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의 영화화 과정에 관한 사례 분석- ‘강철비 : 스틸레인 2 FULL STORY’를 중심으로I. 서론크로스미디어(Crossmedia)란 하나의 콘텐츠 데이터를 다용도로 여러 매체에 출력하는 방법을 말하며 ‘분산된 내러티브(distributed narrative)’ 라고도 불린다. 각각의 미디어가 독립적인 완결성을 가진 트랜스미디어와 달리, 크로스미디어는 각각의 스토리를 결합시켜야 전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본론에서는 웹툰과 영화 제작이 동시에 이루어진 사례인 ‘강철비 : 스틸레인 2 FULL STORY’를 중심으로 크로스미디어(Crossmedia)의 전략을 분석해본다. ‘강철비’의 크로스 미디어 전략이 갖는 의의와 한계까지 알아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II. 본론1. 크로스 미디어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 ‘강철비’‘강철비’의 시작점은 2011년, 원작자인 양우석 웹툰작가가 ‘다음’ 플랫폼에 김정일 사후 남한과 북한의 혼란을 다룬 정치 스릴러 장르인 ‘스틸레인’의 연재였다. 시즌1 격이 된 이 작품은 2011년 5월 5일부터 2012년 1월 5일까지 후기 제외 총 32회로 완결되었다.이후 2013년, 양우석 웹툰작가는 영화 ‘변호인’으로 충무로에서 흥행을 성공시키며 성공적인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한다.2017년, 그는 ‘강철비’를 영화로 제작할 것을 다짐하나 2011년 작품인 ‘스틸레인’을 그대로 스크린에 개봉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때 그가 선택한 전략이 바로 ‘크로스미디어’ 전략이다.그는 6년동안 달라진 남북정세를 반영하여 ‘스틸레인’의 후속작인 웹툰 ‘강철비: 스틸레인2’와 영화 ‘강철비’, 그리고 웹소설 ‘강철비’를 새롭게 제작하여 동시에 대중에게 공개하는 다소 파격적인 동시 제작 전략을 채택했다.그리고 이러한 전략은 대중적인 어필에 성공했다. 영화 ‘강철비’는 손익분기점을 넘기며 흥행했고, 웹툰인 ‘강철비’도 영화 흥행의 여파로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2. 원작 웹툰 ‘스틸레인’과 영화 ‘강철비’, 후속 웹툰의 차이앞서 언급했듯이 ‘강철비’의 원작이자 시작점은 2011년에 연재된 ‘스틸레인’이다. 웹툰의 제목인 ‘스틸레인’은 ‘전술 지대지 미사일’을 의미함과 동시에 전쟁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웹툰은 2011년 연재 당시 가상의 근 미래인 2013년을 배경으로 김정일 죽음 이후를 그리다가, 실제로 연재 도중 김정은이 사망하여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연재는 2012년에 끝나게 된다.그렇다면 이후 2017년 제작된 후속웹툰 ‘강철비 : 스틸레인 2 FULL STORY’과 영화 ‘강철비’, 그리고 2011년에 연재된 원작 ‘스틸레인’ 세 작품 사이엔 어떠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1) 캐릭터 비중의 변화‘강철비’의 세 시리즈는 모두 남북을 대표하는 남자 주인공 두 명이 등장한다. 이들의 관계는 2017년에 새 시리즈가 제작되면서 더욱 끈끈해졌다. 일각에서는 이를 한국영화에서 흥행했던 ‘브로맨스’ 요소를 인식한 변화라고 평가한다. 이에 따라 주변 인물의 분량에도 차이가 생겼다. 원작에 등장하는 능동적인 여자 캐릭터인 ‘파멜라 랜디’의 존재감이 2017년 판에서는 미미해졌다. ‘파멜라 랜디’는 세 시리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2017년 판 강철비가 두 주인공의 유대감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녀의 자리가 줄어들었다.2) 달라진 남북정세로 인한 새로운 스토리 구상2011년 제작된 ‘스틸레인’과 2017년에 제작된 ‘강철비 : 스틸레인 2 FULL STORY’, 영화 ‘강철비’ 사이에는 6년의 격차가 있다. 연재 도중에도 국제 정세가 뒤바뀌어 논란이 됐었던 만큼, 6년이 지난 후 원작 웹툰 ‘스틸레인’을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때문에 2017년에 영화와 후속 웹툰을 제작할 때는 달라진 남북정세를 반영하여 극의 배경과 인물 설정을 바꾼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하였다.3. ‘강철비’의 크로스미디어 전략이 갖는 의의와 한계‘네이버’ 플랫폼에서 연재된 순끼 작가의 인기 캠퍼스 로맨스 웹툰 ‘치즈인더트랩’의 영화화나 주호민 작가의 ‘신과 함께’의 영화화와 같이 이전에도 웹툰의 영화화는 이미 대중화된 미디어믹스 전략이었다.하지만 ‘강철비’는 위와 같은 웹툰의 영화화 사례들과는 차별화되는 면이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첫 번째로는 우선 웹툰과 영화의 동시 공개라는 파격적인 전략이 사용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웹툰과 영화가 같은 세계관과 줄거리를 공유하지만 각각 완결된 서사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이와 같은 크로스미디어 전략은 영화가 한창 흥행할 당시 그 여파로 웹툰이 주목을 받을 때까지는 완전한 성공으로 보였으나, 한계도 분명히 존재했다. ‘강철비’의 후속 웹툰은 영화 상영이 완전히 끝난 후에도 약 5개월 간 이어졌으나 영화 상영이 종료된 이후에는 그 관심도가 급격히 하락했다. 또한 후속 웹툰이 웹툰 자체로 평가받지 못하고 영화와 끊임없이 비교당해야만 했다는 한계도 보였다.
