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 (마태복음 26장 36-46절)본 책은 저자의 소논문과 설교집을 담은 것으로, 특히 고난주간 전후에 담임 교회에서 선포한 설교가 담겨있다. 이 파트는 겟세마네 동산에 오른 사건에 대한 본문으로, 짧지만 풍성한 내용의 해석과 적용이 담겨있다. 그중에서 가장 동의한 부분에 대하여 발표를 해보고자 한다.저자는 본문을 조직신학적 관점보다 성경신학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에 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고통스러운 죽음만이 아니라, 죄짐을 포함하며, 아버지와의 관계조차 단절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라는 것에 집중된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두려움을 첫 번째 기도에서 두 번째 기도로 넘어갈 때의 과정에 집중하여, 결정에서 결단으로 나아갔음에 초점을 맞추었다. 첫 번째 기도의 “만일 가능하다면 잔이 지나가게 하소서.”가 ‘이제는 끝나게 하소서’라는 결정의 기도였다면, 두 번째 기도의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으면 아버지 원대로 하겠나이다.”는 ‘잔을 마시겠습니다’라고 하는 결단의 기도로 예수님의 표현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두 번째 기도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부정어인 “할 수 없거든" (ε? ο? δ?ναται)을 통하여 일종의 단념이자, 저자의 표현으로 ‘결단’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예수님의 변화에 대한 저자의 초점에 대해서 동의한다. 어떻게 보면 예수의 감정적 소용돌이를 통하여 그의 완전한 인성을 드러내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결단으로 나아가 자신의 자아(ego)를 넘어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을 넘기신 예수님의 헌신에 집중한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복음과 달리 두 번째 기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저자가 마태복음의 겟세마네 동산 본문에서 두 번째 기도로 넘어가는 과정에 집중한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졌다.다음으로, 마태는 세 차례의 기도와 잠든 제자들을 세 차례 찾아가는 장면들을 보다 분명하게 진술하고, 이러한 구조는 눈앞에 다가온 위험 앞에서도 육신이 연약하여 준비하지 못한 베드로가 세 번의 부인하는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보통 겟세마네 기도와 베드로의 세 번의 부인을 대조하여 설교하는 것이 일반적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물론 저자도 언급했지만, 주기도문의 내용과 같은 말을 세 번 한다는 것을 연관 지어 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겟세마네 동산의 원어인 ‘Γεθσημαν?’, 즉, 착유기, 기름 골짜기라는 뜻에서 비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세 번의 기도를 올리브 기름을 세 번 짜내는 과정에 빗대어 설교한다. 올리브는 기름을 총 3번 짜내어 각 용도에 맞게 사용한다. 올리브 기름을 짜내듯이 예수님의 피와 땀을 짜내는 기도를 하셨다는 비유는 보았지만, 기름을 세 번 짜내듯 세 번 기도했다고 대조한 설교는 없었다. 올리브 세 번 짜내는 비유를 다른 측면에서 연구하고 싶어 올리브를 언급하는 강해집과 주석, 논문을 총 28권의 부분을 찾아보았지만, 저자와 같은 비유는 찾을 수 없었다. 이 올리브 기름을 짜내는 비유를 통하여, 피와 땀을 짜내는 세 번의 기도의 중요성을 표현한 저자의 통찰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저자의 표현처럼 ‘온몸과 마음과 영을 으깨어 짜 기도하신 예수님’의 헌신을 이해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에 저자의 올리브 세 번 기름 짜는 대조가 적절하다고 생각하고 동의하며, 글을 마친다.
바빙크의 경륜(작정과 예정)과 창조에 대한 이해와 정리“나는 독서 범위(2:423-635)를 한 번 이상 정독하고 작성했습니다.”하나님의 경륜 : 하나님의 사역은 영원부터 영원까지이다. 모든 하나님의 사역들은 내재적인데, 그 사역들은 하나님의 외부에 있거나 있게 될 어떤 것과 연관이 없으며, 신적 존재 자체 내에서 발생하여 그 존재 안에 있는 세 위격들의 상호 관계와 연관된다. 하나님의 순수 내재적 사역들은 하나님의 존재 밖에 있게 될 피조물들에 연관된 것과 구분된다. 이것들은 다시 하나님의 내적 사역들과 외적 사역들로 나뉜다.(424) 성경은 하나님의 작정을 추상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역사 자체 가운데 계시한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경륜을 밝게 비추어주는데, 하나님의 모든 사역들은 영원부터 자신에게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확정된 경륜과 예지에 따라 발생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특히 구속 사역과 연관된다.(427) 기독종교 밖에서도 예정과 자유의지에 대해 다양한 논쟁이 있었다, 철학은 번갈아 가며 범신론적 결정론이나 이신론적 자유론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은 죄의 상태에 있는 인간에게도 자유의지가 있다고 여겼다. 이슬람에서 하나님은 절대적인 전능, 독단인 반면,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초대 기독교회에서 하나님의 경륜이란 예지와 그 예지에 따른 보상과 심판의 결정이었다. 하나님은 믿지 않을 자들을 미리 알고서 불신앙에 넘겨주고, 공로를 지닌 자들을 미리 보고 선택한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그리스 교회의 지속적인 입장이었고, 인간은 죄로 인해 약해져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선을 원할 수 있으며, 제공된 은혜를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431) 펠라기우스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인간 또한 선하고, 원죄란 없고, 죽음이란 죄의 형벌이 아니었다.