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바더’가 들려주는 이야기? 작은 것이 아름답다 를 읽고 나서?우리는 세금을 필요로 하는 공공 부문의 빈곤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을 예로 들 수 있다. 미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부유한 국가이지만 공공 부문의 빈곤이 다른 국가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다. 하지만 공공 부문은 빈곤하고 민간 부문은 풍요로운 불균형 사이에서 세금을 늘리자는 의견에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다. 이는 사유재산제 때문이다. 사유재산제 아래에서 산출되는 이익은 모두 이익을 창출한 개인에게 돌아간다. 따라서 공공 부문의 빈곤은 늘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다.위와 같이 해결하기 어려운 공공 부문의 빈곤 문제는 공적 부채라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 이는 부차적으로 국가의 지속 가능한 발전의 저해라는 문제를 초래한다. 그러나 결국 공동체의 구성원은 개인이기 때문에 공적 부채 문제는 개인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사유재산제를 통해 당장은 개인의 지갑이 두툼해졌을지 몰라도, 결국 그 부채는 공동체에 속한 개인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공공 부문의 빈곤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을 강구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우리 사회 속 기업의 소유권 구조를 지적하고, 공공 부문의 빈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그 해결책을 무소유의 불교와 연관 지어 논할 것이다.소유 구조 변화의 필요성기업의 ‘소유 구조 변화’는 왜 필요한가? ‘재벌’의 존재가 그 이유를 대변해준다. 재벌은 기업의 소유 구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기업의 소유 구조 중 하나인 소유경영체제는 소유권을 집중적으로 보유한 소유주가 기업 경영의 중요한 의사결정권까지 지배, 통제하는 경영체제를 지칭한다. 즉, 소유권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높은 일치도를 보이는 경우이다. 이에 따라 기업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소유하고 이익분배를 집중적으로 받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존재하게 되고, 자본 또는 소유권을 대표하는 소유경영자가 경영정책과 자본의 수익 및 운영 활동에 대한 통제권을 지니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벌이 위의 소유경영체제의 수혜자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자신의 후손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재벌의 존재가 계속해서 되물림되고 있다. 과거에는 이러한 재벌 구조가 경제 성장 동력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재벌 구조를 타파해야 한다는 시각이 등장했다. 소유권 구조의 특혜를 거머쥔 ‘재벌’이라 불리는 이들이 사적인 이익과 욕망을 추구하는 경우가 다분했고,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형제끼리의 골육상쟁 논란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문적인 경영권 세습이 부재할 경우 투명하고 공정한 기업 경영이 불가능하므로 기업의 소유권 변화가 필요하다.돈의 의미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돈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지구촌이 자본주의화 되면서 물질만능주의 역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인간의 권위와 존엄성을 돈으로 측정하는 세상이 되면서 인간의 근본 도리와 가치보다는 돈을 최고로 아는 물질만능주의가 현실에 만연하게 되었다. 그런 현실에서 모두에게 통용되는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좋은 학벌을 취득해야 하고, 더 좋은 회사에 취직해야 한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경쟁 사회에 던져지는 것이다.“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무소유 에서는 위와 같이 말한다. 사람이 물질을 지배하는 세상에서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으로 탈바꿈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소중한 가치는 사라져가고 급기야 인간의 정신적 가치마저도 물질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 이르렀다. 돈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돈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돈이 넘쳐나지 않는 보통의 사람들은 결국 영원히 사회적 약자이자 피해자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다. 사회적 약자가 가득한 세상에서 돈은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든 돈을 쫓지만 남는 것은 공허감일 뿐 돈은 끝내 우리의 편이 아니다. 즉, 돈은 허상이다. 이처럼 자본주의 아래에서 만들어진 돈이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나, 끊임없는 돈에 대한 소유욕 즉 집착 때문에 우리는 결국 허상을 쫓아 살아간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돈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돈에 대한 집착은 결국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어니스트 바더와 불교의 만남어니스트 바더는 기업의 소유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이 창립한 스코트 바더 사의 소유권을 스코트 바더 공동체에 양도한 기업 혁신가이다. 그는 “옛날에 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월급쟁이 생활을 청산했을 때, 내 사고가 사람들을 관리자와 관리 대상으로 분할하는 자본주의 철학과 충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실질적인 장벽은 주주들에게 독재 권력을 제공하고 이들에게 위계적인 경영체계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해준 상법이었다.”