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건축사1. 고대 가람배치의 변천2. 향교와 서원의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에 대한 설명3. 조선시대 서울의 위치선정에 반영된 풍수지리적 특징과, 주요 국가시설 건립에 영향예제, 단묘건축의 건축적 특징4.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에서 진행된 도시계획 관련 사업1. 고대 가람배치의 변천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서술하시오.가람이란 절의 건물을 말하고 승려들이 사는 사찰 등의 건축물입니다.초기의 평지가람의 변천입니다. 순서로는 1탑 3금당식에서 1탑 1금당식 그리고 쌍탑식으로 진행됐습니다.1탑 3금당식은 탑을 중심으로 좌우와 위쪽으로 금당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입니다.그 예로 고구려 청암리사지/ 정릉사지, 상오리사지 일본 아스카지, 신라 황룡사지 가 있습니다.1탑 1금당식은 강당 금당 탑 문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그 예로 부여지역의 군수리사지, 동남리사지, 금강사지, 정림사지, 서복사지가 있고 익산지역의 미릇가지, 일본의 사천왕사, 법륭사가 있습니다. 일본 법륭사는 일직선이 아니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쌍탑식은 탑이 두 개가 있는 배치로 금당과 문 사이에 있습니다경주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경주 교외지역의 최초 쌍탑식이라 불려지는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감은사지, 고선사지, 천군리사지, 불국사가 있습니다. 불국사는 산간지형에 있는데 평지에 계획하던 그대로 적용되어 있습니다.영속신앙과 군사적 목적, 수행, 풍수지리라는 이유 때문에 산지가람으로 이행되었다고 합니다.2. 향교와 서원의 제향공간과 강학공간에 대해 설명하시오. (배치, 건축물 종류와 기능 등)향교와 서원은 지금 시대로 치면 각각 중학교, 고등학교 같은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유교는 인사상과 인의예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유교건축에 중요시 된건 교육과 제사시설입니다.배치는 산간지역의 전학후묘가 전체의 83%이고, 좌학우묘, 좌묘우학, 그리고 평지에만 나타나는 전묘후학의 배치가 있습니다.이러한 배치를 갖게 되는 것은 위계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제향공간과 강학공간 둘 중 더 중요시 여기는 것은 제향공간입니다. 그리고 산과 같이 기울기가 있는 곳은 높은 쪽이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앞에는 강학공간을 배치하고 뒤에는 제향공간의 배치를 갖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평지에는 전묘후학의 배치를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평지에서는 기울기가 없으니 앞이 중요하다고 여겨져서 이러한 배치를 갖게 됩니다.강학공간은 명륜당, 동재,서재, 양사재, 사마재가 있습니다. 명륜당은 교육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교수를 위한 별실과 대청이 있습니다. 동재, 서재는 유생들의 기숙공간이자 강학공간이였습니다. 양사재는 교육 보조기관이고, 사마재는 합겨자들이 모이는 공간이였습니다. 향교의 강학공간은 명륜당이지만, 서원의 강학공간은 강당입니다.다음은 제향공간입니다. 제향공간은 누구를 모시는 공간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대설위에는 133 개의 신위를 모시고 중설위는 39개, 소설위는 27개의 신위를 모십니다. 공통적 신위에는 공자를 필두로 공자의 제자와 손자 4성, 공자의 수제자 10철, 송나라 6현인 송조 6현이 있습니다. 이런 향교와 서원의 제향공간에는 문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 3가지로 나눠져 있습니다. 가장 바깥쪽에 있는 홍살문은 신성공간을 위한 입구이기 때문에 말에 타고 오던 자도 내려서 걸어가야 되는 문이기도 합니다. 향교의 제향공간은 대성전이지만, 서원의 제향공간은 사당입니다.3. 조선시대 서울의 위치선정에 반영된 풍수지리적 특징과, 주요 국가시설 건립에 영향을준 예제의 내용을 서술하고, 이에 따라 건립된 단묘건축의 건축적 특징에 대해 설명하시오.단묘건축은 자연신을 모시는 곳으로 제사의 대상은 천신, 지기, 인귀가 있습니다. 묘와 단의 구분은 신주의 유무로 판단되고 제사의 집행자는 황제나 국왕, 지방관이 있습니다. 종묘를 보면 배치를 알 수 있는데 좌묘우사의 배치를 갖고 있습니다.천단은 황제를 위한 제사시설, 종묘는 왕과 왕비를 위한 제사시설입니다. 