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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원론과 일원론의 관점에서 분석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평가A좋아요
    마음, 우리의 조종간이자 목표물Ⅰ. ‘진짜 마음’과 ‘가짜 마음’의 세계‘SF 신드롬’의 선구자라 불리는 작가 필립 K. 딕의 소설『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는 현상금 사냥꾼인 ‘릭 데커드’가 등장한다. 작중에서 그가 행하는 일은 ‘퇴역’이라는 점잖은 표현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는 사실 인간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들을 향해 레이저 총을 발포해 죽이는 일이다. 데커드는 목표물을 하나하나 제거해간다. 그리고 마침내는 역사상 가장 단기간에 최대두수의 안드로이드를 퇴역시킨 현상금 사냥꾼이 된다.데커드가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구분하는 방법은 ‘보이트 캠프 검사’다. 이는 안드로이드를 백 퍼센트 걸러낼 수 있는 감정이입의 척도를 재는 방식이다. 데커드는 질문하고, 안드로이드들(혹은 인간들)은 대답한다. 데커드의 질문에는 반드시 ‘동물’이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집에 들어갔더니 곰 가죽을 벗겨 만든 러그가 깔려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는 식이다. 피검사자는 필요에 따라 솔직하거나 솔직하지 못하게 대답하지만, 사실 대답은 크게 상관없다. 중요한 지점은 피검사자의 눈동자다. 눈동자가 언제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가 검사의 결과를 가른다.『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이하 『안드로이드』)의 지구에서는 낙진으로 인한 피해 탓에 기계 동물이 아닌 ‘진짜’ 동물이 흔하지 않다. 살아있는, 가여운, 희귀한, ‘진짜’ 동물들 말이다. 피검사자가 이러한 동물들에게 어떤 연민의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안드로이드가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작중에서 이 검사는 백 퍼센트의 정확도를 자랑한다. 검사가 어긋나는 장면은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데커드는 이 검사를 통해 주변을 재단하거나 경멸한다.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기도 한다.그렇다면 주인공인 데커드를 포함한 인간들에게는 존재하고, 안드로이드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은 부분은 정확히 무엇일까? 작중에서 이는 ‘감정이입 능력’, 즉 ‘공감능력’의 영역으로 설명된다. 소설의 초반, 데커드에게 검사고 판단한다(반응이 조금 늦었다는 이유다). 인공이며, 모조인 감정이입 능력. 즉 ‘가짜’ 마음인 것이다. 축약하자면 보이트 캠프 검사는 안드로이드들에게 심어진 ‘가짜 마음’과 인간에게 심어진 ‘진짜 마음’을 구별하는 셈이다.이에 나는 재차 당연한 의문을 느낀다.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나누는 ‘마음’이라는 기준은 어떻게 정의 내려야 좋은 것일까? 『안드로이드』가 마냥 허구였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수많은 AI들이 지능을 장착한 채 우리의 곁에서 우리를 보좌하고 있다. 인공지능 비서들은 인간의 혈압을 관리해주고(이 분야의 기술이 조금 더 발전한다면 『안드로이드』속의 ‘기분 조절 오르간’이 되지 않을까), 네비게이션을 설정하고, 적절한 노래를 골라 알람을 맞춰주며, 옷을 다려주거나 집안을 청소하거나 냉장고 속 식품들의 유통기한을 점검한다. ‘나는 진짜 마음을 느낀다’, 혹은 ‘원한다’고 주장하는 안드로이드가 나타난다고 해도 크게 놀랍지 않을 정도다. 진짜 마음들과 가짜 마음들의 세계, 그 복판에서 한 번쯤 골몰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다.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Ⅱ. 안드로이드와 인간, 부딪히는 존재들『안드로이드』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 해보자. 책 속에 등장하는 넥서스-6 기종의 안드로이드들은 겉보기에는 인간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지능마저도 말이다. 게다가―어쩌면 당연하겠지만―인간보다 더 똑똑한 경우가 대다수다. 작중에서 넥서스-6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무리는 지능 검사를 간신히 통과한 ‘J. R. 이지도어’의 머리 꼭대기에서 그를 조롱하며 부려먹는다.심지어 그들은 자신들의 지능의 우수함을 꽤 객관적으로 알고 있기까지 하다. 이는 여성형 안드로이드인 ‘프리스’의 직접적인 대사를 통해서도 확인 가능하다. “우리가 믿고 있음에도, 정작 우리를 망쳐놓는 게 뭔지 이야기해줄까, 로이. 그건 바로 우리의 더럽게도 뛰어난 지능이야!” 이어 그녀는 자조한다. “우리는 너무 똑똑해”라고.이 대사는 완벽한 사실이다. 그들은 ‘지능’의 네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춘 존재들이다주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도구를 만드는 등의 회의를 거친다. 이는 목적을 위해 적절한 수단을 선택하고 계획을 진전시키는 능력인 ‘합목적성(도구적 지성)’이 비치는 대목이다. 마지막 요소는 한층 심오하다. ‘정신성’, 즉 욕구와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 안드로이드들의 정신성에 대한 증거는 사실 이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안드로이드들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는 안드로이드 역시 ‘양’을 가지려는 욕구를 품는지를 묻는 문장이다. 그리고 대답은 자명하다. 소설 속의 안드로이드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욕구를 가진다.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미술관에서 그림을 향유한다. 