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장. When? Now. 저는 지금까지 3년 동안 언어교환 어플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쭉 지우지 않고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을 사귀면 지체없이 어플을 지우고 그 친구들과의 소통에만 집중했습니다. 보통 6개월을 주기로 새로운 계정을 만들었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어플로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언어 공부를 하는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는데 왜 시중에는 그렇게 비싼 프로그램들이 잘 팔리는 것일까요? 그 가장 큰 이유는, ‘자발성’에 있습니다. 유료의 잘 숙련된 원어민들과 공부하는 프로그램의 경우, 내가 직접 질문을 준비하지 않아도, 단답으로 서투르게 대답하더라도, 그들이 내게 맞춰 질문을 해주고, 나의 답변을 친절히 고쳐줍니다. 한편, 외국인 친구의 경우, 그가 물어보는 답변에만 답을 하고, 단답으로, 의도치 않았지만, 성의 없어 보이게 답을 한다면, 언어 실력이 늘기는커녕 서로 감정만 상하고 끝이 날 것입니다. 또한 ‘언어교환’의 특성상, 그가 내게 언어를 가르쳐 준다면, 나 역시 시간을 내어 한국어를 가르쳐주어야 할 경우도 생길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인 ‘친구’에게는 오늘의 힘든 일에 대해 공유할 수 있고, 그는 그런 내게 인간적인 공감을 해줍니다. 관심사가 같은 친구와의 대화는 언제나 주제가 끊이지 않고, 어쩌면 서툰 언어 실력으로 밤을 새워 그것에 대해 토론을 벌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외국인 ‘친구’와의 언어교환은 그 어떤 공부방법보다도 ‘쌍방향적’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서화관 견학 보고서-강세황과 진주 강씨 5대 초상을 중심으로어렸을 때부터 자주 방문해왔기에 사는 곳과는 조금 멀지만 낯설지는 않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특별 전시뿐만 아니라 상설 전시까지도 매번 관람 후의 느낌이 다르기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미술사학과에 진학하고 나서는 이러한 장소성이 더더욱 두드러졌는데, ‘한국회화사’를 수강하며 관람한 ‘서화관’은 특히나 그랬다. 사실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면 1층의 역사관들을 보기 바빠 2층의 전시실은 둘러보듯 본 것이 전부였기에 서화관을 이렇게 꼼꼼히 관람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처음으로 2층의 전시실이 오히려 1층보다도 더 흥미롭고, 정체구간이 많은 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지식이 많아지다 보니 관람할 때의 시야가 넓어졌기 때문이었는데, 수업시간에 ppt 자료로 지나가듯 본 것이라 기억에 남지 않은 줄 알고 있었던 작품들도 전시관을 둘러보며 새록새록 기억이 떠올라 신기했다. 또한 수업시간에 자세히 다루지 않았던 것들이나 아예 다루지 않았던 것들이 억지로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머리에 내려앉는 듯한 묘한 기분마저 들었다.이와 같은 기분 좋은 경험은 전시해설을 들을 때에도 계속 되었다. 평소 ‘박물관/미술관을 관람할 때, 한 번 이상의 전시해설을 듣는다’는 나만의 법칙을 지키며 관람하는데, 솔직히 말해 매번 전시해설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전시해설 특성상 간간히 섞여 들어있는 전문 용어들이 이해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물론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나서야 그 전문 용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심화적인 내용이 아닌 기초적인 부분에서의 기본 단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이에 이번 서화관에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쌓인 상태에서 전시해설을 들으니 용어에 대한 이해의 막힘이 없어 마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듣듯이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이렇게 박물관을 생각보다 재밌게 관람하다보니 어떤 작품을 골라 과제를 진신문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서화관에서 열리는 이 전시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고, 여타 많은 신문사에서도 앞 다투어 같은 주제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신문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국립중앙 박물관은 2013년 강세황 특별전에서 강현, 강세황, 강이오 초상을 한데 선보인 바 있다. 이후 강인 초상을 지난해 9월 경매에서 사들였고, 지난해 12월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이 미국 경매에서 낙찰 받은 강노 초상을 박물관에 기증해 5대 초상화 컬렉션이 완성됐다.