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광장은 어디에 있는가-최인훈 ‘광장’을 읽고2016년 여름. 나는 처음으로 이명준을 만났다. 문학 교과서에 타 작품보다 비교적 길게 실려있던 작품이 이었다. 교과서엔 이명준이 중립국으로 가겠노라 말하는 소설의 끝부분이 짧게 실려있었고, 소설의 전체적 줄거리는 문학 선생님께서 간추려 말해주셨다. 당시 열여덟 살 여고생이던 나는, 광장이 뭐냐, 밀실이 뭐냐 하는 것을 묻기보다 이명준이 남한에 여자친구를 두고 북한에 가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라며 ‘이명준 나쁜 놈’하며 친구들과 선생님과 한참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라는 작품을 떠올리면 이명준의 인생사를 부채의 모양에 대입하는 장면을 해석하는 것, 광장의 의미, 밀실의 의미 등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주입식 교육의 결과물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번엔 기존에 알던 내용을 적절히 참고하되 이전에 보지 못했던 부분의 글을 읽으며 온전히 내 힘으로 책을 읽어내리라 다짐했다. 표현이 심오하기도 하고 내가 이해하기에 이명준이 너무나도 복잡하고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글을 쓰며 내가 이 작품에 대해 무얼 얘기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일단 적어보기로 한다.나는 작품을 말하기에 앞서 책 속에 수록되어 있는 1973년판 서문 를 통해 이명준의 죽음을 얘기하고 싶다. 1960년 이명준을 세상에 소개한 이후 작가는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질타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앞길 창창한 젊은이 이명준을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숨은 바위에 대한 충분한 가르침도 없이 삶의 바닷속으로 내려보내 세상 버리게 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탓하고 나무랐다고 한다. 이에 대응해 작가는 서문을 통해 약간의 핑계를 던진다. “우리는 그 바위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잠수부를 보내는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모르고 인생을 시작하는 것처럼 소설가는 인생을 모르면서도 주인공을 삶의 깊이로 내려보내야 한다.” 나는 이 서문에 설득당했다. 어쩌면 소설 속 내용에 버금가게 내 속에 뉘우침을 준 글인지도 모른다. 문학을 읽으면서 주인공들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결과를 얻을 때마다 난 속상해했고, 작가를 원망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 줘도 되는거잖아, 하고 말이다. 만약 이 서문을 읽지 않았더라면 을 다 읽고 난 후엔 더욱 격분했을 것이다. 그다지도 힘들게 살아온 이명준인데. 그다지도 끊임없이 생각의 늪에 빠지고 철저하게 그들의 광장과 밀실에 대해 고민했는데. 타락한 이데올로기 속 유일하게 기댈 수 있었던 사랑마저 잃게 된 ‘그’인데. 꼭 이렇게 죽여야만 했냐고,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잔뜩 들었을 것이다. 서문을 다 읽은 덕분에 이명준의 허망하고 어쩐지 쓸쓸하기도 한 죽음이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상에 마냥 허망하게만 남은 죽음은 아니었음을 나는 이제 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세상에 던져졌기에 그가 발견한 그 시대의 사랑과 이데올로기의 무언가로부터 오는 폭력성, 고뇌, 기쁨 또는 슬픔 등이 생생하게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이명준은 타고르호를 타고 중립국으로 가는 석방 포로이다. 배 위에서 새를 보던 중 남한에서 생활하며 철학을 전공하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는 주인집 딸인 영미를 통해 윤애라는 여자를 알게 된다. 아버지 이형도는 극심한 공산주의자인데, 이 때문에 명준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가 겪은 경찰의 폭행 탓에 본인만의 밀실이 파괴된다. 이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명준은 윤애와의 사랑에도 실패하고 타락한 밀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상적인 광장을 꿈꾸며 북으로 향한다. 그러나 북의 광장마저도 당의 독재에 의해 타락해 있었다. 이에 환멸을 느끼던 중 그는 은혜라는 여자를 만나고 진정 사랑을 나눈다. 명준에게 광장과 밀실의 조화를 느끼게 해주는 여자가 바로 은혜였다. 그녀와는 잠시 헤어졌다가 전쟁이 발발한 이후 다시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 또한 명준의 개인적 밀실이라고 할 수 있는 산 속의 굴에서 이루어진다. 시끄럽고 참담한 이념의 전쟁 속에서 명준과 은혜는 그들만의 광장과 밀실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명준의 세계는 은혜의 전사로 다시 한번 무너지고, 더 이상 광장과 밀실에 대해 기대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잡혀있던 그는 남한의 타락한 밀실과 북한의 타락한 광장 사이,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고, 그는 결국 중립국을 택한다. 