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명독후감 작성‘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를 읽고날짜 : 202x.xx.xx과목명 : xxx학과 : xx학과학번 : xxxxxxxxxx이름 : xxx1. 서론회사 업무 차 외국인과 통화하거나 이야기 하는 자리가 종종 있다. 회화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자기 계발의 목적으로 회화 실력을 늘리기 위해 책을 한권 주문했다. 책 제목은 ‘영어책 한권 외워봤니?’ 이다. 예전에 이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어느 방송국 PD가 쓴 책인데 이 책을 본 사람들이 회화적인 스킬과 영어에 대한 관심이 많이 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실생활에 많이 쓰이는 문장들을 위주로 구성된 책이겠거니 하고 주문을 하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이 책에서 영어 문장이 차지하는 비율은 10%도 채 되지 않았다. 영어 회화 책을 주문하여 매일 몇 페이지씩 외우고, 회화 실력을 늘릴 계획이었으나 온통 한글로 되어있는 책을 받고나서 이 책을 읽어야 되나 고민했다. 그래도 이왕 산거 읽어보자! 하고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책의 절반을 읽고 있었다. 굉장히 흡입력이 강한 책이었으며 독서를 많이 하지 않은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음으로서 영어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도전의식, 인간성의 향상이 되었다는 점이 굉장히 놀라웠다. 저자의 인생 경험담을 읽다보면 이 책은 영어 공부 책보다는 사람의 자존감을 올려주고 엄청난 긍정 에너지를 제공해주었다. 주위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며 동시에 한번 읽고 치우는 책이 아닌 두 번 세 번 읽을 수 있는 훌륭한 도서라고 생각한다.2. 본론책의 구성에 대해서 짧게 소개하자면, 영어 공부에는 때가 없다, 일단 한 권 외워보자, 짬짬이 시간도 내 편으로 만들어라, 책 한 권을 완벽히 외웠다면, 영어 공부 즐겁게 계속하자, 결국 영어는 자신감이다 까지 총 6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대부분의 내용은 저자 본인의 경험담을 위주로 하여 글을 풀어나간다. 저자가 말하기를 21살에 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연애 한번 못 해봤고, 현역 입대도 못하는 약골에 전공 학점도 바닥인 비참한 자신이 있었다고, 그래서 영어라도 잘해보자는 마음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간절함이 엿보이는 대목으로는 군대에서 선임들의 눈총을 피해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군종병을 찾아가 영어로 된 성경책을 받아 영어 문장을 외웠다고 한다. 남들이 담배 피울 시간에 쪼그려 앉아 영어 성경을 읽고 외웠으며, 제대 후 공부를 할 때에도 출퇴근길이나 회화 모임에서 마치 해외에 있는 것처럼 오직 영어만을 사용하며 살았다고 한다. 짬짬이 시간을 활용하여 영어 문장을 외웠으며, 이러한 모습을 보니 단순 암기를 열심히 하는게 아니라 평소 생활 자체를 외국 문화권 내에 있는 것처럼 바꿔버리는 것이었다. 또한 남들이 해야지 하는 다짐에서 오는 노력과는 차원이 다른 진지함과 열정을 볼 수 있었다. 저자의 경험담을 읽으면서 저 정도는 해야 성공하는구나, 나는 못하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쯤 저자는 처음부터 거창할 필요 없다며 위로해주고 동기부여를 해준다. 버려지는 노력은 없다며 하루에 단순 10문장 암기만 해나가도 며칠 뒤에는 몇 십, 몇 백 문장을 외우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으며, 힘들어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격려해준다.앞서 서론과 본론에서 저자의 인생사를 통해 배울 점들을 얘기하였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영어 회화에 대해 도움이 없는 책은 결코 아니다. 책을 읽으며 저자가 공부한 방법과 자신의 공부 방식에서의 단점들 그리고 개선점들을 설명해주고 있으며, 초보적인 회화책을 추천해주며 회화책 속 문장을 모두 외우게 되면 달라져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고 말해준다. 또한, 앞서 언급한 ‘짬짬이 시간’을 활용하는, 시간을 잘 관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이 책을 읽으며 나에게 크게 와닿은 구절은 ‘필요(need) 먼저, 욕구(want) 나중’ 이다. 이 문장이 의미하는 바는, 필요한 일을 먼저 하고 원하는 일을 나중에 하라는 말이다. 이는 곧 시간 관리법으로 연결되며, 결국 인생을 어떻게 알차게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는 문장이었다. 늘어지면 한 발짝도 나가기 싫은 것이 우리 본성이지만, 연습만 하면 40킬로미터가 넘는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기 때문이다.영어 회화에 대해 즐거움과 동기 부여를 주는 것을 목표로 한 책인 만큼, 책 한 권을 완벽히 외운 사람이라면 어떠한 방식으로 즐겁게 영어 회화를 지속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지도 설명해준다.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부터 영어 소설책, 미국 드라마, 팝송 및 미국 잡지와 기사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있다. 도서명인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에서도 물어보듯이 영어책을 한 권 다 외우고 나서도 지속적으로 영어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해주고 있다.
