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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자의 세계 에 대한 서평문
    제목 : 『한자의 세계』 의 대한 나의 서평한자는 동아시아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문자였다. 특히 중국, 한국, 일본은 공통적으로 이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서로간의 말이 달라도 한자라는 문자를 통해 전달을 할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한자는 동아시아의 각 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한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다 라고 정확하게 말을 하는 사람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각종 문헌이나 유물을 통해 한자가 어떻게 생성되었는가에 대해 알지를 못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업을 통해 알게 된 책이 바로 ‘한자의 세계’ 라는 책이었다.이 책은 중국문화의 원점 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이 책을 통하여 뭔가 한자가 가장 만들어진 국가인 중국을 통해 이 글자가 고대 중국의 문화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알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이 만든 사람이 일본인인 시라카와 시즈카 라는 인물인데, 이분은 일본에서 저명한 한문학자로써 중국 고대의 문자, 문화를 중심으로 연구한 학자이다. 이 책이 맨 처음 쓰여질 때가 1976년이라고 하였으니 지금으로 따지자면 약 40년이 넘는 책이라고 볼수 있다. 40년이 지났어도 이 책이 계속 출판이 되어지는 것을 보면, 지금도 이 책에 대한 권위가 상당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이 책이 집 근처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어서, 이 책을 대출받아 읽어보았다.책의 구성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내가 대출받은 책이 수정판 까지 보유하고 있어 2부로 되어있는 것 같다. 본래 이 책이 1부로만 되어있었는데, 수정판을 통해 2부까지 연결되어 있다. 1부와 2부 각각 6개의 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장은 내가 목차로만 보아도 알 길이 없었다. 각각의 공통적인 주제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맨 처음 내가 고를때와는 달리 뭔가 심히 불길했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내가 과연 이 책을 다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 책을 점점 『설문해자』를 집필하였다. 문(文)은 원시적 구조의 기초문자로써 분리 또는 분해가 불가능한 문자이며, 자(字)는 기초문자들이 결합하여 나온 것으로 분리하거나 분해가 가능하였다. 이것은 각각 한자의 형태 중에서 상형자와 지사자로 분류되는 독체자와 회의자와 형성자로 분류되는 합체자의 근원이 되었다. 설문해자는 글자의 형태와 의미에 근거한 한자를 찾으면서, 설명을 해주기에 최초의 백과사전 이라고 칭한다.이렇게 설문해자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면서 이 책을 좀 더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한자의 세계 책에 대한 내용을 알아보겠다.우선 제 1부이며 주제는 딱히 알 수 없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책에서도 아무런 주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 1부의 첫 번째 내용은 문자의 시원이다. 문자는 대체적으로 발달된 고대 문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들의 문자는 거의 상형문자이며, 회화적인 형태로 되어져 있다. 한자도 이러한 상형을 본따서 출발하였는데, 다른 고대 문명들이 자신들의 가지고 있는 문자가 소멸되었던 반면에 아직까지도 살아있는 문자이다. 한자는 상형문자 치고는 그림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닌 선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추상적으로 나타나진다. 이는 중국의 갑골문이나 금문에서 잘 알수 있다. 고대문자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무당들이 이 글자를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각종 신화에 따르면, 전지전능한 신들이 인간의 세계에 와서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선물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신과 연결해주는 사람인 무당이 기이한 문양이나 행동을 통해 글자가 처음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을 통해 각종 물건에다 새겨넣었을 것이고 이것이 나중에 갑골문과 금문에 보이는 수천자에 가까운 형태의 글자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고대의 생활양식을 보여준다.두 번째 내용은 불가분의 원리이다. 나눌수가 없는 원리라는 의미인데 문자가 성립하기 전에는 주로 의사표현방법이 말과 표지 그리고 기호로 풀이하고 있으며 우도 마찬가지로 돕는 것이다, 손과 입이 서로 돕는 것이다. 라는 것으로 풀이한다. 좌와 우를 조합해서 나온 글자가 심(尋) 인데 이것은 신이 있는 곳을 찾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좌와 우 한자를 파생해서 나온 工과 口를 통해 신을 부르는 주술적 도구와 신을 내리게 하는 축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工은 특히 무당의 의미를 지니는 글자 무(巫)와도 연관이 되어있다.무당(巫)은 신에 관련된 일의 모든 방면에 걸쳐져 있으며, 신에게 비는 행위는 무당에게 있었다. 제사를 주관함으로써 말씀을 아뢰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지위가 높았으며, 이에 상 나라때와 주 나라때는 왕이 무당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는 무축왕의 지위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와 같은 문자구성을 통해 주술적인 것으로 통해 고대인들의 신뢰를 얻을수가 있었다. 