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글쓰기목차문단쓰기………………………………나의 콤플렉스 극복기………………………………시평(대학생 시국선언)………………………………미디어 비평 1(송포유)………………………………미디어 비평 2(케빈에 대하여)………………………………창조적 글쓰기(별헤는 밤)………………………………1. 문단쓰기 실습이러한 기석의 생각에는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게임이 기석의 꿈을 이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공부이다. 공부를 잘 해서 높은 학업 성적을 거두면 좋은 직장을 얻고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공부가 성공의 유일한 수단은 아니며 사회적 성공만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기석이 정말 게임에 소질이 있고 그것을 좋아한다면 프로게이머 쪽으로 진출하는 것이 기석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이며, 이 때 기석은 굳이 학업에 열중할 필요가 없다. 프로게이머에게 중요한 것은 게임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지 학업 성적이 아니다. 아이유에게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높은 학업 수준이 아니라 훌륭한 가창 실력인 것처럼. 물론 어머니가 기석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기석의 게임 랭킹과 같은 객관적인 능력을 살펴보아야 한다.혹자는 기석 또래에 배우는 공부는 성공의 수단이 아니라 기초 교양을 쌓아올리기 위한 것이라고 반박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럴 경우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사람이 굳이 집에서까지 공부에 열중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공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교양을 쌓기 위한 공부는 학교에서 수업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족하다. 그 이후의 시간은 기석이 정녕 게임에 소질이 있다면 미래의 직업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이 낫다. 미술을 지망하는 사람이 방과 후에 미술 학원에 다니는 등은 받아들여지면서, 프로게이머를 지망하는 사람이 게임 내의 전략과 캐릭터를 연구하는 것이 용납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방과 후에 기석이 학업이 아닌 게임에 열중한다는 어머니의 생각은 다소 편향적이다.모두들 공부, 공부만을 부르짖는 시대이다. 하지만 다였다. 쓸데없이 솔직하신 울 엄마아빠도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젤로 예쁘게 생겼다는 말은 삼가셨다. 가끔 하시는 말에는 꼭 주관적이라는 단서가 뒤따랐다. 그래도 집안에서는 무남독녀 외동딸인지라 나름 귀애받으며 살아왔긴 했다. 그러니 여기까지만으로는 외모를 콤플렉스라고 지칭하기에는 다소 모자란 수준이다. 내가 못생겨도 예뻐해주는 우리 엄마아빠가 있는데. 내가 외모를 콤플렉스라고 칭하기까지는 제법 많은 과정이 있었다.시작은 내가 여섯 살 때였다. 우리 집은 내가 유치원생 때 시골 마을로 이사를 왔는데, 하도 좁은 마을이라 원래 살던 아이들끼리는 서로 알고 친하게 지냈다. 새로운 얼굴이 들어왔는데 애가 또래를 만나 본 적이 드물어서 붙임성도 없었다. 아무에게도 말도 안 붙이고 멀뚱히 있으려니 표적이 되기는 쉬웠다. 왕따의. '쟤 처음 보는 얼굴인데'라는 생각이 '우리랑 다르니 괴롭히자'로 금세 바뀌었다. 유치원생 애들이라 육체적 폭력도 폭력이었지만 당연히 말로 놀리는 것도 따라붙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놀리기 가장 쉬운 것은 아무래도 외모였다. '못난이.' 실제로 내가 못생겼나 아니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네들에게 있어 못난이는 욕이었고, 날 못난이라고 하면 내가 충분히 상처받았기에 족했다.뭐, 그 후로는 뻔하다. 만득이 인형같이 생긴 게, 너 못생겼어, 너 하나도 안 예뻐, 등등의 이야기는 그 이후 매번 아이들하고 충돌이 있을 때마다 이어졌다. 중학생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외모를 가지고 하는 욕은 멈췄지만 그 동안은 내가 외모를 콤플렉스로 여기게 되기까지 충분했다. 조금 크고 나서부터는 예쁜 아이들과 공공연히 차별을 받기도 했다. 어디 대회에 나가더라도 남자애들이 예쁜 여자애한테 먼저 관심을 준다든지, 예쁜 애 주변으로 여자애들이 몰려서 먼저 말을 건다든지 하는. 소극적이고 붙임성 없는 나는 그냥 묵묵히 핸드폰을 켜고 카톡만 신나게 했다. 언제부터인가 화장실에 갔다가, 남자애들끼리 여자애들 외모 평가를 하는 걸 우연히 들은 이후로는 죽고 싶은 생각마저 들는, "야, 너라도 네가 예쁘다고 생각해줘야지. 네가 널 미워하는데 누가 널 예뻐해 주겠어." 라고 말씀하신다. 옳은 말이지만 그게 된다면 이게 콤플렉스가 될 리가 없지요.못생긴 내가 항상 끔찍하게 싫은 건 아니다. 예쁘진 않더라도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가끔 나쁜 일이 생기면 일단 외모 탓으로 돌리고 보는, 이 콤플렉스가 문제라고는 생각하지만, 굳이 이것을 극복하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지는 않다. 못생긴 것도 내가 자라오며 생성한 자아의 일부이고 그것을 죽이는 것은 일종의 자살이다. 나는 자살에 취미가 없다. 탓에 이 어찌 보면 수동적이고, 어찌 보면 능동적인 수용이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랄까. 이걸 극복이라고 한다면, 여기까지가 길고도 짧았던 내 부끄러운 고백의 끝이다.3. ‘진리의 상아탑, 한 차례 빛나랴.’시평최근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인터넷 댓글 활동을 통한 대선 개입을 인정했다. 야당 후보인 문재인을 비하하고, 여당 후보인 박근혜를 지지하는 댓글을 단 것이다. 확인된 것만 해도 벌써 120만개, 용의 선상에 올라있는 것은 천만 개가 넘는다. 이 인터넷 댓글들이 선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는 미지수지만, 대통령 직속 국가 정보기관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며 선거에 개입했다는 사실 자체는 심각한 문제이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국가 기관이 그 의무를 위반하여 민주주의를 훼손했기 때문이다. 