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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욕망의 삼각구도로 살펴본 중국적 코즈모폴리터니즘 - "상하이모던" 독후감
    욕망의 삼각구도로 살펴본 중국적 코즈모폴리터니즘- 《상하이 모던》 리뷰페이퍼00000000 0000000 0001. 서론이 글은 《상하이 모던》에서 ‘중국적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언급되었던 모순적 양립의 현상을 류나어우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이 가지는 의미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 책은 개항 후 반식민지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서구화되기 시작한 1930-40년대의 중국과, 이 시기 대거 등장한 상하이의 백화점, 커피하우스, 댄스홀과 같은 근대적 공간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것을 배경으로 발생한 상하이 특유의 도시 문화를 작품 혹은 기법으로 표현한 당대의 작가들을 몇 가지 키워드들로 묶어낸다. 그 중에서도 류나어우와 무스잉의 소설 속에 드러나는 ‘여성’은 반半식민 상태의 중국을 고려했을 때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바, 즉 중국의 근대화 과정의 특이성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요소다.여기서 여성은 욕망의 대상이다. 이는 오랜 가부장제의 구조를 가지는 우리 사회에서 크게 새로울 것 없는 명제이다. 또한 제국주의와 여성은 어떤 방식으로든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하고 스스로에 예속시키려하는 것은 권력관계라는 관점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구조에 곧잘 비유된다. 하지만 이 시기 상하이의 경우 그 욕망은 보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들은 마치 피식민지의 국민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완전한 서구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또한 뚜렷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예술가들에게는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그에 대한 미학적 비판을 해야만’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이와 같이 모순이 양립하는 상황은 이 책에서 소개되고 있는 류나어우의 〈시간에 무감각한 두 남자〉에 등장하는 남성/여성의 인물들이 가지는 의미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설명가능하다.우선 타자화된 대상에 대한 ‘욕망’을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기 때문에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구도에 입각해 류나어우의 작품 구조를 분석한다. 그리고 분석한 작품에서의 여성/남성 간의 관계와 상하이라는 공간을 공유했던 중국인/서양인 간의 관계를 대응시키며 이것이 기존의 이분법적 틀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한다. 그리고 중국적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의의 및 한계에 대해 간단하게 첨언하며 글을 마무리하겠다. 이를 통해 우리는 중국인의 의식구조와 이러한 특이성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2. 본론-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으로 본 〈시간에 무감각한 두 남자〉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은 소설novel의 서사를 분석하고 그에 통일성을 부과하는 데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는 이론이다. 소설에서는 보통 등장인물들의 욕망의 감정이 그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이때 이 욕망은 흔히 생각하는 욕망의 주체-욕망의 대상의 이원적 구성이 아니라 이에 ‘중개자’가 추가되어 삼각구도를 이룬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핵심이다. 중개자는 욕망을 발생시키는 일종의 촉매제역할을 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쉽게 설명가능하다. 인간의 욕망은 순수하게 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또 다른 대상에 의해 촉발된다. 유명 연예인이 사용한 제품이라면 한번이라도 더 눈이 가는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혹은 권위 있는 평론가가 극찬한 작품을 비판하기란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지라르는 그의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예로 든다. 돈키호테가 기사가 되고 싶은 이유는 자신이 감명 깊게 읽었던 책에 나오는 ‘라다미스’처럼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라다미스를 제외하고 위대한 기사에 대해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허구의 인물을 동경한다. 《돈키호테》 뿐만 아니라 스탕달의 《적과 흑》,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등의 작품에서도 직접적으로 ‘중개자’가 드러나든, 그 존재가 은폐되든, 그러한 제 3자를 상정할 수 있다. 이처럼 등장인물의 욕망의 원인을 밝히는 이러한 틀은 이원적 구조보다 훨씬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시간에 무감각한 두 남자〉에도 욕망의 감정이 등장한다. 