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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미륵사지 동서석탑 복원 사례 비교
    미륵사지 동서석탑 복원 사례 비교
    미륵사지 동·서 석탑 복원 연구- 문화재 원형 개념과 보존 철학을 중심으로 -Ⅰ. 머리말Ⅱ. 미륵사 창건과 미륵사지 석탑Ⅲ. 미륵사지 석탑 복원 공사1) 1915년 ‘미륵탑 보존공사’2) 1999-2019년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3) 동탑 복원 사례와 비교 고찰Ⅳ. 맺음말Ⅰ. 머리말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 미륵사지(사적 제150호)는 백제 최대의 사찰로, 발굴조사 결과 중문-탑-금당이 일직선상에 배열된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 세 동을 동쪽, 중앙, 서쪽에 나란히 병렬시킨 3탑 3금당 구조였음이 밝혀졌다. 이처럼 원래 미륵사에는 3개의 탑이 있었지만 현재는 동원과 서원의 석탑 2기만 전하고 있다. 동원의 탑은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서원의 탑(미륵사지 석탑, 국보 제11호)은 1999년부터 2019년까지 복원 공사를 거쳤는데, 이렇게 3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복원 공사가 이루어진 두 탑은 서로 모습이 다르다. 먼저 복원된 동원의 탑은 반듯하게 잘린 석재로 이루어진 완벽한 9층탑인데 비해 서원의 탑은 비교적 불완전하게 6층까지만 조립되었다. 또한 동·서 석탑 각각의 복원 공사에 대한 평가도 완전히 상반된다. 두 석탑 간의 닮은 듯 닮지 않은 비대칭적인 모습과 상반된 평가는 각각의 복원 공사 시에 어떠한 원형 개념과 보존 철학이 적용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먼저 두 탑이 서 있던 미륵사의 창건과 미륵사지 석탑의 창건 이후 모습에 대한 문헌 기록을 통해 그 변천 과정을 추정하고, 서원의 탑 복원 공사 사례를 분석하여 동원의 탑 복원 사례와 비교 고찰함으로써 한국 문화재 원형 개념과 보존 철학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Ⅱ. 미륵사 창건과 미륵사지 석탑미륵사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유사』(1281년 일연 편찬)이다. 『삼국유사』 권2 기이 2 무왕조에는 미륵사의 창건에 대해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연못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이에 부인이 왕께 이곳에 큰 절을 세기단 폭은 약 12.5m의 정방형이다. 1층 내부에는 십자형 공간이 조성되고 탑의 중앙에는 심주가 4층 중간까지 연속되어 있었으며, 창방과 평방 등 목탑에 사용되는 부재들을 돌로 만들어 조립하였는데, 한국 석탑의 시원 양식으로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한편 2009년 1월 석탑에 대한 1층 해체조사를 진행하던 중 1층 심주석 중앙에서 사리장엄이 출토되면서 639년에 사리를 봉안했다는 절대연대가 확인되었다. 석탑은 창건 이후 수리 또는 개축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석탑의 원형과 변천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찾기 어렵고, 『삼국사기』, 『혜거국사비문』, 『양곡집』, 『금마지』 등의 기록을 통해 부분적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미륵사의 중창과 보수에 대한 기록으로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고려 초 승려 惠居國師 비문이 주목된다. 비석은 고려 성종 13년(994)에 세워졌으나 비석은 사라지고 그 내용만 전한다. 비문에 의하면 혜거국사가 용덕 2년(922) 여름 미륵사 탑을 여는 은혜를 얻고 선운사 선불장(고창 선운사로 추측)에서 설법하였더니 천상의 꽃이 날렸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 미륵사가 고려시대에도 운영 중이었고, 미륵사 탑이 한 차례 보수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때 보수의 대상이 미륵사에 있던 탑들(중앙 목탑·동탑·서탑) 중 어떤 탑을 지칭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김현용은 『양곡집』, 『점필재집』의 내용을 통해 개탑의 대상을 서탑으로 추측하였다. 