역적의 탈을 쓰게 된 혁명가서평을 쓰기위해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도서목록들을 하나하나 검색해보면서 가장 흥미가 있는 책을 찾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책은 ‘허균평전’ 이다. 어릴 적부터 들었던 ‘홍길동전’의 저자가 허균인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허균이 뛰어난 시인이었으며 자기만의 독창적인 학문을 이룩한 대문장가이자 비평가였다는 점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또한 ‘홍길동전’의 홍길동처럼 조선의 엄격한 유교 윤리를 타파하고자 한 개혁적인 지식인이었으며 끝내 역적으로 몰려 저잣거리에서 참형을 당했다는 설명에 허균의 생애를 알아보고 싶은 궁금증이 생겨났다. ‘허균평전’의 저자는 허경진 연세대 대학 교수이며, 대학생 시절 한시에 대해 연구하다가 허균의 문집 ‘학산초담’, ‘성수시화’ 를 읽고 허균이라는 인물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어, 지금까지 허균의 생애와 허균의 시 등을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이 책은 허균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예술가라고 소개를 하며 시작한다. 가족의 생애를 간단하게 소개하며,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허균의 벗과 스승으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 소개한다. 허균의 천재성과, 일찍 아버지를 여위고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자매로부터 사랑만 받으며 자랐기에 허균의 오만하고 진중하지 못한 성격이 자리잡았다는 것, 또한 서얼출신의 스승과 벗들이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것을 보며 출신에 따른 차별에 대해 반감이 크게 자리 잡는 것 등이 여러 자료들과 함께 소개된다. 그리고 허균이 과거시험에 응하여 합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피난길에 오르며 전쟁속에서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기도 하고, 그의 품성 때문에 파직되기도 한다. 워낙 조선 사회를 답답하게 여기며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제 뜻대로 행동하는 허균은 결국 유배를 당하게 되는데, 이때 수많은 문집과 시, 소설을 집필하게 된다. 유배 도중 절친한 벗이 누명을 씌고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때 허균의 사회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하여 조선을 바꾸고자 혁명을 꿈꾸게 된다. 서얼출신의 벗들이 반란음모로 죽고, 허균은 유교사상에 반하는 행동을 하였으며, 같은 당파원들의 질투와 시기로 인하여 허균은 결국 뜻을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사형을 당하고 만다.저자는 허균의 생애를 연구하며, “허균이 젊었던 시절에 너무 자유분방하게 살았기에 세상이 그를 버렸지만 그도 나름대로 세상을 바꿔보려고 노력했다. 귀양 가기 이전의 그와 이후의 그는 너무나도 달랐다. 세상을 보는 그의 눈이 달라졌고,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자신이 세상에 맞지 않자, 자기를 세상에 맞게 고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기에게 맞도록 고치려고 했다.” (허균평전, 허경진, 166p) 라고 허균을 평가하였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물이다. 역사서의 정사에 기록된 허균의 모습은 역적, 괴물, 금수 등으로 비유된 채 남아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던 점은 허균은 단지 성격이 나빠서 조선의 사회규범을 무시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은 채 남들의 비난과 눈치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이라 생각한다. 유명한 양반집 자제로 신분의 제약이 없었고,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천재성도 겸비하였다. 그의 형제 모두 훌륭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으며 높은 관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은 신분층의 대변자가 되려고 하였고, 주변인에게 아부하고 높은 관직에 오르는 편한 삶을 추구 하지도 않았다. 그는 진정 조선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자 노력한 혁명가라고 나는 생각한다.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대상은 남녀노소 누구나 추천해주고 싶다. 허균 그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동하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자신감 있게 행동으로 나타내었다. 그리고 사회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고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자신보다 계급이 얼마나 더 높은지 상관하지 않고 바른말을 뱉었다. 이런 자세들을 보고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국내 선박 온실가스 감축 기술의 동향 파악과주요 선진국 사례 비교 및 개선 사항 연구과 목 명 :담당 교수 :조사 기간 :소 속 : 경상대학교학 번 :성 명 : 김제출일 : 년 월 일< 목 차 >1. 서론1.1 연구배경.........11.2 연구목적.........21.3 연구방법.........42. 