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이 창조를 통해 먼저 인간에게 자연적 능력을 주었고, 더 나아가 공로에 따라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사람들에게 도덕법과 신적 도움을 제공한다. 영구적인 파멸에 예정된 자들”, “저주 받기로 예정된 세상”이라고 말한다.(434) 그러나 예정은 주로 구원을 위해 미리 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선에 있어서 예정이 필요한 반면, 악에 있어서는 예지로서 충분한데, 하나님은 구원과 그 구원에 이르는 수단들을 작정하듯이, 멸망과 그 수단들, 죄를 동일한 방식으로 작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예정이란 항상 적합한 예정, 즉, 구원으로의 예정과 따라서 은혜로의 예정이다. 예정이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인 것처럼, 유기는 공의의 행위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미덕을 계시한다.(435) 루터파가 루터와 종교개혁 전체의 본래 입장을 점점 더 포기했던 반면, 개혁파는 그 입장을 충실하게 고수했다. 따라서 분리의 원인을 개혁파에게서 찾아서는 안 된다. 츠빙글리는 단지 인간론적인 근거만이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존재에서 도출한 신론적 근거에 기초하여, 가능한 한 단호하게 예정을 가르쳤다.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부드럽게 말했으나, 스트라스부르크에서의 자신의 로마서 연구를 통해 인간의 노예 신분과 하나님의 선택에 관하여 점차 더욱 확고한 고백에 이르렀다. 그는 예정이 부인되거나 반대를 받을 때마다 예정을 강력하게 옹호했다.(445) 예정론은 칼빈에 의해 모든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에 수용되었다,(446) 초기의 많은 신학자들은 선택 교리를 신론이 아닌 구원론에서 취급했다. 따라서 그들은 로마서 9-11장의 죄와 은혜의 교리에서 선택의 교리로 올라갔고, 또한 에베소서 1장 3절의 그리스도의 복에서 출발한 사도 바울의 순서를 따랐다.(447) 개혁파 내부에서 또 다른 차이가 곧이어 발생했는데,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의 차이다. 펠라기우스주의에서는 예지되었으나, 예정된 것은 아닌 인간의 타락에 근거하여, 그리스도를 보내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며, 모든 사람에게 선포되게 하며, 그들 모두에게 구원 받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려는 작정과 한편으로 예지된 신앙과 인내, 그리고 예지된 불신앙에 근된 집단을 전제한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작정의 순서에 이해는 타락 후 선택설인 것이다.(450) 아우구스티누스의 많은 추종자들은 나중에 이중 예정 교리에 이르렀다. 사망으로의 예정이 영광으로의 예정과 나란히 섰으나, 동일한 의미에서 이해될 수 없었고, 그러므로 소극적(선행적)유기와 적극적(후행적) 유기로 구별되었다. 소극적 유기는 타락에 선행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이며, 선택과 마찬가지로 응보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타락 전 선택설의 유기는 전적으로 소극적(선행적)으로, 일부의 사람들을 선택하지 않고, 그 사람들의 타락을 허락하고, 그 타락 후에 영벌의 운명에 처하게 하는 하나님의 작정으로 이해되었다. 본질적으로 루터, 츠빙글리, 칼빈 모두 타락 전 선택설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바로 이것을 가르쳤다.(452) 교회는 지속적으로 타락 전 선택설을 반대했기에 그 어떤 개혁주의 고백서에도 실리지 않았다. 하지만 네덜란드 총대들과 외국 총대들, 제네바의 총대들의 전체적인 판단은 분명 개혁주의지만, 타락 후 선택설의 입장이었고, 부드럽고 온건한 용어들로 제시되었다. 그래서 총회는 결국 선택을 “하나님의 작정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죄과로 말미암아 최초의 무지한 상태에서 죄와 멸망에 빠진 전 인류 가운데서 선택했던” 하나님의 작정으로 정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타락 전 선택설을 의도적으로 정죄하진 않았다.(456) 하나님의 경륜은 시간 속에 존재하고 발생할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영원한 작정으로 이해된다. 성경이 어디서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모든 존재와 발생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의 실현이며, 그 모델과 근거는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여호와의 경륜의 실재에 대한 의견 차이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자기 생명과 의식을 인정하지 않는 범신론만이 이것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463)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외적인 사역이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정과 수행은 구별무한한 능력의 행위이므로 자연 또는 은혜에 있어서 그 어떤 피조믈에게도 전달될 수 없다. 기독교 신학은 만장일치로 창조 사역을 삼위일체 세 위격 모두에게 돌린다. 성경은 이 점에 있어서 의심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을 통해 만물을 창조했다. 이 맥락에서 성자와 성령은 의존적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성부와 함께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인 것처럼, 그와 더불어 창조 사역을 수행한 독립적 원리들, 창조자들로 여겨졌다.(528) 삼위일체와 창조론은 운명을 서로 같이 한다. 