인간들의 ‘감정 이입’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탄생시키기 위해 분열하고 반역한다. 누구도 노예에 불과한 그들에게 그러한 차원의 영혼을 불어넣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현상금 사냥꾼’이라는 괴상한 직업까지 탄생하도록 만든 것이다.내가 방금 꺼내놓은 해석은, 이를테면 ‘이원론’과 일정 부분 부딪히는 범위가 있다. 나는 기계덩어리의 인공체에 불과한 안드로이드들의 ‘자유 욕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이원론은 곧 보이트 캠프 검사라는 절대적인 수단으로써 상징화된다. 검사법에 따르면 안드로이드들은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그들이 결국 욕망하는 것(‘감정 이입 장치’ 속의 ‘머서’와 같은 종교성, 나아가 감정 이입 그 자체)은 전부 인간의 욕망을 흉내 내는 모조에 불과하다. 이원론의 구조 아래서 인간은 ‘정신(마음)’과 ‘육체’로 맥동한다. 두 가지는 별개인 동시에 결합하는 지점이 있다. 허나 안드로이드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 그들은 물리적인 기계 덩어리이기 때문이다.‘마음’이라는 미지의 복잡한 존재를 과학적으로 따져 밝히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한데, 애초 과학적(물리적)으로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하도록 설계된 것이 바로 ‘마음’의 실체인 까닭이다. 마음은 크기도 형태도 질량도 색깔도 없다. 인식 가능한 입자들로그 이상의 차원에 똬리를 튼 인간의 정신은 학습과 흉내로는 따라올 수 없는 본능이다. 보이트 캠프 검사는 이 차이를 첨예하게 파고들어 규정함으로써 이원론의 상징이 된다.그런가 하면 ‘유물론’의 입장이 등장해 주인공인 릭 데커드를 괴롭히기도 한다. 그는 안드로이드인 루바 루프트의 노래를 듣고 아름답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놀란다. 여성 안드로이드인 루바 루프트와 레이철 로즌에게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이를 실험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보이트 캠프 검사를 실시하기도 한다. 마침내 레이철과 잠자리를 가진 그는 시인한다. “법적으로야 당신은 살아 있는 게 아니죠. 하지만 실제로 당신은 살아 있아요. 생물학적으로요.” 이후 레이철과 똑같은 얼굴을 한 프리스를 맞닥트린 데커드는 몹시 혼란스러워한다. 보이트 캠프 검사의 현신이나 다름없던 그는 마침내 자신이 믿어오던 것들이 송두리째 흔들림을 인정하고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자살을 택하기까지 한다.데커드가 괴로워하는 후반부의 장면에서 나는 이원론과 일원론(유물론)의 이미지적인 충돌을 연상했다. 그동안 데커드는 놀랍도록 정교한 안드로이드들에게서 발견되는 어떠한 ‘감정적 결핍’을 믿은 채 보이트 캠프 검사를 실시해왔고, 그들을 레이저 총으로 깔끔히 사살해댔다. 그러나 데커드를 향해 질문을 던져대는 넥서스-6들과의 갈등, 레이철 로즌과의 교류는 데커드의 가치관을 통째로 뒤섞었다. 그는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라는 목표를 가진 채 저에게 접근하거나 달아나는 안드로이드들과, 기분 조절 오르간을 통해 기분을 조절해대는 자기 자신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보이트 캠프 검사가 이원론의 상징이라면, 데커드와 그의 아내 아이랜이 사용하는 기분 조절 오르간은 일원론의 상징이다. 그것은 심지어 ‘기분 조절 오르간의 다이얼을 작동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다이얼’ 번호까지 갖춘 뇌파 조작 물건이다. 감정을 탄생시키는 이 오르간의 자극으로 매일 아침 살아갈 힘(또는 스스로 우울함을 선택하는 힘)을 얻는 인간들은, 과연‘감정 이입 장치’라 불리는 가구 역시 준비되어 있다. ‘머서교’의 선물이나 다름없는 이 장치의 손잡이를 잡고 올라서면, 지구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이입할 수 있다. 모두가 언덕을 오르는 ‘윌버 머서’가 되어 감응의 경지에 몰두하는 것이다. 인간들―이지도어와 데커드―은 심지어 이 장치가 하나의 사기극에 불과하다는 진실이 밝혀지고 나서도 ‘오르기’의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감정에 이입한다. 그리하여 윌버 머서라는 실체와 만나기도 한다. 머서교와 머서교의 신자인 지구인들의 신뢰감은 일원론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한계와 맥락을 같이한다. 언덕을 오른다는 성취감, 무언가가 진척되고 있다는 믿음, 하나라는 진정성 등은 기분 조절 오르간의 효과와는 별개로 내뿜어지는 마음의 고유한 산물이다. 이를 증명하듯 안드로이드들은 끝내 사기 행각일 뿐인 ‘머서교’와 함께하기를 택하는 인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안드로이드』는 특정한 결론을 도출하고자 의도된 책이 아니다(그랬다면 데커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홀로 자살했을 것이다. 또 윌버 머서를 만나지도, 기계 두꺼비를 집에 가져오지도, 그것을 기르겠다고 다짐하지도 않았으리라). 단지 데커드를 통해 독자에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 것 같으냐고. 소설의 제목 자체가 그 사유로 향하는 통로가 된다.릭 데커드는 인조적이기에 오히려 매력적인 레이철 로즌의 신체와, 안드로이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루바 루프트에게 동경어린 감탄을 보낸다(이는 거의 본능적인 감정으로 묘사된다. 당시의 그에게 보이트 캠프 검사를 실시해본다면 더 자명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레이철 로즌은 혼잣말처럼 질문한다. “태어난다는 것은 또 어떤 느낌일까요? 우리는 태어나지 않아요. 자라지도 않죠.” 책 속에서 안드로이드들과 인간들은 줄곧 부딪힌다. 서로를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 동경하거나, 부러워한다. 어떤 인간은 안드로이드보다 더 잔인한 얼굴로 순전히 자신의 재미를 위해서 안드로이드를 사살하 같다.