거기에 불가분의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표현된 것들이 확실하게 존재하며 그대로 기능을 하는 것은 한자의 구성원리에서도 기본적으로 인정되는 원칙이라고 할수 있겠다.세 번째 내용은 신화와 배경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신에게 제사를 함으로써, 신에게의 경외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새와 관련된 신의 모습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새 라는 존재는 날수 있는 동물이면서,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면서, 신의 사자라고 칭했을 것이다. 가령 꿩(雉)과 기러기(?)는 사방에 관련된 것을 관련하였으며 설문해자에서도 각 사방에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산해경 이라는 책에서도 새를 사자로 삼은 경우가 많은데, 바람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새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또한 산해경은 새의 얼굴에 인간의 모습을 한 기이한 종족이나, 여러 마리의 새를 데리고 각각의 동물들을 다스리는 종족부터 하여 다양했는데 이는 새에 대한 강인함을 강조하였다.또한 고대 중국에서 태양은 다리가 세 개가 달린 까마귀가 주기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으로 믿었기에 새에 대한 역할은 크다고 볼수 있다. 새를 우리는 이러한 행동은 상 나라가 야만적이라고 평가를 내릴수 있겠지만, 그들의 생각으로서는 이민족으로부터 온 이민족의 신이 우리의 신을 몰아낼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없애기 위해 이민족의 포로를 이용해 재물로 삼아 우리의 신을 공고히 하기 위한 국가적 수단임을 알 수 있다. 가령 方 이라는 글자는 방향표시를 내는 의미이긴 하지만 본래 이 글자의 형태는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걸쳐놓은 모양이다. 이것을 가지고 여러 가지 주술적인 장식을 하여 제사의례를 함으로써, 이족의 신을 몰아내기 위한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 글자에 의해 파생된 글자는 防이며 막다 라는 의미를 사용한 이 글자는 신이 오르내리는 사다리인 부(阜)의 앞에서 행해지는 제례의식을 본따서 만든 글자라고 할수 있다. 이를 통해 이민족을 막고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용도로 사용했다.다섯 번째의 내용은 전쟁에 대하여 이다. 전쟁은 신화때부터 신들간의 전쟁이 있었고 이에 인간들도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씨족사회때부터 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각각의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였으며, 이 씨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신들이며 신들의 힘을 이용해 전쟁의 승패를 가린다고 한다. 이는 주로 서양 문명에서 많이 겪는다.고대 중국에서 특히 상 나라때부터 이민족간의 전쟁이 다분했는데, 복사를 하여, 전쟁이 일어날거 같으면 사용하는 것이 북(鼓) 이다. 북에서 나오는 소리는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각종 제사 때에도 북을 사용하여 신의 힘을 불어일으킨다. 전쟁 때의 북소리는 사기를 불어일어켜 군의 승패를 관련짓게되는데, 이는 춘추전국시대 때 절정을 다하였다. 전쟁을 할 때 신의 뜻을 살피기 위해 그 지역의 음악을 연주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노랫소리로 길흉을 점치는 것은 전쟁에서 북소리로 승패를 알수 있는것과 같은 사고방식이다.전쟁은 씨족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사건이며, 아무리 주술의 힘을 빌려 노력하였어도 현실적으로는 전투력으로 결과를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다. 패배한 씨족들은 승자의 씨족에 포로가 되었으며, 이들은 노비가, 애니미즘과 샤머니즘 이라고 볼수 있다. 애니미즘은 모든 물체에 영적인 것을 믿음으로써, 물체에 신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이를 통해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고대의 기억을 간직한 한자도 애니미즘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 점복문자를 통해 재앙에 관련된 문자는 다 동물의 형상을 띄고 있다. 이것은 무언가 주술적인 영이 행해져 있다는 관념을 나타내주고 있다. 동물의 형상을 나타내는 글자가 사용되고 있는 것은 이 동물의 영혼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이다. 길흉을 묻는건 사회생활의 전반에 걸쳐져 있으며 그것이 자연신이나 조상의 영혼이 신비한 위력을 나타내는 것이다.원시 종교의 또 다른 것은 바로 샤머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주술적인 영혼은 주로 여성 무당인 미고라고 야여 씨족간의 전쟁을 할 때 북을 쳤다고 한다. 앞서 북은 신성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무당이 북을 치면 신성한 힘이 더욱 배가된다고 하여 믿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여러 가지 물건의 모양을 그려 백성들에게 괴이한 것을 알려주며, 산이나 강 같은 자연지물을 가려서 악신들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도 일종의 신의 승낙과 거부를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훗날 왕이 무당을 겸하게 되는 무축왕으로서 점칠수 있는 권위를 얻게 되자 여성 무당에 대한 지위를 잃게 되는 경우가 발생했다.원시 종교는 이렇게 주술적인 힘을 얻기 위해 가무(歌舞)를 통한 행동을 한다고 한다. 가(歌)는 본래 저주의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좋은 노래를 만들어 옳지 못한 사람을 비판하는 것으로 노래가 지닌 주술적인 힘을 열렬히 칭찬하여 그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다. 무(舞)는 제사를 행할 때 무당들이 주술적인 힘을 얻기 위해 각종 기이한 행동을 하면서 신의 힘을 얻으려고 한다 무를 바침으로써 신을 섬기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무는 그 뒤에 악무로써 궁정의 의례로 변화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중국 고대문화의 발전상을 엿볼수 있게 되었다.일곱
