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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영화 바베트의 만찬 감상문 - 종교적 관점으로
    영화 바베트의 만찬 감상문 - 종교적 관점으로
    -바베트의 만찬을 감상하고-북유럽의 스산한 작은 마을, 여기에 누구보다도 독실한 ‘종교적’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두 자매가 있다. 그녀들의 이름은 마르니타와 필리파.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그녀들은 덕을 행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을 이어 마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도우며 살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물과 같이 고요한 나날. 그러나 이러한 자매들의 삶에 뜻밖의 돌이 풍덩- 하고 던져졌으니- 아, 그 날은 비가 무섭도록 쏟아지던 밤이었다. 폭풍우와 함께 찾아온 프랑스 여인 바베트, 그녀는 향후 실로 폭풍우와 같은 변화를 마을에 가져오게 된다.?조용하고 폐쇄적인 이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프랑스 여인 바베트. 하지만 단순히 그녀가 외부에서 온 인물이었기에 이 마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르티나와 필리파 자매가 들장미처럼 곱던 시절에도 이 마을에 기꺼이 어울리고자 했던 인물들은 분명 존재했었던 것이다. 오로지 마르티나에 대한 애정으로 이 작은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자 했던 로렌하임 장군이 있었고, 필리파와 사랑의 하모니를 노래하고 싶었던 무슈 파팡1이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자매는 온 몸으로 그들의 사랑을 모른 체하고,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그녀들에게 있어 이 세계서의 삶이란 남녀간의 사사로운 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위해 바쳐져야 하는 것이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알리사와 제롬처럼, ‘좁은 문‘은 두 명이서 지나기엔 지나치게 좁은 문이었으리라.?이것은 비단 마르티나와 필리파 자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은 정확히 그녀들과 뜻을 같이 했다. 그들에게 있어 성과 속은 완전히 구별되는 것이었고, 구별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지독하게도 감각적인 것들을 경계했다. 말린 생선과 빵을 으깨어 만든 죽만이 그들에게 허락 된 유일한 양식이었으며, 교구에 모여 다같이 찬양을 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 된 유일한 유희였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영적인 삶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런데 바베트, 그녀의 부탁으로 말미암아 이들의 그간의 노력이 시험에 처하게 할 위기가 닥쳐오고 말았다. 문제는 바베트가 복권에 당첨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찾아와, 십여년간 자매들의 일을 도우며 살면서 단 한번도 부탁을 해본 적이 없는 바베트가, 자매들의 아버지인 목사님을 추모하는 집회의 만찬을 프랑스식으로 대접하고 싶다고 이야기 한 것이다. 비용은 자신이 댈 것이며,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일 것이라는 바베트의 청을 자매들은 마지못해 수락한다. 하지만 바베트가 일꾼들을 시켜 집에 들이는 재료들만 보아도 기함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새장 가득한 메추라기 떼, 캐비어를 비롯해 살아움직이는 거북이까지!...?마르티나는 마녀로 분한 바베트가 악마의 음식을 만드는 꿈을 꾸고는, 두려움에 떨며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안감을 전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에 동조하며 바베트의 음식에 관하여 일절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마르티나에게 말도 제대로 붙이지 못하고는 거절당한 뒤, 세속적 가치만을 좇아 숨가쁘게 살아온 로렌하임 장군이 그간의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를 안고 다시 이 마을을 방문했던 날, 그 날은 바로 목사님을 추모하는 날이었다. 그렇게 우연히 만찬에 참석하게 된 로렌하임 장군3은 마을 사람들의 약속을 알리가 없다. 그렇게 때문에 장군은 끊임없이 바베트의 음식에 경탄을 하며 이 훌륭한 음식들을 소재로 대화를 이어 나가고자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약속대로 바베트가 차려낸 음식에 반응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들의 입은 만찬 내내 바쁘게 움직였는데, 그것은 늘 함께 해왔지만 누구보다도 심리적 거리가 멀었던 서로에게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 사이에 오랜 세월 쌓여온 미움, 시기, 질투 등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과거 그들이 진정으로 미덕을 기꺼워하던 시간에 관하여 이야기 나누며 행복을 느낀다. 영화가 시작되고 난 후 처음으로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독후감/창작| 2022.07.13| 3페이지| 1,000원| 조회(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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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르네이유의 <르 시드> 와 라신의 <페드르> 비교 분석 레포트