‘강노 초상’은 국외재단이 국외소재 문화재들의 유통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 국외재단은 온라인 경매시장을 상시적으로 사전 점검하다가 지난 10월 18일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Savannah)에 있는 에버러드 경매·감정소에 본 작품이 출품된 사실을 확인했고 그림의 가치가 높아 국내로 환수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 구매를 추진했다. 국외재단은 입찰 참여 전 문화재적 가치와 진위 여부 등을 확인했고 지난 10월 23일 문화재청 긴급매입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온라인 경매에 참여해 같은 달 27일 초상화를 낙찰 받았다.표암 강세황의 증손자인 강노를 그린 ‘강노 초상’이 공개되면서 강세황의 부친인 강현을 시작으로 강세황, 강세황의 장남인 강인, 강세황의 손자(다섯째 아들의 차남)인 강이오, 강세황의 증손자(넷째 아들의 손자)인 강노까지 진주 강씨 백각공파 5대의 초상화 작품이 모두 중앙박물관에 모였다. 조선 후기 한 명문가 집안의 5대에 걸친 초상화 5점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5대에 걸친 초상이 한곳에 모인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어 학계, 특히 미술사학계에서는 아주 드라마틱한 사건으로 여긴다.”고 밝혔다. 150여년에 걸쳐 세대별로 그려진 초상화들은 초상화 변천과정을 한눈에 보여줘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다. 나아가 조선시대 초상화는 극사실적이란 점에서 복식사는 물론 골상학, 인물 연구 등에도 좋은 자료라고 학계는 평가했다.한마디로 말해, ‘쉽게 볼 수 없는’ 전시라는 것이 요점이다.강민첨부터 강현, 강세황, 강인, 강이오, 그리고 강노를 각각 화제로 하고 있고, 그 중 강세황은 초상이 3점, 자화상이 1점 전시되어 총 9점을 전시하고 있다. 강세황의 집안 진주강씨 가문은 삼대가 나란히 기로소에 들어간 명문가로서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로 불리고 있다. 이 때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70세 이상인 관료들만 입소할 수 있는 ‘국가 원로회’의 개념으로, 매우 힘든 입소조건이었기에 가문 중 한 명이라도 기로소에 들어간 자가 있으면 명문가라고 칭할 정도였다. 기로소에 입소하게 되면 임금이 특별히 연회를 베풀어주기도 했으니 그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는 알만하다. 그런데 그 들어가기 힘들다는 기로소를 할아버지 강백년과 아버지 강현에 이어 강세황까지 삼대가 연속으로 들어갔으니 굉장한 명문가인 것이다.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진주강씨 가문 5대 초상에서 명문가의 자취를 하나하나 짚어보도록 하겠다.가장 먼저 살펴볼 인물은 진주강씨 은열공파의 시조인 강민첨()이다. 조사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강민첨은 ‘시조’이기 때문에 진주 강씨 5대의 초상에 그의 초상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한다. 박물관 설명문에 따르면, 강민첨은 고려 때 문신이자 장군으로, 1018년 거란의 침입 때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고려 문종 때 공신각에 초상이 걸렸다고 한다. 이 초상은 경상우병사 이연필이 진주에 있던 원본을 화원 박춘빈에게 옮겨 그리게 하여 강원도 회양 관아로 보낸 것이며, 당시 회양부사로 부임한 아들 강인과 함께 지내고 있던 강세황이 이 작품의 모사에 관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강민첨의 초상은 당시 고려의 복식문화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는데, 관복차림으로 좌우로 길게 튀어나온 각이 달린 복두를 턱까지 내려오는 홍색 끈을 이용해 리본 형태로 묶어 고정시킨 강민첨의 모습에서 고려 관료의 복식문화를 상상해볼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대부분의 초상에서는 볼 수 없는 ‘손’이 등장하여 홀을 쥐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며, 보통 좌안을 강조하는 초상에 비해 우안을 면, 이 작품은 손을 내놓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손을 소매에 넣은 채 공수 자세를 한 좌안칠분면의 초상이다. 큰 흉배와 발밑의 화문석이 깔린 단이 18세기 전반의 초상임을 드러내는 듯하다.박물관 설명문에 의하면, 쌍학흉배와 코뿔소 뿔 띠돈을 붙인 서각대는 1품 당상관의 차림이라고 한다. 또한 얼굴의 골상과 주름을 선으로 표현하고 약간의 음영을 곁들였으며, 코끝과 뺨에는 볼그스레한 노인의 피부색을 잘 살린 초상이라고 기술하고 있다.이 전시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 강세황의 차례이다. 네 점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가장 화려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 이명기의 이다. 조선 후기의 작품 답게 바닥에는 화문석이 깔려 있으며, 흉배가 크게 그려져 있다. 