    독후감/창작| 2019.09.04| 6페이지| 1,000원| 조회(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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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 대 재상지종에 대한 설명
    충선왕 대 재상지종에 대한 설명Ⅰ. 서론Ⅱ. 본론(1) 재상지종의 배경(2) 재상지종의 업적(3) 충선왕 이후 재상지종의 양상Ⅲ. 결론Ⅰ. 서론무신정변 이후 고려(高麗)는 원(元)과 화친을 맺고 개경으로 환도를 했다. 그 사이에 삼별초의 항쟁도 존재하였지만 원에 의하여 제압을 당하였다. 이제 고려는 원에 의한 정치를 강요받게 되었다. 원종 이후로 ‘충(忠)’이라는 왕이 생겨나면서 원에 대한 간섭이 더욱 심화되었던 시기였다. 약 80년간 원의 지배하에 놓여있으면서, 특히 결혼에 관련하여, 고려의 왕은 원의 공주 한명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으로 많은 시련을 겪게 됨으로써, 충렬왕(忠烈王)때부터 시작하여, 공민왕 초 까지 고려는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이러한 양국의 관계 사이에서 충렬왕과 원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충선왕(忠宣王)은 어렸을 때부터 원나라 수도인 대도에서 머무르면서 살다가 충렬왕과 마찬가지로 원에서 결혼을 하고, 충렬왕의 선위를 받아 왕이 되었다. 그가 원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그는 고려에 와서 왕권 강화를 위하여 다양한 개혁을 세웠다. 하지만 즉위 8개월 만에 원의 공주와 사이가 틀어졌으며, 각종 개혁으로 인한 고려 내부의 반발하는 세력이 존재하였으며, 원의 간섭으로 인해 폐위되어 원으로 돌아갔으며,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였으며, 충렬왕 사후 다시 즉위하였다.그 중에서 가장 개혁에 임했다고 볼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재상지종은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여 가장 먼저 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장 유력한 가문을 선정하여, 자신을 따름으로서 왕권을 강화시키겠다는 취지를 보였다. 이에 이 글은 충선왕이 왜 재상지종을 만들게 된 경위를 알아보고 싶으며, 이 재상지종 가문들이 충선왕을 위해 어떻게 지원을 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재상지종들은 나중에 어떻게 살게 될 것인가에 대해 알아보고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Ⅱ. 본론(1) 재상지종의 배경재상지종이 존재하는 배경을 알아보자면 맨 처음 무신정권(武臣政權)으로 인해 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들이 재상지종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충선왕의 아버지인 충렬왕 때부터 원의 간섭이 시작되면서, 원과 긴밀하게 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원 세조인 쿠빌라이 칸은 충렬왕이 즉위를 하면서, 내린 조서가 이렇다.그대의 나라에서는 여러 왕씨들이 동성(同姓)을 취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이 치에 맞는 것이겠소? 이미 우리와 일가(一家)를 이루게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마땅히 (우리와) 더불어 통혼을 해야할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여 일가를 이룬 의리라고 할 수 있겠소?이러한 조서는 고려 입장에서는 원 세조의 조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으며, 원 입장에서는 공주를 고려로 보냄으로써 원의 권위를 유지해야 되는데 고려의 동성혼(同姓婚)은 원의 입지를 약하게 하는 이유하에 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를 받게 됨으로써, 점차적으로 동성혼에 대한 괴리감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동성혼에 대한 의식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또 다른 하나는 충선왕 즉위 때, 그의 아내인 계국대장공주에 의한 조비 무고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원나라 간의 불신과 충렬왕파의 모함으로 인해 7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충렬왕이 사망한 후 충선왕이 다시 복귀할 때, 이르러서 다시 공포하게 되었다.지금부터는 만약 종친이 동성과 혼인하는 경우 성지(聖旨)를 위반한 것으로 〈죄를〉 논할 것이니 마땅히 대대로 재상을 지낸 가문의 딸과 혼인하여 아내로 맞아들일 것이며, 재상의 아들은 종실의 딸과 혼인하라. 만약 가세(家勢)가 비루하고 한미(寒微)하다면 이 제한에 포함되지 않는다. 신라왕손 김혼(金琿)의 가문은 또한 순경태후(順敬太后)와 큰 집, 작은 집 가문이며, 언양 김씨(彦陽金氏) 일족, 정안임태후(定安任太后) 일족, 경원 이태후(慶源李太后)와 안산 김태후(安山金太后), 철원 최씨(鐵原崔氏), 해주 최씨(海州崔氏), 공암 허씨(孔岩許氏), 평강 채씨(平康蔡氏), 청주 이씨(淸州李氏), 당성 홍씨(唐城洪氏), 황려 민씨(黃驪閔氏), 횡천 조씨(橫재상들의 자식들간의 동성혼을 금지하고 유력한 가문을 중심으로 하는 재상지종과의 혼인을 함으로서 사전에 근친혼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 복위한 충선왕의 입장에서는 1298년에 있었던 개혁정치의 결과 가 퇴위로 이어진 만큼, 어떤 식으로든 기존 세력에 한 재편이 뒤따라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충선왕은 자신이 따르고자 하는 세력을 만들어내어, 다른 세력이 존재하지 못하게 막았을 지도 모른다.여기서 재상지종(宰相之宗)의 선별하는 기준이 나타나는데, 충선왕의 ‘재상지종’ 가문의 특징을 보자면 언양 김씨, 공암 허씨, 당성 홍씨, 평양 조씨는 충선왕과 직접 혼인을 했던 가문이다. 