    코르네이유의 『르 시드』 와 라신의 『페드르』에서 드러나는 정념과 이성의 상관관계로드리고의 아버지 돈 디에그는 로드리그가 사랑하는 여인 시멘느의 아버지, 돈 고메스로부터 뺨을 맞는 모욕을 받았다. 분노한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대신하여 복수를 해줄 것을 부탁한다. 그 시절 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였다. 로드리고 또한 이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는 결정해야했다. 결투를 한다면 로드리고의 칼날은 그가 세상에서 무엇보다 아끼는 여인의 아버지의 피로 물들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명예를 져버리는 일이 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사랑과 의무 중 하나는 저버릴 수밖에는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이때 로드리고의 이성은 인간이 가장 지켜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명예라고 명령 내린다. 로드리고는 이성의 뜻에 따라 사랑을 포기하고 의무를 행함으로써 명예를 지키겠다고 마음먹고는 고메스를 찾아가 결투를 신청한다. 로드리고는 시멘느의 아버지를 죽인 후 그녀 앞에 나타나 그녀의 손에 죽고 싶다고 청한다. 자기가 의무에 따랐던 것처럼 이제는 그녀의 차례라는 것이다. 그러자 시멘느는 제 아버지를 죽인 로드리고를 비난하기는커녕, 당신이 치욕에서 벗어난 것을 비난할 수는 없다며 그가 정직한 사람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한다.코르네이유 극의 등장인물들에게 있어 사랑이란 명예를 지키게 하는 상대에 대한 존중에 근거를 둔 것이다. 따라서 명예를 잃으면 그 사람에게 합당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사랑을 할 때에는 사랑을 하고, 또 받을 만한 자격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한다. 로드리그가 사랑과 의무의 갈등 속에서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시멘느로부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이성적인 추론에 의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판단을 내릴 뿐만 아니라, 그 판단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즉 코르네이유가 말하고자 했던 이성은 데카르트가 이야기했던 판단 능력으로서의 이성이라 고 할 수 있다.로드리고는 이성적 추론에 의거하여 사랑보다 보다 높은 가치인 명예를 추구하고, 실현하였으며 시멘느는 그의 결단과 의지를 높이 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판단하였다. 이성에 충실하게 따른 그들의 행동은 위대하고, 그들의 사랑은 고결한 것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코르네이유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것임에 틀림없다. 로드리고와 시멘느가 결국 결혼식을 올리며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기 때문이다.반면에 페드르를 보자. 페드르는 이폴리트를 보는 순간 아연실색한다. 이폴리트를 마주하 게 된 그 찰나의 순간, 그 순간에는 어떤 사회적 윤리도, 잣대도 끼어들 새가 없었다. 단 한 번의 시선으로 그녀는 사랑에 굴종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페드르의 얼굴에서는 이제 갓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된 여인의 발그스레한 뺨 대신 깊은 절망과 혐오감만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폴리트와 그녀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폴리트는 페드르의 의붓아들이었던 것이다.그를 사랑하지 않게 해달라고 신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보아도 베누스는 침묵으로 일관 할 뿐이다. 이폴리트의 미움을 사려고도 노력하여도 이폴리트가 페드르를 미워한다고 해서 그녀가 이폴리트를 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페드르의 가슴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정념은 제물로 바쳐진 페드르를 갉아 먹으며 스스로 증식하고 있었다. 이 사랑은, 페드르의 죄는 총포 소리에 놀란 말처럼 미쳐 날뛰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페드르는 자신의 사랑에 스스로 괴로워한다. 페드르에게 있어 자신의 사랑은 그 자체로 ' 죄'로 인식 된다. 이폴리트에게 고백하듯 페드르의 사랑을 누구보다 혐오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사랑이 옳지 않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명철한 의식으로서의 이성은 존재하지만 그 사랑을 끊어낼 수 있는 실천적 능력으로서의 이성은 상실된 지 오래이다. 로드리고와 시멘느와는 달리 페드르에게 있어 이성은 무력하다. 그녀의 사랑은 죄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듯 라신은 결국 그녀에게 결국엔 비참한 최후를 안긴다.