이도 언뜻 보면 전근대와 근대 사이의 애매한 경계에 있는, 그러나 ‘팜므파탈’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여성과, 그를 탐하는 두 명의 남성으로 이원적 구조를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그녀의 이미지를 잘 살펴보면 우리는 은폐된 중개자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신식 여성은 ‘질주하는 자동차에서의 섹스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욕망의 주체로 위치시키는, 지금까지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남성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도발적인 존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남자주인공 H에 의해 자동차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심지어 H가 그녀에게 쩔쩔매는 입장임에도 말이다. 스수메이는 이러한 ‘자동차에의 열망’에서 무엇이든 빨리 변화하는 근대의, 도시에서의 속도감을 읽었다. 이는 곧 서구의 근대성을 의미한다. 작품 속 남성들은 서구의 물질문명을 욕망하며 그것을 체화하기를 바라는 존재인 것이다. 류나어우의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소위 신식 여성들의 신체에 대한 묘사 역시 이러한 분석에 힘을 실어준다. 그들은 단발머리의, 이지적인 앞이마, 그리스식 코, 큰 가슴 등으로 묘사되는 서구 여성의 신체적 특성으로 일컬어지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 남성들이 동양의 신식 여성에게 가졌던 욕망은 서구 근대성에의 욕망 혹은 그것이 서구 여성의 신체적 특성으로 치환된 것에서 촉발된 결과다. 따라서 욕망의 중개자는 서양의 근대성의 표상을 가지는 서양의, 혹은 경마장에서, 댄스홀에서 보이는 주변의 여성들이며, 이들이 H와 T로 하여금 작품 속의 여성 주인공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 중국이 서양에 관계하는 방식의 특이성하지만 〈시간에 무감각한 두 남자〉에서는 욕망의 대상인 여성이 곧 욕망의 주체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동차와, 그것에 내포되어 있는 근대성을 열망한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남성은 이 여성보다 딱히 뛰어난 면이 없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모습이 ‘갈수록 딱해 보이는’ 왜소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분명 작품을 지배하는 욕망의 주체이면서, 여성/남성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가부장적 모습을 보이는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대상’인 여성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중국(인)이 서양(인)에 관계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물론 이 여성들이 되고 싶어 했던 것이 이런 형편없는 남성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은 남성으로 대변되었던 권력,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권리들을 근대화를 통해 되찾고 그들과 동등한 지위를 얻고자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자동차를 열망하고, ‘남성의 시각에서’ 점점 더 오만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인물구성은 중국이 완전한 피식민지인을 열망했던 동시에 그들의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서양을 타자화했던 독특한 의식 구조를 닮아있다. 그들은 서양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을 타자로 규정하고 주체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찾아가려고 했다. 이는 호미 바바가 주장한 것처럼 ‘순종적인 동시에 전복성을 띨 수 있는’ 양가적인 특성을 지닌다. 또한 이 소설에서 욕망의 양상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것처럼 이와 같은 양가적인 특성은 상하이의 실질적인 공간적 질서에서도 단순히 반(半)식민, 반(半)봉건의 상태로 설명되기 어려운, 상당히 복합적인-‘잡종적’이라고 표현되었던- 모습으로 나타났다.- 중국적 코즈모폴리터니즘의 의의와 한계이 부분은 개인적인 첨언이다. 저자는 이러한 특이성을 중국적 코즈모폴리터니즘으로 해석하며 그럼으로써 민족주의와 세계주의 사이 어딘가 애매한 중국의 역사적 위치도 설명해낸다. 하지만 이것은 결과론적인 해석일 수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사고의 전개에서 다소 추상적인 부분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중국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너무나도 확고히 지키고 있었기에 완전한 피식민지인이 되기를 바랐다는 식의 생각은 스스로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당시 상황들을 해석한 것은 아닐는지. 더군다나 책에서 저자는 중국인들이 그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언어’를 든다. 그러나 식민 치하에서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은 것은 중국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 역시 그랬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서술했듯 그러한 언어는 신문을 비롯한 인쇄매체의 발달로 널리 퍼졌고, 확신할 순 없지만 당시 한반도를 살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어렴풋이나마 ‘민족’이라는 개념을 느끼게 한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또한 문인들 역시 저항문학을 비롯하여 우리의 색채가 배인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식민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식민사관에 반박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중국이 반(半)식민지였다는 사실에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대표적인 근거로 언어를 꼽기란 명확하지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이다.
