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발이승론을 중심으로 본 사랑의 이해깊은 팬층을 가지고 있는 미국 드라마 'Sex and the city'는 뉴욕에 사는 여성들의 일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총 5개의 시즌으로 구성된 이 드라마는 전 세계 여성들에게 뉴욕에서의 삶과 커리어우먼에 대한 동경을 심어주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시청자의 허영을 자극하는 전략을 쓴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일과 사랑에 대한 고찰의 수준은 높은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5개의 시즌을 통해 4명의 주인공은 각자 저마다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데 5번째 시즌, 맨 마지막 에피소드의 의미심장한 마무리 중에서도 4명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미란다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미란다는 뉴욕에 사는 싱글 변호사였다. 그러다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예상에 없던 아이가 생기고 미혼모로 한동안 지내다 결국 남자친구와의 사랑을 확인하고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 사이의 문제에서 끝날 줄 알았던 어려움은 결혼 후에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시어머니의 치매 발병이었다. 결혼 전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고부 관계였는데 결혼 후 미란다는 시어머니를 직접 모시기로 하며 자신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을 하나하나 겪어나가게 된다. 개인주의적 성향의 미란다는 아이가 생기므로 해서 개인의 삶을 희생해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게 되면서 타인과 함께 살며 희생해 나가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모자라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은 본래 미란다의 성격에 맞지 않은 일로 보였다. 식사를 하다가도 사라져 버린 시어머니를 찾아 헤매야 하고, 어린아이를 대하듯 시어머니에게 옷을 입히고 목욕을 시켜야 하는 생활은 미란다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란다는 조금씩 시어머니에게 동정심과 의무감을 느끼며 그 생활을 유지해 나갔다. 사라져버린 시어머니를 찾아온 동네를 헤매고 쓰레기통을 뒤져 피자를 먹던 시어머니를 발견하여 집으로 데려와 목욕을 시키는 모습을, 그 집의 살림을 이 한 행위가 바로 사랑이며, 당신은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대사였다. 그 대사가 나에게 준 느낌은 어렸을 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톨스토이의 소설을 본 뒤의 느낌과 같았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고, 그 뒤에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어느 추운 밤, 구두를 수선해 준 농부에게 외상값을 받지 못해 분을 참지 못하고 술을 마시다 취해 집에 가던 가난한 구두 수선공 세몽은 길가에 쓰러진 곧 얼어 죽을 것 같은 청년을 발견하고 결국 그를 외면하지 못한 채 외투를 입혀 집으로 데려온다. 아내 마트료나는 어려운 살림에 우리가 누구를 불쌍히 여기냐며 남편에게 욕을 하지만 마트료나 역시 마음이 누그러져 청년에게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한다. 구두장이 세몽 부부와 미란다의 마음은 내가 보았을 때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마음을 작품들에서는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동정심이나 책임감 같은 감정일까.우리가 사랑에 대해 정의할 때에는 결코 ‘동정심이다.’ 혹은 ‘책임감이다.’라는 단편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다. 그보다 더 고차원적이며 복합적인 가치를 포함한 완벽한 무언가를 사랑으로 설명하고는 한다. 그래서인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어머니에게 동정심을 느끼며 동분서주하던 미란다의 마음이나 툴툴거리면서도 결국 죽어가는 청년을 내버려 둘 수 없는 동정심을 가지고 그를 보살핀 세몽 부부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고 바로 이러한 점이 언뜻 이해되지 않은 이유이며, 이내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 점이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일까. 사랑이란 무형의 것인가. 사랑이란 마음과 사랑의 행위는 별개의 것인가. 우리는 어떨 때 ‘저것은 사랑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나는 이러한 질문을 생각할 때 이이의 기발이승론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랑이란 행위를 통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아무도 사랑 그 자체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우리무감에 가까운 단편적 행위들을 사랑 그 자체로 부르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미란다의 집에서 일을 돕던 보모는 미란다가 한 ‘행위’가,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했다. 사랑이라는 실체 자체가 홀로 발한 것은 아니나, 미란다의 행위에서 사랑이라 불리는 어떤 것의 이치를 발견한 것일 것이다. 동정심으로 보이는 행위, 의무감으로 보이는 단편적 행위들 속에서 ‘저것은 사랑의 원리에서 온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우리는 드러난 행위를 통해 사랑의 원리를 느끼는 것이지, 사랑 그 자체의 무형의 것, 하나의 개념인 것을 직접 볼 수는 없는 것이다.이러한 맥락 안에서 이해한다면 왜 미란다의 행위가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없는 살림에 누군가를 도울 형편이 안 되는 것을 뻔히 스스로 알면서도 툴툴거리며 청년에게 먹을 것을 준비해 주는 행위, 옷을 가져다주는 행위, 일자리를 주는 행위 안에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사랑 그 자체가 먼저 발하는 원리로서 작용하거나 사랑 그 자체의 원리 따로, 행위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단지 그 행위들에 사랑의 이치가 있을 뿐이다.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풀어간다면, 예를 들어 짝사랑하는 상대를 오로지 마음에만 품고 어떤 행위로 그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혼자 사랑을 한다 하더라도 분명히 드러나는 행위는 있다는 것이다. 