    독후감/창작| 2023.03.17| 5페이지| 2,000원| 조회(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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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 감상문 및 분석문
    불온한 역설의 세계최승자, 『이 시대의 사랑』청춘이라는 모호한 단어를 떠올리면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불균형을 유지하는 저울을 연상하게 된다. 유아기의 껍질을 벗어나 처음 마주하는 ‘나’ 자신으로서의 세상은 반짝이고 신기한 것 투성이다. 하지만 동시에 공포스럽고 버거운 미지의 만화경이기도 하다. 청춘의 우리는 사회와 친구와 연인의 틈바구니에서 마음껏 욕망할 수 있다. 누구도 절제를 주입 교육하지 않는다. 들끓는 정념의 냄비를 넘치게 내버려두는 건 청춘의 특권이니까. 그러나 모든 욕망을 현실화할 수 없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욕망은 자유로운 반면 실현은 늘 보이지 않는 유리 벽처럼 유한하다. 이 세속의 괴리가 청춘의 저울을 뒤흔드는 것이다. 이어 청춘은 생각한다. ‘정말이지 너무 너무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니 차라리 그냥 죽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정말로 죽고 싶은 건 아냐.)’최승자의 ‘싶다’는 과격하고 직설적이다. 「나의 詩가 되고 싶지 않은 나의 詩」 (19p) 에서 화자는 날카로운 칼로 무언가를 썰어대듯 발화한다. ‘움직이고 싶어’, ‘날고 싶어’를 지나 ‘부수고 싶어’, ‘울부짖고 싶어’에 당도한 언어는 ‘까무러쳤다 십 년 후에 깨어나고 싶어’로 끝맺어진다. 제목에 사용된 ‘싶지 않은’이라는 부정을 곱씹는다면 이 시는 더욱 강렬하게 와 닿는다. ‘싶다’라는 욕망적인 표현 안에 불안한 희망과 후련한 절망이 공존하는 셈이다. 희망의 길은 아름답고 먼 것이기에 갖고 싶고, 절망의 길은 요사스럽고 가까운 것이기에 손쉽다. ‘하고 싶어’와 ‘하고 싶지 않아’는 극과 극에서 동일한 의미로 만난다. 이 양가(兩價)의 상태가 팽팽하게 부풀어선 불온한 역설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우우, 널 버리고 싶어」 (35p) 에서의 양상 역시 마찬가지다. 화자는 연인을 사랑하기에 ‘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아름답고 먼 희망의 그림 (예컨대 ‘너를 만나고 싶어’, ‘너에게 안기고 싶어’ 따위의 회복적인 그림) 대신 오히려 절망의 그림을 선택한다. ‘싶다’는 노골적인 어휘다. ‘돈 많은 애인을 얻고 싶어’라는 대목 한 줄만으로도 독자는 화자와 그의 달아난 연인의 모든 연애를 투명하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화자가 정말로 돈 많은 애인을 얻고 싶은 건 아니다. 화자가 정말로 염원하는 일은 사랑하는 연인의 회귀뿐이다. 욕망의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 더한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다.「내 청춘의 영원한」 (44p) 에서 화자는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어 하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욕망과 실현은 다른 영역이다. 무언가를 갖는 순간 다른 것이 갖고 싶어진다. 어딘가에 당도하는 순간 다른 곳에 가고 싶어진다. 괴리뿐인 ‘싶다’의 반복을 옹알이처럼 내뱉어야 한다. 영원한 트라이앵글에 갇혀 불균형한 저울 위에 올라타는 과정, 그것이 즉 청춘이다. 최승자가 묘사한 욕망 어린 청춘의 세계는 세기를 거슬러 2020년의 지금에까지 생동하고 있다.