    독후감/창작| 2020.12.07| 4페이지| 2,000원| 조회(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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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2010, 정태헌) 독후감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위하여-『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2010, 정태헌)를 중심으로0000000 000000과 0001. 들어가며20세기를 전후로 한국의 근대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다. 일본의 통치가 있었기에 한국의 근대가 도래할 수 있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든, 그것의 대척점에서 한국은 전근대시대에서부터 독자적으로 자본주의로 발전해나갈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자본주의맹아론’을 주장하든,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의 경험’이 한국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각각의 입장에서 근거로 삼는 논리와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따져 수용할 부분과 비판할 부분을 변별하기에 앞서, 우리는 이러한 논쟁에 있어 무엇이 우선하는 기준이 되어야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먼저 정립할 필요가 있다.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는 그런 차원에서 의미가 깊다. 이 책은 이념만을 잣대로 이분법적으로 판단하거나 특정 방법론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 현상만을 쫓는 사람들에게, 이 땅을 살아온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경제사’라는 이름으로 엮인 근대의 가장 현실의 삶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하는지, 그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더불어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조망한다. 이러한 시각 혹은 방법론은 특정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초역사적으로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 특히 ‘근대’라는 특수한 시대적 조건 하에 한 세대의, 한 개인의 삶은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닌 연속적인 역사(歷史)로 보다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이번 서평에서는 책에서 소개한 일제의 식민통치시기를 바라보는 대안적 시각을 정리하고, 해방 후 경제정책들을 둘러싼 주요한 주체들을 살펴봄으로써 역사의 현재성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동일한 시각으로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안들의 바람직한 방향성을 개략적으로나마 모색하며 글을 마무리할 것이다.2. 누구를 위해야 할 것인가 - 일제의 식민통치와 해방 후 경제 정책 바라보기한국의 근대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은 일제의 식민통치시기를 바라보는 극단적인 관점 중 하나다.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일본이 한국에 근대적 문물 및 제도를 들여온 것은 사실이며, 더 나아가 한국이 그것을 기반으로 근대사회로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통치를 위해 근대적 산물을 도입한 것은 사실이니 언뜻 보면 그럴듯하게 생각된다. 하지만 이는 한국을 위해서, 한국이 주체가 되어 일어난 근대화가 아니었다. 즉, 그것은 일본 식민통치의 효율성을 위함이었기에 오히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를 기본으로 설정한 본래의 ‘근대’의 개념에 반(反)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느냐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생각 및 의도에서 나온 정책인지가 중요하다. 전근대적인 생활이 통치에 효율적이었다면 당시 사회는 곧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이 지점에서 식민지적 근대의 모순이 드러난다. 당시 일본의 통치는 삶의 모든 영역의 기준을 ‘일본인’으로 설정하고 그에 맞지 않는 한국인은 뒤떨어진, 정상적인 것에서 모자란 수준으로 낙인찍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의식의 발전을 찾아볼 수 없다. 더군다나 식민지근대화론의 근거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발전 부분 역시 정말 경제가 성장한 것이 아닌 그저 일시적으로 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었다. 또한 강제동원이나 수탈의 구체적인 수치가 주는 충격은 그저 ‘일제가 식민통치시기에 한국인들을 착취했다’는 문장으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정도기도 하다. 이러한 당시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일제의 근대 문물 도입이 한국에 살고 있던 수많은 한국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반증한다.해방 후 경제 정책도 마찬가지다.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지만, 정작 주요한 주체가 되어야 할 국민은 사실상 경제정책에서 중요한 요소로 고려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한국의 정부, 그리고 몇몇의 기업이 호혜적인 관계를 맺으며 경제 정책의 주요 주체들로서 경제를 꾸려나갔다. 기업에 파격적인 혜택을 주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것에 주력하면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규제완화, 유연한 일자리, 민영화 등을 골자로 하는 신자유주의정책들도 그대로 수용했다. 지금까지도 여전히 기업이 보다 쉽게 사업을 펼칠 수 있도록 관련된 규제를 완화하고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게 하며, 더불어 각 부문의 민영화를 통해 이러한 기업들이 더욱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을 계속해서 만들어준다. 