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호의국사 필화사건을 통한호한체제의 종족적모순과 갈등동양중세사목차1. 서론 - - - - - - - - - - - - - - - - - - - 3p2. 호한체제란?1) 흡수이론에서 호한제로 - - - - - - - - - - - - - - -3p2) 남조의 귀족사회 - - - - - - - - - - - - - - - - - -3p3) 북조의 귀족사회 - - - - - - - - - - - - - - - - - -4p3. 최호,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 - - - - - - 4p4. 최호의 국사필화사건1) 국사 필화사건 - - - - - - - - - - - - - - - - - - 5p2) 솔직한 고윤 - - - - - - - - - - - - - - - - - - - 6p5. 효문제의 한화정책 - - - - - - - - - - - - - 6p6. 결론 - - - - - - - - - - - - - - - - - - - 7p참고문헌 - - - - - - - - - - - - - - - - - - 8p1. 서론한나 아렌트는 모든 정치는 소통이라고 하였다.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커다란 갈등이 생기고 이는 바른 정치가 될 수 없고 기득권 세력이 많은 부정부패를 하게 되어 결국 그 정치체계는 몰락하게 된다. 얼마 전 2018년 4월 27일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북한의 김정은과 문재인 대통령의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의 만남이 떠오른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목표로 삼고 있었고, 북한의 김정은은 현상체제 유지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 두 명의 정상들은 판문점의 도보다리에서 약 30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동안 둘만의 대화를 진행하였다. 이후 평화의 집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공동선언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소통이라는 것은 정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중국 중세시대의 이민족과 남방토착세력이 함께 더불어 살면서도 종족적으로 모순적이고 갈등이 있었던 호한시대도 이러한 소통이라는 것이 정치방법과 관련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먼저 호한체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호한체제는 쉽게 말하자면, 호족사회와 한족사회가 결합된 정치적, 문화적 체제이다. 중국의 역사의 주체는 한족이었지만 중국 역사에서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는 적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중국의 한족은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인정했지만 언제나 이 이민족들을 야만인으로 인식하고, 그들이 남긴 영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즉 한족들은 야만인인 유목민들이 중국을 끊임없이 침략, 지배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들을 흡수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이러한 인식을 ‘흡수이론(吸收理論)’이라 부른다. 이러한 ‘흡수이론’은 그동안 중국사를 이해하는 주요한 요소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민족의 침략을 받은 시기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에서 중국사를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호한제’가 그 새로운 시각 중 하나이다.‘호한제’는 중국의 서북쪽에서 살았던 호족들이 후한 말 이후에 대거로 이동하여 중국내륙지방에 처음으로 국가들을 세운 오호·북조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틀이다. 오호제국의 성립으로 시작한 호족의 중국지배는 그 성립과정에서 ‘영가(永嘉)의 난’이라 부르는 중국사상 처음의 한족 참살을 일으켰다. ‘영가의 난’이후 한족들은 옛 부터 내려오던 분묘(墳墓)의 땅인 중원을 떠나 강남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호족 치하에 잔류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피지배민족으로 이민족 치하에 남겨진 한족들과 지배족인 호족 사이에 일어난 호한관계는 이 시대 역사의 구성에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2) 남조의 귀족사회4 세기 초, 5호의 화북진출에 따른 중국 천하의 정치사회 질서의 재편으로 북조와 남조에서 귀족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4세기 초에 북방지역의 5호는 화북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지역을 점령하였다. 