다른 초상화와 비교하였을 때 눈에 띄게 섬세하고,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모습이 특징적이라서, 이 앞에 서서 나도 모르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한 그림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또한 다른 초상화에선 찾아볼 수 없는 ‘손’이 등장하여 강세황의 개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그림은 이 나오고 난 후에 화사 이명기에 의해 그려졌는데, 이에 대해 전시 해설 선생님께서 “전문적인 화가도 아닌 사람이 그린 자화상이 이미 잘 나와 있는 상태에서, 자신보다 두 배는 더 살았을 그의 초상화를 청년 화사가 그리려니 얼마나 떨리고 긴장되었을까”라고 덧붙이셨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청년 이명기가 본 강세황의 위압감,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더욱 와 닿았다. 설명문에는 “평생의 연륜이 아로새겨진 듯한 주름살, 굳은 정신이 드러나는 눈동자 표현은 인물의 내면을 전달하는 ‘전신’의 경지를 보여준다.”고 적혀있었는데, 정말 그 전신이 오롯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자신의 모습을 직접 그린 은 조선의 시서화 삼절 중에서도 으뜸이었던 강세황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앞서 화사 이명기가 그린 초상에 견주어 사실성이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그림에는 그의 자화자찬이 적 그의 평상복에 관모 차림에서 그의 뜻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강세황은 자찬을 써 자신이 현재의 처지와 내면의 지향점으로 인해 갈등하고 있으며 자기 정체성의 모순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차림새를 이용한 것이다. 해학적이면서도 골계미가 넘치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강세황의 초상을 보고, 그의 장남인 강인()의 초상을 보면 부자지간이 아니라 동일 인물의 연령대가 다른 초상으로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같은 한국인인 나도 그러한데, 외국인들이 보면 같은 인물이 아님에 의문이 들 만큼 닮은 모습이다. 그의 복식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5대 초상 중 유일하게 사모의 날개가 무문(無紋)에 한 겹임을 발견했는데, 박물관 설명문에 따르면 당시의 강인은 당화관 중 5품 교리로 재직 중이었다고 한다. 즉, 비교적 신분이 낮은 시기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으로, 이는 단학흉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도드라진 광대뼈와 작은 눈, 튀어나온 입, 음영이 살아 있는 관복이 특징적으로 잘 그려진 작품이다.개인적으로 강세황의 초상화 다음으로 가장 전신(傳神)이 잘 느껴졌던 은 강세황의 다섯째 아들인 강신의 아들 즉, 강세황의 손자인 강이오의 초상이다. 조선시대의 보기 드문 정면 초상화라 그런지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뭔지 모를 기에 눌려 눈 맞추기를 포기하게 된다. 박물관 설명문을 보니 이 초상을 그린 이재관은 도화서 화원 중에서도 인물화에 능해 어진도사에도 참여한 바가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이재관은 초상의 주인인 강이오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알고 나니 얼굴의 굴곡이 잘 드러나지 않아 그리기 힘든 ‘정면’ 상임에도 이 초상에 주인공 성품 및 개성이 잘 드러날 수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지런한 수염과 부드러운 눈매, 잘 다물어진 입술 등 정제된 인물의 얼굴을 통해 성격을 드러낸 강이오 초상은 당대 전통과 새로운 시각을 조화시킨 초상화로 손꼽힌다고 한다.2017년 국외소재 문화재재단이 미국에서 구입한 후 국립 중앙박물관에 이관함으로써 진주 강.
조선왕조실록?기록과?영화?의?거리-패주 연산군의 삶을 중심으로-♠서론영화 에서 보이는 연산군의 모습은 그야말로 폭군이 따로 없다. 그는 왕으로서 갖춰야할 교양도 근엄도 갖추지 않고 그저 어머니의 복수와 여색만 좇는 인물일 뿐이다. 그러한 그의 모습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도 별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거나 자신을 비판하는 충신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색을 즐기며 천한 광대를 곁에 두고 노는 왕이 연산군이었다,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연산군의 이 모습들만이 진실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왕이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옛말에 ‘하늘이 내리신’ 왕이라지만, 천년이 넘는 왕조에서 왕이 될 아이의 천성이 올곧게만 태어나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그것까지 감안하더라도, 아무렴 연산군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무능력한 왕일뿐이었을까? 정말 그는 태생부터 폭군이었을까? 그런 의문을 갖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영화 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았다.♠본론우선 영화와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가장 큰 차이점 하나를 제외하곤 거의 기록을 영상화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다만 그 큰 차이점이 영화를 다큐멘터리의 재현영상이 아닌 각색물이 될 수 있게 했다. 