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를 통한 나의 윤리적 판단 보고서- 상호보완적 개념의 선행의 원칙과 자율성 존중의 원칙Ⅰ. 서론선행의 원칙과 자율성 존중의 원칙 사이의 충돌Ⅱ. 본론1. 자율성 기반의 온정적 간섭주의를 따르는 치료의 필요성2. 온정적 간섭주의를 따르는 치료 예외 경우에 대한 의견Ⅲ. 결론요약 및 결론Ⅰ. 서론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고, 살면서 사람은 누구나 위급한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서로 도와주는 것은 인간의 도덕적 의무이다. 이러한 생각은 선행의 원칙에 의한 것인데 몇 년 전 벌어진 사건을 예시로 들 수 있다. 영업 중 쓰러진 택시 기사를 승객이 아무런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아 기사가 사망한 사건을 두고 승객에 대한 도덕적 비난이 거세지고 이런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법’을 제정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진 일이 있었다. 실제로 이러한 법안이 국회에 발의되기도 했었다. 선행의 원칙은 자율성 존중의 원칙, 악행 금지의 원칙, 정의의 원칙과 함께 생명의료윤리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비첨과 췰드리스는 생명의료윤리의 원칙들에서 이 네 가지 원칙을 주어진 상황에 따라 서로에게 제한을 가하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우리가 많이 접하게 될 현실적인 의료현장 상황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선행의 원칙과 자율성 존중의 원칙 사이의 충돌이다.1. 자율성을 토대로 하는 온정적 간섭주의 기반 치료의 필요성온정적 간섭주의는 선행의 원칙과 통하는 개념으로 한 사람의 선호나 행위를 다른 사람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인의 선호나 행위를 무시하는 사람, 즉 의료인은 자신의 선호나 행위가 무시되는 사람, 즉 환자에게 이익을 준다는 목적이나 그 사람에게 발생할 해를 막거나 완화한다는 목적에 의해 이러한 무시를 정당화한다. 온정적 간섭주의에 대한 비첨과 췰드리스의 정의에서 드러나듯이, 온정적 간섭주의는 선행을 목적으로 어떤 사람이 표현한 선호나 그의 결정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정적 간섭주의와 자율성이 충돌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는 이러한 충돌상황에서 의료인으로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독립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환자의 권리가 주목을 받으면서, 선행의 원칙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던 온정적 간섭주의적 치료의 문제들이 부각되어 왔다. 그러면서 선행의 원칙과 자율성 존중의 원칙은 마치 딜레마의 상황에서 마주하는 적대적인 원칙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환자의 자율성은 어떤 독립적인 고려 사항이라기보다는 치료 후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일부라고 생각한다. 즉, 의료진에게 최선의 치료를 기대하고 병원에 가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이미 환자의 자율성이 선행의 원칙에 따라 치료를 받기로 하는 데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온정적 간섭주의로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환자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 자율성을 존중하는 치료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환자 대부분이 지금도 여전히 의료진의 능력과 권위를 인정하고, 환자 자신이 치료에 있어 현명하지 못한 판단을 내렸을 때 의료진의 온정적 간섭주의 방식의 개입을 기대하는 것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뇌염으로 병원에 찾아와 치료를 위해 입원하였지만, 뇌염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진 환자가 그의 정신적 능력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치료를 거부하는 경우, 그러한 환자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강행하는 경우에 나는 이것을 자율성을 기반으로 한 온정적 간섭주의적인 적절한 치료라고 생각한다.또한 환자의 치료에 대한 의사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에도 온정적 간섭주의에 의한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환자의 의견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는 제럴드 드위킨이 제시한 온정적 간섭주의 간호제공의 세 가지 조건 중 첫 번째 조건인 대상자가 관련되는 정보를 모른다는 ‘자율성의 조건’ 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과거 큰 논란을 일으켰던 ‘보라매병원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경막외 출혈상을 입은 김 씨의 아내는 김 씨가 가족에게 짐만 될 것이고, 앞으로 발생할 추가 치료비를 부담하기도 힘들다는 이유로 퇴원을 요구했다. 의료진은 퇴원 시 사망 가능성을 설명한 후 김 씨의 아내와 퇴원 후 피해자의 사망에 대해 법적인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귀가서약서에 서명했다. 김 씨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후 자택에서 끝내 사망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상황은 환자의 온전한 판단이 존재할 수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가족의 의견이 아닌 의료진의 온정적 간섭주의 방식의 개입이 따라야했다고 생각한다.2. 온정적 간섭주의 기반의 치료 예외 경우에 대한 의견그러나 치료에 대해 환자의 자율적 의지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무작정 선행의 원칙으로 치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A 씨는 “주변에 타인들이 나를 해치려고 한다.”는 피해망상을 이유로 병원에 왔는데, 환자는 입원을 원하지 않았고, 보호자들은 입원을 원하였다. 정신과 의사는 보호자들과 상의 후 입원동의서를 받았고 환자에게 수면 주사제를 투여 후에 수면 중에 강제로 보호병동에 입원을 시켰다. 후에 환자는 강한 분노감을 표현했다. 