기존선의 개발2.1 저유황유(MGO, ULSFO) 사용을 통한 규제 대응의 특징.........52.2 스크러버 사용을 통한 규제 대응의 특징................53. 신규 환경 친화 선박 건조3.1 전기추진선박...73.2 LNG 추진선박..74. 결론....9참고문헌..........에 배출가스 통제구역(ECA)을 설정하여 배출 규제를 하는 등 선박의 온실가스 배출량의 감축을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선박운항 측면에서 보면 선박의 환경오염에 대한 국제사회의 규제가 강화됨으로써 선박의 기본구조가 달라지고 있다. 그동안 해양오염방지 차원의 안전운항 조건에만 적용되어 왔던 선박이 이제는 해양오염방지는 기본이고 대기오염과 기후변화의 주범인 질소산화물(NOx)과 황산화물(SOx), 온실가스(CO2 등)의 배출에도 규제를 받고 있다. 이러한 규제강화로 인해선박은 앞으로 벙커C유의 소비를 획기적으로 축소하는 대신, LNG, 태양력, 풍력 등 친환경에너지와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는 구조로 환골탈퇴해야 한다.우리나라의 해안은 2020년부터 선박 환경오염물질 배출 규제가 적용이 되며,우리나라의 조선 및 해운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늦기 전에 미래형 선박의 개발과 연구 진행이 착수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미래형 선박으로 스크러버 장착선박, 전기추진선박, LNG 추진선박 등의 국내외 개발의 진행상황과 상용화 정도를 조사 ·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국내 선박 환경오염물질 배출 감소 기술 및 지속적인 조선해양산업의 발전을 위한 방향성을 제시 할 것이다.주제어 : IMO, 대기오염물질(NOx, SOx, CO2 등), 스크러버, 전기추진선박, LNG추진선박제 1 장 서 론1.1 연구배경전 세계적으로 화물 운송 시장에서 선박이 차지하는 비율은 그 어떤 수송수단보다 절대적으로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각종 선박들에 사용되는 연료는 석유제품 중에서도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중유계열의 벙커유가 사용되고 있다. 환경 친화적인 방향으로 여러 산업의 발전이 현재 전 세계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주제인데, 선박의 높은 환경오염지수는 여러 산업의 발전 방향과 반한다. 그로인해 탄소배출과 관련하여 2011년 IMO(국제해사기구) 회의에서 향후 건조되는 신조선에 대해서 에너지효율설계지수(EEDI, Energy Efficiency Design Index)를박 내 환경오염물질 배출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제들을 대처하기 위해 각 국의 인프라에 맞는 적절한 대처수단들을 연구 개발 하고 있다. 선박의 엔진 배기가스 오염물질에 대한 환경규제가 점차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기존의 엔진 튜닝 및 저유황유 사용에 의한 배출 저감기술로 더 이상 강화된 환경규제를 만족시킬 수 없어 다양한 엔진 배기가스 후처리 기술 및 장치가 개발되고 선박에 확대 적용 될 예정이다.현재 선박 규제에서 가장 주요한 이슈는 2015년부터 발효된 ECA(Emission Control Area) 에서의 연료 황 함유량이 현재의 1%에서 0.1%로 크게 줄어드는 황 규제 및 2016년부터 발효되는 NOx(질산화물) 규제인 Tier III 이다. Tier III가 적용 될 경우, Tier II 대비 NOx를 약 70%이상 줄여야 하며, 그 이외에도 여러 배기가스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선박 엔진 오염 배출물질에 대한 규제의 강화 및 다양화에 따라 배출량 규제에 대응하는 다양한 수단들이 주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Fig. 2 ECA MARPOL VI, Reg.14선박의 해양오염물질 배출량 규제에 대응하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예로는 값싼 벙커C유 대신 저유황유를 사용함으로 유해배출가스를 줄이는 방법과, 기존 선박에 스크러버를 장착하여 황산화물의 배출을 경감시키는 방법, LNG 추진선을 신규 발주하여 유해배출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방법 등이 있다. 황산화물을 제거하는 후처리 기술에은 폐기법, 건식법 또는 습식법 등이 있다. 습식 폐기 공정의 경우 석회석 세정법, 석회 세정법, 이중 염기법, 강제 산화법, 억제산화법 등이 있으며 건식폐기 공정에서는 석회분사 건조법과 nahcolite/trona 주입법 등이 있다. 이러한 기술들 중 습식 제거 방법의 경우 조작이 단순하고 전체적인 가동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에 탈황기술로써 널리 쓰이고 있다.우리나라의 해안은 2020년부터 선박 환경오염물질 배출 규제가 적용이 되며,우리나라의 조선 및 해운산업이질 규제에 대응하는 수단들을 조사 할 것이고, 이들을 비교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가장 효율적인 규제 대응 수단이 무엇인지 도출 해낼 것이다.저유황유를 사용함으로 선박 해양오염배출물질 규제에 대응 하였을 시 장 · 단점, 스크러버를 장착함으로 선박 해양오염배출물질 규제에 대응 하였을 시 장 · 단점, 해수를 이용한 선박 배기가스 내 SOx 감소를 하였을 경우 장 · 단점, 신규 LNG 추진선을 수주함으로 선박 해양오염배출물질 규제에 대응 하였을 시 장 · 단점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보고 비교·분석을 통해 IMO 배출량 규제에 가장 효과적인 대응수단이 무엇인지 결과를 도출 할 것이다.제 2 장 기존선의 개발2.1 저유황유(MGO, ULSFO) 사용을 통한 규제 대응의 특징첫 번째로 IMO의 선박 배출량 규제에 대응할 수단으로 알아 볼 방법은 기존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많은 벙커C유의 사용을 저유황유로 대체하여 선박을 운행하였을 시에 대한 것이다. 