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 대체 REPORT문제) 조선 후기 풍속화와 민화에 담긴 미학적, 대중문화적 성격을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관점에서 서술하시오. 다음에 제시된 주제어를 토대로 논하시오.(주제어;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와 예술, 예술가의 자율성, 해학과 비판, 계급성, 대중성)우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살펴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서 19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성 중심의 모더니티 이념들이 만들어낸 부작용과 모순에 근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총체적 비판을 가하며 출현한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 이성과 감성 증과 같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거부하며 예술과 일상생활, 순수예술과 응용예술,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 허물기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모더니즘은 어떠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에 반발하여 나타난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더니즘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하학적 형체를 띄기 시작했고 추상화되어 대중들이 이해하기엔 어려운 예술이 되어갔다. 그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을 예술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미술가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개성적인 작품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작품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대중들에게 친숙하고 구상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하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 미술과 조선 후기의 풍속화의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해선 풍속화와 민화가 나오게 된 역사적 배경을 우선적으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조선 후기 풍속화가 가장 발달했던 시기는 영조와 정조, 순조 초년에 이르는 시기였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왕의 자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이 시기에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여 문화적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왕의 역할과 더불어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했고 농업생산량이 증대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당 교육이 보급되었으며 과거에 비해 서민의 경제적, 그리고 신분적 지위가 향상되면서 서민 문화가 대두한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예의 특징은 감정을 적나라한 서당 교육의 보급화로 인해 서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소설도 유행하였는데, 풍속화와 민화와 마찬가지로 다루는 주제에 변화가 나타났다. 과거 영웅을 다뤘던 영웅 소설이였던 반면에 조선 후기에는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현실적 세계를 바탕으로 하였다.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했으며 남녀 간의 사랑과 현실에 대한 비판의 내용과 같이 예술가의 자율성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 더불어 중국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이 유입되었던 것에도 영향을 받았다. 기존의 문학은 성리학적 사유에 근간을 두었다. 그랬기 때문에 도덕적 감화와 효용을 중시할 수 밖에 없었으며 문학의 본질을 제도지기, 혹은 관도지기로 규정한 것이다. 이는 문학을 창작 행위라기 보단 교화적 목적에 준 도구적 역할에 집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동아시아 질서의 재편이 생겼고 공안파 문학사상을 수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도론적 문학관에서 창작자의 개별성이 문학의 본연성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결국, 창작자의 개별성은 곧 예술가의 자율성을 의미했다. 이러한 시대상의 변화로 예술가들은 현상 사물의 사실적 묘사와 문학의 본질 파악에 힘쓰게 된 것이다.조선 후기 문학의 현실에 대한 인식 변화를 정리하면 이와 같다. 성리학적 바탕을 둔 문예 창작이 경전과 성인들의 말씀에 있다는 외재적 요인에서 창작자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개인의 내재적 요소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성정지정에서 성정지진의 문예로의 전환이 나타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 역시 성리학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이 욕망하는 것들에 대해 그대로 참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또한, ‘과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여 도와 문을 분리하고 문(文)자체의 존재론적 가치를 중시하게 되었다. 이렇듯 조선 후기 문예사상에 있어서 개인의 욕망을 긍정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형사(形似)에 대한 강조는 문화현상의 변화에 기여했다. 문예사상과 현실의 후기 문학에 있어서의 변화상은 ‘자의식’의 성숙으로 인한 개인의 자율성과 욕망의 표출을 하던 변화 시기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상공업자들의 부 축적과 더불어 신분제도에 대한 동요도 일어났는데 중인들을 중심으로 한 위향문인들도 이에 가담하였다. 그들중 일부는 신분적 불만을 가지고 체제를 개혁하고자 하는 창작태도를 보여주었다. 풍속화에 있어서는 신윤복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기존의 회화에서는 그림을 도구적 역할로서 인식했던 반면 풍속화는 그 동안의 관심 밖 주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냈으며 사람들의 정감과 욕망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다. 