종묘를 보면 지붕의 모습에 과한 치장이 없고 단아하게 있어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단묘 내에 사단, 직단의 구분이 있어 사단은 토지의 신, 직단은 오곡의 신을 모시는 곳입니다. 사묘는 조상을 기리는 곳이고 가묘는 집에 있는 제사시설입니다.재사건축은 조상들과 가문의 결속을 위한 공간으로 친척들의 숙박시설, 회의시설, 기념비, 커다란 주방을 겸비한 건축이 있습니다.왕이 사는 도성을 예제 입각하여 조성했는데 정도전의 주도 하에 종묘, 사직단, 문묘, 단묘 등을 건축했습니다. 정도전은 중국 고대의 도성원리를 담은 주례 고공기를 통하여 좌묘우사와 전조후시를 따랐습니다.서울의 구성요소로는 종묘 궁궐 시장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배치할 때 북경같은 평지에는 이상적으로 되었지만 한양같이 산세가 있는 곳에는 경사가 있으니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조후시의 후시가 안지켜졌지만 앞으로 이동하였습니다.서울의 문은 4대문과 4소문이 있는데 동서남북 4방위에 문이 있고, 그 사이마다 소문이 있습니다. 이 문들의 이름을 지을 때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인의예지신을 본따서 지었습니다. 동서로 길게 나있는 신문로와 종로를 합하여 예전에는 운종로라고 부르고, 육조거리와 남대문까지의 길로 인하여 T자형 거리가 되었습니다.궁은 왕이 생활하고 기거하고 일하는곳을 뜻하고 궐은 방위용 망루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건물의 위계에 따라 명칭이 전, 당, 각/합, 헌/재, 루/정/사 로 나뉩니다. 전은 왕과 왕비의 의식, 행사, 공적활동을 위한곳이고 당은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공간, 각/합은 그 부속적건물, 헌/재는 왕실 주변사람들의 이용공간, 루/정/사는 연못,개울가,휴식공간을 보통 의미합니다. 궁궐의 제도로는 앞에는 조정,집무를 맡고, 뒤에 일상생활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5문3조라 하여 5문으로 나누고 3단계로 나눈다는 의미를 갖습니다.조선의 궁궐 종류로는 법궁, 이궁이 있습니다. 법궁은 국왕의 공식적인 궁궐들 가운데서 으뜸이 되는 궁궐이고 이궁은 국왕이 필요에 따라 궁궐을 옮기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궁궐입니다. 5대궁궐로 경북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있는데 시대에 따라 법궁 이궁을 다르게 사용했습니다.4.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에서 진행된 도시계획 관련 사업들에 대해 서술하시오. (사업의 목표, 내용, 결과 등)개항기 서울에서는 여러 도시계획의 시도가 있었습니다. 가장 핵심적 문제는 도로였는데 위생적 경관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때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기에 수도로써 체면세우기를 위한 개선 작업 시작되었습니다. 1895년 내무대신 박영호가 치도에 대한 것을 발표하였고, 지금의 서울시장급인 한성부윤은 가가건축의 금령 발표했습니다. 가가건축의 금령은 도로를 침범해서 세워져 있는 가가를 금지하는 것과 도로 폭 일정 유지, 가가지을땐 정부의 허락, 가가부재 넓이, 높이, 일렬로 배치해야 된다는 도시계획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휘어져있던 도로를 직선으로 만들고 가가를 철거하고 전차 건설하는 작업도 추진했습니다. 그 와중 일본은 1906년 토지가옥 증명규칙을 통해 기존 왕실재산을 필지화해서 일본인에게 분양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제침략시작 2단계가 있었습니다.T자형 간선도로망을 직선도로망으로 바꿨는데, 유사시에 병력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서울 중심지를 일본 거주지인 남쪽으로 옮길려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현가능성이 어려워 축소시행하게 되었는데 동서방향의 길보다 남북방향이 더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세운상가의 필지는 대각선방향으로 되어있다고 했는데 다 물길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있었습니다.두 번째는 시가지건축취체규칙이 공포되었습니다. 건폐율, 건추선, 재료, 미관 등을 규제하는 우리나라 최초 건축법으로 1930에 있었고, 두번째 단계로 1945년에 조선 시가지계획령이 있는데 이것은 도시계획법과 시가지 건축법의 합체가 된 내용이였습니다. 주거와 공업 용도에 따른 지역 지정, 건축물 세세하게 지정, 기존 불규칙 하게 되어있던 토지를 개선하고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했었습니다.1910 한일 병합 이후 기존 탁지부건축소에서 관형건축사업이 조선총독부 회계국 영선과, 철도국 공모과로 이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관에서 다양한 양식건축을 건설했습니다. 