따라서 화북의 북조였던 서진정권은 8왕의 난(왕자들끼리 서로 권력을 독차지 하려고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난 권력투쟁)과 영가의 난을 계기로 남조로 피난, 남하하여 동진정권을 개척했다. 동진시대 귀족계층은 하여 각지의 유민을 전객과 노비로 사역하여 귀족 세력으로 발전하였다. 처음에 강남의 토착 명족이나 호족이었던 남방 토착귀족들은 동진피난 정권에 대해 비 호감을 가졌다. 하지만, 이후에는 화북의 이족의 침입과 지배를 두려워하여서 두 배내귀족과 소통을 통하여 협력 체제를 구축하였고 동진정권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100여년 후 북방인의 남방정책이 진행이 되고 관계로 진출하고 이들은 귀족이 되었다.3)북조의 귀족사회화북의 5호 16국 시대의 난립으로 인해 잔존 한인호족이 유민을 규합하거나 성책을 축조하고 자위수단을 강구하여 안전지역에 이주를 하였다. 이들은 문벌귀족이 된다. 그리고 이때 정복자 선비족이 등장하게 되는데 선비족은 한인호족을 정복하게 된다. 선비족은 말을 타고 정치군사권을 장악하고 관대한 토지를 소유하였다. 이들은 너무 많은 권력을 쥐어 특권귀족으로 변모하였다. 선비족은 북위정권의 통일과정에서 한인호족의 협력이 필요하였고, 한인농민을 직접 사역하여 화북지방의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이것 또한 서로 필요한 힘을 나누고 소통하면서 이렇게 선비족과 한인호족 간의 긴밀한 유대관계가 생기게 된다. 그리고 16국, 북위정권 하의 한인 호족들은 중화사상으로 둘러싸인 강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화북의 5호 전란을 극복하였는데, 이민족의 지배하에 동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단결이 도모되었기 때문이다. 한인호족들은 동성을 골육으로 중시하며, 화북 세족의 종족 조직은 점차 대가족화 되어갔고 삭천가의 집단마을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호한 귀족들은 타협과 갈등을 반복하였다.3. 최호,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북위의 통치자인 탁발부는 원래 선비족의 한 부족이었다. (여기서 탁발은 성씨다.) 이후에 선비족의 귀족인 탁발규(拓跋珪)가 북위 왕조를 세우고 한족출신 문인들을 등용하였는데 그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사람이 최호(崔浩)였다.청하(淸河) 최 씨 출신이며, 3세기 중엽 중국 오호십육국시대 말기의 인물이다. 아버지인 최굉(崔宏)은 북위 초기에 제도의 정비 과 나이에 직랑(直郞)으로 임명되었고, 북위 태무제 시기인 431년에 한족이 될 수 있었던 가장 높은 관직인 사도(司徒)에 임명되었고 그리하여 최호의 추천을 받아 태무제는 많은 한족들을 각 군의 군수로 임명했다. 최호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하여, 20년 가까이 북위 조정에서 정말 중요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 그는 도사 구겸지를 천거하여 도가를 숭상하고 태무제의 폐불 정책에 찬성하며 행동에 옮기고 불교를 억제했다. 북위조정은 한인관료 국가로 전환한 듯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최호는 조정 내 한인 귀족세력을 믿고 국사기록에 중화사상을 투영하여 북인조상의 행적을 폄하하였다.4. 최호의 국사필화 사건1) 최호의 국사필화 사건국사필화 사건은 북위시대 호한(胡漢)관계 전개과정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이다. 최호(崔浩)와 고윤(高允) 등의 한인관료들이 연루되어서 최호를 비롯한 북위 최고한인문벌사족들이 주살되었던 이 사건은 국사편찬 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지만, 이 사건의 이면에는 호족과 한족 관료 사이의 종족적 대립, 불교와 도교의 투쟁, 통치계급 내부의 권력투쟁 등이 깔려 있었다.최호가 가장 높은 관직인 사도에 임명됨으로 인하여 태무제는 최호를 마땅치 않게 생각했다. 후에 태무제는 최호에게 명령해 북위의 국사를 편찬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태무제는 “국사는 반드시 역사에 실재한 일들을 적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최호는 그 요구에 따라서 북위 선조들의 자료를 수집하여 국사를 편찬하였다. 당시 국사 편찬의 목적은 황실의 후대들에게 대대손손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최호 수하의 문인 둘이 묘안을 생각해 냈다면서 국사를 돌비석에다가 새기고 교외에 있는 제단 앞의 길에 세워놓았다.