그를 생각하며 잠을 설치는 행위, 그의 곁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주변을 맴도는 행위 같은 것들 말이다. 또한, 먼저 논의되어야 하는 점은 율곡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리이고, 사랑하는 마음은 기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먼저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고 나서 그런 행위가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마음이라는 것 자체가 이이를 반드시 수반한다. 스스로 이것이 짝사랑이라고 느끼기 위해서도 기는 발해야 한다. 심장의 두근거림, 얼굴의 홍조 등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기’적인 측면은 수반되기 마련이다. 리는 무형무위하다. 형태도 없고 운동성도 없다. 그러나 기는 형태가 있고 운동성이 있다.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기이다. 리와 기는 서로 섞일 수 없지만,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다. 이렇게 묘한 리와 기의 관계를 일컬어 율곡은 이기지묘라 하였다.사랑을 보편성을 가진 것이라고 해보자. 그렇기에 우리가 사랑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보자. 그러나 만물이 고르지 않듯, 기는 움직이며 다양한 변화를 만들어 낸다. 맑은 기와 탁한 기로 사물들의 기는 각각 다르다. 개별사물들은 각각의 기를 취하기에 리가 모든 사물에 다 통한다 하여도 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다르고 따라서 사랑은 차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리는 기의 모습에 따라 국한된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우리가 사랑을 말한다 하여도 각각 그 드러나는 사랑의 모습은 다른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혹은 어떤 상황에서는 동정심의 모습으로, 또 다른 경우에는 의무감의 모습으로 말이다. 이것이 율곡이 말하는 이통기국론이다. 리는 통하고 기는 국한시킨다.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이데아를 동정심, 의무감, 책임감, 그리움, 두근거림 등의 감정들이 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율곡식으로 본다면 이데아 자체도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나 예전에 서양 고대철학 교수님께 플라톤은 이데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한 것이냐, 아니면 하나의 원리나 개념으로 상정한 것이냐는 질문을 누군가가 여쭌 적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플라톤은 실제로 이데아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었다고 대답하셨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율곡의 생각과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원리는 현상계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플라톤이 이데아를 하나의 원리로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세계로 믿었다면 율곡이 상으로 더 나아가 ‘그에 걸맞은 행위 없이 사랑을 주장할 수 없다’라는 다소 과격하게 보일 수 있는 의견을 말하는 데까지 가고 싶다. 츤데레’라는 용어가 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서 찾아볼 수 있는 등장인물의 인격 유형 가운데 하나를 일컫는 인터넷 유행어이다. 츤데레란 일본어에서 새침하고 퉁명스러운 모습을 나타내는 의태어인 ‘츤츤’과 부끄러워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레데레’의 합성어다. 사실은 마음속에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만 부끄러운 듯 퉁명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을 귀엽게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츤데레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행위는 둘 다 모두 ‘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기의 존재가 있고 거기에 리가 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사랑 또한 사랑의 행위가 있고 거기에 사랑의 마음이 있음을 아는 것이 응당한 이치라고 생각한다. 보이는 기와 보이지 않는 기의 차이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보이는 기와 보이지 않는 기 역시 불상리 불상잡의 관계 아닐까. 다른 각도에서 말하자면 사랑은 마음이라는 기적인 측면보다, 사랑이라는 원리와 행위 두 가지 요소로 나누어 볼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원리가 있고, 사랑이라는 마음이 있고, 사랑이라는 행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마음과 행위는 같은 기적인 요소로 분리해 생각해볼 수 없는 것이며, 사랑이라는 원리는 현상세계에서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사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오로지 행위를 통해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정의와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만 말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고 있지만, 실제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으며 사실은 너를 사랑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상대방과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말했듯, 어느 누가 사랑의 실체를 바로 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원리로서 타고 있는 행위가 있어야.
