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항우본기에 등장하는 전투과목: 한문학작품론담당 교수: 권**학번: 2006****이름: 이**제출일자: 2009.11.과목:1. 팽성 전투한(漢)의 유방이 한중에서 치고 나와 삼진을 공략하고 함양을 점령하여 도읍을 세우더니 위(魏), 한(漢)등이 다 항복해왔다. 또한, 군 세력도 만만치 않아 50만에 육박했다. 그러자 한나라 왕은 자만하여 병력을 이끌고 초패왕 한우를 치려한다.이 때 한신 대원수가 제재한다.“아직 때가 이르지 않다고 한 이유는 아직 우리 병력이 뿌리가 없어 협심이 없고, 오합지졸에 불과하며, 현재 초패왕이 제나라와 연나라를 공격하고 있는데, 조나라와 대나라가 제,연을 돕기 위해 초패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하옵니다. 분명 초패왕의 성격으로 보아 병력을 나누어 조나라와 대나라 마저 칠 것이니, 그 때 우리는 적의 허점을 찔러야 합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그러자 한나라 왕 유방은 다른 말로 대답한다.“그 때까지 언제 기다리며 현재 우리 병력이 50만이요,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하다. 또한, 항우는 제나라와 연나라와의 싸움으로 버갈 테니,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적기이다. 그렇게 초패왕이 두려우면 대원수는 삼진에 계시오. 나 혼자 초패왕을 무찌르고 오겠소이다.”한신은 잠시 움칫거리더니 허탈해하면서 수락한다. 한 왕이 격문을 전국에 뿌린다. “초패왕 항적(항우)이 초 의제(義帝)를 시해하였으니 어찌 하늘의 벌을 받지 않으리오. 모두 의기 있게 일어나 초패왕 항적을 무찌르자!”그러자 전국 제후들이 호응하여 총 60만 명이 항우의 본거지 팽성을 공격한다. 당시 팽성은 항우의 장수 팽월이 지키고 있었는데 내심 항우에 불만이 많은 자였다. 그래서 팽성을 한왕에게 넘겨주었다. 손쉽게 팽성을 장악한 유방은 말만 번지르르한 위표를 대원수로 삼는다. 역이기, 진평 등이 말렸으나 한왕은 듣지 않는다.위표는 60만 병력을 총 5부대로 편성하였다. 1부대는 은왕 사마앙, 2부대는 신양, 3부대는 하후영, 4부대는 한왕, 5부대는 위표 자신이 이끌기로, 위표 대원수가 중상을 입고 군사들의 기강 또한 피해가 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항우의 힘을 보여준 대표적인 전투, 팽성 대전이다.2. 정도성 전투장함은 멸망을 막은 건 아니지만 멸망을 늦춰준 영웅이자 다른 나라에 투항한 졸장이기도 하다.장함은 원래 무신이 아닌 문신이었다. 그것도 전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수산물을 관리하는 ‘소부’라는 직책이 문신이었다. 그러나 환관 조고가 진승과 오광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알고, 적당히 싸우다 적당히 패할 인물을 찾으니 그가 바로 장함이었다. 장함은 조고가 생각하는 그런 무능력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무신이었고, 장함도 무신의 길을 걷길 원했다. 어짜다 진시황 때 소부를 맡긴 했지만, 남몰래 병서와 무예를 익혔다. 장함은 조고의 속셈을 눈치 채고 군사들로 여산의 20만 명의 죄수들을 데리고 가길 요청했다.조고는 엄격한 통제와 질서를 요하는 전투원들을 죄수로 구성할 수 없다는 생각에 죄수들에게 대사령을 내리고 장함에게 내줬다. 장함은 진나라의 멸망을 2년 뒤로 연기시켰다. 2년이면 짧은 시간인 것 같지만 그 당시 진승, 오광, 항우, 유방 등의 공격을 막아낸 것 등을 생각할 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장함은 첫 전투인 희수 강변의 전투에서 진승 군의 주력 대장 주문의 군대를 단 한 번의 전투에서 무찔러 버린다. 그것은 진승 최초의 패배였다. 장함은 곧이어 장하를 공격해 진승까지 무찔렀다. 진승이 패하고, 장고란 자가 진승을 목 베어 진나라에 투항한다. 뿐만 아니라 정도성 전투에서는 파죽지세로 서진하던 항량 군마저 섬멸하여 반진 운동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러나 그 장함 군이 첫 패를 당하게 된다. 장함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왕리 군이 전멸당한 것이다. 그 후 장함은 항우의 초군과 맞붙게 된다. 그러나 함양에서 원군을 내주지 않아 장함은 항우 군에 투항하게 된다. 그 후 신안 대학살을 겪으면서 장함은 그 자신이 이제는 항우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후 천하의 명장 장함은 어이없 있었던 만큼, 어느 정도 세력을 쌓고 있었다. 따라서 그곳에 부임하게 된 군수 은통은 항량과 맞서기 보다는 혼란한 틈을 타 야합하여 일국을 건설하고자 하였다.그러나 진나라 관료출신과 손을 잡을 수 없었던 항량은 항우에게 은통을 죽이라 하였고, 항우는 즉각 참살한 후 치안과 행정의 공백 상태에서 순식간에 오중지역을 장악해버렸다.항량의 거병 소식이 알려지자, 진나라에 가장 극렬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옛 초나라 사람들은 너나없이 봉기군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장강(현재 양자강)을 건널 때는 진영이라는 사람이 2만 명의 병력과 함께 합류하였으며, 회수를 건널 때는 무장 세력인 경포가 합류하였다. 