그리고 경주 김씨, 정안 임씨, 경원 이씨, 안산 김씨, 청주 이씨 가문은 ‘태후(太后)’ 라는 말을 붙였는데 이는 단순히 왕비만을 많이 배출하여 생긴 가문이 아닌 왕비중에서 태후를 많이 배출하여, 여기서 나온 자식들이 왕이 많이 존재했던 가문이 ‘재상지종’에 선정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유능한 재상들을 출세시키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철원 최씨, 해주 최씨, 평강 채씨, 황려 민씨, 횡천 조씨, 파평 윤씨 가문은 재상을 3대 이상 배출한 가문으로써, 과거 급제를 통한 출세를 시작하여 대대로 재상 자리에 올랐으며, 전통적이면서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가문이었다. 여기서 충선왕 당시의 유력한 가문 출신이 뽑히지 않았다는 것이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2) 재상지종의 업적재상지종이 적용되었던 가문들은 모두 충선왕의 측근이 되면서 충선왕의 지시에 따라 행동을 했다. 비록 충선왕 복위 전, 아버지인 충렬왕의 권력다툼하에 자신을 따르는 인물들이 대부분 숙청당한 적이 있었으나, 충선왕이 복위한 뒤 다시 관직에 등용되었다.재상지종 가문 중 충선왕 때 가장 영향을 끼친 가문은 충선왕과 결혼한 가문일 것이다. 대표적인 가문은 언양 김씨(彦陽金氏)와 평양 조씨(平壤趙氏)이라 볼 수 있다. 언양 김씨는 충렬왕때부터 차근차근 정치에 발판을 내딛었으며, 충선왕이 잠시 물러났을 때 많은 능통하였으며 충렬왕때 자신의 딸이 세자빈으로 가면서, 권세를 확장하였다. 이후 충선왕이 즉위한 후 그의 개혁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원(元)이 〈조인규를〉 선무장군 왕경단사관 탈탈화손(宣武將軍 王京斷事官 脫脫禾孫)으로 삼고 금패(金牌)를 하사하였다. 왕이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조인규는 동정(東征)때 우리 국가의 일을 〈황제께〉 잘 보고하였다. 황제께서는 과인(寡人)에게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을 제수하시고, 또 여러 신하에게 도원수(都元帥)·만호(萬戶)·천호(千戶)의 금패와 은패(金銀牌)를 내렸으니 모두 그의 공이다. 마땅히 그의 공로를 별도로 기록하여 전민(田民)을 하사하고, 자손에게는 등급을 뛰어넘어 관직에 임용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그의 사후 이 가문은 대원관계를 통해 가문의 기반을 다진 만큼 원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전부 참여하였다.윗 글을 보면, 조인규가 고려와 원나라와의 관계 속에서 매우 능통하게 외교를 하여 높은 관직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평양 조씨는 조인규의 영향으로 그의 자손들이 원 간섭기 대대로 높은 관직을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이처럼 충선왕은 재상지종을 이용하여 소금 전매를 중요시하여 복위 전에 실시하였던 각염법(?鹽法)을 부활시켜 당시의 권세가들이나 충렬왕을 지지했던 세력들을 무력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어 충선왕의 재정 확보를 가져다 주었다. 마지막으로 관직 개정에 대한 지시를 내리는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재상지종 중 충선왕을 도와 충선왕의 권위를 회복시키는데 주도를 이끈 가문들이 존재한 가문이 있는 반면, 일부는 충선왕의 개혁에 못마땅한 가문이 있었다.(3) 충선왕 이후 재상지종의 양상충선왕 이후 재상지종은 고려 후기 때의 요직을 전부 맡게 되었다. 이러한 요직들을 특정 가문만이 도맡아서 정치를 하게 되었으며 앞에서 서술한 듯이 재상지종 가문끼리 서로 중첩된 결혼을 하여 다른 가문들이 자리에 오르기 어렵게 하였다. 또한, 경제적 측면으로 넓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토지를 이용한 농장을 경영하게게 등장한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에 의해 많은 견제를 받았으며, 몇몇 가문들은 신진사대부에 속하여 권문세족에 대항하게 되었고 재상지종 가문들도 권문세족과 연관성을 지니게 되어 마찬가지로 공격을 받았다.결국, 신진사대부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면서 기존에 있던 권문세족과 더불어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대부분의 재상지종 가문이 권력을 잃고 있으나, 몇몇가문은 조선왕실과 연관을 맺으면서, 또한, 새 왕조의 신하가 되어 조선 초기의 기반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어 세력을 유지해 갔으며, 그 후에도 재상지종의 후손들이 조선을 이끄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Ⅲ. 결론지금까지 재상지종에 대한 것을 충선왕대를 중심으로 하여 알아보았다. 우선 재상지종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을 먼저 서술하였으며, 재상지종이 반포된 충선왕 때 무엇을 하였는지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충선왕 이후 재상지종에 대한 이후상황에 대해 검토를 해보았다. 이로서, 고려 말 원 간섭기 때의 왕과 귀족과의 관계가 어떻게 잘 이루어져있는것에 대해 알게 되었다.재상지종은 일종의 귀족계층으로 원 간섭기때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이었지만, 이는 무신정권부터 세력을 키운 귀족들이 성장해 나가면서, 점차적으로 권력을 잡게 된 것이다. 이에 원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됨으로써, 고려 사회는 뒤숭숭해져갔지만, 이 사이 원과의 관계를 통하여 또 다른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원 간섭기 시대 고려의 왕은 원의 간섭을 최대한 저지하기 위해 자신을 보살펴줄 수 있는 측근세력을 원했을 것이다. 자신의 측근세력을 만들기 위해 당시 유력했던 가문과의 혼인을 하게 되었고, 충선왕 때 이르러, 유력한 가문들 중에 15개를 뽑아 ‘재상지종’이라는 것을 만든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재상지종들 중에 원과 친하게 지낸 가문이 존재하여 저절로 친원세력이 성장하게 되었으며, 고려 말의 주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아가게 되었다. 이들은 고려가 멸망하고 나서 많은 가문들이 권세를 잃었지만 몇몇 가문들은 아직도 살아남아 새 왕조에 있어 .