파스칼은 『팡세』에서 크게 두가지 주제를 다룬다. 인간의 비참함과 위대함이 그것이다. 인간은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비참한 인간 은 어떻게 위대해지는가: "L'homme n'est qu'un roseau le plus faible de la nature: mais c'est un roseau pensant"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원죄에 의해 타락한 인간은 비참함은 연인을 잃은 자의 그것에 비할 수 있을 것이다. 연인과의 행복했던 시절을 기억하기 때문에 연인을 잃은 현재가 비참하게 보여지듯, 인간 역시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비참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바로 여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고 증언한다.페드르 역시 자신이 나락에 빠지고 있음을 스스로 의식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의 정 념과 그것을 처벌하고자 하는 무력한 이성사이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왔다. 표면적으로는 사랑에 패배하여 목숨을 내던졌다지만 그녀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파스칼의 입장에서 보자면 페드르 역시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잃으면서까지 상대방을 사랑한 페드르를 비참한 존재로 둘 수는 없다. 페드르의 사랑을 부정한 것으로 둘 수는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이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 받을 수는 없을지라도 그녀의 사랑을 단순한 광기로 치부 해버릴 수는 없다. 그것 또한 사랑이었다고, 사랑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유모 외논처럼 거듭, 힘주어 말해주고 싶다.: "마마는 사랑을 하세요. 누구도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어요.”PAGE * MERGEFORMAT2
    인문/어학| 2021.11.11| 4페이지| 1,000원| 조회(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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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비문화론] 조지 리처 - 맥도날드와 맥도날드화를 읽고 / 맥도날드화를 거친 현대인의 삶의 모습 , 부유富裕 속에서 부유浮游하는 우리 평가D별로예요
    소비 문화론 레포트맥도날드화를 거친 현대인의 삶의 모습부유富裕 속에서 부유浮游하는 우리서론조지 리처는 자신의 저서 『맥도날드와 맥도날드화』는 현대인들은 맥도날드화 된 세계에 몸을 담근 채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맥도날드화는 무엇인가? 맥도날드화라는 낯선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한 세기 이전의 사회과학자 막스 베버가 제창한 관료제를 이해해야 한다. 관료제란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체계화된 조직을 말한다. 관료는 철저한 위계질서 아래 오직 규칙에 따라 행동하며, 그의 업무와 권한은 엄격하게 한정되어 있다. 베버가 제시하는 이념형으로서의 관료제 개념은 국가의 행정 기구만이 아니라 사경제의 기업체, 종교 단체, 군대, 정당 등 모든 대규모 조직에도 적용된다. 조지 리처는 관료제야말로 맥도날드화의 선례라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간다. 전 세계를 동일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야말로 맥도날드화라는 것이다. 맥도날드화는 비단 패스트푸트 업계에 국한되는 개념이 아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맥도날드화야말로 전 세계의 모든 부분을 속속들이 관통하는 주축이다.외국의 프랜차이즈들이 전부 뿌리 내리지 못 하고 쓸쓸하게 퇴장했다는 이탈리아. 하지만 그곳에서 마저 굳건히 자리를 버티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맥도날드이다. 맥도날드의 음식이 특별히 맛있기 때문일까? 어디에서도 먹어 볼 수 없는 고유함이 있기 때문일까?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맥도날드가 제공하는 상품은 단순한 햄버거일 뿐이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함께 음식의 나라로 나란히 어깨를 견주는 국가이다. 그런 만큼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면 거리에 흔하게 널린 아무 레스토랑이나 들어가는 편이 훨씬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여행할 적에 나는 종종 맥도날드로 향하곤 했다. 내가 기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이태리어로 쓰인 메뉴판 대신에,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는지 당최 추측할 수 없는 음식들 대신에 비록 한국과는 8000km나 떨어져 있지만 한국의 그것 과 맛이부유하는 맥도날드화의 마법은 사람들을 취하게 했고, 그에 그치지 않고 어플루엔자affluenza라는 무시무시한 질병을 퍼뜨렸다.본론현대인들은 합리성의 열렬한 추종자들이다. 그 행태를 보자면 가히 신흥종교의 광신도들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다. 