외국자본에 대한 무분별한 노출도 같은 맥락에서다. 외국자본을 수용하는 것이 무조건 자국의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을 우선으로 하는 이러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현재 수많은 노동자로서의 국민에게 남은 것은 불안정한 고용형태와 낮은 임금, 열악한 근무 환경이다. 기업에게 주는 특혜는 어딘가에서 무한정 샘솟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갚지도 못할 노동자들의 삶을 빚지고 성장했으며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을 전가시켜버렸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정책 하에서는 이것은 당연한 일로 간주된다.경제를 비롯한 여러 정책들의 방향을 결정할 때, 이러한 정책들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국민이고 민주주의이다.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이 제대로, 억울하지 않게 잘 살아가려면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지를 우선적인 기준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적인 성장을 담보하지 못하는 순간적인 경제지표의 상승곡선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다. 식민지적 근대가 가지는 모순과 독재체제와 경제발전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논리적 비약이 여기서 드러난다. 현실 속에서 국민이 주요한 주체로서 작용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가 여러 정치 및 경제 정책들을 평가할 때 유효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3. 이러한 역사가 그저 과거의 것으로 박제되지 않으려면역사는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말이기에 더 무디어지기 쉽다. 1920년 의열단의 행보를 소재로 재구성한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기 위한 사람들의 투쟁을 그린다. 그들의 존재는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너무나 소박했다. 밀정(密偵)임이 탄로 난 한 의열단원이 이런 오합지졸들을 데리고 독립을 이룰 수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도리어 역정을 낼, 그런 정도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한 친일 부호의 입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불가능해 보이지만 옳다고 여기는 일들을 끊임없이 도모하고 실행하려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립은 언젠가 일어날 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동적인 결말에는 한 가지 과제가 남는다. 부당한 것들에 대해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이러한 사람들의 정신과 투쟁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너무나도 간단하게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더 이상 현실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단편의 기억으로 박제되어 버린다.어떤 대상을 신성시하는 것과 하찮게 여기는 것이 비슷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이유가 위와 유사하다. 무언가를 영웅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행위는 우리가 현재 살아가는 시대와의 단절로 귀결되기 쉽다. 영웅화든 과소평가든 대상을 현실에서 배제시키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대에 가깝게까지 20세기의 경제를 중심으로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것이 그저 그때 일어난 사건들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당시 무엇을 기준으로 어떤 정책들을 선택했는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누구든 생각할 수 있는 말이지만, 이것을 진정으로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현재에도 우리의 삶에서는 어떤 일인지 개략적으로 알기도 벅찰 만큼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기업의 무분별한 하청시스템이 빚어내는 고질적인 문제들에서부터, 2000년대를 전후로 시작하여 아직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 의료민영화 사업, 그리고 최근 한반도 사드 배치를 둘러싼 수많은 입장들까지 참 복잡다단하다. 가장 단순하게 생각해보자. 앞서 살펴보았듯이 여기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은 주체로서의 국민이다. 스스로가 주권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행동하는 것이 곧 민주주의이다.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는 마지막 장에서 이러한 경제의 민주화에 대한 의식을 촉구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독후감/창작| 2020.12.07| 3페이지| 2,000원| 조회(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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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릴레오, 상징의 제작자 독후감
