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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서편제' 감상문
    한이 담긴 소리, 서편제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서편제’란, 원래는 판소리 창법 상의 유파 중 하나로 광주·나주·보성·강진·해남 등지에서 성행하였으며 섬진강의 서쪽에 자리한다고 하여 부르게 된 말이다. 수험생일 때 문학 작품으로 접해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더욱 주의 깊게 감상할 수 있었다.내가 원래 서편제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이 이야기가 소리꾼 아버지가 딸의 눈을 멀게 하여 한을 품게 하여 소리를 더 잘 내게 하려고 했다는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유봉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양딸인 송화가 동호처럼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워도 보약이라고 속이고 눈을 멀게 하는 약을 먹이는 것은 너무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한’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한’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을 의미한다. 나는 ‘서편제’라는 영화 자체가 그런 ‘한’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이 영화의 배경은 1960년대 전라도 보성의 소릿재인데, 산업화가 시작되고 외국의 문화가 유입되는 시대적 상황 때문에 소리꾼들이 설 자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유봉과 송화와 동호는 약장수들을 따라다니며 소리를 하곤 했는데, 시장에서 소리를 하고 있으면 꼬마들이 와서 구경을 하곤 했다. 그런데 서양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대가 시장에 등장하자 꼬마들이 모두 그 쪽으로 이동하였고, 그것을 본 송화와 동호의 허탈한 표정이 기억에 남았다. 이 장면은 국악이 쇠퇴하고 그 자리를 서양 음악이 채우는 그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약장수와 같이 생활하는 숙소에서 소리 연습을 하다가 말다툼을 하고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셋이 같이 길을 걸어가며 처음에 구슬프게 아리랑을 부르다가 갈수록 북 장단에 맞추어 신명나게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이 있다. 나는 이 장면이 내가 말하는 ‘한’을 상징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하여 주목하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정말 슬프고 힘들지만 소리를 통하여 그것을 잊고 그 순간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행복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의문이 들었다.그런데 서편제에 나오는 유봉의 대사 중 이런 대사가 있었다. 동호가 아버지 유봉의 행동에 환멸을 느끼며 소리를 하면 쌀이 나오느냐고 아니면 밥이 나오느냐고 따졌는데, 이에 유봉은 쌀이 나오고 밥이 나와야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소리에 자기가 미쳐서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 좋고 황금보다 좋은 것이 소리 속판이라고 하였다. 유봉과 동호와 송화가 아리랑을 부르는 장면도 마찬가지로 그들도 당장 떠돌며 굶을 수밖에 없는 슬프고 힘든 처지였기에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 소리를 했고, 소리를 하다가 그들의 소리에 그들이 미쳐서 신명을 찾았다. 그 때 우리나라의 소리가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독후감/창작| 2020.05.20| 2페이지| 1,000원| 조회(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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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BS 다큐프라임 '동과 서' - 명사로 보는 서양인, 동사로 보는 동양인', 서양인은 보려하고 동양인은 되려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사고방식의 차이, 어디에서 오는가?- EBS 다큐프라임 “동과 서” 제 1·2편을 보고 나서 -동양인과 서양인은 다르다. 사는 곳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고방식이 다르다. 예전에 jtbc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인 ‘비정상회담’을 즐겨 보았다. 그 프로그램은 세계 각국 토론자들이 나와서 한 가지 주제로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토론을 하며 서로 불꽃이 튀기는 경우는 항상 유럽 국가들과 미국 국적의 토론자들과 동아시아 토론자들이 대립하고 있을 때가 많아서 막연히 ‘서양인과 동양인은 정말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구나.’