삼위의 본질적 일치에 대한 고백은 자연히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은 공통적이며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수반한다. 그리고 반대로, 창조의 삼위일체적 사역에 대한 반대는 삼위일체론을 이탈한 증거다.(530) 비록 창조가 삼위일체 전체의 사역이라 할지라도, 성경에서 창조가 여전히 성자와 고유한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세상은 물론 영원한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세계 관념은 하나님의 의식 안에서 영원했다. 성부는 자신의 모든 생각들, 자신의 본질 전체를 단 하나의 인격적 말씀 안에서 표현했기에, 세계 관념은 역시 로고스 안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어떤 형태, 형성된 형태가 아니라 모든 형성된 것들의 형태”라고 불릴 수 있다.(533)영적 세계 : 성경에 따르면 창조는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 하늘과 땅,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로 나뉜다.(555) 천사들의 실재는 철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존재의 단계에서 형태들의 공백과 본성의 비약이 없도록 인간에서 시작하여 위아래로 온갖 종류의 피조물들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는 라이프니츠의 논증은 수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논증은 결과적으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구별을 없애고, 영지주의적 범신론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은 그러한 실재의 가능성에 대해 그 어떤 논증도 더더욱 제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정신적 존재이며, 영혼의 생명을 물질대사로 해설할 수 없는 한, 미에서 선과 악은 우리 눈에 비친 세상 외에 다른 세상에 근거한다. 천사에 대한 믿음은 그 세상에 대한 표현이다. 이 믿음이 종교의 본질과 중심점을 좌우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과 연관된다.(559) 인간과는 다른 더 높은 이성적 존재들이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반대되기 보다는 오히려 찬성을 받는다. 그러한 고등 존재들에 대한 믿음은 종교에서 우연 이상의 구성 요소다. 그리고 계시는 이러한 믿음을 통해 실재성과 생생함을 얻는다. 하지만 이 천사론이 다양한 종교와 강신술적 이론에서 왜곡되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경계선이 지워지며, 계시와 종교 사이의 구별이 부인되는 반면, 성경의 천사론은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결코 빼앗지 않고, 종교의 순수성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성경의 계시는 기독교인의 천사에 대한 믿음의 확고한 토대이기도 하다.(562) 천사들은 모든 속성들, 즉 피조된, 영적, 이성적, 그리고 도덕적 속성들로 인해 인간과 유사하다.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천사들의 통일성이 전면에 부각되고 그들의 상호 다양성이 배후로 사라지기 때문에, 천사와 인간의 차이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차이점보다는 이들의 유사성이 훨씬 눈에 띤다. 인간과 천사 둘 다 인격적, 이성적, 도덕적 존재다. 둘 다 본래 지식과 의로움과 거룩으로 지음 받았다. 둘 다 통치권, 불멸 그리고 복을 받았다. 둘 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그들의 차이는, 천사가 아닌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을 통해 가장 엄격하게 견지된다.(576) 인간과 천사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을지라도, 차이가 결코 적은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여러 가지 특징들이 천사들에게 있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단지 인간과 천사의 공통점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개신교는 천사들에 대한 종교적 숭배를 거부함으로써 천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생활에서 필수적 요소가
감상문‘주님이 차려주신 밥상’이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부모님과 같은 주님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마치 따듯한 밥을 차려놓으시고, ‘춥지? 식기 전에 어서 먹어.’라고 다독이시는 위로의 밥상이 떠올랐다. 그러한 위로의 주님을 경험하기를 소망하며 책을 읽기 시작하였다. 시편 23편, 누가복음 15장, 요한복음 21장을 본문으로 3편의 강해를 담은 책으로, 저자의 신앙의 여정과 목회자와 설교자로의 사역에서 경험한 위로와 소생의 은혜를 담은 값진 책이었다. 저자는 시편 23편, 누가복음 15장,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에서 나타난 주님의 속성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 세 편의 본문은 하나님의 존재를 직·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편 23편은 목자로, 누가복음 15장에서는 아버지로,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으로 존재를 보여주고 있어 신론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성경적 가정(假定)을 통해서 추상하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특별 계시에 의해 발견되고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본 책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속성 중 한 단어가 ‘목자’이심을 밝힌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만이 나의 목자이심을 고백하였다. 