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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와 왜의 교류를 통해 본 4-6세기 한일관계
    백제와 왜의 교류를 통해 본 4~6세기 한일관계목차Ⅰ. 머리말Ⅱ. 백제(百濟)와 왜(倭)의 교류Ⅲ. 맺음말Ⅳ. 참고문헌Ⅰ. 머리말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한 이웃 국가이기에 고대부터 현재까지 상호 간에 수많은 영향을 주고 받아오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의 백제(百濟)는 한반도에 존재했던 여타 다른 국가들보다 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많은 인적·물적 교류를 이어나갔다. 이러한 백제와 왜의 교류는 『日本書紀』와 『三國史記』 등의 문헌과 칠지도를 비롯하여 한반도와 일본 열도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다양한 유물과 고분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4~6세기는 한국과 일본 양국 모두 고대국가의 발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임나일본부설과 같이 일본학자들의 일방적이고 근거가 명확하지 않은 학설이 제기되며 한국과 일본 양국 사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시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이러한 4~6세기의 백제와 왜의 교류를 주요 사건과 유물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Ⅱ. 백제(百濟)와 왜(倭)의 교류1) 배경본문에서 다루는 4~6세기의 백제의 교류를 살펴보기 위하여 우선 4세기의 한국과 일본 양측의 상황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4세기 이후 나라 일대에서 성장한 야마토 정권은 주변의 집단을 흡수하면서 점차 일본 열도의 지배자로서 자리를 잡아간다. 이들은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상징물을 통해 왕권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였고, 지역의 호족들과의 연합, 연계를 통해 정치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더욱 확고한 지배체제를 확립하게 된다. 반면 한반도는 그동안 삼국 간의 완충지 역할을 했던 낙랑·대방군이 축출되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토전쟁이 본격화된다. 삼국의 전쟁은 격렬해져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군사적 외교가 전개되다가 급기야는 일본 열도의 야마토 정권에까지 연동되어 왕권과 국가의 존립을 위한 전쟁외교는 중단 없이 계속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제와 일본은 상호 간의 필요에 의해 교류를 이어나가며, 이러한 교류는 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 부흥운동까지 이어진다. 이를 통해 당시 백제와 왜의 교류가 단지 필요에 의한 교류로서 상호 이익에 그친 것이 아닌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 중 가장 깊은 우호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2) 칠지도칠지도는 길이 66.5cm에 양면에 금상감 기법으로 62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검으로 백제와 왜의 교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연구자들의 노력에 의해 검에 상감된 다수의 문자가 해석되었지만, 해독 불가능한 문자가 존재하여 연구자들 간에 제작시기와 의도를 둘러싼 해석에 있어 봉헌설, 하사설, 증여설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이 중 주로 일본학자들에 의하여 제시되는 학설이 봉헌설로 백제가 왜왕에게 칠지도를 헌상하였으며 왜가 백제보다 상국이였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서기 신공 52년 (372년)조에서 백제의 근초고왕이 사신을 통해 칠지도 1구와 칠자경 1면 및 각 종의 귀물을 바쳤다고 하는 기사를 근거로 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해왔다. 하지만 이는 칠지도에 상감된 명문의 해석을 보았을 때 일본학자들의 근거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칠지도의 앞면의 명문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七支刀□?百兵宜供供侯□□□□□作」는 ‘태□ 4년 □월 16일 병오정양에 백 번이나 단련된 철로 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공손한 후왕에게 줄 만하다. □□□□이 만들었다.’로 해석되며 뒷면의 「先世□?未有此刀百濟□世□奇生聖音故?倭王旨造傳□□世」는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일부러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로 해석된다. 이중 명문의 ‘공손한 후왕’과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라는 명문 등이 하행문서의 형식을 띄고 있어 백제왕이 주체가 되어 왜왕에게 하사하고 있음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칠지도는 왜왕은 일본열도의 수장으로서 그 지위를 인정받고, 백제의 경우 세력을 확장하며 혼란한 국제관계에서 그 위상을 펼치고자 했음을 드러내는 당시 일본과 백제의 관계와 의도를 잘 드러내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3) 무령왕무령왕(武寧王, 501~523)은 백제의 제25대 국왕으로 우리에게 무령왕릉을 통하여 널리 알려져 있는 백제의 왕으로, 백제와 왜의 교류를 문헌과 유물을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백제에서 천황에게 보낸 여인이 일본에 입궁하기 전에 정분이 나자 천황이 화형을 시켰다. 