또 거소(현재 안휘성)지역에서는 각종 병법은 물론 지략과 처세술에 통달한 범증을 만났다. 범증은 70세에 불과한 한 명의 노인이었지만 항상 초나라 부흥을 꿈꾸고 있었으며, 이후 항우가 서초패왕이 되기까지 군사(軍師)로 타고난 능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그는 항량을 만나자 진승·오광의 난이 실패한 이유는 성급하게 초왕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옛 초나라 지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초나라 왕조를 부활시키는 일이 시급하다고 강조하였다.항량은 범증의 의견을 받아들여 옛 초 황실의 인물 중 한 명을 초희 왕으로 옹립하였다. 그리고 그 시기 시황제의 공사현장에 동원될 인부 인솔 담당자였던 유방이, 시황제의 죽음과 함께 인부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자 100여 명의 인원을 데리고 항량의 진영에 찾아왔다.이제 진승과 오광의 군대를 격파한 진나라 장한의 군대와 일전을 벌이는 일만 남았다. 사실 진나라 마지막 명장인 장한의 군대만 격파하면, 진나라를 무너뜨리는 일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였다.항량이 이끄는 군대는 기세 좋고 산동성을 진격하였다. 그러나 항량은 자신이 이룬 성과에 고무된 나머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얻으려 하였다. 그 결과 병력을 둘로 나누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였고 항우와 유방이 거느린 부대와 지나치게 간격이 넓어지고 말았다.항량이 거느 수밖에 없었다. 송의의 전략이 전혀 틀렸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문제는 송의가 전투를 가급적 피하면서 손쉬운 승리만을 얻고자 하는데 있었다.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짐은 물론 군량까지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항우는 송의를 단칼에 참해버렸고 이 소식을 접한 초희왕은 항우를 상장군에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리고 상장군에 오르자마자 항우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진의 주력군에 있는 거록(중국 하복성)으로 진격을 거듭하였다.그러나 그가 거느린 총 병력은 7만여 명, 30만 명에 이르는 장한의 군대와는 수적으로나 장비 면에서 절대적으로 열세에 놓였다. 더구나 장한은 산성을 구축하고 산성과 산성 사이에는 용도라고 하는 흙담을 쌓아 연결시켰다. 그리고 각종 병법이나 전략을 섭렵한 이들에게 이 용도를 돌파하는 계책을 생각하는 일은 대단히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최고의 지략가인 범증 조차 현재의 전략으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을 것으로 전망하였다. 하지만 항우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감이 차 있었다.“인간이 만든 것이면, 인간이 깨뜨리지 못할 리가 없소. 나는 싸우면서 깨뜨리겠소.”항우가 생각한 계책은 오직 하나, 필사의 정신만이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그리하여 항우는 황하 강을 건너자마자 타고 온 배를 모조리 침몰시키고 괴력의 힘을 이용하여 가마솥을 때려 부셔 버렸다. 어차피 3일 내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모두 전멸할 수밖에 없으니 더 이상의 식량 확보나 돌아갈 궁리를 한다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항우의 모습을 본 혈기왕성한 젊은 장수들 역시 솥을 깨며 필사의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항우의 선봉장인 경포는 3만의 선봉대만을 이끌고 맹렬한 기세로 용도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진군 역시 이처럼 무모하게 돌진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방어태세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다. 더구나 지형적으로도 좁은 병목지역이라 수적 우위만으로는 경포가 거느린 부대를 포위하기 힘들었다. 결국 경포가 이끈 선봉대는 용도를 돌파하였다 가담함으로 진군은 완벽하게 괴멸당하고 말았다. 진의 상장군 왕리가 사로잡힘으로 거록의 전투는 항우군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으며 그가 포로로 잡은 병력만도 10만에 이르렀다.