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굴렘(Angouleme)은 프랑스 서남부 누벨아키텐 주의 도시로 앙구무아 지방의 역사적 중심 도시이며 보르도에서 동북쪽으로 80km, 푸아티에에서 남쪽으로 80km 떨어진 평원에 위치한 도시이다. 인구 5만 명의 소도시이지만 중세 앙굴렘 백작령의 중심지로서 유서가 깊은 도시이다. 시가지는 샤랑트(Charente) 강 연안 해발고도 96m의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낮은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비잔틴, 고딕 양식의 성당이 여러 개 남아있다. 생피에르 대성당은 12세기 초에 건립되기 시작한 비잔틴 로마네스크 건축이며 이곳은 나바르의 왕비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의 출생지이다. 통신의 중심지이며 제지업 등이 활발하다. 현대 들어서는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제가 개최되는 도시로 유명하다.로마 시대의 앙굴렘은 작은 도시였으나 주교구가 설치되었고, 서고트 왕국 시대에 성당이 지어졌다. 푸아티에 인근에서 벌어진 507년의 부이에 전투 이후인 508년에 프랑크 왕국에게 함락되었으며, 부상을 입은 클로비스 1세가 머물기도 하였다. 프랑크 제국의 분열 이후, 앙굴렘은 두 차례에 걸쳐 바이킹의 침략을 받았다. 첫 번째 침략인 848년에는 도시가 함락되었으나 두 번째의 침공 시에는 백작 기욤 1세의 활약으로 격퇴하여 그들을 포위하고 항복시키기까지 하였다. 이 활약으로 앙굴렘 백작 가문은 방어자(Taillefer)라는 호칭을 얻었는데, 12세기 말의 상속녀 이사벨까지 이어졌다. 그녀는 본래 뤼지냥 백작인 위그 9세와 약혼한 몸이었는데, 미모에 반한 잉글랜드의 존 왕이 빼앗다시피 결혼해버렸다. 이에 위그가 주군인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하소연했지만 12세기부터 잉글랜드 왕실이 프랑스 왕국 내에 소유하고 있던 막대한 영지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필리프는 이를 빌미로 영지 회수에 나섰다.1205년까지 잉글랜드 왕실은 프랑스 내부의 영토를 전부 상실 (보르도 등 아키텐 해안 지역인 가스코뉴는 1249년의 파리 조약으로 수복)하고 존 왕의 인기는 급락하게 되는데, 이 거대한 사건의 시발점이 바로 앙굴렘이었던 것이다. 1217년에 존이 사망한 후, 이사벨라는 1220년에 전 약혼자의 아들인 위그 10세와 결혼하였고 앙굴렘 백작위는 뤼지냥 가문에 넘어갔다. 1236년에는 푸아티에, 보르도와 함께 십자군에 의해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어 개종을 거부한 수백 명이 학살되기도 하였다.1302년에 위그 13세가 후사 없이 죽자 앙굴렘 백국은 프랑스 왕령지가 되었다. 백년전쟁 시기인 1360년에 잉글랜드가 150여 년 만에 앙굴렘을 회복하였으나, 1373년에 프랑스 군이 재차 입성하였고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루이가 백작이 되었다. 1498년에 발루아 왕조 본가가 대를 이를 사람이 없었고 1515년에 발루아-오를레앙 가문마저 대를 이을 사람이 없자 루이의 증손자인 앙굴렘 백작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였다.프랑수아의 시대에는 북아메리카 식민지 개척이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프랑스 측에 고용된 피렌체 출신의 항해사 조반니 다 베라차노가 한 해안을 국왕의 출신지를 본 따서 뉴 앙굴렘으로 명명하였다. 이 도시는 1624년에 네덜란드에게 점령되어 뉴 암스테르담으로 개명되었고 1654년에 잉글랜드에게 넘겨져 뉴욕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앙굴렘은 종교개혁 시기에도 중요한 도시였는데, 1533년에 장 칼뱅(Jean Calvin)이 도시 인근의 동굴로 피신을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1548년에는 높은 세금에 반발한 소작농들의 반란 (jacquerie des Pitauds)이 일어나기도 하였다.앙굴렘은 위그노 전쟁 시에 서쪽의 라로셸과 함께 위그노의 도시였으나 1562년에 국왕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1565년에는 전국 순행 중이던 샤를 9세가 도시를 지나기도 하였고 1568년에 앙굴렘은 재차 신교도의 도시가 되었다. 그리고 1569년에 재차 가톨릭 군대가 도시에 입성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앙굴렘은 심하게 파괴되었고 18세기 후반까지 작은 마을로서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앙굴렘에는 프랑스 국제 만화 영상 단지(Cite Internationale de la Bande Dessinee et de l’Image)가 있다. 프랑스 국제 만화 영상 단지는 프랑스 남서부 만화 도시로 알려진 앙굴렘에 있는 만화 전시관이자 복합 단지를 말한다. 앙굴렘 종이 박물관(Musee du papier d'Angouleme), 앙굴렘 생 피에르 대성당(Cathedrale Saint-Pierre d'Angouleme) 등과 함께 지역의 주요 관광명소로 꼽힌다. 앙굴렘은 종이 생산지였는데, 소규모 만화 전시회와 비평회가 자주 열리면서 만화 관련 시설들이 늘어나 만화도시가 되었다.1982년 당시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16세기에 봉건제가 붕괴되었고 중앙집권적 왕권이 등장했으며 민족주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여러 제후국과 공화국으로 분열했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급부상했다. 또한 콜롬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무역이 발달되었다. 