풍속화는 인물을 소재로 했기 때문에 다른 회화와 비교했을 때, 시대적 분위기를 가장 잘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 화가를 들자면 김홍도, 윤두서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각 화가의 작품적 특징을 살펴보자면, 김홍도는 서민들의 생활상을 주로 담아내었다. 그들의 생업을 한국적 해학과 정감이 잘 표현되도록 간략히 그려낸 것이다. 한국 서민 사회의 정경을 다뤘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과 춘의를 주로 그렸다. 조선시대는 유교적 도덕 관념이 농후했던 시기이다. 그러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러한 작품을 그렸던 것은 그의 대담성도 있지만 그러한 작품을 그리는 것이 가능했던 사회적 추이를 염두에 줄 필요가 있다. 이는 그 시대의 시대적 조류를 보여주는 셈이다.김홍도의 풍속화는 각 계층 사람들의 일상사, 생업, 세시풍속이나 시정의 유희와 같은 다양한 소재를 주제로 삼았다. 은 배경이 없는 구도로 투박함과 생명력을 모두 담아내었다. 이를 통해 인물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정감 넘치는 갊을 생생하고 재밌게 묘사할 수 있었다. 김홍도의 이러한 병풍류와 화첩류 풍속화풍은 화원 화가들의 정형을 이루면서 여러 화가들에게 계승되었고, 이는 뒤에 민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홍도는 화원 화가의 소속으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소작인들과 마름의 갈등과 더불어 지방 관리들의 부패를 비판하는 내용도 함께 비유적으로 담긴 것을 알 수 있다. 벼를 열심히 터는 소작인들의 모습을 통해 수확철임을 알 수 있다. 벼를 열심히 털고 일을하는 소작인으로 보이는 사람들과는 달리 입에 담배를 물고 편히 쉬고 있는 양반으로 보이는 남자를 볼 수 있다. 그의 오른쪽 아래에는 술로 보이는 술병을 보아, 낮술을 한 잔 걸친 후 소작인들을 감시하는 듯 하다. 머리 위의 갓은 비스듬히 벗겨져 있고 옆으로 삐딱한 자세로 다리를 꼬며 누워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옆의 소작인들의 얼굴은 웃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이는 신분제의 모순과 계층간의 갈등을 해학과 풍자를 통해 비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일꾼들 중 가운데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한 인물은 다른 일꾼들과 달리 표정의 대비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대비를 통해서도 일꾼들과 마름의 행동을 대비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서민들의 생명력 넘치는 일상을 그려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홍도는 순수 자의적 비판을 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대신 체제의 위계적 질서원칙에 기반을 둔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을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에로티시즘적 요소를 담고는 있지만 유가적 이념 내에서의 비판적 시각임을 알 수 있다. 그의 풍속화는 남녀간의 진솔한 애정이 아닌 일방적으로 훔쳐보는 양반들의 모습을 통해 봉건적 질서 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풍속화로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그는 위계질서 자체를 부정하지 못했다는 점과 봉건적 질서에 머물렀다는 한계점을 지닌 것이다.하지만 신윤복에 이르러선, 풍자의 방식이 과감하고 적나라하게 바뀌었다. 그는 신한평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의 풍속화와 김홍도의 화풍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소재와 구성방식 등에서 독창적이며 새로운 조류의 풍속화를 보여주었다. 그는 혜원전신첩에서 볼 수 있듯이 기방과 기녀의 모습을 중심으로 호색적인 정경을 자주 다루었다. 이러한 선정적 경향은 시정의 속태와 여속을 생생하게 그려내었다. 오른쪽의 작품은 신윤복의 이라는 그림이다. 이는 단오를 맞아 여인들이 계곡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여인들이 냇가에 멱을 감기도 하고 목욕을 감기도 하며 그네를 타는 모습이 보인다. 주로 단오에 여자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타기를 했으며 남자들은 씨름을 즐겼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위의 그림에서 왼쪽 아래 여인들은 물가에서 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올린 상태로 있다. 이 네명의 여인과 언덕 위에서 머리를 다듬는 여인, 그리고 그네를 타는 여인을 대각선으로 배치해 놓은 구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오는 여성과 바위 뒤쪽에 숨어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는 동자승 두 명 역시 대각선 상에 마주보고 배치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대칭적 구조와 대각선의 구도, 그리고 그네를 타는 여인의 옷 색을 대비시킴으로서 예술적 효과를 드러내기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동자승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동자승을 통해 관음증적 욕망을 드러내고자 한 것일 것이다. 결국, 위에서 말했듯이 개인의 감정이나 유교적 관념의 영향이 적었던 당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하나의 그림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왼쪽의 그림은 신윤복의 이다. 그림을 보았을 때 남성은 갓 속에 상투를 틀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았을 때, 결혼을 이미 한 양반집의 자제임을 알 수 있다. 그 남성은 노골적으로 왼쪽 여성의 손목을 잡아당기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슴이 드러나는 짧은 저고리를 입고 머리를 틀어올린 여성은 결혼을 한 몸종으로 볼 수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렇게 몸종이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있음에도 손목을 잡아끄는 모습에서 기득권층이었던 양반의 추태를 담아내는 듯 하다. 그림의 배경은 초록빛과 붉은 꽃으로 덮여있는데, 왼쪽에 적힌 문구 역시 ‘초록과 같이 양반의 탐욕은 쌓이고 붉은 꽃으로 비유된 여성을 유린한다’로 해석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