모든 것이 제도화되고 시스템화 될 때에 사람들은 이러한 합리성이 풍요와 여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조직화된 체계 속에서 물질의 생산량은 크게 늘었다. 사람들은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사람들은 ‘효율적인’ 일처리에 따라 생산량만큼이나 여가 시간 역시 크게 늘어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풍요로 워질수록 여유는 사라졌다. 어플루엔자는 미국의 환경과학자 데이비드 웬과 듀크대학교 명예교수 네일러 등이2001년 펴낸 같은 제목의 저서 《어플루엔자》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풍요로워지면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소비심리 또는 소비지상주의로 인해 나타나는 갖가지 증상을 일컫는다. 어플루엔자의 대표적인 증상은 시간 기근이다. 이유는 우리가 시간 대신에 물질을 선택한 것에 있다. 인류가 무리를 짓고, 문명을 건설한 이래로 현대 사회는 최대의 물질적인 풍요를 눌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풍요로운가? 풍요에 파묻힌 개개인은 도리어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하여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정서적 좌절의 책임을 비단 개인에게 물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이미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만연하기 때문이다. 어플루엔자 바이러스를 전세계로 퍼뜨린 배경으로는 바로 맥도날드화로 대표되는 합리성, 혹은 효율성 지상주의와 소비 만능주의가 있다.부유(富裕)해졌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부유(浮游)했다. 효율성이 세계를 지배하 고 사람들이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속절없이 잠식당하고 난 뒤의 결과는 참혹했 다. 합리성은 도리어 비합리성을 불러왔고, 인간 소외는 만연해졌다. 개개인을 특징 짓는 특성은 불만과 불안에 잠겨 빛을 잃는다. 사람들은 거짓 페르소나를 쓴다. 사실상 현대인들은 모두 같은 페르소난 분명 기뻐했다. 새로운 샤프를 가지 고 문제를 풀면 어쩐지 집중이 더 잘 되는 것도 같았다. 새로운 샤프를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오는 만족감도 있었지만 내 취미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관심을 보일 때마다 이게 가장 최근에 장만한 것이라며 가슴을 펴고 자랑을 할 때에 얻는 기쁨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만족감은 금세 사라지곤 했다. 일주일만 지나도 새로운 샤프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이지 않았다. 소비가 가져다주었던 기쁨은 모래알이 되어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또 다시 새로운 샤프를 검색했고, 구입했고, 기뻐했고, 수그러들었고, 이를 끊임없이 반복했다.다들 나와 같은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한 소리를 들은 후 복 합 쇼핑센터로 달려가서 새로운 구두를 장만하는 27살의 누군가, 명절을 보내고 난 후 명품 가방을 장만하는 40대의 누군가. 모두 다른 이들이지만 마치 같은 주물에서 찍어낸 것처럼 꼭 닮아있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불만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혹은 마음속 빈 공간, 그 헛헛함을 채우기 위하여 소비한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역시도 소비에 크게 의존한다. 고등학교 시절 우리 반엔 늘 고등학생이 소지하기엔 큰돈을 가지고 다니던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는 내게 와 말했다. 부모님이 출장이 잦으셔서 늘 빈 집에 혼자 들어간다고, 불 꺼진 집에 혼자 들어가면 가끔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얀 봉투(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와 짧은 메모가 자신을 반긴다고 했다. 부모와 자식 사이가 같은 시간 속에서 숨을 나누며 쌓아야할 친밀한 애착은 빳빳 한 직사각형의 지폐들로 대체된다. 이와 같은 예는 또 있다. 남자친구와의 기념일이 다가온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남자친구가 무엇을 선물해주 었느냐고 묻고, 대답하는 이는 남자친구와 함께 갔던 호텔 뷔페에 대하여, 받은 선 물에 대하여 늘어놓는다. 남자친구와의 애정의 척도 역시 상품이나 서비스로 쉽게 재단되고 감이나 기쁨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소비를 할수록 더욱 부유(浮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평면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많은 페르소나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수많은 페르소나들이 소비로 점철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다. 페르소나와 진정한 나 자신의 괴리야말로 그들이 겪는 소외의 근원이다.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하는 얼굴이 되는 페르소나가 이젠 오로지 부, 명예, 돈 따위로 제한되고 매스 미디어에서 그것을 부추기고 종용한다.