그 중요한 차이점이 바로 ‘광대’의 여부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나례’가 있어 정치의 잘잘못 등을 논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연산군일기를 보면 임금의 잘잘못을 논하는 사례에 있어서는 그 자에게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영화에선 오히려 정치를 풍자하는 광대들의 연극을 즐겼으며 설령 그 내용이 왕을 풍자한다고 해도 웃으며 넘기는 장면들이 숱하게 나온다. 물론 기록에서도 왕이 술에 취하면 기어이 처용무를 추기도 했다고 나오지만, 영화에서처럼 자신을 풍자하는 내용의 나례에서 춤을 추진 않았다. 이에 반해 영화 속 광대는 왕 앞에서 왕과 중신들, 그리고 폐비윤씨 사건을 주제로 판을 벌이며 영화를 전개해나간다. 이러한 차이점은 영화에서 연산군을 기록보다도 더 무능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광대들이 왕과 관련한 주요 사건들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은 영화 속 연산군이 광대들의 풍자내용으로써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광대들은 자신들이 꼭두각시도 아니고 내시 김초선이 시키는 내용을 연극해야하느냐고 불평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오히려 왕이 광대들의 꼭두각시, 아니 내시 김초선의 꼭두각시로써 광대들을 보고,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이렇듯 너무도 무능한 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여색만을 밝히다가 중조반정으로 자신의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그 후 연산군의 폭정에 대한 내용이 기록으로 남겨져 후대 사람들에게도 무능하고 악랄한 사이코패스라는 평을 받으며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것이다.비교적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칭해지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니만큼 연산군에 대한 기록이 거짓이라고 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기록들에서 보이는 연산군, 한 개인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일단 기록 속 연산군이 폭군임은 확실하다. 왕의 권력을 손에 쥐고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를 조금이나마 동정의 눈길로 이해해 볼 수 있다. - 그저 놀기 좋아하던 어린 아이일 뿐인 그는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는 것을 보았고,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서적인 불안 속에서 자라 왕위에 오른다. 아직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풀지 못한 억울함이 남아 있는데, 어머니의 죽음을 찬성한 자들과 한자리에서 국정을 논해야 하는 상황이 계속된다. 그 와중에 국정도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고, 계속해서 아버지와 자신을 비교하는 신하들이 짜증스럽다. 이에 어머니를 대신할, 자신의 채워지지 않는 욕구를 해소할 무언가를 찾다보니 장녹수가 눈에 들어왔고, 그녀는 자신에게 어머니행세를 하는 등의 무례한 태도를 보이지만 자신의 욕구를 모두 해소시켜주는 유일한 자였다. - 이런 식으로 연산군을 이해해보니 연산군이 악랄하다기 보단 가엾게 보인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그래도 만약에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윤씨가 그렇게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폐비윤씨의 심성이 곱고 너그러워 그 밑에서 연산군이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왔더라면 우리 역사 속에서 연산군은 성종과 중종 가운데 왕의 이름으로 올라와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요즘 소설을 읽다보면 흔히 나오는 주제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복수’이다. 같은 맥락으로, 연산군의 폭정을 그저 단편적으로 압축해서 보면 그의 폭정의 끝은 어린 시절 사랑하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내적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여색을 밝히고, 어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에 영화 에선 그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연산군을 부정적인 인물로 희화화하더라도 그를 무조건적으로 나쁘게만 볼 순 없게 한다. 현대에서 봤을 때 그는 정신적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산군에게 주어진 ‘왕의 자리’는 그저 복수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고 이에 그는 참혹한 결말을 맞게 된다.