위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 사상과 신플라톤철학의 합으로 이루어진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부정신학을 통해 신과의 합일을 추구했다. 아테네 사람인 디오니시우스의 것으로 알려져 온 저작들이 실제로는 그 이름을 빌린 시리아 성직자들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僞디오니시우스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현존하는 그의 전집은 ‘신의 이름들’, ‘신비신학’, ‘천상의 위계’, ‘교회의 위계’, ‘10편의 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신의 이름들’ 에서 그가 받은 신플라톤철학의 영향을 중심으로 신에 대해 논하고 부정신학의 필요성을 설파할 기초를 세운 뒤 ‘신비신학’에서 부정신학의 방법론을 제시한다.신플라톤철학의 차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신학적 정리는 신비주의적이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의 세계관을 계승하되, 이데아 계를 일자와 지성, 그리고 영혼으로 세분화시킨 사상이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은 만물이 하나의 근원에서 단계적으로 산출되고, 다시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신이 만유의 원인으로 만유에 분유 되어 있다는 것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하나의 근원에서 만물이 분출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며, 다시 신과의 합일을 이야기하는 것 또한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근원으로의 복귀와 흐름을 함께 하는 것이다. 이렇듯 만물이 궁극적 일자에 기초한다는 이론은 유일신 사상인 기독교와 어울려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을 통해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단순히 중세 기독교에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가 없는 이유는 디오니시우스를 통해 정리된 기독교 사상과 신플라톤철학의 결합이 현대 기독교 교리에 역시 굳건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가 신비주의와 기독교를 분리해서 설명하려 시도를 한다 해도, 신에 대한 해석의 방식에서 여전히 디오니시우스의 설명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침묵과 얼굴, 이름에 대한 명상은 신플라톤주의의 플로티누스의 사상과 더불어 그것이 아무리 성경에 나와 있는 문구를 토대로 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신비주의적인 성질의 것으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꾸준히 언급되고 있다.‘우리가 신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디오니시우스의 저작이 말하는 것은 신의 초월성과 인간의 지성 및 감각의 한계이다. 인간은 인간의 한계로 인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명명할 수는 없다.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이름을 야훼로 알려주었다고 하나, 야훼라는 단어 또한 신을 온전히 담고 있지 않으며 우리가 야훼라는 단어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신을 알았다는 의미와는 다른 것이다. 야훼는 정의가 아니라 호칭이다. 인간은 만물을 초월하는 신을 철저히 이해할 수 없으며, 정의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다. 그러나 신은 만물의 원인이며 모든 만물에 분유 되어 있으므로 모든 만물의 이름으로 불릴 수 있는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 상징과 은유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조건 아래에 있다. 신에 관해 서술할 때 우리는 상징과 은유를 통해 신의 일 면목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즉 신이 창조한 피조물들을 통해 신을 서술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해석학적인 이해의 시도일 뿐, 신에 대한 진정한 정의일 수는 없다. 신에 대한 상징은 한시적인 것이며 무한한 신을 담을 수 있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무한과 영원이라는 말로 신을 표현하는 것도 디오니시우스에 의하면 부정되어야 마땅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말이나 개념에 의존하여서는 신의 진정한 모습에 다가설 수 없다. 인간의 영적 상승을 위해서는 신의 피조물들을 통한 해석학적 이해 이상의 것이 필요한 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피상적인 신에 대한 이해의 과정에 매몰되지 않고 영적 도약을 이루기 위해 부정이라는 방법을 말한다.디오니시우스의 부정 신학은 이렇게 나온다. 신은 어떤 류의 개념이나 종개념을 초월하며, 신을 아는 지식은 지식을 초월한 지식이다. 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개념적 부정을 통하는 것이다. 존재 너머의 신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에 대한 개념을 제거해야 한다. 이루려는 목표와 확실히 다른 것들을 삭제해 나가며 계속해서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다. 신에게 가는 길이란 끊임없는 개념의 제거와 자기포기의 과정과 다르지 않다. 디오니시우스는 신과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 침묵이라는 방법과 신과의 합일에서 오는 침묵이라는 결과에 대해 말했으나, 신의 초월성 자체에 대해 침묵할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신에 대한 인식이 불가함을 받아들이고 접근을 포기하는 것도 디오니시우스가 보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는 신에 대한 올바른 접근의 방법으로 부정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 신을 설명하고 이해하려 하는 것, 분석하려 하거나 이름을 부여하려 하는 것은 불경스러울 뿐만 아니라 가능하지도 않다.구약성서에서 모세는 신의 음성을 들으며 신의 이름을 묻는다. 신은 모세에게 ‘나는 나다.’라는 대답을 할 뿐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를 파악하고 분류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름은 전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더군다나 신은 모든 존재 위에 있다. 모든 지식들은 존재하는 어떤 것을 대상으로 삼는다. 한데 신이 존재 너머에 있다면 우리는 신의 온전한 본질을 파악하려 하기 이전에 신의 위치부터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를 찾기 위해서는 절대 무지 속에서 모든 것 밖에 있는 그를 향해 어둠 속으로 걸어나가야 한다. 신을 향한 접근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무지의 어두움을 통하는 것이 본성을 알 수 없는 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우리가 앎을 넘어서 있는 바로 그 어둠 속에 잠기게 되었을 때, 우리가 침묵하게 되는 것은 단지 우리의 언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말도 없고 앎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디오니시우스에게 침묵이란, 긍정과 부정을 넘어선 상태일 것이다.디오니시우스의 부정은 엄밀히 말해 부정도 부정하는 부정을 말한다. 긍정과 부정사이의 오고 감을 넘어선 무엇을 말하는 것이다.