    독후감/창작| 2023.03.17| 1페이지| 1,000원| 조회(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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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감상문
    오히려 악몽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2041043 조소희Ⅰ. 구보 씨와 그의 시대「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주인공은 말마따나 소설가인 ‘구보’다. 구보는 영세한 소설가가 되지는 못한 처지다. 원고료로 받는 돈은 가족의 치마 두 벌을 사기도 빠듯한 금액이다. 그는 동경유학까지 다녀온 지식인이지만, 가정 내부에서는 변변한 직장을 얻지 못한 백수 취급을 당할 뿐이다. 배경은 예술이 천대받는 시대다. 일제의 마수 아래 활발한 문명기가 열린 가운데 월급을 타는 직장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오점으로 작용한다.얼핏 무념하게만 비춰지는 구보도 이에 대한 자괴감을 가지고 있다. 차라리 깊은 귓병에 걸렸으면 하고 내심 바라는 부분에서 그러한 심리가 엿보인다. 건강보다 차라리 병을 바라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아마 자신의 현실을 병이라는 장막으로 덮어 버리고픈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앓아 누운 채 정상적인 일상을 포기할 법한 ‘병’은 그를 덮치지 않는다. 구보는 다만 조금 불편한 정도가 끝인 귀와 눈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아프지는 않되, 불편하다는 것. 지끈지끈한 신경증의 전조와도 같은 증상이다. 구보는 완전히 건강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고통스럽지도 못하다. 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거리를 산책하는 그의 위치를 빗대는 장치이다.구보는 무의미의 의미를 찾아보려 노력한다. 유의미한 무언가를 움켜쥘 능력이, 희망이 없는 지금의 구보에게 의미 찾기는 상당히 절실한 작업일 터이다. 구보는 동전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또한 동전을 들여다보듯이 여자를 관찰하기도 한다. 허나 동전이 말을 걸어올 리는 없다. 자신이 동전처럼 여기고 그리하여 용기내지 못했던 여자가 재차 구보에게 다가와 운명을 선물해줄 리도 없다. 구보는 혼란한 시대의 관음자인 동시에 무기력증의 토템이다. 말했듯이 구보는 극심한 병환 탓에 앓아 누워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건강한 상태가 될 수도 없는 남자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신이 지켜보는 여자에게 말을 걸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심을 거두자는 선택지를 향해 뒷걸음질칠 수도 없다. 구보의 포지션은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전차 안의 사정처럼 오도가도 못한다. 이는 옛 것과 새것의 문화적 충돌이 벌어졌던 당시 조선에 대한 거대한 비유처럼도 읽힌다.무기력증에 빠진 시민은 주인공 구보뿐만이 아니다. 구보가 방문한 다방에서도 구보와 비슷한 얼굴을 한 낯선 이들이 여럿 보인다. 그들은 구보의 시선에서 ‘젊은이’로 칭해진다. 하지만 전혀 젊은 기색이 없다. 외려 젊음을 다 빼앗긴 듯 피로한 안색만을 내걸 뿐이다. 주인공 구보는 젊음을 강탈당한 젊은이들의 무리가 제자리라는 듯 그들의 틈으로 자연스레 섞여 든다. 그런가 하면 전당포집의 둘째 아들을 만났을 때의 태도도 의미심장하다. 구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모호한 입장이 되어 전당포집의 둘째 아들을 따라 나선다. 이후 싫지도 좋지도 않은 자리에 앉게 된다. 전당포집의 둘째 아들은 벗이라면 벗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이다. 중학 시대의 열등생이었던 그는 어느새 물질의 대명사처럼 자라나 있다. 물질의 힘으로 번뜩이는 그와도 구보는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혼잡한 기운이 가득한 조선에서, 구보는 진창의 과거로도 신세기로도 향하지 못하는 것이다.Ⅱ. 이토록 단면적인 관계들‘관계 맺기’란 으레 지속을 목표로 하는 행위이다. 때로는 한 관계가 다른 관계로, 혹은 흥미진진한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관계들은 지속되지도 않을뿐더러 다른 유기적인 영역으로 구보를 끌어가 주지도 않는다. 구보가 외출을 통해서 마주친 이들은 실상 ‘오늘 만나지 않았더라도 별로 달라지지 않을 이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여자를 전차에서 마주친 구보는 그녀를 향해 말을 걸 용기조차 내지 않는다.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말에 ‘네’라는 짧은 대답마저 붙이지 않은 구보다. 하물며 동전을 바라보듯이 관음할 뿐인 여자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리가 없다.소설 내에서 구보가 맺는 관계들은 몹시 일차원적이며 발전력을 갖지 못한다. 다방에서 홀로 벗을 그리워하던 구보는 결국 보통학교의 친구였던 ‘유군’과 마주하게 된다. 구보는 반가움에 그를 붙든 반면 유군은 데면데면하다. 억지로 나누는 듯한 두 사람의 대화는 토막 난 채 부유한다. 숨막히는 어색함의 연속이며, 누구에게도 화목을 안겨주지 않는다. 오랜만에 조우한 벗인 유군은 무척 초라한 행색이다. 그리고 사실은 구보의 행색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은 다방에서 넋을 잃은 채 앉아 있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인 얼굴을 띠고 하나마나한 몇 마디를 나눈다. 그 이상은 없다. 우정이라고 칭하기도 멋쩍은, 너무나 단면인 만남이다. 구보는 울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이 장면이 전달하는 강렬한 허탈함이야말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대표적인 무드이다.