이에 개로왕이 소식을 듣고 동생 곤지를 왜국에 사신으로 보낼 때, 곤지의 청에 따라 자신의 임신한 부인을 곤지의 아내로 삼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가는 도중 임신한 부인이 산기를 느껴 지금의 사가현 북쪽에 있는 섬인 카카라노시마에 정박하여 아이를 낳았고, 아이의 이름을 시마키시(嶋君)라고 하였으며 이가 무령왕이 되었다. 이를 통해 무령왕릉 내부 지석 등에 표기된 무령왕의 다른 이름 '사마왕(斯麻王)'이 바로 嶋君에서 나온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무령왕의 목관 역시 일본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유물이다. 그의 목관은 금송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남부지방에서만 자라는 종이었다. 때문에, 그의 목관이 일본에서 수입된 목재를 이용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령왕은 출생과정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본서기의 기록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백제와 왜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자 인물로 파악할 수 있다.4) 백제의 선진문물 전파와 왜의 군사원조4세기 무렵 백제와 왜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래 일본은 백제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며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특히, 문자지식은 고대국가로의 발전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지표인데, 일본에서의 문자사용이 자료에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5세기 대로 「송서 왜국전」에 보이는 왜왕 무의 상표문을 시작으로 에다후나야마고분 출토 대도명, 이나리야마고분 출토 철검명 등이 5세기에서 6세기의 자료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대도명의 명문을 작성한 서자 장안(張安)이라는 인물은 백제계 이주민으로 추정되며 왜왕 무의 상표문 역시 백제 개로왕 대의 대북위 상표문과의 원전 인용 등의 유사점으로 볼 때 백제계 지식인이 작성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 된다. 또한 「수서 왜국전」의 “문자가 없고 단지 나무에 글을 새겨 새끼줄로 묶었다. 백제에서 불경을 얻고 불법을 존숭한 후에 처음으로 문자를 얻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왕인과 아직기로 대표되는 백제계 지식층 이주민의 영향으로 일본의 문자사용이 본격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6세기 백제와 왜의 교류는 어떠한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게이타이 천황(繼體天皇)이 즉위하는 507년부터 가야가 멸망하는 562년까지 왜는 고구려, 신라와는 각각 왕복 2회와 4회의 교류에 그쳤지만, 백제와는 39회에 달하는 교류가 이루어졌음이 일본서기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 교류를 통해 백제는 오경박사와 승려, 학자 등 전문지식인을 파견하여 선진문물을 왜에 전수하였고 이를 통하여 백제의 영향력을 왜에 강력하게 피력하였다. 특히, 일본의 불교문화에서 백제의 흔적을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538년 백제 성왕(聖王)이 왜에 불교를 공식적으로 전해주며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불교의 전파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552년에는 달솔 노리사치계 등을 보내어 석가불금동상(釋迦佛金銅像) 1구와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권을 전해주었다. 백제는 이러한 선진문물을 왜에 전해주며 대가로 군사원조를 받았다. 이는 백제가 당시 고구려와 계속되는 전쟁과 이로 인해 발전한 신라에 위협을 느꼈고, 고구려와 신라의 침입에 대한 대비와 추락된 위상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군사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왜의 경우에는 고대국가로의 정비과정에서 선진문물의 수용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가 사실상 단절된 상황에서 백제와의 교류를 통한 꾸준한 선진문물의 수용은 필수 불가결적인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백제와 왜의 활발한 교류는 대내외적 상황이 맞물리며 양국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인문/어학| 2021.10.15| 4페이지| 2,500원| 조회(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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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기> 서평
    서평『갈리아 전쟁기』는 로마사를 대표하는 인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직접 집필한 책이다. 그는 로마의 전쟁영웅이자 최고의 권력자였으며, 로마 공화정을 파괴한 인물이자 제정의 기틀을 다진 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직접 저술한 『갈리아 전쟁기』는 기원전 58년부터 기원전 51년까지의 갈리아 전쟁을 기록한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8권 중 7권은 카이사르가 직접 저술했으나 마지막 8권의 경우에는 그의 사후 친우이자 참모였던 아울루스 히르티우스가 저술했다. 각 권은 대체로 갈리아에서의 1년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는 간결하고 고상한 문체로 쓰여졌으며, 긴박한 전쟁의 상황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저서인 『내전기』는 갈리아 전쟁 이후 루비콘강을 도하 하며 시작되는 로마 내전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저서인 『갈리아 전쟁기』와 『내전기』는 현대인들이 카이사르라는 인물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체이며, 키케로의 저서와 함께 라틴 문학의 정수로써 지금까지 평가받고 있다.