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은 신에 대한 명명이나 인식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신을 직관하고 신과 합일되기 위한 길을 제시 하려 한 점에서 그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가 신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신이 무엇이 아닌지를 말하므로 신의 무한성과 절대성을 확보하려 시도한 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신비주의적인 성격이 가진 한계 때문인지는 몰라도 끊임없는 긍정과 부정의 순환과 신에게 이르는 방법 제시의 모호함의 문제도 있다.인간의 지각과 감성의 한계를 설명하고 무한과 초월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 긍정을 부정해야 하고 부정도 부정이 아님을 설명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또한 신의 초월과 인간의 한계에 차이를 긋는 것도 상징에 대한 설명의 긍정과 그 긍정을 다시 부정해야 하는 과정과 다름 아님도 이해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러한 끊임없는 긍정과 부정의 순환은 인간의 한계와 신의 무한성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 이 자체를 신에게 이르는 방법론으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왜냐하면 결국 디오니시우스가 이것이 가능하다 말하는 이유로 드는 것은 다름 아닌 신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모든 개념을 제거하고 자기를 포기하며 어둠 속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어둠 속에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은 오직 신의 은총이다.사실 디오니시우스가 말하려 했던 것이 신이 일자이며, 신은 무한하고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라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디오니시우스는 신이 무한하고 절대적이라도, 무한하고 절대적이라는 개념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니 무지의 어둠으로 들어가 신을 알게 되면 결국 침묵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할 것이다. 재차 말하지만 침묵을 통해, 그리고 침묵을 결과로 하면서 말이다.디오니시우스는 궁극적으로 신에 대한 온전한 앎을 신과의 합일로 보았다. 신을 타자로서 이해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일치를 통해, 조금의 왜곡의 소지도 없이 신 안에서 신을 보려 한 것이다. 무엇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타자로서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말할 수 있는 상태에 머무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신에 대한 앎이란,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나 신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 더 깊게 신을 추구하는 의미로서의 신과의 합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플라톤이 꿈꾸던 사회-철학자와 국가서문-소크라테스의 죽음과「국가」본문-1. 플라톤 이전의 철학과 철학자라는 명칭2. 플라톤의 철학, 철학자, 이데아의 정의3. 동굴의 비유와 좋음의 이데아결론-플라톤이 꿈꾸는 사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사상적 원천이자 철학자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술은 소크라테스 본인이 아닌 플라톤에 의한 것이다. 플라톤은 “아테네에서 노예가 아니라 시민으로 태어난 것과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이 같은 플라톤의 고백에서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향한 존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플라톤의 36편의 작품 중 거의 모든 작품이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대화편이다.소크라테스는 나라에서 믿는 신을 부정하고 자신이 믿는 신을 끌어들인 죄, 아테네의 청년들을 부패시킨 죄로 기소당하였고 아테네 법정의 배심원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플라톤은 그의 저서「변명((Apologia)」에서 소크라테스의 무죄를 변호한다. 소크라테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항변이다. 다수결로 유무죄를 가리던 아테네 법정과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라는 탈을 쓰고 있던 말속임에 대한 분노가 플라톤에게 이상적인 사회와 그 사회를 위해 필요한 무엇에 관한 주장을 하게 했을 것이다.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천민적 민주주의에 대한 플라톤의 혐오는 교육을 통해 사회 계층을 나누고 각자의 맡은 바만을 충실히 완수하면 되는 국가의 모습을 그리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그 올바른 사회는 너도 옳을 수 있고 나도 옳을 수 있는 사회, 그중에서 언변이 화려한 사람들의 주장이 힘을 갖는 사회, 무식한 국민의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가 아닌 제대로 교육받은 현명한 철인이 통치하는 사회였다. 플라톤은 이 내용을 「국가(Apologia)」라는 작품에 담았다.1. 플라톤 이전의 철학과 철학자라는 명칭‘철학자’라는 명사는 기원전 4세기 초까지 소크라테합당한 존재로 서술했다. 플라톤은 철학자의 통치에 대한 합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철학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을 했고, 철학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 또한 필요했다. 다시 말해 플라톤이 꿈꾸던 사회와 정치에 대해 말하기 위해 철학이란 무엇인가로 이야기가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플라톤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예를 들어 철학자의 성질을 설명하려 했다. 그 예로 든 것이 사랑에 민감한 사람(에로티코스), 명예에 애정을 가진 사람(필로티모스). 술을 좋아하는 사람(필로이노스)이다.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필로소포스’다. ‘필로’는 어떤 심적인 충동, 열망, 갈망을 나타내고 그 대상은 ‘소피아(지혜)’이다. 플라톤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철학자를 그리기 위해 어떠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란 어떠한 특성의 것인가를 설명하려 했다. 