에서 백제문화 찾아내기부조1. 서론1) 주제 선택 계기수업시간에 를 다룰 때에 교수님께서는 굉장히 흥미로운 부조라고 말씀하시며 수미산의 구성과 미륵하생신앙 및 미륵삼회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해주셨다. 그런데 나는 부끄럽게도‘수미산’을 그 때 처음 들어봤으며, 미륵하생신앙과 미륵삼회에 대해서도 수박 겉핥기식의 지식만을 알고 있었다. 이에 발표를 준비하며 배우고, 부조에 숨겨진 다른 특징들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 를 발표주제로 선택하였다.2) 에 대한 간략한 설명는 1954년 사천성 성도시만불사지에서 출토되어 현재 사천박물원(四川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는, 높이 62.9cm, 너비58.5cm의 붉은 모래(?砂石)재질의 비석이다. 제작 시기는 양나라 6세기로 추정되며, 앞면과 뒷면, 그리고 측면 모두에 조각이 되어 있다. 앞면 부조에는 수미산과 그 위 화개(왕후장상의 수레 위에 씌우는 일산)가 위치해 있는데, 가운데가 우뚝 솟은 버섯모양으로 표현되어 있다. 수미산 아래는 기형적인 모양에 용이 둘러져있는 모습이다. 정면 하단부는 높은 탑이 둥근 모양으로 궁형을 이루고 있으며, 각종 보석들을 수놓아 만든 영락이 둘러 새겨져 있다. 수미산의 그 산형은 백제 금동대향로의 산형과 닮아 있어 그 영향관계와 수미산형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표현방식을 유추할 수 있다. 측면의 각 네 개의 공간(좌측면 1, 2, 3, 4)에는 궁중 고사가 조각되어 있다. 뒷면 부조는 크게 세 무더기의 군중들이 있는 ‘미륵삼회’의 장면과 농사를 짓는 모습의 1종7수(1種7收) 장면, 노인입묘(老人入墓)의 장면이 함께 나타나 있다. 뒷면인 는 현존하는 가장 이른 가운데 하나로써 백제의 미륵사 창건 시 삼원병립식 가람배치의 계획을 사상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불교도상적인 면에서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한다.2. 본론1) 앞면 ? 수미산도부조① 수미산과 그 구성수미산은 불교론적 우주론에 입거한 산으로, 불국토의 이상향을 표방한다. 수미산의 형성은 우주창조와 관련되며, 태초에 바람과 물 그리고 금을 상징하는 풍주는 인도 아대륙의 형태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것이 사는 대륙이라고 한다. 이 대륙 지하에는 지옥, 아귀의 세계가 있고, 사주의 밖, 금륜의 외주를 철위산(Cakrav?daparvata)이 둘러싼다. 수미산의 상반부는 제석천(인드라) 등의 천(신)이 사는 세계로, 그 상공에는 몇 층의 신의 세계가 겹쳐 있다. 상반부의 중턱에는 사천왕이 거주하는 사왕천이 있고, 그 정상에는 제석천이 사는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우주관을 속칭 수미산 우주관이라고 한다.② 수미산의 형태적 특징과 의 수미산형 비교수미산의 형태적 특징과 관련해서, 불교경전인『루탄경』계통에서는 정방형으로 된 수미산정의 한 변 길이가 8만 유순이라고 되어 있으나 산의 중간이나 아래의 크기 및 둘레에 대한 정확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산의 형태와 관련해서는 ‘아래쪽이 위쪽보다 좁고 중간에 굴곡이 없다’는 기록이 있다. 즉 수미산은 정상의 한 변이 8만 유순의 정사각형으로 된 ‘역 사다리꼴’과 같은 형태라는 말이다. 인도의 천상세계에서는 신의 위계에 의해 위로 올라갈수록 높이와 면적이 증대하는데, 이는 신의 위계가 높을수록 더 크고 수명이 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 의거해 역 사다리꼴의 불안정한 산형이 제시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산의 아래쪽 변과 관련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어서 『루탄경』계통의 수미산 형태는 역 사다리꼴 구조의 상방하방과 상방하원 중 하나라는 판단이 도출된다.에서의 수미산의 형태는 마치 버섯이나 나무 한 그루처럼, 용이 둘러져 있는 기형적인 모양이 불룩 솟아나와 수미산을 받치고 있다. 앞서 살펴봤던 수미산의 형태적 특징인 ‘역 사다리꼴’ 구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래에 비해 위가 비대한 모습인데, 이러한 수미산의 형태는 운강석굴 제 10굴의 수미산 부조와 조선시대 의 수미산 그림 부분을 보아도 유사함을 알 수 있다.[좌-운강석굴 제 10굴의 수미산부조/우-조선시대 의 수미산 부분]이러한 수미산의 형태와 관련해서 눈 여겨볼만한 것은 수미산 아래를 감싸 돌고 있는 ‘용제 금동대향로’의 산형에 대한 수미산적 이해 및 작품과의 비교백제금동대향로는 사비시대 백제를 대표하는 최고의 금속공예품이다. 지금까지는 백제금동대향로의 산형을 박산이라는 신선사상과만 연결시켜 이해했으나 불교의 수미산일 개연성을 모색해볼 수 있다. 그 주장 근거는 첫째, 불교의 수미산과 박산이 중국 불교 안에서는 상호간의 영향관계에 의해 형태적인 유사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 둘째, 신선은 육체를 가진 존재이며 박산 역시 삶의 세계인데 향로의 출토장소가 능사라는 선왕의 추모사찰이라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점, 셋째, 향로에 불교의 상징인 세 겹으로 된 연잎이 묘사되어 있어, 불교적인 영향이 불명하게 확인된다는 점 등이 있다.이러한 근거로 보아 백제 금동대향로를 박산이 아닌 수미산으로 이해해보면, 백제 금동대향로에도 의 수미산의 형태와 비슷한 모습이 있어 당시 수미산형의 도상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좌-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우-]2) 뒷면 ? 