책의 제1권은 갈리아 지역에 대한 분류와 함께 시작되며 헬베티족과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쟁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는 갈리아 지역을 벨가이인, 아퀴타니인 그리고 스스로를 켈타이인으로 명명하는 갈리아인의 세 지역으로 구분하며, 헬베티족과의 첫 갈리아에서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헬베티족과의 전쟁은 그들의 게르만의 침략을 피하기 위한 이주로 시작되었다. 카이사르는 그들의 이동 경로를 미리 예측하고 움직여 승리한다. 이러한 헬베티족과의 전쟁에서 그의 전략적 우수함이 드러나며, 그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이유를 보여준다.전쟁 2년째의 내용을 기록한 2권에서는 벨가이인과의 전쟁에 대하여 주로 말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이 로마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조직한다는 정보를 듣고 그들과의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한다. 카이사르는 전쟁을 위한 준비가 끝나자 빠른 속도로 진군하였고, 로마군의 침공을 받은 레미족은 카이사르에게 협조하게 된다. 벨가이인들은 레미족이 카이사르에게 협력하자 그들의 영토를 공격하였으나 카이사르와 로마군은 그들을 복속시키고 갈리아를 일시적으로 평정하였다. 원로원은 이에 15일의 감사제를 선포하였는데 이는 카이사르 이전까지 아무도 누리지 못했던 영예였다.전쟁 3년차에 카이사르와 로마군은 알프스 산악부족과 해안 지대에 거주하던 베네티족과의 전쟁을 치루게 된다. 알프스 산악부족과의 전투는 로마인들의 안전한 산맥 통행을 이루기 위해 치루어 졌다. 카이사르는 갈바를 통해 알프스 부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패퇴시키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그들의 원래 목표인 완전한 점령에는 실패하였다. 카이사르는 전 갈리아를 정복하는 것에 성공하였다고 생각하여 겨울이 되자 이탈리아로 떠나려 했으나 베네티족과 그 세력들이 식량을 구하러 온 사신들을 인질로 잡아 로마에 대항하여 해전을 벌이게 된다. 로마군에게 해전은 익숙하지 않은 경험이었기에 그들은 불리한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그들은 새로운 전략을 통해 불리함을 극복하고 베네티족과 인근 해안 부족들에게 항복을 받아낸다. 이후 아직 복속되지 않은 모리니족과 전쟁을 벌이게 되나 그들의 도주와 악천후로 원정을 끝내게 된다.다음으로 4권에서는 게르만인 부족인 수에비족과 브리타니아 정복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인의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그들의 말을 믿지 않기로 결정한다. 때문에 그는 수에비족 사절의 말을 믿지 않았고 전투에 대비하여 그들을 무너뜨렸다. 카이사르는 억류한 게르만들이 위협을 느껴 로마군 진지에 머물기를 원하자 그들의 요청을 수락한다. 이를 통해 적군이 항복했다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카이사르의 포용력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카이사르는 게르만인들에게 로마군대의 용기와 능력을 보여주기 위하여 최초의 라인강 도하를 실시했고, 목적을 달성하자 다시 갈리아로 돌아온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에 그치지 않고 로마에 대항한 적들이 브리타니아의 지원을 받았기에 그들을 정복하고자 움직인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외부에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어 미지의 땅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정복에 성공하였고, 과감한 결단력의 결과물로 원로원에게서 20일 감사제라는 영광을 받는다.갈리아 전쟁의 5번째 해를 다룬 5권에서는 직전 해에 이어서 브리타니아 정복을 이어가며 암비오로스와의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이탈리아에 머무는 겨울 동안 군단을 책임지는 부장들에게 2차 브리타니아 원정을 위한 준비를 시킨다. 출정이 준비되었으나 트레베리족이 전쟁 준비를 한다는 정보를 듣고 그들을 찾아가 트레베리족의 두 지도자 중 한명인 전쟁을 준비한 인두티오마루스에게서 인질을 받아내고 다른 지도자인 킨케토릭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급하게 문제를 해결하고 원정을 떠난다. 원정은 비교적 순탄하였으나 폭풍으로 로마군의 배가 다수 파손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갈리아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겨울이 되자 각 군단을 여러 부족의 영토로 분산해 주둔시켰는데, 인두티오마루스의 선동으로 에부로네스족의 암비오로스가 사비누스와 그의 군단을 공격해 소수의 로마군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암비오로스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부족들을 선동하였고, 이에 네르비족의 총공격으로 로마군은 위기에 처했으나 가까스로 카이사르에게 원군을 요청해 위기를 극복한다. 카이사르는 위기를 넘기자 각 부족의 족장들을 불러들여 보복이 아닌 회유를 통해 다시 대부분의 갈리아를 복종시키고 인두티오마루스를 처단함으로서 다시 갈리아를 평정한다.책의 6권에서는 트레베리족의 반란과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풍습과 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트레베리족과 그의 동조하는 부족들은 인두티오마루스가 처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을 다시 일으킨다. 이에 카이사르는 트레베리족을 복속시키고 로마에 호의적이었던 킨케토릭스에 통치권을 맡긴다. 이후 다시 라인강을 도하하나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계속해서 반란을 진압해 에부로네스족의 영토를 파괴했으나 주동자인 암비오로스는 그의 행운으로 인해 놓치고 만다. 