북위의 선조들은 체통에 어긋나는 일이나 체면을 지킬 수 없는 일들을 적지 않게 했는데, 그 돌비석에는 “국사는 반드시 역사에 실재한 일들을 적어야 한다.”는 태무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 과거 선조들의 황당한 일들까지도 새겨져 있었다. 그러자 그걸 본 북위의 선비족 사람들은 이 비석이 기분명문 귀족 128명을 주살하였다. 이로 인해 문벌귀족에 대한 선비족 군주권의 우위성과, 군주권의 절대성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고윤의 정직함으로 인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고윤이라는 자는 어떤 자였을까?2) 솔직한 고윤태무제의 태자는 자신의 스승인 고윤(高允)도 함께 국사 편찬에 가담을 했기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이튿날 그는 스승 고윤과 함께 회의에 나갔다. 태자는 먼저 전당에 올라가 태무제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고윤은 소심한 데다 지위도 낮습니다. 국사는 모두 최호가 쓴 것이니 고윤을 사면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하옵니다.” 이 말을 듣고 무제는 고윤을 불러서 물었다. “국사는 모두 최호가 쓴 것인가?” 하지만 고윤은 정직하게 사실대로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최호는 대강만 잡아주고 구체적인 내용들은 저희들이 나누어 썼습니다.” 그 말에 태무제는 태자를 돌아보며 물었다. “들었느냐? 고윤의 죄가 최호보다 큰데 어떻게 사면시킨단 말이냐?” 그러자 태자는 스승인 고윤을 살릴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고윤은 폐하를 대하자 가슴이 떨려 제정신이 아닌 모양입니다. 방금 전에 같이 올 때만 해도 최호가 한 짓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허튼소리를 하고 있사옵니다.” 태무제가 고윤에게 물었다. “정말인가?” “아니옵니다. 소신이 어찌 감히 폐하 존전에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태자께서는 소신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은 소신에게 묻지 않으셨으며 소신 또한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없사옵니다.” 태무제는 고윤의 충직함과 솔직함에 감동하고 말았다.그래서 그는 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고윤은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거짓말을 할 줄 모르니 참으로 갸륵하다. 고윤의 죄를 사면해 줄 터이니 그리 알아라.” 이후 태무제는 사람을 보내서 최호를 심문하였다. 공포에 질린 최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노한 태무제는 고윤에게 최호를 멸문시키는 조서를 작성하라고 명했다. 관아로 돌아온 고윤은 반나절동안 한 글자도 다.
킹덤 오브 헤븐 - 십자군 전쟁‘킹덤 오브 헤븐’은 2005년에 개봉한 십자군 전쟁의 내용을 다룬 영화입니다.프랑스의 가난한 대장장이인 발리안이 영주인 고프리를 따라 성지인 예루살렘 왕국으로 여정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주인공 발리안이 수도원에 감금 되어 있던 중 한 무리의 십자군이 마을을 방문하게 되고, 그 무리 안에서 어머니를 버리고 십자군에 참전한 발리안의 아버지 고드프리가 있었습니다. 고드프리는 발리안에게 용서를 구하고 같이 가기를 원해고 결국 발리안은 죽은 아내를 위해서라도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에 가야한다고 하며 십자군원정에 참여하고 맙니다. 곧 고 드프리는 조카의 습격을 당해 큰 상처를 입고 아들 발리안에게 예루살렘의 왕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며 발리안을 기사로 서임하여 이벨린의 영주 자리를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합니다.발리안이 오랜 여정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고 예루살렘의 공주와 사랑을 나누며 잠시동안 행복을 느낍니다. 하지만 레날드와 기의 무슬림 상단 공격에 살라딘이 나서게 되고 나병으로 점점 쇠약해져가던 왕도 살라딘을 막기위해 군을 이끕니다. 발리안은 반대하지만, 십자군은 결국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라는 말만 믿으며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이렇게 살라딘의 군대와 십자군은 서로의 신앙을 내세우며 예루살렘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많은 사상자를 내며 결국 발리안은 왕을 대신하여 협상을 통하여 전쟁을 종료시키고 예루살렘을 내어 줍니다. 