미륵변상부조③ 미륵하생신앙미륵신앙이란 일종의 메시아 신앙으로, 도솔천(兜 率 天)에 올라가 천인(天 人)들에게 설법하고 있는 미륵보살이 석가모니불 입멸(入 滅) 후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용화수(龍 華 樹) 아래에서 세 차례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륵신앙은 미륵상생(彌 勒 上 生)신앙과 미륵하생(彌 勒 下 生)신앙으로 나뉘는데, 미륵상생신앙이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왕생하여 수행을 하는 내용이라면, 미륵하생신앙은 먼 장래에 미륵불이 출현하여 중생들을 3회에 걸친 용화법회(龍 華 法 會)로 모두 구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미륵하생경』에 의하면, 미륵은 석가모니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수행하다가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을 받고 목숨을 마친 후 도솔천에 태어나 수행 중이라고 한다. 그는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 화림원의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3회에 걸쳐 설법하는데, 그 설법으로 약 3백억 명의 중생이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생신앙’임을 알 수 있다.④ 부조 속 미륵삼회 모습 및 세부 분석현존하는 가장 이른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의 세부를 살펴보면, 중앙의 산 아래에 부처님이 설법을 하는 장면과 그 좌우의 설법의 장면들이 대칭되게 보이고 있어 미륵이 용화수 아래에서 세 번 설법한다는 ‘미륵삼회’의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세 구의 미륵불상과 법회에 참여한 권속들, 청중들 이렇게 세 그룹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중에 중앙 그룹이 가장 크고, 좌우의 그룹은 중앙보다 다소 작게 묘사되어 있다. 위쪽 중앙을 보면 불전이 묘사되어 있고 그 중앙에 교각(交脚)보살상이 조각되어 있어 이 장면은 도솔천상 미륵보살의 설법장면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미륵불의 세상에선 한번 씨를 뿌려 7번을 수확한다는 1종7수(1種7收)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노인들이 세상을 떠날 때는 스스로 동굴로 들어가면 되고 고통이 전혀 없다는 노인입묘(老人入墓)의 장면이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불설미륵대설불경』을 근거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가. 백제문화 ? - 백제 ‘익산 미륵사터’에 드러난 미륵하생신앙"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師 子 寺)에 가려고 용화산(龍 華 山, 현재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워주십시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하고 청하니 왕은 그것을 허락하였다.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로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존의 상을 모방해 만들고 전(殿)과 탑과 낭무(廊 ?)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서는 왕흥사(王 興 寺)라 하였다-라 하였다. 진평왕은 각종 공인(工 人)을 보내 역사를 도와주었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삼국사』에는 이 분을 법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서는 독녀(獨 女)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삼국유사』 「 하고 있는 것은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삼회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하생경(彌 勒 下 生 經)』의 내용을 구상화한 것이다. 이 때 3원병립식 가람은 중문, 탑, 금당이 하나의 원을 이루고 그 세 원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형식의 가람으로, 미륵신앙을 현실세계에 구현한 것 그 자체를 말한다.에서, 미륵의 설법을 듣는 세 그룹의 청중 중 중앙의 그룹이 좌우에 비해 유독 규모가 큰 점이 미륵사 창건 시 삼원병립식 가람배치와 유사하다. 이로써 양 대의 이 당시 미륵사 창건 시 사상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불교도상적인 면에서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려준다.3. 결론에서 보이는 수미산의 형태는『루탄경』계통의 역 사다리꼴 구조로써 위가 아래에 비해 비대하다. 수미산은 거대한 바다 속에 있는 섬과 같은 산으로써 그 아래를 수신의 상징이자 군왕의 상징인 용이 받치고 있다. 이와 같은 도상은 운강석굴 제 10굴의 수미산부조와 조선시대 의 수미산 부분에서도 보여 그 형태적인 도상을 당시 동아시아에서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백제 금동대향로의 산을 박산이 아닌 수미산으로 이해해보면, 백제 금동대향로에도 의 수미산의 형태와 비슷한 모습이 있어 당시 수미산형의 개념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 뒷면 에는 미륵 삼회 장면이 표현되어 있어 그 주제가 미륵신앙 중에서도 ‘미륵하생신앙’임을 알 수 있다. 세 구의 미륵불상과 법회에 참여한 권속들, 청중들 이렇게 세 그룹으로 표현되었고, 그 중에 중앙 그룹이 가장 크고, 좌우의 그룹은 중앙보다 다소 작게 묘사되어 있다. 이 때 중앙 그룹이 가장 큰 점이 백제 때 미륵사 창건 시 삼원병립식 가람배치를 할 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조의 세부를 보면, 1종7수(1種7收) 장면이나 노인입묘(老人入墓)의 장면이 세밀하게 나타나고 있어 『불설미륵대설불경』을 근거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는 부조이다.주제를 선택하고 나서는 막연히 앞, 뒷면으로 되어 있는 부조이고, 부조 자체가 빽빽이 조각되어 있어 조사했다.