이후에도 많은 여자들과 벗들이 구보의 의식을 스쳐간다. 하지만 구보가 추구하는 ‘행복’에 가깝도록 행동하거나 부추겨주는 인물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고됨을 견디거나 불평을 삼키고 있다. 혹은 구보의 상상 속에서만 등장해 후회와 좌절의 감정을 심어주곤 금세 사라져버린다. 상상임에도 구보는 그들과 진득하게 결속하지 못한다.구보와의 만남을 가지는 이들은 ‘벗’이라면 모두 벗이라고 부르는 게 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벗’의 범주를 구보와 구보의 최종적인 행복에 기꺼이 에너지를 실어줄 법한 인물만으로 좁혀 본다면 구보는 벗들을 몽땅 잃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구보의 벗들 역시 구보처럼 단순히 어슬렁거리거나,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막연히 바라고만 있는 처지다. 구보의 주변은 온통 이런 (구보의 표현에 의하자면, ‘정신병자 같은’) 청년들로 넘쳐난다. 어머니의 염려만이 둥둥 떠다니는 가정 내부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구보의 관계 맺기는 가정 외부에서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다.Ⅲ. 1930년의 일일이 소설의 특징이라 함은 별다른 사건이 없다는 점일 것이다. 주인공인 구보는 고된 시련을 겪지도 않고, 사랑에 실연당하지도 않고, 누군가의 죽음을 지켜보지도 않는다. 친구들과 가족들은 황폐해졌으나 무사하고 구보의 목숨에도 큰 위협은 없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구보가 취하는 행동이라고는 돈도 목적도 제로인 채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귀가하는 것뿐이다.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구보의 악몽이지 않을까. 하루하루를 커다란 무의미로, 혹은 후회와 타념으로 채우고 있다는 것. 땅을 치고 울 만한 절망도 거리를 뛰어다니며 환호할 만한 희망도 없는 세계에서 다시 막연한 희망을 그리며 내일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모든 일이 허무맹랑해지고 모든 일에 정신분열의 징후가 깃들어버린 시대에서 제 삶을 지탱하기란 말을 듣지 않는 남의 강아지를 유혹해 부를 때마냥 부끄럽고 어려운 법이다.이 소설의 제목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로 얼핏 구보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늘어놓고 산책을 묘사하는 글 같다. 하지만 사실은 1930년대의 지식인 예술계층에 분포한 모든 ‘구보 씨’를 포커싱하는 카메라나 다름없다. 시대성을 거푸집처럼 옮겨 담은 박태원의 특출한 리얼리티가 시간을 거슬러 책장을 펼친 독자들을 붙들어서 지난 세기의 조선으로 끌어당긴다. 거대한 사건의 출현 없이 인물의 어떤 하루를 다뤘을 뿐인데도 마치 재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볼 때처럼 씁쓸한 감정이 이는 소설이다.
    독후감/창작| 2023.03.17| 3페이지| 1,500원| 조회(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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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리엔탈리즘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하여
    오리엔탈리즘의 어제와 오늘― 오리엔탈리즘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목 차Ⅰ. 개요Ⅱ. 근대국가와 민족주의의 탄생Ⅲ.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Ⅳ. 오리엔탈리즘Ⅴ. 21세기, 현재의 오리엔탈리즘Ⅰ. 개요오리엔탈리즘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오리엔탈리즘(1978)』을 통해 확립된 개념이다. 이는 서구 문명이 동양을 바라볼 때 생기는 뒤틀린 시선과 왜곡된 인식을 말하는 용어이다. 오리엔탈리즘은 처음에는 단순히 유럽 국가의 시민들이 동양의 신비로움과 미지를 탐구하는 취미 및 관심 자체를 표현하는 말로 쓰였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러서는 제국주의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동양을 대상화하며, 지배를 정당화하는데다 대상적인 하나의 텍스트로 왜곡 해석하려는 태도를 나타내는 말로 폭넓게 정리된다. 나아가 나는 이 글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이 어떤 맥락에서 생성되고 전개되었으며 현재에는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정리해보려 한다.Ⅱ. 근대국가와 민족주의의 탄생오리엔탈리즘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영국과 프랑스의 발전에 대해 언급해야만 한다. 이들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친 끝에 19세기로 향하는 일에 성공한 국가들이다. 이들은 ‘근대국가’임과 동시에 ‘민족국가’, ‘국민국가’ 라고 정리되는데, 오늘날에는 당연한 개념일 수 있으나 당시에는 국가의 통일성을 위해 시민혁명과 함께 새로이 도입된 이념이었다. 이들은 집단의 연대감, 즉 하나라는 통일감이 낳은 공동체적 존재인 ‘Nation’을 중시한다. 중세에 다원적으로 흩어져 있던 집합체를 ‘Nation’으로 끌어모은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은 민족이 되고, 민족은 단위가 되어 국가를 형성한다. 이는 이전의 왕들이 통치했던 국가와는 달리 시민이 자본주의 속에서 주인이 되는 국가를 지향하는 개념이다.근대국가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민족적 통일’이라고 흔히 일컬어진다. 이들은 공통의 사회, 경제, 정치적 생활을 누리는 공동체로 인정받게 된다. 