더욱 박근혜의 아버지가 그 박정희라는 점에서 독재의 재현인가? 하는 말도 나오고 있는 시점이다. 비록 국정원이 선거 개입을 인정하기 전이지만 의혹이 제기되자마자 적지 않은 수의 총학생회들(이하 총학), 심지어는 서울대처럼 ‘비운동권’으로 구분되는 총학들까지 시국 선언을 통하여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합의 과정의 부족, 정치적 도구로서의 악용 우려 등을 이유로 들어, 대학생 시국 선언 자체를 부정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심지어는 시국선언 반대 연합이라는 단체까지 발족했다. 비단 사건 자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만 이 사회가 긍정하고 있는 정치 체제는 민주주의라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과정상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 사회의 올바른 민주 시민이라면 그 정치적 입장이나 선거로 얻은 이득이 어떻든간에 의문을 제기해야할 부분이다.그 옛날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고 했던가.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종종 인용되고 하는 이 문구는 사실 흔한 용례와는 반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말의 근원지인 옛 로마에서는 은이 금보다 귀한 금속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오늘날의 가치에 맞게 바꾸면 침묵은 은이고 웅변은 금이 된다. ‘국정원이 선거 개입을 했다.’는 문장 자체는 심지어 당사자들마저 인정한 명확한 사실이다. 이미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근간부터 크게 흔들린 것과 진배없다. 이에 진리의 상아탑 아래 수학하는 대학생들이 침묵을 포기하고 금과 같은 웅변을 시작했다. 시대의 한계로 4.19 혁명과 6월 민주항쟁처럼 커다란 시위 깃발을 이끌어내지는 못 했지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주적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위협이 되었으며 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리라. 허나 언론 통제 탓일는지는 몰라도 많은 시국선언들과 시위들은 방송과 신문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3.15 부정 선거, 5.16 쿠데타 등 과거의 악몽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건 과도한 우려일까.아직 검찰의 수사가 다 끝나지 않았고 밝혀가야 할 사실이 많아 현재 국정원 사태에 대해 함부로 펜을 놀리기는 아직 두렵다. 다만 아무리 서로의 입장이 다양하며 의견의 불일치가 있을 수는 하나, 올바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제기한 일련의 시국선언 자체를 비판하는 무리들이 있다는 사실에 통탄을 금할 수 없을 뿐이다.4. ‘힐링? 킬링!’미디어 비평 1(송포유)?"저는 옛날에 많이 엇나간 학생이었어요.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래가 저에게 찾아왔어요. 그때부터 저는 변하기 시작해 지금의 제가 되었습니다. 과거 행했던 일을,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번듯한 사람이 고으니 당연히 프로그램이 문제를 내포할 수밖에 없지요, 라는 일종의 증거물이랄까.시청자들이 용납할 수 없던 건 그들이 보편적 가치를 저버렸으며 법을 어긴 전과자이고 학교폭력 가해자들임에도, 충분한 반성 없이 방송에 떳떳한 모습으로 출연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낙인을 찍고 그들이 노력하는 모습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편협한 시각이라는 비판도 가능하나 방송에서 그들은 어딜 봐도 절대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말로는 잘못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방송 내부나 외부에서 보여준 태도는 피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누가 피해자를 땅에 묻었다는 사실을 그리 당당하게 지껄이겠는가.게다가 송포유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피해자를 완전히 도외시했다. 가해자들도 상처받은 사람들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불우한 과거를 가졌든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잘못을 했으면 질책 받고 그에 맞게 반성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방송에서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은 내비쳐지지 않았고 PD는 이미 죗값을 치룬 아이들이라며 그들의 죄를 대신 용서했다. 피해자들은 그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즉, 송포유는 가해자들만을 위한 노래였다. 송포유 방송을 용납한다는 건 그들에게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제대로 된 정신적, 물질적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은 현 상황에서 가해자들이 잘 될 수도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그럼 대중은 왜 송포유를 용납하지 못 했는가. 보통의 사람들은 약자에게 더 잘 동조된다. 그들 역시 강자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상사에게, 교수에게, 선배에게, 더 나아가서는 이 사회 전체에. 반항하지 못 하고 그 시류에 편승할 수밖에 없는 약자들이 우리 사회의 다수를 구성한다. 대중들은 송포유를 둘러싼 선악구도에서 숨겨진 약자를 발견했고 이에 더 몰입했다. 뿐만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 우리가 옳다고 배웠던 가치들, 이를테면 권선징악들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사람들은 방송, 다분히 작위적인 예능 등지에서라.