목자는 양을 치는 사람으로서, 양을 재우고 먹이며, 위험한 길로 가지 않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참된 목자의 보살핌을 받을 때, 양들은 부족함이 없이 살을 찌우며 성장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저자는 세 편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성경적 가정으로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세 본문 중에서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의 두 번째 아들은 어쩌면 반유신론(反有神論)들을 주장하는 무신론(無神論) 중 실천적 무신론자처럼 보일 수 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하나님)에게 자신의 몫을 받아 타지를 떠나 호의호식하며 잘 지내다가 재산 탕진과 기근으로 인하여 당하게 된 비참한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 집에 돌아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관념이 전혀 없지 않으나 그것을 억압하며 잊어버리며 하며 순풍에 행선 할 때는 무신 생활을 즐겨 살되, 돌연 생명의 위기에 처하면 꿇어앉아 기도하기도 하는 기독교 문화 가운데 사는 않은 사람이 이에 해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른다.또한, 이 본문들은 그릇된 신관(信管)중 범신론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자연신론(초연신론)은 그의 초월성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내재성을 희생시켰고, 범신론은 하나님을 세계와 동일시하여 그의 내재성을 역설함으로써 그의 초월성을 무시하였다. 즉, 창조하셨던 신(하나님)께서 그 후 내버려 두셔서(방치) 자연적으로 그들이 자연이나 환경에 맞게 알아서 살아간 것 아니냐는 주장은 올바르지 않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에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지킬 필요가 있다. 이것을 전재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무한성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편 23편에 목자는 양들에게 풀과 물을 먹일 때 그들이 자유롭게 먹을 수 있게 하지만, 그들을 사자와 곰 같은 맹수로부터 지키며, 그들이 좋은 풀과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인도하며, 그들이 편안하게 몸을 뉠 수 있는 곳을 인도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우리를 인도하시며, 진리에서 능동적으로 나아가시는 자발적 사랑이며, 어디에나 계시는 무한한 사랑이다.누가복음 15장에서는 아들이 원하는 대로 재산의 절반을 내어주지만, 그 아버지는 한 시도 그 아들을 잊은 적이 없으며 그 아들을 기다렸으며, 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반겨 맞아 주었으며, 자신에게 역정을 내는 큰아들에게는 본인(아버지)이 존재하고 있지만, 내 것이 네 것이라는 말을 통해 누리지 못하는 큰아들에게 깨달음을 선사하였다. 실제로 많은 설교의 본문으로 사용되는 탕자의 비유는 둘째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많지만, 첫째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설교도 많이 있다. 설교자는 이미 예정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내어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요한복음 21장을 통해 예수님은 부활 후 천사들을 통해 먼저 갈릴리에 가 계신 것도 있지만, 그들이 자신을 배신한 모습도 알고 있으면서, 하고 원래의 직업으로 돌아가 어부로 돌아가는 것도 보시고, 그들이 밤새 그물질을 하는 것을 보고 계셨지만, 그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내리라고 하며, 그들에게 만선(滿船)의 축복을 주셨으며, 결정적으로 3번이나 본인을 부인하였던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되려 질문을 하시면서 다시 그에게 사도권을 회복시켜주셨다. 이러한 오래 참으시는 사랑은 패역한 죄인들을 즉시 멸하시지 않고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덕임을 우리는 전해야 한다.
(참고문헌·각주 제외 낱말 2955개)목 차1. 서론2. 권징(Discipline)의 개념2.1 권징의 정의2.2 권징의 근거2.3 권징의 성질3. 권징의 역사적 배경3.1 칼빈과 재세례파의 관계3.2 권징의 필요성3.3. 권징의 결과4. 칼빈의 권징의 특징4.1. 표지(charitable judgement)와가시적·불가시적 교회4.2. 권징의 과정과 목적5. 재세례파의 권징의 특징5.1. 완전주의 교회론적 권징5.2. 권징의 과정과 목적6. 칼빈의 재세례파 권징의 대한 반박7. 칼빈의 권징을 통한 한국교회의 권징에 대한 고찰8. 결론1. 서론본 글은 16세기 유럽에서 있었던 칼빈과 제세례파의 권징에 대한 연구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 진영의 권징의 특징을 살펴서 역사적 사건의 본질을 살펴보는 데 있다. 사건종교개혁의 목적은 ‘회복’에 있었다. 종교개혁은 복음의 회복, 교회의 회복, 성례의 회복, 말씀의 회복이 일어나 당시 카톨릭의 부정부패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밝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회복의 발걸음 속에서 존 칼빈은 교회와 도시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따르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기 위해 칼빈은 성경적인 교회와 성도, 도시를 위하여 ‘권징’이라는 교회적 제도를 시행하였다.