선박 연료에 들어가는 황은 해양오염의 주 요인이다. IMO의 선박 환경오염물질 배출량 규제에서 선박 연료유의 황 함유량의 감소가 메인 이슈인 것이 이를 반증한다. 저유황유를 사용한다면 황 함유량이 적은 연료를 사용하므로 황산화물질의 배출이 줄어들 것이다. 또한 저유황유를 사용할 경우, 기존 선박의 시스템을 그대로 사용해도 되는 장점이 있다. 특별한 개조나 수리의 필요 없이 저유황유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모든 선박들이 저유황유를 사용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기존의 벙커C유(고유황원유) 대비 40% 이상 고가이며, 추가 가격상승의 리스크가 검토되기 때문이다. 선내 특정장비의 추가설비가 불필요하지만, 공급 부족에 따른 가격 급상승의 가능성이 있고 연료유 가격차이가 주요 변수가 된다. 또한 인화점이 낮고 품질연료의 혼합으로 발생되는 안전 및 기계장치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2020년 국내에 황산화물 규제가 적용되기 시작하면 규제 시행 초기에는 저유황 연료유의 수요가 급증 할 것이다. 과도한 수요에 따른 가격습식 스크러버는 물로 배기가스를 씻어낸 뒤 폐수를 배 밖으로 버리는 개방형(Open loop wet system)과 배 안 순환수를 사용해 배기가스를 씻어낸 뒤 폐수를 배 안에 보관하고 있다가 육상에 버리는 폐쇄형(Closed loop wet system) 이 있다. Fig. 3은 습식 스크러버와 건식 스크러버의 원리와 제작 회사를 나타낸 것이다.건식 스크러버는 배기가스의 세정을 위해 건식 반응물(구형 펠렛 형태의 수산화칼슘)을 이용하여 배기가스를 세정한다. 상대적으로 가격이 비싼 저유황유 사용이 부담돼 스크러버를 장착하는 경우가 많다. 스크러버를 장착하면 기존의 고유황 연료를 사용가능하며, 스크러버에 관해 오랜 연구가 있었기에 기술적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또한 초기투자비용이 드는 단점이 있으나 초기투자비용과 운용비용(유지비) 등은 낮은 편이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최근 개방형 방식 스크러버를 사용하면 바닷물로 배기가스를 씻어낸 뒤 다시 배 밖으로 내보내게 되는데 이 부산물이 해수를 오염시킨다는 지적이 나오며 스크러버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지속적인 스크러버의 연구 개발을 통해 이런 단점을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므로 스크러버의 사용은 환경규제에 대응하는 완벽한 수단이라고 할 수 없다.Fig. 3 Type of Scrubber제 3 장 신규 환경 친화 선박 건조3.1 전기추진 선박전기추진에 관한 관심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미 전기를 동력으로 하여 버스나 자가용이 운행 중이며, 이와 같은 친환경의 흐름에 따라 에너지원에 대한 관심이 석유에서 전기로 변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항만과 선박에서도 전기에너지를 활용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다.기존 선박의 디젤엔진 대신 전기모터를 이용해 추진하는 전기추진선박의 장점으로는 전기 선박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벙커C유를 사용하지 않아 온실가스와 대기 오염물질이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전기에너지는 디젤연료보다 저렴해 운송비용이 줄어들며, 기관실 내 전기추진모터는 소음과 진동이 적으며 설치위치가 자유로
한국 근현대사 이해주제 : 근현대 군사 독재정권과목명 :학 과 :학 번 :이 름 :목차1. 서론-독재정권의 탄생2. 본론- 1960년대의 독재 정권- 1970년대의 독재 정권3. 결론-독재정권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 항쟁과 배울 점4. 참고문헌서론-독재 정권의 탄생군사 독재 정권(1960~1980) 이전의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로 독재의 향연이었다.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을 통해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당선된 이후에도 헌법에 규정된 ‘3선 금지’ 라는 조항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 폐지한다는 내용의 개헌을 추진하였다. 그 후 1960년 3월 15일 일정보다 앞당겨 실시된 선거에서 단독 출마하게 된 이승만의 당선은 뻔했다. 하지만 고령의 나이로 부통령자리에 이기붕을 앉혀야 했는데, 그로인해 다양한 협박과 투표함 바꿔치기 등 악행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개표함을 확인하였는데,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퍼센트에 이르러 개표 결과를 조작하여 발표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3.15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이 학생들로부터 일어나고, 선거 무효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을 경찰이 유혈진압하자, 반정부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4월 19일 시위가 확대되고 경찰들의 무차별 총격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사상하며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기붕의 사퇴, 이승만이 하야하게 된다.그 이후 민주당의 윤보선이 제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국무총리로 장면이 임명된다. 4.19 혁명 결과로 인해 기대 받은 장면 국무총리는 여러 시정방침을 밝혔다. 