이로 인해 도시가 발달했고 결과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었다. 경제의 중심이 토지 기반의 지주계급에서 무역중심의 상인계급으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또한 교회와 성직자가 신학을 독점했고 교황과 성직자들의 윤리적 타락 및 부패, 교회의 권력 점유 및 부 축적에 의해 로마 가톨릭이 타락하게 되었다.마틴 루터는 성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며 중세 교회의 가르침과 권위에 도전했다. 면죄부를 판매하는 가톨릭을 비판하며 죄에 대한 용서는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1517년 독일의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반박문을 개제했는데, 독일의 민중은 루터의 교리에 동조하였다.장 칼뱅은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을 성립했다. 칼뱅은 근면하고 금욕적인 현실 생활을 통해 신의 선택을 받은 자임이 증명된다는 예정설을 주장했다. 또한 직업은 신이 주신 것이며 직업에 열심히 종사하는 것이 신앙인의 의무라고 했다. 칼뱅은 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위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제네바에 대학을 설립했다.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 스코틀랜드,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확산되어 근대 장로교회로 발전되었다.영국의 헨리 8세는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문제를 계기로 영국 교회를 로마 교회로부터 독립시켰다. 로마 교황청과 결별 후, 교황이 주도하는 로마 가톨릭을 왕이 주도하는 영국 교회로 바꿨다. 엘리자베스 1세 때에 확립된 영국의 종교개혁은 종교적 요인보다 정치, 경제적 요인이 더 강했다. 교리 면에서는 루터와 칼뱅의 영향을 받았으나 의식면에서는 가톨릭교회와 별 차이 없는 중도적인 영국 국교회를 수립하였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왕권강화나 자본주의 성장을 반영하였다. 영국은 종교개혁으로 교황과 로마 가톨릭의 권위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고 헨리는 영국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또한 성축일이나 단식의 변화를 포함하는 종교적 관습들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종교개혁은 교회의 제도화 및 조직화를 비판하며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더 중요하게 여긴 중세 교회를 흔들었다. 결정적으로는 중세적인 기독교 세계를 분열시켰다. 종교개혁과 그 뒤를 이은 종교전쟁의 결과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고 신앙의 자유가 확립되는 등 근대 사회의 기본적인 성격이 드러났다. 또한 개성을 자각하고 폭넓은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이 수립되어 르네상스 이래의 휴머니즘이 발전되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유럽의 근대성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종교개혁은 단지 기독교 역사뿐만 아니라 근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유럽 절대주의의 표본은 프랑스 절대주의이다.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치세 초 프롱드의 난을 통해 귀족들의 저항으로 인해 왕권에 위기가 찾아왔지만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업적에 힘입어 유럽의 주도권 장악했고 신권에 입각한 절대왕정을 구현하며 중앙집권화를 실시했다.마자랭이 죽고 난 후, 루이 14세가 프랑스를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루이 14세는 중앙집권 정책의 연장선에서 근대화 정책을 추구하며 정치 인사를 전격적으로 교체했다. 부르주아 출신의 고급 공무원들을 채용하며 재무에 콜베르, 군사에는 르부아, 요새에는 보방 같은 인재를 등용했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비롯한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군주권을 강화했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통해 무엇이 바뀌는가?장애등급제는 그동안 장애를 ‘등급’으로 나누어 혜택을 준다는 측면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또한 중증 장애인에게 혜택이 집중된다는 지적도 많았다. 문재인 정부는 2019년 7월부터 장애등급제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는 내용의 제 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발표했다. 장애인 복지법 제 10조의 2에 따라 이번 계획 발표는 지난 1년간 장애인 단체와 관련 전문가 등 각계각층의 폭넓은 의견과 관계 행정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마련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장애인들의 개별적 욕구와 환경을 고려한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는 점에서 국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여기서 장애등급제 폐지의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가장 큰 변화는 ‘종합적 욕구조사 실시를 통한 맞춤형 서비스 제공’이다. 