플라톤이 말하는 무엇인가에 특별한 기호를 가진 사람들,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 무조건적 열정이나 취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종류의 지식 분야에 흥미를 갖고 있다고 하여 그 사람들이 다 철학자는 아니다. 플라톤은 이들로부터 철학자들을 구분해 주기 위해 철학자를 ‘진리’를 바라보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혜란, 진정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실재에 관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재가 바로 ‘이데아’이다. 우리가 무엇을 말할 때 그것은 ‘하나’이다. 그것이 나타나는 사례가 아무리 다양하다 하더라도 하나의 정의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지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물의 색깔, 소리, 모양 등을 반길 뿐 아름다움 그 자체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즉 철학자는 아름다운 사물과 아름다움 자체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다.플라톤은 이 조금 더 나아가 철학자의 인식(그노메)과 필로마테스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의견(독사)에 대해 설명했다. 존재에는 인식이, 비존재에는 무지가 상관한다. 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할 수 없고, 완전한 의미에서 비존재라고도 말할 수 없다. 의견의 대상은 완전한 인식도 완전한 무지도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보았을 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세계를 좋아한다. 이들은 그것이 실재라 생각하고 이것 외에 실재는 없다고 믿는다. 이들이 실재라고 생각하는 대상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성질을 나타낸다. 사물(의견의 대상)은 상황에 따라 다른 것으로 보이게 된다. 아름다운 사물을 다른 상황 속에서 보면 추한 것으로 보이게 되게 쉽다. 각각 상반되며 다른 성질을 가지는 그것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 아름다우면서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된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어느 쪽 '이다’라고도, 어느 쪽‘이 아니다’라고도 단정 지어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양쪽에 걸쳐져 있는 의견(독사)의 대상들은 중간의 능력에 의해 포착되는 것이고 플라톤은 당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를 지적하는 듯, 누군가가 아름다움은 하나, 올바름도 하나이고 그 밖의 다른 것들도 역시 그러하다고 말하면 도저히 참지를 못하는 ‘저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의 예를 들었다.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첫째로 철학의 본성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점이며 둘째로 철학의 본성은 가변하는 경험의 세계 이면의 하나라는 단일성, 즉 진리를 파악하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 내용은 철학적 통치의 당위성에 의미를 준다. 또한, 좋은 통치자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된다.철학자란 진리를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다. 즉 철학의 본성이란 진리를 바라보며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다시 일상의 다양한 경험을 구성하고 있는 사물들 속에서 ‘하나(이데아)’라는 단일성과 불변의 원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철학이란 완전한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학문하는 사람들 모두 목표로 삼게 되는 것이다. 감각계의 세계에서 그 자체의 세계로 눈을 떠나가는 것이다.무엇인가를 다스리고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의 실재를 보는 눈을 가져야 할하기 위해 사용했던 세 가지 비유중의 하나이다. 이 비유들은 이상 국가의 철인 통치자는 어떤 종류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명료히 설명하기 위해 채택된 것들이다. 동굴의 비유는 통치자가 가져야 할 지적 직관을 생생한 그림이 그려지는 비유를 통해 제시한다. 어려서부터 감금된 목과 발이 묶인 죄수들은 앞면만 똑바로 볼 수 있는 동굴 우리에 갇혀있다. 죄수들의 뒤쪽과 위에는 하나의 불이 타고 있고 그 불과 죄수 사이에 옆으로 벽이 있는 하나의 통로가 있다. 그 벽은 통로를 따라 움직이는 무엇인가를 가린다. 불빛은 통로를 따라 운반되는 대상들의 그림자들을 죄수들의 정면에 있는 동굴 벽에 비춘다. 죄수들은 벽에 비친 어른거리는 그림자 이외에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 그림자들을 실재라고 보게 된다.그런데 한 죄수가 사슬을 풀고 나와 원래 바라보던 방향이 아닌 벽과 통로로 향하게 되고, 자신의 전 생애 동안 실재라 생각했던 그림자가 단순한 환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는 운반되는 대상들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그림자 세계에 친숙하여 그 그림자들을 만드는 대상들을 인지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는 일은 고통스러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림자만 봐왔던 죄수는 실물들의 눈부심을 감당하기 힘들다. 그러기에 죄수에게는 높은 곳의 것들을 보기 위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 익숙해지다 보면 죄수는 서서히 더 높은 것들에 대한 바라봄이 익숙해지고 그 죄수와 다른 동료들이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인 태양까지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죄수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불쌍한 마음이 들게 되고 동굴로 돌아가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지만 비웃음만을 당하게 될 뿐이다. 다른 동료 죄수들은 자기들을 풀어주고 위로 인도하기를 바라는 이 죄수를 죽여 버리려고 하기까지 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우화를 통해 진리를 말하려 하는 소크라테스를 인정하지 못하고 사형을 선고한 아테네시민들의 어리석음을 말하고 있의 필요성이란, 교육의 필요성을 의미한다. 