    박제된 ‘위대한 과학자’, 숨겨진 ‘조각그림 맞추는 사람’- ´갈릴레오, 상징의 제작자(마리오 비애지올리, 1990)‘ 감상문00000000 0000000과 000과학의 인상(印象)에 대한 의문‘과학’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인가? 그 과정이 복잡한 기호와 수식들로 표현되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과학과 친숙하지 않은 본인의 대답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개인이 과학에 대해 느끼는 진입장벽의 정도를 논외로 둔다면, 과학은 주관적이지 않고 객관적인 것, 가치중립적인 것이라는 의견이 현재 그에 대해 가장 보편적으로 공유된 인상일 것이다. ‘과학적이지 못하다’와 상응하는 말들-이를테면 ‘감정적’, 미신적’, ‘주관적’, ‘논리적이지 못한’, ‘분명하지 못한’ 등의-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은 진실로 객관적인 것인가? ‘객관적인 과학’에서의 과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입증된 진리를 말하는가, 아니면 그러한 실험과정 전체를 포괄하는가?마리오 비애지올리는 그의 논문 ‘갈릴레오, 상징의 제작자(1990)’에서 갈릴레오의 경력을 통해 권력과 과학의 관계를 제시하며 이러한 질문들을 심화시킨다. 비애지올리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당대 최고 권력자였던 메디치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성학적으로 예정된’ 상징의 제작자로 위치시켰다. 그 일환으로 그는 자철광을 코시모와 연관시킨 문장(紋章)을 제안하고 그가 발견한 목성의 위성들을 메디치가에 헌정하기도 하였다. 그럼으로써 갈릴레오는 철학자의 지위로 격상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권력의 지위에 기대어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지식의 정합성을 효율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다. 여기서 권력을 이용해 특정 지식을 옹호하는 것에 대해 찬반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권력과 지식, 혹은 권력과 교육이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은 명백하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실질적 작동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을 은폐하는 또 다른 차원의 작업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위대한 과학자’의 속사정비애지올리는 논문의 마지막에서 갈릴레오를 ‘위대한 조각그림 맞추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비애지올리는 갈릴레오의 행적을 그의 능력으로 평가하는 듯 보이지만, 혹자는 지식 생산의 기술적 능력을 갖춘 자로서 갈릴레오의 권력에의 철저한 봉사에 대해 그를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논문에서처럼 갈릴레오가 그의 코페르니쿠스주의적 지식의 효과적인 확산을 위해 온전히 자발적으로 권력을 ‘이용’했으리라는 보장 또한 없다. 경제적 지원의 측면과 그의 경력이 완벽하게 분리될 수도 없을뿐더러 설사 ‘참된 지식’의 확산을 위해 권력을 수단으로서 이용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갈릴레오에 대한 비판을 저지하는 근거로 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대인들에게 익숙한 갈리레오는 수많은 ‘과학적’ 발견 및 발명을 한 위대한 과학자이지, 자신의 경력을 위해 권력과 결부된 실리(實利)의 조각그림을 맞추는 봉급생활자는 아니라는 점이다.이러한 표현에서 그의 과학적 발견들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비애지올리의 논문에서 소개된 갈릴레오는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을 한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조건들을 고려하여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 역시 생활을 위해 돈을 벌었으며 수학자인 본인에 대한 인식을 철학자라는 지위를 얻음으로써 상승시키고자 몇 번의 시도 끝에 대학에서 궁정으로 그의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이 궁정의 ‘새로운 철학자(p42)’는 당시 대학의 학문분야의 위계에서 자발적으로 비껴가 있었지만, 그로인해 모든 방면에 있어 궁정의 인증이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예속상태이기도 했다. 이는 당시 권력이 어떻게 지식을 통제하고 지식이 어떻게 권력에 봉사했는지를 단편적으로 드러내준다. 하지만 오늘날의 갈릴레오는 이러한 면모들이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조각그림 맞추는 사람’이 숨겨진 과정-실리적 차원의 은폐그렇다면 이러한 차원의 은폐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이에 대해 감상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거칠게나마 나름대로의 답을 내리기 위해, 먼저 갈릴레오가 ‘사심없는 메디치가의 가신(家臣)’ 혹은 ‘신이 보낸 중재자’로서 그의 입지를 굳히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그가 메디치가와의 후원 관계에서 경제적 측면은 감추려는 경향을 보였다(p34)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에 적절하게 잘 끼워 맞춘 상징물을 헌정이라는 방식을 표방해 그것을 팔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되었다. 그와 메디치가와의 관계는 완전히 필연적이고 이미 준비된 것이며, 따라서 목성의 네 개의 위성들도 갈릴레오가 아니면 ‘조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를 강조하는 것은 갈릴레오의 입장에서뿐만 아니라 메디치가의 입장에서도 이익이 되는 길이었는데, 그들은 천상의 별들의 상징성을 빌려 그들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이러한 과정에서 바탕이 되는 기제는 ‘거대한 어떤 우주적이고 자연적인 질서에 기대는 것’ 정도로 표현할 수 있겠다. 목성의 위성들을 헌정하는 것을 계기로 갈릴레오는 당시 메디치가의 신적인 권력의 질서에 편입하여 들어갈 수 있게-비록 그는 자신을 메디치가의 ‘자연스러운’ 가신으로 내세웠지만-되었다. 이와 같이 당시 메디치가의 권력을 상징하는 기반은 오늘날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여겨지는 ‘과학적’ 질서 혹은 사고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 혹은 ‘미신적’ 질서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위대한 과학자’ 갈릴레오의 과학적 업적들을 비롯한 과학과 합이 잘 맞았다. 권력을 가진 통치자는 과학적 발견을 그들 통치의 정당성을 선전 및 상징할 수단으로 이용했고, 과학계 역시 그들의 연구가 정당성을 얻고 널리 알려지기 위해서는 권력의 승인이 필요했다. 이 시기부터도 권력과 과학은 서로를 정당화시키는 데 적절히 상호 봉사했던 존재였던 것이다.