먼저 『양곡집』은 조선 성·명종대 문신 소세양(1486∼1562)의 시문집으로 그의 후손이 1571년에 간행한 것이다. 소세양은 1545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익산으로 내려와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공중에 우뚝 솟은 삼백 척 석탑, 미륵이 함께하는 감실이니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기록하였다. 다음 『점필재집』은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직(1431∼1492년)의 시문집으로, 1520년에 후손들이 다시 간행한 것이다.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끝내 아득하기만 하정할 만한 것, 丁은 보존의 필요성이 가장 낮은 것이다. 세키노는 미륵사지 석탑에 대해 가장 보존이 시급한 ‘甲’ 등급을 부여하였다. 당시 석탑이 동측면과 북측면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너져 주변에 석재들이 흩어져 있고 6층은 모서리 부분만 남아 매우 위태로운 상태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1915년 12월 조선총독부 토목국은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실측도와 공사설계도를 작성하고 ‘미륵탑 보존공사’를 실시하였다. 공사의 주요 내용은 석탑 주변에 흩어져 있거나 교란된 석재들을 수습해 석탑과 석축을 정비하고, 서측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칠해 보강하는 것이었다. 석탑의 십자형 통로 내부 등 부재 사이의 간격이 크게 벌어진 곳에는 진흙 또는 잡석 또는 콘크리트를 채운 후 시멘트-모르타르로 마감하였다. 옥개석 등 외부 부재 사이의 틈새에는 시멘트로 줄눈 처리를 하고 일부 옥개석에서 파손되어 없어진 부분을 시멘트로 보형하였다. 남측면에서는 일부 신석재를 보충하거나 훼손이 심한 부재들을 재설치하였으며, 2~5층의 옥개받침석이 파손되거나 불안정한 위치에는 ‘대정4년(1915년)’을 음각한 간주석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즉 전면 해체수리가 아닌 추가적인 붕괴를 막기 위해 콘크리트로 보강한 응급보수 성격의 공사였다. 그러나 콘크리트를 약 185톤을 덧씌워 보수함으로써 석탑의 백화현상과 풍화작용이 촉진되었다는 점에서 석탑 붕괴라는 최악의 결과는 막을 수 있었지만 문화재 훼손은 감수해야 했던, 세부적인 면에서는 아쉬웠던 보수공사로 생각된다.2) 1999-2019년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미륵사지 석탑은 1998년에 구조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콘크리트 노후화 및 구조적 안정성에 문제가 제기되어 1999년 문화재위원회에서 해체보수가 결정되었다. 세부적인 보수 방법은 해체조사를 진행하면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에 2001년 10월부터 2010년 4월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본격적인 석탑 해체조사를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외부 부재 587개, 석축 부재 853개, 적심 부재 1,000여 되거나 왜곡 또는 제거되어서는 안된다는 것, 후세에도 문화재 복원 및 보수에 접근이 가능하도록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이러한 기본원칙을 바탕으로 한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 과정은 추정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전통기법과 현대기술의 조화를 이룬 점, 그리고 체계적인 학술조사연구를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문화재 복원 사례로, 다음으로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과정에서 기본원칙이 어떻게 지켜졌고, 얼마나 지켜졌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1) 첫째, 미륵사지 석탑은 7층 이상의 직접적인 근거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추정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원래 남아있던 6층까지 보강, 수리하여 진정성을 확보한다.