전파망으로 연결 된 세계에는 경계선이 없다. 모두에게 열린 디지털 공간에서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전보다 스스럼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타인의 이야기에도 쉽게 노출 되었다. 이전에는 옆집 영희만이 비교대상 이었다면 이제는 저 멀리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는 이들의 삶까지 엿볼 수 있게 되었 다. 이로써 사람들은 더더욱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을 욕망하며 더욱 깊은 고통으로 빠져든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인지, 타인의 욕망을 따라 욕망하는지는 논외 밖이다. 오직 모니터 너머의 그들과 자 신을 비교하기에 급급하다. 초라함이야말로 그들이 경계해야 하는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SNS를 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하루 종일 쉼 없이 반복 되는 케이블 TV의 광고, 버스를 타면 들려오는 광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교묘히 몸 을 숨기고 있는 PPL,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강남역 전광판에 걸린 현란한 빛의 네온 사진 전광판까지. 우리는 숨 쉬듯 광고에 노출되어있다. 과연 이런 환경에서 나는 어플루엔자 바이러스에 노출된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소비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일상화되었고, 또 소비가 나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구성 물질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초라함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옥죄는 박탈감을 떨쳐내기 위해 소비할 수밖에 없다. 페르소나의 표준은 미디어를 통해 정해지고 사람들은 그를 좇광했고, 글을 쓰는 지금도 빌보드 차트를 플레이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먼 나라였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 번도 밟아보 지 못한 땅이었기 때문일까. 미국이라는 나라가 전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인식한 적은 없었다. 엘 고어의 불편한 진실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세계를 고갈 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다. 이러한 생각은 맥도날드화와 어플루엔자에 대해 글을 읽을 적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미국 사회의 병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매일 반복되는 일상 생활을 되돌아보며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맥도날드화가 만들어낸 어플루엔는 나의 삶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모든 것을 계량화 하는 사회, 예측 가능성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는 페르소나 역시 그 가치를 계산 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나는 확신이 없어졌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욕망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오롯이 나의 것이 아니라 타인의 눈에 비친 나, 미디어가 비춰주는 나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타자와의 비교가 없는 자기 인식은 나르시즘이라고 하지만 도리어 요즘의 나는 타의식 과잉이다. 근래에 들어 생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새로운 샤프를 사며 즐거워하던 그때,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최초의 소비 경험, 그때부터일지도 모른다. 내가 소비를 통해 나 자신을 규정하고, 나의 욕망이 오롯이 나의 것이지 않았던 것은 말이다. 저명한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공간은 비균질적이라고 말했다. 그에 의하면 중심을 바탕으로 세계의 질서가 세워진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 우리 모두는 중심을 필요로 한다. 의미 있는 공간이, 지향점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현대인들에게는 그러한 의미 있는 지향점이 부재한다. 소유를 통해 얻는 만족이란 실로 허망한 것이다. 마치 모래성과 같아 가벼운 파도 한 번으로도 무너지기 십상이다. 매순간 쩍쩍 하고 금이 가는 모래성을 끌어안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상상AT2
    독후감/창작| 2021.11.07| 7페이지| 1,000원| 조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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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한 하위징아 - 중세의 가을 서평, 중세인들의 낭만적 감수성과 가혹한 현실 사이의 괴리를 중심으로