중립국을 향하던 배 안에서 그를 괴롭히던 환영이 갈매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갈매기가 죽은 은혜와 자신의 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내 바다에 몸을 떨구며 소설은 끝이 난다.이 소설에 있어서 광장과 밀실이 갖는 의미는 쉬우면서도 어렵고, 어려우면서도 쉽다. 간단히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광장은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집단의 공간이고, 밀실은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이다. 남한과 북한에 광장과 밀실이 모두 존재하지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각 집단의 특성상 굳이 나누자면 남한은 개인적인 삶, 실존적 삶을 중시하는 밀실에 가깝고, 북한은 집단적 삶, 사회적 삶을 중시하는 광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각자의 방식의 이념을 찾아가던 두 집단은 극심한 과도기에 놓여있었고, 이는 개인에게 폭력으로 이어졌다. 남한과 북한 그 어디에서도 멀쩡한 광장을 볼 수 없었고 멀쩡한 밀실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 불온한 광장과 밀실 가운데서 혼자 살아가기에 이명준은 약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으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약간 벗어난 말이지만, 이번에 이 소설의 전체를 읽으면서 이명준이 복잡하고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지만, 사랑 앞에 있어선 투명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된 건 개인적으로 뿌듯한 결실이다. (이명준은 양다리쟁이(?)라고 판단했던 과거의 나를 대신해 이명준에게 이 기회를 빌려 사과한다.)
철인들의 시대-신경숙의 ‘외딴방’을 읽고당신의 글 속엔 훼손되지 않은 우리 민족의 정서가 흐르고 있어요. (중략) 당신 글을 보면 이 땅에서 자란 사람의 냄새가 물씬해요. 그것이 죽음이든 사랑이든 이별이든 간에요.이는 조선인이 소설 작가인 ‘나’에게 한 말이다. 명료한 설명이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지나온 한국인의 삶을 보여준다. 나는 그 시대를 지나온 사람이 아님에도 이 소설에 공감하고 감동한다. 한국인이니까. 이 책은 어느 정도 사람들에게 알려진 작가가 된 1인칭의 화자인 ‘나’가 유복한 시골을 뒤로 한 채 열여섯 살에 서울로 올라와 공장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던 자신의 과거를 적어낸 소설을 써내는 작품이다. 그래서 작가는 이 글을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하고’라는 문장들의 나열로 시작한다. 사실도 픽션도 아닌 중간 쯤의 글. 내 개인적으론 작가의 문체 때문인지 사실의 비중이 클 것이라고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읽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작품이 소설이기에 내가 믿고 싶지 않은 장면은 ‘만들어 낸 것일 거야’하는 생각으로 스스로 주문을 걸어가며 글을 읽을 수 있었다.우리나라의 빛과 향을 많이 담아낸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과거를 회고해 만들어 낸 일종의 자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에 대해 간단히 알아봤다. “작가 신경숙은 1963년 1월 12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산업체 특별학교를 거쳐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뒤 1985년 에 중편소설 를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전라북도 정읍. 구로공단. 산업체 특별학교. 문예창작과. 내가 알아본 작가에 관한 대부분의 내용이 소설 속 ‘나’의 것과 일치했다. 그렇게 느껴진 나의 의문은 낯설지 않았다. ‘이 작품은 소설인가 수필인가.’ 이전에 읽었던 ‘엄마의 말뚝’에서 느낀 의문이었다. 최근에 한 번 경험해서인지, 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소설 속 작가는 열여섯에서부터 스물까지의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소설에서 언급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아픔이었다. 어쩌면 부끄러움. 이러한 감정을 품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기에 본인의 이야기임에도 소설이라는 허구적 요소를 완충재로 입혀 세상에 내보낸 게 아닐까. 꽁꽁 감춰뒀던 모든 것을 털어놓은, 상처가 가득한 한 사람의 마지막 자존심이 아닐까. 나는 생각했다.서른일곱 개의 방 중의 하나, 우리들의 외딴 방.작가는 외사촌과 자신에게 방을 소개하던 큰오빠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창문을 열면 전철역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게 보이고, 구멍가게나 시장, 육교와 같이 사람들로 번잡한 집 주변이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작가는 그 방을 생각하면 한없이 외졌다는 생각, 외로운 곳에, 거기서 외따로이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고 말한다. 