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 두 편에 걸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보면서 왜 그들과 우리는 같은 ‘사람’으로 살면서 무슨 차이 때문에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알 수 있었다.“판다와 원숭이와 바나나가 있다. 이 중 둘을 묶는다면 어떻게 묶겠는가?”나는 이 질문에 주저 없이 원숭이와 바나나를 묶는다고 생각했다. 원숭이와 바나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판다와 원숭이를 묶는다고 대답했다. 같은 동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물음에도 서로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를 설명하자면 동양과 서양의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한다.서양은 사물이 허공 속에 존재하며 두 물체 사이의 공간은 텅 비어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동양은 기가 모여서 사물을 이루고 그 물체 사이에는 기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서양은 물체를 중심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동양은 물질을 중심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서양에서의 전체란 개체들이 모인 집합을 의미하며 동양에서의 전체란 개체성이 없는 일체 그 자체를 의미한다. 가령, 우리 한글은 동사를 많이 사용하지만, 영어는 명사를 많이 사용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함께 차를 마시다가 차를 더 권하는 상황에서, 한글로는 ‘더 마실래?’라고 표현하지만 영어로는 ‘More tea?’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관계성을 중요시하는 동양은 동사를 사용하고, 개체성을 중요시하는 서양은 명사를 사용한다.판다와 원숭이와 바나나를 둘로 묶는 질문 또한 똑같다. 서양인은 판다와 원숭이를 같은 동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개체’로 분석했기 때문에 둘로 묶었다. 반면 동양인은 바나나는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이기 때문에 그 ‘관계’로 둘로 묶은 것이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분명 다르기는 한데 무엇이 다른지 설명하기는 모호했던 나의 머릿속에 명확하게 들어오는 답변이었다.또,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점은 예술에서도 극명하게 보인다. 동양과 서양의 미술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종이의 재질, 그림을 그리는 재료에 따른 차이도 분명히 보이지만 그림의 구도에서 가장 큰 차이를 느꼈다. 서양화에서는 원근법이 발달되었다. 가까이 있는 것은 크게, 멀리 있는 것은 작게 그리는 것으로 이는 투시법이라고도 불리며 그림을 인간의 눈으로 보는 3차원 세상을 규격화된 2차원 평면 위에 묘사적으로 표현하는 회화기법을 말한다. 이는 철저히 인사이더(insider)의 관점이며, 자신이 이 세상에 중심이 되는 관점이다. 반면 동양화에서는 역원근법이 나타난다. 역원근법은 자연스러운 시각과는 달리 배경의 입체를 전경의 입체보다 크게 그리거나 화면의 중심을 향하여 집중하여야할 선을 반대로 확산하여 그리는 방법으로 조감도를 그리는 방법의 하나다. 조감도라는 것은 아웃사이더(outsider)의 관점이며 이는 개인은 전체 사회의 부분이라는 동양적인 사고방식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다.서양화가 실제 내 눈에 보이는 그림을 그린다면, 동양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가의 마음까지도 그려낸다. 이는 서양에서는 논리학의 핵심인 동일성의 논리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이고, 동양에서는 주역 사상의 핵심인 변화의 원리가 중요시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로 ‘대상’이라는 단어는 ‘object’이며, 이는 곧 ‘사물’이라는 뜻이다. 또한 ‘object’의 형용사형인 ‘objective’는‘객관적인’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I see’는 ‘I understand’와 뜻이 같다. 인간이 본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원근법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인은 보는 것이 이해하는 것이다. 동양에는 ‘물아일체(物我一體)’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대상과 내가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줄곧 ‘마음을 비운다.’, ‘마음을 닦는다.’, 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마치 구슬이 깨끗하고 투명할수록 더 잘 보이듯이 마음 또한 스스로 수행을 거듭할수록 대상과의 일체가 잘 되는 것이다. 즉, 동양인은 대상이 되려고 한다.