반란이 진압된 후 카이사르는 갈리아 회의를 소집해 이전과는 달리 반란의 지도자와 공모자들에게 포용이 아닌 강한 처벌을 내린다. 한편 6권에서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의 풍습을 소개하는데 전쟁 6년째가 되어서야 이 내용을 쓴 이유에 의문이 든다.카이사르가 직접 저술한 책의 마지막 권인 7권에서는 베르킨제토릭스의 주도하에 일어난 갈리아 대반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갈리아 족장들은 전해 반란의 지도자로 죽음을 맞은 아코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로마에 군사적 대항을 결정한다. 이에 카르누테스족이 앞장서 전쟁을 이끌기를 약속하고 케나붐을 공격해 로마시민들을 학살한다. 이 소문은 빠르게 갈리아 전역에 퍼져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 역시 대항에 참여한다. 베르킨게토릭스는 군대를 조직한 뒤 모든 곳으로 사절을 보내 충성을 요구하고 최고지휘권을 얻었다. 그 후 모든 부족에 인질과 병사를 요구하고 범죄와 동요를 일으킨 자의 처벌을 가혹하게 하는 폭압으로 군사를 모았다. 이러한 대반란의 소식을 이탈리아에서 들은 카이사르는 즉시 갈리아로 출발하며 모든 군단을 한 장소에 집결시킨다. 이후 그는 빠른 속도로 적군을 격파해 나가며 아바리쿰을 점령했으나, 게르고비아에서 크게 패배한다. 이로 인하여 그에게 꾸준히 우호적 태도를 보였던 하이두이족 역시 그를 완전히 배반하고 반란군에 가담하고 갈리아 전역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 다시 이어진 전투에서 그는 크게 승리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알레시아 요새로 도망간다. 베르킨게토릭스를 돕기 위해 갈리아군이 세 차례에 걸쳐 로마군을 공격하였으나 모두 로마군이 승리하고 베르킨게토릭스는 군량의 부족에 시달리며 결국 항복한다. 그는 이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서 사형되며 최후를 맞이한다. 비록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으나 역사에서 베르킨게토릭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의 최대 고비이자 갈리아의 영웅으로서 기록되며 프랑스인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독후감/창작| 2021.04.24| 3페이지| 2,000원| 조회(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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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란 무엇인가- 서평
    00과 학번 000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외교관, 정치학자였던 에드워드 카의 라는 책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름이 익숙한 책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책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특히, 이 책이 우리에게 부림사건을 다루었던 영화 의 재판과정에 불온서적 중 하나로 등장하며 더욱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다.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를 비롯한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붙여진 책들을 대표하고 있는 는 1장 ‘역사가와 그의 사실’부터 6장 ‘지평선의 확대’까지 6장의 파트를 통해서 역사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책의 1장에서 저자는 역사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이 처해 있는 시대적 위치를 반영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는 역사에 대한 역사가의 대답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핵심적인 말이다. 역사는 수많은 과거의 사실 중에 역사가의 선택을 통해 선택된 것만이 서술되는 것이다. 때문에, 어느 역사가의 시대에서 한 역사적 사실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 사실은 역사로서 서술될 수 없는 것이다. 반대로 이전 시대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아 선택받지 못한 역사적 사실이 현재에는 선택을 받아 역사로 서술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카는 많은 사람들이 루비콘 강을 건넜지만,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 것이 역사적 사실이 된 이유는 역사가들이 그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렇기에 카는 크로체의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는 말을 인용하며 역사가의 임무란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닌 사실에 대한 해석과 평가라고 말한다. 때문에 카는 역사가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주제나 자신이 제시하려는 해석과 어떤 의미에서이건 연관되어있는 모든 사실들을, 자신이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모든 사실들을 알려고 애써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 역사가를 연구하라고 말한다. 따라서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라고 답한다. 이 말은 지금도 많은 역사가들이 꾸준히 인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카의 말이 역사라는 학문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것이다.