석탑을 어디까지 수리 또는 복원할 것인지에 대해 1층을 현 상태로 보존하여 수리하는 안, 최종 6층까지 수리하되 일부 복원하는 안, 9층까지 전체를 복원하는 안 등이 논의되었다. 이에 해체조사 과정에서 7층 이상 원형을 확증할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없었으므로 석탑의 복원은 6층을 유지하여야 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9층까지 복원하는 것은 추정에 의한 복원이기도 하나, 상부에 보충된 석재의 하중으로 인해 기존 하부 석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지양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되었다.(2) 둘째, 석탑의 원형과 역사적 가치 보존을 위해 훼손된 부재는 과학적 방법으로 보강하여 재사용하고 원래의 기법과 재료는 최대한 보존 및 활용한다.2019년 준공을 앞두고 감사원이 석탑의 재료와 공법이 원형과 다르게 복원되었다 지적하였는데, 감사원의 지적 사항은 크게 2가지였다. 첫째, 석탑 내부의 중심 기둥인 적심을 모두 새로운 석재로 쌓겠다는 계획과 달리 1, 2층에만 이를 적용하고 3층 이상에서는 옛 부재를 활용하였다는 점, 둘째, 계획 단계에서는 돌 사이의 틈을 메우는 충전재로 실리카퓸을 사용한다 하였지만 황토 배합제로 바꾸었다는 점이다.원래 석탑에 사용된 화강암은 미륵사지 북쪽의 미륵산에서 채석한 것인데, 현재 미륵산에서 채석이 불가능하기가 없으므로 충분한 조사 연구가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석탑의 해체를 진행하면서 건축, 보존과학, 고고학, 미술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학술연구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보수정비 기본원칙을 세우고 기술적 방법을 마련해 보수정비 작업에 반영하였다.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를 위한 기반연구는 기초조사연구, 보존과학 조사연구, 구조 및 재료 연구, 수리기술 연구 등으로 분류된다. 기초조사연구는 석탑의 현황과 원형을 규명하기 위한 연구로 석탑의 해체조사, 기단부 발굴조사, 발견 및 수습 유물조사, 축조기법 연구 등이 포함된다. 보존과학 조사연구는 석탑 주변 보존환경 조사, 표면 오염물 조사, 가공도 조사, 풍화 훼손도 조사 등으로, 다양한 조사와 실험연구를 통해 석탑에 맞는 보존처리 방법을 마련하고자 노력하였다. 구조 및 재료 연구는 석탑의 구조해석을 통한 붕괴원인 조사연구, 구조안정성 평가 연구, 무기질 보수재료 연구 등으로 석탑의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과 재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수리기술 연구는 기초부 토층 보강방안 연구, 풍화도에 따른 금속보강 방법 연구, 절단부재 접합용 장치 개발 등으로, 과학 실험과 연구를 통해 개발한 기술들을 특허로 등록하고 이를 석탑의 보존처리, 조립시공 등에 반영하여 현재의 미륵사지 석탑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의 조사 및 연구 내용은 상세하게 기록하여 심포지엄, 공개설명회 등을 통해 관련 전문가와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으며, 조사 보고서나 관련 논문은 문화재청 홈페이지를 통해 바로 열람이 가능하도록 제공하고 있다.3) 동탑 복원 사례와 비교 고찰한편 터만 남아 있던 동탑은 3년 간의 공사를 거쳐 1993년 복원되었다. 동탑지 발굴 조사 때 수습된 노반석과 옥개석 등으로 서탑과의 비례를 계산해 총 27.9m의 9층탑으로 복원하였는데, 동탑 복원이 ‘최악의 복원’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렇게 추정에 의한 복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서탑을 참고하여 복원하였지만, 서탑의 경우 6층 이상의 형태에 대해 알였다.