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는 현대의 기업 경영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위계 질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비판한 것이다.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 즉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일반 사람들과의 평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의 행보는 불교적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하지만 필자는 바더 사의 체계가 우월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적 측면에서 볼 때, 그의 혁신은 보통의 기업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기업의 통상적인 돈벌이 행위에서는 흔히 무시되기도 하는 인간적인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에 있다. 바더 사의 인간적인 목적을 그와 그의 동료들이 함께 체결한 규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조직 내부에서 일에 대한 보수는 최저 수준과 최고 수준의 격차가 나이, 성별, 직무, 경험에 상관없이 세전 기준으로 1대 7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공동체 성원은 종업원이 아니라 동료이므로 중대한 개인적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한 어떠한 이유로든 다른 동료들로부터 해고당할 수 없다.·공동체는 스코트 바더 사의 순이익의 40% 이상을 취득해서는 안된다. 즉 최소한 60%는 납세와 재투자를 위해 스코트 바더사 내부에 유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는 이익의 절반을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보너스로 지급하고 나머지 절반을 외부의 자선단체에 기부해야 한다.’위와 같은 바더 사의 체결 사항은 더 많은 이윤을 취하고자 하는 보편적인 기업의 체결 사항과는 차이가 있다. 불교적 측면에서 볼 때도 바더 사의 행보는 보편적인 기업과는 차이가 있는데, 자비의 실천 여부가 그것이다. 바더 사는 불교 자본주의 윤리 중 하나인 자비의 경제 행위를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자비의 경제 행위란 경제적 환경에서 항상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하며 타인에게 연민을 갖고 말하고 사고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자비에 기초한 경제 관계는 그렇지 않은 경제 관계에 비해 훨씬 더 연민과 배려에 기초한다. 바더 사와 달리 한국의 일부 기업 재벌과 대기업 총수 일가들은 갑질, 막말, 공금 횡령, 비자금 조성 등 불법 불공정 갑질 행위로 인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수면 위로 떠오르는 기업의 갑질 사례들은 보편적인 기업 행태가 연민과 배려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계속해서 입증해 주고 있다. 기업들의 무자비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가 노사 관계인데,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는 자비에 근거하지 않았을 때와 자비에 근거했을 때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범죄행위를 한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을 자비롭지 못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기업의 소유 구조를 바탕으로 한 사용자와 노동자의 무지막지한 임금 차별과 노동력 착취는 무자비한 것이다. 보통의 기업이 행하는 바와 달리 욕심을 버리고 인간을 위한 체결 사항을 실현한 것에서부터 바더의 자비 경제 행위는 시작된다. 이렇듯 자비의 경제 행위를 실천하면 선한 결과는 부차적으로 뒤따른다.우선 바더 사의 체계는 사유재산체계의 환원주의를 극복하고 기업조직이 인간을 자본 소유자의 풍요로움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조직을 인간을 위한 봉사자로 전환시켰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이는 물질이 사람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바더 사가 시도한 하나의 혁신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획득한 이익의 일부를 자선 목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스코트 바더 사의 합의 사항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홀히 취급되기 쉬운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더 나아가 바더 공동체는 수행하는 불교 경제 공동체로도 볼 수 있다. 불교 경제 공동체는 불교 자본주의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최상의 도구이며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타인을 배려하고 자비를 베푸는 경제 행위는 필연적으로 나와 남을 하나로 묶게 하고 공동체는 저절로 부수적으로 구축된다. 이처럼 바더 사는 하나의 불교 경제 공동체로서 작용하며, 욕심을 버리고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기업 윤리를 따름으로써 불교 자본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몸소 보여준다.진정한 자유를 향한 버림과 비움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나누려는 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바더는 기업의 소유권을 그의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선택을 했다. 이는 자본주의의 탐욕스러운 성장 흐름과 벗어난다. 그러나 스스로 창출해낸 부가 곧바로 축적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더와 같은 기업 철학을 갖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정책을 통해 소유권을 규제하는 것 또한 현재 상황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소유권 구조 변화의 실질적인 첫 걸음이 될 수 있을까?