책의 2장에서 카는 사회와 개인이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저자는 역사가 역시 개인이기에 다른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현상으로서, 자신이 속해 있는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그 사회의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대변자라고 말한다. 때문에 카는 ‘역사가의 연구대상은 개인의 행동인가 아니면 사회의 힘의 작용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하나의 사회적인 과정이며 개인은 그 과정에 사회적 존재로서 참여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카는 콜링우드의 역사관에서 행동의 이면에 있는 생각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고, 그것을 개인의 생각이라고 가정해버린 것은 중대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따라서 카는 역사가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 행동의 배후에 있는 것을 연구하는 일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래서 카는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라고 우리에게 설명한다.책의 3장에서 카는 역사와 과학연구 간의 관계를 통해 역사는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그는 역사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이들의 생각을 5가지의 주장을 들며 반박한다. 첫 번째로 역사는 오로지 특수한 것만을 다루며, 과학은 일반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역사가는 언어의 사용 그 자체에 의해서 과학자들처럼 일반화하여 관여한다고 말한다. 둘째, 역사는 교훈을 가르치지 않는다. 카는 역사의 기능이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두 가지 모두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진전 시키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셋째, 역사는 예견할 수 없다. 과학의 법칙이란 실제로는 경향에 관한 설명이며, 역사가는 특정한 예언은 아니어도 미래의 행동에 대한 타당하며 유용한 일반적 지침을 줄 수 있다고 카는 말한다. 넷째, 역사는 인간이 인간 자신을 관찰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것에는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과학 역시 상호관계와 상호의존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사회과학 전체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역사는 과학과는 달리 종교와 도덕의 문제를 포함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역사가는 신의 힘에 의존하지 않으며 개인에 대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사건이나 제도, 정책에 대해서만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카는 역사와 과학을 분리 하는 것이 아닌 역사학의 수준을 향상 시켜야하며, 과학자들과 역사가들의 목표가 동일하다는 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촉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카는 역사가도 여느 과학자처럼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동물이라고 주장한다.4장에서 카는 역사의 연구가 원인에 관한 연구라고 말하며 최종적으로는 모든 원인들의 원인을 결정하는 것이 연구주제에 대한 역사가의 해석이라고 말한다.그는 원인을 연구하는 과정이 필연적인지 우연적인지에 대하여 결정론에 동의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카는 역사에서 필연적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사에서 우연은 무지의 표지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우연한 일로 간주 되온 사건들 역시 합리적으로 설명 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우연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전혀 다른 사고방식 속에서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카는 파슨스의 말을 빌려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의 인식체계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의 선택체계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역사가는 사실의 바다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만을 추출해야 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책의 5장에서 카는 역사에서의 진보를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다. 그는 우선적으로 진보와 진화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보는 세대를 단위로 측정이 될 수 있지만, 진화는 오랜 시간을 단위로 하여 측정되기에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획득형질의 전승이 사회적 진보의 기초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진보에는 일정한 출발점이나 종점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로는 퇴보의 시기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집단에게는 쇠퇴의 시기로 느껴지는 것이 다른 집단에는 새로운 전진의 시작으로도 얼마든지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에서의 본질적 진보란 자연의 진보와는 달리 획득된 자산의 전승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카는 역사에서의 진보를 사실과 가치의 상호의존과 상호작용을 통한 성취라고 주장한다.