나는 이 외딴 방에 대한 얘기가 처음에 말한 것과 같이 소설이었으면 하는 부분과 맞닿아있다. 첫째, 사람들이 기계적이다. 서른일곱 개의 방에 한 명씩만 살아도 서른 일곱 명인데,(나를 빼면 서른 여섯 명이라고 치자.) 이사를 갈 때까지도 희재언니 외엔 아는 사람이 없다. 주변에 사람이 아닌 기계들이 사는 건 아닌가.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공간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타지살이를 하는 처지에 사람들과의 정도 못느끼면 얼마나 외로울까 하는 생각에 슬퍼졌다. 둘째,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다. 물론 외딴 방에 큰오빠와 외사촌, 그리고 셋째 오빠가 함께 살았다만, 그래도 시골집에서 모두가 같이 살던 때와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너무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나와 모든 것이 기계화된 것 같은 세상에서 살게 된 것. 그것이 슬픔이었다. 셋째, 너무 어린 나이에 목격한 죽음. 살면서 그런 일을 겪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희재 언니. 구더기. 냄새. 이런 표현들을 글자로 마주했을 땐 나도 너무 놀라 책 읽기를 멈칫했다. 게다가 그녀를 방안에 묶여있게 한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을 열아홉의 ‘나’를 생각하면, 그 이후의 삶 속에서도 희재 언니를 생각하며 죄를 느꼈을 ‘나’를 생각하면, 이게 부디 소설 상의 이야기이기를 간절히 바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외딴방에서 산 것,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온 것은 작가의 사실이더라도 부디 그 외딴방에서 희재 언니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소설일 뿐이길 바랐다. 그렇게 겪은 죽음이 그 방을, 열여섯부터 열아홉까지의 그녀의 삶을 더욱 외딴 곳으로, 그녀의 마음 속 외진 곳으로 밀어넣었을테니까.엄마가 가자, 잠시 집의 냄새를 물씬 풍겼던 외딴 방의 부엌이 쓸쓸해진다.나는 기숙사에 산다. 타지에서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 삶, 공허 그리고 그리움. 같이 있을 땐 모른다. 아니.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공허는 내가 생각한 것과 차이가 있어 처음 마주할 때 꽤 깊은 타격을 줬다. 그래서 나는 수없이 많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위의 문장을 통해 작품 속 ‘나’와 강한 동질감을 느꼈다. 엄마가 오빠의 생일에 부랴부랴 서울로 찾아와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하루 머물다 간 날이다. 그토록 낯설고 외롭고 냉랭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던 외딴 방은 엄마가 온 것만으로 시골 집의 냄새를 풍긴다. 40년이 지났어도 이런 감정은 변하지 않음을 난 이런 작품들을 통해 느낀다. ‘인간의 감정은 변하지 않는구나.’ 물론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집에 가기도 수월하고 부모님과 연락하는 데에 원초적인 어려움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일상 속에서 사라지고,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늘 그립고. 늘 보고 싶고. 늘 안기고 싶다.
모두가 프로가 된 세상-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나는 야구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그저 현존하는 국내 유명 야구팀의 이름 정도만을 알 뿐이다. 축구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단박에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야구에 관해 대화를 하자고 누군가 요청해온다면 난 정말 할 말이 없다. 그 정도로 나는 야구 문외한이었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작품의 제목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인데, 사실 난 이 세대와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1999년에 태어난 내가(게다가 야구엔 관심도 없다.) 1985년에 고별전을 펼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를 알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난 고등학교 재학 중 필독도서에 올라와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제목을 마주했을 때 이게 야구에 관한 책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고 삼미라는 동네의 사람들이 결성한 밴드의 마지막 팬클럽이겠거니 추측했던 기억이 난다.1982년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끊임없이 연달아 있는 프롤로그로 이 소설은 시작한다. 드는 생각이라고는 ‘아, 그렇구나’가 전부인 글이었다. 그래서 이게 삼미 슈퍼스타즈랑 무슨 상관인건가 싶기도 했다. 