아트 슈피겔만 분석 및 감상문I. 서론, 즉 는 미국의 저명한 만화 잡지인 지의 공동 창설자이자 편집자인 아트 슈피겔만이 그린 그래픽노블 - 만화와 소설 중간 형식을 취하며, 일반 만화보다 철학적이고 진지한 주제를 다룬다 - 이다. 는 '구겐하임상', '전국도서비평가협회상', 1992년 '퓰리처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전세계적으로 15개국 이상의 국가에 외국어판이 발간되었다. 이 작품은 작가 '아트 슈피겔만'이 자신의 아버지인 '블라덱 슈피겔만'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세계2차대전 당시 유태인 생존자의 이야기를 만화로 풀어내고 있다.그렇다면 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간략하게 요약하여 설명해보겠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은 뉴욕에 살고 있는 아버지인 블라덱 슈피겔만을 찾아가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듣게 된다. 블라덱 슈피겔만은 유복한 사업가의 딸인 아냐와 결혼하며 폴란드에서 사업을 하게 된다. 그러나 곧 세계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게 된다. 폴란드의 국민들은 나치의 인종정책으로 극심한 수난을 겪게 되고 슈피겔만의 가족들 역시 전재산을 빼앗기고 도망다니는 처지가 된다. 이내 나치에게 체포당한 가족들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게 되고 매일매일을 겨우 연명하다 마침내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 혼란의 과정에서 블라덱은 아내와 헤어지게 된다. 그러나 결국 고향인 소스노비에츠에서 아내인 아냐를 재회한다. 는 이러한 아버지의 얘기를 들은 아트 슈피겔만이 윗세대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본론에서는 이러한 가 어떠한 표현 방법과 전개 방식을 사용한 작품인지 알아보려고 한다.II. 본론1) 구성의 특징책은 유태인 학살의 생존자인 블라덱 슈피겔만을 그의 아들인 아트 슈피겔만(아티)이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전혀 동질성이 없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구성이다. 즉 블라덱 슈피겔만이 아우슈비츠를 겪는 과거의 이야기와 다 늙어버린 블라덱 슈피겔만의 현재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아트 슈피겔만은 유태인 대학살에 관한 이야기들을 만화 안에 디테일하게 그려내며 독특한 내러티브 전개를 유지한다. 이러한 구성이 의의를 갖는 점은 독자에게 다소 낯설고 먼 이야기로 느껴질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을 직접적으로 마음 속에 와닿게 해준다는 점이다. 또한 이러한 방식은 세대가 다른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점과 세대차이를 통해 나타나는 갈등에 독자가 쉽게 이입할 수 있도록 한다.2) 은유적 표현'쥐'는 등장인물들을 동물로 표현하고 있다. 유태인은 쥐, 독일인은 고양이, 폴란드인은 돼지, 프랑스인은 개구리, 미국인은 개라는 당시 국가간의 상관관계를 동물간의 상관관계로 치환하여 은유한다. 아트 슈피겔만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제3제국에서 제작한 어떤 선전영화를 보니, 게토 주변에 웅성웅성 모여 있는 유태인이 나오더군요. 그러더니 화면이 갑자기 하수도 주변에 모여 있는 쥐로 바뀌는 거예요. 그리고 또다시 유태인이 비춰지더군요." 결국 제목인 가 유태인을 상징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3) 만화적 표현아트 슈피겔만은 '쥐'에 몇 가지의 만화적 장치를 사용했는데 다음과 같다. 우선 앞서 구성의 특성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현재의 아버지와 과거의 아버지를 한꺼번에 다루는 이중화법을 사용했다. 또한 자신이 과거에 그렸던 작품인 를 에도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이 만화에 더욱 실화로 몰입할 수 있게 하였다.4) 역사적 의의쥐는 역사의 기록과 해석이 들어있는 만화이다. 만화의 재미를 추구함과 동시에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전기문학의 요소를 가지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 작품은 아트 슈피겔만의 아버지 세대에 대한 풍자가 곳곳에 들어있으나 그것이 독자에게 강압적인 의미 주입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독자가 작품 속 시대상을 따라가면서 나름대로 파악하고 해석을 내놓도록 여지를 주는 것이다. 이는 만화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보통 '만화'라고 하면, 만화적인 특성을 활용하여 현실을 도피하거나 과하게 부풀리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쥐는 상당히 실험적인 구성과 실화를 오가는 독특한 방식을 보였기 때문이다.III. 결론 - 에 대한 나의 감상아무래도 ‘만화’라는 타이틀이 붙어있기 때문일까? 나는 처음 쥐의 제목과 표지만을 접했을 땐 ‘다소 가벼운 전개방식의 옴니버스 만화가 아닐까’ 하고 추측을 했었다. 내가 지금껏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동물’이 나오는 ‘만화’는 대개 그랬기 때문이었다.그러나 제목의 ‘쥐’가 은유하는 대상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제목에 있던 문양이 ‘나치’를 의미함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만화를 편하게 감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마치 가슴에 납덩이를 올려둔 것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갔다. 비록 나는 그 시대의 사람도, 그 나라의 사람도 아니지만 블라덱 슈피겔만의 얘기에 엄청난 몰입감과 슬픔을 느꼈다. 유태인의 아픈 역사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는 왠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두 세대의 갈등과 이해에 몰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작품 속에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중화법’ 역시 큰 작용을 했다.