    인문/어학| 2023.01.26| 9페이지| 2,500원| 조회(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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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표암 강세황 칠탄정십육경도 연구
    표암 강세황 칠탄정십육경도 연구
    豹菴 姜世晃 연구Ⅰ. 머리말Ⅱ. 의 제작 배경Ⅲ. 의 구성과 화풍Ⅳ. 맺음말Ⅰ. 머리말姜世晃(1713~1791)은 18세기를 대표하는 시서화 삼절의 선비화가이다. 강세황의 생애는 가세가 기울어 처가인 안산으로 이주하는 1744년을 기준으로, 사회적 지위의 변화에 따라 크게 안산 시기(1744~1773)와 한양 거주 시기(1773~1791)로 나눌 수 있다. 30여 년에 이르는 안산 시기에 강세황은 학문과 서화에만 전념하였고, 성호 이익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그로부터 안산 시기는 강세황이 화가로서 문인 사회에서 활동하며 정치적 복권을 이뤄내고, 그의 회화 세계가 성립된 시기로 평가 받기도 한다.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는 안산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그가 직접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의 ‘시서화 삼절’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 작품을 검토하는 것은 강세황의 회화 세계는 물론 그가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영향을 끼친 교유 관계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에 대한 대부분의 선행 연구는 국문학에서 이루어진 그림과 제화시의 비교 분석으로 주로 제화시가 회화에서 어떻게 표출되었는지 그 유형을 분류하였다. 또한 지리학 분야에서 현재 접할 수 있는 칠탄정 주변 건축, 조경을 그림에 묘사된 풍경 그리고 시적 풍경과 비교하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미술사학계에서는 강세황의 생애와 작품 전체를 다룬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이루어졌고, 최근 정은주에 의해 주목 받았으나 작품의 제작 배경에 대해 더 중점적으로 고찰하는 연구로서 상대적으로 작품의 구성이나 화풍 등의 작품의 내적 요소에 대한 고찰은 부족하였다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의 제작 배경과 구성, 화풍에 대해 살펴고자 한다.Ⅱ. 의 제작 배경1. 안산 시기 강세황(1744~1773)강세황은 숙종 39년(1713)에 姜?(1650~1733)의 3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晋州이고 字는 光之, 호는 豹菴, ?齋, 豹翁 등을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호는 ‘표범의 암자’라는 뜻을 니 권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1706년 둘째 형 李潛(1561~1593)이 장희빈을 두둔하는 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역적으로 몰려 옥사하자 이익은 이를 계기로 과거에 응할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하며 평생을 첨성리에 칩거하게 된다. 이익의 호인 ‘星湖’는 안산에 위치한 같은 이름의 호수에서 연유한 것이다.이익이 안산에 자리 잡은 이후, 서울의 정동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여주 이씨 일문을 비롯한 일부 남인 가문들이 자연스럽게 안산으로 모였다. 비록 안산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각지의 남인 문사와 정치계 인물들이 안산을 찾았다. 문인들을 비롯하여 尹斗緖(1668~1715)의 아들 尹德熙( 1685~1776), 崔北(1712~1786)과 같은 화가들 또한 여주 이씨의 문하를 드나들었다. 당시 안산이 여주 이씨, 진주 유씨 등 주로 남인 계통에 속하는 가문의 거점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실각한 인물들이 안산에 몰려들었고, 안산은 자연스럽게 명사들을 품을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또한 당시 안산에서 활동하던 문인들은 지역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하면서 서로 왕성하게 교유하였다. 강세황의 거처를 기준으로, 남쪽 5리 쯤에 청문당이 있었고, 다시 그 남쪽 5리 쯤에 이익, 이재덕, 이현환 등의 여주 이씨 문인들이 분포하고 있었다.강세황은 당시 안산에서 여주 이씨 문인들과 친교하며 그림, 글씨, 인장 등 활발한 문예적 교유를 하였다. 여주 이씨 친족들은 이익을 중심으로 시회를 자주 열었다. 단원시사는 그 대표적 모임으로, 이재덕, 이광환, 이현환 등 여주 이씨 가문의 자제들은 물론, 그의 문하에서 문예활동을 하던 강세황, 허필, 유경종 등이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강세황과 성호가의 시회 활동 및 교유 양상은 성호의 족손 이재덕이 당시 시회를 기록한 『성고수창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강세황은 1753년부터 1766년까지 총 10회에 걸쳐 성호 가문 인물들의 시회에 참석하였고, 이중 이현환과 동시에 참석한 것은 1753년 3회, 1755년 1회, 1756년 2회, 1758년 1회, 보지 못한 것과 나이 들어 더 이상 그 경치를 밟을 수 없음을 아쉬워하는 내용이다.