그 중 경제개발을 위한 5개년계획안에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군비축소가 있었는데, 군비 축소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군인들이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게 된다. 민주화를 향한 민중의 노력인 4.19혁명은 1년여 만에 일어난 5.16 군사정변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필두로 한 육군 사관생도들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의 주요 기관들을 점령한다. 4.19혁명 이후 일어난 자주,평화 통일 운동을 부정하며 군사혁명위원회는 반공 체제와 친미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이름을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입법, 사법, 행정을 장악하게 된다. 또한 언론을 탄압하고, 자신들에 반하는 정치인들의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헌법을 마음대로 개정하였으며, 민주공화당을 창설하게 된다. 군복을 벗고 군정의 모습으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가 제 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군사 독재 정권의 막이 오르게 된다.본론- 1960년대의 독재정권그림 1. < 독재정권을 통해 장기집권을 한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 >출처 : 네이버 이미지박정희가 군대를 이끌고 국가를 장악한 1961년 군정기간부터 박정희정부는 경제발전과 한일 국교정상화를 가장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61년 10월 일본 동경에서 제 1차 한일회의가 열렸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대일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 실무교섭이 활발히 진행되었으며 최초로 일본 수상과 회담하였다. 한일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지만 박정희의 대일자세는 친일외교적인 성향이 굉장히 짙었다. 국민들의 대일감정을 자극 할 만큼 굴욕적인 외교가 진행되었는데 (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 군대 위안부, 강제징용자, 원폭피해자에 대한 배상 등등의 문제들이 소홀히 다루어짐 )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같은 협정을 체결 ( 한일협정 체결, 1965.06 ) 한 이유는 경제발전을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서이다. 또한, 미국이 경제지원을 해주는 대신에 월남파병을 요구( 1964.09 )하였는데, 이 때 파병을 간 군인은 5만 여명이고 그 중 5,00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젊은 청년들의 목숨을 대가로 경제성장을 위한 자금을 마련한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얻어 온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을 건설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외국에서 들여온 자본으로 공장을 세워 수출을 늘려 나가며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고도의 성장을 이룩하였다.하지만 이러한 고도의 경제성장은 어두운 내면이 존재하였다. 정부가 경제 활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에, 기업은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 정치자금을 건네주었고 정부는 특정 기업을 보호해주고 키워주는 정경유착의 관행이 짙게 형성되었다. 또한 마구잡이로 들여온 외부자원과 수출위주의 경제성장 전략은 대외의존도를 심화시켰고, 석유파동이나 외환위기가 닥치면 국내 경제가 크게 동요하는, 국민들이 피해를 받는 형태의 경제구조가 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그림 2. < 경부고속도로 완공 및 포스코 완공식에 참여한 박정희 전 대통령 >출처 : 네이버 이미지형태의 고도성장은 계층과 지역의 소득 격차를 심화시켰으며, 이는 심각한 사회갈등을 유발하였다. 1960~1970년대 이룩한 고도성장은 원료를 수입, 가공, 수출한 형태이다. 수출액에서 수입액을 뺀 나머지가 기업과 노동자의 몫이었는데, 국민 1인당 소득이 1961년 85달러에서 1971년 252달러로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국민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가진 것이 아니었다. 기업의 대외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 운동을 탄압하고, 저임금 정책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기업은 크게 성장하였지만, 노동자들은 힘든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저임금을 받았다. 이러한 산업형태는 앞서 말한 것처럼 국제경제에 따라 크게 좌우되어, 국제경제가 힘들어지면 노동자들은 임금이 더 삭감되거나 해고되었다. 또한 인플레이션이 극심하였는데, 정부미(米)라고 일 년 묵은 쌀을 시장에 방출하고, 햅쌀을 사들여 농촌의 소득이 낮았고, 그로인해 생산력이 저하되었다. 더욱이 부족한 쌀을 대신하여 미국에서 밀과 보리를 수입하였는데, 이로 인해 농민들의 생활고는 계속해서 악화되어 농업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었다.이러한 경제성장 속에서 지속적인 독재가 자행되었는데, 1967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재선되었고, 재선한 직후부터 2회에 한하여 연임을 할 수 있는 법을 개정하기 위해 ‘3선개헌’이라는 작업을 추진하였다. 