995년, 고베 대지진으로 인해 2만 명 이상이 사망을 했다. 그리고 60만 명 이상의 생존자들은 그들이 삶을 이어오던 터전을 잃어버렸다. 시게루 반은 그 시절, 가능한 한 빨리 수많은 이재민들을 위한 집을 건설하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이후 그는 모래로 채운 배 상자 토대에 판지로 만든 벽을 세우고, 그 위 천막 소재로 지붕을 덮어 오두막을 만들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어딘가 동아시아적 느낌이 나는 듯하다. 급하게 주문을 받아 만들어 여유 있게 만들진 못했겠지만, 짧은 시간 안에도 충분히 흠집없는 건물을 만들어 내었다.종이 튜브를 벽체로 사용하였으며, 페허의 돌, 벽돌 조각을 기초로 활용하였다. 마루 표면은 전통의 진흙 바닭으로 마무리 되었다. 우리가 평소에 들어 본 건축 자재랑은 매우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최대한 환경에 나쁜 재료들을 사용하지 않고, 최대한 저렴하고도 튼튼한 건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벽면엔 대나무로 짜인 매트가 2중으로 있으며, 지붕에는 대나무 줄기, 그리고 플라스틱 방수천이 교대로 층을 이루어 외부환경으로 보호 되었는데, 박공 면 대나무 사이를 통해 순환이 이루어져 환기가 되기 때문에 음식도 할 수 있고, 벌레로부터의 공격도 막을 수 있다.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또한 외적으로 보았을 때도 값싼 재료로 지어졌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경건하다. 심지어 이 건물은 이동성이 좋아 2005년 해체 후 대만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보내져 유용하게 재사용되었다고 한다.[그림 3] 페이퍼 테니어 뮤지엄두 번째로 설명할 반 시게루의 건축물은 페이퍼테니어 뮤지엄이다. 디자인하우스는 창사 30주년을 맞아 시게루에게 친환경적인 미술 건축관을 의뢰하게 된다. 그래서 제작된 이 건물은 종이와 컨테이너를 만드는 데 15일, 조립하고 배선장치를 넣는데 30일, 45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통해 완성된 제작물으로도 유명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수나 방염에 있어 아주 까다롭게 처리가 되었으며, 산소 접촉을 차단하는 공법을 활용해 무려 산소 접촉률이 0%로 측정된다. 또한 안정적인 건물을 만들기 위해 컨테이너를 연결하는 새로운 연결 장치도 만들어져 튼튼한 건물로 인정받으며, 빈민층을 위해, 재난피해를 위해서가 아닌 그저 고급문화를 위해서도 종이라는 건축 재료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다.
양극의 평가, 고종황제의 진실은 어디쯤인가「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를 읽고고종황제는 근 현대사의 가장 큰 흐름이던 개화로 인해 생겨난 수많은 갈등과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자, 가장 위태로운 역사적 시기에 집권했던 왕이다. 시대적 한계 때문이지 그는 후손들에게 긍정적인 인식으로는 자리 잡지 못한 듯하다. 나 또한 고종을 떠올리면 ‘도망 다닌 왕’, ‘실패’와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번 서평 과제를 통해 조금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왜 고종은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면에 숨겨진 긍정적 측면은 없는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배운 역사에 잘못된 점은 없는지 알아보고 고종의 역사적 성격에 대해 다섯 가지 근거를 들며 설명하기로 했다.(1. 일본에 의해 사실보다 과장되고 왜곡되기도 함.)우선 이 책에서 필자는 “고종시대가 왜곡의 출발점”이라 말한다. 이것에 대한 얘기를 하기 위해 식민주의 사관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덧붙이겠다. “식민주의 사관”이란 일제가 과거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한국 역사를 부정적으로 설명한 사관이다. 한국 군주와 정부가 근대화를 이루기에는 아직 무능하다고 단정하며, 선진국인 일본의 도움과 보호가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사관이라 설명할 수도 있겠다.많은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역사 속에 알게 모르게 남아있는 식민주의 사관. 이 사관은 고종시대와 큰 연관성을 띤다. 그 이유는 한국사 왜곡 작업을 고종시대, 조선왕조, 중세 고려, 고대로 올라가는 순으로 진행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역사왜곡의 주된 근거는 고종시대까지 계속되어 왔다는 ‘악정’인데, “고종시대가 악정이 만연했던 시대인가?”라고 묻는다면 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이 ‘악정’이란 표현은 메이지 정치지도자들에 의해 나온 충분히 검토 되지 않은 표현이다.그 이유에 대해 설명하겠다. 첫째, 고종의 시기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잘못된, 비판 받아 마땅한 역사라 말한다면 할 말이 없겠으나, 독일 쾰른 일간지 기자 겐테의 글을 빌려 말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재치 있는 지도자들만 있다면 빠른 시일에 현대문명국가의 수준에 오를 수 있는 희망 있는 민족”이라며 긍정적인 평을 얻기도 했다. 둘째, 메이지 일본 정치가들은 주로 일본의 정치 문제를 놓고 자신들이 서로 주장하던 것을 한국의 유사한 상황에 바로 적용해 말한 경우들이 많았다. 물론 한국의 역사, 고종의 역사에도 잘못된 것들이 많고 비판받아야 마땅한 사건들도 정말 많지만, 내가 생각하는 바로는 일본의 영향으로 인해 더욱 과장되어 비판 받는듯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고종의 역사적 성격들을 조금 더 날카로운 시선에서 현명하게 인지해야 할 필요성이 있겠다.(2. 아버지인 대원군의 정치에서 깨달아 개화 정치를 지향함)고종의 역사에 있어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고종은 1864년, 고작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집권을 했기에, 초기 10년간은 ‘대원군 집권기’라 하여 아버지가 왕정을 이끌었는데, 당시 대원군의 정치는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영조와 정조에 비견된다고 할 만큼이나 치열하고, 개혁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당시 문란하던 세도정치를 종식시키며 권력을 왕에게로 돌려놓기도 했고, 외에도 국가의 여러 부정부패를 극복하기 위한 치열한 노력들을 한 군주였다. 