이때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곳이냐고 묻는데, 살라딘은 "not thing"이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더해서 “everything"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결국 종교라는 것이 신자에 있어서는 목숨까지 내놓을 만한 모든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쓸모없고 허무한 것입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실제로 십자군은 패배했고, 신은 이들을 도와주지 않았죠. 후반부에 발리안이 말한 것처럼 결국 이 전쟁의 목적은 신앙이 아니라 영토 확장과 부의 축적이라는 것과 부합하고 기독교의 신앙은 낮아지고 교황의 권위도 낮아짐에 따라 결국 교회는 쇠퇴합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깨달았던 발리안은 다시 원래 자신이 대장장이로 일했던 대장간을 찾고, 예루살렘의 공주와 함께 떠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됩니다.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다소 오래전 일인데, 발리안이 백성들을 위하고 평화와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이야기는 조금 어설프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실제 역사적 사건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영토 확장과 부의 축적, 그리고 신앙을 통한 정복이 목적이었을 것이고, 결과로는 신의 무응답으로 인해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청나라에 전례되다과목명동양현대사교수님학과학번이름Ⅰ주제선정이유Ⅱ본론1. 예수회의 선교활동2. 청나라로 파견 간 선교사들-마태오 리치-아담샬3. 전례문제-초기의 평온했던 선교활동-예수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코 교단의 충돌-청나라 조정과 교황과의 대립4. 19c 의화단 운동5. 조선의 전례문제-서학으로 알려진 천주교-조선의 전례문제, 천주교 박해Ⅲ종교의 전레에 대한 나의 고찰Ⅳ출처주제선정 이유아주 오래전부터 지금 21세기까지 지구상에서는 다양한 종교가 존재 했다. 종교는 많은 이념과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삶속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필자는 어렸을 때 성당에서 유아 세례를 받아 지금까지 성당에 꾸준히 다니고 있는데, 천주교의 사상은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재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여 각자의 삶의 방식에 적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불가피하게 때와 장소에 따라 종교적 갈등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기존의 보수적인 종교와 새로운 신교와의 충돌은 당시사람들의 삶의 방식, 사상, 이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곧 전례문제로 이어지게 되는데, 나는 이러한 종교와 그 종교의 전례 갈등을 소재로 청나라에 대입 시켜보려 한다. 약 400년 전, 서양에서는 계몽사상으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서양의 사상은 동양의 청나라로 들어오게 된다. 청나라 역시 새로운 종교단체인 예수회와의 접촉으로 전례의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전례문제는 중국, 명말 청초, 가톨릭교회가 중국에서 포교할 때에 중국인 신도에게 어디까지 중국전통의 전례를 허용할 수 있느냐는 점을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이다. 이 논쟁은 마태오 리치의 죽음(1610) 전후부터 예수회 해산까지의 160여 년에 걸친 대논쟁이었다. 본론에서는 명말 청초의 예수회의 선교활동과 대표적인 선교사들, 이후 전례문제와 의화단으로의 계승, 그리고 서양에서 청나라를 거쳐 들어온 한반도에 전례 된 기독교를 중점으로 살펴보겠다.1. 예수회의 선교활동예수회는 우리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종교단체였강대학교가 있다. 서강대학교는 예수회를 재단으로 기반으로 세워진 대학교이다. 이렇듯 예수회는 현재까지도 한반도에 많은 요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예수회가 중국 청나라에 옮겨갔을 때의 상황은 어떠했을까?16세기 이후, 가톨릭의 동양포교에 앞장서 달린 것은 바로 로욜라가 창시한 예수회였다. 예수회는 군대식으로 조직되었는데 포교에 관해서는 굉장히 현실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현지의 외세를 배척하는 사상을 선동하지 않기 위해, 현지의 종교와 가톨릭 교리와의 타협도 불사하고, 학자로서 권력자에게 접근하고, 활동자금을 얻기 위해서 상업적인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16세기 말,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의 대일무역의 4분의 1은 예수회의 경영이었다고 한다. 