-역사적 차원의 은폐이러한 과학과 권력의 밀접한 관련 및 내부적 은폐의 작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다시 한 번, 혹은 반복적으로 은폐되는데, 이는 현재 우리가 갈릴레오를 어떤 인물로 여기는지를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갈릴레오의 ‘조각그림 맞추는 사람’으로서의 면모는 지워지거나 축소되고 ‘위대한 과학적 발견을 한 과학자’로서의 면모만이 강조되어 남게 된다. 일종의 우상화 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작업과정에서 일반사람들이 겪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측면들은 그의 이미지에서 매우 적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그마저도 그의 과학적 능력 및 재능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로서 기능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실상 그가 열정적으로 봉사했던 권력과의 관계나 경제활동 등과 같은 현실적 조건들로부터 유리되고 ‘위대한 과학자’로서 역사 속에 박제된다.비애지올리는 그가 그의 연구를 위해 메디치가의 권력을 이용하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였으나, 그 역시 후대에 과학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그것이 결과적으로 갈릴레오의 명성 또한 높이는 일이었다 할지라도-선별작업을 거쳐 한 번 더 이용당하게 된다. 이것은 결코 아이러니하거나 모순적인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권력과 과학의 관계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실리적 차원의 은폐에서는 권력의 기반이 비과학적인 것이었다면 이 때의 은폐를 주도한 권력의 근거는 객관성 및 가치중립성을 인정받게 되는 과학 그 자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은폐의 작용에는 과학에 대한 일종의 충실한 편견 내지 선입견이 더해져 그 양상이 더욱 가시화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는 일련의 체계적인 과학 찬양 작업들-이를테면 그것은 객관적인 진리를 담보한다는-이 ‘과학혁명’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논쟁을 촉발시킨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20.12.07| 3페이지| 1,500원| 조회(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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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혈의 누(이인직)와 상상의 공동체(앤더슨)
    조선의 근대적 공동체 형성 요인으로서 신소설 『혈의 누』가 가진 가능성 탐구-그것의 출판 형태 및 문자사용을 중심으로00000000 000000과 0001. 서론1.1 주제 선정 이유 및 목적1.2 글의 진행 방향과 동서양 간 ‘소설’ 개념의 차이2. 본론2.1 〈혈의 누〉의 민족-국가 형성 요인으로서의 가능성 - 내용적 측면에서2.1 〈혈의 누〉와 전근대소설 및 근대소설과의 비교2.2 〈혈의 누〉 출판 형태-만세보 연재 및 시장의 융성 요인-루비 활자3. 결론 - 요약 및 맺음말* 참고문헌 출처1. 서론1.1 주제 선정 이유 및 목적우리나라 문학사는 1910년대를 전후로 하여 ‘근대’로 진입했다. 개항 후부터 서구 문학이 유입되면서 고전 문학이 쇠퇴하고 새로운 장르의 문학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일제 식민 치하에 있으면서 ‘민족주의’가 문학에서 한동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 등장했던 새로운 문학 장르는 ‘근대 지향’의 의식을 바탕으로 개화사상, 계몽사상, 애국사상 등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 대다수였고, 이들 작품은 ‘개화기 소설’ 혹은 새로운 시대의 사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신소설(新小說)’이라고 불렸다. 우리나라에서 신소설이라는 명칭은 1906년 2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의 《중앙신보》 발간광고문에서 을 가리켜 “한운선생이 저작한 현대걸작의 신소설”이라 한 것이 최초였다.이인직의 〈혈의 누〉 역시 그러한 작품들 중 하나였고, 작가 이인직이 가지고 있었던 근대적 계몽사상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허구적 인물인 옥련 일가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독자들은 〈혈의 누〉가 만세보에서 연재되던 당시 ‘독자투고란’을 통해 이야기의 진행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한 바 있다. 이 사실은 이전까지 ‘소설’이라고 하는 것이 당시 사람들에게 ‘옛날이야기’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혈의 누〉를 통해 ‘소설’이 현대의, 동시대의 이야기를 포함할 수 있는 것으로 소설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주었다는 점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따라서 본격적으로 앤더슨이 4편의 소설들을 예로 들며 동시성 개념을 명명한 것을 〈혈의 누〉에 적용하기 이전에, 동서양 간의 ‘소설’이라는 용어의 쓰임의 차이를 언급할 필요성을 느껴 서론에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서양에서는 우리가 현재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설’ 개념인 서사문학을 중세에는 로망스(romance), 근대에 와서는 노벨(novel)로 구별해서 불렀는데,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에서는 소설(小說)이라는 한 가지 용어로 사용해왔다. 하지만 시대별로 그 뜻은 그리 크지 않은 폭이지만 차이가 분명했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노벨(novel)’의 개념과는 또 달랐다. 소설이 될 수 있는 일종의 조건으로서 노벨(novel)이 가지고 있었던 특징은 1) 인간의 감정 및 관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장편의 길이, 2) 인과관계를 중심으로 한 플롯 구성과 사건의 유기적 배열을 통한 작품의 완결성, 3) 현실성을 구현하는 리얼리즘적 특성 정도가 있다. 