    사회과학| 2019.09.04| 6페이지| 1,000원| 조회(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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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자(整理字)1. 정리자란 무엇인가?- 1796년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편찬하기 위해 주자소에서 만든 동활자.- 1795년에 주조를 시작하여 다음 해인 1796년에 주조가 끝났으며 대자 16만자, 소자 14만자로 총 30만자에 달하였음.*정리(整理) 란?- 조선시대에 국왕이 바깥으로 행차할 때 호조에서 국왕이 머물 행궁을 정돈하고 수리해서 새 로 만드는 일.- 이를 관장하는 관리를 정리사(整理使) 라고 함.- 정조 때 여러 차례 수원으로 원행을 하여, 수원 화성에 ‘정리소’를 설치하여, 행사진행, 물 자 및 경비 조달, 회계처리, 기록 보존 등 행사와 관련된 사무 처리를 담당함.2. 정리자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1)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원행(園幸) : 임금이 도성 밖을 나가는 행위을묘(乙卯) : 1795년정리(整理) : 행사를 준비하는 임시기구를 설치의궤(儀軌) : 국가 왕실에 관련된 주요 행사를 치른 뒤 그것을 상세히 정리한 책- 1795년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현륭원 참배를 위해 8일간 이루어진 원행을 기록한 책이며 이 의궤를 간행하기 위해 제작된 활자가 ‘정리자’- 단순히 부모에 대한 효도가 아닌 그동안 쌓아둔 업적을 보여주고 신하와 백성들의 존경을 얻기 위한 정치적 행동.(2) 이전에 사용하던 활자의 문제점당시 사용되고 있던 임진자, 한구자 등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높낮이도 한결같지 않아 조판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음.3. 정리자의 종류(1) 초주정리자(初鑄整理字)- 1796년 3월에 완성함.- 주로 조선왕실에서 『의궤』를 편찬할 때 사용됨.- 이 글자를 통해 만들어진 작품은 『오륜행실도』, 『원행을묘정리의궤』, 『태학은배시집』이 존재함.- 1857년(철종 8년)에 창경궁 내에 화재로 주자소가 연소되었는데, 이것으로 인해 글자 가 상당 부분이 소실됨.(2) 재주정리자(再鑄整理字)- 1856년(철종 9년) 9월에 완성.- 초주정리자의 상당 부분 소실로 인해 다시 주조하게 되어 만들어진 정리자.- 정리자 대자 8만 9203자와 소자 3만 9416자를 새로 주조하고, 초주정리자의 남은 활자 인 17만 5698자와 함께 주자소에 보관.- 초주정리자와 비교해 정교함이 약간 부족하지만, 대한 제국까지 각종 관보나 법령, 조약 문 등에 다양하게 사용.4. 정리자의 특징- 생생자를 글자의 기본으로 하였음.- 중국의 ‘사고전서 취진판식’을 간행한 목활자의 제작 방식을 도입.- 글자체는 『강희자전』의 글씨체를 모방하였으며 정리자대자는 글자체가 넓적하고 글 자의 획이 굵고, 소자는 가늘고 정교함.- 재주판에 실제 크기보다 다소 작은 활자가 보임.- 한글 활자가 만들어져 병용. 활자의 뒷면은 활의 등처럼 속으로 움푹 파임.- 인쇄가 간편하여 비용과 노력이 적게 드는 등 효율적이었으며 인쇄상태는 중국의 수진본 보다도 오히려 선명.- 이전에 만든 활자에 비해 모양과 높낮이가 일정함 -> 필요한 인력과 시간이 절약되므로인쇄 속도가 높아짐, 종이가 찢어지거나 활자가 옆으로 기울고 흔들리는 일이 없었음.5. 정리자의 영향- 1798년에 민간이 주조하여 상업적으로 사용해 정리자를 닮게 만든 철활자를 만들게 됨. 누가 언제 만들어지는지 기록이 적혀있지 않아 이를 ‘정리자체 철활자’라고 일컬음.- 민간인쇄를 촉진시켜 서민문화와 시민의식의 발전에 기여한 점에서 인쇄문화사상에 큰 의의를 지님.- 정조 사후 출간된 문집인 『홍재전서』를 정리자로 간행.- 『화성성역의궤』, 『진작의궤』, 『진찬의궤』 의 간행에 사용.- 정조 이후 화성 행차를 행한 을묘년 식년시의 방목을 정리자로 간행하게 됨. 이는 화성 행차의 의미를 부각시키게 됨.- 순조 이후 대한 제국까지 문집, 족보, 경서 및 각종 전기 등 각 계층들이 필요로 하는 책을 찍어 널리 배급함.- 고종 연간에 간행된 『지방제도개정』, 『공법회통』, 『한청통상조약』 등 근대적 서적 에도 정리자가 사용됨.6. 정리자의 의의(1)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글자- 조선시대에는 금속활자가 만들기가 어려우면서도 재료값도 많이 들어 민간에서 쉽게 만들 수 없음 ->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2) 정리자가 가지고 있는 왕권의 상징성- 정조가 왕실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기획한 을묘원행을 기념하는 의궤를 인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리자.- 처음으로 의궤에다 금속활자로 간행. 이전의 의궤는 필사본. 이는 의궤를 널리 보급하겠다 는 것으로 국왕의 위엄을 널리 알리겠다는 뜻.