단군신화와의 거리1.서론드라마 는 정확히 10년 전, 내가 10살 때 방영했던 드라마이다. 당시 역사인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던 난, 가 단군신화를 기반으로 한 드라마라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지금 보면 우스울 만큼 어색한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의 분장과 CG기술이 난무한 드라마를 그저 순수한 눈으로 멋있고, 재밌는 드라마라며 감상했었다. 학년이 올라가며 가 기억 속에서 잊혀갈 때쯤, 한국사 시간에 단군신화와 그 이면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배웠다. 2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쉬운 3점짜리 문제를 하나 더 맞히기 위해 ‘곰, 호랑이 ? 웅족, 호족’ 이렇게 기계적으로 외웠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더 알아보려 하지 않았고,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두었다.대학에 들어와 ‘단군신화’만을 주제로 하는 강의를 들으니, 그동안 부족했던 설명의 빈공간 사이사이를 채우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빈 공간들을 채우고 나서 본 는, 그것을 재밌게만 여겼던 ‘10살의 나’와 ‘현재의 나’와의 거리를 실감케 했다.2.본론2-1. 와 단군신화의 거리 ? 호족과 웅족고기(古記)에 적힌 단군신화에서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천왕은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주며 백 일간 햇빛을 보지 않고 쑥과 마늘만을 먹으라고 명한다. 이에 곰은 21일 만에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호랑이는 해내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여자의 몸이 된 곰은 천황과의 아이인 ‘단군왕검’을 낳았고, 이 단군왕검은 평양성에 도읍하여 조선을 세운다.이 신화의 이면을 살펴보자. 환웅의 ‘환’에는 크다, 하나다, 유일하다의 의미가 담겨 ‘태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환웅은 태양 토템족의 우두머리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곰과 호랑이는 웅족과 호족을 상징한다. 햇빛을 보지 말라고 명한 것은 자신들을 상징하는 햇빛을 보지 말라, 즉 자신들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쑥과 마늘만을 먹으라고 명한 것은 그들이 좋아하는 육식, 즉 좋아하는 것을 끊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종합해보면, 태양 토템족이 강력하게 권력을 갖고 다스리겠다는 의미이다. 웅족을 상징하는 곰만이 사람이 되는데 성공했으니, 웅족과 호족 중 웅족만이 태양 토템족과의 연합에 성공한 것이다. 또한, 웅녀와 천황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은 두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조선을 건립했기에 조선이 웅족과 태양 토템족 모두를 포괄하는 완전한 나라라는 의미이다.그러나 를 살펴보면 우선 호족과 웅족의 관계가 좋지 않다. 어디서 영감을 얻은 것인지 모를 ‘불’의 신녀 가진이 호족을 대표하여 불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있었고, 이를 보다 못한 환웅이 세상에 내려와 나라를 세운다. 이에 자신들의 권력이 휘청거리자 환웅의 백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호족에 맞서 웅족이 등장한다. 환웅은 웅족의 여전사인 새오를 지켜보다가 가진에게서 불의 힘을 빼앗아 새오에게 전달하고, 후에 새오와의 아이를 갖는다. 이들을 질투하며 화가 난 가진이 새오와 환웅의 아이를 빼앗아 죽이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분노한 새오가 흑주작이 되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자 어쩔 수 없이 환웅은 새오를 죽인다. 그리고 왕이 되지도, 환웅의 여인이 되지도 못한 가진도 자살한다.단군신화에는 서술되지 않았던 호족과 웅족의 불화부터, 호족의 우두머리가 가진 불을 다스리는 능력, 그리고 웅족과 호족의 우두머리의 죽음까지. 드라마에선 호족과 웅족에 관한 단군신화의 내용을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추가시켰다. 위 신화의 이면을 살펴볼 때 상징적인 의미를 담아 해석하듯 를 해석해보면 그 거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 - 호족이 신식 무기를 앞세워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다스리고 있을 때, 이주민족인 태양 토템족이 나타나 사람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끌어들인다. 