    중세의 가을중세인들의 가혹한 삶과 낭만적 감수성 사이의 간극중세인들의 실제 삶은 그들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아름답지 못 했다. 하위징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세의 삶이란 ‘가혹하고 냉정하고 배신적’(p. 168.)이었다. 사람들의 영혼은 풍부하고 감상적이었지만, 중세의 현실은 그들의 낭만적인 감수성을 수용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모질고 혹독한 실제 삶과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한 동경 사이엔 커다란 간극이 있었고,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하여 중세인들은 모든 것을 형식화하고 일상을 고상한 규칙을 갖춘 아름다운 놀이로 바꾸는 것에 집중했다. 아름다운 형식을 갖춘 삶에 대한 동경은 장례 절차도, 출산을 위한 준비도 본격적인 화려함과 과시의 신분적 특징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로 만들었다. 정리하건대, 중세인들의 삶은 인생을 하나의 드라마로 만들려는 충동에 의해 이루어졌다.이러한 중세인들의 특성은 우정마저도 정교하게 형식화하여 구경거리로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뇽Mignon 혹은 미뇬느Mignonne라고 불리는 중세 우정의 형식은 우정의 표식으로서 같은 옷을 입고 함께 다니기를 요구했다. 이는 특히 군주와 기사간에서 두드러지곤 했는데, 군주의 미뇽이 된다는 것은 곧 그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의미로 여겨졌다. 미뇽은 자신이 모시는 군주와 동일한 옷을 입고,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자는 특별 대우를 받아으며, 이러한 우정의 양식은 귀부인들 사이에서도 유행했다.우정을 형식화 하였던 것처럼 중세엔 사랑 역시도 엄격한 규칙과 질서를 갖춘 채 행해졌다. 중세의 사랑을 대표하는 양식으로는 궁정풍 사랑l’amour courtois이 있다. 궁정풍 사랑은 기사로 하여금 이상적인 여인을 숭배하(보통은 영주의 부인)며, 그녀를 수호하기 위해 숭고한 사랑의 봉사를 행하되 어떠한 보상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한다. 12세기에 쓰인 크레티엥 드 트루아Chrétien de Troyes의 『수레 마차의 기사Lancelot, ou le chevalier de la charrette』 (1177)에서 우리는 궁정풍 사랑의 보편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백 여년 후, 즉 중세 후기에 접어들어서는 『장미 이야기Le Roman de la Rose』에서 드러나듯 남녀 간의 유희와 희롱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랑관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장미 이야기』는 이미 결혼한 귀부인들에 대한 지나친 동경을 그만두고, ‘장미’로 상징되는 처녀성을 얻기 위해 인내할 것을 주장한다. 기존의 사랑관을 뒤엎는 이 파격적인 이야기는 곧장 강렬한 찬반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비록 『장미 이야기』가 당시의 사랑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과거의 사랑관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 했기 때문이다.중세인들의 삶을 연극적으로 구성하는 또다른 요소 중 하나는 바로 토너먼트Les Pas d’Armes이다. 토너먼트는 아서왕 전설 속 동화적인 요소를 유치하게 각색하여 현실에 적용한 것으로, 무훈시에 등장하는 변화무쌍한 모험에 궁정적 감상성이 결합된 것이다. 14세기 후반에 발전하여 15세기까지 인기를 유지한 파 다르므는 주로 다리나 성문과 같은 이동 지점을 지키는 기사와 그곳을 지나가길 희망하는 기사 간의 대결로 이루어진다. 이때 상대 기사가 대결을 회피할 경우 말의 박차를 굴욕의 표시로써 내려놓아야 한다. 여성이 홀로 지나갈 경우엔 장갑이나 스카프를 남겨두고, 그 이후에 지나가게 될 기사로부터 ‘구출되어’ 자신이 두고 간 물건을 징표로 되돌려 받아야 한다. 귀족들은 이처럼 파 다르므를 통해 그들이 읽은 내용을 재연할 기회를 가졌고, 이에 따라 토너먼트는 고대 그리스의 스포츠와 같은 자연스러움을 잃은 채 점점 장식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PAGE * MERGEFORMAT2
    독후감/창작| 2021.11.07| 3페이지| 1,000원| 조회(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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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후감] 소포클레스 - 안티고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본 안티고네,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은 누구인가