손백경의 이름은 손사익(1711-1795)이다. 칠탄정은 그의 선조인 ?漢 孫起陽(1559-1617)의 옛 터이다. 손기양은 1588년 식년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을 조직해 활약하였다. 1603년에는 영천군수를 역임하였지만 1612년 이후로 광해군의 폭정이 계속되고 정치가 문란해짐에 따라 관직에서 내려와 고향에 은거하며 오직 학문에만 힘을 쏟은 인물이다. 그의 호인 ‘오한’은 귀머거리라는 뜻으로, 어지러운 세상사를 듣고 싶지 않아 은거를 선택한 그의 의도가 드러난다. 칠탄정은 손기양이 은거하며 낚시했던 장소로, ‘칠탄’이라는 이름은 후한의 엄광이 광무제의 소환을 거절하고 부춘산 칠리탄에서 낚시질하며 평생을 보냈다는 고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칠탄정은 현재 경상남도 밀양시의 칠탄서원 내에 위치한다. 칠탄서원은 손기양의 옛 터 위에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서원이다. 서원은 4개 건물로 구성되고, 칠탄정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구조로 읍청당과 마주보며 단장천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워졌다.손사익은 왜 이익을 찾아와 행장을 요청한 것일까. 손사익은 성호의 문인으로, 영조 때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의 간병을 위해 과거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줄곧 밀양에 거주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교육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조선시대에 선조를 선양하는 방법 중 하나는 문장과 학행으로 존경받는 인물에게 행장을 받는 것이었다. 이는 자신의 선조가 그만큼 존경받을 가치가 있는 인물임을 드러내는 효과가 있었다. 이를 염두에 두면, 는 손기양과 관련된 칠탄정 일대 장소를 선정하여 그림으로써, 선조를 기리는 데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당시 재야의 학자로서 존경받았던 이익은 손기양의 유적에 문화적 권위를 부여하는 데 누구보다 적합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이익의 행장과 제영시를 받고 칠탄정과 손기양을 연관시켜 현창한 것이다.실제로 이외에도 이익은 이씨 일문과 그의 문인, 친인척, 친분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칠리탄과 그 중심에 있는 칠탄정을 강조하였다. 손기양이 은거했던 장소의 전체적인 풍경을 손기양이 보았을 듯한 시점에서 표현함으로써,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찬가지로 칠탄정에서 칠리탄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칠탄정에서 바라본 칠리탄 주변 자연과 지형을 설정하여 이어질 열 다섯 폭의 그림이 칠탄정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임을 예고하는 역할을 한다.제2경 ’일대청림‘은 칠탄정에서 바라보는 푸른 숲을 그린 그림이다. ’청림‘은 밤나무 숲을 말하는데, 예로부터 밀양 다죽리 앞에는 관아에서 관리하던 황률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밤나무는 중국 대표적 시인인 도연명이 은거했던 栗里에서의 삶을 상징하는 소재이기도 하여, 곧 밤나무가 있는 곳은 은거하는 선비들의 이상적인 장소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칠탄정 주변 밤나무 숲 경관을 16경 중 하나로 그린 것을 통해 결국 칠탄정 일대를 이상적인 장소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제3경 ’조기수간‘은 손기양이 물가에 앉아 낚시를 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손기양은 실제로 칠탄정에 나가 자주 낚시를 했다. 그가 낚시를 했던 곳이라 추정되는 곳 인근 바위에는 ‘釣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손사익이 새겼다는 후대의 기록이 있다. 번잡한 곳을 떠나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낚시하는 모습에서 은거하는 선비로서의 손기양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제4경 ’임애상화‘는 칠탄정 옆 계곡 벼랑 위에 핀 꽃을 그린 그림으로, 김수진의 2018년 3월 현장 조사 시 칠탄정으로 이르는 산길에 야생 진단래 군락이, 칠탄정 옆에 있는 바위에서도 활짝 핀 진달래가 확인되어 김수진은 ’임애상화‘에 나오는 꽃에 대해 봄철의 진달래를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였다.제5경 ’선암도기‘는 넓은 바위에 앉아 바둑을 두는 3명의 인물을 그렸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바둑은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우주 만물의 도를 배울 수 있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강세황이 그린 그림을 살펴보면 배경에 있는 절벽이나 나무보다 바는 밀양 손씨 집성촌과 꾀꼬리봉의 공간적인 맥락, 그리고 꾀꼬리봉에 신성성을 부여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제13경 월교귀승은 시주를 받아 다리로 건너 돌아가는 승려를 그렸다. 