이에 화가 난 호족이 태양 토템족을 공격하려 하자, 웅족이 태양토템족과 한 편이 되어 맞서 싸운다. 웅족과 태양 토템족은 화합하게 되고, 한 민족으로 유지하려 하지만 호족의 방해로 결국 세 민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 이런 식으로 해석 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단군신화를 창의적으로, 보다 긴장감 있게 연출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단군신화와 비슷한 듯 다르게 각색해 놓아 ‘이 드라마는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만을 알고 볼 경우 단군신화의 본 내용을 오해할 소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역사적 인식을 갖고 단군신화와 비교하며 드라마를 감상할 경우, 작가의 창의적인 시도를 눈여겨보며 재미를 느낄 수 있다.2-2. 와 단군신화의 거리 ? 환웅의 영향력단군신화에서 환웅은, 능력이 출중한 리더이다.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의 홍익인간 사상을 바탕으로 하늘에서 내려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삼백 육십 여 가지의 일을 주재하여 세상을 다스렸다. 눈여겨 볼만한 점은, 환웅이 기원전 신화인 단군신화에서 인권과 평등사상을 담고 있는 홍익인간 사상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했다는 점이다. 또한 환웅에게 자진하여 웅족과 호족이 찾아와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는 내용에선 신화 속 환웅이 얼마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그러나 를 보다 보면 환웅의 신으로서 능력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물론, 드라마에서도 환웅은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와서 세상을 다스렸고, 그가 내려온 뒤의 세상은 평화로웠다는 서술을 통해 그에게도 인간을 다스리는 뛰어난 능력이 있었단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본 환웅의 모습은 과연 그가 ‘신’으로서 영향력 있는 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호족이 불의 힘을 앞세워 환웅의 백성들을 공격할 때에도, 새오가 자신과의 아이를 낳을 때에도, 새오와 가진이 아이를 두고 절벽에서 싸울 때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환웅이 인간세계에 올 때 같이 온 풍백과 우사, 운사도 마찬가지로, 흑주작이 세상을 불바다로 만들었을 때 비로소 등장하여 급한 불을 끈 정도였다.단군신화를 각색할 때, 작가는 곰이나 호랑이를 웅족, 호족으로 바꿨다. 이에 비해 환웅은 ‘태양 토템족의 우두머리’가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신’으로 두고, 풍백, 우사, 운사 또한 신령스런 존재들로 남겨 두었는데, 이는 분명 신으로서 환웅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환웅은 항상 사건의 마지막에 자신의 신령스러움을 과시하듯 빛을 내며 등장하고, 사라졌다. 애초에 드라마에서 환웅이 호족의 칼과 불이 지배하는 세상을 보다 못해 내려왔다고 했으나, 자신의 백성들이 호족과 맞서 싸우며 죽는 걸 방치했다. 또한 호족의 우두머리인 가진이 다쳤을 때 오히려 그녀를 치료해주기까지 했다. 물론 후에 가진의 불의 능력을 빼앗아 봉인하긴 했으나, 그 봉인은 그가 하늘에서 내려오자마자 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호족들은 불의 힘을 앞세워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웅의 실망스런 영향력은 드라마를 감상하는 나를 너무 답답하게 했다.2-3. 와 단군신화의 거리 ? 등장인물의 감정에서 단군신화와 비교하여 가장 두드러지는 거리가 바로 이야기에 인간의 감정을 담아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은 웅녀의 원을 들어 주기 위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아들을 낳으니 그것이 단군왕검이다. 이 두 문장이 환웅과 웅녀 사이 단군왕검이 태어난 이야기의 전부이다. 그리고 너무하게도, 웅녀는 단군왕검이 태어난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신화 속에서 단군이 곰을 여자로 만들어(?) 준 것은 그저 자신의 뒤를 잇는 아이를 생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까지 했다.그러나 는 달랐다. 환웅은 웅족의 여전사인 새오를 지켜보다가 그녀의 가능성을 보고 불의 능력을 봉인한 홍옥을 선물했고, 그녀가 그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따로 시간을 내어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노을이 진 낭만적인 절벽에서, 환웅은 새오가 자신의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늘에 맹세하며 이마에 맹세의 키스를 서슴지 않는다. 현대인의 감정으로 보아도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로 단군왕검이 태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