이제까지의 장애인 활동 서비스 신청은 1~3급의 중증 장애인에만 제한되어 왔지만 제 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통해 4급 이하의 장애인도 종합적 욕구조사 결과에 따라 서비스 이용이 가능해진다. 종합조사의 단계적 확대에 따라 2019년에는 활동지원, 보조기기 지급 및 거주시설 입소자격 부여가, 2020년에는 장애인 전용 콜택시, 주차구역 이용 등이 실행될 예정이라고 한다.과연 분야별로 달라진 주요 내용은 무엇일까? 우선 복지, 건강 부분에서는 장애인 건강주치의제를 도입하여 만성질환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장애인 건강검진기관도 2021년까지 100개소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한 교육, 문화, 체육 부분에서는 장애인 통합문화이용권을 10만원으로 높여서 지원하며, 경제적 자립기반 부분에서는 장애인연금 기초급여를 2021년까지 30만원으로 인상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권익 및 안전 부분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경보, 피난, 안전 설비 기준 강화를, 사회 참여 부분에서는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BF, Barrier Free)을 민간 건축에도 단계적으로 확대, 적용한다.제 5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 실시에 따라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달라질까? 국무조정실 보도 자료의 세 가지 사례를 통해 알아보자. 먼저 첫 번째 사례이다. 뇌병변 장애 4급인 A씨는 일상생활 도움이 필요하지만 활동지원 신청자격이 1~3급으로 제한되어 있어 신청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장애등급 폐지 후에 A씨는 기존 장애등급에 상관없이 활동지원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고, 종합조사 결과에 따라 실제 필요한 하루 3시간의 활동보조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2020년부터 적용되는 특별교통수단에 대한 사례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 3급인 B씨는 휠체어 리프트가 장착된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하고 싶어도 이용대상이 1~2급으로 한정되어 있어서 이용이 불가능 했지만 2020년에 특별교통수단 이용대상이 종합조사에 따라 실질적으로 이동이 제한되는 장애인으로 개편되므로 B씨도 장애인 콜택시 이용이 가능해진다. 마지막으로 2022년에 적용되는 장애인 연금의 사례이다. 정신장애 3급인 C씨는 직장생활이 불가능해 생계에 어려움이 있지만 장애인 연금이 1~2급 및 3급 중복 장애인으로 한정되어 있어 장애인 연금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애인 연금 수급자격이 소득, 고용분야에 따라 실제로 근로가 어려워 소득수준이 낮은 장애인으로 변경됨에 따라 C씨도 장애인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본격적인 연명의료중단결정법 시행, 과연 옳은 것인가?정부는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지난 2월 4일부터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 여부를 환자 본인 또는 가족 등이 결정할 수 있는 연명의료결정제도(존엄사)를 본격 시행했다. 법 개정에 따라 말기 환자들은 연명의료계획서를 쓰거나 이를 쓰지 못한 채 임종 시기에 접어들었을 때 가족 2명 이상의 일치된 진술,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 등을 통해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으며 ?연명의료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미리 밝혀 놓는 ‘연명의료계획서’를 쓸 수 있는 대상도 모든 질환으로 확대했다. 여기서 말하는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와 연명의료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치료를 통해서 회복되지 않으며,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돼 사망이 임박한 상태에 있다고 의학적 판단을 받은 환자를 의미한다. 또한 연명의료란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게 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 네 가지 의학적 시술로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만 늘리는 것을 의미한다. 연명의료결정제도의 본격적인 시행에 따라 '인간답게 죽을 권리'와 헌법 최고 기본권인 '생명권에 반하는 죽음의 선택'이라는 주장이 대립하면서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먼저 연명의료결정제도를 찬성하는 측의 입장을 들어보자. 