    인문/어학| 2019.09.04| 3페이지| 1,000원| 조회(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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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학사상의 특성 평가A+최고예요
    동학사상의 특성동학의 기본요소 천심즉인심 ( 天心卽人心 ) “ 하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다 . 오심즉여심 ( 吾心卽汝心 ) “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 ” 나와 너 , 하늘과 사람과의 관계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다는 것 . 이것을 통해 동학은 당시의 사회와는 다른 평등적인 것이며 당시 성리학과는 다른 일원론적 세계관을 지닌다 .동학사상의 특성 첫번째 – 시천주 사상 시천주 ( 侍天主 ) : ‘ 천주를 모신다 ’ 라는 의미 동학에서 말하는 천주는 서양의 천주교의 천주와는 달리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이해되며 우주만물을 창조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동학의 21 자 주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단어 이다 . “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 (“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 ( 기운에 이르러 지금에 이르렀고 원컨데 크게 내립니다 . 천주를 모심으로 조화가 정해지며 영원히 세상을 잊지 못함이 온갖 일을 알게 됩니다 )” 시천주는 인간의 마음 안에 천주의 기운을 잡아 그 기운을 밖으로 보내어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 .시천주 사상을 통해 이후 사람 섬기기를 하늘과 같게 하는 ‘ 사인여천 ’( 事人如天 ) 사상과 사람이 곧 하늘 이라는 ‘ 인내천 ’( 人乃天 )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 동학사상의 특성 첫번째 – 시천주 사상 천주와 인간의 하나됨을 통하여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천주를 내면화하고 , 이를 통해 신분간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면서 인간평등의 이념 이 되었다 .동학사상의 특성 두번째 – 후천개벽 사상 후천 = 동학의 이상적 세계 동학에서는 선천 과 후천 이라는 것을 나누어 비교하였다 선천 말세의 세상선천 후천 절대적 유일신 존재 신의 창조물인 인간 질병이 있는 사회 수직이 있는 관계 = 악질이 가득 찬 사회에 모든 문화가 수직적으로 불평등 구조로 차별화되어있는 혼란적 상태 ( 당시 조선 사회 ) 시천주 지상천국 군자공동체 수평적 사회 = 평등하고 옛날 태평성대를 누리는 새 시대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목적 ( 이상향 ) 동학사상의 특성 두번째 – 후천개벽 사상동학에서는 후천을 중요시하며 , 선천으로부터 후천으로 가는 개벽 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 동학사상의 특성 두번째 – 후천개벽 사상 개벽의 주체는 인간 이며 , 시천주를 하면서 , 끊임없이 천주를 모시는 세계 를 만들어가야한다고 주장 .후천으로 가기 위한 여러 가지 수행을 하였는데 마음으로 하는 주문수행 과 수심정기 라는 종교체험을 함 . 동학사상의 특성 두번째 – 후천개벽 사상 이를 통해 천주의 사람이 되어 천주를 깨달으면서 이 땅에 지상천국 을 실현시키는 것을 궁극적 목표를 두었다 . = 현실지향적 후천개벽 사상은 동학의 추구한 이상세계의 변화에 대한 말을 듣고 당시 민중의 갈망을 고취시켰다 .동학사상의 특성 세 번째 – 반외세적 사상 동학에서는 현재 선천의 시대를 통해 선천의 최후는 혼란에 가득차고 사사로운 마음을 위한 각자위심 ( 各自爲心 ) 의 시대 라고 주장 . 위의 두 사상 ( 시천주 , 후천개벽 ) 을 통해 공동체주의를 표방하는 동학으로써 서양세력은 이기주의에 기초한 각자위심을 증폭 시키고 있다고 하여 반대 .= 사회적인 현실을 현실적 측면 에 맞게 공동체적 의식 으로 풀어나가야 한다는 동학의 특성 동학사상의 특성 세 번째 – 반외세적 사상 이러한 각자위심의 증폭을 막기 위해 동학을 이용하여 모두가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한 마음으로 되는 동귀일체의 시대 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학사상의 특성 세 번째 – 반외세적 사상 사상적 특징을 기반으로 동학은 세 가지의 목표를 내세웠다 . 동학은 서양세계의 제국주의적 특성을 선천과 같은 세계로 인식하여 그 인간 사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혁명성 을 가지고 있다 . 첫째는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는 ‘ 보국안민 ( 輔國安民 ) ’이 세 가지 목표로 당시의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 할 수 있었으며 , 이러한 적극적 참여는 3 남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 되어졌고 이후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 되어졌다 . 동학사상의 특성 세 번째 – 반외세적 사상 세 번째는 온 세상에 덕을 베푼다는 ‘ 포덕천하 ( 布德天下 ) ’ 를 주장했다 . 두 번째는 널리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제하라는 ‘ 광제창생 ( 廣濟蒼生 )’ 을이정희 , 「동학의 선후천관 연구 』, 『 동학학보 』, 제 23 권 0 호 , 2011, pp.53~99. 정용수 , 「동학의 인간중심 사상」 , 『 동학학보 』, 제 38 권 0 호 , 동학학회 , 2016, pp.151~174. 조극훈 , 「동학 개벽사상의 역사철학적 의미」 , 『 동학학보 』, 제 27 권 0 호 , 동학학회 , 2013, pp.63~91. 참고문헌{nameOfApplication=Show}