중국 포교의 선구자인 마태오 리치 또한 중국 국정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신자가 하늘이나 공자, 조상의 제사에 참가하는 것을 용인하고, 예수그리스도는 서구의 공자라고 가르치며, 세례를 주는 관습에서도 중국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것은 잠깐 빼는 등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고, 수학이나, 천문의 지식을 무기로 사용하여 포교의 결실을 맺었다. 그의 이런 포교활동을 예수회 대부분은 옳다고 여겼지만 비판의 소리도 존재했다.2. 청나라로 파견 간 선교사들1) 마태오 리치마태오 리치는 중국 명대 말기에 활약한 이탈리아 예수회의 선교사이자, 교사, 과학자, 문인이었다. 마체라다라는 곳에서 태어났고, 북경에서 사망하였다고 알려진다. 그의 이름은 중국이름으로 이마두(利瑪竇)이고, 자는 서태(西 泰)이다. 1568년에는 직접 로마에 가서 로마의 법률을 배우고 1571년 예수회에 입회하게 되었다.마태오 리치 신부는 사제 서품을 받기 위해 신학을 더 배워야 했기 때문에, 고아의 바오로 학원에서 신학 수업을 받았고, 희랍어와 라틴어 교수를 겸하였다. 이후 그는 프란체스코 파시오 신부와 고아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명 만력 10년 8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는 루지에리라는 사람과 함께 1583년에 광저우 서방에 최초의 중국 천주교당인 선화 그리고 그간 중국어를 배워서 중국어 발음의 로마자화를 시도하였고,《대학》 《논어》 《맹자》 《중용》의 라틴어 번역을 시도 하였다. 1589~1595년에는 소주에 장기간 동안 있었고 그 후 남경을 거쳐 1598년에 상경하였다. 1600년 이후에는 북경에 자리를 잡고 오랜기간 있었으며, 만력제에게 자명종(시계), 3능경(프리즘) 등을 선물하여 환심을 샀다. 황제는 알현하지 못했으나 선무문 가까이에 있는 남당(교회당)을 설치하였고, 많은 고위관리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중국어로 저술한 『교우론(交友論)』, 『천주실의(天主實義)』, 그리고 처음으로 조선에 들어온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와 유클리드 기하학의 번역서인 『기하학 원본』 등 논저가 많다. 곤여만국전도는 동양의 지리상의 안목을 넓혀 주었다는 데에서 유명하다.2) 아담 샬한국중세사 시간 아담샬 이라는 선교사의 이름을 처음 들었다, 그는 조선 중기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를 비롯한 많은 북학파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탕약망(湯若望)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가진 아담 샬은 1611년 예수회에 들어가, 1618년에 사제서품을 받았고, 중국을 담당하는 선교사가 되어 1622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F.베르비스트 등과 포교활동에 종사하였다. 역법과 천문에도 학식이 깊어 월식(月蝕)을 예측하여 그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서광계(徐光啓)의 후원으로 천문학서인《숭정역서(崇禎曆書)》를 번역하여 숭정제(崇禎帝)에게 바치기도 했다. 이후 이것을 100권으로 개편하여 《서양신법산서 (西洋新法算書)》또는 《서양신법역서 (西洋新法曆書)》 라고 하였는데, 서양천문학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명나라 말, 북방의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대포를 주조하기도 하였으나,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에서 1645년에는 흠천감을 맡아서 이듬해에 《시헌력(時憲曆)》을 완성하였다. 순치제(順治帝)의 도움을 받아, 포교활동에 종사하며 북경에 중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대성당을 지었지만, 1664년 궁정대신들의 모함으로 인해 반역죄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포 . 이것은 조선의 북학파에게 영향을 주었다.3. 전례문제초기의 평온했던 선교활동명 말 청 초에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합유선교(合儒宣敎) 라는 정책에 따라 중국 포교에 커다란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리고 선교사들은 서양의 문물을 중국에 전달해 주고 또 중국의 국가사정을 유럽에 전달해 주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 청나라가 북경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흠천감의 자리에 있었던 선교사들은 추방되지 않고, 아담 샬은 감정이 되어 신임을 받기도 했었다. 