이상과 현실, 그 사이 어딘가Ⅰ. 서론‘권력은 남용되고 타락하는 경향을 가지며, 이때 그것은 투쟁과 저항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권력은 정치를 발생시키고 움직이는 동력이기 때문에 그것 없이는 공적 결정을 이끌어내고 집행할 수가 없다.’ 막스 베버는 정치와 권력에 대해 이와 같이 말했다. 이처럼 권력을 떠나서는 정치를 정의할 수 없는 한 권력은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국제 문제에서도 이 관계는 그대로 적용된다. 약소국들은 강대국들의 정세에 따라 움직이고 영향을 받는데, 그 이면에는 권력 정치적 요소가 그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의 역사를 보면 권력 정치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국제 연맹의 사무국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직원이 비정치적 요원으로 구성되어 권력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국제 정치 무대에서도 권력과 정치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정치와 권력의 관계처럼 정치는 이상과 현실이라는 요소를 제외하고는 말할 수 없다. 이상과 현실은 정치학의 두 얼굴이며, 현재의 세계위기와 국제 정치를 깊이 있게 따져볼 때 필수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부분이 이상과 현실 간의 갈등이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은 좌파와 우파의 갈등으로도 표현 가능하며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에 이상과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상과 현실 간의 갈등은 정치를 넘어서 경제적으로도 대립했는데 경제적으로 자국의 산업이 상대국에 대해 절대 또는 비교우위에 있을 때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쪽은 정치적으로 이상주의를 추진했다. 이에 반해, 상대국에 비해 절대 또는 비교우위에 놓여 있는 쪽은 보호무역주의 또는 산업보호주의를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적으로는 헤겔로부터 출발하는 현실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정치 · 경제적으로 이처럼 대립되는 듯한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각각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한계에는 서로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고려하기 위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현실과 직면한 문제임을 직시하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국제정치사에서 권력의 역할과 정치학의 두 얼굴인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에 대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연관 지어 논할 것이다.Ⅱ. 본론1. 국제 정치와 권력정치란 항상 권력 정치이다. 국가 간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 간의 관계에서 권력이 포함되거나 혹은 포함되었다고 생각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순간 문제는 ‘정치적’이게 된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권력을 떠나서 정치를 정의할 수 없는 한 권력은 항상 정치의 한 필수 요소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국제 문제에서 정치 권력은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생각에 대한 통제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며, 현실적으로 어떤 국가가 이들 중 한 가지만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어렵기에 권력이란 불가분의 일체라고 말할 수 있다. 먼저 군사적 수단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국제 관계에서 권력의 궁극적인 시험이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단지 다른 수단으로 전개되는 정치의 연속일 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군사력은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이기도 한데, 지난 100여 년 동안 일어난 주요 전쟁 중 무역이나 영토를 늘리기 위해 일어난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주는 한 사실이다. 또한 민족주의가 최초의 목적을 달성하면 제국주의로 전개된다는 것, 그리고 안보를 목표로 한 전쟁은 곧 침략과 팽창을 위한 전쟁으로 변질된다는 것은 더 많은 권력을 원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언급할 경제력은 항상 정치 권력의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E.H 카는 문명사가 전쟁사인 동시에 경제발전사라고 말한 바 있다. 경제 부분에서 자유방임주의가 갖는 의의는 그것이 경제와 정치를 이론적으로 완전히 분리시켰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1900년 이전에 이미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환상에 지니지항상 권력의 다른 요소들과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오늘날의 프로파간다는 대중 교육이 아닌 다른 수단을 말하는데 라디오나 영화 그리고 신문이 그것이다. 대중매체의 경영권은 이로써 자연히 소수에 집중되었고 이 집중효과가 여론을 중앙에서 통제하는 것이 용이하면서도 불가피한 현상이 되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문제는 기득권층이 주도하는 프로파간다의 홍수 속에서 대중들이 어떻게 의지의 자유를 유지하는가에 있다.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는 국가의 행정 및 통치 정보를 제공하고 정치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편 보도 통제, 왜곡 보도, 진실 은폐, 확대 해석, 그리고 주관적인 보도로 미디어는 여론 통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은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은 생각에 대한 지배라는 힘의 형태가 지닌 가장 명백한 제약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를 통한 프로파간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 우리는 무의식을 파고들어 생각의 통제를 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러한 현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2. 