본 글에서는 먼저 권징의 정의와 근거, 성질의 개념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권징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시작되었고, 사용되었는지를 다룰 것이다. 다음으로 칼빈의 권징의 특징을 다루며, 어떻게 칼빈이 제네바 도시에서 권징 제도를 시행하였는지 살펴보고, 제세례파의 권징의 특징을 탐구한다. 그러한 재세례파의 권징에 대한 칼빈의 반박을 통하여 어떤 주장이 개혁주의 입장에서 올바른가를 살펴볼 것이다. 본 글의 결론에서는 칼빈의 권징을 통하여 한국교회 권징에 대해 고찰하며, 실태를 돌아보아 권징의 본질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지 제언할 것이다. 본 글에서 연구하는 권징은 개혁주의 입장에서 칼빈과 재세례파의 논의를 중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칼빈의 주장을 담았으며, 다른 나라에차 제네바 사역 중, 1537년 3월 9일에 재세례파 두 사람이 제네바에서 체포되어 추방되었고, 3월 29일에는 재세례파 경향을 가진 무리들과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칼빈은 후에 아내가 되는 이들레트 드 뷔르의 첫 번째 남편인 보메로메누스와 논쟁을 벌였다. 칼빈은 추방 이후 신앙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한 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활동하는 재세례파와 접촉하였다. 재세례파들의 영향이 컸던 방직공 조합(tailors’ guild)에 가입하여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개혁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재세례파를 만나서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재세례파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 수 있었다. 칼빈은 재세례파의 교리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지만, 재세례파 출신 아내와 결혼한 점, 재세례파 지도자들을 포기하지 않고 교회의 교제 안으로 받아들인 점을 볼 때, 사람 자체에 대한 불신은 가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3.2. 권징의 필요성제네바 도시의 권징 제도를 시행한 칼빈은 권징의 신학적 개념을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크에 체류하고 있을 때, 마르틴 부쳐와 외콜람파디우스의 영향을 받아 구체화하였다. 제네바로의 귀환은 칼빈으로 하여금 권징의 개념을 현실에 접목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되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교회의 독립된 치리권을 확보하고자, 교회의 일체성과 존속을 위한 권징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기독교 강요, 성경 주석, 편지, 소논문과 보고서 등에서 권징에 관한 논의로 가득 채웠다. 컨시스토리를 설치하여 제네바 교인들의 삶을 거룩하게 성화된 모습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권징은 교회의 통일성과 순수성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순종과 영적 건강으로 인도하는 “아버지의 회초리” 같다고 할 수 있다.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 된 곳으로서, 성도는 성령과 믿음으로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듯이, 나머지 몸의 모든 지체들과도 하나로 연결되었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모든상의 권한으로 이 사실을 시의회에 통하여 처방하게 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다. 사적인 죄악은 은밀하게 훈계했으며, 공적인 죄악이라도, 개선의 모습이 보일 경우, 훈계를 멈췄고, 다시 잘못 행동할 경우 다시 훈계하였다. 칼빈은 스스로의 죄를 자백하고 삶의 태도를 고칠 때까지 출교를 시켜야 한다고 규정하였고, 이것은 성경과 일치하는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권징의 시행에 대한 기대는 하나님 앞에 겸비해져서 자신의 잘못을 더욱 깊이 인정하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칼빈은 왜 그렇게 권징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을까? 칼빈은 구원 교리는 교회의 영혼이요, 권징은 교회의 힘줄이라고 보았다(엡 4:16). “칼빈은 성도의 훈련과 권징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을 막고, 죄인에게는 회개를, 공동체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칼빈이 1541년 제네바로 다시 돌아오면서 시의회에 제시한 조건은 무엇보다 권징의 회복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칼빈은 권징의 세 가지 목적을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에서 말하고 있다.첫째, ‘교회의 몸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함’이다. 칼빈은 교회 자체가 성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한다(골 1:24).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의 말씀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6장』 ‘성도들의 친교’에서는 교회의 일체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성령에 의해,또 믿음에 의해 연합된 모든 성도들은 그의 은혜들,고난들, 죽으심, 부활, 또 영광에 있어서 그와 함께 교제한다.”칼빈은 이러한 연합된 교회가 더럽혀지지 않도록 교회의 가시적인 표지인 말씀과 성례를 무분별하게 거행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은 교회 내에서의 기독교적인 삶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신성함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신중함을 요구하였고, 그렇기 위하여 교회의 권징이 필수불가결한 존재임을 말하였다.