반면 우리나라 근대 소설은, 후대에는 서구의 노벨(novel) 개념을 받아들인 작품들이 점차 많아졌으나 〈혈의 누〉가 연재되던 당시에는 이러한 조건들과는 상반되게 비교적 짧은 길이의 단편 소설이 대부분이었고 우리나라의 상황에 따라 독자적인 플롯 및 기법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인 특질들이 서구의 그것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나라의 근대 소설은 ‘근대’의 문학으로는 부족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실상을 바탕으로 깊은 분석을 하지 못한 채 표면의 것만 비교한 탓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동서양의 근대 소설의 성립에 있어 중요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그들 각자가 어떻게 작품의 대중화를 이루었는지, 즉 어떻게 독자층을 포섭했느냐다. 서양은 근대소설이 발달할 무렵 문자 해독 인구의 비중이 높아져 개인 독서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근대 소설 독자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는 작가 층이 대중들의 언어, 즉 한글을 작품의 언어로 포함하여 사용함으로써 독자층을 끌어들였다. 이처비교하며 〈혈의 누〉에서의 동시성을 읽어보고자 한다.앤더슨이 예로 든 소설 중 하나가 프란치스코 발락타스의 《알바니아 왕국의 플로란테와 로라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소설에서 발락타스가 줄거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지 않음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야기는 중간에서 시작되고 완전한 이야기는 회상의 역할을 하는 일련의 말(연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혈의 누〉 역시 그 방식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연대기적 시간 구조에 따른 서술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혈의 누〉는 청일전쟁 이후 가족을 잃은 한 부인이 그의 남편과 딸 옥련이를 애타게 찾아다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앞서 어떤 난리를 겪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 않을뿐더러, 그 이후에 부인의 남편인 김관일이 장인인 최씨 노인에게 처자를 찾아 줄 것을 부탁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미국에 간 사실이 장인과 이웃사람의 대화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이나, 부인이 남긴 편지를 발견하고 자신의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최씨의 모습 등이 역시 순차적으로 서술되지 않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동시적’ 과거가 ‘부인이 가족들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김관일은 장인을 만나 미국으로 떠났고, 장인은 딸의 소식을 듣고자 딸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라고 단순하게 서술되는 것과 이들의 말과 대화를 통해 연결되는 것은 확연히 다른 기법이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독자들이 글을 읽으며 동시성을 재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서사의 구조가 각각 세 개의 공간에서, 각 인물들의 행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 역시 그러하다. 앤더슨이 예로 든 또 하나의 책이 필리핀 민족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호세 리살의 《놀리 메 탕헤레》인데, 여기서 그는 작품의 도입부에 주목한다. ‘10월 말경 캐피탄 티아고로 잘 알려진 돈 산티아고 데로스 산토스는 만찬회를 열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통해 그는 소설의 시작에 등장하는 특정한 시대, 특정한 달의 만찬을 마닐라의 아주 다른 지역에서 서로를 모르는 수백의 이름 모를 사람들이 화제로 삼고이고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특징들은 우연적 사건 전개, 아이디얼리즘에서 발생하는 현실성 감소, 당시 급변하는 시대상황에 따른 전통적 의식과 근대적 이상의 혼재 등이 있다.우연적 사건 전개는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옥련이 조선에서 정상군의를 만나 일본으로 가게 되는 장면이나, 일본에서 갈 곳을 잃고 떠돌다 구완서를 만나 미국으로 가게 되는 장면 모두 어떤 필연적 계기 없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성이 전근대의 그것과 완전히 같은 층위의 것은 아니다. 『별주부전(수궁가)』에서 자라가 토끼 간을 얻지 못하여 낙담하고 있을 때 도사가 나타나서 선약을 주는 구조와 같이, 갑자기 초월적 인물이 등장해 이야기 진행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혈의 누〉에도 자살을 결심한 옥련이의 꿈에 어머니가 등장해 결국 마음을 고쳐먹게 되는 신비스러운 장면이 등장하긴 하지만, 후에 다시 부모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꿈을 통해 옥련에게 시련을 줌으로써 꿈이 서사 갈등의 해결에 있어서 마냥 전지전능한 요소는 아님을 보여준다. 『숙향전』에서는 하필 숙향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받은 관리가 병자호란 때 헤어졌던 아버지임을 등장인물이 꿈을 통해 알게 되는데, 이러한 전근대소설과는 달리 〈혈의 누〉에서는 현실적 세계에 하나의 인간이 행하는 행위 중 일부로 기능한다.아이디얼리즘에서 발생하는 현실성 감소 역시 그 주제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옥련이 구완서와 함께 미국으로 가서, 거기서 마주한 미국과 미국인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애초에 미국으로 가는 여정이 굉장히 간단하게 묘사되어 있고, 미국에 도착해서도 그 모습을 작가가 ‘미국’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생각들로 묘사해놓았는데, 이는 당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이인직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보인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계 헤게모니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서양의 근대적인 것’, ‘신문물’의 나라로 미국을 떠올요한 양상 중 하나로 바라본 연구를 고려한다면, 〈혈의 누〉에서도 비록 그것이 서사를 구성하는 주요소가 되며 작동하진 않지만, 근대적 가능성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여기서 직접적으로 드러난 특징들 외에도 “이더라”, “하였도다” 등의 전근대적 어미 사용이나 평면적이고 유형적 인물의 등장, 작품의 기본구성과 무관한 에피소드의 남용으로 작품분량의 불필요한 증가 등 〈혈의 누〉를 포함한 신소설은 근대소설로서는 부족하다고 할 만한 여러 한계점을 가진다. 