이상주의이상주의자들은 윤리 우위론의 입장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의무란 본질적으로 윤리의 문제이지 힘의 함수가 아니라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규칙에 복종하는 개인의 의무가 합리적 논리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즉 최대 다수의 최대선이 최대 다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합리적 목적이 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이익을 촉진하게 되고 공동체의 이익을 촉진할 때 개인의 이익도 동시에 촉진하게 된다는 주장이며 이상주의의 중심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담 스미스의 자유 방임에 의해 유명해졌으며 그가 이익의 조화를 주장했을 때 이는 18세기 경제구조에 잘 적용될 수 있었다. 다만 이는 생산과 교환의 극대화에 주력하고 부의 분배에는 관심이 없는 소규모의 생산자와 상인들로 구성된 사회를 전제하였다. 그와 같은 전제조건은 이 출간될 당시극대화될 때 국제적 경제 이익도 극대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876년부터 이익과 조화 사상의 몰락이 시작되었고 세계 곳곳에서 보호무역의 붐이 일어나게 된다. 또한 다윈의 진화 사상과 맞물려 이익의 조화는 약자의 희생이 곧 강자의 생존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로 변화한다. 즉 약자에게는 도덕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과거 이익의 조화 사상에서 벗어나 경제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법안을 채택했다. 결국 국제 도덕이 전체 사회의 이익이 그 개별 성원의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이익의 조화 사상에 근거한다는 생각은 부적절하며 진실을 호도하는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베르사유 평화조약 내용이 경제적 조항에서 유독 가혹했던 이유는 현실에 눈을 뜬 사람들이 이제는 더 이상 이익의 조화를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쟁국의 번영이 자국의 번영을 위협하기에 경쟁국을 제거하는 것이 그들의 새로운 목표가 되었다. 이로써 이상주의의 기본전제가 무너지게 된다. 오늘날 국제 정치에서 우리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기까지 정치·경제적 생각을 지배해 온 도덕률의 붕괴를 직면하게 되었다. 필자는 E.H 카가 주장하듯 이익과 조화 사상이 사람들을 우둔하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또한 경제의 무한한 팽창이라는 조건이 없었다면 이익과 조화 사상은 성립이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상주의자들의 지극히 이상적인 포장이 있었기에 19세기 이 사상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고, 그들이 스스로의 파멸을 이끈 구조적인 결함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따져보기 위해 현실주의에 대한 구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3. 현실주의현실주의는 이상주의의 반발로서 등장하게 된다. 플로렌스의 마키아벨리는 최초의 정치적 현실주의자이며 마키아벨리의 출발점은 당시 팽배했던 이상주의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의 사상에 내재한 세 가지 핵심 주장이 현실주의의 주를 이룬다. 먼저 역사란 인과관계의 연속으로 이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은 철저히 지적 이처럼 현실주의자들은 역사과정의 결정론적 측면을 강조했으며, 이는 그들이 주장한 사고의 상대성과 함께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된다. 상황이 대부분 사람들의 의견을 결정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보다 구체화한 마르크스는 모든 생각이 생각하는 사람의 경제적 이익이나 사회적인 지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선언했다. 생각이 사람들의 이익과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믿음이 마르크스이래 널리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상대성이라는 무기는 정책과 행동을 판단하는 이상주의의 고정되고 절대적인 기준을 파괴하는데 사용해야 한다.또한 이상주의자들의 이익과 조화 사상도 사회도덕이론이 곧 지배 집단의 작품이라는 현실주의의 원칙에서 쉽게 분석 가능하다. 이에 따르면 이익의 조화라는 사상은 특권 집단들이 그들의 지배적 지위를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해 주장하는 탁월한 도덕적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의 분석이 적용될 수 있는데 정치상에서도 평화의 유지라는 공동의 이익은 결국 지배국가에 의해 창출된 것이다. 국내 사회에서 지배 집단이 자신의 안전과 번영을 보장해주고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계급 간 투쟁을 막아줄 평화를 갈구하듯 결국에는 국제 평화도 지배국가들의 기득권층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익과 조화 사상의 한 특수한 형태인 국제주의 개념을 지적한 현실주의자들은 ‘국제질서’와 ‘국제단결’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강자들의 슬로건일 것이라며 이상주의를 비판했다. 이러한 이상주의에 대한 현실주의의 비판 중 가장 설득력 있는 부분은 국제 정치에서 주장되는 추상적인 원칙들의 현실을 들춰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주의는 사람들이 원칙에 충실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국제 정치의 원칙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국가이익에 기반한 국가 정책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즉 추상적 원칙들을 실제 정치적 상황에 대입하는 순간 그것은 기득권층의 이기적인 욕망을 포장하는 용도임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이상주의가 붕괴.