    독후감/창작| 2020.05.20| 2페이지| 1,000원| 조회(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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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BS 다큐멘터리 '바다의 제국' 제1편 욕망의 바다 감상문 평가A좋아요
    바다의 제국 제1편 욕망의 바다 감상문‘총이 교역을 하게 만든다.’이것이 대항해시대를 관통하는 한 마디라고 생각한다.바스코 다 가마가 향신료를 얻고자 인도의 항구도시인 캘리컷에 도착함으로써 대항해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나 인도의 캘리컷 왕은 바스코 다 가마가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진상품이 볼품없다며 비웃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당연히 교역을 해보지도 못하고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하였다는 데에만 의의를 둔 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포르투갈은 카브랄이 이끄는 두 번째 인도행 선단을 보냈고 이들은 성공적으로 교역을 마쳐서 돌아올 때엔 다량의 향료,도자기,생각,향목,진주,다이아몬드,루비 등을 싣고 돌아왔다. 하지만 기존에 인도와의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과 포르투갈과의 갈등, 인도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의 문화적·종교적 마찰이 깊어져 포르투갈인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에 바스코 다 가마는 두 번째 인도행을 결심하였고, 인도로 갈 때에는 배에 총과 칼, 병사들도 함께 싣고 갔다. 그는 인도에 도착하여 이슬람 상선을 상대로 해적질을 자행하였고 죄 없는 인도의 상인들과 어부들을 학살하는 데까지 이른다. 결국 그는 인도의 제해권을 장악한 후 포르투갈에 귀환했다. 그는 본국에서 인도정책고문의 자리까지 오른다.바스코 다 가마는 아마도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교역을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포르투갈은 유럽에서도 변방에 있는 국가였고 발전 정도가 당시 인도에 한참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에 바치는 진상품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걸 본 인도인들의 입장으로서는 교역을 해봤자 이익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동양 국가들보다 나은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총이었다. 그들은 총으로 인도를 위협하여 교역을 성공시킨다. 그리고 바다를 장악한다. 나는 그 이유를 동양의 농업 국가들은 바다가 굳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도와 중국과 같은 동양 국가들은 상업보다는 농업을 중요시했고, 바다가 없더라도 먹고 살만한 자원은 충분했다. 바다가 없으면 안 되는 쪽은 유럽이었다. 그들은 후추가 필요했지만 후추는 너무 비쌌다. 후추 한 줌에 사파이어 반지 2개 혹은 돼지 16마리와 교환할 수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비쌌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들은 중간 교역과정에서 붙는 가격을 줄이고자 후추의 원산지인 인도로 향해야만 했고, 그러려면 바다가 필요했다. 그냥 가질 수 없으니 총을 들고 간 것이다.바스코 다 가마의 대항해시대의 시작은 19세기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과 흡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교역을 하고자 인도를 찾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은 싼 값으로 원료와 노동력을 얻고 물건을 만들어서 팔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단순히 무력으로 그들을 진압하였지만, 19세기 이후에는 총과 칼은 물론이고 제국주의 국가의 약소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사회진화론’과 같은 이론이 등장하여 더욱 지능적이고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실제로 인도와 중국은 서양에 절대 뒤처지지 않는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총’과 인종 차별적 정책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독후감/창작| 2020.05.20| 1페이지| 1,000원| 조회(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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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현대 고정관념을 탈피한 중국 여성 위인에 대한 연구 -추근과 등영초를 중심으로 평가A+최고예요
    근·현대 고정관념을 탈피한 중국 여성 위인에 대한 연구-추근과 등영초를 중심으로목차Ⅰ. 서론Ⅱ. 근·현대 중국 여성을 억압하였던 사회적 배경Ⅲ. 근·현대 중국 여성 위인1. 추근2. 등영초Ⅳ. 근·현대 중국 여성 위인의 의의 및 한계점Ⅴ. 결론[참고문헌]Ⅰ. 서론2017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뜨거운 키워드는 ‘페미니즘’이다. 여성의 정치 활동이 이전보다 많아지고 사회에서 여성이 내는 목소리가 점차 커지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남성 중심 사회에서 성 평등한 사회로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 성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자 정부는 여러 정책을 시행하고 있고, 네티즌들이 성 평등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은 나아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특히, 나는 이번 연구의 주제인 ‘위인전’에서 그런 점이 많이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위인’이란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보통 어린 아이들이 읽는 위인전들의 주인공의 대부분은 대부분 남성이다. 