자기운명결정권에는 환자가 자기의 생명과 신체의 기능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질병에 대하여 치료를 받을 것인지 여부 및 치료의 범위에 관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환자는 치료를 받지 않으면 질병이 계속 진행되어 장차 시간이 지나면 사망에 이르게 될 상황이라고 하여도 의료법에 따른 의료인에게 연명의료중단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한 설명을 듣고 본인이 앓고 있는 질병의 상태와 향후 본인에게 시행될 의료행위에 대해 분명하게 인지한 상태에서 자기결정권에 기초하여 치료를 시작하지 아니하거나 계속되어 온 치료를 중단하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연명의료 중단에 대한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자기결정은 연명의료결정법 제 1장 1조에 따라 존중되어야하고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이에 따른 반대 측에서는 연명의료를 중단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환자가 사망할 것으로 예측되어서 임종 과정에 들어섰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환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는 의료인이 쉽게 예측할 수 없으므로 환자의 정확한 사망 시기를 예측할 수 없다. 만약 환자가 의식이 없는 상태라면 환자 본인이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보호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연명의료 중단이 악용될 수 있으며 생명경시 풍조가 생겨날 수 있다. 또한 돈이 있으면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해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연명의료 중단을 선택한다면 연명의료 중단이 돈 없는 사람들의 도피처가 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율배반을 어떻게 해결해야하는가?이율배반(antinomie)은 논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동등한 근거로 성립하면서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된 두 명제 사이의 관계이다. 또한 이율배반은 똑같은 근거에 의해서 두 개의 상반된 명제가 동시에 성립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율배반은 보편성과 특수성이 충돌하는 것이다. 이에 따른 예시로 ‘샤를리 엡도’ 사건을 들 수 있다.‘샤를리 엡도 테러사건’은 2015년 1월 프랑스 파리 샤를리 엡도 사무실에 이슬람 극단주의자 테러리스트들이 침입하여 총기를 난사해 편집장을 포함한 직원 10명과 경찰 2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테러를 당한 ‘샤를리 엡도’는 그동안 각종 성역에 대한 비판을 해온 주간지로, 특히 2011년에도 무함마드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만평을 게재해 테러 위협을 받았으며 그해 11월에는 화염병 공격을 받아 사무실이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샤를리 엡도’는 테러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고 표현의 자유를 지키겠다며 2012년에는 무함마드의 누드를 묘사한 만평을 게재했다가 이슬람 단체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제소되기도 하였다. ‘샤를리 엡도 사건’을 통해 '불에 기름을 끼얹는 행위' 또한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용인될 수 있는지 프랑스 안팎으로 논쟁이 발생하게 되었다.나는 ‘샤를리 엡도 테러사건’이 보편성과 특수성이 충돌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샤를리 엡도가 발간한 잡지’가 이슬람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 대한 것도 게재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무함마드를 섬기는 이슬람권의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가 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편성과 특수성이 충돌한다.보편성과 특수성이 충돌한 이율배반의 또 다른 예시로 안티고네(antigone)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안티고네에게는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라는 두 형제가 있었다. 안티고네는 자신의 손으로 눈을 찌르고 왕국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여러 나라를 방황하다가 아버지가 죽은 뒤 다시 테베로 돌아왔다. 그 뒤 두 형제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위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다가 모두 죽게 되고, 새 지배자가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를 애국자로, 폴리네이케스를 역적으로 취급하여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체를 들에 내다버려 새와 짐승의 밥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거역하는 자도 사형에 처한다고 포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가 시체를 매장하자, 크레온은 그녀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고 그녀는 목을 매어 죽었다. 그 뒤 그녀의 약혼자였던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도 자신의 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크레온의 아내 에우리디케도 자해를 함으로써 크레온은 파멸에 이르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