둘째, ‘죄의 오염을 막기 위해서’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되듯리의 근거는 마태복음 18:15-20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두고 있다. 또한, 출교의 목적은 세례를 받은 공동체의 일치와 순수성을 강조하며, ‘우리 모두가 같은 영 안에서 그리고 같은 사랑 안에서 같은 떡을 떼고 같은 잔을 마시게’ 하는 데에 있다.6. 칼빈의 재세례파 권징의 대한 반박칼빈은 자신의 저술 대부분에 걸쳐서 재세례파의 완전주의를 비판하였다. 교회론에 있어서 칼빈은 교회가 산 공동체, 즉 지상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왕국이어야만 했다. 이 의미는 가능한 한 거룩함에 가까이 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에 따른 교회의 임무는 성도의 점진적인 성화에 기여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교회는 이미 택함받은 신자의 모임일지라도, 재세례파와 같이 구성원들의 완전함을 기대하며 완전한 교회를 구성하려 하기보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의지해야 하는 곳이다. 칼빈은 우리의 삶이 완전주의를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완전한 복음만을 호흡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며, 복음적인 완전함을 엄격히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축출당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완전함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복음은 우리가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규범적 목표로서 우리 앞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김요섭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세례파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완전한 순결함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와 주권을 임의로 제한해버렸다.”칼빈은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 사이에 중요한 선을 긋는데, 전자는 선인과 악인,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를 모두 포함하여 현재 경험되고 있는 지상의 공동체였고, 비가시적인 교회는 선택된 자들로만 이루어진 신앙과 희망의 대상이었다. 가시적인 교회와 비가시적인 교회의 구별은 가시적인 교회에 선택된 자와 유기된 자 모두가 포함될 것을 표현한 것이다. 누가 불가시적인 교회에 속하여 궁극적인 구원을 얻을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참된 자녀들은 불가시적이었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8. 결론오늘날 현대사회는 교회의 권징에 대하여 관심도 없을뿐더러, 더 나아가 권징의 과정에 대해서 듣는다면 교회에 대한 혐오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은 기조로 현대사회는 나아가고 있다. 기독교 신앙은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분위기는 도덕적 개인주의를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당연한 처사이다. 진리를 외치는 기독교의 도덕적 타락의 모습은 교회의 인식을 낮추었다. 현대 교회가 교회 권징을 포기하고 교회 권징의 실행에 있어 실패한 직접적인 결과가 세상의 불신과 경멸의 원인이며, ‘권징의 실패로 인해 교회의 혼돈이 야기 되었다’고 말한 아담스(J. Adams)의 지적은 지극히 옳다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떨어진 위상과 인식을 회복해야 한다는 목회자들의 부담감은 교회가 백화점이 되도록 이끌었다. 성도들이 교회로 오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교회의 수적 부흥주의의 기저에 깔린 마음가짐을 주의해야 한다. 물론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싶은 취지는 이해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해결 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교회의 회복’이다.교회의 회복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한국교회가 칼빈의 권징 제도를 통해서 무엇을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지가 여기에 담겨있다. 칼빈의 권징 제도를 통해 필자가 제언하는 교회의 회복이란, 첫째, 한 사람의 신앙의 회복을 통하여 한 교회가 회복됨의 정신을 한국교회가 마음에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한 성도 개인이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돌아보고, 신앙을 회복할 수 있도록 그 과정을 돕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역할이다.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교회가 먼저 도덕적으로나, 신학적으로나 올바르게 서야 할 것이다. 둘째, 교회는 성도를 정죄하는 곳이 아닌,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칼빈의 권징은 재세례파의 출교와는 달리, 사랑을 기초로 하여 믿음이 연약한 성도를 다시 일으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를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08.