    사회과학| 2019.09.04| 13페이지| 1,500원| 조회(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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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잔티움 초기 전성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비잔티움 초기의 전성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 목차Ⅰ. 서론Ⅱ. 본론(1)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생애와 제국의 영토(2)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조력자(3) 이 시기의 문화(4) 그의 사후에 일어난 비잔티움 세계Ⅲ. 결론Ⅰ. 서론330년 콘스탄티누스 1세 때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발칸 반도 부근의 도시인 비잔티움이라는 도시로 옮기게 되고 이 도시를 콘스탄티노플이라 개명하고 도시를 세웠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에 동·서로마가 갈라지게 되었으며,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망하면서 동로마제국만 남게 되었다. 동로마제국은 유일한 로마 황제이자 크리스트 교 세계의 지배자로 행세하였으며, 서로마 각지의 게르만 왕국들도 겉으로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문화적·정치적 능력이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6세기 전반 서부 지중해 세계는 로마의 통치 질서가 와해되고 있었던 반면 동부 지중해 세계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로마의 국가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뚜렷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의 시기였다. 로마 시대와 다른 독창적인 비잔티움 시대를 만드는 요소가 그의 통치시대의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비잔티움 시대 초기의 전성기를 누렸던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관련된 것들을 서술할 것이다. 우선 그의 생애를 조사할 것이며, 그가 누렸던 전성기였던 영토, 그를 도와주었던 조력자, 다양한 문화, 마지막으로 그의 말년과 사후 비잔티움 세계를 간단히 서술하여 이 글을 마칠 것이다.Ⅱ. 본론(1)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생애와 영토 확장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482년에 사르디카의 한 유적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농민으로 살고 있었다가 그의 삼촌인 유스티누스 1세의 영향으로 그의 양자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후 그의 상속자가 되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유스티누스 1세가 노령이 되어 왕권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자, 527년에 유스티니아누스에게 물려줌으로써 그는 황제에 자리에 오르게 된다.제위한 후 곧바로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여 532년에 영구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페르시아는 이 조약을 깨고 또 다시 쳐들어왔으나 제국은 잘 막았으나 페르시아와의 배상금을 지불해야된다는 조건으로 평화협정을 다시 맺어지게 되었다. 그 다음 그가 벌인 전쟁은 반달족이 지배하는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이었다. 이 싸움에서 534년 반달왕국을 완전히 항복하게 만들었다. 이어서 시칠리아, 사르데냐, 코르시카 등 지중해의 여러 섬들을 다시 제국의 지배로 만들었다. 이듬해 이탈리아를 정복하였다. 마지막으로 히스파니아 남쪽 부근을 점령하여 비잔티움 시대는 옛 로마 제국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540년대에 비잔티움 제국에 일어난 흑사병은 많은 제국민의 생명과 사기를 잃게 만들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자신도 이 병에 걸렸지만 살아남게 된다. 재위 말년에는 정치적인 것보다는 종교적인 측면으로 접근을 많이 하였으며, 이처럼 지칠줄 모르고 자신의 목표를 이루던 황제는 565년 그는 73살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하였다.(2) 그의 조력자 테오도라 황후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훌륭한 조력자라고 하면 그의 아내인 테오도라이다. 그녀의 출생은 서커스단에서 일하고 있는 곰 사육사라는 아주 천한 직업의 딸로 어렸을 때부터 상당한 미모로 비잔티움 제국인들의 사적인 자리나 공적인 자리에서 즐거움을 주도록 했다. 이 시기의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의 『비밀 역사』 라는 책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하기 전에 무용수와 창녀를 했던 기록이 남는다.성인이 되어 콘스탄티노플로 향한 그녀는 유스티니아누스를 만나게 되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당시에 원로원의 지위에 있었지만 로마의 법 상 원로원 의원이 미천한 출신이거나 무대에서 일을 하여 불명예스러운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많은 친족들이 테오도라와의 결혼을 반대했지만 그는 법을 바꾸어 ‘명예를 주는 회개’를 하면 어떤 불행한 여인들도 저명한 사람과 합법적 결혼을 할수 있게 개정을 했다. 이 법을 발표한 이후에 그녀와의 결혼을 했고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자연스럽게 황후가 되었다.532년 마차 경주로 인하여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유스티니아누스는 수도에서 도망치려 할 참이었는데, 도망치지 말라고 권유했던 사람이 테오도라였다. 이로써, 반란은 무사히 진압되었고 그 영향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대 세력에게 휘둘리지 않게 되었으며, 무사히 국정을 잘 처리했다고 한다.