그렇게 학습된 아이들은 자칫하면 뛰어난 인물들은 대부분 남성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쉽고,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아이들은 이 사회를 남성 중심 사회로 인식하게 된다. 하지만 여성 위인이 드문 이유는 여성이 남성보다 천하고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에는 여성 인권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지금보다 현저히 여성의 사회진출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서양을 구분할 것 없이 전 세계의 공통적인 사항이었다.그 중에서도, 본 연구에서는 유교 사회이자 전통적인 남성 중심 사회인 중국의 여성 위인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 유교문화는 계층적이고 차별적인 실천도덕을 중시하였는데, 유교에 있어서 도덕은 ‘사람’을 위한 도덕이 아닌 ‘정치’를 위한, ‘남성’을 위한, ‘어른’을 위한, 그리고 ‘기득권자’를 위한 도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적인 가족제도가 존재할 수 있었고 ‘출가외인’, ‘삼종지도’와 같은 말이 생겨났으며, 여성을 차별하는 문화가 끊임없이 재생산되었다. 이러한 남존여 여성을 신체적으로 억압하였다.그렇다면 전족은 어떻게 지속되었던 것일까? 이는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송대 이후 농업경제의 변화에 따라 지연 관념과 종법 관념 가산의 완전 승계 등 일련의 관념에 변화가 생겼다. 지연관념의 기초 위에 지연과 혈연의 결합과 가족재산의 귀속 관계 등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여성은 단지 가정 안에 있어야 한다는 관념이 강조되었다. 고향의 본가를 지키는 여성이 있어야만 연속인 구심이 되고 종법적, 예교적 이념 안에서 존재를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반발한다 해도 여성은 결코 남성과 동등한 지위나 독립, 자유를 가질 수 없었다. 남권사회는 근본적으로 여성이 남자와 동등하게 제공받을 수 있는 생존의 방법이 없었고 또한 불가능했다. 여성의 행보는 더욱 더 약해졌고 전족은 남성 위주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전족은 신해혁명 이후로 금지되어 일부에서는 계속 행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신해혁명 이후에 역사에서 점차 사라진다.하지만 전족은 풀어졌을지언정 여성을 옥죄고 있었던 사회적 배경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여자는 재능이 없는 것이 덕’이라고 여기며 여자들을 교육을 시키는 것을 꺼리는 풍조가 사회에 만연하였다. 그리고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성은 1920년이 되어서야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또한 유교 문화가 오래 이어져왔기 때문에 부모 등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거나 처와 첩이 공존하는 등의 구시대적 혼인 관습이 여전히 존재하였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고 나서 1950년에 발표한 ‘중화인민공화국 혼인법’을 통해 여성을 옭아매었던 쇠사슬은 점차 타파되어 갔다.Ⅲ. 근·현대 중국 여성 위인1. 추근추근은 1879년 11월 8일 청말의 부유한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추근은 부모로부터 깊은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자랐는데 6세 때 그녀의 부모는 학식이 풍부한 가정교사를 초빙하여 추근 형제자매에게 서사를 배우도록 장려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그녀는 경전을 읽고 시 짓는 법을 나 추근은 결혼하면서 전족을 풀어버렸다. 추근은 일본에서 여성해방운동을 전개하면서 여성들에게 전족으로부터 해방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천족회’를 창립하여 계몽에 앞장섰으며, 전족으로부터의 해방, 가정으로부터의 해방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왔던 노예적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그리고 추근은 문자를 모르는 중국 민중들이 보다 쉽게 글을 읽고 배우게 하기 위해 1904년 9월 ‘연설연습회(演說練習會)’를 조직하고 백화보 잡지를 창간하였다. 연설의 장점에서 추근은 연설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첫째는 지역에 관계없이 어느 지역에서나 곧바로 연설할 수 있다. 둘째는 돈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들으려는 사람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셋째는 누구나 듣고 이해할 수 있다. 비록 글자를 모르는 부녀나 어린이일지라도 모두 들을 수 있다. 넷째는 혀만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민중을 움직일 수 있다. 다섯째는 천하의 사정을 모두 알 수 있다. 추근은 연설을 듣는 사람은 비록 글자를 모르는 여성일지라도 들을 수 있고 또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자유로이 말할 수 있으므로, 여성의 해방과 구국혁명 운동에 있어 연설의 중요성과 장점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추근은 혁명선전의 수단으로 연설과 백화를 적극 활용하려 하였다. 