이 거록의 전투로 인해 항우는 전국재패의 선두주자가 될 수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삽시간에 중국 전역으로 알려졌고, 그가 타고 다니던 말도 오추마라 하여 항우 못지않은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거록의 승리는 단순하지만 예리하였던 전술과 구태적인 병법을 넘는 필사의 의지와 용기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거록의 전투는 진 제국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렸다. 항우는 거록의 승리 이후 스스로 서초패왕에 올랐다.4. 형양 전투형양에서 항우와 대치할 때 유방은 팽성을 손에 넣었다. 당시 항우는 형양에서 제나라와 전투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팽성 함락 소식을 듣자마자 장수들에게는 제나라를 계속 공격하라고 명하고 자신은 당장 정예병 3만 명을 선발해 밤새 내달려서 팽성 서남쪽의 소현에 군대를 주둔했다. 이 전투에서 항우는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형양은 팽성 동쪽에 있었고 서쪽의 외황, 양하, 소현 등지는 이미 유방군의 든든한 후방 역할을 하고 있었다.① 확대되는 유방의 세력항우가 제나라 평정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사이에 유방은 영토 확장에 여념이 없었다. 한나라 2년, 유방은 동쪽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각지를 공략했다. 이 과정에서 사마흔과 동예, 신양이 차례로 항복했다. 다만 한왕 정창만이 항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한신을 파견하여 실력으로 굴복시켰다. 정월에 한나라는 장함의 아우 장평을 체포했으며 죄수들을 대사면하였다.유방은 함곡관을 출발, 섬 지방을 방문하여 그곳 유지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돌아왔으며 장이가 한으로 망명해 오자 크게 환영하여 맞았다. 2월로 접어들어 한왕은 진나라의 사직을 철거하고 대신 한나라 사직을 세웠다. 3월에는 한왕이 임진에서 황하를 건넜으며, 그러자 위왕 표가 군대를 이끌고 투항해왔다. 이어서 하내까지 공략하여 은왕을 사로잡고 그곳을 직할 하내군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실습생 27] 실습 종결보고서실습 종결보고서* 다음은 실습을 종결하면서 한 학기 동안 실습한 내용을 요약정리하고 목표 달성 정도와 소감을 간략히 정리하는 보고서입니다. 이 종결보고서는 파일에 정리되어 사무실에 비치되며 다음 실습을 준비하는 학생에게 실습지 선정의 지침이 되는 자료로 활용될 것입니다.실습기관일터 지역 자활센터실습지도자최**실습부서청소년 사업팀실습지도교수조**실습기간2016년 9월 20일(화)~2016년 10월 24일(월)실습생이지은종결 일시2016년 10월 24일(월)1. 실습기관 소개2000년 8월 보건복지부 ‘자활 후견기관’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7월 ‘일터 지역 자활센터’로 명칭이 변경되었다.해당 구에 거주하는 저소득계층에게 자활근로사업, 자활기업, 취업과 창업 정보를 제공하고 정기적인 자활교육을진행하고 있다. 또한, 저소득층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여 교복과 교육비를 지원하기도 한다.지역자활센터의 기본 이념인 “생산 · 나눔 · 협동 ”의 가치 실현을 통한 생산적 복지 이념의 지역사회 구현하고자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지역사회 자활지원네트워크를 통한 지역복지 공동체 망을 구축하고 있다.2. 실습기간 및 시간2016년 9월 20일(화)부터 2016년 10월 24일(월)까지 총 24일 실습. 평일 주 5일 실습, 13시부터 18시까지 진행함.3. 실습목표1)실습생의 목표실습을 시작하면서 정한 목표는 ‘기록을 잘 하여 실습기간 동안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자’였다. 이러한 목표를 실행하기 위해 실습 기간 동안 촬영했던 사진이나 간단하게 남겨둔 기록물을 잘 보관하여 정리하려고 노력했다.2)실습기관의 목표지역 자활센터에서 적용되는 사회복지 기술 및 업무사항, 청소년 자활 지원 프로그램과 관련된 정보를 파악하여 차후 현장에서 효율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초점을 맞춰 실습을 진행하였다.4. 실습내용 소개1) 실습일정자활센터에서의 실습일정은 구체적인 실무 과정 중심이었다. 전반적인 기초이론교육을 포함하여 자활센터 안에서 운영되고 있는 자활사업단도 직접 방문해보는 시간도 있었다. 자활사업 현장을 실습생이 직접 접해볼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주신 점이 감사했다.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구체적 현장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점이 좋았고 모든 팀장님들이 업무가 많아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신경을 써주셔서 실습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2) 교육,참관사항실습했던 자활센터 사무실 옆에 교육장이 있는데 자활사업단에 소속되어 계신 분들이 직능교육을 받으시는 모습을 모니터링을 하였다. 