국민이 곧 공동체의 주춧돌이 되고, 그 공동체의 감각이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 유럽이 잦은 시민혁명을 거치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는 점과 맥락을 같이하는 내용이다.그렇다면 근대의 국가가 강조하는 ‘민족’이란 과연 무엇일까? ‘민족주의’는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자리잡은 어떤 개념일까? 민족주의란 사회적 생활의 기본 단위로써 민족을 어떠한 가치보다도 우선시하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당시의 시민들은 자신 스스로를 ‘민족’이라 여기기 어려웠다. 그전까지 하나의 나라는 왕의 발아래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는 왕만의 것이었으며, ‘왕권신수설’이라는 개념을 등에 업은 왕은 신의 권한을 대행해왔다. 시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유럽은 그러한 통치에 오랜 기간 익숙해진 상태였던 것이다. 시민들은 왕에 종속된 자신들이 국가를 구성하는 중요한 핵심체임을 자각할 수 없었다. 국가는 단지 왕의 소유였다. 시민들은 국가의 파이를 나눠 갖지 못한 채 그저 자신들의 주인인 왕을 위해서 노동해왔다. 상황이 바뀐 계기가 되어준 것이 바로 시민혁명인 셈인데, 시민혁명을 통해 비로소 국민들은 국가의 주인으로 거듭났다. 자유주의를 흡수하고, 시민이 자본주의 속에서 주인이 되는 민주적 통치 체제의 주체로서 한 발을 뻗은 것이다. 이처럼 민족적 가치를 우선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국민이라는 공동체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해냈다. ‘애국심’이라고 일컬어지는 감각 역시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정서 중 하나이다. 민족끼리는 운명을 함께해야 한다는 결속력과 자긍심이 민족국가를 배태했다.Ⅲ.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앞서 언급했듯, 민족주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써 활용되며 근대국가의 국민을 한 가지 정서로 통일시키는 일에 단단한 몫을 보탰다. 그러나 역사에는 언제나 다른 면의 암흑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자유주의적 속성 아래서 개인의 권리와 시민으로서의 각성을 중시했던 18세기의 민족주의와 달리, 산업화가 고도로 발전한 국가를 중심으로 한 19세기의 유럽에서는 전체주의적 성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한 민족’이라 명명하며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우월감을 품게 시킨 것이다. 이는 ‘이데올로기’라는 무형의 영향력이 향할 수 있는 종결적이고 암흑적인 사상의 극한이라 할 수 있다.19세기 말, 민족주의의 반동화인 ‘제국주의’가 불어닥치는 동안 민족주의는 부정되기도 하고 발전하기도 했다. 민족국가라는 얼개를 깨고 다른 민족을 흡수하려는 제국주의의 이념은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우월한 하나의 민족의 힘을 과시하고 권력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의 발전이라 일컬어질 수도 있겠다. 민족주의의 극단적인 성격만을 가지고 출발한 제국주의는 ‘우리는 우월한 하나의 민족’이라는 사상을 심어주었으며, 이에 따라 약소국에 대한 침략이나 전쟁을 미화하는 일에 쓰였다. 나아가서는 파시즘에까지 활용되기도 했는데, 유대인을 학살한 히틀러는 그들이 ‘더러운 피’를 가졌다고 언급하며 악랄한 논리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였다.몸집을 불린 제국주의는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자는 정책을 내세웠다. 산업혁명 이후, 원자재를 저렴하게 공급받고 잉여 생산품을 값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는 장소로서 식민지가 중요하게 대두된 시점이었다. 서구 열강끼리의 식민지 쟁탈전이 심화된 상황에서 제국주의는 환영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내 제국주의는 식민지의 영토로 자국민을 옮겨 심는다는 의미의 ‘식민주의’로 발전했고, 부강한 나라들은 하나둘씩 식민지의 영토를 강탈하기 시작했다. 피식민국가가 된 이들은 정치적 주권을 상실하고, 언어와 문화와 전통을 빼앗기기에 이르렀다.Ⅳ. 오리엔탈리즘제국주의의 등장 배경에 관해 설명했으니 이제는 본격적인 오리엔탈리즘을 논해도 좋을 것이다. 성공적으로 근대국가로의 발돋움에 도달한 서구 열강은 다른 세계로의 가능성으로 눈을 돌렸다. 비(非)서구 사회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주로 서구 열강에게 침탈당한 중동의 사례를 이야기하지만, 이는 동양 사회 전체에 대한 담론으로 확장해 읽기에도 무리가 없다. 아직 식민화되지 않은, 그러므로 곧 식민화되어야 할, 마침내는 ‘식민화가 완료’된 동양의 세계는 서구 열강의 입맛에 맞춰 대상화되었다. 서구 열강은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도덕적인데다 이성을 갖춘 국가들로 칭한 반면 미지의 도태자들인 동양의 국가들은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짐승적인 문화를 가진 집단이라고 해석했다. 그렇기에 그들의 문화는 우월한 서양의 민족이 마음껏 텍스트화하고 사유 없이 누려도 되는 타자의 자리로 격하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물론 이처럼 공격적이지 않은 관점도 있다. 단순히 동양의 문화를 취미처럼 향유할 뿐,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의 관점을 구태여 덧대지 않는 서구인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이 역시 완전히 순수한 의도와 목적으로 영위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동양(오리엔트)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저술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오리엔탈리스트”라고 비판하기까지 한다. 