나라의 수립자들은 자질을 지닌 자들이 배움에 이르도록, 그래서 ‘좋음’을 보기 위한 오르막을 오를 수 있도록 하되,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공사 간에 자진해서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의무를 띠고 있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와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철인 통치의 정당성과 철인 통치의 방법으로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었다.-플라톤이 꿈꾸는 사회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들에 대한 생각나는 플라톤의 생각에 3가지 의문점을 가졌다.첫 번째로 ‘사랑과 취향에 대한 문제’이다. 플라톤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대상에 대해 무조건적 열정이나 취향을 가지고 있으며, 자기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상에 가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플라톤이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아주 열정적인 특별한 기호라는 것이라는 주장은 이해하였으나, 실제로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것이 그 무엇인가에 속한 대상 전부를 좋아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오히려 무엇인가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 더욱 까다롭고 비판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든 연주를 사랑하기는커녕, 누군가의 연주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청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사랑한다고 하여 취향마저 없는 것은 아닐 터인데 플라톤은 인간의 취향에 대한 문제는 소홀히 다룬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나 여러 책을 찾아보고 교수님의 수업을 떠올려 보고 하던 중에 ‘어떤 대상을 사랑하는 데 가리는 것이 없다’라는 말의 의미는 인간의 취향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의 총체성을 알고자 하는 열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대상의 전체를 파악하고 그것 자체에 대한 욕구가 플라톤이 말하고자 했던 ‘가림 없이 사랑하는 것’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생각해 봤다. 어떤 장르를 좋아하냐는 질문이 대답하기 가장 어려운 질문이었같았다.
신을 버리고 자유를 얻은 자의 기투“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렇게 믿었던 적이 있었다. 신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신은 불확실한 삶의 확실한 보증이었고, 구원의 약속은 희망을 갖고 지속하게 하는 힘이었다. 나의 본질은 신이 확증해 줬다. 나는 신의 자녀이고, 나는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소명을 실현하기 위해 이 세계에 보내진 신의 자녀였다. 신의 사랑을 통해 확증된 자존감은 어떠한 시련이나 불안도 견뎌내고 넘어서게 하는 마술적 힘이 있었다. 그런 거룩한 존재로 부름 받은 나에게 세계는 어둡고 잔혹한 곳이 아니었다. 비록 불평등하고 부조리하고 악마적이기 까지 한 세계의 모습이었지만 어둠이 깊으면 빛이 더 찬란하듯이 그 빛은 고약한 어둠을 몰아내고 어둠을 치유할 것이라 믿었다.그러나 의심이 많은 내게 때때로 찾아드는 신에 대한 의문과 질문의 침입은 괴로웠다. 그때마다 신에 대한 갈망으로 버텼다. 신은 너무도 위대하고 아름답고 사랑이 충만한데 여전히 세계의 비참은 끝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아이가굶주림과 전쟁으로 죽어갔다.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게릴라가 되기도 하고 전사가 됐다. 자본의 탐욕은 냉혹하고 철저하게 한 인간을 파괴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서 여행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어떤 엄마와 아이들이 서울로 여행 온 첫날 값싼 여인숙에서 잠을 자다가 불이 나서 죽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부조리와 불의와 억울함과 고통이 계속됐지만 신은 침묵했다. 신은 잘못이 없다고, 그것은 신의 형상을 잃은 인간의 잘못이라고 자신을 설득해봤지만, 쉽사리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신을 포기하기도 어려웠다. 나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몰아칠 허무의 파도를 감당할 수 없었다. 자신을 설명해줄 그 어떤 언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산들바람에도 흔들리는 유약한 나에게 견고하게 버티는 나무와도 같은 존재가 신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그래서 신에 대한 해석을 변경해가며 붙잡기도 했다. 침묵하는 신의 의미를 묵상하기도 했고, 무기력한 신이 나와 함께 고통받고 있다고 믿기도 했다. 사실은 애초에 전능한 신은 없었고, 신도 세계와 함께 진화하고 있다는 과정으로서의 신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렇게라도 애써 신을 붙잡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렇지만 이별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연인들처럼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제는 신의 손을 놓을 때가 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렇게 나는 토대를 잃었다. 어느 것도 나의 존재를 보증하지 않는 세계에 내던져진 것이다. 마치 한 번도 가보지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넓고 황량한 들판 위에 서 있었다. 엄마의 품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던 아이가 홀로서기를 하겠다고 뛰쳐나온 것 같기도 했다. 어디로 가야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신은 나를 보호하던 갑옷이었고 창이었고 길이었는데, 그것을 벗어버린 나는 헐벗은 몸과 나약한 정신으로 위태롭게 서 있었다. 어디선가 맹수라도 달려들면 대응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그러나 나는 돌아갈 수가 없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의 나는 죽었다. 그 믿음은 재현할 수 없다. 신이 지어준 이름에 기뻐하고 신의 소명에 춤을 추고 신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 신의 뜻대로, 신의 이름으로, 신의 소명에 따라 충만해 할 수가 없다. 이제는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 스스로 길을 선택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이데아를 상실하고, 구원을 상실하고, 토대를 잃었지만, 그로 인해 나는 자유를 얻은 것이었다.