추근은 문맹상태의 무지한 여성을 일깨우기 위해 많은 강연을 하였는데, 추근의 강연을 들은 많은 여성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그녀가 백화보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연설을 통해 여성들의 무지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또한, 추근이 제1차 귀국 후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 중국동맹회에 가입한 다음 착수한 것이 바로 공애회(共愛會)를 재건이다. 공애회의 재건은 중국동맹회 활동의 일환이 아니라 지식인 여성들을 결합시키고 학문을 장려하고자 하는 그녀의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추근은 실행공애회의 목적을 남자의 지배로부터 여성이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돕는 것으로 하고, 그 목표를 여성의 교육과 여학교의 진흥으밀히 행해졌지만, 그녀의 죽음은 곧 세상에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냈다.추근은 중국 근대사의 제 1세대 혁명가이며, 반청혁명가이다. 또한 근대 중국여성해방운동과 혁명활동에서 선구자적 리더십을 발휘한 여성리더이다. 그녀는 천 년을 이어 온 악습인 전족을 거부하였으며, 가정으로부터 해방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남성중심사회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녀는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녀는 “여성을 분발시켜 중국을 구원할 이 땅의 지식인들과 연합하여 민족혁명을 완성”하려 한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추근이 여성교육을 제창하고 여군을 조직하려고 했던 것은 우선 남성과 똑같은 『의무의 남녀평등』을 통해서 진정한 남녀평등을 회복할 수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추근의 이러한 시도가 비록 실패로 끝났더라도 앞으로의 중국부녀운동이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귀중한 경험으로 평가된다.2. 등영초등영초는 1904년 광서성 남녕에서, 청조의 군관인 아버지 등정충과 신지식인 어머니 양진덕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일곱 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세가 크게 기울었고, 등영초는 배워야할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면학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아홉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북경평민소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학교는 중국 사회당 북경지부가 세웠기 때문에 교사 대부분이 중국사회당원 또는 중국동맹회원이었고 교사들 대부분 근무를 봉사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월급은 지급되지 않았다. 등영초와 그녀의 어머니는 학교에서 숙식을 제공받아서 살았다. 식사 때마다 교사들은 열정적으로 사회주의의 이상과 ‘대동세계(大同世界)’의 실현에 관한 이야기와 정치비판 및 새로운 사회 구상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러한 진보적 분위기 속에서 모녀는 즐거움을 느끼고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년도 되기 전에 교사들이 체포되고 교장 진익룡이 혁명자금을여 여성해방 사상을 선전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는 8개월 만에 군벌정부에 의해 정간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녀도 조직의 결정에 따라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에는 혁명 동지인 주은래와 결혼하여 광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그러나 1927년 4·12 쿠데타로 국공합작은 완전히 결렬되어 버리고 공산당원의 수도 격감하였다. 이로 인해 국민당의 탄압이 심해지자 1928년 잠시 러시아로 피신했다가 돌아와 1931년까지 치열한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장개석의 공산당 탄압은 극심하였고, 피신을 거듭하다 그녀는 몸이 약해져 아이를 사산하여 그 뒤에는 자식이 없게 된다. 1937년 제 2차 국공합작이 이뤄진 시기에 그녀는 상해에서 비밀 공작사업을 수행함과 아울러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또는 중국공산당 중앙부녀위원회 서기로 뽑히기도 했다.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을 때 그녀의 나이 45세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은 여성을 속박하는 봉건제도를 폐지한다. 여성은 정치, 경제, 문화교육, 사회생활 각 방면에서 모두 남자와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남녀 혼인의 자유를 실행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후 각종 중요한 법령에서 이 정신을 관철하였으나, 수천 년간 전해 내려온 여자를 경시하는 봉건사상을 단시간에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남녀평등 정책을 선전하고, 여전히 사회 속에 잠식하고 있는 봉건적 관념을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 뒤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제1회부터 제5회까지의 전국인민대표회의 상무위원회위원으로, 그리고 제1회부터 제3회까지 중국대륙부녀연맹 부주석으로 활동했고, 개인적으로는 국무원 총리 주은래의 부인으로 활동했다. 등영초의 생활은 언제나 검소했으며 옷차림은 수수했다. 집안에 가구라는 것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그러나, 모택동에 의해 수립된 인민의 나라는 역설적이게도 모택동에 의한 문화대혁명으로 위기에 봉착하였다. 문화대혁명은 모택동의 사상과 숭배를 제외한 다.
    인문/어학| 2020.05.20| 11페이지| 1,000원| 조회(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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