< 알베르 카뮈 ? ‘페스트’ 독후감 >페스트의 이야기는 1940년대, 폐쇄된 도시 오랑 시를 무대로 펼쳐진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페스트’라는 걷잡을 수 없는 재앙과 절망에 대항해 싸우는 주인공들의 각기 다른 입장이 서서히 극을 달구고, 이끌어 간다.실제의 재앙은 친히 날씨를 알려주는 일기예보와는 전혀 다르다. 페스트는 예고 없이 평화로운 오랑 시를 기습했다. 하지만 그 절망감이 오랑시 주민들의 피부에 닿기까지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전과 다름없는 평화로운 일상에 젖은 주민들의 모습, 오랑 시를 폐쇄하지 않고 해결방안을 모색하려는 시장.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페스트의 초반부를 읽고 있자면 답답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기분이 든다. 그 이유는,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 내가 사는'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페스트라는 전염병에 휘말린 오랑 시를 보고 코로나 19로 혼비백산에 빠진 지구를 떠올리는 건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ㅡ특히나 현시점에선 말이다.ㅡ 그리고 마치 이러한 미래를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이, 재앙에 대처하는 인간의 안일한 행동 패턴이 적나라하게 서술된 대목에선 대신 얼굴이 낯 뜨거워지기까지 했다.제목 '페스트'는 단순히 작중의 병원균 '페스트'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페스트는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나 몰아닥칠 수 있는 '팬데믹', 즉 '공동체의 위기상황' 그 자체를 상징한다.주목할 점은 이처럼 공동체에 커다란 재앙이 닥쳤을 때, 다양한 인간군상이 어떻게 감정을 드러내고 행동을 하느냐였다. 흔히 인간은 극한 상황에 몰렸을 때 본성을 드러낸다고들 말한다. 특히, 전염병이나 전쟁과 같이 '내가 왜 이렇게 힘들어야 하나?' 같은 감정적인 호소가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선 더더욱 그렇다. 작중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궁지에 몰려 개개인의 바닥을 드러낸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점은 그러면서도 각자가 지키고 싶은 가치를 끝까지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집단의식과 개인의식. 알베르 카뮈는 그 양극에 적절히 인물을 배치해 둔 채 간접적으로 독자들에게 물음을 던진다."당신은 누구의 입장에 공감하는가?" 그리고,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나 역시 책을 읽으며 나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물음의 답을 찾기 위해 더더욱 인물들에 몰입해야만 했다.그러나 나는 이 과정에서 시원한 입장 정리 대신 딜레마를 얻었다. 이 소설에서 ‘객관적 윤리성'이 짙은 인물은 의사인 베르나르 리외와 그의 아들인 타루이다. 그들은 개인의 행복보다 사회의 안녕을 중요시하며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머리로는 그들의 윤리적인 모습을 옳다고 여기면서도, 어딘가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괴리를 느낄 찰나였다." 내가 관심 있는 건,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거예요. "주연도 아닌 랑베르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이 대사가 가슴을 쾌감으로 요동치게 했다. 읽으면서도, 다 읽고 나서도 분명해졌다. 나는 랑베르에게 공감이 갔다. 결국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내 자아가 존재하는 이상 사회의 번영과 안녕이 내 행복 위에 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모든 사람이 랑베르처럼 행동한다면 인간은 극한 상황을 이겨내고 다음 단계로 향할 수 없을 것이다. 커다란 딜레마의 굴레에 빠져든 셈이었다. 마음은 랑베르에 공감하지만 결국 '모두를 위해서'라는 빈껍데기 같은 말로 치장한 채 겉으로는 리외와 타루를 지지하고 있는 자신의 이중적인 면모에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