그림 오른쪽에 다리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위를 세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삿갓을 쓰고 긴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 승려임을 유추할 수 있고, 가운데 인물은 머리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으며, 그 뒤에는 상투머리를 한 사람이 따라가고 있어 가운데 인물은 선비이고, 뒤따라가는 인물은 하인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손기양은 임진왜란 당시 밀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섰다. 특히 승려들과 함께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는데, 사명당 유정과 함께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전해진다. 제13경 ’월교귀승‘에 승려가 등장하는 것과 제11경 ’선감효종‘에서 산사를 배경으로 한 것은, 손기양을 기리는 데 목적이 있는 이 작품의 성격상 손기양의 임진왜란 참전에 대한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제14경 연교목아는 칠리탄 주변 들판에서 목동이 소를 몰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세 명의 인물이 두 마리의 소를 몰고 화면 왼쪽으로 향하고 있다. 소는 당시 상당한 재산적 가치가 있는 동물로, 소를 그렸다는 것은 풍족한 밀양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제15경 ’죽촌쥐연‘은 죽촌마을의 밥 짓는 연기를 그린 그림이다. 화면 왼쪽 상단에 높은 봉우리가 그려져 있고, 그 왼쪽으로는 작은 봉우리들이 이어져 있다. 산 아래에는 마을이 있는데, 대나무 숲이 마을 뒤쪽을 에워싸고 있고, 마을 앞쪽으로는 나무가 몇 그루 있으며, 그 앞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는데 칠리탄으로 생각된다. 죽촌은 현재 칠탄정이 위치한 마을의 이름으로, 밀양손씨 집성촌이었다. 많은 집들을 중첩되게 그린 것은 마을의 크기가 크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 마을에서 밥 짓는 연기가 많이 피어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죽촌의 살림살이가 넉넉하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제14경 ’연교목아‘에서 제15경
    인문/어학| 2023.01.26| 11페이지| 2,500원| 조회(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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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판매자 표지 중세 유럽의 사상가들 독후감 서평 레포트
    중세 유럽의 사상가들 독후감 서평 레포트
    중세 유럽의 사상가들-목 차-Ⅰ. 서론Ⅱ. 본론1.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 4-5세기 / 유럽적 정체성의 형성(1) 그리스 교부(2) 라틴 교부2. 초기 중세 6-8세기 / 가톨리시즘의 유럽화3. 봉건 중세 9-11세기 / 계서적 보편주의의 대두4. 고중세(1) / 12세기 인문주의 운동5. 고중세(2) / 13세기 스콜라사상의 종합6. 말기 중세 14-15세기 / 신비주의, 헌정주의, 공의회주의7. 중세 동방 정교회 / 정통주의의 성장Ⅲ. 결론Ⅰ. 서론근대는 가깝지만 중세는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을 선택하는데 있어 가장 먼저 들은 생각이었다. 근대와 연관된 개념들, 예를 들어 산업혁명, 계몽주의, 여러 혁명들 등의 개념은 친숙했지만, 중세를 떠올린다면 막연히 종교적이고 딱딱한 이미지만 떠올랐다. 이러한 인식을 갖고 있던 내게 ‘서양 중세사’ 강의에서 중세를 다음에 이어지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갈 발판을 창조적으로 마련하는 시기라고 정의한 것은 신선한 발상이자 충격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그 충격을 충격에서 그치지 않고,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이라는 책을 골랐다. 문화가 아닌 사상에 대한 책을 고른 이유는, ‘서양 중세사’ 강의를 통해서 역사와 문화적인 부분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에 비해 중세의 사상적인 면은 따로 책을 통하지 않는다면 그저 ‘중세 사상=종교’라는 등식에 한정하여 인식하기 쉽고, 자세하게 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제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지닌다고 해도, 이것을 기회로 삼아 나에게 도움이 되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Ⅱ. 본론1.