역사서『열왕기하 9장 1-37절을 중심으로』교수님강 의 명역사서담당교수님교수님학번반이름- 1 -- 목차 -목차 1주해1. 열왕기상하에서 본문의 역할22. 문법적 주해23. 문예적 주해44. 역사적 주해65. 정경적 주해86. 신학적 주해10참고문헌 12설교문 13주해열왕기상하에서의 본문의 역할과 문법적-문예적-역사적-정경적-신학적 주해1. 열왕기상하에서 본문의 역할열왕기하 9장은 북국 이스라엘의 제10대 왕인 예후가 일어나서 아합의 아들이자 제9대 왕인 여호람과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징벌한 내용이다.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오므리 왕조를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아합이 아내 이세벨과 함께 이스라엘이 바알을 숭배하도록 선동하고 선지자들을 죽인 것에 대한 죗값과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밭을 폭력으로 취한 것에 대한 심판의 본문이다. 원래 하나님은 아합이 근신하자 아합 세대가 아닌 그의 아들 세대에 가서 이 일을 하시겠다고 심판을 보류해주셨다(왕상 21:27~29).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가 온 것이다. 우리가 이미 수차례 봐온 것처럼 하나님은 한 사람의 신실함 때문에 자손 대대로 많은 복을 내리는 분이지만, 한 번 선언하신 심판의 약속 또한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꼭 지키시는 분이다. 예후가 본문에서 이룬 주 업적은 아합 집안과 연관된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일이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주님의 분노를 아합 집안에 쏟아부은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예후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신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2% 부족한 개혁이었기에 아쉬움을 남긴다. 예후의 아합 집안을 제거하는 업적을 회고하고 있는 본 텍스트는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자세히 오므리 왕조의 몰락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합을 비롯한 이 왕조의 왕들이 참으로 악한 짓을 많이 했음을 고발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저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적절한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2. 문법적 주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칼 완료 1인 공성 단수 특별히 A"는 아합의 집을 여로보암과 바아사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그 멸망의 상황을 상기시킨다. B'-B"는 심판의 이유와 대상을 구체화한다. B는 심판의 원인이 된 이세벨에게 “나의 종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의 대가를 찾는 것이다. 이것은 열왕기상 18:4,13의 내용, 즉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인 사건을 가리킨다. 또한 B'는 아합에 속한 모든 자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선언한다. B"는 더 나아가 그 사건의 주체인 이세벨을 개들이 먹을 것을 선언하는데, 이것은 열왕기상 21:23~25의 예언이 곧 성취될 것을 드러낸다. 따라서 아합의 집에 대한 예후의 장면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한 선언이다.15b-29절은 선지자 생도의 신탁이 성취되는 다음 단계, 즉 요람과 아하시야 모두의 종말을 보여준다. 이 단락은 신속하게 이동하는 내러티브의 결과들과 간략한 회고와 설명적 해석들 사이에 발생하는 운율적인 교대로 전개된다. 구문론적으로 이것은 와우(??) 계속법에 미완료형, 그리고 주어에 완료형으로 구성된 종속절의 사용으로 이루어진다, “운율”(rhythm)은 다음과 같은 표로 나타내질 수 있다.표 : 9장 15b-29절의 운율(1)(2)15b-16a절16b-17aα절17aβ-20aα절20aβb절21-25a절25b-27a절27b-28절29절이 운율은 이차적이거나 편집적이거나 혹은 다른 어떤 삽입 구문들이 있음을 암시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 운율은 내러티브가 전개되는 속도를 보여주는 내러티브의 개요를 말해준다. 내러티브의 속도는 내러티브가 전개 되는 것과 설명적인 구절의 존재로 인해 잠시 멈추게 되는 것을 나타내 준다. 만약 이러한 운율적 교대가 의도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16b, 25b-26, 28, 29절들이 원래 내러티브에 대한 이차적 자료들이라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4. 역사적 주해왕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고대 근동 일부 지역에서 흔한 관행이었다. 이집트인들과 히타이트인들은 어떤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면 그것이 그 사람을 저승 세계많은 행위들을 없애버린 유다 종교의 개혁자였기 때문에 그러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동맹은 여호사밧 자신에 의해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5. 정경적 주해9장의 첫 장면(9:1-3)은 엘리사가 선지자 생도 중 하나에게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기 위해 기름을 붓도록 명령하는 장면을 묘사한다. 기자는 이 사건의 시간적 배경에 해단되는 열왕기상 8:25~29의 내용, 즉 아하시야와 요람에 대한 묘사, 특별히 라못 길르앗에서 아람의 하사엘과 아하시야의 요람의 전투 상황과 ‘아합의 아들’ 요람의 부상에 대해 언급하던 도중 갑자기 열왕기하 9:1에서 “엘리사 그 선지자”란 표현을 문두에 위치시킴으로 그의 행동을 주목하게 한다.예후의 소명은 아합의 집을 치는 것이엇다. 그동안 이세벨로 인해 죽임을 당한 선지자들과 여호의 종들의 피(????)를 갚는 것이 목표였다. 소년 선지자가 전한 나머지 예언은 이전에 엘리야를 통해 아합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왕상 21:21-24)을 반복한 것이었다.