나는 이 경우에서 우선 가족을 환자로부터 분리해 2차 피해는 막아야 하지만 환자를 온정적 간섭주의에 따라 치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주장한 나의 의견과 같은 맥락으로 이 상황에서 A 씨에 대한 치료는 선행의 원칙으로서만 보면 충분히 타당한 행위로 인정될 수 있지만, 정신과 환자들도 치료 여부와 자신이 받게 될 치료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으며 자신이 치료를 거부할 때에는 그러한 권리까지도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은 경우에 무작정 온정적 간섭주의를 바탕으로 치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 초반은 페미니즘의 전개에 의하면 제1의 물결을 지나 제2의 물결이 오기 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는 여성의 시민권 획득 이후 페미니즘운동이 사그라든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제1의 물결시기에는 여성도 남성과 같은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함을 주장하는 여권운동이 벌어졌고 참정권이나 교육권과 같은 여성의 권리획득이 주된 이슈가 되었기에 여성의 권리와 남녀평등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제도개선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제1의 물결이후 제2의 물결이 오기 전 여성은 여러 형태의 시민권을 획득하였지만 여전히 개혁되지 않은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차별 속에서 살아가는 상태였다. 영화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드러났는데, 머큐리 프로젝트의 주요 브리핑에 여성인 캐서린 존슨은 참석할 수 없었던 장면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게다가 흑인여성의 인권은 더욱 지켜지지 않았다. 즉 여성의 내부에서도 격차가 존재하여 백인여성이 흑인여성을 무시하고 관리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었고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보다 적은 월급을 받으며 비정규직으로 일했고 유색인종여성이라는 이유로 화장실과 커피포트를 따로 써야 했다.당시 흑인 여성들은 여성으로서의 차별뿐 아니라 여성내부에서 흑인으로서의 추가적 차별도 겪어야 했고 그것은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명의 흑인여성은 각자의 위치에서 받고 있는 차별이나 억압을 당연한 것이 아닌 불평등으로 ‘인식’하여 해결해나가고자 여러 가지 실천을 보여주었기에 글로서 배웠던 페미니스트들의 활동을 실제 영상을 통해 보게 되어 많은 장면이 인상적이고 감동적이었다.첫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메리부부의 대화 장면이다.“가정주부라면 이런 생각 까진 안했겠지.”“여성 엔지니어라니, 흑인은 될 수 없어. 분위기 파악해. 나사는 흑인여성에게 그러한 권리를 주지 않아.”나는 이 장면에서 여성으로서의 차별과 더불어 흑인여성으로서의 차별 두 가지를 동시에 보았다. 예전 수업시간에 페미니즘의 정의에 대해 배우던 중 교차성 페미니즘에 대한 개념을 접하고 꽤 충격을 받았었다. 흑인여성이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한 번, 흑인으로서 또 한 번 어려움을 겪어 왔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나로서는 성별에 따른 문제와 인종에 따른 문제가 교차하여 흑인여성은 백인여성이 겪는 어려움보다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단순히 백인 여성의 시각에서만 여성의 인권을 생각하였던 나의 좁은 시야였지만 여성내부의 깊숙한 수준에서 차별을 다시 생각하게 되어 충격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을 쉽게 넘길 수 없었다. 이 장면에서 남편은 메리잭슨에게 여자는 집에서 가정주부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듯 핀잔을 주는 가부장적인 억압과 더불어 흑인여성은 엔지니어의 꿈을 이룰 수 없다며 두 가지 억압을 주었다. 그러나 메리잭슨은 극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슬로건을 수업시간에 배운 것 보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메리잭슨은 엔지니어의 꿈을 이루고자 학위를 얻어야 했기에 재판을 신청하는 등 개인적으로 경함한 억압과 차별을 해결해나가는 실천을 했고 결국 백인학교에서 최초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조적, 정치적 영역인 재판에서 판사의 판결을 받아내었다. 수업시간에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라는 슬로건을 배울 때 과연 사적이고 개인적인 작은 실천이 얼마나 큰 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생각하며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영화를 통해 여성주의적 실천의 방식이 개인에서 출발해서 확대해 나가는 것 이라는 슬로건의 의미를 더욱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두 번째로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흑인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과 차별을 ‘인식’한 백인들의 모습이 담겨져 있는 장면이다. 나는 불의한 상황을 보았을 때, 그리고 그 상황 가운데 내가 어떤 우월함을 가졌을 때 그 상황을 개선해 나갈 만큼의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영화에는 흑인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과 차별을 조금씩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실천을 이어나간 백인들이 있었다. 우주비행을 하는 글렌대령과 캐서린 존슨의 상사인 해리슨, 그리고 메리잭슨의 야간수업을 허락한 백인판사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상대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겨졌던 백인들이었지만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특히 해리슨은 캐서린 존슨의 능력을 인정해주어 그녀를 흑인여성이 아닌 나사에 근무하는 한명의 팀원으로서 인정해주었다. 그 덕에 캐서린 존슨은 영화에서 점차적으로 변화하였는데, 처음에는 무시를 받는 유색인종여성이었고 위축되어있었다. 그러나 조금씩 해리슨에 의해 인정받자 문제가 생기면 질문하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보고서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용기도 가지게 되었다. 머큐리 프로젝트의 주요 브리핑에서는 해리슨이 쥐어준 분필을 들고 나가 완벽한 계산을 보여주며 수많은 백인남성들 앞에서 인정받는 팀원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