실습 후반에는 중학교 직업체험 일정 때 해당 직업군 체험을 신청한 학생들을 인솔하는 업무를 맡기도 했다.3) 담당업무청소년 사업팀에 소속되어 현재 자유학기제를 시행하고 있는 중학교 직업체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일정에 참여하여 간단한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주로 맡았다.A중학교·B중학교·C중학교 측에 배부할 안내문을 청소년 사업팀 담당인 최** 팀장님, 정** 팀장님과 함께 작업하기도 했고 일정 당일 팀장님들과 동행하여 일을 도와드리기도 했다. 그 외 자활센터에서 진행되는 교육 일정에 참여하고 행정 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맡았다.5. 실습목표와 달성 정도실습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자활센터와 관련된 실무 능력을 익히는 것, 예비 사회복지사와 직업상담사를 꿈꾸는데 있어서 나의 적성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 달성에 기초하여 평가한다면 아직 실무 능력과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실습 후반에 진행되었던 중학교 직업체험 일정 참여, 타 기관 방문과 프로포절 발표는 모두 유익했다. 특히 프로포절 관련 교육은 실습생이 직접 프로그램을 기획해보는 기회가 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는데 담당 슈퍼바이저 선생님의 지도를 통해 좀 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프로포절 작성법을 익혔고 꾸준히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6. 실습지도자와 실습지도 내용소개슈퍼바이저로 실습을 지도하셨던 최** 팀장님은 사회복지 실무 경험이 7년 7개월 정도 되었다고 하셨다. 학부에서 청소년 교육을 전공하셨고 현재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라고 하셨는데 대학원에서도 청소년 복지 정책을 전공하신다고 한다. 일터 지역 자활센터에서 저소득 청소년 자활지원과 사례관리를 담당하고 계신다.일터 지역 자활센터 실습생으로 한 달을 보내면서 청소년 자활 관련 업무를 많이 배웠으나 그와 동시에 자활과 관련된 많은 정보들을 접하기도 했다. 프로그램을 연계하고 있는 타 기관을 파악하고 자활사업단에 소속되어 있는 분들을 직접 뵙기도 하였다. 특히 실습 과정 중에 있었던 인문학 소양 교육과 심리 교육이 인상적이었는데 예비 자활 사업자 분들에게 그러한 교육 역시 필수적인 단계라는 것을 깨달았다.7. 실습소감1) 힘들었던 것실습일지를 쓰거나 문서 작성을 할 때 어려움을 겪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쓰고자 하는 내용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고자 했으나 다소 어수선한 부분이 보여 정리하는 기술을 꾸준히 익혀야겠다고 생각했다. 피드백을 받은 이후 다시 써보거나 다양한 정보들을 자주 접해보는 노력을 해야겠다.2) 제기되었던 질문들처음에는 자활과 관련된 지식이 많이 없었기에 자활사업 입문과정인 게이트웨이 개념이나 사회적 경제에 대한 개념 등이 마냥 생소하게 느껴져 오히려 구체적인 질문을 하는 것보다 메모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교육 일정에서 이러한 서툰 모습을 이해해주시고 전반적 흐름이 이해가 될 때까지 답변해주셨던 모든 팀장님들께 감사드린다.3) 배운 것자활센터를 방문하는 클라이언트의 주된 이유는 일을 하고 싶지만 오랜 실직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 길을 찾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다. 한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자활센터의 끊임없는 노력을 실제로 느낄 수 있었고 교육과 모니터링을 통해 직업 세계와 클라이언트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주변의 요소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영어회화 Report-방학 때 나의 계획담당교수: M***학번: 2006****이름: 이**제출일: 2006. 