개헌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여당 국회의원 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3.15 부정선거보다 더한 부정이 자행되었다. 민주화 운동의 불씨가 다시금 켜지는 순간이었으며, 또한 1960년대 말에는 경제성장을 위해 빌렸던 외채를 상환해야하는 부담에 시달리기 시작하며 박정희의 독재정권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는 듯 하였다.-1970년대의 독재 정권1970년대 초, 석유 파동으로 원료 수입가격이 폭등한 반면 수출은 침체되었다. 또한, 경제 개발의 그늘에 있던 노동자와 농민의 불만들이 속속 터져 나왔으며 정부의 비리 역시 연일 속출하였다.1970년 4월 8일 달동네 서민 아파트인 와우아파트가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1969년 6월에 착공을 시작하여, 단 6개월 만에 완공한 와우아파트는 완공한지 4개월 만에 붕괴하여 70여명의 주민이 사망하거나 다쳤다. 또한 평화시장의 재단사였던 전태일은 노동3권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하였다.그림 3. < 전태일의 일기문 (1969.11) >출처 :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저자 : 박찬승이뿐만 아니라 다양한 박정희정권의 경제성장 속 이면이 드러나기 시작하며 독재정권은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자 박정희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을 발표하고 유신체제에 들어서는데, 유신체제란 대통령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초헌법적인 국가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동시에 전국적인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11월 21일 국민투표를 통해 유신 헌법을 확정하였고, 대통령 취임일인 12월 27일에 공포 · 시행되었다. 사실상 유신 헌법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으로서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 구조상에 있어 대통령 권한의 비대로 독재를 가능하게 한 헌법이었다. 이후 1973년 정치 라이벌인 김대중을 납치하고 살해하려했지만 미국의 압력으로 풀어주는 사건이 있었고, 1974년에는 유신 독재 정권에 반대하면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긴급조치 1호를 발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유신 활동이 거세지자 시위 주동자에게 사형을 구형하겠다는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기자들의 언론 자유 수호 투쟁이 전개되자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에 기업 광고를 끊었고, 언론을 탄압하였다. 1976년 3월 1일에는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문익환을 대표로 유신 철폐를 주장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민주화를 향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78년 12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79년 8월에는 YH무역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하였는데, 이 때 신민당사에 2,000 여명의 경찰이 난입하여 여공들을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야당 총재를 구타하는 등 폭력을 휘두르다 결국엔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유신 정권을 강력히 항의하는 김영삼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국회의원에서 제명시켰다. 그러자 김영삼 총재 지지 지역인 부산과 마산에서 거친 시위가 이어졌고, 부산에 이어 마산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으나 시민들은 공화당사, 방송국, 파출소를 파괴하면서 격렬하게 유신체제에 대항하여 싸웠다.
한국 근현대사 이해과목명 : 한국 근현대사 이해학 과 :학 번 :이 름 :1. 머리말요즘 한국에서는 일본 불매운동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왜 불매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부터 말하자면, 한국 대법원에서 강제 징용자 보상을 한국 내 일본 기업으로부터 강제 환수로 처리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인정하였습니다. 현재 일본정부의 입장으로선 절대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으로, 배상이 치뤄지면 명목상으로도 일본 제국 시절의 과거사를 인정하게 되는 꼴이 되니까 일본 정부는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그 당시에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베 신조는 자신의 정당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정치적 이미지를 그대로 굳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베는 한국으로부터 일본 기업이 피해를 보면 그동안 호경기로 지지율을 이끌어온 자신에게 큰 피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아예 먼저 책임을 자기 자신이 아닌 한국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한국은 신용 할 수 없는 나라”이므로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를 선언하고, 일부 품목(주로 반도체)에 대해 한국과의 자유무역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하였습니다. 