특히 건물들을 권위적인 외관을 갖게 하고, 표면을 석재로 하여 육중한 느낌 연출했습니다. 그리고 서양 역사적 양식 모방하며, 주로 새로 개통되거나 확장된 간선도로에 지어서 새로운 경관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주택의 역사적 변천 과정한국주택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설명에 앞서 한국주택, 역사적 변천 과정이란 단어의 뜻을 풀어보겠습니다. 한국이라 하면, 한반도 지역을 중심으로 시간적 공간적 활동을 해온 범위를 다루고 있습니다. 역사적이라는 단어는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입니다. 그 다음은 주택입니다. 주택이라 하면 사람들은 집 또는 주거와 같이 병용하여 사용하기 때문에 뜻이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차이가 있습니다. 집은 동물들이나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신체를 보호하는 모든 종류의 장소를 의미하며, 주택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인간이 자신들의 생활을 위해 지은 정식의 구조체를 의미하고, 주거는 기본적으로 주택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주거 생활까지 포함합니다. 그래서 새 둥지나 토끼 굴을 집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주택이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또한, 건축 형식이 발달하지 않은 선사시대의 집터 또한 주택지라고 말하지 않고 주거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정리한 결과로, 주제의 의미를 풀어 써보면 한민족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영위해온 생활을 위한 정식 구조체의 변화과정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그렇다면 방대한 역사 속에서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정해야 하냐는 문제가 있습니다. 건축사에서는 신석기시대 이전쯤 수혈주거가 있는데 이것은 어디서든 보이는 특징이라 동물적 본능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기준으로 잡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국 건축사의 시작을 이야기할 때에는 보통 한반도의 한민족이 사회공동체를 이루어 지내기 시작한 한국 고대 원시시대의 집을 우리 건축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고조선 및 원삼국시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로 연결되는 시점으로 서로 다를 건축문화를 갖는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이 시기는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갈 때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기술력의 발달로 철기를 쓰면서 자연 훼손 능력이 높아지고, 생산력, 노동력의 발달로 이어집니다. 이를 통해 더욱 거대한 의 시간적 변천을 다루는 역사적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고 봅니다. 남아 있는 유구의 절대량이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후기에 건설된 것이고, 그마저도 후대의 계속된 사용으로 정확한 조성 시기를 확인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궁궐이나 사찰 등과 달리 주택은 문헌 자료의 양이 적은 것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주택의 형태 변천 관한 연구는 고고학의 발굴로 드러난 집터, 고분벽화나 산수화 등의 그림 자료와 일부 문헌 자료를 통한 추정에 의존하여, 선사와 고대, 중세 대부분을 추정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보통 그 원형으로 설정되는 것은 선사시대 움집의 평면이거나 이와 가까운 단순형이 되기 쉽습니다.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다른 방법으론 주택의 지역형 연구가 주택의 원형을 찾는 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주택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주거 조절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주택과 문화 사이의 관계를 다루어서 주택사를 보는 시각이나, 주택 건축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 사회.