삶과 죽음: 그 희미한 경계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삶과 죽음: 그 희미한 경계짜여진 각본과도 같은 삶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은 실재하는가. 만약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에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산띠아고 나사르의 죽음은 하나의 공연과도 같다. 그는 정해진 운명이라는 각본 아래에서 우연이라는 무대 장치를 거쳐 죽음이라는 결말을 맞게 된다. 필자를 포함한 독자들은 그의 죽음이 이미 예견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며, 그의 죽어감을 마치 구경꾼처럼 관찰한다. 그러나 산띠아고 나사르는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 그리고 그 기구한 운명을 알아채지 못한다. 필자는 이러한 운명론을 현실에 적용해 보기로 했다. 만약 우리가 매일 맞이하게 될 내일들이, 그리고 과거라고 칭하는 어제들이 모두 짜여진 각본이라면?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완성될 개인의 삶이 결국 정해진 운명 아래에서 제 궤도를 달리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살아갈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삶과 죽음의 경계 또한 모호해진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 아래에서 삶과 죽음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논할 것이다.들숨과 날숨 사이: 삶과 죽음은 결정된다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인간에게 영원한 미지의 세계이다. 살아있는 한 우리는 그 누구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호기심과 욕망을 주기도 한다. 동시에 이러한 죽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의 극단이 아닌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의 주인공인 산띠아고 나사르의 죽음은 생(生)과 사(死)가 완전한 반대가 아님을 보여준다.그는 마지막 계단에서 넘어졌지만 즉시 일어섰다. “자기 창자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조심성까지 있더라.” 그리고 그는 오전 6시부터 열려 있던 뒷문을 통해 집으로 들어가서 부엌 바닥에 엎어졌다.소설은 이와 같이 끝이 난다. 산띠아고 나사르는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듯 자연스럽게 죽음으로 들어선다.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것은 이처럼 찰나의 순간이며, 순간의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 이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모호한 것이며 종이 한 장만큼이나 좁은 것이다. 찰나의 경계 사이에서 삶에 대한 욕구와 죽음에 대한 충동은 계속해서 우리의 삶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인간이 죽음과 가깝게 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일 하루 더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죽음과도 하루 더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해진 운명에 따라 죽음을 향해 가까워지고 있다면 인간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는 왜 살아 숨쉬며 오늘을 살아갈까.주인공은 ‘오늘’을 살아간다“우리가 신중하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죽을 운명이기 때문은 아니다. 객관적인 차원에서 짧은 시간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목표가 매우 많이 있고, 그런 목표들을 달성하는 게 힘들고 어렵다는 사실에 비해 죽음이 너무 빨리 오기 때문이다.”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실재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방향성을 잃게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인생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리고 그 선택을 후회하더라도 운명이라는 견고한 변명 하에 개인의 책임을 조금이나마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운명이 정해져 있는지 아닌지는 신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모르기에 어쩌면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이 목숨을 스스로 끊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죽고 싶다’보다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승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치열한 고민 가운데서 살아남으려면 주어진 오늘을 살아내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 이 책의 주인공 또한 자신의 운명, 즉 정해진 죽음을 몰랐기에 ‘오늘’을 살아낼 수 있었다. 필자는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알고 전전긍긍했지만, 정작 그 자신만은 그의 오늘을 살아갔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싶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바라보고 사는 삶은 죽어가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주어진 오늘을 놓치고 살다가 다가온 내일이 허망한 오늘이 되었을 때,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오늘에 초점을 맞춘 삶은 운명에 구속받지 않는다. 설령 그것조차 운명에 구속받는다고 할지라도 개인에게는 의미있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부여잡을 오늘이 없어질 때까지 우리는 모두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여성이라는 창으로 보는 명작-지난 2년 동안의 이슈는 페미니즘이었다. 미투 운동과 더불어 페미니즘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서 내려오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대단하다. 관심이 뜨거운 만큼 페미니즘은 어딜 가나 민감한 문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이 대두되자 그동안 우리의 시선 밖에 있었던 페미니즘에 관련된 도서나 영화 또한 수면 위로 떠올랐다.