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 4-5세기 / 유럽적 정체성의 형성교부(Father of the Church, 敎父)는 5~8세기경까지 교리의 정립과 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면서 신앙이나 교회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을 말한다. ‘교회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신앙상 맺어진 사제지간을 부자관계로 보는 지칭이다. 역사적으로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기에 해당하는 4~5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 중에서 정누스 대제 등 동로마제국의 보호를 받던 아리우스파는 황제정권과 결탁하여 아타나시우스를 공격했고,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파의 음모로 아우구스와 트레베로룸에서의 귀양살이를 포함 다섯 번이나 추방과 귀향을 반복했다. 339~346년의 제2차 추방 때는 로마의 율리우스 1세에게로 피신하여, 로마 교회와 아타나시우스설이 결합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아리우스파 논박론》은 340년대에 쓴 것으로 아리우스파의 주장에 맞서 삼위일체 교리를 변호하기 위한 글이다. 또한 《아리우스파에 대항한 변론서》, 《아리우스파의 역사》 등은 모두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비판하고, 아리우스파에 맞서 정통교리를 수호하는 자신의 입장을 서술한 것이다. 즉 그의 교리사적 의의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에 있다.(2) 라틴 교부성 아우구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히포의 주교이자 서방교회 교부이며 교회사에서 ‘신약 시대 이후 가장 탁월한 기독교인이며 위대한 인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그는 방대한 양의 저작들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이 중세 내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사도 시대 이후 희미해져 가던 구속 은혜의 교리를 바울 이후 가장 분명하게 확립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반(反) 펠라기우스 논문인 《영과 율법에 관하여》, 《자연과 은혜에 관하여》에서 그는 인간의 원죄와 전적 부패, 예정론에 대한 정통 교리를 확립하였다. 또 배타적 교회론을 주장하는 도나투스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는 보편적 교회론과 성례전, 섭리론을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고백록》과 《신국》을 비롯한 수많은 논문, 주해서, 강해집 등이 있다. 《고백록》은 아우구스틴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한 종교적 저술로서, 그는 이 책에서 개인적 삶의 여정과 그의 기도를 혼재하여 서술하였고, 또한 자신의 신앙적 고백과 다양한 사상들과의 재점들에 관한 비판적 검토를 수행하였다. 그는 바울 사상을 주장하였다. 파사시우스 라베르투스를 포함한 알퀸(Alcuin, 740~804), 라바누스 마우루스(Hrabanus Maurus, 780~856), 와라프리드 스트라보(Walafrid Strabo, 809~849) 등의 9세기 인문주의자들을 ‘알퀸학파’라 한다. 알퀸학파는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이른바 ‘9세기 르네상스’의 토대를 형성하여 라틴 교회의 이론적, 제도적 정비와 라틴 교회의 유럽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로마 제국의 이념을 기초로 하는 단일 정치문화적 단위로서의 유럽 공동체 개념을 조탁하였다는 의의를 갖는다.3. 봉건 중세 9-11세기 / 계서적 보편주의의 대두힝크마르 랭스(Hincmar of Rheims, 806~882)는 교구를 열정적으로 개혁하였던 진취적인 대주교였다. 고트샤르는 예지와 신의 예정을 혼동하여, 선행을 하고도 지옥이 예정되어 있는 자들과, 악행을 저지르고도 구원이 예정된 자들이 있다는 ‘이중예정설’을 주장했다. 랭스는 이 이중예정설에 대해 반박하며, 사탄은 사악해서 교회의 통합을 깨트리기 위해 오류를 전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경고했다. 동시에 그는 예지와 예정에 관한 일련의 정의도 규정하면서, 예지(praescientia)란 앞으로 일어날 일과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날 장소를 미리 아는 것이며, 반면에 예정(predestination)이란 신의 은총으로 예정되어 있거나 예비된 것을 의미했다. 즉, 고트샬크 주장의 치명적인 오류는 신의 악의 창안자임을 내포하고 있던 것이었다. 힝크마르 랭스는 이런 식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해박한 지식을 활용해 교구를 관리하는, 탁월한 실천적 주교였던 것이다.게르베르 오릴락(Gerbert of Aurillac, 940~1003)은 프랑스 남부 아키텐에서 어린 수도승으로 경력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아키텐은 우마이야 칼리프조가 전성기를 이루고 있었던 스페인 코르도바와 지역적으로 매우 인접했기 때문에 그는 이슬람 학풍의 여러 요소들을 실체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수학과으로 거세를 당하였고, 로셀린에 의해 그의 학설이 공격받자 그는 은둔하여 생 드니에서 수도승이 되었다. 