6.Our summer vacation is from June to August.First, I want reading a book during summer vacation.Especially, I like literature books. reading book is open my mind to new possibilities. book provokes many and varied emotional responses. it makes me laugh out loud, and makes tears spill onto the page.I witness their struggles, triumphs and failures. I feel their loves and losses, their joys and sorrows, hopes and fears, somewhat ad if they were my own. sometimes suffer along with their anxieties and sorrows, I receive a pleasure from the experience.Second, I go to the travel.Travel is intrinsically associated with expanding cosciousness. all travel is inner travel, a way of finding our more about, ultimately myself. I have come back from a trip feeling “larger” and somehow more complete.A trip is the journey of life in miniature. the very act going on it is a huge leap of faith that will eventully discover something about myself that I have not known.The encounter along our path are the jewels od knowledge that we went out the seek. we can better understand the inner process that in at work when we “go out”.I wonder how many people give up just when success is almost within reach.The difference between enormously successful people and miserable failures is not that much. those who never maki it are the ones who quit too soon. things often seem at their worst just before they get better.I heard if said that need to live in the present as wall ad hold on to my dreams for at a time.I urge to set yourself realistic goals, and aim to achieve them one step at a time.When efforts in succeeding in life, not go off in all directions, but center on precious goals. strength is always specific.Anyway, I do one’s best during summer vacation.번역우리의 여름방학은 6월부터 8월까지다.첫째, 나는 여름방학 동안에 책을 읽고 싶다. 특히 나는 문학 책들을 좋아한다. 책을 읽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내 마음을 열어준다. 책은 많고 다양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나를 크게 웃게 하고 페이지 위에 눈물을 쏟게 한다.나는 그들의 투쟁과 승리, 그리고 실패를 목격한다. 나는 그들의 사랑과 상실, 즐거움과 슬픔, 희망과 두려움을 어느 정도는 내 자신의 것처럼 느낀다.때때로 그들의 걱정과 슬픔을 함께 괴로워하지만 나는 그 경험으로부터 경험도 얻는다.둘째, 나는 여행을 갈 것이다.여행은 본질적으로 의식을 확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모든 여행은 내적 여행이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발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나는 여행에서 “더 크게”, 그리고 어떻든지 더 완성되었다고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여행은 축소된 삶의 여정이다. 여행을 떠나는 바로 그 행동은 내가 알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한 어떤 것을 궁극적으로 발견할 것이라는 믿음의 큰 도약이다. 우리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것들은 우리가 찾기 위해 나갔던 지식의 보석들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갈 때 작용하는 내적 과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나는 궁금하다. 성공에 거의 도달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포기를 하는지. 아주 성공한 사람과 비참하게 실패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은 그렇게 크지 않다. 결코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은 너무나 빨리 그만두는 사람들이다. 일은 더 좋아지기 전에 최악의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유럽사의 이해 Report영국 산업혁명기 면공업의 발전담당 교수:분반:학번:이름:제출일:1. 