여기서, 한국의 사업에서 반도체사업은 가장 비중 높은 것 중 하나인데, 이걸 못 만들게 원료 공급을 억제하겠다는 것은 아예 굶어 죽으라는 뜻이고, 심지어 틀어막는 이유조차 불분명한 가운데, 이번 경제제재가 정치하고 연계되어 있는 것인가, 하고 큰 의심을 드러냈고, 말이 거듭될수록 거의 그런 쪽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민심에서 “니들이 우리에게 일부러 물건을 팔지 않겠다면, 우리도 니들 물건을 팔리지 않게 하겠다.”라는 여론이 들끓어 본격적인 불매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제를 친일파로 선정하게 된 계기는 전에는 일본과 어떤 관계였는지 불매운동과 반대되는 일본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누가 있었는지 연관이 되는 것 같아서 주제를 선정하였고, 우선 친일파라는 것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 각국을 침탈할 무렵에 일본 제국에 가담하여 그들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지지하거나 옹호하여 추종한 무리를 가리킵니다.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 중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일제가 침략하거나 전쟁을 일으킨 지역의 국가들에서는 이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또한, 돈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돈을 바치고 권력을 사는 것인데, 한국인이지만 일본인과 대등하게 권력을 얻어 서민들의 돈을 빼앗는데 앞장 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권력뿐만 아니라 막대한 부까지도 얻게 되게 됩니다. 즉, 자신의 안위와 부, 권력을 가지기 위한 이기적인 사람들이 친일을 하는 것입니다.2. 주제와 관련한 목차권중현은 조선 후기의 관료이며 일제강점기의 조선 귀족입니다. 개화파 정치인이었으나 초기에 친일파로 변절하였습니다. 충청북도 영동 출신으로 양반가의 자손이었으나 그는 서얼이었습니다. 초명은 권재형 으로 을사조약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자 가계을 숨기기 위하여 권중현으로 개명했습니다. 일찍부터 일본어를 익혀서 개화파에 가담하면서 친일 개화 관료의 길을걸었습니다. 1883년 동래감리서 서기관 발령에 이어 일본 주재 서기관 등을 거쳐 1891년에는 인천항 방판통상사무를 지냈고, 같은 해 오스트리아와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참가했습니다. 한성부윤, 의정부 참찬, 표훈원 부총재 등을 거쳐 1899년에 법부대신에 올랐습니다. 1904년에는 러일 전쟁에서 일본군 위문사로 파견되는 등 일본의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서보대수장을 받았습니다1901년에 군부대신 임시 서리를 맡으면서 국방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일했습니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교장 임시 서리가 되었고, 1903년에는 육군법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1904년에는 대한제국 육군 부장이 되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철도원 총재 임시 서리도 겸했습니다.1905년 농상공부대신으로서 을사 조약에 찬성, 을사오적으로서 오명을 남겼다. 을사오적에 포함된 뒤 1907년 나철의 을사오적 암살단과 강원상의 암살 기도에 노출된 바 있습니다. 이후로도 군부대신을 지내면서 의병 진압 명령을 내리며 의병 운동을 탄압하였습니다. 1908년 일본 정부가 내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습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10월 16일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 1 등 자작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를 수령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과 조선사편수회의 고문을 지냈습니다.박제순은 조선의 문신이자 외교관, 대한제국의 정치인, 외교관입니다. 과거 급제 후 외교관과 이조, 호조의 참의, 이조참판, 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청나라, 일본 등과 협력하며 농민군 진압에 기여하였습니다. 대한제국에서 총리 대신을 두 번 역임하였고 외무 대신과 내무 대신을 역임하였습니다. 을사 조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이며 한일 합방 당시에는 내무 대신이었습니다. 1893년 동학교도들이 보은 집회를 열자,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는데, 그는 이때 민씨 정권의 명령을 받고 청나라에 파견된 위안스카이를 만나 청나라 군사를 파병하는 문제를 의논했습니다. 이후 동학농민운동 당시 흥선대원군 등의 세력이 연대할 조짐을 보이자 그는 청나라와 계속 교섭하였습니다.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된 후에,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경군이 공주에서 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참여, 협조 하였습니다. 