    안티고네 – 소포클레스진정한 비극의 주인공 크레온오이디푸스 사후 테바이 왕실은 공석에 놓인다. 이에 안티고네의 두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두 사람이 번갈아 테바이를 통치하기로 합의하지만, 에티오클레스가 약속한 기한이 지나도 왕위를 넘겨주기를 거부하면서 갈등이 생겨난다.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부정하는 에테오클레스에게 분노한 폴리네이케스는 결국 장인인 아르고스 왕의 도움을 받아 테바이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전쟁 중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 모두 전사하고, 섭정을 맡은 크레온은 에티오클레스는 영웅으로 취급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식을 하되,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로 규정하고 ‘새떼와 개떼의 밥이 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다. 누구든지 그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사형에 처해질 것이다.당시 그리스에서는 망자에게 적절한 장례의식을 갖추는 것이 절대적인 의무이며 천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안티고네는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이 방치되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고, 이스메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른다. 파수병에 의해 끌려온 안티고네에게 크레온은 감히 ‘법’을 어겼느냐 묻는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이 내린 포고령은 한낱 인간의 법에 불과하다고 반박한다. 인간의 법칙보다 신들의 확고부동한 근원적인 원리와 정의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그분에게는 권리를 내게서 떼어 놓을 권리는 없는 거야.” 크레온은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안티고네에게 분노하여 그녀를 동굴에 가두어 버린다.“이 나라를 나의 뜻이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한 사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곧 국가의 주인이 아니란 말이냐?”국가를 통치함에 있어 국가의 안녕과 번영이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나 권리에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크레온의 명령은 냉정하고 잔인해보이지만 설득력이 있다. 크레온은 무엇보다도 국가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인물이다. ‘통치의 부재는 모든 것을 망쳐 놓는다’는 그의 말은 국가주의적 가치관을 잘 드러낸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통치일까? 하이몬과의 대화에서 맹목적인 복종만을 강요하고 폴리스적 민주주의를 무시한 채 민중에게 군림하고자 하는 크레온은 폴리스를 위한 지도자가 아닌 애국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개개인의 양심이 국법보다 우선 될 경우 찾아올 혼란을 걱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불안정한 권력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안티고네를 처단했을 뿐이다.크레온은 자신의 권력이 폴리스의 시민들로부터 위임 받은 것이라는 사실은 인정면서도 자신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헤어나오지 못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성격적 결함 혹은 판단 착오에 의하여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빠진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크레온이 자신은 국가를 통치하는 자이고, 따라서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복종은 자기 자신에 대한 복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통해 오만함이 크레온의 하르마티아로 기능한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안티고네는 오빠에게 합당한 장례 의식을 행하는 ‘고귀한 죄’를 저지름으로써 닥치게 될 미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 감으로써 크레온의 법령에 희생당하기를 거부한다. 안티고네는 비록 죽음을 맞이했을지만, 그녀의 죽음은 결코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선택한 죽음이며,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이 가진 무게와 그로 인해 따라올 결과를 바로 알고 행동하는 안티고네와 다르게 크레온은 자신의 아집이 무슨 결과를 낳을지 전혀 알지 못 한다.아들의 청원에도 굳건하던 크레온은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듣고 난 후 마음을 돌려 동굴을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안티고네는 목을 맨 이후였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비극의 도화선으로 기능한다. 약혼녀를 잃은 하이몬은 자결하고, 아들을 잃은 크레온의 처 에우리디케의 역시 충격에 목숨을 끊는다. 삽시간에 아들과 처를 잃은 크레온은 절망감에 울부짖는다. 안티고네의 마지막 대사처럼 ‘인간은 겪고 나서 깨닫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을 크레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PAGE * MERGEFORMAT2
    독후감/창작| 2021.11.07| 3페이지| 1,000원| 조회(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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