면직물 기계의 발명과 활성화산업혁명 시기에 발명된 방적기계는 면직물과 모직물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1733년 존 케이가 발명하여 1750년에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던 ‘나르는 베틀Flying shuttle’은 폭넓은 직물의 직조를 4배의 속도로 가능하게 했고 노동인구도 절반을 줄일 수 있어 랭카셔 지방에서 널리 사용되었다.한편 제니의 방적기는 물레와 달리 한 번에 8개의 실을 뽑아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양모 공장의 생산성을 높였다. 이 방적기는 제임스 하그리스가 사랑하는 아내 제니를 위해 제작한 것이었다. 제니의 방적기는 양털을 회전시켜 천 조각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시간과 작업을 대폭 감소시켰고, 초기에 8개의 실패를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120개의 실패가 한꺼번에 작업할 수 있게 개발되었다. 1779년 영국 전역에 2만여 대의 제니 방적기가 돌아갈 정도로 기계를 대량생산했다. 또한 16-18세기에 귀족들에게 유행하던 가발을 제조하던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인력이 필요 없는 수력방적기를 만들었다. 실패의 수는 적었지만 수력을 사용하여 빠르고 품질이 좋은 실을 생산할 수 있었다.대량생산된 모직물과 면직물을 유럽과 세계 각지로 운반하는데 혁신적인 공로를 세운 것은 제임스 와트가 1775년 최초로 만들어낸 증기 엔진이었다. 제임스 와트는 별도의 응축기를 추가하여 증기 엔진의 효율을 올리고 잠재적 열 손실을 개선했다. 증기기관은 가장 위대한 산업혁명의 발명품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크랭크 샤프트(회전축)와 기어가 통합되어 현대식 스팀 엔진을 돌리기 시작했다.19세기 중후반 영국은 산업혁명의 절정에 있었다. 세계 최강국으로서 국가의 위신을 전 세계 만방에 보여준 게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다.“우리는 세계박람회장에 갔다. 기계 전시장에 두 시간 정도 머물렀는데 아주 흥미로웠고 교훈적이었다. 이런 멋진 발명품을 고안하여 만들어낸 인간 지성의 위대함에 경탄한다. 이런 발명품은 인류의 복지와 편안함에 기여한다. 과거 손으로 몇 달 걸리던 일을 이제는 가장 아름다운 기계가 몇 초만에 마친다. 올덤(Oldham, 맨체스터 인근의 소도시)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방직기계를 봤다.”-빅토리아 여왕의 일기 중 세계박람회 방문을 기록한 1851년 6월 7일자 기록여왕은 1851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박람회를 몇 차례 관람한 뒤 보고 느낀 점을 세밀하게 일기에 기록해 역사가들이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남겨주었다. 여왕이 감탄한 이 박람회는 영국 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자석처럼 끌어 들였다.런던 세계박람회는 5월 1일부터 10월 15일까지 5개월 반 동안 열렸다. 런던 버킹엄궁 인근 하이드파크 서쪽 끝에는 수정궁이 지어졌다. 주철에 유리를 합성한 거대한 건축물로 속이 훤하게 드러나 보여서 이렇게 불렸다. 박람회에 출품된 물품은 약 10만 여 점으로 증기기관부터 방적기, 전보 등 당시 산업혁명의 현장에서 사용되는 첨단 물품들을 볼 수 있었다. 절반 정도의 전시물은 영국제였고 나머지는 다른 나라에서 왔다. 세계 각지에서 1만4천여 명의 참가자들이 물품을 전시하러 왔다.“영국 역사상 가장 성대하고, 아름다우며 영예로운 날이었다.”여왕은 전시회 폐막일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영국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영국인 4분의 1 이상이 박람회를 관람할 수 있었던 것은 철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수만 명의 시골 사람들이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와서 진귀한 물품을 지켜보며 당시 세계 최고 국가의 국민으로서 자부심을 느꼈다.영국 최초의 철도는 잉글랜드 북동부 선더랜드 인근의 두 도시 스톡턴과 달링턴 노선에 부설되었다(1825년 9월). 광물 운송에만 사용되었고 조지 스티븐슨에 개발한 증기기관차가 그 위를 달렸다. 1830년 공업도시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를 증기기관차 ‘로켓’호가 시속 31킬로미터로 달리면서 사람을 수송하는 최초의 현대 철도가 개통되었다. 1834년부터 영국 전역에 철로 부설 공사가 시작되어 1850년에는 철로 총 길이만 1만 킬로미터를 넘었다. 잉글랜드와 웨일스, 스코틀랜드까지 주요 도시가 철도로 연결되었다. 석탄과 철의 운반, 면직생산물, 각종 공업제품, 농산물을 운반하는 데 철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1851년 앨버트 공이 기획하고 추진한 런던 박람회는 141일 동안 계속되면서 관람객 600만 명을 동원했다. 런던 박람회는 단순한 전시성 행사가 아니었다. 