하지만 한 가지 큰 한계점이 있다면, 국내 개혁에 있어서는 열심이었지만, 세계사에 관련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옆에서 대원군의 정치를 보고 배운 고종은 치열한 개혁 정신을 흡입하면서 커나감과 동시에 세계적인 부분에서 국교수립 요청을 거부하고 청전의 사용을 중단시키지 않은 등의 내용에 불만을 지니며,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개화정책을 시도해야겠다.”는 깨달음을 자연스레 얻게 된다. 따라서 고종은 청나라에 대한 자주의식을 강하게 표시하는 외교정책인 조선중화주의를 계승하려하고, 서양 기계문명의 우월성을 분명하게 인정, 수용하는 등의 노력을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고종은 그저 개화주의를 추구한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고종시대 중요한 개혁사건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광무개혁”이다. 황제로서 광무란 연호를 사용하고, 짧은 시간에 많은 성과를 거둔 이 개혁으로 인해 일본은 이대로 조선을 방치하면 정복이 어려워질 것이란 위협감을 얻기도 한다.필자는 “대한제국이 무능하거나 근대화의 의지가 없어 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한 발전의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에 일본이 조기 박멸책을 써 망하게 된 것이다.”라 말한다. 나는 이 말에 매우 동의하며 고종의 개화 정치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조금 더 발 빠른 대처를 하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고종의 모든 정책 자체가 무능하며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고종도 “선 정비 후 개국론”과 같은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 같다.(3. 고종의 치명적인 문제점, 우유부단함 - 갑신정변과 관련하여)앞에서 언급한 내용만 바라본다면 고종이 나라를 위해 노력을 했는가? 에 대한 답변으로 충분히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고종은 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고종의 치명적인 단점이자 성격적 결함인 우유부단함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서는 평소에 나라를 위해, 백성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올바른 선택을 해내는 것도 필수적인 요건이다. 다른 말로 사람의 진가는 위기, 중요한 순간에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고종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이러한 점이 완벽하게 결여된 사람이었다.갑신정변, 1884년, 급진개화파가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급진개화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박영효, 김옥균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동아시아의 천재이자, 앞으로 한국을 이끌어나갈 인재라고 평가받았던 인물들이다.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면에서 매국적 반역자라는 부정적 평가를 얻기도 하나 이 점은 우선 배제하고 설명하겠다. 요점은 그만큼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던 똑똑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그 배경에 대해 설명하자면 급진개화파가 조선의 문제점으로 재정 구조를 지적한다. 따라서 당시 당백전, 당오전 등등 여러 유통되던 화폐 제도를 투명하게 잡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개혁을 하였으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이는 안 좋은 화폐 제도에서 이득을 보는 세력이 고종의 아내였던 명성황후 세력이었다.이 나라의 황제,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가야 할 사람의 아내의 집안이 앞에서는 개화정책을 이야기 하며 뒤에서는 잘못된 경제 정책을 통해 이문을 얻고 있는 상황. 굉장히 곤란하고도 당혹스럽다. 급진 개화파는 좋은 군대를 양병,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빌려오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민씨 척족들의 여러 방해로 인해 상황을 뒤집는 어떠한 사건이 없으면 변화 또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선 한 나라의 군주이자 명성황후의 남편인 고종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을 것.초반에 급진개화파가 이 정변에 대해 언급을 할 때 고종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금 지나니까 고종은 생각을 바꾸며 다른 입장을 말한다. 또한 갑신정변도 3일천하로 실패에 그치며 끝나게 된다. 갑신정변 모든 것이 고종 탓에 무너졌다 말할 순 없으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고종의 입장 바꿈, 우유부단함이 갑신정변에 너무나도 큰 타격을 미쳤다는 것이다. 만약 갑신정변을 성공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4. 고종의 치명적인 문제점, 우유부단함 - 독립협회와 관련하여)두 번째로 고종의 문제점을 보여준 사건은 독립협회와 관련되어 있다. 독립협회는 너무나도 중요한 시민단체이다. 만민공동회, 토론대회, 신문 발간 등으로 민중계몽운동을 했던 이 협회는 가장 기초적인 민주주의의 시초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고종은 초반, 현명하게도 이 독립협회의 중요성을 파악하고, 후원을 해준다.하지만 자꾸만 세력이 커지던 독립협회, 이를 못미덥게 생각하던 이는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를 하려 한다.”며 황제를 몰아내고 대통령에 박정양을 세우며 정권을 쥐려 한다는 익명의 문서를 거리에 내다붙인다. 흔히 익명서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세력이 커진 독립협회가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걸까? 이 문서는 그들에게 성공적이었다. 고종은 돈을 들이며 많은 지원을 해주고, 큰 세력으로 키우려 했던 자신의 노력들을 무산시킨다. 병력을 동원해 독립협회를 강제로 없앤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