    인문/어학| 2020.10.25| 3페이지| 2,000원| 조회(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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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시대의 역병 평가A좋아요
    페스트의 전파과정과 사회적 영향을 중심으로00학과 학번 000길거리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중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고민 없이 많은 사람들이 중세에 유행한 역병인 흑사병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흑사병의 유행은 유럽의 역사를 바꾸는 데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이는 현대에도 영향을 주었다. 흑사병은 최근에도 몽골 서북부 바얀올기 지역에서 대형 설치류인 마못의 생고기와 생간을 먹은 연인 남녀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하는 일이 발생 하는 등 완전히 우리 주변에서 사라진 질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흑사병(Black Death)의 정확한 명칭은 ‘페스트 균(Yersinia pestis)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열성 전염병’으로 피부의 조직이 괴사가 되며 검게 썩어가는 증상이 나타나 죽음에 이르게 되어 흑사병으로 불리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당시의 페스트에는 그러한 증상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라틴어인 페스티스 아트라(Pestis atra)또는 아트라 모르스(atra mors)를 영어로 직역하는 과정에서 오역이 발생하였다는 설명이 가장 유력하다. 이 질병은 1347년 유럽에서 처음 창궐이 확인된 이래 14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 동안 유럽을 죽음의 공포에 떨게 만든 질병이었다. 흑사병은 1346년부터 1353년까지 범유행이 절정에 달했다. 학자들은 14세기에 유럽에서만 최소 7500만에서 최대 2억명에 달하는 사람이 흑사병으로 인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즉 당시의 유럽 인구의 최소 30%에서 50%, 지역에 따라서는 70% 이상이 흑사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 이다. 이번 레포트를 통해서는 흑사병의 전파과정, 흑사병의 유행 전 유럽의 상황과 흑사병이 사회에 끼친 영향, 흑사병과 현대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흑사병은 원래 들쥐나 다람쥐 등 야생 설치류 사이에서 도는 병으로, 벼룩에 의해 동물 간에 유행하게 되며, 페스트가 옮겨진 설치류가 대량 번식하게 되어 인간에게 옮겨진 전염병이다. 중세 유럽에도망친 제네바의 배를 통해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고 하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흑사병이 1347년 10월 초 배를 통해 시칠리아에 도착하고 페스트가 도시를 완전히 휩쓸게 되자 시민들은 재난을 불러온 선원들을 항구에서 몰아내며 페스트가 지중해로 퍼지게 되었다. 하지만, 페스트는 곧 시칠리아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시칠리아에서 튀니지를 거쳐 북아프리카로, 코르시카와 사르디나로, 이베리아 반도의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등으로, 그리고 북 이탈리아로 퍼져나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유럽 전역을 죽음의 공포에 떨게 할 정도로 흑사병이 확산된 데에는 11~13세기 초반 까지 유럽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며 일어난 활발한 국제무역에 의한 나라 간 잦은 무역으로 형성된 국제 무역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중세인 들의 낮은 위생관념과 의학지식 역시 흑사병의 전파에 영향을 주었다. 농경지에서 이모작을 하며 분뇨를 거름으로 쓰는 기술이 발달했기에 분뇨를 모으는 화장실이 중요했던 동아시아 지역과 달리 유럽은 삼포제의 시행으로 인해 분뇨를 거름으로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었다. 당시 도시는 말의 배설물로 인해 더러웠기에 굳이 인간의 배설물만 따로 관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고 이는 위생의 질 저하로 이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불결했던 유럽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위생적인 생활을 하였고, 그로 인해 그들은 가장 낮은 사망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이는 유대인들이 흑사병을 옮긴다는 소문은 만들어냈고 흑사병이 퍼진 기간에 유대인의 학살이 도처에서 일어나게 만드는 역설적 상황을 일으켰다. 또한, 당시의 의학은 웬만한 병은 피를 뽑으면 치유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환자의 체력을 저하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고 이는 사망자 수의 증가로 이어지게 됐다.학자들은 흑사병 유행이전의 유럽의 상황에 주목하고 있다. 당시 유럽의 정황과 유럽인의 신체, 정신적인 상태가 흑사병을 다루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되게 유럽전역에서 생산과 수요의 차이는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흑사병이 유행하기 7,80년 전에는 극도로 날씨가 추워지며 알프스와 북극의 빙하가 하강하였고, 많은 비로 카스피해의 수면이 올라가며 아이슬란드의 곡물재배와 영국의 포도재배는 거의 불가능 하였으며, 덴마크와 프로방스 고지대의 밀 경작지대는 점차 축소 되어 갔다. 무엇보다도 흉작이 계속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 최소 한번, 평균적으로 두세 번은 흉작이 들어 저장할 식량이 줄어들며 기본적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 져 식인 행위는 일상적 일이 되었고, 그 외에도 개와 고양이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는 비인간적 행위가 자행되었다. 