열왕기하 9:14~29는 예후가 요람과 아하시야를 숙청하는 장면인데 세 단계로 소개한다. 첫 단계는 열왕기하 9:14~16로 사건의 시·공간적 배경을 제공한다. 기자는 요람에 대한 ‘예후의 배반’을 기록하면서 열왕기하 8:28~29의 사건을 재진술함으로 독자의 눈을 이스르엘이라는 장소로 옮길 준비를 하는데 그곳은 열왕기상 21:17~26에 약속된 심판의 장소다. 둘째 단계는 열왕기하 9:17~26로 요람의 죽음이다. 이 또한 두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열왕기하 9:17~20로 예후의 군대가 증대되는 장면이다. 특별히 이 장면은 반복 싸이클을 통해 몇 가지를 주목하게 한다.1)샬롬 ? 요람은 파수꾼을 예후에게 파송하면서, 그리고 자신이 스스로 “평안하느뇨”라고 질문한다. 2)예후의 말 - “평안하느뇨”란 질문에 대해 “평안을 위하여 내 뒤로 돌이키라”고 답변한다. 이 대답은 샬롬의 길이 요람에게 있지 않고 예후에게 있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이런 반복을 통한 내러티브의 시간은엘리사를 엘리야를 대신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왕상 19:15~17, 19~21)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임으로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한다. 뿐만 아니라 열왕기하 9~10장에 기록된 예후가 “아합의 집”을 붕괴시키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샬롬’(???????)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한다. “아합의 집”(왕하 9:9~10; 10:10~11)과 “바알의 집”(왕하 10:23, 26)의 통치는 하나님의 땅을 우상숭배와 피로 더럽히고 하나님의 땅에서 정의를 무시함으로 ‘샬롬’을 제거했다. 여호와는 자신의 땅에 공의로움을 드러내고 백성들에게 ‘샬롬’을 주기를 원했다. 따라서 여호와는 자신의 땅을 더럽힌 아합의 집과 바알의 집을 제거하기를 원했고, 그 실행자로 예후를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열왕기하 9~10장에 기록된 내용, 즉 예후가 “아합의 집”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은 땅에 ‘샬롬’을 이루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은근히 드러내며 동시에 ‘샬롬’을 위한 도구로서 선택된 자의 행동의 면모를 상세히 전달한다.열왕기하 9:7에서 하나님께서 예후에게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라고 말씀하신 후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예후가 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똑같음을 말씀하신다. 예후가 아합의 집을 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시는 일이다. 예후가 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예후가 하는 일이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종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여러 면에서 보여준다.열왕기하 9장은 열왕기상 21장에서 하나님께서 예언한 그대로 아합의 집에 응한 내용으로, 아합이 나붓과 그 아들들까지 죽인 죄로 아합과 그 아들들까지 죽임을 당하되, 다른 곳이 아닌 나봇이 죽은 바로,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에 대한 주권을 가지신 통치자입니다. 그분은 자신이 계획하신 것을 성취하며, 약속한 바를 이루어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이십니다.대표적인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라는 박사님은 하나님을 표현할 때, “신적 통치를 하시는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역사는 우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주권자신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움직입니다. 열왕기하 9~10장에 기록된 북이슬라엘 아합왕조의 붕괴와 예후왕조의 등극은 힘의 이데올로기를 따른 반란과 전쟁이 아니라, 열왕기상 19장 16절에 기록된 우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열왕기하 9~10장은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엘리사를 엘리야를 대신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이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임으로 세상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합니다. 뿐만 아니라, 열왕기하 9~10장에 기록된 예후가 “야합의 집”을 붕괴시키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샬롬(???????)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합니다. “아합의 집”과 “바알의 집”의 통치는 하나님의 땅을 우상숭배와 피로 더럽히고, 하나님의 땅에서 정의를 무시함으로 ‘샬롬’을 제거했습니다. 여호와는 자신의 땅에 공의로움을 드러내고 백성들에게 ‘샬롬’을 주기 원했습니다. 따라서 여호와는 자신의 땅을 더럽힌 아합의 집과 바알의 집을 제거하기 원했고, 그 실행자로 예후를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열왕기하 9~10장에 기록된 내용, 즉 예후가 “아합의 집”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은 땅에 ‘샬롬’을 이루기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은근히 드러내며 동시에 ‘샬롬’을 위한 도구로서 선택된 자의 행동의 면모를 상세히 전달합니다.예후가 왕이 되다열왕기하 9:1-13은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과정을 세 장면으로 소개합니다. 첫 장면은 엘사가 선지자 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