하지만 이번 장에서 살펴본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면, 그들의 한계점 역시 근대로의 지향을 가지고 나타난 산물임은 분명해 보인다.2.3 〈혈의 누〉 출판 형태-만세보 연재 및 시장의 융성 요인-루비 활자지금까지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주장한 관점을 수용해, 민족-국가적 공동체를 형성하는데 기여할 수 있었던 근대소설의 요소들을 〈혈의 누〉에서도 찾아보았고, 또 그것과 전근대소설 및 근대소설의 특질들을 비교하며 논의를 보완했다. 본론의 마지막 장에서는 〈혈의 누〉를 둘러싼 물적 요인, 그 중에서도 출판 형태 및 시장에 주목해 근대성에 대한 논의를 마저 진행할 것이다.우선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항이 〈혈의 누〉가 천도교 신문인 『만세보』에 연재되었을 당시 사용되었던 활자 표기다. 〈혈의 누〉는 1906년 7월 22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 50회 연재되었으며, 완결된 이후 다시 소설을 연재해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에 이인직이 10월 16일에 바로 을 연재하기 시작했을 정도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이렇게 독자들의 인기를 얻었던 근본적인 요인에는 서론에서 ‘소설’의 개념을 정리할 때 언급했던 문자의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이인직이 주필로 있었던 『만세보』에서는 한자 옆에 작은 한글 활자를 덧붙여 적는 ‘한국식 루비 활자 표기’를 사용했는데, 이는 한자 사용자와 한글 사용자를 모두 독자로 포섭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으며 〈혈의 누〉 역시 루비 활자로 연재되었다. 이는 우리 근대문학이 기존에 작가 개된다.
    독후감/창작| 2020.12.07| 7페이지| 2,000원| 조회(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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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근삼, 국물있사옵니다 감상문 (1p)
    이근삼 「국물 있사옵니다」 감상문0000000 00000이근삼의 ‘국물 있사옵니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풍자와 비판으로 점철되어 있다. 제목에서 ‘국물이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흔히 이야기하는 ‘국물도 없다’의 반어적인 표현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작품의 방향성을 읽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은 물질 만능주의와 배금주의가 팽배하기 시작하던 우리나라 6-70년대의 시대상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점에서 전하려고 하는 바가 명확하다. 따라서 모든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나 역할, 그들의 행동들이 이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주인공 상범은 늘 스스로 손해를 보며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명시적으로 말이 오고 간 것은 아니지만 당연히 자기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웃 여자 박용자가 어떤 언질도 없이 그의 형 상학과 결혼해버리고, 허구한 날 경비 아저씨는 술에 취해 찾아와 집에 가기 싫다며 자신을 귀찮게 한다. 또한 탱크와 그의 정부 현 소희를 비롯한 다른 주변 인물들도 상범을 만만하게 보는 듯 행동하고 있기에 상범이 그렇게 느끼는 것을 마냥 그의 자격지심이라고만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그러다 극의 중반쯤에, 그는 이런 삶을 ‘새 상식’으로 바꾸어보기로 결심했다고 말한다. 그의 새 상식은 출세와 돈에 있어서 굉장한 성과들을 만들어낸다. 갑자기 죽어버린 경비 아저씨가 잠시 맡아달라고 주었던 돈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이 가져버리는 것을 시작으로, 사장의 신임을 얻어 배 과장을 교묘히 모함해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고 스스로 그 자리를 꿰차는 모습이라든지, 성 아미와 박 전무와의 은밀한 관계를 이용해 결국엔 성 아미와 결혼까지 하게 되는 모습 등 그렇게 소심하던 사람이 이렇게 확 바뀌어 버린 것을 보니 무섭기까지 했다. 중간 중간 상범이 혼잣말로 이러한 새 상식과 그에 따라 그가 얻은 것들이 훌륭하고 바람직하다는 듯 이야기하는 것이 이러한 비판의 정서를 더욱 강화시켰다. 주인공에게 도덕 판단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 당시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하였다는 것을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급격한 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가치 판단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었던,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가치를 정립하기가 더 어려워져버린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외에도, 상범이 그의 동생 상출이에게 돈을 주며 자신과 같은 변화를 강요하는 것이나 성 아미가 박 전무의 아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결혼을 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뻔뻔하게 “우리 아이는 언제?”라고 묻는 장면 등이 인상 깊었다. 상범이 엽총을 주변사람들에게 겨누는 장면 역시 그것으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설 것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적절한 소품의 사용이라고 생각했다.
    독후감/창작| 2020.12.07| 1페이지| 1,000원| 조회(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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