이렇게도 많은 일이 있었던 1982년임에도 작가에게 아주 큰 일로 남아 있는 것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발생이었던 것이며, 이를 박민규는 무려 네 페이지를 써가며 장황히 얘기한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1장의 첫 내용부터 소설의 중반부까지는 사실 내게 큰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과하게 야구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가 꽤 오랜 시간(영화로 치면 러닝타임) 이어졌기 때문이다. 할 푼 리, 선수들의 이름, 승률이 어쩌고 저쩌고. 온통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뿐이었다. 물론 ‘나’가 자라나는 과정을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슈퍼스타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소개되는 부분은 읽는 내내 ‘이게 뭔소리인가’ 싶었다. 결국 완전히 이해하기는 포기하고 연패(敗), 역전패 등의 단어에 의존해 슈퍼스타즈를 이해했다. 내가 생각할 때 ‘나’는 어린아이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의 열정의 보여주는 인물이다. 우선 이 열정에 대해 얘기해보자면, 초반부의 야구열정은 마냥 귀여웠다. 국내 프로야구단의 창단에의 흥분과, 자신의 연고지에도 대표 야구단이 생긴다는 데에서 비롯하는 아이들의 즐거움, 기쁨, 삼미 슈퍼스타즈 팬클럽 어린이 회원이 되려고 아빠한테 공부에의 포부를 어필하는 것까지도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졌으며 그 모습이 귀여웠다. 그러나 아이들의 이 순수한 열정과 흥분은 동시에 슬픔과 공포로 이어지기도 했는데, 삼미 슈퍼스타즈가 비상하지 못하고 점점 쇠퇴해갈 때 아이들이 느끼는 무력감과 우울감이 그랬다. 공포스러웠다. 열두살, 열세살 정도의 아이가 염세를 느낀다는 게 섬뜩했다. 잠시동안의 상승세로 다시 밝아지나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바로 하락하는 모습에서 더욱 심화된 우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야구단이 해체되고 우울감과 세상에 대한 염증 가운데에서 그럭 저럭 성장해가고 공부에 몰두하는 ‘나’의 모습을 보며 이 작품은 우울감을 피력하는 게 목표일까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우울해하면서 ‘삼미 슈퍼스타즈’에 대해 얘기하는 이유가 뭘까 싶었다. 이러한 나의 의문은 소설의 중반까지 이어진다. ‘나’가 대학을 들어가는 순간까지. 박민규 작가가 쓴 작품의 특성들일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이전에 읽었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앞부분이 굉장히 지루하고 이해도 안 가고 왜 이런 글을 쓴 걸까 싶었지만, 이 고비만 넘기면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즐거움을 선물하는 작품이었다. 책이 지루하다고 여겨질 때 즈음 ‘삼미 슈퍼스타즈’에 대한 이야기가 점차 사그러든다 싶어질 때 즈음 나는 이 책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프로’를 논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작가가 이 이야기를 쓴 이유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프로’에 대해 짚어내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야구가 시작되던 순간. 그 순간을 우리나라에 ‘프로’라는 개념이 팽창하는 시점이라고 작품은 말한다. 프로야구가 등장하면서 회사 일에 있어서도, 장사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공부에 있어서도, 사람들은 프로처럼 행동하려고 애쓰며, 프로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강박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데에 있어서 ‘프로’인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 역할을 아주 훌륭히 해주는 소재였다. ‘프로’야구단 가운데에서 가장 ‘프로답지 않았던 프로’는 삼미 슈퍼스타즈였다. 매번 패배하고, 패배의 기록을 갱신하는 그런 집단이었다. 승리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하지만 승리를 얻지 못하는. 프로답지 않은 프로였다. 그러나 ‘과연 슈퍼스타즈가 프로답지 않았는가‘를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도 눈에 흙을 뿌려야 할 만큼 치욕을 당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니까. 그래서 (프로의) 순위는 우리 모두에게 일종의 최면처럼 거대한 오해와 착시를 유발한다. 결국 문제는 ‘평범’의 기준에 관한 것이다.”