그는 ‘열등한 문화가 가진 짐승적이고 샤먼적인 신비함에 매료되는 우월한 자신’으로서의 위치를 획득하려 하는 순진하고도 악의적인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눈으로 동양을 왜곡하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한 시선을 통해 동양은 서구 열강의 대상화 아래서만 존재하게 된다. ‘동양’이라는 하나의 주체가 아닌, ‘서양이 소비하는 동양’이라는 객체이자 타자가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완벽하게 동양이 될 수 없는, 결국 동양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한 서양의 눈으로 동양을 담는다는 것은 그 오리엔탈리즘적인 맥락과 역사의 흐름을 전부 무시하고 ‘낯설고 신비한 대상’에로의 겉핥기식 흥미만을 뽑아 마시는 일종의 착취와 같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동양이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이유는 어렵지 않다. 동양은 오랫동안 서양이 바라보는 프레임 속에서만 대상화되어왔기 때문이다. 동양은 있는 그대로 서양에게 전파되지 못한다. 특정한 이론을 가진 시각 아래서 판별될 뿐이다. 사이드는 이처럼 뒤틀린 현상을 더러 “동양이란 어떤 독특한 방법에 의해 가르쳐지고, 연구되고, 판단되는 것”이라 말했다. 즉, 동양의 문화는 서구가 과시하는 힘의 체계 아래 표상적으로만 편입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찍이 서양의 지식인들은 동양의 문화를 얕잡아 보거나 임의적인 자신의 그릇된 방식으로 바라보는 형태의 오리엔탈리즘을 행해왔다. 지식은 권력을 낳는다. 서양의 지식은 이내 동양에의 몰이해적 이해―그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이해했다고 여기는 것―에 가닿았다. 서양은 “자기중심적으로” 동양을 해석하고 분해했으며, “상당히 비상식적인 곳”으로 치부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지적 충족”과 “감각적 상상력”을 위한 “자아도취”의 수단으로 동방의 문화를 이용했다. 동양의 문화는 서양인들의 흥미 따라 변용되기 일쑤였다. 19세기의 동양은 서양인들에게 미지라서 아름다운, 미지이기에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이 가능한 식민지였던 셈이다.Ⅴ. 21세기, 현재의 오리엔탈리즘이쯤에서 떠오를 법한 의문은 간단하다. ‘우리는 어째서 오리엔탈리즘을 계속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관한 골몰이다.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빼앗고 문화를 말살하는 식민주의의 시대는 거의 저물었다고 말해도 무방한 지금, 21세기에 오리엔탈리즘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에드워드 사이드가 언급했듯이 오리엔탈리즘은 비단 식민주의의 팽창과 그 부산물에 의해서만 생산되는 개념이 아니다. 서양인들의 시선으로 동양을 평가하고 구성하는 잘못된 시선, 이해가 결여된 채 동양의 문화를 삼켜 재현하는 방식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바로 오리엔탈리즘이다. 그러므로 오리엔탈리즘은 문명의 시대인 지금에 이르러서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 교류가 극도로 발달한 현대에서, 동양은 자신들에게로 쏟아져 오는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적 컨텐츠를 제약 없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문학이거나, 미술이거나, 영상이라는 포장지를 두른 채 ‘21세기식 오리엔탈리즘’를 전파한다. 이에 나는 현대의 서양이 창조해낸 몇 가지 영상 컨텐츠의 사례를 제시해보려 한다.
    인문/어학| 2023.03.17| 5페이지| 2,500원| 조회(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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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감상 및 분석문
    비성장(非成長)이라는 성장―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새 학교에 입학한 귀족 가문의 소년’이라는 설정이 뿜어내는 어떤 이미지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주인공인 ‘소년’이 아슬아슬한 모험을 거쳐 학교의 비밀을 밝혀낸다거나, 귄위적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진정한 꿈을 찾는다거나, 혹은 우정과 사랑의 힘을 경험하며 사교계의 어른이 되어간다는 줄거리는 구태여 노력하지 않아도 줄줄이 떠오른다. 나 역시 『벤야멘타 하인학교』를 처음 펼치던 순간에는 비슷한 내용을 상상했었다. 거만한 귀족 자제인 주인공이 하인학교의 생활을 경험하며 성숙해지는 성장 소설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소설은 내가 예상한 과녁의 정반대 방향에 꽂혀 있었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보다는 차라리 페소아의 『불안의 책』에 가까웠다. 시종일관 냉소하며 하인학교를 부유하는 야콥 폰 군텐은 마치 ‘하인학교’라는 괴상한 교육기관에서 뿜어지는 여러 타념들을 형상화한 유령처럼 느껴졌다.그러나 야콥이 경험하는 감정이 마냥 낯선 종류의 것이라고는 단언하기 어렵다. 나 역시 미성년이었던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재학 내내 나는 소극적인 등교 거부자였다. 예체능 입시엔 출결 관리가 불필요하다는 합리적인 핑계를 대며 무단결석과 지각을 일삼았다(그리고 결국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학년 부장 선생님은 자주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상담의 탈을 쓴 지겨운 문답이었다.