『82년생 김지영』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성의 모습을 풀어낸 페미니즘 도서 중의 하나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여성의 인권이 침해받을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이 한 권의 도서는 페미니즘 열풍을 일으켰다고 볼 정도로 그 영향력이 대단했다. 페미니즘의 정확한 정의에 대해 뒤늦게서야 접하게 된 나는 이제 모든 문학 작품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고 페미니즘에 대해 아직 무지하지만 ‘페미니즘’의 존재 자체만으로 나 역시 잘못된 성에 대한 관념의 피해자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번 학기에 문화와 예술 명작 세미나 수업을 들으면서 접했던 두 작품을 통해 무의식중에 자연스럽게 성 불평등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었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낯설었다. 이제는 내 주위의 환경과 내가 접하는 모든 작품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모든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작품들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이번 학기 문화와 예술 명작 세미나 수업에서 접한 『그리스 로마 신화』와 『빌리 엘리어트』는 나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예전에 내가 접했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단순히 올림포스의 멋진 신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다. 여신들의 아름다움과 신들의 경이로움,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신들이지만 그들도 똑같이 사랑을 하고 질투를 한다는 점. 내 시선은 딱 거기까지에만 머물렀다. 그런데 페미니즘을 접하고 난 뒤 가치관 측면에서 약간의 변화를 겪은 후 내 시야는 읽으며 비윤리적 행위보다는 신화에서 비춰지는 여성들의 모습에 더 시선이 끌렸다.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유독 여신들은 남신들에 비해 존재감이 약하다. 또한 여신의 대표 주자라고 볼 수 있는 헤라 여신은 바람 피는 남편을 응징하지 못하는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여성들은 언제나 피해자이고 때로는 악녀로 치부되기도 한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도 말이다.남신에 비해 존재감이 약한 대표적 인물로 헬레네와 클뤼타임네스트라 자매를 꼽을 수 있다. 그녀들은 제우스를 아버지로 두었고 알에서 태어나는 엄청난 운명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영웅적 풍모를 유지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제우스의 자식들은 대부분 남성들로 여성에 비해 높은 존재감을 지닌다. 신화에서 조금은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알에서 태어나는 출생의 신화를 갖고 있는 박혁거세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영웅적 풍모를 지닌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헬레나는 남편의 선택권 하나 없이 납치되어야 했으며,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남편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서양의 대표적 악녀가 되어야만 했다. 우선 헬레네는 원래 라케다이몬의 왕비였으나 그곳을 침략한 메넬라오스에 의해 강간 당해 남편의 얼굴이 뒤바뀌었다. 그러다가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에게 납치되어 그곳에서 머물게 된다. 여신임에도 불구하고 강간 당하고 납치 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트로이가 멸망하자 옛 남편 메넬라오스는 아무렇지 않게 헬레네를 데려가 다시 왕비로 삼는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의 여성은 엄청난 출생의 신화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삶을 개척하지 못하고 남성들에 의해 생을 의지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으로 비춰진다.클뤼타임네스트라의 운명 또한 비슷하다. 그녀 또한 기구한 운명을 지녔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는 이유로 딸을 제물로 바칠 수 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항상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었다. 그것도 제물로 바쳐지는 여성은 숯처녀가 많으며 이들은 눈대명사가 되어야만 했다. 비록 살해가 비윤리적 행위이나 그럴 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말이다.만약 남성이었어도 사람들의 반응이 같았을까? 그 부분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만약 남성이 가족들을 죽인 현부인을 살해했다고 하더라도 악남으로 치부되었을까. 애초에 나는 ‘악남’이라는 단어가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악녀’에 대한 기록은 많이 접할 수 있지만 ‘악남’에 대한 기록은 거의 보지 못했다. 악녀가 존재하듯 악남이 존재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임에도 말이다. 또한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악녀가 저지른 악행이 악남이 저지른 악행보다 더 잔인하고 악랄하게 각인되어 있다. 따지고 보면 악녀의 악행은 자기 보존에 치중되어 있고 세상의 것들을 정복하고 획득하기 위한 악남의 악행보다는 덜 잔인한 것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여성들은 신화에서도 차별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악녀로 낙인 찍힌 클뤼타임네스트라는 결국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이외에도 여신들은 미에만 관심 있는 존재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결국 내가 본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여성들의 삶은 대부분 수동적이었고 남성에게 의지해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으로 그려졌다. 