눈물과 애도-천운영의 ‘그녀의 눈물 사용법’, ‘엄마도 아시다시피’를 읽고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봤을 때도 ‘세상에나, 지금 눈물이 나온다고?’ 싶은 타이밍에 울 정도로 눈물이 많다. 내 눈물은 어떤 방향으로든 극에 달할 때 나온다. 너무 슬플 때는 물론, 너무 기쁠 때, 너무 화날 때, 너무 놀랐을 때에도 어김없이. 활짝 열린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처럼 눈물이 떨어진다. 이런 내게 눈물은 거부감을 일으키는 소재가 아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감정에 흐름에 따라가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든 만나게 되는 게 눈물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이번 학기 ‘현대대표소설읽기’수업의 마지막 독후감이 될 이번 글에서 나는, 이런 나와는 약간은 다른 방향에서 눈물을 바라보는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그녀의 눈물 사용법’과 엄마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행위에 대해 서술한 ‘엄마도 아시다시피’를 읽고 떠오른 생각과 느낌을 앞서 제출했던 과제들에 비해 보다 더 자유롭게 적어보고자 한다.천운영 작가의 글은 전체적으로 ‘여성’에 대한 내용이 많다. 내 취향의 소재와 표현은 아니었으나(나는 개인적으로 김애란 작가나 이도우 작가의 소재 선정과 표현, 문장을 좋아한다. 표현 하나하나가 마음을 울린달까. 이야기 전개도 지루하지 않게 진행되어 딱 내 스타일이다.) 취향에만 맞지 않을 뿐, 흥미가 없진 않았다. 오히려 표현 방식이나 소재는 흥미로운 쪽에 가까웠다. 이전에 수업시간에 다뤘던 글들이 비교적 먼 과거의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이번에 읽은 작품들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이해가 소설 이해의 큰 축으로 작용하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쉽게 읽혔고, 더욱 쉽게 매료됐다. 뒷 내용이 궁금해지게. 자극적이었달까. 그렇다고 그녀의 작품이 남긴 여운도 빠르게 사라지는가 하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 내게 있어서 두 작품은 읽는 그 순간엔 강렬하고 기괴하게 다가오나, 다 읽은 후 돌이켜 생각해보고, 내 나름의 의미부여를 끝내면 그땐 고요한 여운으로 오랫동안 마음 한 켠에 찡한 울림을 준다. 내가 두 작품을 읽으면서 얘기하고 싶은 내용은 크게 ‘눈물’과 ‘애도’이다.‘그녀의 눈물 사용법’에서 ‘나’는 어릴 적 단 하루만 살다 간 동생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책감을 짊어진 채 어른이 되었다. 죄책감 때문인지, 그녀는 죽은 동생을 볼 수 있다. 동생의 혼은 그녀가 슬플 때, 아플 때 위로를 해주기도 한다. 점차 그녀는 ‘그애’와 합일되어 가는 모습을 보이는데, (성고정적 관념에서 비롯된 사고라고 생각할 여지가 충분하나, 일단 레포트를 써내기 위해 아랑곳 않고 적어보겠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굴복의 태도라고 생각하여 우는 것을 꺼리는 것과 같이 남동생의 ‘남성성’을 그녀가 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남성의 생식기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동성에게 끌리기도 하는 등 여성성을 상실해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수년을 함께 생활을 해왔으나, 점차 심해지는 오빠의 우울증이 ‘죽은 그애’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천도재를 지내게 되고, 지금껏 눈물을 흘리지 않던, 흘리고 싶지 않아 했던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 천도재 장면에서 눈물의 의미가 전환되는 것 같다. 천도재를 지내기 전까지, 오랜 기간동안 그녀에게 있어서, 그리고 그녀의 집 여자 식구들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것이었다. “눈물은 감정의 늪이다. 유약한 인간들만이 제가 만든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법이다.” 천도재 이전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조롱과 비난, 슬픔과 고독에 대한 굴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천도재를 계기로(어린 아들을 떠나보내 오열하는 한 여자를 보며) 그녀는 슬픔을 치유하는 적극적인 눈물의 사용법을 알게 된다. 나는 ‘눈물이 굴복의 의미’라는 데에 공감하지 못한다. 나의 감정이 극에 달해, 도저히 거짓으로 감정을 감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이를 ‘순수’가 아닌 ‘굴복’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데에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겪어온 시간들을 떠올리면, 나약해선 안됐던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나약함’의 표출이라고 여기며 울지 않게 된 것이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작동한 것이라는 정도의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는 올바른 눈물 사용법은 변하지 않는다. 굳이 빗대자면 천도재 이후 그녀가 받아들인 눈물의 사용법에 가까울 것이다. 상황을 회피하고자 흘리는 눈물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남을 곤란하게 하는 눈물도 별로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눈물을 통해서 마음 속에 꽝꽝 뭉쳐있는 감정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것이 눈물의 올바른 사용법이라고 생각한다.애도. 다시 찾을 수 없는 것,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슬픔을 받아들일 때 겪는 고통스러운 통과의례. 