내 앞엔 수많은 삶이 열려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그 많은 삶이 나의 선택사항에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기만일 수 있다. 내가 물려받은 유전자와 가정환경, 그간의 경험과 학습, 그리고 재산 등을 생각해보면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런 외부적인 조건이 나의 선택에 압력을 가하고 두려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신은 그런 것마저 감당해줬고, 약속했지만 이제 나는 그런 조건을 오롯이 떠안아야 한다. 어떤 약속도 없는 세계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어떤 기대와 바람이 담겨있지만 불확실한 세계다. 더욱이 나는 그 선택으로 인해 겪어야 할 여러 어려움과 부조리와 조건들을 감당해야 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상황들이 나를 덮칠 수도 있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돌부리처럼 놓여 있어서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오해를 겪을 수도 있다. 물론 기쁨과 성취감, 그리고 뿌듯한 의미를 선물로 받을 수도 있다.그런데 나는 그 책임을 어떻게 짊어질 수 있을까?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렇다고 해도, 과정에서 비롯되는 일마저 나의 책임인가? 그 책임이라는 것은 나에 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선택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주게 되는 것까지 포함되는 것인가? 만일 그 선택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법적으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사실 그것은 메뉴얼이 있지 않다. 그때그때 사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선택이 낳은 것은 흔적처럼 자신을 따라다닌다. 사후적으로 평가받고, 또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때로는 그 책임에 걸맞지 않을 정도의 부당하고 억울한 책임을 떠안아야 한다. 신은 그런 부당함과 억울함도 책임을 졌다. 비록 세상에서는 불명예를 얻고 모욕을 겪는다고 해도 신은 명예회복을 해주고 신의 나라에 입성할 기회를 줬다. 허나 실존의 길은 그 약속도 없고 명예회복의 기회도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억울하고 부당한 것을 떠안는 것이 속절없이 무력하게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나는 그런 요인들이 선택에 중요한 복합성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의식한다. 그러나 그런 요인들을 고려하면서 대비를 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실존은 던져졌다는 것을 또 확인한다. 더욱이 내가 지향하는 기대와 바람이 만들어내는 미래는 존재와 일치되지 않는다. 완벽한 일치를 통해서 마치 즉자의 충만함 같은 것에 머물고 싶지만, 그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신이라면 친절하고 명확하게 바로 그것이라고 말해줄지 모르지만 실존에 기대와 바람은 늘 어긋난다. 어떤 본질도 없기 때문에 나의 지향은 불일치를 수반한다. 그것을 의식하는 나는 미끄러진다. 왜냐하면, 의식하는 나를 의식하는 나는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결여는 계속해서 발생한다. 바로 그것을 떠안으며 응고시키려는 과거를 부정하고 또다시 기투하는 것을 반복한다.
카뮈의 페스트로 본인간의 의지와 악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악이란 선의 결핍을 의미한다. 그는 악의 본질을 따로 두어 분석하려 하지 않고 오로지 신은 선한 것만 창조하셨으며, 선의 부재에 악이 있음을 말했다. 즉 악은 세계의 능동적 구성요소가 아닌 선의 결핍으로 인해 딸려오는 수동적 개념이다.카뮈의 소설 페스트를 악으로 보았을 때, 파늘루 신부와 리외의 대립에서 악은 각각 다르게 해석되어 나타난다. 파늘루 신부에게 악이란 인간의 잘못에서 온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로 설명된다. 그러나 리외에게 악이란 인간의 죄에서 온 것도 아니며 관념적인 것도 아닌 인간사의 부조리이며 대항해야 할 실재이다. 리외는 파늘루 신부를 학자라고 표현하며 파늘루 신부가 페스트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관념적인 말들을 하는 이유가 의사인 자신처럼 죽음을 여러 번 목격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만약 죽음을 가까이에서 경험해본다면 죄의 원인에 대해 분석하기보다 눈앞의 사람을 살리려 애쓸 것이라고 말하는 데서 리외가 보는 세상은 선과 악의 구도가 아닌 부조리와 그에 대항하는 인간의 의지의 관계인 것을 알 수 있다.여기서 인간사의 부조리란 페스트에 걸린 어린아이의 죽음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어린아이의 죄 없는 죽음은 파늘루 신부가 말하는 죄를 지은 인간이 당연히 겪어야 할 불행의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페스트라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죄를 지은 인간과 죄 없는 인간의 구분은 무의미해지는 것이며, 리외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랑해야 한다는 신부의 주장을 거부한다. 부당한 신의 징벌을 받아들이는 것은 리외에게 있어 인간이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어린아이의 죽음 속에서도 침묵을 지키는 신과 세계의 부조리함에 대해 대항하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리외에게 중요한 것은 인류의 구원이 아닌 인류의 건강이다. 페스트가 일어났을 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한 명이라도 더 살리려는 노력이지 신에게 죄를 빌고 간청하는 기도가 아니다.리외에게 페스트는 분명히 악이었을 것이다. 인간이 타파해야 하고 대항해야 하는 악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악이란 선의 결핍에 불과하다 말할지라도, 리외는 고통을 쾌락의 결핍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다. 페스트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인간의 통증은 쾌락의 결핍이 아니라 치료를 필요로 하는 실제적인 병이기 때문이다. 질병과 자연재해는 인간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고통이요, 악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선의 결핍도 아니며, 파늘루 신부가 말하는 죄에 대한 형벌도 아니다. 