이러한 침체상태가 유지되며 사람들이 오랜 기간 영양실조에 걸려 있었고 때문에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가 많았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영국의 역사가 트리벨리언 (G. M. Trevelyan)은 “흑사병은 산업혁명에 견줄 만한 현상이며, 사실 산업혁명보다 더하다고 본다. 페스트와는 달리 산업혁명은 ‘인생의 강을 건너 떨어졌고 잠정적을 인생을 변화시킨 뜻밖의 장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으며 오스트리아 작가이자 비평가 에곤 프리델(E.Friedell)은 “현대인이 만들어진 해는 1348년, 바로 흑사병의 해였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평가처럼 흑사병은 많은 사회 문화적 변화를 만들어 냈다.흑사병으로 인해 수많은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고 이는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한 노동임금 상승으로 이어졌다. 또한, 농산물의 가격이 하락되었고 이는 수많은 지주들의 파산을 만들었고 일부 장원구조의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또한 영주와 소작인 간의 관계 변화로 말미암아 농경지에서 목축지로의 광범위한 변화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는 앞서 언급된 노동력의 부족으로 인한 임금상승의 상황에서 노동집약적 경작이 아닌 최소한의 배려만 요구되는 목축으로의 합리적 전환으로 볼 수 있다.교육 역시 많은 변화가 이뤄졌다. 당시 교육계는 비교적 소수집단의 학자들이 주도했었으나, 그들 중 유력다. 그러나 흑사병으로 많은 이들이 죽으며 교회가 자신을 실망 시켰다고 느꼈고, 흑사병은 하나님의 행위로 간주되었다. 한편 교회는 규칙적으로 사람들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주지시켰으며 교인들이 얼마나 사악했는지를 지적 하기만 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교구목사가 교구인과 마찬가지로 페스트로 죽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이는 성직을 수여 받게 되면 초인간적 면을 얻으며 인간이면서 인간과 별개가 되는 사제가 페스트 이후 유약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며 초인간적 면모가 사라짐을 보여주는 일 이었다. 또한, 많은 성직자들이 죽으며 성급하게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부적절한 후보가 많이 임명되는 일이 있었고, 겸직을 하는 이들 역시 늘어났다. 그 결과 사람들의 공포에 휩싸인 심리상태를 이용한 이단과 온갖 미신이 이시기에 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도원 역시 흑사병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흑사병 기간 동안 많은 수도승을 포함한 수녀와 탁발 수도사들이 죽었고 이는 수도원의 권위와 권력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흑사병 기간과 그 직후에 교회에 기부금이 급속히 증가하며 불가피하게 사람들은 수도원의 의미를 잊게 되었고 수도원의 적자로 이어졌다. 이 과정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페스트 이후 몇 십 년은 교회의 특권과 영적 권위가 쇠퇴한 동시에 종교적 열정이 성장하던 시기가 되었다.흑사병의 공포는 예술의 후퇴도 일으켰다. 예술은 인간의 창의력에서 비롯되는 만큼, 흑사병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죽은 뒤 그 자리를 채우는데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렸다. 게다가 예술가들이 창의력과 작품의 영감을 위한 여행이 금기가 되면서 살아남은 화가들이 그릴 수 있는 것은 흑사병의 잔혹한 풍경만 있을 뿐 이었다.중세 유럽에서의 흑사병 대유행 이후에도 흑사병은 사라지지 않고 우리 주위에서 잠복하고 있다. 1770년 모스크바 발병 이후 유럽에서는 흑사병이 발병되지 않았다. 반면 19세기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인도를 기점으로 약 반세기 동안 페스트가 대대적으로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이를 3차 페스트 범 유레건 주 남부, 네바다 주 서부에서 간헐적으로 발병했으며, 2006년에는 17명이 감염 2명이 사망하였고, 2015년에는 16명이 감염 4명이 사망했다. 이외에도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는 2017년 10월 WHO자료에 따르면 194명 발병 30명 사망(치사율 15.5%, 약 2/3가 폐 페스트, 1/3이 림프절 페스트)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인도, 미얀마, 베트남 등지에서 최근 증가현상을 보이며 매년 많은 환자가 발생하고 있다.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질병에 대하여 어느 시기 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흑사병은 더 이상 큰 공포로 다가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SARS)와 2009년 신종플루 사태, 그리고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 증후군)사태 등 에서 알 수 있듯이 전염병은 언제나 우리를 불시에 찾아오며 항상 생명을 잃을 수 있는 큰 위험으로 다가왔었다. 또한, 이외에도 현대판 흑사병으로 불리는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 역시 치료제가 꾸준히 개발되며 지금은 만성질환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인류에게 큰 위험으로 남아있다. 언제든 우리가 치료법을 찾은 질병이 변종이 발생하며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또한, 현대사회는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국제정세와 교통의 발달로 전염병의 발병 시 발병지역만의 국지적 지역의 피해가 아닌 전세계적 규모의 대량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또한, 현대전은 대체적으로 살상무기만 사용된 과거의 전쟁과 달리 세균을 이용한 생물학적 무기가 대규모 사용될 가능성이 있으며 생물학무기를 이용한 테러의 위험 역시 존재하고 있다. 때문에 과거 중세의 흑사병유행과 같은 선례를 기억하며 전염병의 발병 시 국제적인 검역업무의 공조와 공동조치, 감염 의심자의 빠른 격리와 파악 등의 신속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각국의 정부와 국제기관들은 상시 대비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전염병의 발병 시 각국 의료기관의 적극적 대응, 정부와의 공조와 국민들의 협력 역시 매우 중요하다. 만약07