왜 여성들의 모습은 그렇게밖에 그려질 수 없는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성 캐릭터를 시작으로 나는 내가 쉽게 접하곤 했던 다른 여성 캐릭터에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동화 속 공주들 그리고 그리스 로마 신화 속의 여신들은 모두 남성의 도움 그리고 남성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내가 어릴 때부터 봐온 만화나 동화책에서 여성 캐릭터들은 공주과가 정말 많았다. 가만히 보면 백설공주, 인어공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등과 많은 애니 속의 여주인공들은 남성에 의해 구원 받는 프레임이 갇혀 있다. 공주들에게는 이상하리만큼 남성에 비해 위기가 쉽게 닥치곤 하고, 공주가 메우지 못한 빈 자리는 늘 능력있는 왕자의 몫이었다. 공주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늘 왕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왕자의 키스를 받고 깨어나는 공주의 모습을 화 속의 날씬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공주와 왕자에게 구원 받는 공주의 모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라온 여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 또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최근의 디즈니 영화들을 보면 여성들의 모습이 조금은 다르게 그려지는 듯하다. 제일 대표적으로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는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여성 캐릭터를 보여준다. 엘사는 처음에는 사회적인 시선 때문에 스스로를 방에 가두는 행위를 하며 자신을 억압하지만, 이내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능력을 펼치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짓는 엘사와 안나의 당당한 모습과 함께 그동안 디즈니가 주로 다루었던 사랑보다는 자매간의 우정을 다뤘다는 점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내가 봐왔던 작품에서 여성들의 연대를 다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공주나 여신들을 그저 예쁘장한 여성으로만 바라보지 않고 매력 있는 사람으로 바라봐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식의 변화 속에 나 또한 속해 있다는 점이 한편으로는 다행으로 느껴지기도 했다.시대의 변화에 응답하듯 후에 나온 영화 『빌리 엘리어트』는 나에게 오아시스처럼 느껴졌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며 느낀 이유 모를 찜찜함과 불쾌함을 조금이나마 해소시켜 주었으니 말이다. 우선 이 영화는 한 문장으로 발레하는 남자아이의 이야기이다. 우선 나는 이 영화의 포스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발레하는 여자 아이들 속에서 복싱하는 차림으로 동작을 취하고 있는 빌리 엘리어트가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영화는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이래야 한다’라는 성적 고정관념의 틀을 깬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 정확히 어디가 가려운 지 몰라서 긁지 못했던 부분을 콕 찝어 긁어주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우선 이 영화가 명작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려 애썼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의식과 그들만의 이야기를 담았다는 것에서도 충분히 감동을 느낄 수 무엇인지.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이 무엇인지. 이 영화를 보고 우리는 모두가 페미니즘을 지향해야 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여성의 인권이 기득권인 남성보다는 현저히 낮은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여성 못지 않게 남성들에게도 성적 프레임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빌리 엘리어트의 사례만 봐도 말이다. ‘남자가 울면 못써’ ‘남자가 이것도 못해?’ ‘남자라면 의리!’. 내가 어디선가 많이 접해본 말들이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는 약한 것들을 지킬 의무가 있고, 강해야 하며 사람들 앞에서 슬픔이라는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강요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남자들 또한 그 답을 명쾌히 내릴 수 없을 것이다. 보호를 받는다고 칭해지는 여성이 과연 그로 인해 행복해졌는지도 의문이다. 그러한 성적 프레임에 갇혀 남녀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았다면 문득 ‘남자다움’에 대한 강박이 모두를 불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 단지 남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감수성이 풍부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만들어놓은 장벽이 너무 두터워서는 아닐까.영화 속의 조연으로 등장하는 빌리 엘리어트의 동성애자 친구 마이클은 또한 나에게 시사점을 던져주었다. 처음에는 어딘가 모르게 여성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마이클을 보며 동성애자인가에 대한 의심이 먼저 들었다. 여성스러운 남자와 남성스러운 여자는 어딜 가나 눈에 띄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의심이 지속되는 찰나에 마이클이 빌리 엘리어트에게 수줍게 뽀뽀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이 장면에서 나는 확신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약간의 거부감 또한 들었다. 하지만 나중에 성공한 빌리 엘리어트의 공연을 보러온 성장한 마이클의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올랐다. 성장한 마이클이 등장하자 세미나 수업을 듣는 강의실의 분위기가 급 왁자지껄해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화장을 하고 여성만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요염한 표정을 지녀서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