영국의 발전한 산업 문명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면서 영국인의 민족적 자존심이 크게 향상되었다. 이 날의 감격을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오늘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날이며 사랑하는 앨버트의 성공을 기리는 날이었다. 이처럼 위대하고 멋있는 남편을 내게 주신 신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18만 6,437파운드에 달하는 박람회 이익금은 연구 보조금과 장학금, 빅토리아 앨버트 국립 박물관을 세우는데 사용됐다. 하이드 파크에 세워진 전시장 건물 수정궁은 런던의 새 명물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이 만들어 낸 최대의 성과물인 수정궁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2. 영국 면공업 산업에 닥쳤던 불행섬유산업은 18세기 새로운 산업이었기 때문에 목화와 직물 생산과정에서 나온 먼지들이 눈송이처럼 날리는 근무환경에 대한 마땅한 규제법도 없었다. 공업도시는 석탄이 타면서 뿜어대는 오염된 연기로 인해 공기가 나빠졌고 악취가 심하여 사람들이 북적대는 불결한 도시로 변하게 되었다. 부유한 사람들만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근로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주일에 6일, 하루 10-14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고, 휴식도 크게 제한을 받았다.새로운 노동계급이 형성된 지역에서는 여가시간을 즐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지방정부는 적극적으로 전통축제를 금지했고 노동자가 축제를 위해 마을에 들어가면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이러한 삶은 느리고 느긋하게 즐기는 시골생활을 경험한 1세대 산업노동자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1799년과 1800년 영국 의회는 조합법을 통과시켰다. 조합법은 노동자들이 더 나은 노동조건을 요구하기 위해서 연대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이다.더욱 심각한 것은 아동노동의 착취가 영국의 공장, 광산, 제련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던 것이다. 6-7세 아동들이 노동에 동원되는 일이 당연시되었다. 직물 공장에서 새로운 동력 방적기가 나오자 공장주는 숙련공을 대신하여 기계를 도입했다. 기계 중 일부는 조작이 간편하여 작은 어린이가 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을 좁은 공간에서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가 절감의 가장 저렴한 방법이었다. 더구나 아동들은 노조에 가입하거나 파업을 시도하지도 않았고 성인 남자의 1/10에 해당하는 임금만 주면 되었다.리처드 아크라이트의 새로운 공장에선 1789년 1,150명에 당하는 공장노동자의 2/3가 아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에서 이루어지는 제도의 변화는 가슴 아플 정도로 느렸다. 1830년 전면적으로 어린이 노동을 금지하고 야간 근무를 금지시키는 관련 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지루하고 위험한 공장 작업을 위해서 병약하고 아프고 흉한 모습으로 맨발의 아이들이 동원되었던 것’이라고 마이클 세들러가 1832년 공장조사관으로 파견되어 수집한 증거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 아동의 노동착취에 관련해서는 공장에서 10시간 이내로 근무하도록 시간 규정만이 바뀌었을 뿐이었다.3. 열악한 공중보건 상태 및 사회의 변화산업혁명이 막 일어난 무렵 밀집된 도시 형태, 영양실조에 이를 정도의 가난한 식사, 빈약한 위생시설, 중세적 의료 요볍에 의존하는 대다수 영국인의 공중보건은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가정에 화장실과 하수도 시설이 없었고 식수는 자주 오염되었다. 콜레라, 결핵,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및 인플루엔자는 특히 빈곤한 노동계급 지역에서 자주 출몰했다. 1849년 런던에서만 3개월 만에 1만 명이 콜레라로 사망했고, 결핵은 19세기 10년 동안 6-7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설상가상 의사들은 거머리를 사용하는 비과학적인 방법에 의존하거나 수은, 철, 비소를 사용하는 의료행위를 했다. 노동자들의 수명은 귀족계급보다 현저히 짧았는데 이는 비위생적인 노동환경과 열악한 의료환경 때문이었다. 1841년 영국의 평균수명은 45세라고 발표되었지만 실제로 런던에서는 37세였고 리버풀은 26세였다. 그리고 19세기까지 5세 미만의 유아 사망률은 25-33%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