    사회과학| 2020.10.25| 5페이지| 2,000원| 조회(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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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미술사 레포트
    위대했지만 비운했었던 명장00학과 학번 000서양 고전문화의 부흥의 시기로 불리는 르네상스 시기 3대 거장 중 한명이자, 이번학기에 발표를 하기도 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원시에서 로코코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예술가중에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화가이다.그를 처음 알게 되었던 때는 오래되어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그만큼 다 빈치는 서양인들에게만 익숙한 존재가 아닌 멀리 동양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 속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에 대하여 내가 알고 있던 것은 단편적인 부분이었다. 그가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는 것이나, 그가 발명에도 뛰어났다는 능력을 보였다는 것 정도만을 알고 있었다.이후에 대학에 입학하여 수업을 듣고 발표를 준비하며 그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유튜브를 통해 그에 대한 영상을 찾아보거나, 도서관에서 그에 대하여 저술된 책을 찾아보며 그를 점차 제대로 알아가게 되었다. 그에 대해 조사하며 알아가는 과정 중에서 그의 이름을 정확히 줄여 부르는 방법은 매우 흥미로웠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름를 다 빈치라고 부르지만 그의 이름을 정확히 줄여 부르는 법은 레오나르도라고 한다. 왜냐하면 다 빈치에서 다는 ‘~의’ 의미를 담고 있고 빈치는 그가 태어난 도시를 말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빈치의 레오나르도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레오나르도 보다는 다 빈치가 조금 더 부르기 편하고 익숙해 레오나르도 라는 이름으로는 잘 부르지 않게 되는 것 같다.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의 예술 인생을 14살 무렵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평가받는 알베르토 델 베르키오의 도제로 피렌체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그의 그림 실력이 너무 뛰어나 그의 스승이 조각에만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 뒤 밀라노 대공의 후원을 받으며 밀라노에서 17년간 활동을 하였고, 2번째 피렌체 시절과 2번째 밀라노 시절을 거쳐 말년을 프랑스의 앙부아즈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는 후원자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 한 도시에 정착해 작품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도시에서 작품생활을 했다. 그가 만약 한 도시에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했다면 우리는 더 많은 명작들을 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그의 명작 중에 최후의 만찬이 나의 눈을 가장 사로잡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당대에 벽화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프레스코 기법이 아닌 템페라 기법을 사용한 혁신적인 기법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템페라 기법을 사용함으로서 다 빈치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작품의 훼손이 일어나 많은 복원작업을 거쳤지만 원형의 상태와는 달라졌다. 예수와 제자의 뛰어난 배치와 구도는 성경 속 최후의 만찬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한 장면을 보여준다. 이렇듯 현대인들이 보기에도 뛰어난 작품이 원상태를 유지 했다면 얼마나 더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을지 호기심이 든다. 작품의 훼손으로 인해 원상태를 보지 못한다는 것만이 아쉬울 뿐이다.최후의 만찬 다음으로 나를 사로잡은 작품은 모나리자다. 이 작품 역시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중에 하나인데 1911년 빈첸초 도난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이 작품에 호기심을 가지고 작품을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으며 유명해 졌다고 한다. 또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그림의 눈썹이다. 사람들은 이 작품에서 눈썹이 왜 그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을 가져왔었다. 하지만 프라도 모나리자와 많은 연구 끝에 눈썹이 있었지만 시간에 의해 지워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최후의 만찬과 마찬가지로 원상태의 작품은 사람들에 강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완전한 작품이 완벽한 작품으로 보이는 것에 정말 감탄을 표현하지 않을 수 가 없을 뿐이며, 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 다 빈치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가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외에도 다 빈치는 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암굴의 성모 등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만을 다 빈치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예체능| 2020.10.25| 2페이지| 1,500원| 조회(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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