프로이트는 애도작업을 ‘비애의 과정 중에 상실된 대상에게 투영되어있던 리비도(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갈망, 욕망)를 철수함으로써 자아가 다시 자유로워지고 원래의 에너지 상태로 귀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에 ‘그녀의 눈물 사용법’과 ‘엄마도 아시다시피’의 두 주인공은 모두 애도작업에 실패한 것 같다. ‘그녀의 눈물 사용법’ 속 ‘나’는 천도재 이후 본인의 사랑을 추구하며 애도에 성공한 것처럼 볼 수 있지만, 내가 볼 때 그녀의 마음속엔 여전히 동생이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거의 자기와 일치된 것 마냥 여겨왔던 남동생의 혼을 천도재를 지냄으로써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그녀는 그를 그녀와 분리시켜내지 않고 생활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 안에 여전히 살고 있는 울지 않는 소년”이라는 문장으로 작품을 끝낸 것을 보면, 이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애’에게 투영되어 있던 리비도를 거두지 않은 채 함께 살아갈 것으로 보인다. 소설은 끝났지만, 이후에도 그녀의 행동에 그녀의 동생이 일정정도 영향을 미칠 것임이 충분히 예상된다. ‘엄마도 아시다시피’의 상황은 이 ‘애도의 실패’를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 자체를 주요 플롯으로 사용한다. 엄마의 죽음을 경험한 남자는 무던하게 살아온 인생처럼 국가에서 지정한 법에 따라 무던하게 엄마의 장례를 마친다. 소설 앞부분의 문체는 이 무던함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한데, 읽는 나도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무던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슬픔뿐만 아니라, 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엄마의 부재를 느끼는 것은 반듯하게 다려진 손수건이 없다는, 익숙함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지금껏 덤덤하던 그의 모습은 그 순간 이후 사라진다. 사실 이러한 고통과 슬픔을 표출하는 행위는 자연스럽다. 그도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늦었다뿐이지, 그가 슬퍼하는 것은 남들과 똑같이, 정도를 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감정이고 상황이다.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함께 있지 않는 것은 견딜 수 있겠으나, 이 순간, 지구 어딘가에서 숨쉬며 살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혹은 그것이 사실이어서 이를 새삼 인식하게 된다면, 나 또한 기약없는 슬픔에(이렇게 큰 우울감을 ‘슬픔’이라는 단어가 반영해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빠져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울감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극복해낼 때 ‘애도’라는 것이 가능해진다. 식당에서 걸어준 앞치마를 두른 채 거리를 활보하며 오열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를 연상시키는데, 이후 그의 행동은 더더욱 어린아이와 같고, 중년의 시간을 걷고 있는 육체와 그가 보여주는 행동의 괴리가 너무나 커서 그의 모습이 기괴해 보이기까지 한다. 엄마의 기일날, 쉰 목소리를 한 채 맞지 않는 엄마의 옷을 꾸역꾸역 입고선 엄마가 좋아하던 ‘샹송’을 부르는 것도 기괴해 보인다. 무섭다. 애도에 실패한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는 게 신박했다. 애도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은 죽은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님을 충분히 잘 알지만, 그럼에도 난 그가 애도에 실패한 것이 아주 이해못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람 마음이 가장 알기 어렵다.-김승옥의 ‘생명연습’, ‘무진기행’을 읽고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무진. 말 그대로 안개나루이다. 책 초반에 나온 무진의 안개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었는데, 한낱 안개를 살아 숨쉬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했다고 느꼈다.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산들을 유배시키고, 여귀가 뿜어내놓은 입김같고,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헤칠 수 없는. 이렇게 표현된 안개를 가진 ‘무진’이라는 곳은 자연스럽게 매력있는 지역일 것이라는 연상으로 이어졌다.무진은 실존하는 지명이 아니라고 한다. ‘무진기행’이라는 작품은(사실 김승옥 작가님의 작품은 이번에 처음 접했다_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서울 1964년 겨울’을 읽었었다.(웃음)) 초면이지만, ‘무진’이라는 공간은 초면이 아니다. 안개가 많이 끼는 무진으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공지영 작가님의 ‘도가니’를 통해 다녀왔던 곳이다. 