강희제때만 하더라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맞이하여 그들로부터 서양의 기술과 과학 등에 관한 것을 배웠다. 그런데 종교개혁으로 인해 신교가 탄생하고 구교가 위축되어 실추된 교황권의 회복과 구교의 교세확장을 위한 새로운 선교단체로 앞에서 언급한 로욜라의 ‘예수회’가 성립되었다.예수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코 교단의 충돌그런데 새로운 선교단체인 예수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코 교단이 중국 전통의 전례 문제에 대한 입장과 기독교의 전파가 확대되면서 선교사의 선교 방식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그리고 이미 자리를 잡고 포교활동을 하고 있는 예수회의 선교 방식에 대해 불만을 품고 이러한 상황을 교황에게 잘못된 점이라고 보고 하게 되었다. 이에 교황은 중국의 선교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써 유럽 사람들 사이에 중국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한 때 ‘중국 열’이 나타나기도 했다..청나라 조정과 교황과의 대립결국, 교황 클레멘트 11세는 1704년에 금약(禁約)을 발표하여 조상의 위패를 집 안에 둘 수 없으며, 공자와 조상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이단으로 금지시켰다. 강희제는 이에 대해 굉장히 불쾌하게 여기고, 허가받은 선교사 이외에는 북경을 떠나도록 하였으며, 중국의 예의에 따르지 않을 때에는 선교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충돌은 중국의 황권과 교황의 신권대립이었지만 강희제가 기독교 자체에 대한 반감이 있어서 금령을 내린 것이 아니어서 철저하게 집행되지 않았다.그러나 그다음 황제인 옹정제는 달랐다. 라마교 숭배자인 금교를 실시하고있었다. 이후, 베이징조약에서 금령을 해제하게 되고 기독교 포교를 인정하게 되어 선교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다시 서양 선교사와 중국 민중 간 토지를 두고 벌어진 재판으로 교안문제가 대두되어 반 기독교운동이 전개되었고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다.4. 19c 의화단 운동19c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탓에 민중들은 심하게 고통 받았고, 서양 세력에 대한 반감은 반기독교 운동인 ‘구교운동’으로 표출되었던 의화단 운동은 바로 청나라의 전례문제에 기원을 둔다.당시의 특권을 누렸던 기독교의 포교는 중국인들의 반감을 사 배격하자는 기운이 높아졌다. 서양 열강 세력의 침탈에 반해 민중들이 벌인 대표적 움직임이 의화단 운동이었다. 이들은 '부청멸양(扶淸滅洋)', 즉 청조를 도와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기치를 내걸고 대대적인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경제적 침탈에 가장 큰 피해계층은 민중이었다. 내륙시장이 개방됨에 따라 물가가 폭등하였으며 굴욕적인 조약들로 인해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전후 배상금때문에 세금은 늘어만 갔다. 서양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은 반기독교 운동, 이른바 '구교운동(仇敎運動)'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구교운동은 18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베이징 조약으로 인해 기독교의 내륙포교가 활발해지자, 기독교의 확산이 중국의 전통문화를 파괴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이 중국의 자료를 본국에 제공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 정책에 협력하는 것이라 여기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거세졌다. 운동 초기에는 보수적 관료와 지방 실권자인 향신층들이 유교질서의 유지를 위해 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점차적으로 민중 속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결국 강력한 반제국주의 운동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지주나 제국주의 세력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는 관리들을 공격하거나 중국인 기독교도나 서양선교사를 죽이거나 외국 공사관을 습격하였다.5. 조선의 전례문제서학으로 알려진 천주교서양의 학문이라는 뜻인 서학, 서교라고도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