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왜 다니냐는 헛소리가 어딨어? 그냥 다니면 되지.’ ‘제가 학교에서 뭘 배워야 해요? 맨날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 ‘그래, 가만히 앉아 있는 거. 그런 걸 배우는 데가 학교야.’ 부장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학교는 가만히 앉아 있는 태도를 배우는 곳이었다. 우리는 전부 ‘가만히 앉아 있기’를 통해 성장한 후 사회화되어 바깥으로 출하되는 셈이었다.그리고 이 메커니즘은 야콥이 머무는 하인학교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 교양소설의 전위와 패러디처럼 여겨지는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실상 패러디의 행색을 한 리얼리티 쇼에 가깝다. 나는 ‘하인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삶과 성장에 대한 거대한 비유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무존재’에서 태어나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은 확실히 올바른 순서처럼 보인다. ‘태초의 우리는 흰 도화지 같았다가 서서히 자신의 개성을 획득해 나간다……’ 는 류의 문장들은 아주 반듯한 정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꿈 같은 이야기인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과 현실의 삶은 대개 반대인 경우가 많고, 때문에 이상은 ‘이상’이라 불린다. 현실의 우리는 ‘나’라는 순수하며 불가해한 덩어리로 태어난다. 이후 성장의 단계를 통과해 야생의 도시에 던져진다. 그리고 끝내는 르네 마그리트의 처럼 몰개성한 중절모 그룹으로 완성된다. 조금 전의 내가 이 소설을 가리켜 ‘리얼리티 쇼에 가깝다’고 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가 전복하는 것은 기존 문학에서 다뤄졌던 일종의 ‘가상의 성장’일 뿐이다. 현실의 우리는 학교에서 그다지 쏠쏠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지는 않는다. 교직원들이 출입하는 중앙계단을 피해 통행하고, 의욕이 죽어버린 듯한 선생님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어슬렁대는 교장 선생님에게 배꼽 인살 하고,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기나긴 수업시간 내내 가만히 앉아 무위를 즐기며 또 버틸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가만히 앉아 있는’― 과도기를 통해 어른이 된다. 멋과 속박을 동시에 책임지는 제복을 입은 채 천천히 성인으로 변한다. 놀라울 만큼 각자였던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비성장(非成長)이라는 성장을 거쳐 주체를 떠나 보낸다. 그리고는 이내 주체와의 이별을 합당하게 여기는 담담한 무위의 속박자가 된다. 결국 우리 모두는 주인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삶의 하인들과 같다.이 과정을 비난하려는 생각은 없다. ‘사회가 썩었다’라거나 ‘교육 환경이 부패되었다’는 메시지를 위해서 선택한 독법도 아니다. ‘무위’라는 단어가 제시되었다고 해서 『필경사 바틀비』를 꺼내려는 심산 역시 없다. 오히려 나는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편이다. 우리는 좋든 싫든 성장하게 된다. 좋든 싫든 사람과 관계하게 되고 사회에 끼어들게 된다. 우리는 전부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탄 채 수많은 ‘나(하인)’들이 만들어둔 시장을 향해 나아갈 운명을 가진 것이다. 로베르트 발저는 다만 바라보고 조명한다. 마치 야콥이 ‘성장’의 중도들 또는 결과들(크라우스를 비롯한 학우들의 취업, 푹스의 하차, 벤야멘타 양의 죽음 등)을 바라보았듯이. 야콥의 이러한 시선은 그가 행하는 잦은 ‘산책’과도 겹쳐 읽히는 구석이 있다. 야콥은 대도시의 복판으로 기꺼이 외출한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돈을 써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고,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란 요한 형과 만나 대접받기도 한다. 허나 일기에 서술되는 투로 짐작할 때 그는 사회에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다. 야콥은 그저 관망할 뿐이다. 현재의 자신과는 도무지 별개인 대도시의 중절모들을 경외하면서, 그리고 다시 경멸하면서.‘중도 탈락’한 푹스와 ‘완성형 도시인’이 된 한스 형, 자유의 환상을 좇다 시체가 벤야멘타 양, 충직한 하인임을 인정받은 크라우스. 여러 갈래의 길과 등진 야콥의 학교 생활도 마침내는 마무리를 짓는다. 취업, 탈출, 또는 탈락. 어떤 방식으로든 끊임없이 ‘학원 외부’의 세계를 그려보던 야콥이 원장과 함께 사막으로 떠나는 결말은 아주 적절하게도 느껴지고 아주 엉뚱하게도 느껴진다. “자, 이제 그럼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벤야멘타 학교여”라는 문장은 어떤 일대기나 역사서의 전언마냥 와 닿는다. 하인학교의 마지막 학생이자 잠재적 후계자인 그는 비성장의 연속이었던 성장의 국면을 통해 자신을 무엇으로 정의한 것일까. 평생의 졸업을 유예한 야콥에게서 나는 끝내 비성장으로써 결속되는 성장의 모순적인 가능성을 읽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들이 야콥에게 동화되어 같은 감정을 읽었으리라고 확신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이미 일정한 정도 이상의 야콥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에게 끈끈히 달라붙은 ‘아이 같은 무언가’와 동행하면서 말이다.
    독후감/창작| 2023.03.17| 3페이지| 1,500원| 조회(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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