이 도가니의 무진이란 배경이 ‘무진기행’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이라는 걸 깨달은 뒤엔 ‘아-’하는 뭔지 모를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다. 무진에 대해 마냥 좋지만은 않은 인식(어쩌면 부정적인 쪽에 가깝다)을 가지고 있던 나는 이 작품의 제목을 읽고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하고 시작하는 첫단락을 읽는 순간까지도 주인공이 가는 ‘무진’이라는 공간은 음침하기 그지없는 공간일 것이며, 뭐가됐든 찜찜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단단히 준비시켰다. 그러나 ‘무진기행’ 속 무진은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무진을 무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 윤희중의 무진을 만나고 온 느낌이다. 윤희중은 제약회사 딸과 결혼해 제약회사의 젊은 나이에 전무의 자리에 이르는, 사회적으로 보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과연 그가 성공한 삶을 살고있는가를 굳이 따지자면 그렇지 않다. 그에게서 자신의 줏대라고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 짙은 안개 속에 숨을 뿐이었다. 아내와 장인이 무진에 가서 있으라고 하면 그 말을 따를 뿐이다. 엄마가 전쟁에 나갈 생각 말고 방에 숨어있으라고 하면 아무리 참전하고 싶었어도 그런 그의 생각은 감춰둘 뿐 얌전히 숨어있었다. 사랑도 인생에 있어서 선택도, 책 속에 제시된 그의 인생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무진에서 벗어난 그의 삶에 있어서 주도권은 내가 함부로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무진에 있어서는 ‘타인에 의한 강제가 일어나는 곳’이라는 정의를 내려도 괜찮을 듯하다. 그의 인생엔 선택이 없는 듯 보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책을 읽으며 그가 굉장히 답답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진은 이 답답한 남자의 무의식이 형상화된 공간인 듯했다. 공상을 거침없이 해내던 곳. 실패로부터의 도망이나 새출발이 필요할 때 주인공이 찾아가는 곳. 이 모든 게 안개가 있기에 가능한 연상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안개로써 그를 숨겨줄 수 있을 법한 공간, 그의 공상을 감춰줄 수 있는 공간을 연출해 낸 것이다. 그가 서울에서 무진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무진은 무진으로서 존재한다는 점, 그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무진엔 그의 추억하기 어려운 추억이 묶여있다는 점. 이런 여러 점들을 모았을 때 무진은 분명히 그의 기억 속 어딘가에 항상 무의식으로서 존재한다.나는 작품에 사용된 문체와 표현(표현이 얼마나 아름다웠냐면, 나는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여러번 만족스러울 때까지 반복해서 읽는데, 이 작품에 사용된 표현이 너무 예뻐서 그 글을 눈으로 다시 읽고, 또 다시 읽고 하다가 자꾸 흐름을 놓치게 될 정도였다.)뿐만 아니라 인물들도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답답한 주인공부터 시작해서 순박한 청년인 국어교사 박,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은 세무서장 조, 서울로 가고 싶어 하는 음악교사 하인숙이 등장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윤희중과 하인숙의 사랑이 어려웠다. 그가 진짜로 하인숙을 사랑한게 맞는지가 헷갈렸다. 그가 하인숙에게 빠져드는 과정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읽어봤을 땐 또 그의 마음에 하인숙이 스며드는 장면이 존재하는 것 같고(열두시 이후에 우는 개구리 얘기를 나누는 시점)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을 의식화 하지 못하는 그의 부족한 능력을 드러내는 장치에 지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적어둔 낭만적인 편지의 구절을 읽으면서는 진짜 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이것을 너무나도 쉽게 찢어버리는 게 사랑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는 한정된 책임 속에서 살기로 약속하는 사람이니까, 편지를 찢어버리는 게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가 무진을 떠나며 보았던 선명한 글씨가 그에게 부끄러움을 상기시켰다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무진에 있는 동안은 적어도 그가 하고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 생각도, 행동도. 그러나 무진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눈 앞에 놓이는 순간부터 그가 그의 생각과 행동들을 합리화 하고, 모두 내버려 두고, 떠나고 싶든 그렇지 않든 얌전히 떠나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게 우습기도 안쓰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