문화적 요인에 좀 더 주목하는 방식, 선사시대의 주거 발생 및 발달 과정과 원시 씨족 공동체 사회의 발달을 밀접하게 연계하여 서술하는 등의 성과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한국주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주제 2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온돌과 마루입니다. 온돌과 마루는 한국 주택에 관한 연구의 초기부터 계속 되어 온 중요한 주제입니다. 온돌은 딱딱하고 따뜻하며 청결하고 매끈한 바닥 형태를 갖고 있으며 대표적인 난방기구입니다. 한반도의 연교차가 크고, 길고 추운 겨울을 갖고 있는 기후 특징 때문에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 주택 어디에서나 발견되며, 한반도 북부와 인접한 북방 지역에서 부분 온돌이나 쪽구들에서 일부 유례를 알 수 있으며 한국의 온돌은 부분온돌에서 전면온돌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 다음은 마루입니다. 마루에는 2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짐승이나 벌레 습기 등을 피하기 위한 기능과 권위를 부여하는 단의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마루에는 남방기원그리고 작업을 하는 재생산공간인 마루가 있습니다. 변화과정을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러한 공간 형식이 처음에는 경계가 없다가, 분화되고, 합쳐지는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선사시대 초기의 천막 주거지는 아직 완전한 정주지이기보다는 동굴과 겸해서 사용한 임시 거처입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것은 어디서든 보이는 특징이라 동물적 본능의 산물로 보기 때문에 기준으로 잡기 때문에 한국적 특성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주거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 프랑스의 뺑스방 유적인데 이 유적은 바닥을 지면보다 아래로 파서 다지고, 두꺼운 경사 부재를 이용하여 상부의 지붕을 만들어서 원시 움집보다 가벼운 구조체를 갖고 지표면을 그대로 다지거나 자갈을 깔아서 사용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주택 형식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의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과 충청북도 창내 유적에서도 천막 주거지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오산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집터유적으로 기원전 6,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나, 학자에 따라서는 1만 2000년 전까지 올려 잡기도 합니다. 이 주거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 중 하나는 이제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주거지의 일반적인 형태가 수혈 또는 반수혈인데 반해 완전한 지상 가옥이라는 점입니다. 오산리 유적을 살펴보면 바닥은 점토 다짐을 했고, 창내 유적은 원형의 바닥에 강자갈을 깔아 실내 공간을 만들었습니다.오산리 유적 창내 유적(제천 사기리 유적)목초지를 따라서 이동해야 하는 목축은 설치와 해체가 쉽고 이동이 간편한 주택 형식을 유지했는데, 천막은 이에 적합합니다.왼쪽부터(원추형,요절 원추형,게르,흑천막)매우 앞선 시기의 천막식 주거를 제외하면, 선사 주거의 형식으로 가장 폭넓게 나타나는 것은 수혈주거입니다. 수혈 주거는 대개 0.3~1미터 정도의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지붕 혹은 벽체와 지붕을 덮어 실내 공간을 만듭니다. 이처럼 지면을 파 내려가 생활공간을 구성하면 벽체 등의 지상 구조물을 만드는 노력을 최소화하고, 땅 온도를 이용하 노출된 완전한 수혈식에서 지상의 벽체가 일부 만들어지는 반수혈식(반움집)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반움집은 수직 벽체가 만들어지면서 지붕이 지면으로부터 떨어지고, 맞배지붕이나 우진각지붕의 가구 체계가 발전하는 단계입니다.회현리 패총 맞배지붕형식이러한 최초의 집의 형태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혈처, 다른 하나는 소거입니다. 