외부대신 재직 시에는 간도행정관리권 교섭 그리고 경흥과 의주의 개방 등 외교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 뒤 관제 개정 이후 외무부협판과 중추원의관을 거쳐 외무대신, 의정부찬정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청나라에 파견되는 전권대신으로 임명되어 조청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귀국하였고, 필리핀에 파견되어 조비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하였고, 대한제국에 파견된 벨기에의 뱅카르트와 조백수호 통상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외무대신 재직 중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고민하다가 일본공사 하야시와 을사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을사오적의 한 사람으로 지탄받았으며, 그해에 의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이끌었습니다. 이후 친일파로 변신하였고,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내부대신을 역임하고, 이완용이 고종 퇴진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면서 일시적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그 후에 이완용이 저격당하자 내각 임시총리 서리가 되었고 내부대신으로 한일 합병 조약에 서명하였습니다.이근택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입니다. 을사조약 당시 군부대신 이었습니다. 한일 병합 조약에 협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습니다. 을사늑약 문서에 이근택이 도장을 찍은 후 집에 귀가하여 “우리 집안은 부귀가 지금부터 크게 시작될 것이니 장차 무궁한 복과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하고 집안 권속들과 기뻐하였습니다.이완용은 조선의 문신이자 외교관, 정치가, 대한제국의 관료이다. 이완용에 대해서는 분량이 10페이지도 아깝도록 행적이 너무 많아서 짧게 요약해서 쓰겠습니다. 이완용은 매국노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는 그런 인물입니다. 한일합방 당시에 내각 총리대신이었으며 러일전쟁시에 일본이 유리한 것을 내다본 이완용은 친러파에서 친일파로 변신하였고 을사보호조약 체결을 주동합니다. 그 덕분에 을사오적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됩니다. 대표라는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인물입니다.을사보호조약에 대한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조약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한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 일본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고종의 황제 직 이양을 요구하는 무지한 행동을 하는데 한심하게도 이 나라의 신하였던 이완용은 그에 동조하여 고종의 양위를 건의하기도 합니다. 여러 차레에 걸쳐서 말입니다.결국, 압력을 견디지 못한 고종은 황태자에게 양위를 하게 되는데 이에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서 이완용의 집에 불이 나서 전소하고 됩니다. 이완용의 가족들은 이토의 보호로 왜성구락부에 들어가 지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토는 이완용을 아꼈던 것입니다. 이 나라의 신하이면서도 일본을 유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를 비참하게 몰고 간 그는 일본인보다 더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이지용은 고종의 종질이며 사도세자의 5대손입니다. 그는 다양한 벼슬을 했는데 그다지 평이 좋지 못한 인물로서 뇌물을 받고 군수직 15개를 팔아 탄핵을 받습니다. 그가 친일파로 비난을 받는 것은 먼저 그가 한일의정서에 조인하였기 때문입니다. 한일의정서는 군사용 부지를 허용하고 일본 군 사령관의 서울 주둔을 허락하는 조약인데, 일본이 이 나라를 짓밟을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한일의정서로 인하여 국내에서 반대여론이 높아지자 정부에서는 그를 일본국 보빙대사로 특파하고, 귀국 후에는 많은 역할들을 역임시켰고, 이지용의 친일매국행위는 1905년 내부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찬성하여 조인함으로써 그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을사조약으로 명실상부한 매국노의 반열에 오르고, 1910년 일본으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에 임명된 후에, 일제의 훈장을 세 개나 받았으며 한일합방 시에는 백작을 수여받습니다. 특이한 점은 한일합방 후 날마다 도박으로 소일하며 지냈다는 점인데, 나라를 팔아 넘기고 얻은 엄청난 재산을 도박판에서 아낌없이 날린 그의 모습은 매국노의 풍모로서 조금도 아쉬운 점이 없습니다.3. 맺음말일본이 대한민국에게 정신적, 물리적, 신체적으로 상당히 고통을 입힌 행위는 사실입니다. 어느 나라의 과거와 현재 형법을 보더라도, 오늘날 최고의 범죄행위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 행위는 처벌이 없습니다. 그리고 범죄에도 공소 시효가 있고, 대한민국 전대통령들도 심판한 것처럼 역사의 범죄에는 시효를 따지지 말고 처벌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진상 규명을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경제적으로 나아졌느니, 어쩔수 없이 했다, 친일은 인재다 라는 말은 애초에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4. 참고문헌다음 , 지식백과,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