테오도라는 자신이 과거에 겪었던 비슷한 사람들 500명을 모아 안전하고 거룩한 안식처로 옮겨 유폐시켰는데 일부는 반대하였지만 대부분 그녀의 혜택으로 구원받은 여인들은 감사의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한지 24년째 548년 병에 걸려서 사망하고 만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의 죽음에 많이 애통했다고 한다.(3) 문화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 때에 비잔티움 제국의 법전을 새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제국의 법전은 선대 황제들이 법전을 만들려고 하였지만 그들의 칙령을 모으는 것으로 끝이 났다. 정복을 통하여 땅이 넓어짐에 따라 당시에 혼란했던 여러 법률을 하나로 통일하기에 이르렀고 이 법전을 ‘로마법 법전’이라고 칭하였다. 제국 내에 있는 여러 법전들이 보편적으로 되어가면서 법학 교육을 확립시켰고 이를 통해 황제의 권위를 높여지게 되었다.또한 그는 황제의 위용이 수도에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하여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공공 토목공사를 통해 화려한 건축물을 만들게 했다. 우리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잘 보여주는 모자이크가 나타내주는 성당인 성 비탈레 성당이 이 시기에 완공되었다. 또한 오래 전에 생겼던 여러 반란이나 전쟁으로 인해 무너져서 잔해로만 남았던 하기아 소피아 같은 큰 성당을 다시 복원시켜놓았다.그가 비잔티움의 전성기를 누릴수 있었던 원인은 상업의 발달이 영향이 컸다.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관문 역할을 하여 당시 서유럽과의 경제 측면에서 크게 차이가 나게 되었다. 특히 중국에서 들여온 비단이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한 가지 문제점은 페르시아가 가로막고 있으며 페르시아와의 중간다리를 거치는 동안 엄청난 수수료를 물어야만 했기 때문에 직선으로 통과하지 못하더라도 우회하는 통로로 이동하여 교역을 취했다. 552년에는 직접 누에를 들여와서 비단을 직접 생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경제적으로 부유하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은 사치스러운 풍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4) 그의 말년과 사후에 일어난 비잔티움 세계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35년동안 통치를 했다. 앞서서 위에 간단하게 그의 말년에는 정치적인 것보다는 종교적인 것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됬다고 설명했다. 그가 사망하기 1년 전에는 예수의 인간적 성질은 신의 성질에 흡수되었다고 하는 ‘가현설’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 주장은 예수의 신성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으로 서유럽의 교회와 충돌이 빚기도 하였다.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였다. 그에게는 왕자가 없었고 공주 한명이 있었으나 어린 나리에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조카인 유스티누스 2세가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백성들은 새로운 황제의 즉위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이는 새로운 황제에 대한 기대감과 동시에 황제 자신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될 것이라는 반증적 의미를 보인다. 568년에 이탈리아 부근을 시작으로 롬바르드 족에게 영토를 잃게 되면서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점령한 땅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또한 페르시아의 재침략으로 인해 외부에서의 고통과 내부에서는 경제난으로 인한 민중들의 불만으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Ⅲ. 결론이처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35년간 통치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 초기에 전성기를 누렸다. 영토 확장을 통해 옛 로마시대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였으며,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들을 설치해 제국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또한, 동방과의 무역을 통한 얻은 물자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제국의 법을 정리하여 집대성시켰으며 이 법은 유럽 각지의 근대법의 토대가 되었다.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별칭은 ‘잠이 없는 황제’라고 할 만큼 열심히 일한 황제였다. 그 이유는 자신의 일이 곧 백성을 위한 길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업적으로 인해 높은 목표가 형성되어 그 다음 황제에게 전해져 일에 부담이 되어 쉽게 처리를 하지 못하여 큰 혼란이 빚어지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비잔티움 제국 초기 시기 전성기를 누리게 해주는 황제로써, 많은 업적을 달성하였기에 후대에 ‘대제’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는 천년의 역사로 이어가게 해주는 한 획을 긋게 되었다.강일휴, 유스티니아누스 역병 -실체 인식과 대응 영향-, 『역사와 담론』, 제68호, 호서사학회, 2013, p.301~331.최자영, 「정교(콘스탄티노플과 로마)와 동방 단성론간의 정치·사회적 갈등」, 『서양고대사연구』, 제33호, 2012, p97~138.
    사회과학| 2019.09.04| 5페이지| 1,000원| 조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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