혈처는 앞서 말한것과 같이 수혈주거, 땅바닥식으로 선사시대 움집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직의 벽체가 점차 발달하고 구덩이 깊이가 얕아지며, 평면의 규모가 커졌습니다. 원형/정사각형에서 직사각형, 凸자형 呂자형, 육각형 등으로 발전해나갔습니다.나머지 하나는 소거입니다. 고상식, 뜬바닥식으로도 불리는 소거는 나무 위에 지은 집을 생각하면 됩니다. 땅바닥에서 일정 거리를 띄움으로서 벌레나 습기를 막을 수 있습니다.두 방식 모두 공간에서의 특징으로는 뚜렷한 공간적 분화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있습니다.허무두 유적(소거)이러한 두 방식이 어디에서든 보이는 선사시대의 건축이고 그 뒤로 이제 한국주택의 특징이 시작됩니다.이제 고대시대입니다. 시기적으로 보면 원삼국시대를 말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건축 역사에서 선사시대와 고대를 구분 짓는 기준은 도성과 궁실의 유무입니다. 도성과 궁실은 계급사회의 성장과 고급 건축 기술의 발달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고대 사회의 특징적인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성 밖과 성안이라고 하는 공간적 구분이나 거처의 규모와 장식에 따른 격식의 차이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고대 주택은 와 같은 고대의 문헌 기록과 고구려의 고분에 남겨진 벽화 등 간접 자료를 통하여 더우 구체적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귀족층의 주택은 주인이 머무는 장소, 부엌. 창고, 마구간 등 주택의 여러 기능이 각각 독립적인 건물을 차지한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벽화에서는 모든 건물들은 기와지붕이고, 규모는 세 칸을 넘지 않는 간단한 목구조에 기단을 갖춘 건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행위마다 하나의 채를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포괄하는 시대입니다. 이 시기에는 왕을 포함한 다수의 지배계급이 건축을 지배해 나간 시기입니다. 유교사상이 강조 되었던 사회고 양반 게층이 중앙과 권력을 분점하는 독특한 중앙집권 사회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성의 궁궐과 함께 예제에 입각한 각종 제사 교육 시설과 향촌의 양반 사족을 위한 주거와 위락 시설이 건축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확장 공사를 시행하여 대청의 도리 칸수나 도리 칸 길이를 늘이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은 예를 행하는 마루 공간이 협소하다는 불만 때문에, 또한 기술력의 발전으로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중세 주택의 가장 큰 특징은 개별적으로 발전해 온 공간 형식 간의 구체적인 결합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결합은 계속 진행되어 중세 후기에는 공간 형식의 완전한 결합을 통해 우리가 전통 한옥이라고 부르는 전형적인 중세 한국 주택이 완성됩니다. 저 위에 사진으로 나와있는 를 보면 3가지 다 다른 형태의 바닥을 취하고 있습니다. 온돌은 매끈한 바닥, 마루는 거칠고 마른 바닥, 부엌은 물과 오물이 발생하는 더러운 흙바닥, 서로 매우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기에 결합이 어려워 보이지만 전면 온돌의 수용으로 주택 안에서의 생활은 신발을 벗고 깨끗한 바닥을 맨몸으로 사용하는 좌식의 기거 양식을 만들어 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신발을 벗은 채로 서로 오갈 수 있게 하려고 각 공간끼리의 연결은 점점 더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세 가지 공간 형식 사이의 결합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고 단계별로 시행되어 왔습니다.첫 번째는 온돌과 마루입니다. 지배층과 상류층의 주택 형식으로 위험하고 일을 해야되는 부엌은 따로 두었습니다. 사적공간과 공용공간의 조합이며 공공 기능을 가진 반주거 건축인 궁궐의 침전, 관아의 동헌, 향교의 명륜당, 서원의 동서재 등에서도 보입니다.온돌과 마당의 결합다음은 온돌과 부엌의 결합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주택의 구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사적공간과 지원공간의 결합입니다. 조선시대 서민주택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