수도승이 된 아벨라르는 파라클레트 수도원을 새롭게 세우고 계속해서 학문과 수도생활에 힘썼으나, 대립했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 의해 그의 사상이 이단으로 내몰렸고, 아벨라르의 학설은 공의회로부터 매몰차게 비난받기에 이르렀다. 이에 아벨라르는 클뤼니에 은둔하였고, 그곳에서 피터 외경자가 그를 보호해주었다. 그리고 2년 후 클뤼니 수도원에서 타계한 것으로 전해진다.피터 아벨라르의 주요 저서로는 《심화과정을 위한 논리학의 요소》, 《변증법》 등의 논리학 저술들과 《너 자신을 알라》 등의 윤리학 저술들이 있다. 《너 자신을 알라》의 경우 피터 아벨라르의 가장 독창적인 저술로서, 당시 유행하던 ‘자신을 알기’라는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이것은 앞서도 언급하였듯이 종교에 대한 저술이 아닌 윤리학에 대한 저술로서, 여기서 피터 아벨라르는 특정한 행위가 항상 옳은지 그른지, 혹은 상황이 어떠한 차이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였다. 심지어 그는 선한 동기로 이루어진 행위는 항상 선하다고 주장하며, 무엇이 참된 의도인지에 대한 신의 판단이 주요하다고 믿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서구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매우 선구적인 추론이었다. 이처럼 피터 아벨라르는 당대의 혁신적인 학자의 한 예였으나, 그가 논리학 분야에서 이룩한 개척적인 성과는 이후 논리학 분야의 성장이 급속히 진전됨에 따라 곧 인멸되었다 볼 수 있다.베르나르 클레르보(Bernard of Clairvaux, 1090~1153)는 디종 근교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1113년 새로이 건립된 수도원인 시토 수도원에 들어갔다. 시토 수도회 수도승들은 개혁적 성격의 베네딕트 수도승들로서 보다 단순한 삶으로의 회귀를 그들의 목표로 했다. 이 수도회의 다수의 수도승들은 기도와 독서에 전념했으며 세속형제들이 수도원에 필요한 부수적인 노동을 담당해주었다. 이후 시토회는 급속히 발전하였고, 그의 명성과 영향력도 확장되어,. 따라서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탁발 수도사들에 대해 권면의 글을 남겼으며, 이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도 권면하였다. 한편 성 프란시스와 초기 추종자들은 마침내 프란시스 수도회 설립을 교황으로부터 구두로 승인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란시스 수도회는 회칙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이를 1209년 교황 이노센트 3세로부터 구두로 승인받았고, 보완된 형태로 1223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 의해 교황령으로 공식 승인받게 되었다.탁발수도사들은 당시 무엇보다도 순회 설교에 힘을 기울였고, 이를 위해 프란시스회 수도사들은 일정한 설교사 교육을 이수해야 했다. 설교는 적절한 자격을 갖추고 이를 교회로부터 인정받은 수도사들의 역할이었으므로, 프란시스회 수도사들이 모두 설교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를 1223년의 프란시스회 규칙 9항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프란시스회 수도사들은 주교가 허락한 교구 내에서, 그리고 프란시스회 총원장의 검증을 받은 다음 순회 설교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프란시스회가 행했던 이 새로운 유형의 설교는 당대 종교적 의식의 발달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따라서 프란시스회의 수도사들은 중세 말기 설교 역사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한편 그의 사망 이후 그리스도교 내에서 첨예하게 제기된 청빈의 관한 논쟁은 여러 세대에 걸쳐 가톨릭 교회에 내분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논쟁은 청빈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그리스도적 삶의 단순성을 실천하지 않았던 가톨릭 교회에 대한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는 또한, 16세기 종교개혁의 상황을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신학자로, 도미니크 교단의 수사이다. 그가 태어난 당시 교회와 세속적인 권력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였고, 그 영향을 받아 토마스는 그의 부모에 의해 5살에 이미 몬테카시노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보내졌다..
    독후감/창작| 2023.01.26| 10페이지| 2,500원| 조회(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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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20일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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