또한 이러한 자연의 영역이 아닌 도덕의 영역으로 눈을 돌려 보아도 악은 단순히 선의 결핍 이상의 능동성과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겪어온 악의 역사를 살펴보면 잔인함이 단순히 온순함의 결여가 아닌 악한 의지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은 하나의 의지나 인격으로 존재하기를 멈추지 않으며 악의 의지는 그 힘을 계속 증식해 나간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악은 자발적 의지가 아닌 수동적 원리이며 자유의지의 어둠 안에 감추어진 비실제적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리외에게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러한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보기 위해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죄 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지켜본 파늘루 신부에게도 변화는 있었다. 아이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뒤, 파늘루 신부의 설교는 예전처럼 확신에 차 인간의 죄악을 고발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페스트는 죄 있는 인간의 의지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부는 약간의 회의감 끝에 신에게는 우리가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죄악도 존재한다는 것으로 형벌의 문제를 유보해 놓는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조는 유지하지만, 이전의 설교보다는 훨씬 온화해지고 누그러진 것이다. 인간의 죽음이 신의 의지임은 맞지만 어린아이의 죽음과 악한 인간의 죽음이 같은 종류의 것인지에 대해서는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페스트가 악으로서의 관념적 현상임이 아니라 인간사의 구체적 산물임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파늘루 신부는 자신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보아야 했다. 신앙을 지키고 신의 선과 사랑을 믿는 것과 어린아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의 모순이다. 파늘루 신부에게 어린아이가 내지르는 모든 인간에게서 한꺼번에 솟구쳐 나오는 것과 같은 비명을 듣고 바라보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파늘루에게 더 이상 페스트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며 인간이 겪는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신의 의지라는 것을 믿거나 아니면 신의 의지라는 설명을 모두 거부해야 하는 갈림길에서 파늘루는 끝내 신앙을 선택한다. 리외는 물론 이와 정반대의 생각을 한다. 신의 편에 선다는 것은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것은 곧 악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둘은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의 차이는 있었지만 한뜻으로 연대하여 페스트에 대항한다. 같은 보건대에 있으면서도 파늘루 신부는 신앙인으로, 리외는 신을 믿지 않는 의사로 각자의 신념을 따른다. 파늘루 신부는 끝내 병을 얻지만,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신의 의지에 자신을 맡긴 채로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고 숨을 거둔다. 그는 그동안의 갈등과 회의감과 모순 속에서도 신을 선택함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구한 것이다. 리외에게 파늘루의 선택은 동조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악 그 자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알 수 없는 신의 뜻만을 생각하며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대해서는 체념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페스트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죄와 형벌의 인과관계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여기서 파늘루 신부와 리외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뉜다.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의 태도는 인간의 의지를 인간의 노력 그 자체로 볼 것이냐, 신의 의지의 범위 안의 것으로 볼 것이냐로 갈리게 된다. 또한 이것은 인간의 조건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것이냐,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어떤 것을 수용해야 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리외에게 페스트는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분석하고 맞서야 할 것이다. 모든 고통과 잔인함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인간의 죄의 원인을 물을 필요도 없고 단지 우리를 고통에서 구제하는 데 애를 써야 한다. 파늘루 신부에게 인간의 이성은 세계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의 것이 못 된다. 따라서 파늘루 신부가 오로지 기대어야 할 옳은 존재는 신 그분밖에는 없는 것이다. 리외에게 신이 있다면 그것은 부조리한 삶을 강요하는 부당한 신이다. 그 신에게 기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우리가 개척하는 데 삶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신의 사랑과 인간 고통의 양립 불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신에게 우리를 맡길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포기할 수 없다. 세계의 부조리는 대항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페스트의 상황에서 의사가, 다시 말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란 환자들을 고쳐주는 것, 힘이 미치는 데까지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 조건 앞에서 파늘루의 신앙은 무의미한 것일 것이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신의 의지를 온전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인간이 겪는 고통을 인간이 선택한 죄에서 오는 것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과 인간의 의지로 대항하여야 하는 부조리함으로 보는 리외의 주장은 그 간극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